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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영어 Sayyid Jamāl al-Dīn al-Afghānī 파슈토어 سید جمالالدین افغاني |
출생 | 미상 |
사망 | 189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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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이드 자말룻딘 알 아프가니는 이란 혹은 아프가니스탄 출신 무슬림 개혁가이다. 자신을 아프가니스탄 출신 순니 무슬림이라고 주장했으나 당시 순니파가 다수이던 상황에서 이란 시아파라는 점이 알려지면 자신의 개혁 운동의 차질이 많을 거라는 이유로 아프가니스탄 출신이라 주장했다는 설도 있고, 순니파와 시아파와의 화해를 추구한 것 때문에 이란 출신이라 의심받았으며 사실 아프가니스탄 출신이 맞다는 설이 대립하고 있다.이집트의 이슬람 신학자 무함마드 압두와 함께 이슬람 모더니즘[1]및 범이슬람주의[2]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2. 상세
부유층 출신으로 태어난 자말룻딘 알 아프가니는 유럽 여러지역을 여행하고 견문하면서 19세기 당시 이슬람 사회의 후진성을 목격한 이후 이슬람 개혁운동에 뛰어들었다. 폴리글롯[3]에다가 달변이었던 그는 가는 지역마다 유창한 웅변 실력으로 민중들을 감탄시켰는데, 당시 무슬림 지도자들은 자말룻딘의 대중 선동 능력을 경계하여 필요할 때만 이용하는 대상으로 여겼다.자말룻딘 알 아프가니는 이슬람권 전역에서 수니파와 시아파와의 화해를 추구했으며, 인도에서는 힌두교도와 무슬림들이 화합하여 영국에 맞서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또한 수피 교단의 이슬람 신학이 지나치게 숙명론적으로 변했으며, 현세에서 무슬림들이 서구의 침입으로 도탄에 빠진 상태에서도 별 다른 대책 없이 내세에서의 구원만 치중한다는 비판을 하였다. 당시 수피 낙슈반디야 교단이 샤리아 율법 날조 및 강제와 이성적인 판단 금지, 교단주 절대화를 주장 등 부패 문제가 심각하던 상황에서 그의 수피즘 비판은 대중과 지식인 모두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4]
이집트 알 아즈하르 대학의 셰이크 무함마드 압두와 친분이 있었다. 자말룻딘의 제자이자 동료를 자처했던 압두는 자말룻딘의 개혁 사상을 좀 더 과감하게 해석하여 무타질라 학파의 부흥까지 추구하면서 이슬람 모더니즘 학파의 기원이 되었다.
3. 영향
- 자말룻딘은 기성 수피 교단을 비판하고 마드하드 개혁을 추구하면서 살라프파의 사상적 기원을 제공한 인물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살라프파는 자말룻딘과 다르게 힌두교와의 융화도 거부하고 시아파도 싫어한다.
- 남아시아의 이슬람 개혁 사상가 사이드 아흐마드 칸이 서구식 유물론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신랄하게 비판한 적이 있었다. 즉 정렬적인 개혁가이긴 했으나 당시 이슬람권 시대상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던 인물인 셈이다.
- 힌두교와 이슬람이 갈등을 멈추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일부 힌두교도 지식인들도 동조하여, 초기 베다 해석을 바탕으로 힌두교식 유일신론을 주장한 아리야 사마지 운동 등이 출현하기도 했다.
4. 여담
자말룻딘의 출신지가 이란인지 아프가니스탄인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자말룻딘 본인도 자신의 출신지를 모호하게 숨기는 편이었는데, 비슷한 경우로 중세 아랍인들과 생활하면서 자신이 아랍인이 아닌 것을 부끄러워해 출신을 얼버무렸던 알 파라비가 있다.- 일단 이란 출신이 아니라고 반박하는 측에서는 자말룻딘 알 아프가니가 모든 무슬림들은 오스만 제국 술탄(칼리파)에게 충성을 바치며 단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칼리파 제도는 공식적으로 예언자 무함마드의 대리인 계승자 제도에 해당하는데, 순니파 세계에서는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가 이슬람 제국의 통치를 대신 이어받은 것을 시작으로 우마이야 칼리프조 - 압바스 칼리프조 - 맘루크 왕조 - 오스만 제국으로 칼리파 계보가 이어진다. 반면의 시아파의 경우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를 찬탈자로 보며 무함마드의 계승자는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와 후세인의 후손들이 진정한 무함마드의 후계자이며 최후의 이맘은 숨어있다가 심판의 날 직전에 다시 등장한다고 주장한다. 자말룻딘이 이란 출신 시아파였다면 오스만 제국 술탄에게 충성하자고 하는 대신에 다른 시아파 운동가들과 마찬가지로 구세주가 나타난다고 선동했어야 마땅하다
- 자말룻딘이 이란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든다. 순니파 중에서는 시아파랑 친하게 지내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드물지만, 시아파 중에서는 순니파나 시아파나 다 똑같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왜냐하면 시아파는 소수라서 다수 순니파랑 사이가 나쁠수록 여러모로 힘들어지지만 순니파 입장에서는 시아파랑 사이가 나빠도 시아파가 워낙 소수라서 그닥 손해볼 것이 없기 때문이다.
[1] 서구 학문을 수용해 이슬람권을 더 강하게 하자는 일종의 자강운동[2] 순니/쉬아 등 종파 차이 막론하고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자[3] 모국어로 추정되는 페르시아어와 파슈토어는 물론이고 프랑스어, 아랍어, 우르두어/힌디어 모두 유창했다.[4] 무굴 제국 황제 악바르 대제(재위 1556-1605)가 모든 종교에 대한 포괄적인 관용을 천명했을 당시 낙슈반디야 교단의 아흐마드 시르힌디(1564-1624)는 여기에 반대하면서 힌두교도 및 소수 종파에 대한 관용이 철폐되어야 하며, 음악(사마samā‘), 춤(라크스raqs), 노래(나그마흐naghmah)가 금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