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22:38:21

이정영(1616)

1. 개요2. 생애3. 여담4. 가족 관계5. 묘역

[clearfix]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예술가. 이름은 이정영(李正英), 는 자수(子修), 는 서곡(西谷),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본관은 전주(全州)로, 정종의 10남 덕천군의 7대손이자 호조판서를 역임한 이경직의 아들이다

2. 생애

1616년(광해군 8년)에 태어났다. 21세이던 1636년(인조 14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그러나 얼마 못가 병자호란이 발발하고 조선이 패하면서 소현세자청나라로 끌려가자 사서 자격으로 같이 갔다. 언제 돌아왔는지는 모르나 1642년(인조 20년) 윤 11월에 정언으로 임명받았다는 《인조실록》 기사를 보아 그 이전에 귀국한 듯 하다. 이후 사서, 부수찬, 수찬, 부교리, 교리 등의 관직을 지냈고 강원도 삼척암행어사로 파견나가 삼척부사 장자호를 징죄하기도 했다.#

효종이 즉위한 후에는 헌납 등으로 제수받았다가 교리로 있던 1651년(효종 2년)에 경연에 술마시고 취한 상태로 들어와서 파직당했다.# 이후 다시 부수찬을 거쳐 이조좌랑과 정랑 직을 역임했다.## 효종 말년에는 지금의 대통령비서실장 격인 도승지# 병조참의를 지냈다.#

현종이 왕이 된 뒤에는 우승지를 거쳐 형조참판과 대사간 직을 맡았고 대사간으로 재직하던 중에는 남부 지방에 다녀와 지방 사람들의 민원을 현종에게 전하기도 했다. 호조참판을 지낼 때 진위 겸 진향 정사로서 홍주원[1]과 함께 청나라 연경에 다녀오기도 했고#, 평안감사로서 평안도에 파견나가기도 했다.# 한성으로 돌아온 후에는 도승지와 이조, 예조, 호조의 참판, 한성판윤과 우윤을 지냈다. 개성 유수로서 개성의 백성들을 다스리기도 했고# 임기를 마친 후에는 형조판서와 공조판서로 임명받았다.

현종국상 때 명정서사관으로 봉무했고, 1675년(숙종 1년)에는 이조판서 직을 제수받았다. 그러나 얼마 못가 파직당했다. 이후 다시 형조판서와 한성부판윤으로 임명받았고,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형조판서로 재직하던 중이던 1677년(숙종 3년)에는 시험 출제 관련하여 문제를 일으켜 철원으로 유배갔다.# 풀려난 후에는 판돈녕부사가 되었고# 판의금부사와 공조판서 직을 다시 제수받았으며 예조판서도 지냈다.

1685년(숙종 11년)에는 기로소에 들어갔고 이듬해인 1686년(숙종 12년) 4월 3일에 사망했다. 향년 71세였다.[2]

3. 여담

4. 가족 관계

5. 묘역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93호 94호 95호
원지동 석불입상 및 석탑 효간공 이정영 묘역 충익공 신경진 묘역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4호
효간공 이정영 묘역
孝簡公 李正英 墓域
소재지 <colbgcolor=#fff,#191919>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 산 32-79, 산44-7
시대 조선 시대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기타
수량 / 면적 분묘 1基, 석물 9基, 토지 308.6㎡
지정연도 1994년 5월 10일
파일:이정영의묘.jpg
<colbgcolor=#C00D45> 이정영 묘[8]
[clearfix]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에 이정영의 묘가 있다. 봉분은 하나이며, 묘 앞에는 묘비와 상석이 있고 양 옆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각각 1쌍 씩 서 있다.

[1] 선조의 적녀 정명공주의 남편. 작위는 영안위(永安尉)이다.[2] 당시 나이 셈법인 세는나이를 적용한 기준이다. 만으로는 70세이다.[3] 정명공주의 차남[4] 숙안공주의 아들[5] 윤지완의 아우, 민진원의 처숙부[6] 정명공주의 외손자[7] 숙명공주의 아들[8]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