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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정치사/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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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략적인 상황2. 동로마 제국 지배하의 발칸 반도와 에게 해 일대3. 구 서로마 제국령와 그외 지역들
3.1. 서유럽 일대3.2. 중부유럽 일대3.3. 이탈리아3.4. 브리튼 제도3.5. 이베리아 반도
4. 스칸디나비아 지역5. 러시아 평원6. 몰타7. 기타

1. 대략적인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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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6년 말의 유럽
프랑크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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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 왕국 부르군트 왕국 오도아케르 동고트 왕국
수에비 왕국 율리우스 네포스 동로마 제국
·
반달 왕국

5~10세기 사이인 중세 전기의 정치적 상황은 다음과 같다. 우선 왕권의 경우 중세 초기 상당히 불안정했다. 동로마 제국은 여전히 남아 있는 로마의 공화주의 사상, 황위 계승 시스템이 완전하지 않은 점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황실이 빈번하게 교체되었고, 북쪽으로 아바르, 슬라브, 불가르, 마자르의 침공을 막아야 했으며, 남서쪽으로 페르시아 제국이슬람 제국, 해상으로 바이킹의 침략을 막아야 했다.

다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내부적으로 지방 세력들이 할거를 할 움직임 같은 것은 없었다. 이탈리아 북·중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영토를 잃은 것에 불과했고,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더라도 곧바로 진압되었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이중 동로마 황제 자리를 찬탈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반면 구 서로마 제국령은 사정이 달랐다. 서로마 제국령에 점차 들어서기 시작한 게르만족 국가들은 기존의 라틴인 및 그에 동화된 민족들이 피지배층으로 전락되었고, 무엇보다 게르만족들이 지배층인 왕국의 경우 로마 제국의 효율적인 행정 체계가 붕괴된 후였기에 DUXCOMES만으로 행정을 꾸려야 했고, 대부분 문자조차 없어 문맹의 비율이 높았기에 유일하게 식자층을 갖고 있던 교회와 협력해야 했기에 점차 기독교로 개종하기 시작했다.

다만 안정적이지 않은 분할 상속으로 나라가 분열되거나 왕위 계승으로 인해 오랫동안 내전이 발생하는 등 혼란기가 많았고, 이러한 혼란을 틈탄 외세에 의해 병합되곤 했다. 그나마 6세기 중반에 들어서 서고트 왕국프랑크 왕국이 제대로 된 나라꼴을 갖추었지만 여전히 불안한 면이 있었다.

2. 동로마 제국 지배하의 발칸 반도와 에게 해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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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서로마 제국[1]와 그외 지역들

서로마 제국 옛 영토는 브리튼 섬 남부와 알프스 이북과 이남인 이탈리아 반도, 피레네 산맥 이남으로 나눠져 각기 차지 하고 있던 게르만족은 여러 부족으로 나눠져 부족 단위의 왕국을 세웠고, 다시 내부로 여러 씨족으로 나눠져 있었기에 부족장이 왕이 되고, 그 아래의 씨족장들이 귀족 계층이 되었다. 다만 귀족 계층은 게르만족으로 구성되어 있지는 않았다. 이때까지 게르만족이 진출하지 않은 옛 서로마 제국 영역 안에 파견되었던 총독이나 로마인이나 로마인으로 동화된 켈트족 유력자들이 잔존하고 있었다[2]. 프랑크 왕국처럼 잔존한 서로마 제국의 잔당 세력을 공격해 흡수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반면 서고트 왕국의 경우 영토 안에 있던 모든 로마인들을 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쨋든 영토의 크기가 당연하게도 작은 소국인 것은 기본이었고, 게르만족 사회의 정치적 관념이 그대로 유지되어, 구체적인 왕위 계승법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있어 왕권이 약했고, 무엇보다 게르만족의 오랜 전통이었던 분할 상속법에 따라 왕이 죽은 후 여러 왕자들에 의해 왕국이 여러 갈레로 분할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갈리아 지방을 석권한 프랑크 왕국으로 클로비스 1세에 의해 실질적으로 개국한 이래로 팽창주의 정책을 펄쳐 서고트 왕국을 남프랑스 일대에서 축출하는 등 강력한 모습과는 별개로 왕권이 지방 유력자들의 협력 없이는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힘들 정도였고, 이때문에 지방분권화로 지방 유력자들이 강해지는 결과로 이어지다가 나라가 분열되다가 몇 년 안가 다시 통합되기는 했으나 다시 분열되어 반백년 동안 단일 프랑크 국왕 자리를 두고 내전이 이어졌다. 다만 프랑크와 동일하게 한 지역 전체를 석권한 서고트동고트, 그리고 브리튼 제도 남부에서 재각기 들어서 칠왕국의 경우 이러한 왕위를 둔 내전은 거의 없었다.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지 않은 지역들의 경우 현재의 독일의 니더 작센와 네덜란드의 프리슬란트는 각각 서로마 제국 붕괴시 이미 자리잡고 있던 작센족들과 프리지아족들이 왕국을 세우다가 각각 8세기 중엽과 9세기 초 프랑크 왕국에 병합되었다.

유틀란드 반도 및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경우 게르만족의 기원지엿으나 450년대를 전후로 노르드인들만 남아 잇던 상태였다. 이들은 수많은 게르만계 친척들이 몰락해가는 로마 제국을 침략해 막대한 금은을 약탈해오는 것을 보고 혹해 친척들을 따라 점차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로마 제국 북부 국경을 넘나들며 엄청난 부를 뜯어왔고, 결과적으로 상당량의 금이 북유럽으로 유입됐다.

이후 8세기를 전후로 농업 기술의 발달과 온난한 시기를 맞이하면서 스칸디나비아 지역은 겁잡을 수 없이 증가한 인구수로 인해 한정된 자원을 공평하게 배분할 수 없게 되면서 새로운 식량 공급원을 찾고자 하는 이들과 보다 나은 삶의 터전을 찾아나서는 사람이 점차 늘어나 조직적으로 전 유럽을 약탈하기 시작해 많은 유럽인들로 부터 바이킹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후 9세기를 전후로 노르드 내의 군소 집단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현재의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등의 왕국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한편 라인 강 서부 일대는 한때 게르만족의 영역이었으나 5세기까지 이어진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인해 거진 비어진 땅으로 이후 6세기경 슬라브족의 이동으로 인해 서슬라브인들이 정착해 터전을 일구어 가기 시작했고, 6세기 중엽 튀르크계 유목 민족 집단인 아바르인들이 아바르 칸국을 건국했고, 이후에 현제의 체코와 슬로바키아, 폴란드에 정착한 서슬라브인들에 의해 모라비아 왕국, 보헤미아 공국, 폴란드 영지 등이 건국되었다.

이후 9세기 중반 아바르 칸국이 프랑크 왕국과의 전쟁으로 인한 패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끝에 몰락하면서 그 자리에 하자르 족에서 독립한 새로운 유목 집단인 마자르족들이 차지해 바이킹과 함께 한 동안 유럽 각지를 공포로 몰아넣지만 레히펠트 전투에서 패하면서 더 이상 유럽 각지를 약탈하는 것을 포기, 판노니아에 정착해 헝가리 대공국을 세우게 되다.

또한 8~9세기 작센과 프리슬란트를 시작으로 10세기경에 유틀란드와 스칸디나비아 반도, 폴란드와 보헤미아 및 슬로바키아, 헝가리 등에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해 어느 정도 기독교화되기 시작했다.

3.1. 서유럽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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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중부유럽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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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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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브리튼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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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이베리아 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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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스칸디나비아 지역

스캍디나비아 지역은 789년을 기점으로 스칸디나비아와 유틀란트 반도에 살던 노르드, 데인족들로 구성된 바이킹들이 브리튼 제도를 시작으로 유럽 전역의 해안과 하천 일대의 지역들을 습격해 약탈 및 해당 지역 점거하기 시작하면서 유럽 국가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소빙하기로 인해 살고 있던 유틀란드 반도와 스캍디나비아 반도의 평균 기온이 다시 내려가면서 일시적인 간빙기 동안 늘어난 인구수를 급락한 농업 생산량이 받춰주지 못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이지역 내에서 군소 왕국들이 서로의 영토를 병합하면서 정복자에 의한 징세를 거부한 자들이나 아예 후계 구도에 밀려난 이들 위주로 구성되었고, 새로운 땅을 찾기 위해 바이킹이 되었다.

872년 하랄 1세 하르파그리에 의해 노르웨이가 명분상 통일이 되지만 하랄 1세 하르파그리의 실제 통치력은 노르웨이의 서부 해안가에 국한되어 있었다. 상술한 대로 그의 통치, 특히 토지세 징수를 거부하는 일파가 바이킹이 되어 잉글랜드를 비롯해 스코틀랜드 인근의 오크니 제도, 셰틀랜드 제도, 헤브라디스 제도, 페로 제도 등지로 떠났고, 처음으로 발견된 아이슬란드도 이 시기에 본격적인 정착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하랄 1세의 사망 후 노르웨이의 왕위를 두고 자식들 간의 분쟁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에이리크 1세 블로됙스는 아버지가 살아있던 당시에 다른 형제 2명을 살해하였고 이후 왕위에 오르자 지나친 강권 정치 때문에 '피의 도끼(Blodøks)'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기 때문에 노르웨이 귀족들의 반발이 심해졌고, 결국 반대 귀족세력들이 에리크 1세를 몰아내고 그의 막내 동생으로 잉글랜드에 머물고 있던 호콘 1세를 귀국시켜 왕이 되도록 했다.[3]

이후 왕위에 오른 호콘 1세는 잉글랜드에서 자란 영향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상태였고 이후 노르웨이에도 잉글랜드 선교사들을 초청하여 그리스도교 전파를 후원했지만 다른 노르웨이 귀족들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각 노르웨이 귀족들이 보유하고 있던 함대를 모두 회수하여 국왕 직할로 만드는 데 성공했고 지방 행정제도를 개편하여 노르웨이가 본격적인 통합 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하도록 하는데 기여했다. 이 때문에 호콘 1세는 '선량왕(den gode)'이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덴마크에 피신해 있던 에리리크 1세의 아들인 하랄 2세가 덴마크 왕 하랄 1세 블로탄의 지원을 받아 그의 형제들과 노르웨이를 침공하자 AD 961년 노르웨이의 남서쪽에 있는 피티아르 섬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이후 하랄 1세 블로탄은 에리크 1세의 아들 중 장남인 하랄 에리크손을 노르웨이 왕 하랄 2세로 즉위시키고 노르웨이를 덴마크의 속국으로 삼았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왕이 된 하랄 2세의 실질적인 통치력은 노르웨이의 서부 지역 일대에만 머물러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에 하랄 2세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오슬로의 지방 영주인 트뤼그비 울라프손과 구드라드 비아른손, 그리고 라데 백작(Jarl of Lade)인 시구르드 호콘손을 살해하였고 전통 신앙 숭배도 금지시켰다. 이에 따라 노르웨이에서 하랄 2세에 대한 반감이 퍼져 나갔고 덴마크 왕 하랄 1세 블로탄 역시 하랄 2세가 덴마크의 종주권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아닌 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때 하랄 2세에게 살해당한 시구르드 호콘손의 아들인 새로운 라데 백작 호콘 시구르드손이 AD 970년 하랄 1세 블로탄의 묵인을 얻어 하랄 2세를 암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 노르웨이에서는 덴마크의 지원을 받은 라데 백작 호콘과 하랄 2세의 형제들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으나 덴마크의 하랄 1세 블로탄의 지원을 받은 라데 백작 호콘이 최종적으로 승리하였다. 그리고 하랄 1세 블로탄은 노르웨이의 남동부를 덴마크의 영토로 합병하며 직접 통치하였으나 노르웨이 서부 지역은 라데 백작 호콘을 봉신으로 임명하여 간접적으로 통치하였다.이후 후술하겠지만 통치권을 장악한 라데 백작 호콘이 점차 오만하게 굴면서 각지에서 반란이 들끓었고 결국 AD 995년에 부하들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노르웨이가 반란으로 혼란스러워졌다는 소식을 들은 트뤼그비 울라프손의 아들인 울라프 트뤼그비손이 노르웨이로 돌아와 왕위 올라 잠시나마 덴마크로 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이후 열렬히 그리스도교 포교에 나서 노르웨이 서부 해안 지방과 인근 섬인 페로 제도, 셰틀랜드 제도, 오크니 제도 및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였으나 앞선 노르웨이 왕들과 마찬가지로 울라프 1세도 노르웨이 내륙 지방에 대해서는 거의 통치력을 행사하지 못했고 그리스도교도 전파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올라프 1세의 가장 큰 위협은 덴마크의 스벤 1세였다. 스벤 1세는 부왕인 하랄 1세 볼로탄 시절의 노르웨이 통치권을 되찾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스웨덴 왕 올로프 3세 쇠트코눙 및 호콘의 아들인 라데 백작 에리크 호코나르손과 동맹을 맺었다

덴마크의 경우 오랫동안 여러 개의 부족 단위로 분열되어 있었으나 노르웨이 같은 험준한 산맥과 스웨덴 같은 빽빽한 산림도 없었기 때문에 통일 국가의 형성을 방해할 만한 지리적인 요인은 적은 편이었다. 936년 옐링 지역의 군주가 된 고름이 대대적인 정복 활동을 벌이며 덴마크의 통일 사업을 시작하여 덴마크 서부를 지배하던 울라프 가문의 시그트리그 그누파손을 물리치고 유틀란트 반도를 통일하였다. 고름은 인근 노르웨이 통일 왕국의 초대 왕 하랄 1세의 아들 에리크 1세와 자신의 딸인 건힐다를 결혼시키며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고름의 아내인 티레가 덴마크와 독일의 국경인 다네비르케 방어벽을 세우며 국경선을 확정지었다,

947년 독일의 작센 북부 지역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에 항거하는 이교도 슬라브족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아들인 하랄 고름손 블로탄을 보내 이들을 지원하였다. 이 반란은 3년이나 이어졌으나 950년 신성로마황제 오토 1세의 대대적인 반격을 받으면서 진압당하고 말았다. 덴마크 군도 유틀란트 반도로 쫓겨갔고 오토 1세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신성로마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매년 공물을 바치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강화조약을 체결해야만 했다.

덴마크에서는 958년 고름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하랄 고름손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하랄 고름손은 '푸른 이빨'이라는 뜻의 '블로탄(blatǫnn)'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전투 중에 부러진 이빨 대신 파란색 의치를 넣었기 때문이라는 설과 블루베리를 너무 좋아하여 항상 이빨이 파랗게 물들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하랄 고름손 블로탄은 아버지가 완료하지 못한 덴마크 통일 사업이 완수하여 최초의 통일 덴마크의 왕인 하랄 1세로 즉위하였다. 또한 하랄 1세 블로탄은 아버지와 달리 그의 어머니인 티레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960년경 직접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그리스도교를 덴마크의 국교로 선포하였다. 또한 상술한 대로 노르웨이 또한 이때 합병시켰다.이후 오토 1세가 사망한 후 오토 2세가 황제가 되자 자신의 왕국을 신성 로마 제국의 종주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고, 몇차례의 고비 끝에 신성 로마 제국의 종주권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것과 함께 통일 왕국을 유지하기 위해 장자 상속제를 체택해 차남인 스벤 트베스케그을 제거하려 했지만 되려 반격을 받아 독일의 벤틀란트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으나 곧 사망했다.

스웨덴 또한 10세기 말 우플란드 지방을 통치하던 에이리크 6세가 피리스벨리르 전투에서 조카인 스티르비르욘을 물리치고 스웨덴 왕으로 즉위하여 '승리왕(Segersäll)'이라는 별칭을 얻고 멜라렌 지방을 중심으로 스웨덴 역사상 최초의 왕이 되었다. 에이리크 6세라는 칭호를 쓴 이유는 그 이전의 전설 상의 스웨덴 국왕을 모두를 계승한다는 의미인데, 다만 에이리크 6세가 윙글링 왕가의 후예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직접 윙글링이라는 가문명을 사용했는 지는 확실치 않으며 역사적으로는 에이리크 6세가 창건한 왕조를 문쇠(Munsö) 왕조라고 부르지만 문제는 이시기까지만 하더라도 스웨덴의 역사에 대한 문헌이 존재하지 않아 이것이 진실인지 조차 알 수 없다.

심지어 AD 995년 에이리크 6세가 사망하면서 스웨덴의 울라프 3세 쇠트코눙이 스웨덴 왕으로 즉위했다. 초기 북유럽 역사를 기록한 브레멘 주교의 아담에 의하면 에리크 6세가 AD 994년 덴마크 국왕 스벤 1세를 잉글랜드 왕국으로 내쫓고 AD 995년 사망할 때까지 덴마크를 지배했지만 에리크 6세가 사망하자 스벤 1세에게 덴마크를 빼앗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울라프 3세 쇠트코눙이 덴마크 왕위를 두고 다투게 되었지만 울라프 3세 쇠트코눙의 어머니이자 에리크 6세의 미망인인 시그리드가 스벤 1세와 재혼하면서 화해하였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에리크 6세가 덴마크를 지배했다고 한 시기에 스벤 1세는 잉글랜드로 쫓겨난 것이 아니라 잉글랜드를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브레멘 주교 아담의 기록은 그 사실성을 의심받고 있다. 다만 울라프 3세 쇠트코눙와 덴마크의 스벤 1세의 동맹은 사실로 보이는데 실제로 스벤 1세가 노르웨이의 울라프 1세 트뤼그비손을 몰락시키는 데 동참했다.

5. 러시아 평원

한편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전신인 키예프 루스 또한 이때 중세 초인 9세기 말에 등장한다. 상술한 대로 키예프 루스 역시 류리크를 지도자로 하는 바이킹 군벌 세력들에 의해 건국되었는데 이때는 군주 칭호로 을 혼용했기에 루스 카간국이라고 불렸고, 타지역에 정착해 현지 문화와 융화된 다른 바이킹 세력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또한 슬라브인들과 주변 있던 유목민 세력들과 융화되기 시작했다. 노브고로드를 수도로 했기에 노브고로드 대공국으로 불렸다. 860년 류리크는 남쪽으로 진군하여 흑해를 넘어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도 했다.

879년 류리크가 죽자 노브고로드의 올레그가 크냐지겸 칸이 되었다.류리크에게 이고리 류리코비치가 있었으나 나이가 어린 탓인지 출신이 불명확한 올레그가 즉위한 것으로 보이며 후술하지만 올레그는 이고리가 장설할 때까지 섭정에 가까운 위치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즉위한 후 최초로 보이는 행적이 바로 키예프 장악이다. 882년, 올레그는 군사를 이끌고 드네프르 강을 따라 남하하며 스몰렌스크와 류베치를 장악했다. 그 곳에서 그는 일찍이 류리크가 파견했던 부하들의 소식을 들었다. 류리크는 860년 제7차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을 일으켰는데, 이 때 참전했던 부하들 중 일부를 현재의 우크라이나 일대에 파견했다. 이들을 이끄는 장수는 '이방인 뒤레'로 자신의 무력과 동로마에서 세운 전공으로 현지 슬라브인들을 감동시켜 키예프 일대의 군주가 되었다.

이후 지리적으로 멀다 보니 키예프는 노브고로드의 류리크 조정과 교류를 줄이고 반독립적으로 통치되었는데, 올레그는 키예프의 통제권을 잡고자 했다. 올레그는 뒤레에게 사절을 보내 방문을 허락해달라고 했고, 뒤레는 이를 허락했다. 배를 타고 와서 키예프 앞 강변에서, 올레그는 뒤레에게 사절을 보냈다. 금은보화를 선물로 들고 왔으며, 국가의 일로 긴히 할 말이 있는데 몸이 아파서 자신이 갈 수가 없으니 뒤레가 배로 좀 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뒤레는 별 의심 없이 올레그의 배로 갔다. 뒤레가 배에 타자 올레그는 돌변해, 그 자리에서 뒤레를 살해했다. 그리고 바로 키예프에 입성했다. 그는 류리크의 어린 아들 이고리를 데리고 왔는데, 키예프 사람들 앞에서 이고리를 보여주면서
내가 바로 여러분의 군주 올레그이며, 이 아이가 류리크 님의 아들인 이고리요.
라며 자신과 이고리의 정당성을 설파했다. 이 선언은 키예프 사람들을 납득시켰고, 올레그는 희생 없이 키예프를 장악했다. 올레그는 이 도시가 루스인들의 도시의 어머니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자신의 궁정을 노브고로드에서 키예프로 옮겼고, 이때부터 키예프 루스가 시작되었으며 스몰렌스크 등의 정착촌과 연결되어, 드네프르 강안 일대 전부가 루스인들의 영토가 되었다. 키예프로 천도함으로써 슬라브인들에 대한 통제력이 훨씬 높아졌고, 사방으로 상업과 약탈을 나가기도 쉬워졌다.

올레그는 키예프에서 멈추지 않고 주변 슬라브계 부족들의 복속을 시작했다. 이 당시 우크라이나 일대의 슬라브인들이 주로 하자르 칸국에 종속되어 있었는데, 올레그는 이들에게 자신과 연대해 하자르에 대항하자고 부추겼다. 이 결과 드레블랴인, 세베르냐인, 라디미치인과 하자르계 유목민 일부가 키예프 루스에 종속되었다. 이렇게 주변에 영향력을 확대한 후에는, 류리크의 뒤를 이어 907년 레온 6세 치세 하의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

루스인들의 남하 소식을 들은 동로마는 보스포루스 해협에 쇠사슬을 쳤는데, 이 것을 본 올레그는 배에서 내린 후 바퀴를 꺼내 배를 싣고 육지로 배를 옮겼다고 한다. 이렇게 함대 손실 없이 콘스탄티노플에 상륙한 올레그는 성을 포위하고 직접 앞서 싸웠다고 하는데, 다른 전쟁으로 여력이 없던 동로마는 배에 달린 노 하나 당 12 흐리브냐의 금을 주고 루스인들이 동로마에서 용병업을 하는 내용도 포함된 평화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이 공격은 루스 쪽 연대기에만 기록되어 있고 동로마 쪽 기록에 없어 전임 류리크의 공격과 후임 이고리의 공격을 짜집기해서 창조한 전설 아니냐는 의혹도 있다.

912년 올레그가 죽은 후 이고리가 크냐지로 즉위한다. 이고리의 즉위 초반의 기록들은 거의 전해진 것이 별로 없으나 그 역시 920년 동로마제국을 공격하고 있던 페체네그족의 후방을 공격했으며, 이후 941년 페체네그족과 연합해 100척의 배를 이끌고 다시 동로마 제국을 공격해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다. 이때 콘스탄티노플을 방어하는 군함의 수는 고작해봐야 15척이었다.

문제는 당시 동로마 황제는 노련한 군인 출신이었던 로마노스 1세였다. 로마노스 1세는 군인 출신 답게 침착하게 남은 15척의 낡은 배에 그리스의 불을 장착해 이고리 대공의 함대를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남은 육군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 일대인 비티니아에 상륙했다. 이고리는 비티니아에서 약탈과 학살을 벌였다. 민간인에겐 묶어놓고 활을 쏘고 사제들에게는 머리에 쇠못을 박는 등 잔혹 행위를 하며 군기가 잠시 해이해졌고, 딱 이 때 도착한 동로마 중앙군의 요안니스 쿠르쿠아스대 바르다스 포카스에게 공격당해 크게 패했다. 살아남은 인원들은 잔존한 함대를 합쳐 탈출하려다 제독 테오파네스에게 걸려 다시 한 번 큰 피해를 입었다. 결국 941년 전쟁은 재물 약간 말고는 피해만 엄청 입은 채 끝났다. 이후에도 이고리는 944년 페체네그 기병을 이끌고 다시 무력시위를 하다가 945년 평화 조약을 맺었는데 조약문에 서명한 루스인이 총 76명인데, 왕족이 12명, 왕족 1인당 1명씩을 대표하는 외교관 11명, 수행원 27명, 따라온 상인 26명으로 . 왕족과 귀족층인 외교관들은 거의 전원이 스칸디나비아식 이름을 갖고 있다. 오히려 왕족 중엔 현지인들과의 동화를 위해서인지, 슬라브식 이름을 가진 사람이 셋 있다. 귀족층 중 핀란드식 이름이 셋 있으나, 슬라브식 이름은 전혀 없었고, 반면 평민 계층일 상인들에는 핀란드식 이름이 셋, 슬라브식 이름이 둘 있었다. 내용으로 동로마와의 무역통상 권리와 드네프르 강 하구 항구의 이용권을 얻었다. 하지만 키예프 루스 측도 크림 반도 남부에 대한 불가침조약과 정착촌 건설 금지를 약속해주는 등 경제적 권리를 얻는데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이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전비를 그대로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이고리는 피지배층 슬라브인들에게 세금을 많이 뜯어서 벌충하려 했다. 이고리는 군대를 이끌고 드레블랴인들의 수도 이스코로스텐으로 진군해 특별 공물을 요구했다. 원래 이 당시 루스 일대에는 폴리우디아라 불리는 정기 공물 수취 제도가 있었다. 그런데 이고리가 폴리우디아 공물 자체를 올린 것도 모자라 드레블랴인들에게 특별 공물까지 내놓으라고 한 것이다.

어쨌든 루스의 위세가 높았으니 드레블랴인들은 순순히 공물을 바쳤다. 공물을 챙겨 돌아가던 이고리는 왠지 좀 더 털면 더 나올 거 같다는 생각을 했는지, 약간의 병력을 데리고 다시 드레블랴인들에게 돌아가 더 내놓을 것을 요구하는 등 드레블랴인들에게 갑질을 하다가 드레블랴인들은 이고리를 습격해 체포한 후 그를 구부러진 자작나무 가지 사이에 사지를 묶어놓고 자작나무를 튕겨 사지를 찢어 죽여버렸다.

이고리가 살해되자 3살짜리였던 스뱌토슬라프 1세가 즉위했고, 어머니인 올가가 섭정으로 키예프 루스를 통치한다. 그녀는 우선적으로 남편을 죽인 드레블랴인들에게 4차례의 방식으로 복수를 했다. 첫번째는 이고리를 죽이면서 기고만장해져 레블랴 연합의 공작 몰과 재혼하라는 드레블랴인 사절 20명을 산매장시켰다. 이후 두번째 복수로 드레블랴인들에게 전령을 보내, 저번 사절들을 잘 맞아들였으니 더 저명하고 지위 높은 인사들을 새로운 사절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드레블랴인들은 아무 의심 없이 최고위층 인사들을 보냈다. 올가는 이들에게 자신을 만나기 전 목욕탕에서 깨끗이 씻고 올 것을 권했다. 드레블랴인 귀족 사절들은 의심 없이 목욕탕에 갔는데, 올가는 목욕탕 입구를 걸어잠근 뒤 목욕탕에 불을 질려 산체로 태워 죽였다. 이후 세번째 복수로 다시 드레블랴인들에게 전령을 보냈다. 새 결혼을 하기 전에 전 남편 이고리의 무덤에서 장례식을 하고 싶으니 벌꿀술을 잔뜩 준비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드레블랴인들은 조금 긴장했지만 이를 수락했다. 얼마 후 이고리의 무덤이 있는 곳에 나타난 올가는 정말로 수행원 몇명을 대동하고 왔다. 올가는 장례식을 연 후 남편의 무덤 앞에 앉아 엉엉 울기만 했고, 수행원들은 먹고 마시는 분위기였다. 이에 많은 양의 벌꿀술에 눈독을 들이던 드레블랴인들은 루스인들의 태도가 수상하지 않자 곧 장례식에 모여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다들 술에 취해 곯아떨어졌다. 하지만 루스인들이 그저 술잔을 기울이던 것도, 올가가 무덤 앞에서 울고 있던 것도 모두 연기였다. 계획대로 드레블랴인들이 전부 곯아떨어지자 올가는 수행원들에게 전부 처단할 것을 명했다. 수행원들은 드레블랴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인 후 올가와 함께 키예프로 탈출했다. 이 날 밤 드레블랴인 전사 5천 명이 살해당했다.

마지막으로 네번째 복수로 46년, 올가는 드레블랴인들을 침공했다. 전쟁 명분은 당연히 남편 이고리의 복수였다. 드레블랴인들은 전쟁을 지휘할 귀족 수십 명과 전사 5천 명을 손실한 상태였기에 전쟁은 순조로웠다. 순식간에 드레블랴인 도시 대다수가 장악당하고, 드레블랴인들의 수도 이스코로스텐만이 남았다. 올가는 1년 간 이스코로스텐을 포위했으나 함락시키지 못 했다. 그러다 올가는 기막힌 꾀를 내었다. 그녀는 이스코로스텐에 전령을 보내어, 지금 성 밖의 마을들은 일찌감치 항복하여 농사도 짓고 생업을 하는데 어째서 이스코로스텐 사람들은 항복하지 않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이스코로스텐 수비대는 일찍이 우리가 당신들의 대공을 죽였으므로 보복당할까봐 항복하지 못 한다고 답장했다.

이에 올가는 이미 귀족 수십 명과 전사 5천 명을 죽인 것으로 화가 풀렸다며, 우리가 승리했다는 증거로 대단한 것은 필요없고 다만 드레블랴인들 한 사람 당 비둘기 세 마리와 참새 세 마리를 바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드레블랴인들은 안심하며 비둘기와 참새들을 마련해 올가에게 전했다. 하지만 올가의 복수는 당연히도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올가는 포위를 푸는 척 하는 한 편, 나뭇가지, 천쪼가리와 석탄을 잔뜩 가져왔다. 그리고 이 나뭇가지, 천쪼가리, 석탄에 불을 붙인 후 이것들을 드레블랴인들에게 받은 비둘기들의 다리에 묶고 모두 풀어주었다.

그리고 귀소본능이 있던 비둘기들은 원래 살던 집인 이스코로스텐으로 날아갔고, 비둘기들이 다리에 불 붙은 상태로 주인 집을 찾아가는 바람에 이스코로스텐에 어마어마한 화재가 났다. 이 시기 동유럽 성채들은 거의 대부분이 건물은 물론 성벽마저도 목재였기 때문에, 이스코로스텐은 불타며 내려앉았다. 그리고 올가와 루스 군대는 진격해 불타는 이스코로스텐을 마구 휩쓸었다. 드레블랴인 대다수가 타죽거나 루스 군대에 학살당했고, 생존자들은 모두 사로잡혀 노예로 팔려갔다. 이로써 드레블랴인 연합 국가는 멸망하고 민족은 거의 절멸당했다. 가히 역사에 남을 만한 대복수극의 마무리였다.

복수를 마친 올가는 키예프 루스의 내정을 정비해 이고리가 살해된 이유가 무리한 공물 수취에서 비롯된 것을알고 있었기에 속국들의 공물 수취를 줄이고, 초토화된 이스코로스텐 대신 브루치에 관청을 세워 옛 드레블랴인들의 땅을 관리하게 했다. 그리고 이전까지 주먹구구식으로 통치되던 키예프 루스 전역에 행정구역을 설치해 관리들을 파견하거나 강들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루스식 무역 체계를 개량해 강변 곳곳에 무역기지를 설치해 상업 효율을 높이고, 수출할 모피를 구할 국립 사냥터도 곳곳에 설치했다. 또한 새로운 마을과 도시의 설립과 군사 요충지에 목조 요새를 설치하는 등 적극 후원해 훗날 키예프 루스가 '도시의 나라'라는 호칭을 얻게 되는 기틀을 마련했다.

957년 올가는 돌연 수행원들을 이끌고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했다. 당시 황제는 콘스탄티노스 7세였다. 올가는 957년 9월 9일 수요일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해 황제를 알현했다. 이후 10월 18일 일요일에도 황제를 알현했다. 이때 원초 연대기에선 콘스탄티노스 7세는 그녀의 미모에 반해 청혼을 했다고 하지만 콘스탄티노스 7세는 결혼한 상태였기에 있을 수 없는 내용이다.

어째든 올가는 콘스탄티노스 7세에게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김과 동시에 놀랍게도 기독교로 개종한 후 키예프 루스로 돌아갔다. 원초 연대기에 따르며 그녀는 아들인 스뱌토슬라프를 비롯한 다른 루스인들을 개종하려 했으나 실패했다고 하는 등 기독교로 전파시키는데 애를 먹었다.

이후 964년 올가는 섭정 자리에서 물려나 전권을 아들 스뱌토슬라프에게 넘겻고, 스뱌토슬라프는 아버지 이고리가 그랬던 것처럼 주변국을 침공했다. 그의 치세는 오직 전쟁뿐으로 친정을 하기 전부터인 950년부터 군권을 행사했다. 즉위 후 하자르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당시 키예프 루스의 주요한 자금 수입원은 볼가 강 무역로의 관세였는데, 볼가 강 하류를 하자르 칸국이 장악해서 무역로가 통제받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아예 하자르 칸국의 수도 이틸이 볼가 강과 바다가 맞닿는 곳에 있었을 정도. 그래서 그는 즉위 직후에 볼가 강으로 가서 그 곳의 슬라브 부족인 브야티치인들을 정벌했다.

브야티치인들이 하자르 칸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이다. 브야티치인들의 땅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후 965년, 하자르 칸국과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했다. 아랍 쪽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에 먼저 볼가 강 중류에서 상인들을 위협하던 볼가 불가르부터 박살냈다고 한다. 볼가 불가르를 혼쭐낸 그대로 볼가 강을 타고 남하하며 하자르 칸국의 도시들을 휩쓸어 버렸다. 트무타라칸, 사만다르와 사르켈이 무너지고 969년에 하자란이 뚫린 뒤 수도 이틸이 무너졌다. 하자르 칸국은 이 전쟁 이후 더 이상 카간국을 칭하지 못 하고 소국으로 전락해 명맥만 간신히 잇게 되었다. 수많은 하자르인들이 죽거나 루스인들에게 사로잡혀 동로마나 아랍에 팔려갔다. 볼가 강 무역로와 강변은 완전한 키예프 루스의 것이 되었다. 사르켈이 있던 터에 신도시 벨라야 베자를 건설한 후 돌아가는 길에 브야티치인들을 다시 공격해 완전히 복종시켰다.

967년 동로마 황제였던 니케포루스 2세는 귀족 칼로키로스를 스뱌토슬라프에게 사절로 보냈다. 금 1만 5천 파운드를 줄 테니 불가리아를 공격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968년 페체네그족을 불러모은 뒤 도합 6만 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불가리아로 남하했다. 불가리아군은 두드려 맞다가 도로스톨론에서 루스에게 완패하고 완전히 국력을 상실했다. 노년에 루스군에게 스트레스를 과하게 받은 불가리아 차르 페터르 1세는 뇌졸중으로 죽어버리고 보리스 2세가 즉위했으나 상황이 나아지기는 커녕 970년에 수도 프레슬라프가 함락당했다. 차르 보리스 2세는 붙잡혔고, 전리품마냥 보리스 2세를 자신 곁에 데리고 다녔다. 불가리아 전역이 루스에게 점령당하고 불가리아 제1제국은 껍데기만 남아 키예프 루스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키예프 루스가 승기를 잡자 동로마 제국의 니키포로스 2세는 처음에 약속했던 대로 불가리아 땅을 넘길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단숨에 이를 거절했다. 그 이유는 첫 번째로는 동로마가 약속한 금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며 두 번째로는 스뱌토슬라프 1세가 불가리아 땅에 반해서 이 곳에 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니키포로스 2세는 페체네그족에게 금을 보내 루스 본토와 키이우를 공격해 줄 것을 부탁했다. 968년, 키예프 전투가 일어나 페체네그족은 단숨에 키이우를 포위했다. 늙은 키예프의 올가가 직접 키이우 방어군의 지휘관으로 나섰다. 이때 운좋게 이사실을 알게 된 스뱌토슬라프는 군대를 키예프로 회군시켜 페체네그족을 격퇴해 키예프를 구원한다.

이후 스뱌토슬라프는 불가리아 땅의 페레야슬라베츠로 천도할 것을 발표했다. 천도 이유는 페레야슬라베츠와 불가리아 땅이 키이우보다 훨씬 풍요로우며 약탈할 대상들도 가까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키예프의 올가는 자신이 쇠약한데 가기는 어딜 가냐며 자신이 죽은 뒤에나 천도할 것을 부탁했다. 이에 스뱌토슬라프가 천도를 미뤘는데 이 말을 한 3일 후 올가가 사망했다. 스뱌토슬라프는 어머니를 사랑했기에 본인은 기독교를 싫어했지만 어머니는 기독교식 장례를 치러 드렸다. 어머니가 죽은 후 스뱌토슬라프는 루스 땅을 그의 아들들에게 분봉해주고 자신은 페레야슬라베츠로 천도했다.

아예 스뱌토슬라프 1세가 불가리아에 수도까지 세워 버리자 동로마 제국은 전쟁을 벌일 결심을 굳혔다. 이후 키이우를 구원하러 돌아갔을 즈음에 니키포로스 2세가 살해당하고 요안니스 1세가 즉위했다. 970년 봄에 불가리아 잔존 세력을 정리하고 일전에 사절로 왔었던 칼로키로스를 동로마 제국의 황제라고 선포한 후 불가리아인들과 마자르인들까지 동원해 동로마 제국 수도권을 대대적으로 침공했다. 트라케가 삽시간에 박살나고 필리포폴리스가 공격당했다. 요안니스 1세는 아나톨리아에서 죽은 아내 마리아의 오빠인 바르다스 스클리로스와 환관 페트루스 포카스에게 지휘권을 맡겼다. 바르다스가 이끄는 제국군의 규모는 1만 2천 명 가량이었다. 바르다스 스클리로스는 아드리아노플로 진군한 후 적이 다가오자 천천히 퇴각하면서 마치 싸우기를 두려워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한편, 그는 요안니스 알라카스 파트리키우스에게 기병대를 맡겨 적을 유인하는 미끼로 삼았다. 루스군이 기세를 올려 추격에 나서자, 기병대는 퇴각 속도를 높혔다. 루스군은그들을 추격하다가 아르카디오폴리스에서 제국군의 매복에 걸려들었다.

이후 치열한 혈전을 벌이면서 전장에서 탈출한 스뱌토슬라프는 불가리아로 귀환한 후에도 쟁을 그만두지 않고 계속 동로마를 위협했다.

이 때 동로마에서 바르다스 포카스의 반란이 일어나서 바르다스 스클리로스는 포카스를 상대하러 아나톨리아로 넘어갔고, 그 대신 요안니스 1세가 친정을 준비했다. 971년, 요안니스 1세는 환관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와 함께 5,000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엄청난 속도로 산악 지대를 돌파해 4월 13일에 페레야슬라베츠를 기습했다. 루스 수비대 8천 명이 있었으나 깜짝 놀라 성문을 닫지도 못 했다. 바람처럼 페레야슬라베츠 성벽을 돌파한 제국군은 루스인들이 도망친 궁전에다 불을 질러 루스인들을 몰살했다. 보리스 2세도 여기서 제국군에게 잡혔다. 요안니스 1세는 자신을 불가리아의 해방자로 선전했다. 이에 깜짝 놀란 스뱌토슬라프는 페레야슬라베츠로 진군하려 했으나 요안니스 1세가 먼저 움직여 루스군을 몰았다. 이에 인근 도시 도로스톨론으로 들어갔으나 그 곳에서 포위당했다. 4월 23일에 시작된 도로스톨론 포위전은 몇 번의 포위망 돌파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결국 항복하였고 끝이 났다. 양국은 971년 7월 23일, 평화 협상을 맺었다. 조약은 아래 다음과 같았다.
1. 키예프 루스동로마 제국은 다시 우호 관계를 맺는다.
2. 키예프 루스는 다시는 동로마 제국을 침범하지 않는다.[4]
3. 키예프 루스는 불가리아 지역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
4. 키예프 루스는 사로잡은 모든 로마인과 불가리아인 포로들을 송환한다.
5. 키예프 루스는 다시 동로마와의 무역통상을 허가받는다.
사실상 스뱌토슬라프 1세의 패배였다. 스뱌토슬라프와 루스 군대는 불가리아와 루스 국경 즈음에 있는 베레쟌 섬으로 안전하게 퇴각하도록 약속받았다. 스뱌토슬라프의 꿈이었던 불가리아 땅을 잃은 채, 스뱌토슬라프와 루스 군대는 회군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요안니스 1세는 스뱌토슬라프가 보통 걸물이 아니라고 느꼈고, 스뱌토슬라프가 언젠가 다시 동로마를 위협할 것이라 판단한 요안니스 1세는 계략을 꾸몄다. 페체네그족에게 다시 뇌물을 먹여 루스 군대를 기습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페체네그족 카간 쿠랴는 이를 수락했고, 키예프로 가는 길목중 하나인 드네프로 강 주변에 병력을 매복시켰다.

이를 모르던 스뱌토슬라프는 드네프로 강을 통해 키예프로 귀환하지만 오랜 시간을 스뱌토슬라프와 함께 해 온 스베날드르 공작은 대공의 안전을 위해 미리 첩보를 보냈고, 그 결과 수상한 페체네그족들이 드네프르 강 주변에 엄청나게 모여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스베날드르는 이를 대공에게 보고하며 육로로 가자고 제안했으나, 스뱌토슬라프는 드네프르 강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한참을 설득해도 대공이 듣지를 않자, 스베날드르는 스뱌토슬라프에게 허락을 받고 군대를 나누어 육로로 먼저 출발했다.

그 후 스뱌토슬라프는 함대를 꾸려 972년 봄에 드네프르 강에 들어섰다. 하지만 정말로 스베날드르가 말한 것처럼 함대의 양옆 강변에서 페체네그족이 출몰했다. 대공과 루스 군대는 분투했으나 숫자로 보나 지형으로 보나 이길 수가 없는 전투였고, 결국 스뱌토슬라프 1세는 드네프르 강에서 활을 맞아 전사했다. 그를 따르던 루스 군대도 거의 몰살당했다. 쿠랴 카간은 전투 후에 스뱌토슬라프의 시신을 찾아 목을 베고 두개골을 발라내 술잔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후 키예프 대공에 오른 장남 야로폴크 1세는 조모인 올가 밑에서 양육되었기에 기독교에 친화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스뱌토슬라프가 불가리아를 차지한 후 아들들에게 루스 땅을 분할했는데, 야로폴크는 장남답게 키이우와 루스 남부의 주요 영토를 받았고, 차남인 올레그 스뱌토슬라비치는 키예프의 올가가 개척한 브루치와 옛 드레블랴인들의 땅, 삼남인 블라디미르 1세는 본래 고려 대상이 아니었으나 노브고로드 사람들이 자신듫에게도 크냐지를 보내달라면서 블라디미르를 지목했기에 노브고로드와 루스 북부 일대를 받았다.

초기에는 분제가 없었으나 오해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말미암아 세형제는 사로간 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발단은 그 발단은 놀랍게도 스베날드르 장군이었다. 스베날드르는 이 시점에 루스 최고의 권신으로 발돋움했으나, 정작 그의 원래 영지였던 드레블랴인 지역은 올레그 공작에게 빼앗겨버린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973년에 스베날드르의 아들 루트 스베넬디히가 올레그의 영토에 들어가 멋대로 사냥을 벌였다. 정치적 상황을 보았을 때 이는 분명한 루트 또는 스베날드르의 도발이었다. 올레그는 즉각 대응해, 루트를 잡아다 죽여버렸다. 이에 스베날드르는 야로폴크 1세에게 가서 올레그를 모함하고 전쟁을 선동했다. 야로폴크 1세는 막상 동생과 일전을 벌여 그를 죽이는 것이 부담되었는지 처음에는 전쟁을 거부했으나 스베날드르의 2년간에 걸친 설득 끝에 결국 975년, 브루치로 출병을 결단했다. 올레그는 야전을 결단했고 브루치 성 앞으로 나아가 싸웠다. 전투에서 올레그의 군대는 참패했고 병사들은 다급히 브루치 성 안으로 도망치려 시도했다. 올레그는 성으로 들어가는 다리를 막고 군대를 수습하려 했으나 인파에 떠밀려 다리에서 떨어져, 해자로 추락해 사망했다. 브루치는 즉각 야로폴크 1세에게 항복했다. 야로폴크 1세는 우선 동생부터 확보하려고 수색대를 꾸렸는데 며칠 간 찾아내지 못 했다. 수색은 어느 현지인이 전투 때 올레그 공작께서 다리에서 떨어지는 걸 보았다는 증언이 나오면서 멈췄다. 해자에서 동생의 시체를 찾아낸 야로폴크 1세는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그러고는 스베날드르를 돌아보며
자, 이것이 당신이 원했던 거요!
이라고 일갈했다. 올레그를 브루치 성에 장사지낸 후 야로폴크 1세는 키이우로 돌아갔다.

이 때, 큰형이 둘째 형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셋째 블라디미르 1세는 즉각 노브고로드에서 도망쳐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망명한 것으로 보인다.때문에 야로폴크 1세는 얼떨결에 북부 지역 통제권까지 얻었고, 3년간 평화로운 통치를 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스베날드르가 죽었고, 스베날드르의 자리는 다른 귀족 블루드가 차지했다. 하지만 978년, 블라디미르 1세는 엄청난 수의 바랑인 군대를 이끌고 노브고로드로 귀환했다. 그가 돌아오자 노브고로드와 일대의 통치권은 즉각 블라디미르에게 돌아왔다. 블라디미르 1세는 이제 대놓고 야로폴크 1세와 전쟁을 시작했다. 그는 야로폴크 1세의 지지자 폴로츠크 공작 바이킹계 바랑인 귀족 라그볼로드를 회유하기 위해 그의 딸인 라그네다에게 청혼했다. 이에 야로폴크 1세도 전략적 이유로 그녀에게 청혼했다. 라그볼로드 공작은 그녀의 딸에게 누구와 결혼하고 싶은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라그네다는
종년의 자식의 신발을 벗겨줄 순 없으니[5] 야로폴크 대공과 결혼해야지요.
라고 대답했다. 내심 야로폴크 1세를 지지하던 라그볼로드는 이를 수긍한 후 블라디미르에게 전령을 보내 딸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이러한 모욕적인 언서를 들은 블라디미르는 플로츠크를 쳐 무너뜨리고 키이우로 진군했다.

야로폴크 1세는 블루드를 믿고 싸우려 했으나, 사실 블루드는 일찌감치 블라디미르 1세와 밀약을 맺어놓은 상태였다. 블루드는 최근 키이우의 민심이 블라디미르 1세에게 기울어 여기서 싸웠다간 백성들이 성문을 열 수 있다며, 인근에 있는 작지만 튼튼한 요새 로덴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야로폴크 1세는 이에 따랐다. 곧 블라디미르 1세가 당도해 키이우에 무혈입성하고 로덴을 포위했다. 작은 요새 로덴은 물자 비축량이 많지 않아 금세 기근 상태에 빠져버렸다. 상황이 악화되고 야로폴크 1세가 근심에 빠지자 블루드는 블라디미르 1세와 협상에 나설 것을 제안했다. 야로폴크 1세의 친구이자 충신인 바랴즈코는 분명히 계략이고 협상장에 갔다가는 죽을 거라며 대공을 말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키이우로 갔다. 6월 8일에 야로폴크 1세가 키이우 궁전에 들어서자, 블라디미르 1세는 우선 궁전을 봉쇄한 후 3일 간 형에게 큰 연회를 베풀며 안심시켰다. 그리고 6월 11일, 블라디미르 1세는 전사 둘을 보냈다. 두 전사는 야로폴크 1세를 기습해 가슴을 칼로 찔러 죽여버렸다.

승자가 된 것은 블라디미르 1세는 키예프 루스의 대공이 되었다. 블라디미르 1세는 키예프 대공에 오른 초기만 하더라도 슬라브 신앙을 믿었고, 실재로 즉위 직후 키예프에 슬라브 신들판테온을 지었고, 또한 인신공양 제사도 주관했으며 이 시기엔 첩도 수백명을 두었다고 한다.하지만 987년 돌연 기독교로의 개종을 선언했다. 《원초 연대기》에 의하면 블라디미르는 개종을 선언하면서 어떤 종교가 자신과 루스에게 가장 좋을지 회의를 열었다. 블라디미르 1세가 후보군에 올린 종교는 가톨릭, 정교회, 이슬람, 유대교였다. 여기서 가톨릭은 중심지가 너무 먼 데다 교황의 간섭이 강제된다는 것이 별로였고, 유대교는 믿는 민족이 멸망한 걸 보니 효험이 의심되는데다가 루스인과 대판 싸웠던 튀르크계 하자르인들의 국교였다는 것이 별로였으며, 이슬람은 루스인의 필수품이었던 돼지고기를 못 먹는다는 교리가 너무 치명적이라 탈락했다고 한다. 반면 정교회는 블라디미르 1세가 만난 신학자들이 인상깊었던 데다가 동로마 제국하기아 소피아에 다녀온 사절들이 정교회 사원은 여기가 천국인지 지상인지 구분도 안 될 정도로 아름답다고 증언하자 정교회를 채택했다고 한다. 이 중 유대교는 정말로 검토했는지 다른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정교회와 이슬람에 대해선 실질적으로 관심을 보인 흔적이 있다. 중앙아시아의 의사 겸 작가 알 마르와지는 10세기 후반에 블라디미르라는 이름의 북쪽 야만인 왕이 호라즘 지역에 사절 넷을 보내 이슬람에 관심이 있으니 이맘을 보내달라고 청했다고 기록했다. 실제로는 종교 선택 회의가 있었다고는 해도 루스인들의 전적상[6] 정교회를 내정해놓고, 보여주기식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개종 타이밍은 동로마 제국의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로마 황제는 로봇마냥 국정만 돌본 황제로 유명한 명군 바실리오스 2세였다. 986년에 로마 귀족 바르다스 포카스가 황제를 상대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바르다스는 동로마 제국의 군사 중심지이던 아나톨리아 반도를 모조리 장악하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군했다. 곤경에 빠진 바실리오스 2세는 황급히 병력을 데려올 만한 곳을 찾았는데, 눈에 띈 곳이 바로 키예프 루스였다. 바실리오스 2세는 루스에게 동맹을 맺고 자신을 좀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이에 블라디미르 1세는 바실리오스 2세에게 제국 황녀와의 결혼을 대가로 요구했다. 바실리오스 2세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당시 황녀는 바실리오스 2세의 여동생 안나[7]포르피로게니타[8]였다.

일전에 바실리오스 2세의 할아버지 콘스탄티노스 7세포르피로게니투스는 어떤 외국인에게도 결혼시키면 안 된다고 규정했는데[9], 실리주의자 바실리오스 2세에게 그런 건 없었던 모양이다. 덕분에 989년, 바실리오스 2세는 블라디미르 1세에게 받은 군사 6천 명으로 아비도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둬 바르다스 포카스를 죽이고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이 병력은 후일 바랑인 친위대의 직접적인 기원이 된다. 하지만 막상 황녀를 루스에 보내려니 찝찝해진건지 바실리오스 2세는 결혼 문제를 미적거리기 시작했는데, 이에 분노한 블라디미르 1세는 크림 반도의 동로마 도시인 케르손을 쳐서 함락시켰다. 그러자 바실리오스 2세는 결혼을 진행시키기로 했고, 안나는 그 대신 남편이 될 블라디미르 1세의 개종을 요구했다 이에 마침 개종하려고 했던 블라디미르 1세는 단박에 정교회로 개종했다. 세례명은 바실리오스 2세에게서 따와 '바실리오스'로 했다.

안나와 결혼한 블라디미르 1세는 자신이 세운 슬라브 신화 만신전을 파괴하고, 슬라브 신화의 신상들을 모조리 부수거나 강에 던질 것을 명령한 후[10] 나라 곳곳에 성당을 세웠다. 그 후 989년에 전 루스의 개종을 선언했다. 그리고 모든 루스인들에게 성당으로 가서 세례를 받을 것을 명령했다. 키예프 사람들은 고분고분하게 따랐으나 블라디미르 1세의 외삼촌 도브리냐가 다스리던 노브고로드에선 개종 거부 폭동이 발생했다. 이때 바랑인 기독교도 페오도르와 요안이 폭도들에게 살해당했는데 이들은 훗날 최초의 루스인 순교자로 인정되었다. 키예프에 대교구가 설치되었고 노브고로드, 체르니히우, 페레야슬라블 등에도 교구가 설치되었다.

아울러 외치 또한 방관하지 않았는데 981년폴란드미에슈코 1세와 전쟁을 벌여 프르셰미슬 일대를 장악했고, 볼가 강 일대의 슬라브계 브야티치족들을 다시 공격해[11] 공물을 받아냈으며 983년에는 발트족의 일파인 야트빙거족들을 정복하고 발트 연안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984년에는 드네프르 강 상류의 슬라브계 라디미치족들[12]를 쳐서 복속시켰다. 985년에는 볼가 불가르와 전쟁을 개시해 그들을 제압하고 루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화의를 맺었다. 그리고 그대로 볼가 강을 타고 남진하여 일전에 스뱌토슬라프 1세에게 공격당한 후 남아있던 하자르 칸국의 잔당들을 공격해 루스의 속국으로 삼았다. 992년에는 카르파티아 산맥 일대를 공격해 백크로아티아인들을 복속시키고, 최초로 카르파티아 산맥을 루스의 영토로 만들었다.

반면 페체네그족을 상대로는 끊임없이 방어해야 했다. 콘스탄티노스 7세에 의하면 페체네그족드네프르 강의 지류 근처로 움직이며, 키예프로 말을 달리면 하루 만에 가는 거리 즈음에서 배회하면서 루스를 위협했다고 한다. 또 암살당한 맏형 야로폴크 1세의 친구이자 충신이었던 바랴즈코도 페체네그족으로 망명해 끊임없이 페체네그족을 선동했다. 블라디미르 1세는 페체네그족을 상대로 여러 번 패배했고, 지긋지긋한 페체네그의 공격을 막기 위해 드네프르 강변에 장성을 건설하고 그 사이사이에 많은 군사기지를 건설했다. 이후 997년에는 페체네그족 족장 쿠추그를 복속시켜 기독교로 개종시키는데 성공한다.

또한 평화적으로 외교 역시 많이 했는데, 정교회의 본산이었던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이어가기는 했지만 서방 교회의 본산인 로마 교황청헝가리 왕국의 성 이슈트반 1세, 보헤미아 공국의 경건공 볼레스와프 2세, 폴란드 왕국의 용감공 볼레스와프 1세와도 교류를 했다.

내치 역시 동방 정교회로 개종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문물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여 키예프 루스의 내치를 발전시켰는데 988년 수많은 아들들을 키예프 루스 전역에 분할 분봉시켜 이후 중기에 발생하는 내전의 씨앗을 뿌리고 만다.

기독교 개종 후 990년대 초반에, 블라디미르 1세는 보야르[13]들과 포사드니크[14]들을 모아서 평의회를 열었다. 여기서 10진법에 기반한 새로운 행정 및 군사 체계를 조직했고, 《교회 헌장》을 제정해 교회의 권한도 정했다. 법도 다듬었는데, 고대 슬라브인의 관습법인 '비라'를 명문화한 후 동로마 제국의 로마법을 대대적으로 도입했다. 그 후 로마법을 기반으로 비라 법을 섞어[15] 키예프 루스 국법을 완성했다. 따라서 키예프 루스도 이제부터 로마법을 따르는 국가가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무역을 크게 진흥시켰으며, 원래 동로마의 솔리두스화나 이슬람의 디르함화를 받아 쓰던 키예프 루스에서 최초로 화폐를 발행했다. 금화와 은화 두 종류를 발행했으며 금화는 '즐라트크', 은화는 '스레브레니크'로 불렀다. 동로마 제국의 화폐와 거의 비슷한 디자인이었으나 그리스식 복식을 입은 블라디미르 1세의 모습과 블라디미르 1세의 이름을 넣어 발행했다. 아쉽게도 당대의 국제 화폐였던 솔리두스와 디르함에 밀려 블라디미르 1세 사후엔 추가로 발행되지 못하고 금세 사라졌다.

기독교의 도입과 함께 블라디미르 1세는 문맹 퇴치 정책을 추진했다. 사람들이 성경 정도는 읽을 줄 알아야 신앙 생활을 하기 좋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아토스 산 출신의 불가리아인 수도자들을 불러들여 귀족 아이들을 교육하게 했다. 이 정책의 결과는 블라디미르 1세 사후부터 러시아 문학이 꽃피는 것으로 드러난다. 또 다른 기독교와 관련된 정책은 복지 정책이었다. 블라디미르 1세는 자선 활동을 통해 기초적인 복지를 실현했다. 매주 일요일마다 대공 자신의 돈으로 축제를 베풀었고, 빈민들에게도 빵, 고기, 야채, 꿀, 술 등을 수레에 실어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성당을 세우면서 조모 키예프의 올가가 시작한 석조 건물 건축을 계속 진행한 것은 덤으로 화려한 성당을 위시로 한 여러 석조 건물이 루스 곳곳에 세워졌다.

6. 몰타

몰타 역시 5세기 서로마 제국이 붕괴한 뒤, 6세기 동로마 제국이 다시 섬을 점령했으나 이후 사라센 해적들의 공격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그러다가 870년에는 이슬람 세력 중 하나인 아글라브 왕조에 점령당했다. 이후 많은 아랍인들이 해적 기지 삼아 섬에 정착했다. 마요르카 섬을 비롯한 발레아레스 제도의 경우에도 서러모 령이었으나 461~468년 사이에 반달족들에게 점령되어 533~534년 동안 지배를 받다가 이후 동로마의 벨리사리우스에 의해 동로마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 1세 말기에 닥친 전염병과 7세기 중반 사산 왕조와의 전쟁. 9세기 전후로 남쪽으로 이슬람의 발호와 함께 카르타고와 이집트, 팔레스타인 지역이 넘어가면서 통제권이 약해지다가 707년 우마이야 왕조에 점령되지만 자치권만큼은 인정받게 되었다. 그너나 9세기 중엽 지중해 방면으로 세를 확장하는 바이킹들의 약탈을 피하지 못했으며 902년에는 해적들의 본거지가 되자 이를 빌미로 코르도바 토후국에 점령된다.

7. 기타

그리고 이 시기에는 의회와 같은 의결 및 심의 기구의 기초가 생기기도 했다. 이는 당시 원로원이 있던 로마인들뿐만 아니라 게르만/노르만, 슬라브 모두가 팅그(thing), 두마 혹은 베체라 불리는 평의회가 있었다. 두 평의회 모두 기본적으로 싸울 능력을 갖춘 자유민 남성들만 참석이 가능했다. 우선 게르만족의 팅그 혹은 알싱크의 경우 게르만족들이 서로마 제국 곳곳에서 자신들의 왕국을 세운 후에 크게 변천을 겪게 된다.

잉글랜드의 경우 7세기 경에 기존의 팅그가 위테나예모트로 바꿔졌으며, 기독교화가 진행되면서 주교 또한 위테나예모트의 일원을 참석할 권한을 갖게 되었다. 프랑크 왕국에선 754년 제국의회의 전신이었던 제국회합이 처음으로 문헌에 등장했고, 카롤루스의 프랑크 제국이 그의 손자들 대에서 셋으로 분할되면서 궁극적으로 독일의 전신이었던 동프랑크 왕국이 제국회합의 정통성을 거머쥐게 된다.
슬라브족의 경우 루스계 바이킹이었던 류리크가 세운 키예프 공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바이킹을 구성하던 노르드족들 또한 평의회인 팅그가 있었기에 슬라브족들의 평의회인 베체와 섞이게 된다. 이밖에도 930년 건국된 아이슬란드 연방은 알팅그를 정치주체로 하는 여러 부족들로 구성된 연방제 국가였다.

한편 자치 도시의 경우 서로마 제국의 붕괴 후 백년 전 먼저 공화제로 건국되었던 산 마리노처럼 도시 국가로 독립할 여건이 되었으나 도시의 유력자들이 도시 밖에 있단 자신들의 소유인 대농장과 그곳에 딸려 있던 요새로 피신하는 것을 택하는 등 큰 공백이 생겼다. 본래 서로마 재국이 붕괴되기 이전까지만 공화정부터 시작한 이래로 고위 관리들을 명예로운 경력이라 무임금에 기초한 선출직으로 운영되었으며, 이는 자치 도시라 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때문에 자치 도시 내의 자산가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도시의 고위 관리로 선출되려고 기를 썼다.

하지만 서로마 제국이 붕괴되면서 이러한 메리트가 사라지면서 유력자들은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는 것을 포기한체 도시 밖으로 피신하게 되자 그빈자리를 교회가 대신 매꾸기 시작했다.교회는 십일조 등의 다양한 경로로 얻은 교회 자금을 바탕으로 도시 내의 사법권과 행정권을 행사하게 되면서 도시의 통치권은 주교들이 갖게 되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로마 또한 로마 총대주교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게 된다.

이후 교회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게르만족 군주들에게 가장 중요한 정치적 파트너로 자리매김하게 되나 도시의 경우 라벤나 총독부의 함락 이후 우연치 않게 독립한 베네치아를 제외하면 주교의 통치를 받게 되며, 주교좌가 도시에 설치되었기에 12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도시는 주교가 통치하는 곳으로 인식하게 된다.
외교적으로 중세 초기인 5~11세기까지만 해도 서유럽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 잔존하고 있던 상태였다. 비록 동로마 제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게르만족계 국가들도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그대로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때문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성립된 오도아케르의 왕국 또한 서로마 제국의 제관을 콘스탄티노풀로 보낸 후 동로마 제국에게 왕국으로 인정받았으며, 동로마 제국과 인접한 나라들도 동로마 황제에게 자세를 낮추는 대신 동로마 황제는 이들에게 바실레우스 칭호를 허락하는 유연한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이런 동로마 황제의 권위에 의구심을 갖는 국가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8세기를 기준으로 카롤루스 왕조 하의 프랑크 왕]의 서유럽 제패와 함께 피핀 3세의 기증으로 이탈리아 중부에 교황령이 성립이 되면서 정치 지형에 변화가 생긴다.

우선 콘스탄티누스 1세의 콘스탄티노풀 천도 이후 5세기를 전후로 삼위일체를 정통 교리로 삼은 기독교는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교회와 콘스탄티노풀을 중심으로 한 동방교회로 교리 문제 등으로 분열해가고 있었다. 더욱이 서로마 제국의 붕괴 후 로마를 장악한 로마 총대주교를 비롯한 서방 교회의 성직자들이 무정부상태가 된 자치 도시의 통치권을 장악하면서 동방 교회뿐만 아니라 동로마 황제하고도 점차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그러다 8·9세기에 걸쳐 두 차레의 성상 파괴 운동과 그리고 랑고바르드 왕국이 동로마 제국의 라벤나 총독부를 점령하는 등[16] 로마가 위치한 중부 이탈리아로 진출한 야욕을 보이자 로마 총대주교였던 자카리아는 당시 메로비로스 왕조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새로운 프랑크의 국왕 피핀 3세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랑고바르드 왕국을 공격하게 해 랑고바르드 왕국이 점령하고 있던 라벤나 총독부까지 랑고바르드 왕국으로 부터 빼았아 라벤나 총독부를 로마 총대주교에게 넘기면서 754년 자카리아의 후인 총대주교였던 스테파노 2세가 피핀 3세를 정식으로 프랑크의 국왕으로 인정해줬고, 이에 대한 답례로 피핀 또한 두번째 기증을 하면서 교황령이 성립된다.

교황령을 바탕으로 9세기 중반에 걸쳐 동방 교회를 비롯한 동로마 제국과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고, 급기야 800년 카롤루스 1세를 로마로 초청해 서로마 황제의 제관받아들이면서 811년까지 서로마 제국을 칭하는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으로 이어질 정도였다.이후 동로마 제국의 우위를 인정하고, 동로마 제국 또한 샤를마뉴에게 그냥 바실레우스 칭호를 인정할 수준으로 유야무야 넘어가게 되며 이슬람 세력과도 대립과 공존이라는 아슬아슬한 줄다리기하는 등 국제정세가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카롤루스 사후 손자대에 프랑크 왕국은 세개로 분열한 후 북쪽으로 바이킹과 동쪽으로 마자르족들의 침략을 받게 되며 남쪽으로 이슬람 해적들에게 시달리는 상황이 더 심화되며 동로마 제국 또한 발칸반도로 진출한 슬라브족들과 불가르족들의 침략에 시달리게 되었고, 특히 불가리아의 시메온 1세가 자신을 불가리아인과 로마인의 황제를 자칭하는 등 유일한 로마 황제로서의 권위를 위협받게 된다.


[1] 브리튼 남부·이베리아 반도·이탈리아 반도 및 알프스 이북과 라인강 동부 너머와 남독일 및 오스트리아·판노니아 평원 일대[2] 대표적인 예가 수아송 왕국이다.[3] 추방된 에이리크 1세는 데인족이 장악한 잉글랜드의 노섬브리아에서 왕위에 올랐으나 잉글랜드 왕 에드래드의 공격을 받아 도망쳐야 했다. AD 952년 다시 노섬브리아의 데인족의 요청에 따라 다시 왕위에 올랐지만 AD 954년 잉글랜드의 에드래드에게 다시 축출당한 후 스테인모어에서 살해당한다.[4] 여기엔 동로마 본토 뿐만 아니라 루스가 일상적으로 약탈하던 크림 반도의 케르손 일대도 포함되었다.[5] 당시 루스의 결혼식 풍습으로 첫날밤에 아내는 엎드려 남편의 왼쪽 신발을 벗겨준 후 신발에 이마를 문질렀다. 남편은 아내를 가볍게 때린 후 오른쪽 신발을 벗고 자신의 겉옷을 아내에게 덮어주었다.[6] 이미 키예프의 올가, 야로폴크 1세 두 정교도 군주를 배출한 상태였던데다 정교도도 많았다.[7] 이 때 이미 독일 국왕 오토 2세와 서프랑크 국왕 로베르 2세의 청혼을 거부한 상태였다.[8] 포르피로게니투스의 여성형.[9] 동로마 제국은 제위의 여계 계승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포르피로게니투스를 외국에 넘기는 건 외국에 동로마 제위 요구자를 만드는 짓이었다.[10] 이때의 정황을 두고 제정 러시아와 소련 시절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서술이 엇갈린다. 제정 러시아 시절에는 모든 백성들이 기독교로의 개종을 기뻐하며 순순히 받아들였다고 서술한 반면, 소련 시절에는 백성들이 조상 대대로 믿어온 신들의 신상이 파괴된 것에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표현되어 있다.[11] 이미 스뱌토슬라프 1세가 두 번 공격한 적이 있는 부족이었다.[12] 노브고로드의 올레그가 공격한 적이 있는 부족이었다.[13] 키예프 루스의 공작, 백작과 같은 봉건 귀족.[14] 키예프 루스의 시장 직.[15] 비라법의 핵심은 살인을 사형이 아닌 벌금으로 다스리는 것이었다. 블라디미르 1세는 로마법에서 사형과 눈 뽑기, 거세 등 고문 종류를 들어낸 뒤 그 자리에 비라법의 벌금제도를 집어넣었다.[16] 이때 베네치아는 석호 한가운데 있었기에 랑고바르드의 침공에서 벗어났으나 로마와 마찬가지로 동로마 제국과 단절되면서 시민들 사이에서 지도자를 선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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