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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20:53:41

일본령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 싱가포르 - 브루나이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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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1942년 2월 15일 ~ 1945년 9월 12일
성립 이전 반환 이후
해협식민지
싱가포르
말라야 영국군정부
국가 기미가요
언어 일본어 ,(사실상 공용어),
중국어
영어
말레이어
타밀어
문자 가나 문자, 한자
종교 국가신토, 도교, 이슬람, 불교, 기독교
정치 체제 군사독재
국가원수 천황
연호 쇼와 (1942-1945)
통화 일본군 발행 달러
현재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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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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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싱가포르일본 제국이 통치한 시기이다.

이때 싱가포르는 일본에 의해 쇼난도(昭南島(소남도))로 강제 개명당했다.[1]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은 싱가포르일점시기(新加坡日佔時期/신자포르짠스치(Sinjiapo Ri Zhan Shi qi))라 부른다.

여기서 일치(日治)가 아닌 일점(日佔)임을 주목해야 하는데 일본 식민통치기에 비교적 관대한 처분을 받아 반감이 적은 대만과 달리 동남아시아의 일본 점령지 화예들인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은 취급이 더 잔혹했기에 반감이 강해서 그렇다.[2] 더구나 싱가포르는 대만과 달리 일본에 비해 1인당 GDP도 훨씬 앞서고 동남아시아 아세안 회원국 중에서도 외교 파워가 강하기에 이렇게 날세우기가 가능하기도 하다.

싱가포르 역사에서 말레이시아 연방 시절에 겪은 인도네시아의 침공인 콘프론타시(Konfrontasi) 전쟁과 더불어 단 둘뿐인 전쟁 경험이며 이때 굉장히 괴롭힘을 당해 두고두고 이를 가는 흑역사로 남았다. 리콴유가 생전 일본을 굉장히 경계한 원인이기도 하며 현재에도 싱가포르 역사 교과서에서 굉장히 자세하게 서술해 젊은 층도 이를 알고 있다.[3]

2. 역사

1941년 12월 7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영국홍콩을 통해 중화민국을 돕는다고 여겨 영국령 홍콩을 점령하였다. 영국은 허약한 식민지 주둔군 탓에 손쉽게 식민지를 뺏겨버렸다.

여기에 기세를 몰아 일본은 전선을 동남아시아 전 지역으로 확대해 필리핀미국으로부터 빼앗고 또 다른 영국령인 말레이 연방까지 쳐들어가 말레이 반도 본토를 순식간에 차지하였으며 1942년 2월에는 마침내 영국령 말레이 연방의 최대도시였던 싱가포르까지 침략하여 싱가포르 전투를 치렀지만 영국군은 허약한 식민지 주둔군 특성 상 손쉽게 패배했고 싱가포르 주둔군이던 영국 해군은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호주로 패퇴해야 했다.[4]

싱가포르는 이후 일본 제국의 통치 하에 들어간다. 이름부터 쇼와의 남쪽 섬이라는 의미의 쇼난(昭南(소남))으로 바뀐다.

이곳을 일본군이 점령한 이후 일본군은 많은 물자를 얻게 되어 사기가 올라가고 물자 전달 방식을 현지 조달, 손쉽게 말해 약탈하는 방식으로 바꾸게 된다.

이때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은 적국인 중화민국과 동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아 많은 탄압을 받았다. 이는 말레이 반도 본토인 말라야도 해당된다. 말레이인이나 인도계 싱가포르인에 대한 탄압은 거의 없었다고 잘못 알려진 경우도 있는데 자유 인도 임시정부 관련해서 잘못 퍼진 루머로 일본군에게 항복을 거부한 인도계 싱가포르인 영국군 장병과 군무원, 영국령 말레이 연방 경찰공무원 및 총독부 소속 공무원들 상당수가 수감되거나 살해당했다.[5]

현재 싱가포르 차이나타운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벌인 숙칭 대학살[6]은 일본 군부가 18~50세의 중국계 싱가포르인 게릴라 또는 공산주의자를 제거하려는 목적으로 자행한 학살이다. 이로 인해 일본 추산 5000명, 학계 추산 약 5만명, 중국계 싱가포르인 커뮤니티 추산 10만명 정도의 화교가 학살당하였다. 사실 학계 추산 수치만 해도 엄청난 숫자다.

이 학살의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1. 일본군 및 일본계 주민을 상대로 게릴라 활동을 한 자.

2. 중화민국에 재정지원을 한 자.

3. 동남아시아를 거점으로 항일활동을 하거나 반일행동을 한 자.

4. 레지스탕스 관계자 및 지지자

5. 영국 식민지 시대의 공무원, 법관, 입법회 의원, 경찰관 및 식민지 주둔 영국군 군속.

6. 흑사회 등 비밀조직과 반사회적 조직에 관여된 자.

7. 중일전쟁 이후 이민한 자.

8. 하이난성 (海南省) 출신자.[7]

9. 일본군의 검문 시 저항하는 자 및 도망하는 자. 출처

이러한 중국계 학살 역사는 싱가포르 교육에서 전 인종을 통틀어 제대로 배우며 특히 중국계는 밥상머리 교육 등으로 젊은 세대도 일본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있다.

중국계 중에서도 특히 기독교인들이 집중 탄압대상이 되었는데 탄종파가에 들어선 19세기에 건립된 초창기 교회들이나 성공회의 세인트 앤드류스 대성당 등은 일본군 장교 사교클럽으로 개조되거나 감옥으로 바뀌었으며 성경, 성물 등을 불태우는 신성모독을 벌였다. 중국계 불자들도 탄압당한 건 마찬가지라 일본 불교를 따르도록 강요당했다. 그리고 싱가포르 곳곳에 신사를 세워 참배를 강요했다. 이 신사들은 영국이 싱가포르를 탈환하면서 모두 없애버렸다.

중국계는 물론 영국인, 아르메니아인백인들도 괴롭힘을 당한 건 물론이고 야만인이라 멸시하던 일본군으로부터 터무니없는 망신소리까지 들어야 했으며 여자들은 위안부로 끌려갔다. 백인들 중 일부는 망신소리와 조리돌림 끝에 자결하기도 하고 일부는 호주로 피신해 복수를 꿈꾸기도 했으며 싱가포르를 영국이 탈환한 후에나 되돌아올 수 있었다.

한편 학살 대상은 중국계만 그치지 않았다. 말레이인들도 중국계 부계 혈통을 지닌 프라나칸들이 학살당했으며 모스크가 모독당하거나 돼지고기를 먹을 것을 강요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식민지 주둔군과 공무원을 맡던 영국인들은 초창기에 중국계와 함께 가차없이 학살당했다.

일본은 이곳에서 재배되는 농산물을 약탈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에 의해 속칭 바나나 달러라 불리는 일본 발행 달러가 발행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암시장에서는 해협 달러가 더 많이 쓰였으며 화폐의 발행과 현지 공장의 가동 중단, 영국령일 때 인도 제국호주에서 수입하던 식량이나 자원을 수입하지 못해서 생필품 가격이 오르는 턱에 겁없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일본군 전쟁범죄의 알파요 오메가에 속하는 최악의 개막장(...)인 일본군 위안부도 있었다. 주로 한반도, 만주 등에서 끌고 온 타국인 여성들이나 말라야 본토 화인 여성들이 싱가포르 내에 산재하던 위안소에서 있었다. THE COMFORT WOMEN OF SINGAPORE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A DARK HERITAGE TRAIL. 이상하게 한국에는 잘 안 알려진 사실인데 싱가포르 내에서는 지금도 많이 회자된다.[8]

연합국은 이곳을 탈환하기 위해 영국 공군미국 육군 항공대가 맹공격으로 해안가의 일본 해군기지에 대규모 폭격을 퍼붓는 등 많은 노력을 했다.[9] 그러나 아직까지 해병대를 상륙시키는 등의 본격적 탈환 시도는 없었고 일본 해군도 해안선 방비를 철저히 하여 싱가포르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제의 통치를 받았다. 물론 저항은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이 태평양 전선 곳곳에서 전열을 재정비한 미합중국 해병대에 밀리며 하나둘씩 점령지를 뺏기기 시작하고 미드웨이 해전으로 연합함대가 전멸해버려 전쟁이 점점 끝을 향해 달려가자 영국군은 말레이반도 본토와 홍콩에 상륙해 두 지역은 일찍이 해방시켜 버린다. 같은 시기 미군도 필리핀을 탈환해 해방시켰다.

이후 끝까지 일본군이 버티는 싱가포르의 경우 최종적으로 싱가포르를 탈환할 지퍼 작전과 조석 작전을 영국 해군이 입안한다. 그러나 그 전에 미국이 원자탄 2방을 일본 본토에 선물하고 소련이 만주 작전으로 일본군을 한반도 북부, 만주, 내몽골, 사할린, 쿠릴 열도 등에서 모두 쫓아내면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며 이 작전은 무기한 연기되어 실행되지 못했다.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여 항복한 뒤에도 한 달 동안이나 싱가포르에선 일본군이 버티는 바람에 싱가포르만 계속 일본의 지배 아래에 있다가 영국 해군이 전함 두 척을 보내고 전쟁이 끝났으니 항복하라고 일본군을 설득하여 현지 사령관이 받아들임으로써[10] 영국은 싱가포르를 되찾게 된다.

리콴유는 유소년 시절 이 일을 모두 겪었는지라 일본에 대해 생전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싱가포르 독립 후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점령한 날을 민방위의 날로 지정하는가 하면 싱가포르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 of Singapore)에 일본군이 점령했을 당시 벌인 학살극을 자세히 언급하고 관련 유물도 모두 전시해 박제해놨으며 싱가포르 역사 교과서는 일본군이 싱가포르에서 잔혹 행위를 벌였다며 날을 세운다. 싱가포르가 1인당 GDP에서 일본을 압도하는 선진국인 만큼 여유가 있어 일본에 날을 더 세울 수 있는 면이 있다.[11]

중국계 싱가포르인 사회에선 반일 감정이 상당하여 서구권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식집에 걸린 욱일기가 없으며 욱일기나 일본군 미화 등은 금기시된다. 현재까지 생존한 그 시절 학살에서 살아남은 중국계 노인들도 꽤 많으며 이들은 아직까지 앙금이 남아서 일본 요리도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일본 문화가 보편화되고 일본으로 여행도 많이 가지만 뒷감정이 안 좋은 케이스이며 결국 2010년대 한류의 범세계적 유행 직후 일본 문화가 한류에 많이 밀리고 있다.

1991년 가이후 도시키 당시 일본 총리는 동남아시아 순방의 일환으로 싱가포르를 국빈방문했는데 이때 고촉통 당시 총리에게서 환대를 받았으나 한편으론 외무장관이던 라자나트남[12]으로부터 '일본은 반성이라는 걸 모르는가'라며 호된 질책을 들어야 했으며 일부 중국계 전쟁 생존자들은 가이후 총리의 방문을 반대하기도 했다.

한편 이때 일부 말레이인, 인도계 싱가포르인들이 일본에 붙어먹어 중국계 학살에 동참한 역사 때문에 싱가포르의 독립 후 현재와 같은 철저한 인종/문화 융화책이 마련되어 인종갈등을 없애는 계기 중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1] 쇼와 시대에 차지한 남쪽 섬이라는 뜻이다.[2] 그래도 2등 시민이나마 준 내지인 취급은 해준 대만일치시기와 달리 동남아시아의 말라야/싱가포르는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중국계 싱가포르인 그룹을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고 학살하기에 바빴다. 이 두 나라 화예들은 친일 부역자조차 나오지 않았을 정도로 철저하게 씨를 말리고자 했는데 반감이 없으면 그게 이상한거다.[3] 중국계 싱가포르인 10대 및 20대 사이에서도 '우리 할아버지/증조할아버지가 이때 돌아가셨다'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일본군의 학살 때문에 한 집 걸러 지금도 제사를 지낼 정도다.[4] 사실 말레이 연방 본토인 말라야 주둔군과 동양함대의 궤멸로 곁다리 전력이던 싱가포르 주둔 영국군이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싱가포르는 현재의 중요성과 달리 그때만 해도 변방으로서 이렇다 할 가상적국도 없는 후방 오브 후방 식민지에 불과하였다. 비슷해보이는 홍콩 식민지가 맞닿은 중국 대륙의 중요성 때문에 대규모 전력이 주둔했던 것이나 말라야 본토가 접경한 태국을 의식해 꽤 많은 전력을 주둔시킨 것과 달리 싱가포르 주둔 영국 해군은 제대로 된 함정 없이 포트캐닝과 센토사섬의 해안포가 주력이었고 영국 육군은 전차조차 없었다.[5] 물론 말레이인이나 인도계 싱가포르인들 중 일부는 일본군과 함께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에 대해 쌓인 감정 때문에 학살에 동참한 경우도 있었다. 당연히 중국계도 이에 응수해 서로 학살극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는 나중에 싱가포르 해방 후 리콴유가 민족 갈등을 없애고자 인종/사회 통합책을 쓰는 이유가 된다.[6] 현재 싱가포르 MRT 동북선 차이나타운역 앞에 숙칭 대학살이 벌어진 장소가 유적지로 지정되어 안내문이 붙어 있으며 젊은 중국계 싱가포르인들도 어렸을 때부터 이를 배우고 일본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었다.[7] 왜 하필 하이난성이면 일본군은 이들 대다수를 공산주의 활동가로 보았기 때문이다.[8] 현재의 싱가포르 창이 공항이 소재한 창이 해변과 포트캐닝, 센토사섬 등 일본군 기지들이 들어선 곳들에 위안소가 있었다. 이들 위안소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 직후 버티던 일본군이 연합군이 쳐들어오기 전 증거인멸을 위해 관련 문서를 모두 소각하고 위안부를 학살하여 없애버렸다. 창이비치나 풍골비치의 귀신 목격담 중에 중국계 남성이나 영국 군인 귀신과 함께 타국인 여성 귀신 목격담도 나온다.[9] 홍콩이나 필리핀보다는 적지만 가끔 이 때 일본 점령 말라야 일대에 떨군 미군 불발탄이 싱가포르에서도 나와서 소동이 벌어지고는 한다.[10] 다만 이건 그나마 온건히 나온 케이스여서 일본군 300여 명이 할복 자살하는 일도 있었다.[11] 일본 ODA가 아쉬운 개발도상국이 대부분인 타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경우 이렇게 날을 세우지 못했고 결국 집단적 자위권 등 대게 일본의 입장을 동조하게 되었다. 일본이 바탄 죽음의 행진 등을 저지른 필리핀만 해도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지지하는 나라가 되었다.[12] 인도계 싱가포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