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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10:44:52

제리 브룩하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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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Hollywood Walk of Fame St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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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4a1a1><colcolor=#FFD700> 이름 제리 브룩하이머
JERRY BRUCKHEIMER
분야 영화
입성날짜 2013년 6월 24일
위치 6834 Hollywood Blvd.
}}}}}}}}}}}} ||

<colbgcolor=#00001b><colcolor=#ffffff> 제리 브룩하이머
Jerry Bruckheimer
파일:vuLdDKqI.jpg
본명 제리 리언 브룩하이머
Jerry Leon Bruckheimer
출생 1943년 9월 21일 ([age(1943-09-21)]세)
미국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73cm, 75kg
학력 멈포드 고등학교
애리조나 대학교 (심리학)
직업 제작자
배우자 보니 브룩하이머 (1969~1974)
린다 브룩하이머 (1993~현재)
자녀 딸 알렉산드라 브룩하이머
지지정당

[1]

1. 개요2. 생애 및 경력
2.1. 필모그래피
2.1.1. 영화
3. 평가 및 비판4. 여담

[clearfix]

1. 개요

파일:Jerry-Bruckheimer-star-Hollywood-Walk-of-Fame-2013.jpg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서의 브룩하이머

미국의 영화 및 TV 제작자. 80년대~90년대~2000년대 중반까지는 그야말로 만들었다하면 최대 대박 최소 중박은 터지는 거물 영화 제작자였다.[2] 할리우드에서 수도 없는 히트작을 만들어내었고, 영화제작에 있어서 빅히트작이 좀 시들했던 시기엔 CSI 시리즈도 성공시킨 흥행의 마술사.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를 흥행시킨 2000년대 중반까지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박스오피스 수익을 올린 영화 제작자로 명성을 떨쳤으며 2004년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 한명에 포함되기도 했다.

브룩하이머가 어떻게 거물이 되었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은 한국과 달리 제작자의 역할이 감독을 넘어서거나 감독에 버금갈 만큼 엄청나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3] 일단 실제 물주들은 투자한 만큼 벌어야 된다는 생각도 매우 강하니 그걸 충족시키기 위해서 못 벌어갖고 영화판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이름만 제작자가 아니라 실제 만드는 과정에도 감독만큼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본인들도 영화판 혹은 TV 스튜디오에서라도 경험이 있다보니 최종편집권(영화의 완성도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권한 중 하나라 배우들이 요구하는 경우도 매우 많다.)을 요구하고 제리 브룩하이머의 경우도 굉장히 영화 및 드라마 전반에 관여한다.[4]

이와 비슷한 인물로 스콧 루딘이 있다.[5]

2. 생애 및 경력

독일계 유대인 이민자의 자녀로 1943년 디트로이트에서 출생하였다. 처음에는 영화보다는 사진에 흥미를 보였었다. 이후 애리조나 대학교에 진학해 심리학을 전공하였고 이후 처음 일한 곳은 광고회사. 나름 CF를 기막히게 만드는데 일가견이 있었다.[6] 심지어 광고 상도 타는등 인기를 끌었으나 그의 관심은 이미 영화로 옮겨져 있었다.

1972년 폴헬믹 제작자와 딕 리처드 감독과 함께 컬페퍼 캐틀 컴퍼니를 시작으로 영화 업계에 뛰어들어 조금씩 명성을 쌓아갔다. 이때만하더라도 아직 메인 제작자의 보조로서 역량을 닦는 수준이었는데, 워낙 감각이 있다보니 조금씩 소문이 퍼져나갔다. 1980년에 리처드 기어를 주연으로 아메리칸 지골로를 만든다. 이 영화는 그의 커리어상 최초로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였고, 이를 계기로 할리우드에 브룩하이머의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키며 본격적으로 유명 제작자로 인정받기 시작한다.

이후 그의 제작자 인생 최초의 빅히트 흥행작이라고 할만한 플래시댄스를 만든다. 이 영화는 그의 영원한 파트너가 될 뻔했던 돈 심슨과 최초로 공동 제작한 작품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약 9천만달러의 흥행을 기록했는데 1983년이라는 시기를 생각해보면 굉장한 성취였다.

돈 심슨이 사망하기 전까지 그와 계속해서 공동 제작을 해 나갔으며 이후의 작품들이 모두 큰 흥행을 거두었다. 에디 머피를 당대의 영화배우로 올려준 비버리 힐스 캅 시리즈나, 톰 크루즈의 풋풋한 모습을 볼 수 있는 탑건, 당대 국민 배우들 중 두 명인 덴젤 워싱턴·진 핵크먼과 협동한 크림슨 타이드, 윌 스미스를 일약 스타의 반열에 올려준 나쁜 녀석들 등등 거의 대부분의 작품이 흥행하였다.

돈 심슨과 브룩하이머의 합은 매우 좋았는데 스튜디오(영화 제작사)에서 바닥부터 시작해 일을 배워오며 커리어를 쌓아온 심슨은 인간관계를 맺고 사람을 쓰는데 능했고 돈을 끌어오기 위해 경영진들과 협상하는 재주가 매우 뛰어났다. 반면 브룩하이머는 영화 현장을 몸소 뛰며 감독, 배우와 얘기를 나누었으며, 감독의 아주 고유한 부분은 내버려 두면서도 전체적인 영화의 흐름을 자기 스타일 대로 이끌며 흥행작을 만들어냈다.[7] 바깥일과 안살림을 나눠서 잘하다보니 당연히 지속적인 흥행세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둘의 관계는 더 록을 마지막으로 끝나게된다.[8] '더 록'은 평가와 흥행에서 크게 성공하였다.

이후 홀로서기를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의 우려를 받았다. 돈 심슨의 특출난 대인 관계 및 협상 능력때문에 제리 브룩하이머는 그간 영화 제작 자체에만 힘을 쏟을 수 있었으나 이제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오히려 더욱 승승장구했다.1997년 흥행작 콘 에어를 시작으로 독립한 브룩하이머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한국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끈 아마겟돈, 리멤버 타이탄, 코요테 어글리, 식스티 세컨즈 등을 통하여 준대박이상의 흥행을 연속적으로 기록하며 2000년대 중반까지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2001년엔 예상과 다르게 진주만이 초대박을 치지 못하고 준대박을 기록했다. 같은 해에 브룩하이머가 제작한 또다른 영화인 블랙 호크 다운도 초대박 흥행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얻으며 작품성을 챙겼다.[9] 2002년에 야심차게 만든 배드컴퍼니도 재미를 못 보면서 흥행력이 조금 주춤하다는 평가를 받으려고 하던 즈음, 2003년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를 시작하며 다시 한번 저력을 과시했고 2004년 내셔널 트레져 시리즈도 성공해서 자신의 흥행력에 달린 물음표를 완전히 떼버렸다.

영화 제작 이외에도 1998년부터 티비 시리즈를 제작했다. 2000년엔 총괄 제작자로서 CSI 시리즈를 만드는데 이 시리즈가 배심원들에게 강한 영향을 끼쳐 미국 법조계에까지 영향이 미칠 정도로 인기를 끌자 스핀오프인 CSI 마이애미CSI 뉴욕등으로 확장시켜갔다. CSI시리즈는 무려 16년이나 지속되어 2016년 CSI 사이버를 끝으로 그 대장정을 마쳤다. 그 외에도 굉장히 많은 TV 시리즈들을 런칭하였는데 사실 콜드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재미 본 것이 없었다.

영화들과 CSI가 승승장구하던 2000년대 중반이 지나가고 후반부터 슬슬 그의 흥행력에 다시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2007년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를 마지막으로 2010년까지 별다른 흥행작이 없었고 그나마 성공한 작품은 시리즈의 힘에 기댄 2011년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뿐이었다.[10]

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근 20년간 할리우드를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지만 2010년대에 와선 TV에서도 영화에서도 힘을 못쓰고 있다. 2016년을 기준으로 70살이 넘은 나이를 생각해보면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2000년대 이후에는 디즈니와 협업해왔지만 2014년부터 다시 파라마운트 픽처스와 계약을 맺어 34년만에 나온 탑건의 후속작인 탑건: 매버릭이안 감독의 SF 스릴러 영화 제미니 맨 제작에 참여했다.

2020년 1월에는 17년 만에 돌아온 나쁜 녀석들 시리즈의 최신작 나쁜 녀석들: 포에버 를 제작했는데 시리즈 중 가장 좋은 평가를 받고 흥행에도 성공하면서 오랜만에 재기에 성공했다. 2021년엔 CSI 라스베가스 시즌 16(베가스) 제작에 참여했다. 2022년엔 제리 브룩하이머가 제작에 참여한 탑건: 매버릭이 흥행과 평을 모두 잡아 대성공을 거뒀다. 6월 톰 크루즈와 함께 한국을 방문해 팬들과의 만남을 가졌다. 그날 따라 무더운 날씨 속에서 몇 시간씩 야외 행사가 이어졌는데도 한국 나이 80에도 거뜬히 건강한 모습.

2.1. 필모그래피

2.1.1. 영화

연도 제목 역할 배급사
제작 협력 프로듀서
1980 아메리칸 지골로 O 파라마운트 픽처스
1983 플래시댄스 O
1984 비버리 힐스 캅 O
씨프 하트
1986 탑 건 O
1987 비버리 힐스 캅 2 O
1990 폭풍의 질주 O
1994 사랑의 금고털이 O 터치스톤 픽처스
(브에나 비스타 인터내셔널)
1995 나쁜 녀석들 O 콜럼비아 픽처스
크림슨 타이드 할리우드 픽처스
(브에나 비스타 인터내셔널)
위험한 아이들
1996 더 록 O
1997 콘 에어 O 터치스톤 픽처스
(브에나 비스타 인터내셔널)
1998 아마겟돈 O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2000 식스티 세컨즈 O
코요테 어글리
리멤버 타이탄 월트 디즈니 픽처스
2001 진주만 O 터치스톤 픽처스
(브에나 비스타 인터내셔널)
블랙 호크 다운 콜럼비아 픽처스
2002 배드 컴퍼니 O 터치스톤 픽처스
(브에나 비스타 인터내셔널)
2003 캥거루 잭 O 워너 브라더스
(캐슬 록 엔터테인먼트)
나쁜 녀석들 2 콜럼비아 픽처스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 펄의 저주 월트 디즈니 픽처스
베로니카 게린 터치스톤 픽처스
(브에나 비스타 인터내셔널)
2004 킹 아더 O
내셔널 트레져 월트 디즈니 픽처스
2006 글로리 로드 O 터치스톤 픽처스
(브에나 비스타 인터내셔널)
캐리비안의 해적: 망자의 함 월트 디즈니 픽처스
데자뷰 터치스톤 픽처스
2007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 O 월트 디즈니 픽처스
내셔널 트레져: 비밀의 책
2009 쇼퍼홀릭 O 터치스톤 픽처스
(브에나 비스타 인터내셔널)
G-포스: 기니피그 특공대 월트 디즈니 픽처스
2010 페르시아의 왕자: 시간의 모래 O
마법사의 제자
2011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 O
2013 론 레인저 O
2014 인보카머스 O 스크린 젬스
(소니 픽처스 모션 픽처 그룹)
2017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O 월트 디즈니 픽처스
2018 12 솔져스 O 워너 브라더스
2019 제미니 맨 O 파라마운트 픽처스
2020 나쁜 녀석들: 포에버 O 콜롬비아 픽처스
2022 탑 건: 매버릭 O 파라마운트 픽처스
시크릿 헤드쿼터 O
2024 비버리 힐스 캅: 액셀 F O
젊은 여인과 바다 O
나쁜 녀석들 4 O
미정 베이블레이드(가제) O

3. 평가 및 비판

최고의 프로듀서로 명성이 자자한 사람이지만, 온갖 감독의 권한을 침해하고 피곤하게 하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무작정 감독을 누르기보다는 감독의 스타일을 읽고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능력이 뛰어났고 거기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흥행성을 더하는 방식이었다.

이제는 블록버스터 영화라면 아주 지겨울 정도로 비슷하고 반복되는 느낌을 관객들에게 주는 것도 제리 브룩하이머가 그 시초다. 웅장한 음악과 있어 보이는 도입부 내레이션, 건물과 소품을 한데 모아 전부 다 때려 부숴 터뜨리고 날리는 정신없는 편집과 특수 효과, 모든 사람들이 정신없이 빠르게 움직이는 액션 스타일을 영화에 적절하게 접목시킨 게 바로 제리 브룩하이머. 이런 파괴적인 특수효과 중심의 액션신이 이미 할리우드에 존재하긴 했지만, 정말 돈이 아까울 정도로 몽땅 가져다 때려 부수는 스타일은 브룩하이머와 돈 심슨이 할리우드 영화계에 불어넣은 일종의 혁신이었다. 이는 그의 후계자 마이클 베이트랜스포머 시리즈에서 극대화된다. 그런데 여기서 참 아이러니한 것이, 그렇게 욕을 먹는 베이 영화 중 극의 구성이나 각본 면에서 그나마 괜찮은 평가를 받는 더 록이나 나쁜 녀석들의 경우 베이가 초짜 감독인 시절이라서 브룩하이머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영화를 너무 단순한 오락거리로 전락시켰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감독이나 작가가 자신의 철학이나 생각을 영화로 표현하고 그것을 관객에게 전파하는 게 영화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선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비판이다. 하지만 영화라는게 사실 처음부터 그렇게 탄생된 게 아니라 하나의 오락으로 발전했음을 고려해본다는 브룩하이머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조금 과한 측면이 있다.

또한 스티븐 스필버그리들리 스콧 같은 거장들의 활동으로 인해서 조금 퇴색되던 프로듀서라는 의미를 다시 한번 부활시킨 장본인이었다. 아주 예전 스튜디오에서 강제적으로 스탭진을 선정하고 그에 맞는 영화를 만들어오라는 식의 경영진에 의한 영화 시대가 있었다면 이후 조지 루카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스필버그 등의 감독 위주의 시대가 도래할 때쯤 제작자가 영화의 성공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며 지금의 현 헐리우드 시스템을 완성시키는데 이바지하였다.

4. 여담



[1] 2016년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젭 부시를 지지한바 있다.[2] 제작자라는 개념이 미국과 우리는 좀 많이 다른데 우리나라는 대체적으로 영화 자본을 대는 회사의 대표들이 제작자라는 명함을 맡는다. 영화의 전반에 관여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거의 전권을 감독에게 쥐어주는 경우가 많다. 한때 미국처럼 제작자들이 설치던 시기도 있었으나 제작자 대부분들이 영화적인 개념조차 없는 시기에 일어났던 일이라 지금은 감독에게 맡겨주는 경우가 많다. 다만 역시나 돈과 관련된 내용이라 여전히 제작자들이 결정적인 순간에는 입김을 발휘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 한국 영화계는 감독의 예술인 경우가 많다.[3] 다만 본인 영화를 본인이 제작하는 스티븐 스필버그리들리 스콧의 경우나 마틴 스콜세지 정도 되는 세계적인 거장, 혹은 폴 토머스 앤더슨 처럼 이름난 작가주의 감독 정도가 되면 제작자나 투자자들의 입김에서 그나마 상대적으로 자유로워 진다. 한국은 할리우드보다는 조금 더 감독의 활동을 존중해 주는 문화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완전히 제작자의 영향에서 자유롭진 못하고 박찬욱, 봉준호 정도는 되어야 제작자들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4] 실제로 영화의 시작은 파워있는 감독들이 아니면 거의 제작자로부터 시작한다. 걸출한 시나리오를 찾아내거나 혹은 기막힌 아이디어를 생각해내서 작가에게 살을 붙여오라고 시키는 식으로 영화 전반의 설계를 담당한다.[5] 차이점이라면 루딘은 독립영화에도 참여한다는 점이다.[6] 훗날 CF감독으로 이름났던 마이클 베이를 키워주게 된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7]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망할 것이라고 저주를 퍼부을 정도로 영화 제작 과정에도 굉장한 영향력을 끼쳤다. 좋게 말하면 바른 길로 잡아주는 것이지만 감독들에게는 그냥 짜증나는 고역 그 자체인 인물. 토니 스콧이나 직접 발굴한 마이클 베이를 제외하면 시리즈를 빼놓고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감독은 거의 없다.베이도 어느정도 크고 나서는 바로 도망쳤지[8] 심슨은 심각한 마약 중독때문에 일을 태만히 하는 면이 있었고, 브룩하이머는 이에 강경책으로 맞섰으나 안타깝게도 더 록을 촬영하는 도중 돈 심슨이 약물에 의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더 록의 엔딩 크레딧에 돈 심슨에게 바친다는 헌정 문구가 나오는 것은 이런 이유이다.[9] 브룩하이머의 작품 중에서 평론가들에게 작품성으로 인정받는 작품은 몇 개 되지 않는데, 그래도 아주 대놓고 흥행만 노린 작품만 있는 것도 아니다.[10] 작품성은 물론 재미에 있어서도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해당 영화가 오리지널 영화였다면 분명히 망했겠지만 프랜차이즈의 명성 덕에 10억 달러가 넘는 큰 흥행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