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중세 음악의 역사는 크게 3기로 나눠볼 수 있는데, 단성성가의 발전을 이룬 5세기~8세기, 성가의 확장과 세속노래의 발전을 이룬 9세기~12세기, 다성부 음악의 등장 시기인 13세기~14세기 이렇게 나눠 볼 수 있다.[1]2. 초대 교회음악
초대 교회의 음악 활동은 성경에서도 나타나는데, 마르코 복음서 14장 26절을 보면 "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산으로 갔다."는 구절이 나오며 에페소서 5장 19절에도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라고 나온다.4세기쯤 되면 신자들이 들고 입지가 상승함에 따라 큰 건물에서의 공식적인 모임으로 성장하였고, 당시 예루살렘에서는 사제들 여러 명이 돌아가며 시편을 노래한 후 기도를 올렸다. 당시 교부들은 동시에 단순한 오락을 위한 음악은 거부하였고 오로지 신앙심을 더욱 고취시키는 음악만 허용하였다. 자세히 보자면 교부들은 기독교의 가르침과 거룩한 사고에 마음을 열게 하는 음악만이 가치있는 음악이라 생각하며, 가사없는 음악 즉 기악음악은 철저히 배척하였다. 그리하여 교회에서는 그로부터 천년 동안이나 무반주로 노래되었다. 이러한 음악적 견해는 후의 칼뱅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비록 성경에서는 결코 기악을 금기시한 적이 없지만.[2]
이런 초기 교회의 음악은 시편창과 찬가창로 이루어져 있다.[3]시편창은 시편조[4]라는 원시적인 선율에 맞춰 시편을 낭송하는 것이었다. 현대에도 볼 수 있는 합창과 사제가 교대로 불렀다. 선율은 도입부, 낭송음, 중간종지부와 종지부로 구성되었으며 굉장히 단순했으며 기보되지도 않았다. 이런 단순한 시편은 후에 갈수록 후렴이 삽입되면서 달라지기 시작된다. 끼워넣을 후렴구와 선율을 부드럽게 연결시키기 위해 시편의 끝을 종지음 외의 음으로 끝내는 경우가 많아져 시편창은 시편조와 잘 맞기 않게 된다.
찬가창은 시편창보다 리듬이 뚜렷하며 선율적이기도 하다. 찬가창의 시작은 대체로 성 암브로시오가 작곡한 4곡을 시작으로 하게 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작시 입을 열어 찬양하세(Pange, lingua)에 의한 그레고리오 성가 |
3. 중세 초기
3.1. 그레고리오 성가
자세한 내용은 그레고리오 성가 문서 참고하십시오.중세 교회에서 미사와 성무일도에 수반되는 음악은 평성가로 이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이 그레고리오 성가였다. 천년동안이나 이 그레고리오 성가는 교회의 공식적 전례 음악이었다. 이러한 그레고리오 성가로 인하여 교회 선법이 생겨났고 기보법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3.2. 성무일도
자세한 내용은 성무일도 문서 참고하십시오.성무일도(officium Divinum)는 수도원에서 매일 일정 시간에 거행되는 의식으로 철야기도[5]를 기본 요소로 삼고 있으며 이러한 의례의 순서와 내용의 최초의 기록은 성 베네딕토가 쓴 《계율(Regula》에서 발견된다.
바로 이 성무일도가 그리스도교 음악 의식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중세시대에는 수도원뿐 아니라 성당에서도 가장 중요한 의식 중 하나였다. 음악적으로 봤을 때 다성음악은 오직 '저녁 기도'만 허용되었다. 또한 '끝기도'에서는 동정녀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하는 성모찬송가를 노래했는데 전례력에 따라 각 절기에 맞는 것을 부른다. 이 안티포나들은 미사가 끝난 뒤에도 바쳐진다.
4개의 교송 | |
대림 시기부터 ~ 2월 1일까지 | Alma Redemptóris Mater(구세주의 존귀하신 어머니) |
2월 2일 ~ 성주간 수요일[6] | Ave, Regína caelórum(하늘의 영원한 여왕) |
부활 시기: 주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 | Regína cǽli(하늘의 모후님, 기뻐하소서): 부활 삼종 기도 |
연중 시기 둘째 부분: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날부터 연중 제34주간 토요일까지 | Salve, Regína(모후이시며): 묵주 기도의 성모 찬송 |
연중 아무때나, 특히 성모 마리아 축일 | Sub tuum praesidium(당신 보호 아래에)[7] |
3.3. 미사
자세한 내용은 미사(음악) 문서 참고하십시오.가톨릭의 가장 중요한 전례이다. 자세한 것은 미사(음악) 문서 참조. 일단 하단에서는 중세시대의 단성 미사음악만 다룬다.
{{{#FFBD03 미사 전례}}} | |||
노래 부분 | 낭독/낭송 | ||
고유문 | 통상문 | ||
시작 예식 | 입당송(Introitus) | ||
자비송 대영광송 | |||
본기도(Collecta) | |||
말씀 전례 | |||
제1독서[8] | |||
화답송(Graduale) | |||
2독서(사도서간) | |||
부속가(Sequentia) | |||
복음 환호송[9] | |||
복음 | |||
신경 | |||
성찬 전례 | 봉헌송(Offertorium) | ||
감사송(Praefatio) | |||
거룩하시도다 | |||
주님의 기도 | |||
하느님의 어린양 | |||
영성체송(Communio) | |||
영성체 후 기도(Post communionem) | |||
마침 예식 | 강복과 파견 |
3.3.1. 통상문
이 중 자비송(Kyrie)는 4~5세기경에 그레고리오 1세가 도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사의 3부에 맞춰 선율도 흔히 ABA 구조로 나타나는데 3부 형식의 원조로도 언급된다. 기존에는 키리에 3번, 크리스테 3번에 키리에 3번씩 총 9번의 구조를 가졌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각각 두 반씩 총 여섯번을 부르는 것으로 개편되었다. 남아있는 선율은 200개 이상.10세기경 키리에 악보 |
대영광송(Gloria)는 원래 5세기경부터 불리던 성가였으나, 7세기에 성무일도에 도입되었고 9세기에 처음으로 미사에 도입되었다. 대림 시기 주일이나 사순 시기 주일에는 생략되고 또 긴 가사 때문에 남아있는 선율은 19개밖에 없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Credo)는 325년의 신앙선언문으로써, 미사 통상문에 도입된 것은 한참 후의 1014년이였다. 대영광송과 마찬가지로 긴 가사와 산문적 성격 때문에 선율양식은 완전히 단음적이고 많은 선율들이 반복 사용된다.
거룩하시도다(Santus)는 가장 최초로 4세기 경에 미사에 도입되었고 원래는 '상투스(거룩하시도다)'를 회중들이 3번 외치는 것에 불과했으나 갈수록 가사가 붙어진다. 230여개의 선율이 남아있으며, 다양한 형식과 유형을 보여준다. 종종 ABA나 AA'B같은 진행을 사용하기도 한다. 원래는 뒤에 따라오는 찬미받으소서(Benedictus)와는 별개로 분리되어있었다. 베네딕투스는 본래 성체, 성혈 축성이 끝난 뒤에 사제가 감사기도를 이어가는 동안(현대 미사 전례에서는 ’신앙의 신비여‘ 환호를 하는 때)에 불리워졌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전례개혁으로 상투스와 통합되고 전에 없던 신앙의 신비여 환호가 들어가게 되었다.
하느님의 어린양(Agnus Dei)는 자비송과 마찬가지로 동방에서 들어왔으며 7세기 말 세르지오 1세 교황 때 정식으로 미사에 도입되었다. 원래는 3번의 청원 모두가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miserere nobis)'로 끝났으나 11세기 쯤에 마지막 청원이 '평화를 주소서(dona nobis pacem)'으로 수정이 가해졌다.
3.3.2. 고유문
입당송(introitus)은 역시 그레고리오 1세 때에 축일 때 교황의 행렬하던 관행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음악은 이중 합창단의 교대식으로 노래하였고, 8세기 말쯤에는 축소되었고, 사제가 제대에 도착한 후 시작되었다. 원래는 교송, 시편 한 편 전체, 소영광송과 교송의 반복으로 구성되었으나 시편을 전체에서 한 구절만 부르는 것으로 축소되었다.화답송(responsorium)은 사도서간 후 이어지는 성가로 독창자가 연단 아래의 층계에 서서 불렀기 때문에 층계송(graduale)라 칭하기도 한다.
원래는 합창 - 시편솔로 - 합창 이라는 형식이었지만 마지막 합창은 생략되었으며 독창으로 시간한 후 합창단이 노래하는 것으로 바뀌였다. 중세시대에는 음절마다 음이 30개가 넘는 부분을 볼 수 있었다.
복음 환호송은 처음에는 1년 내내 노래되었으나 후에 다마소 1세 교황이 부활 시기에만 제한했다가 점점 주일과 축일에도 사용되었고 7세기에는 평일 미사에도 사용되었다.
봉헌송(Offertorium)은 카르타고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빵과 포도주를 제대로 가져올 때 노래하던 관습을 전례에 도입한 것이라고 한다. 9세기 때 봉헌송은 교송과 시편, 다시 교송의 반복으로 구성되었으나 12세기 때에 시편이 삭제되었고 16세기 트리엔트 공의회 때 완전히 제거되어서 현재 미사 때는 사용하지 않고 레퀴엠 미사 때에만 사용한다.
영성체송(Communio)은 입당송과 같은 교송 - 시편 - 소영광송 - 교송의 반복형식이었으나 11세기 즈음에 시편이 삭제되었고 12세기 때는 봉헌송과 마찬가지로 레퀴엠 때만 제외하고는 교송만 남았다. 중세 시대 때에 통일적인 형식은 아니었으며 짧고 단순했다.
3.3.3. 관련 문서
4. 중세 중기
4.1. 성가의 발전
4.1.1. 트로푸스
기존 성가에 새로운 가사나 선율을 첨가하는 방식과 첨가된 부분을 트로푸스(tropus)라고 했다. 트로푸스가 언제부터 사용됐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말리우스(Amalius)라는 학자가 840년에 트로푸스를 설명 없이 언급한 것으로 보아 이미 그때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트로푸스는 스위스와 프랑스의 수도원을 중심으로 이탈리아나 영국까지 퍼졌으나 12세기부터는 사용이 감소되었고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결국 사용이 금지되었다.트로푸스 방식에는 3가지 유형이 있었는데 (1) 가사가 없는 멜라스마(다음적 패시지)에 가사를 붙이는 것으로 보통 가사 한 음절에 음 하나 1대1로 붙여졌다. 이렇게 첨가된 가사는 프로사(prosa)나 프로술라(prosula)라 불렀다. 가사만 새로 추가하는 대표적 트로프는 응창식 성가이다. (2) 성가에 선율만 더 첨가하는 것이다. 이런 트로푸스는 축일이나 행사 등 더 화려한 음악이 필요할 때에 사용되었다. (3) 기존 성가에 가사가 있는 새로운 음악을 끼워넣는 것이다.[10] 보통 이부분은 독창자가 불렀고, 합창단이 원래 성가 부분을 불렀다.
이러한 3가지 확장을 통해 이러한 트로푸스 형식들은 성무일도나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제외한 통상문과 몇몇 고유문 성가에 붙여졌다.
4.1.2. 부속가
부속가는 9세기말부터 유행한 장르였으며 르네상스 시대에 가서는 4,500개나 달해게 된다. 교회는 트로푸스와 마찬가지로 부속가들을 전례를 방해하는 요소로 보아 전례음악의 통일을 위해 트리엔트 공의회 때 부속가는 4개만 허용되었다. 특별 축일의 미사에서 알렐루야 다음으로 불러지는 성가로 알렐루야의 트로프로부터 나왔다.[11] 알렐루야 성가의 마지막 가사없이 음을 길게 부르는 멜라스마가 있는데, 이부분을 유빌루스라고 불렀다. 이 유빌루스는 점점 더 길어졌고 여기에 가사를 붙임으로써 점점 틀이 잡혀갔고 갈수록 알렐루야와 전혀 다른 음악이 되자 독립적인 악곡이 되었다.생갈 수도원의 노트커 발불루스는 884년에 쓴 부속가 가사 모음집인 《찬미가집(liber hymonorum)》 서문을 통해 자신이 부속가를 만들게 된 계기를 "기억에만 의존하던 긴 선율들이 도망가려 하자 빨리 묶어두려고 해서"라고 설명하며, 이미 그 시대에 유빌루스 가사 붙이기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부속가는 대체로 첫 문장과 쌍을 이룬 문장의 연속이 이어지고 마지막 문장으로 구성되었다. 초기의 부속가는 2행 연구로 쓰여졌고 두 시행은 같은 음절을 가지고 선율을 공유했으나 각운은 없었고 구간의 길이도 달랐다. 후기의 부속가는 연구의 길이가 같아졌으며 규칙적인 패턴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과 마지막의 단행구는 사라졌다.
4.1.3. 전례극
중세의 종교극은 전례 성가로부터 시작되었다. 부속가와 마찬가지로 성가의 트로푸스를 거쳐 탄생된 전례극은 문맹이 많았던 중세 시대의 평신도들에게 교리와 성경을 좀 더 쉽게 이해시키려는 목적이었다. 교회에서는 축일날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나 구약성서의 장면들을 사제가 제단 앞에서 연극처럼 공연하는 전통이 있었지만, 단순히 높낮이만 적용한 대화를 하는 수준이었다. 점차점차 여기에 음악이 붙여졌으며 그에 맞게 의상들이나 무대장치도 갖춘 전례극으로 발전한다. 이런 전례극은 기적극, 신비극, 도덕극의 세 방향으로 나눠졌다. 기적극과 도덕극은 그리스도교 성인들이나 성모 마리아의 생애에 조금 살을 붙여 그려내는 극이고 도덕극은 추상적으로 선과 악 같은 무거운 주제를 다룬 교훈극이다.가장 최초의 전례극은 10세기의 것으로 예수부활 대축일 입당송 앞의 트로프이다. 이 중 생갈 필사본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러온 3명의 마리아와 천사들의 짤막한 대화 수준이었다. 전례극이라 할 만한 것은 영국의 베네딕토 수도회의 의식 소책자였다. 973년 간행된 이 책자에서는 차려입은 사제 4명이 각각 마리아와 천사를 연기하며 대화하는 것이었고 후에 테 데움이 붙었다. 이런 전례극이 점점 확대되고 복잡해졌다.
이후 가장 완전한 전례극은 12세기 프랑스 성 브누아 쉬르 루아르의 수도원에 있는 각본집이다. 이 각본집에는 여러가지 10개의 이야기가 실려있었다. 그후에도 13세기 초에 보베 성당 학교 학생들이 작곡한 '다니엘 이야기'는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하는 다니엘을 묘사한 것으로써 50개가 넘는 선율, 노래와 춤, 행렬,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구경거리들이 붙으면서 전례극은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고 넓은 광장이나 교회 밖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상연하였다. 초반에는 사제들이 라틴어를 사용하며 연기했지만 점차 대중적으로 기악음악이 붙고 일반인들도 참여가 가능하면서, 목소리가 음역별로 분류되거나 당시 지역의 언어를 사용하였다. 여기에 점점 민속적, 세속적인 요소가 침투하며 본래의 의도에서 변질되자 1210년 교황은 성직자의 무대연기를 금하기도 했다. 이런식으로 가면서 전례극은 점점 세속적인 연극으로 독립하게 된다.
5. 중세 후기
[1] 차하정, 『서양사 총론』 137쪽, 김미옥, 『중세음악 역사, 이론』 32쪽[2] 구약 시대의 찬미가들을 모아놓은 시편만 보아도 비파, 수금, 피리, 나팔, 북 등 온갖 악기들을 거론하고 그 악기를 연주하며 하느님을 찬양한다는 구절이 심심찮게 나온다.[3] 둘이 구별은 뚜렷하게 되지 않았으나 4세기부터 뚜렷히 구별되기 시작한다.[4] 이러하나 시편조에는 교회선법으로 발전하는 8개조와 순례자 조라는 하나의 조가 더 있었다.[5] 아침기도, 저녁기도, 점심기도로 나뉜다.[6] 대략 4월 초반[7] 가톨릭 기도서에 수록된 ‘일을 마치며 바치는 기도’와 같은 내용. 기록으로 남겨진 것만 해도 최대 3세기까지 거슬러올라가는 기도문이며, 역사가 오래된 만큼 동서방 교회가 모두 공유하는 기도문이기도 하다.[8] 구약성경 혹은 신약 사도행전이나 요한묵시록[9] 알렐루야 또는 '연송(Tractus)'이라고도 불리는 복음 전 노래[10] 첨가된 부분은 기존 성가의 보충 설명 역할을 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크리스마스 성가의 앞에 이사야의 예언 내용을 붙인다던지.[11] 라틴어로 세쿠엔치아는 '이어지는 것'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