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파퀴딕 사건 Chappaquiddick incident | ||
▲ 사고 이후 사고 현장과 인양된 자동차의 사진 | ||
<colbgcolor=#000,#222222><colcolor=#fff> 일시 | 1969년 7월 18일 오후 11시 15분 ~ 7월 19일 오전 1시 30분 경[1] 사고일로부터 [dday(1969-07-18)]일, [age(1969-07-18)]주년 | |
위치 | ||
미국 매사추세츠 주 채퍼퀴딕 섬 다이크 다리 | ||
유형 | 운전자 과실로 인한 자동차 침수 및 동승자 사망 사고 | |
사고 차량 | 1967년형 올즈모빌 델몬트 88 | |
관련 인물 | 테드 케네디 미국 상원의원 메리 조 코페크니 여비서 | |
인명 피해 | 사망 | 1명[2] |
부상 | 1명[3] | |
영향 | 유력 대권주자였던 테드 케네디 상원의원의 향후 대권 가도를 불가능하게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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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9년 7월 18일 매사추세츠 상원의원이자 케네디 가문의 4남인 테드 케네디(에드워드 M. 케네디)와 여비서 메리 조 코페크니(Mary Jo Kopechne)가 타고가던 자동차가 바닷물에 빠져 코페크니가 사망한 사건. 사건이 발생한 장소인 매사추세츠 주 채퍼퀴딕 섬(Chappaquiddick island)[4]의 이름을 따 "차파퀴딕 사건"으로 알려졌다.사고 이후 테드 케네디 혼자만 빠져나와 생존했으며, 약 10시간 후 경찰에 의해 시신이 발견될 때까지 당국에 신고를 하지 않아 큰 논란이 되었다. 차량은 수심이 매우 얕은 곳으로 추락했고 사망한 메리 조는 차가 물에 빠진 후 30분에서 2시간 가량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케네디가 신고만 제대했었어도 생존했을 가능성이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정치사의 가장 큰 미스터리 중 하나로, 도대체 왜 테드 케네디가 경찰에 신고를 안 했는지, 어쩌다가 자동차를 바닷물에 빠트렸는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 있고 그와 관련된 책만 20권이 넘을 정도로 대중의 관심을 끌었으며 음모론도 많다.
테드 케네디가 여비서와 자신의 부적절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설, 자신의 음주운전을 감추기 위해 술 기운이 가라앉을 때까지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설, (테드 케네디 본인이 주장하듯) 사고 직후의 충격 때문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없었다는 설 등 많은 가설이 있다. 어느 쪽이 되었든 테드 케네디 본인의 과실로 여비서가 숨졌다는 점이 명확했고, 테드 케네디 본인의 해명에 의심스러운 점도 많았으며, 사고 후 처신에서도 부적절한 점이 많았기 때문에 유력 대권주자로 분류되던 테드 케네디의 대권 가도를 사실상 끝장낸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2. 사건 경위
2.1. 메리 조 코페크니는 누구인가?
로버트 케네디와 코페크니 |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하자 코페크니는 다른 민주당 정치인들의 선거운동 보좌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는 여러 정치인 캠프나 정치 컨설팅 회사를 전전했으나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몇 개월 단위로 짧게 이직을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테드 케네디와 친분이 있거나 그의 밑에서 일하지는 않았다.[6]
1969년 7월 18일부터 19일까지 테드 케네디는 에드거타운 요트 클럽 레가타 경주에 참여할 계획이었다. 이때 테드 케네디는 에드거타운 맞은 편에 있는 차파퀴딕 섬의 별장을 임대했고, 로버트 케네디 밑에서 일했던 보일러룸 걸스 6명을 여기에 초청하여 파티를 열었다. 메리 조 코페크니도 이 파티에 참석했다.
2.2.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이 사건을 일으킨 테드 케네디(Edward M. "Ted" Kennedy)는 당시 37세의 매사추세츠 주 연방 상원의원으로, 조지프 케네디의 유일하게 남은 아들이자[7]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유력 대권주자였다. 테드 케네디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과 비슷한 배경의 미국 북동부 상류층 자제들와 어울리며 함께 술을 마시고 파티하는 걸 좋아했다.테드 케네디는 1969년 7월 18일부터 이틀간 매사추세츠주 마서스 비니어드(Martha's Vineyard) 섬[* 마샤, 마사스, 마타스, 마샤스; 빈야드, 바인야드 등 아주 다양하게 표기되고 있다.)에 위치한 에드거타운(Edgartown) 및 마서스 비니어드 섬과 불과 수백 미터 거리에 있는 채퍼퀴딕(Chappaquiddick) 섬에서 요트 경기와 파티를 주관하였다. 테드 케네디는 1969년 7월 18일부터 19일까지 이틀간 에드거타운에서 가까운 친구들과 요트 경기에 참가할 계획이었고, 요트 경기가 열리는 양일 사이 밤에는 채쿼퀴딕섬에 임대한 외진 별장(코티지)에서 파티를 열 계획이었다. 테드 케네디는 자신의 형 로버트 케네디를 보좌했던 여비서 6명(보일러룸 걸스)을 파티에 초청했다. 메리 조 코페크니도 파티에 참석했다. 보일러룸 걸스 멤버들은 모두 20대 미혼녀들이었다. 또한 파티에는 테드 케네디의 가까운 친구들 및 운전기사 등 6명의 남성이 참석했다. 파티에 참석한 6명의 남성들은 모두 기혼이었다. 케네디와 그 지인들은 세간의 오해와 달리 부적절한 신체적 접촉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메리 조 코페크니는 술을 5잔이나 마셔 많이 취했다고 한다. 테드 케네디의 증언에 따르면 메리 조 코페크니가 테드 케네디에게 자신이 묵고있는 호텔로 데려다줄 것을 부탁했는데 테드는 이를 수락했고 7월 18일 오후 11시 15분 쯤 자신의 운전기사인 크리민스에게 차 열쇠를 요청하여 자신의 어머니 소유의 1967년형 올드모빌 델몬트 88 승용차를 몰고 별장을 떠났다. 테드 케네디는 평소에 운전기사에게 운전을 맡기고 자신이 직접 운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함께 파티에 참석했던 로버트 케네디의 다른 여비서들의 증언에 따르면 보일러룸 멤버들은 오랜만에 재회하게 되어 서로 매우 기뻐하고 반가워하였는데, 메리 조 코페크니는 돌아간다는 말도 없었다고 한다. 또한 메리 조의 지갑과 호텔 키 등 소지품들이 파티 현장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파티는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되었고, 메리 조와 테드 케네디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음날 새벽까지 파티에 있었다.
테드 케네디와 여비서가 탄 차의 운전 경로 |
메리 조 코페크니를 동승시키고 차를 몰고 나온 테드 케네디는 북쪽 길로 향했고 갈림길에서 그녀의 호텔이 있는 에드거타운으로 가기 위해서는 좌회전을 하여 페리 선착장으로 갔어야 했다. 그러나 테드 케네디는 갈림길에서 우회전을 했고, 차는 호텔의 정반대 방향을 향하게 되었다. 그렇게 가다가 별장에서 4km 정도 떨어진 차파퀴딕 섬 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나무로 만들어진 다이크 다리(Dike Bridge)에 도달하였다.
2.3. 자동차가 강물에 빠지다
차파퀴딕 섬의 동쪽 끝에 위치한 다이크 다리(Dike Bridge)는 나무로 만들어진 오래된 다리로, 시속 30킬로미터로 운전해도 다리가 크게 흔들릴 정도로 위태로웠으며 난간이 설치되지 않아 간혹 추락 사고가 일어나는 위험한 다리였지만 음주 상태였던 테드 케네디는 이에 대한 자각 없이 빨리 다리를 건너고자 했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케네디와 여비서가 탄 자동차는 차가운 바닷물 아래로 곤두박질 치고 말았다.대학교 때부터 풋볼 선수로 활약하였고 평소 운동을 즐겨 하던 케네디는 곧바로 헤엄쳐서 자동차를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메리 조 코페크니는 수영을 못했고 취해 있어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테드 케네디는 자동차에 바로 물이 들이찼고 코페크니가 물을 너무 많이 먹어 곧바로 익사했다고 생각했다고 증언하였다. 테드 케네디는 강둑에 걸터앉아 잠시 숨을 고른 후 7~8번이나 바닷물에 뛰어들어 코페크니를 구출하려고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 의하면 밤 1시였기에 물 속에 빠진 코페크니가 잘 보이지 않았고 유속이 1.5노트 가량으로 빨랐으며 물이 차가웠기 때문에 코페크니를 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4. 사고 이후 시신이 발견될 때까지 케네디의 행적
결국 테드 케네디는 사고가 벌어진지 약 15분 후 메리 조 코페크니 구출을 포기하고, 사건 현장을 이탈하여 파티가 열리던 별장으로 걸어 돌아갔다. 걸어 돌아가는 중 민가 4채와 비상 소방서가 있었으나 테드 케네디는 여기에 방문해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채 바로 별장으로 갔다.파티 현장에 도착한 테드 케네디는 다른 손님들에게 일절 사고를 알리지 않은 채, 조용히 최측근 2명을 불렀다. 그들은 조 가건(Joe Gargan)과 폴 마컴(Paul Markham)이었다. (국내 문서에는 가간, 가르건, 가르간; 마크햄 등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이후 이 두 사람은 이 사건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으며, 테드 케네디 이외에 이 사건에 대해 가장 많은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되었다.
조 가건(Joseph F. Gargan Jr. 1930 ~ 2017)은 테드 케네디의 이종사촌이다. 조 가건의 모친인 아그네스 피츠제럴드 가건의 친언니가 존, 로버트, 테드 케네디 형제의 모친인 로즈 피츠제럴드 케네디이다. 그는 6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6세 때는 아버지마저 사망하면서 고아가 되었다. 폴 가건은 아버지가 남긴 유산으로 대학을 진학하는데 문제가 없었지만, 6살 때 모친이 돌아간 이후, 큰이모였던 로즈 케네디가 죽은 어머니를 대신하여 그에게 신경을 써줬고, 이후 조 가건은 큰이모집에 정서적으로 애착을 가지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종사촌들 가운데서 나이 차이가 적은 테드 케네디와 매우 친해졌고, 이후 평생 테드 케네디의 최측근으로 일했다. 가건은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인 1952년부터 사촌형인 존 F 케네디의 상원의원 선거캠프에 합류하였고 이후 1960년 대통령 선거 때까지 사촌 형의 캠프에서 일했다. 이후 1962년 절친했던 테드 케네디가 정계에 진출하자 테드 케네디의 상원의원 선거캠프에 참여했다. 1968년에는 대선에 출마한 사촌형 로버트 케네디의 대선 선거캠프의 책임자(chairman)를 맡았다.
폴 마컴(Paul Francis Markham)은 테드 케네디의 동창으로 조 가건과 더불어 테드 케네디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다. 1963년 테드 케네디의 친형이자 현직 대통령이었던 존 F 케네디에 의해 연방검사(Assistant U.S. Attorney)에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출세길을 걷기 시작했다.
별장에 도착하여 가건과 마컴을 부른 테드 케네디는 여비서가 바닷물에 빠졌다고 도움을 청했다. 이 테드 케네디와 가건, 마컴 3인은 함께 렌트카를 타고 현장으로 갔다. 가건과 마컴은 3~4번이나 바닷물에 뛰어들어 여비서를 구하고자 했으나 테드와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이후 세 사람은 페리 선착장 부근으로 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 논의했다. 가건과 마컴은 경찰에게 신고해 시신을 인양해야 한다고 여러차례 주장했였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테드 케네디는 경찰 신고를 거부하였다. 대화가 진행되던 도중 테드 케네디는 물에 뛰어들며 현장을 이탈했고, 페리 선착장 맞은편에 있는 자신의 호텔로 150m를 수영하여 갔다. 그는 혼자 호텔로 걸어가 2시경부터 해가 뜰 때까지 잠을 잤다.
훗날 가건은 그날밤 페리 선착장에서 테드 케네디가 수영으로 에드거타운으로 건너간 것이 경찰에 신고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테드가 물에 뛰어들며 자리를 떠나자 가건과 마컴은 다시 렌트카를 타고 새벽 2시경 별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훗날 추가된 증언에 따르면 가건과 마컴은 사고를 신고할지 여부를 두고 30분 이상 차로 섬 주위를 돌면서 논의했다고 한다. 결국 별장에 도착한 가건과 마컴은 파티 손님들 아무에게도 사고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사건이 발견된 후 테드 케네디, 조 가건, 폴 마컴은 더이상의 구체적인 진술을 하지 않았다. 이들은 로스쿨 출신으로 변호사 자격증이 있었다. 테드 케네디는 자신이 변호사인 조 가건과 폴 마컴의 의뢰인이라 주장하였으며, 이에 따라 테드 케네디가 원하지 않는 내용이나 케네디에 불리한 내용을 조 가건과 폴 마컴이 증언하는 것은 변호사의 비밀유지의무 조항를 위반하는 위법 행위가 된다. 이에 따라, 경찰에 신고되어 시신이 발견되기 전 사건 현장에 있던 모든 당사자 및 증인인 테드 케네디와 조 가건, 폴 마컴은 불리한 모든 증언을 합법적으로 회피할 수 있었다. 그나마 가건과 마컴이 증언한 내용들은 주로 사건 당시에 이루진 것이 아니라 이후 수십년에 걸쳐 한두마디씩 추가로 증언한 것들이다.
호텔에 돌아가 잠든 테드 케네디는 아침 7시에 일어나 호텔 로비로 걸어 나왔고 7시 30분경 평소와 다름 없이 친구들과 잡담을 나누었다. 심지어 아침에 그는 친구들과 요트 경주 이야기를 하는 등 자신의 과실로 일어난 사고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오전 8시경 가건과 마컴이 페리를 타고 에드거타운에 도착하여 케네디와 만났다.
2.5. 시신의 발견
시신을 인양하는 소방대 소속 잠수부 |
오전 8시가 조금 지난 시각, 인근에 살던 한 남성과 15세 소년이 낚시를 하려다가 물속의 자동차를 발견하였고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오두막집을 찾아 8시 20분경 당국에 신고했다. 그로부터 10~20분 사이에 경찰과 소방대원들이 출동하여 현장에 도착했다. 8시 45분 스쿠버 장비를 갖추고 현장에 도착한 에드거타운 소방구조대의 잠수부 존 패러(John Farrar) 대위가 차량 속에서 메리 조 코페크니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시신 인양에는 총 10분 가량이 소요되었다. 경찰은 자동차를 인양한 후 자동차 번호판을 대조해 그것이 테드 케네디 어머니 소유의 자동차임을 확인하고 테드 케네디에게 전화를 걸어 경찰서로 출두하라고 명령했다.
발견 당시 차량은 아래위가 뒤집힌 채 전복된 상태였으나 수심이 얕아 뒷바퀴 등 차체의 일부가 수면 위에 나와 있을 정도였고, 경찰들이 잠수 장비 없이 맨몸으로 차량에 접근하여 차량 뒷범퍼 위에 걸터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 최초 발견 당시 차량과 시신의 위치 침수된 사고 차량의 뒷범퍼에 걸터 앉아 있는 도미니크 아레나 경찰서장
다이크 다리는 길이가 불과 20m 남짓에 불과한 짧은 다리였고, 난간에 남아 있는 바퀴 자국으로 볼 때 차량은 다리가 시작되는 초입에서 떨어져서 지면 내지는 수심이 얕은 바닥에 부딛히면서 전복된 것으로 보인다.
인양된 차량에서 로즈마리 키프(Rosemary "Crickett" Keough)라는 여성의 지갑이 발견되었고, 이로인해 처음에 경찰은 시신의 신원이 로즈마리 키프라고 여기게 되었다. 로즈마리 키프는 보일러룸 걸스의 또다른 멤버였다. 어째서 지갑이 해당 차량에서 발견되었는가에 대해서 로즈마리 키프는 파티 당일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개인적인 일로 해당 차량에 탑승했었다고 말했다.
한편 그 시각 테드 케네디는 가까운 지인 및 변호사 등과 공중전화(Payphone)로 사건의 수습을 논의했는데, 운전자가 자신이라는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경찰이 자신의 차와 코페크니의 시신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들은 테드 케네디는 마컴과 함께 9시 50분 에드거타운 경찰서에 출두했다. 같은 시각 가건은 보일러룸 걸스 멤버들에게 사건을 알렸다.
경찰서에 도착하자마자 테드 케네디는 전화를 좀 쓰겠다고 말했고, 경찰들은 현직 상원의원이자 유력 대선 후보인 테드를 서장실로 안내하여 자유롭게 전화를 사용하도록 했다. 서장실에서 테드 케네디는 지인들과 자유롭게 전화 통화를 할 수 있었다. 통화 후 테드 케네디는 서장인 도미닉 아레나에게 자신이 사고를 일으켰음을 시인했다. 경찰서장 아레나가 진술서를 작성했다. 테드 케네디는 마컴을 변호사 자격으로 함께 입회시킨 자리에서 진술서를 작성했다. 테드 케네디는 작성된 진술서의 내용을 인정했지만 서명은 거부하였다.[8] 게다가 진술서는 파티에 대한 언급도 빠져 있는 등 내용이 부실했다. 하지만 아레나 서장은 테드 케네디가 스스로 진술한 내용 이외에 어떠한 추가적인 질문도 하지 않았다.
테드 케네디가 경찰에 출두한 동안 테드 케네디의 친구들은 변호사와 케네디 가문의 가신들을 불러모아 어떻게 법정 대응을 해야 할지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테드 케네디는 경찰서에서 불과 수십분만에 나왔고, 정오에는 이미 섬을 벗어나기 위한 비행기에 탑승하고 있었다. 그리고 테드 케네디는 그길로 차파퀴딕섬 맞은 편 하이애니스(Hyannis)에 있는 가족 별장으로 이동했다. 케네디 가문의 가신들도 이 별장으로 모여들었다.
이후 코페크니가 왜 사망했는지에 대해 검시를 해야 한다는 반응이 있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지역 경찰은 코페크니의 시신에 대한 부검을 거부하고 그녀의 사인을 익사로 단정지었다. 불과 4일 후 코페크니의 장례식은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치러졌으며 코페크니의 사인은 영원히 알 수 없어졌다.
3. 사건 이후
3.1. 케네디 가문의 대응
사건 현장에 나타난 케네디[9] |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 아침 존 F. 케네디 시절부터 케네디 가문을 보필한 여러 인사들이 차파퀴딕섬 맞은 편 매사추세츠주 본토에 있는 작은 마을인 하이애니스(Hyannis)에 위치한 케네디 가문의 별장 저택으로 모여들었다. 정오가 조금 지났을 때 테드 케네디도 이곳에 도착했다. 이곳으로 모인 이유는 언론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어떻게 테드 케네디에 대한 사법적 심판을 회피하고 그의 정치적 커리어를 구출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케네디 자택에 모인 "변호인단"의 이력은 화려했는데 전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 뉴욕시립대 미국사학과 교수 아서 슐레진저, 케네디 행정부의 대변인이자 공보비서관, 전직 상원의원이었던 피에르 샐린저, 케네디의 연설 대필 작가인 테드 소렌슨, 케네디 형제의 일정 담당 비서관이자 1968년 로버트 케네디 선거캠프 선대위원장이었던 케네스 오도넬, 케네디 형제 특별 고문이자 연설 작가 리처드 N. 굿윈, 로비스트 겸 국제법 변호사인 밀턴 그워츠먼, 존 F. 케네디 선거캠프 선대위원장 스티븐 E. 스미스, 캘리포니아 주 하원의원 존 튜니 등 정부와 법원에서 활동하던 엘리트들이었다.
우선 그들은 테드 케네디가 최대한 사건을 회피할만한 알리바이를 만들어야한다고 주장했다. 테드 케네디는 이들의 조언에 따라 사건이 일어난 직후 호텔 로비를 서성이며 자신이 현장에 없었다는 증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아예 사고 자동차를 운전한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메리 조 코페크니였다는 알리바이를 만들자고 주장했는데 변호사들이 너무 막나간 주장이라며 테드 케네디의 제안을 거절했다.
케네스 오도넬, 테드 소렌슨, 스티븐 스미스 같은 연설문 대필 작가들은 테드 케네디가 유권자들에게 어떤 어조로 자신의 과실을 설명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했고 밀턴 그워츠먼과 로버트 맥나마라 등은 케네디가 감옥에 갇히지 않을 만한 절묘한 사법적 주장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했으며 자신이 알고 있는 언론사 사주와 매사추세츠 지역 경찰[10]에 연락해 최대한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 했다.
그럼에도 언론이 차파퀴딕 사건을 보도하고 논란이 크게 확산되었다.
사건 발생 약 일주일 후인 7월 25일 메사추세츠 지방법원에서 법정 심리가 열렸다. 테드 케네디는 임신한 아내와 함께 법원에 도착하였다. 심리에서 그는 사고 현장을 떠난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했다. 케네디의 변호사들은 집행유예를 주장했고, 매사추세츠주 검찰도 테드 케네디의 인성과 평판, 젊은 나이를 고려하여 집행유예의 선고에 동의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법정 심리는 10분만에 끝났다.
법정 심리를 마친 후 일주일간 침묵을 지키고 있던 테드 케네디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최고의 연설 작가들이 써 준 연설문 <차파퀴딕>을 생중계로 읽었다.
이러한 사건들, 이를 둘러싼 가십, 빈정거림, 안타까움, 그리고 오늘 아침 제가 유죄를 인정한 사실은 우리 매사추세츠 주의 주민들 사이에서 저의 지위가 손상되어 상원의원직을 사퇴해야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자아냅니다. 만약 매사추세츠 주민들 사이에서 정당한 이유가 없든, 있든 그들의 상원의원의 성격이나 능력에 대한 신뢰가 부족할 경우, 제 생각으로 그 상원의원은 자신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으며 직위에 남아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존 퀸시 애덤스, 대니얼 웹스터, 찰스 섬너, 헨리 캐벗 로지[11], 존 F. 케네디와 같은 위대한 상원의원을 선출한 주의 주민들은 최고로 위대한 상원의원들에 의해서만 대표되어야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제가 사임해야한다고 일부가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저는 이해합니다. 이것은 저에게 어려운 결정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매사추세츠의 상원의원으로 당선된지 7년이 지났습니다. 유권자 여러분과 저는 많은 추억을 공유합니다. 일부는 영광스러웠고 일부는 매우 슬펐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일하고 매사추세츠를 위해 제가 봉사할 수 있었던 기회는 제 삶을 가치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밤, 매사추세츠 주민 여러분에게 이 문제를 저와 함께 생각해보시길 요청드립니다. 이 결정을 앞두고 유권자 여러분의 조언과 의견을 구합니다. 여러분의 기도 역시 구합니다. 왜냐하면 이 결정은 결국 제 스스로 내리고 책임져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969년 7월 25일, 테드 케네디의 해명 연설문
이 해명 연설에서 테드 케네디는 일부 언론이 보도한 음주운전설 등의 의혹을 전면 부정했으며 자신이 여비서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하였다. 연설 끄트머리에서 자신이 상원의원직을 계속 지내야 할지 말지는 유권자들이 판단할 문제라며 사실상 책임을 매사추세츠 주민들에게 떠넘겼고 은근슬쩍 자신을 찰스 섬너, 대니얼 웹스터와 같은 역사적 위인들과 동치시키기까지 했다. 대중의 여론은 크게 격양되었으며 연설은 끔찍한 역효과를 불러일으켜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테드 케네디를 오만하고 부정직한 사람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테드 케네디의 범정 심리와 해명문 발표가 열린 날은 아폴로 11호가 인류 최초의 달착륙이라는 인류사 최대의 업적을 달성하고 지구로 귀환한 다음날이었다. 언론과 시민들의 관심이 아폴로 11호로 쏠린 틈을 활용하여 최대한 묻혀가려는 전략이었다.
3.2. 테드 케네디에 대한 솜방망이 심판
부당하게 숨진 여비서의 안위와 유가족의 슬픔은 염두에도 없고 오로지 자신의 상원의원직 사수와 향후 대권가도에만 관심이 있는 듯한 테드 케네디의 행보에 대중들은 크게 분노했으며 테드 케네디가 적법한 판결을 받아 상원의원직을 박탈당하고 구속되기를 원하는 여론이 커졌지만 정작 매사추세츠 주 당국은 테드 케네디를 향해 솜방망이 심판이나 다름 없는 가벼운 판결을 내렸다.테드 케네디의 변호인단은 그의 나이가 37세로 젊어 향후 갱생의 여지가 많으며 자신이 범죄를 충분히 뉘우치고 있고 그의 전과 기록이 깨끗하다는 점을 들어 테드 케네디에게 가벼운 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검찰도 이 논리에 넘어갔고[12] 은퇴 직전의 63세 판사인 제임스 보일(James Boyle) 판사는 법정 최소형인 징역 2개월과 집행유예 1년, 운전면허 16개월 정지라는 있으나 마나한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크게 논란이 되었는데 테드 케네디가 반성하는듯한 태도를 거의 보이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애초에 테드 케네디는 평소에도 음주와 난폭 운전으로 여러차례 딱지를 떼인 상습범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950년대 대학교 재학 중 버지니아 주에서 경찰을 따돌리는 폭주 레이스를 한 혐의로 붙잡히기도 하였으며 이전과 이후에도 난폭운전 혐의로 수차례 벌금을 선고받았지만 제임스 보일 판사는 이것을 알지 못했고 테드 케네디가 평소에 모범적인 운전자였기 때문에 과도한 형벌을 내리는 것은 부당하다는 황당한 판결을 내렸다.
3.3. 대중의 싸늘한 반응
대중의 여론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해리스의 여론조사에서 대중의 68%는 차파퀴딕 사건과 같은 비극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고 답했으나 동시에 유권자 10명 중 4명이 테드 케네디가 앞으로 절대 대통령직이나 상원의원 직과 같은 중대한 공직을 차지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동조한 것으로 나타났다.#테드 케네디는 1969년 1월 갤럽이 시행한 1972년 대선의 민주당 대권주자 가상대결에서 45%로 압도적 1위를 차지했고 21%의 휴버트 험프리 전 부통령과 17%의 에드먼드 머스키 상원의원, 15%의 유진 매카시 상원의원을 크게 앞지르고 있었지만 이 사건이 일어난 후인 1969년 10월 동일 기관의 동일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27%로 18%p이나 하락한 것으로 드러나 29%의 험프리에 밀렸고 24%의 머스키와 경합을 드러냈다. 그 다음년도인 1970년 5월의 여론조사에서는 지지율이 18%로 더욱 하락했다.
1970년 중간선거에서 테드 케네디는 "유권자들이 원한다면 스스로 상원의원직에서 물러나겠다"며 자신의 재선을 사실상 스스로의 신임투표 성격으로 몰아갔다. 당연하지만 매사추세츠는 케네디 가문의 조직력이 너무 강하고 주 자체도 손꼽히는 민주당 텃밭이기 때문에 테드 케네디가 낙선할 가능성이 없음을 고려하면 이는 답정너식의 대응이나 다름 없었다. 테드 케네디는 자신이 예상한 대로 압도적인 표차로 재선에 성공하긴 했는데 1964년 1,716,907표를 얻어 74.26%를 기록했지만 1970년 재선 때는 1,202,856표로 50만표나 표가 줄었고 득표율도 12.1%p나 줄어든 62.16%에 불과했다. 이는 1964년 테드 케네디를 신임한 매사추세츠 유권자 10명 중 3명이 그를 불신하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워터게이트 사건 때도 골수 공화당원들은 "워터게이트에서 그 누구도 익사하지 않았다"(Nobody drowned in Watergate)는 범퍼 스티커를 차에 붙이고 다녔다. 그만큼 파급력이 큰 스캔들이었다.
3.4. 향후 테드 케네디의 경력에 미친 영향
결국 테드 케네디는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불출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측근인 조지 맥거번 사우스다코타 상원의원을 대신 지지했으며 그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될 수 있도록 도왔다. 맥거번은 테드 케네디에게 부통령 후보직을 제안했으나 테드 케네디 본인이 차파퀴딕 사건으로 인한 후폭풍을 고려해 스스로 고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1976년에도 또 대통령 후보로 고려되었으나 이 사건으로 발목이 붙잡혀 또 출마하지 못했다.테드 케네디는 1969년 민주당의 상원 원내총무로 선출되어 민주당 원내 지도부의 2인자로 등극하기도 했으나 이 사건의 여파로 동료 상원의원들에게 인망을 잃어 단 2년만인 1971년에 로버트 버드 상원의원에게 31-24로 표결에서 밀려 총무직을 잃는 충격적인 일도 당했다. 테드 케네디는 현재까지도 민주당의 최단임 상원 원내총무로 남아있다.
대선에 출마한 테드 케네디 |
1984년과 1992년에 테드 케네디가 대통령 후보로 다시 거론되곤 했으나 이 사건 때문에 결국 본선에 출마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2009년 사망할 때까지 "영원한 대통령 잠재 후보군"으로만 남아야 했다.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된 일로, 2010년 공개된 비밀 문건에 의하면 리처드 닉슨은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던 정적이었던 테드 케네디를 파멸시킬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여겨 기자로 변장한 비밀 요원을 차파퀴딕 섬으로 파견시켰다고 하지만 실질적인 소득은 거의 없었고 테드 케네디가 혼자 무너졌기 때문에 닉슨이 굳이 손을 쓸 필요가 전혀 없었다.[13]
3.5. 유가족의 반응
유가족은 일반적으로 테드 케네디의 미흡한 대응을 비판하는 반응을 보였다. 테드 케네디는 사건 발생 직후 메리 조 코페크니의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어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그녀를 죽인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사실은 알리지 않아 코페크니의 부모의 분노를 샀다.[14] 테드 케네디는 코페크니의 유가족에게 141,000 달러의 위로금을 지급했지만 직접 제공한 것이 아니라 보험사를 통해 대신 지급한 것이었으며 유감의 말도 없었다.사건이 한참 지난 1994년에도 코페크니의 부모는 "케네디 가문의 일원으로부터 자필 사과 편지를 받은 적은 있지만, 테드 케네디 본인에게는 사과 편지 한장, 사과의 말 한마디를 들은 적이 없다"고 테드 케네디를 비난했고 테드 케네디와 케네디 가문의 대응이 억울하게 숨진 코페크니를 달래기에는 한참이나 모자라다고 호소했으며 정의가 실현되었다는 느낌을 조금도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2015년에는 코페크니의 사촌이 "우리 메리 조"(Our Mary Jo)라는 책을 써서 다시 한 번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코페크니의 부모는 사건 이후 조용히 살다가 남편은 2003년, 부인은 2007년 세상을 떴다.
3.6. 테드 케네디의 반응
이 사건은 테드 케네디에게도 개인적인 불행이었으며 그가 죽을 때까지 PTSD에 시달리는 원인이 되었다. 1963년부터 테드 케네디는 형 두 명의 죽음과 비행기 사고[15]를 당해 정신적인 후유증이 심했는데 의도하지 않은 자동차 사고로 여비서를 죽이고 사회의 지탄까지 받다 보니 완전히 정신이 피폐해지고 말았다. 그는 개인적으로 심한 우울증을 앓았고 이 사건에 발목이 잡혀 출마할 수 없었던 1980년 대선 예비선거 이후에는 우울증이 심해져 더 마실 수 없을 만큼 끝 없이 술을 마셨다. 이 사건의 후유증이 테드 케네디의 무분별한 알코올 남용과 섹스 중독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많다.무엇보다 테드는 뇌졸중으로 오늘 내일하던 아버지 조셉 P. 케네디에게 가장 미안해했는데 아들 3명이 모두 먼저 떠나고 자신마저 영원히 대권 진출이 불가능해진 사실을 아버지에게 전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괴로웠던 경험"이라고 테드 케네디는 술회했다.[16] 테드는 직접 아버지에게 "아버지, 제가 여자를 죽였어요..."라고 해야 했고 조셉 케네디는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으며 몇 달도 가지 않아 사망했다.[17] 비록 오랜 지병으로 인한 사망이긴 했지만 테드 케네디는 아버지가 자신의 스캔들에 충격을 받아 급사한 것이라고 여겨 스스로를 평생 자책했다.
4. 현재의 인식
한국에서의 인지도는 높지 않지만 미국에서는 미국사 230년 사상 최악의 정치 스캔들을 꼽으라고 하면 반드시 꼽히는 스캔들로, 워터게이트 사건과 쌍벽을 이루는 1960~70년대의 스캔들로 남아 있다. 1960~70년대에는 존 F. 케네디의 사후 정부가 뒤에서 무엇인가를 꾸미고 조작한다는 인식이 높았는데 형들이 다 죽고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되던 케네디 가문의 일원마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사망 사건을 은폐하자 대중들은 충격에 빠졌다. 그러한 인식은 오늘날에도 유지되고 있으며 미국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과거의 정치적 스캔들로 남아있다.특히 테드 케네디의 역사적 명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케네디 가문은 부유한 가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고 솔직하고 용감하다는 이미지로 미국 진보좌파 진영에서 인기가 높은데 존 F. 케네디, 로버트 F. 케네디는 여전히 미국 진보 진영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테드 케네디는 자신의 부와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과실로 일으킨 사망 사고를 은폐하고 처벌을 피한 비열한 이미지라는 이미지가 강하며 미국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과거의 정치인을 꼽으라면 리처드 닉슨과 함께 꼽히는 일이 잦다. 존 F. 케네디의 연설은 종종 테드 케네디의 차파퀴딕 특별 연설과 비교되는데 많은 이들은 존 F. 케네디의 연설에서 진보적인 비전, 용감함, 진취성이 느껴진다면 테드 케네디의 차파퀴딕 연설은 그저 권력에 의존하는 뻔뻔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평한다. 많은 역사가들은 테드 케네디의 차파퀴딕 해명을 리처드 닉슨의 "체커스 연설"[18]과 비교한다.
케네디 가문의 지지자였던 퓰리처상 수상 언론인 데이비드 핼버스턴조차 "그동안 내가 케네디 가문에 느낀 매력을 모조리 무효화할 정도로 뻔뻔하고 천박스러웠다. 테드 케네디는 케네디 가문을 독특하게 만들었던 모든 것을 잊은 것처럼 느껴졌다. 이 막내동생은 자신이 케네디 가문이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건 모든지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고 테드 케네디를 비난했다.
특히 이 사건을 경험했을 65세 이상 유권자 사이에서 테드 케네디에 대한 비호감도는 52%(매우 비호감 28%+어느정도 비호감 24%)에 달했다. 같은 세대에서 존 F. 케네디가 매우 긍정 45% + 어느정도 긍정 38%를 받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5. 가설
지난 40년간 채퍼퀴딕 스캔들로 알려진 그 일을 전체 혹은 일부로 다룬 책이 20권 이상 출판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일을 다룬 신문과 잡지 기사는 셀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내 설명을 회의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고, 개인 블로그에 근거 없는 내용을 올리며 이 책에서 언급할 가치도 없는 허위, 악질적 추측을 제멋대로 퍼트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혹자는 내가 침묵함으로써 사람들이 제멋대로 내놓는 끔찍한 추궁이 설득력을 얻는 것 같다고도 한다. 그러면서 나에게 왜 그런 억측에 반박하지 않냐고 물었다. 평생 동안, 나는 그 사고 뿐 아니라 다른 어떠한 거짓 소문이나 추측에 대해서도 대응해본 적이 없다. 단 한번도 타블로이드식 가십에 반응해본 적이 없고, 그런 루머들이 주류 언론에서 다루어질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내가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아무리 허무맹랑하고 난감한 주장이라 할지라도 어쩔 수 없기 그때마다 논쟁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이미 마음 속에서 판단을 내린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없으리라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테드 케네디, 자서전 <케네디 가의 형제들> p416~p417
테드 케네디가 왜 밤중에 여비서와 둘이서 아무도 없는 한적한 나무다리로 차를 몰고 가 추락했는지, 왜 테드 케네디가 10시간 동안이나 경찰에 신고를 안 하고 사건을 은폐하려 했는지에 대해 여러 의문이 제기되었으며 케네디라는 이름 값 때문에 더 큰 논란이 되었다. 형 존 F. 케네디, 로버트 F. 케네디는 마릴린 먼로도 홀릴 만큼 세기의 섹스 아이콘으로 불렸고 테드 케네디도 그런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많은 사람들이 성추문이나 다른 무언가가 있었고 이를 감추려고 10시간이나 신고를 미룬 게 아니냐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다.혹자는 내가 침묵함으로써 사람들이 제멋대로 내놓는 끔찍한 추궁이 설득력을 얻는 것 같다고도 한다. 그러면서 나에게 왜 그런 억측에 반박하지 않냐고 물었다. 평생 동안, 나는 그 사고 뿐 아니라 다른 어떠한 거짓 소문이나 추측에 대해서도 대응해본 적이 없다. 단 한번도 타블로이드식 가십에 반응해본 적이 없고, 그런 루머들이 주류 언론에서 다루어질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내가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아무리 허무맹랑하고 난감한 주장이라 할지라도 어쩔 수 없기 그때마다 논쟁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이미 마음 속에서 판단을 내린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없으리라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테드 케네디, 자서전 <케네디 가의 형제들> p416~p417
테드 케네디가 쏟아지는 음모론, 가설에 전혀 대응하지 않은 것도 일을 키우는 원인이 되었다. 테드 케네디는 "시중에 20권 넘게 책이 나와있지만 모두 2류 타블로이드 음모론에 불과하며, 그것에 대응하면 오히려 사람들이 더욱 나를 의심할 것"이라는 이유로 2009년에 사망할 때까지 이 사건에 대한 그 어떤 해명도 거부했다. 734페이지에 달하는 테드 케네디의 자서전 <True Compass>[19]에서 차파퀴딕 사건을 언급한 페이지는 많아야 4페이지 분량 정도밖에 안 될 정이다. 그러나 테드 케네디가 해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간에서 말하는게 맞나보네!"라고 생각해 테드 케네디의 이미지만 더 악화되었다.
케네디와 닉슨의 전기 작가인 존 A. 패럴은 2022년 발간된 전기 "Ted Kennedy: A Life"에서 테드 케네디의 귀족적인 성격이 사건을 그르쳤다고 주장했는데 이 책에서 테드 케네디가 처음부터 솔직하게 경찰에 신고하고 부검까지 신청했다면 애초에 허무맹랑한 음모론이 퍼질 일도 없었고 향후 대권가도에 그렇게까지 치명적인 결함이 되지도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케네디와 친했던 역사가 아서 슐레진저도 테드 케네디의 이런 침묵을 "자멸"이라고까지 표현했다.
관련 책만 20권이 넘고 연구자 별로 가설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진실은 오로지 땅에 묻힌 테드 케네디만이 알 것이다.
5.1. 여비서와의 외도 은폐 가설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가설이다. 테드 케네디는 젊은 나이에 잘생긴 외모, 부, 권력, 명성까지 모두 갖추었으니 당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을 법하며 여성 편력이 화려하다 못해 추잡한 건 당대에도 잘 알려진 사실이었는데 형 두 명보다도 더 여성 관계가 복잡했으며 거의 성중독에 가까웠다. 그만큼 테드 케네디가 여비서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져 이를 은폐하기 위해 일부러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가설이 나온다.여비서의 임신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죽였다는 음모론과 자동차 사고 당시 경찰이 여비서와 자신의 불편한 관계를 물을 것을 우려해 신고하지 않았다는 가설이 있다.
그러나 오랜 기간에 걸쳐 반박되어 온 음모론이기도 하다. 메리 조 코페크니는 로버트 케네디와는 오래 알고 지냈지만 테드 케네디와는 면식이 없었고 사실 테드 케네디와 함께 사고를 당한 바로 그날 테드를 처음 만난 것이었다. 로버트 케네디와 사적 친분이 있었지만 성적인 관계를 가졌다는 증거는 없다. 메리 조 코페크니의 침실은 별장이 아닌 호텔에 있었고 별장에는 수많은 테드 케네디의 지인이 드나들었으므로 관계를 맺었을 시간과 장소가 없다. 애초에 코페크니는 알려진 것과 달리 테드 케네디의 여비서가 아니었기 때문에 둘 사이에 관계가 생겼을 가능성은 없다.
테드 케네디는 평소 문란한 사생활로 사교계에서 유명했기 때문에 오히려 숨길 필요가 없었다는 반박도 제시될 수 있다. 오린 해치나 크리스 도드처럼 테드 케네디와 오래 알고 지낸 개인적인 사람은 친구이든 정적이든 테드 케네디가 못말리는 섹스광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딱히 그것을 언론에 흘리지 않았고 일부 타블로이드 언론이 테드 케네디의 성 생활을 파고들긴 했지만 주류 언론은 그가 죽을 때까지 그의 성스캔들에 대해 함구하였다. 즉, 대중의 눈치 안 보고 평생 문란한 성생활을 해 온 테드 케네디가 굳이 대형 사고를 일으켜 여비서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숨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경찰도 코페크니가 테드 케네디와 부적절한 관계였다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고 코페크니의 유가족도 코페크니가 테드 케네디와 부적절한 관계였다는 사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였으며 테드 케네디도 마찬가지였다.
불행히도 미국의 많은 황색언론들은 메리 조 코페크니를 상대로 테드 케네디와 놀아난 문란한 여자라는 식으로 2차 가해성 기사들을 쏟아냈으며 유가족들은 황색언론의 비난을 피하다 못해 은둔 생활을 해야 했다. 테드 케네디조차 코페크니와 그녀의 유가족들이 당한 부당한 공격을 생각하면 자신은 얼굴을 들고 다닐 자격도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
5.2. 음주운전 가설
외도 다음으로 자주 통용되는 가설이며 당시 당사자들의 증언을 교차검증하면 어느 정도는 사실로 보인다. 당시 파티장에 있었던 역사가 아서 슐레진저에 의하면 테드 케네디는 자동차를 타고 나가기 전에 술을 "3잔" 정도 마셨고 취기가 있었다. 테드 케네디는 평소 워싱턴 정가에서도 알아주는 주당이었다.[20] 1968년 형이 암살된 후 테드 케네디의 알코올 남용은 심해졌고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이 드물었는데 차파퀴딕 사건이 일어난 날에만 술을 마시지 않을 이유가 없다.음주운전이라면 10시간 동안이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것도 잘 설명된다. 1969년에는 고위공직자에 대한 도덕적 요구가 더 강했고 음주운전에 대한 사회적 시선도 나빴다. 만약 테드 케네디가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죽였다면 사회적 지탄은 거셀 것이고 이로 인해 대권가도에 차질이 생기는걸 막기 위해 일부러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더불어 테드 케네디가 사고 직전에 길을 해맨 것과 사고 직후 친구들 앞에서 횡설수설한 것도 풀이가 된다.
그러나 테드 케네디 본인은 음주운전을 부인했으며 음주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운전에 영향을 미쳤을지는 불확실하다는 의견도 있다. 당시 매사추세츠 주의 면허 취소 수준 만취 기준은 혈중 알코올 농도 0.15%였고 테드 케네디 정도 체격의 남자라면 3~4시간동 안 술 8잔을 마셔야 그정도가 된다. 메리 조 코페크니의 혈중 알코올 농도도 0.09%로 면허 취소 수준의 만취 기준에는 못 미쳤다.
당시 법정에서도 테드 케네디의 음주운전 여부를 가려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판사가 파티 참여 멤버 증언 수집 등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테드 케네디가 정말 술을 마셨는지, 운전에 방해될 정도로 술에 취했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
5.3. 테드 케네디 본인의 해명
테드 케네디는 자신이 10시간 동안이나 신고를 하지 않은 것이 음주운전이나 은폐 시도보다는 일시적인 충격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그것이 "슬픔, 두려움, 의심, 피로, 공황, 혼란, 충격" 등이 합쳐진 실수였다고 주장하였다. 두 명의 형을 몇 년 전에 떠나보낸 후 자신에게도 죽음이 닥쳐오자 공포에 시달려 경찰에 신고 할 생각을 못 했다는 것이다.그러나 사고 다음날 아침 테드 케네디가 태연하게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고 치밀하게 사건 은폐를 위해 노력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설득력이 없다. 사건 직후였다면 몰라도 사고 다음날 아침까지도 신고를 하지 않은 것은 단순한 충격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으며 특히 테드 케네디 주변의 모든 인물들이 경찰 신고를 종용했음에도 테드 케네디가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5.4. 에어포켓 가설
이런 것과는 별개로 차가 물에 빠졌을 때 에어포켓이 형성되었으며 여비서 코페크니가 숨진 이유도 익사가 아닌 에어포켓에서 공기가 다 떨어져서 질식사했거나 저체온증으로 사망했다는 이론이 잘 알려져 있다. 코페크니가 몇 시간 동안이나 에어포켓에서 살아있었으며 테드 케네디가 빨리 신고했으면 여비서가 살 수 있었다는 이론이다.이 가설은 당시 잠수부로 코페크니의 시신을 인양한 잠수부 존 패러가 주장했다. 그는 코페크니의 시신에서 손이 보닛을 잡고 있고 목이 뒤로 젖혀져 차 뒷면에 생긴 에어포켓의 공기를 필사적으로 빨아들이려는 듯한 제스처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에어포켓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는데 그는 소방사이긴 하지만 의료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의 말을 100% 신뢰할 수 없다.
상반되게 사건 수사를 맡은 지방검사는 시신 인도 때 코페크니의 소매에 피가 묻어있었다며 의심할 여지 없이 익사한 것이라 판단했다. 테드 케네디는 법정 진술에서 "자동차 앞유리와 옆 유리가 깨지면서 물이 쉴 새 없이 들이찼고 코페크니는 바로 익사했다"고 증언하였다. 테드 케네디가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케네디가 타고 있던 왼쪽 유리창이 깨져 빠져나갈 만한 공간이 생겼기 때문인데 이 경우 에어포켓이 생기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침몰한 배에서도 에어포켓이 생기기 어려운데 일반적인 승용차라면 생존하기 충분한 에어포켓이 생길 것이라고 보기는 더욱이 어렵다. 설령 생겼더라도 지속 시간은 30분 남짓이었을 것이고 처음 에어포켓 가설을 제기한 잠수부도 30분 정도만 에어포켓이 생겼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즉 몇 시간 동안이나 에어포켓에서 코페크니가 살아 있었으며 테드 케네디가 신고했다면 그녀를 구출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근거 없는 믿음에 가깝다. 테드 케네디의 전기 작가인 존 A. 패럴은 "만약 부검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코페크니가 바로 익사했다는 사실이 명확해졌을 것이고, 그렇다면 지금처럼 근거없는 루머들이 돌아다닐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썼다.
5.5. 대안 가설: 케네디는 사고를 몰랐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론으로, The Bridge at Chappaquiddick(1970)의 저자인 잭 올슨은 테드 케네디가 사고가 일어난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대안 가설을 제시하였다. 잭 올슨의 이론에 따르면 사건 경위는 이렇다. 테드 케네디와 메리 조는 같이 차를 탔는데 섬의 부보안관이 둘이 같이 차에 타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매사추세츠에서 가장 유명한 테드 케네디가 미혼의 여성과 같이 차에 탄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테드 케네디는 도중에 차에서 내려 별장으로 돌아갔고 메리 조에게 홀로 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가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메리 조는 테드 케네디보다 더 술에 취한 상태였고 차파퀴딕 섬의 지리에도 익숙지 못했다. 때문에 그는 길을 잘못 들어 문제의 나무다리까지 갔으며 그곳에서 차를 추락시켜 홀로 숨졌다. 별장으로 돌아간 테드 케네디는 현장에 있지조차 않았고 사고가 일어난 사실 자체를 몰랐기 때문에 애초에 신고를 하지 않았다.몇 가지의 정황이 이를 뒷받침한다. 시신을 본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코페크니의 시신에는 왼쪽 옆구리에 큰 멍이 있었는데 이는 메리 조 코페크니가 탄 차가 추락할 때 그가 운전석에 타고 있었으며 문에 부딪혀 멍이 생겼음을 암시한다. 테드 케네디도 처음에는 자신이 아니라 코페크니가 차를 운전했다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이는 완전히 터무니없는 이론이거나 현재까지 가장 진실에 근접한 이론으로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이 사건과 관련된 일부 전문가들은 잭 올슨의 주장이 테드 케네디 본인의 해명보다 말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별장에 있던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테드 케네디는 물에 젖은채 사색이 되어 별장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몇 년에 걸쳐 잭 올슨의 이론은 반박되었다. 2007년 아서 슐레진저의 사후 공개된 일기장에서 슐레진저는 "테드 케네디가 제정신이 아니었고" "술에 취한 상태로 울부짖었다"고 서술했기 때문에 테드 케네디가 사고 현장에 있었던 것은 맞는 것으로 보인다. 잭 올슨의 해당 책은 이 사건과 관련된 여러 연구가 이루어지기 전인 사건으로부터 1년 후에 발간된 차파퀴딕 연구의 1세대 책이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반박된 여러가지의 잘못되거나 부정확한 주장을 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게다가 이 이론이 맞다고 치면 이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는 테드 케네디가 된다. 그는 음주운전을 하지도 않았고 펜스룰에 따라 미혼 여성을 내버려 두었으며 음주운전을 해 차를 강물에 빠트려 혼자 죽은 것은 여비서라는 말이 되는데 그렇다면 테드 케네디가 일부러 거짓말을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잭 올슨은 "테드 케네디가 메리 조와 바람난 것을 감추기 위해/결혼 생활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고 썼지만 메리 조 코페크니가 테드 케네디와 혼외관계가 아니었다는 것은 후대의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진 사실이다.
6. 대중매체에서
- 대체역사 드라마 포 올 맨카인드에서는 1969년 6월 소련이 먼저 달 착륙에 성공하는 바람에 테드 케네디가 NASA 임원들을 갈구는 청문회에 참석하기 위해 7월 18일의 차파퀴딕 별장에서 열린 파티에 불참한다. 이 때문에 차파퀴딕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1972년 대선에 출마해 우주경쟁 패배로 인기가 추락한 리처드 닉슨의 재선을 저지하고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다.[21]
* 2017년 이 사건을 다룬 독립영화 <차파퀴딕>이 미국에서 개봉했는데 평론단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고 독립영화 치고 흥행에도 성공했다. 제이슨 클라크가 분한 테드 케네디가 거의 실물과 똑같이 생겨서 캐스팅에 신경 썼음을 알 수 있다.
7. 참조 문헌
- Olsen, Jack. The Bridge at Chappaquiddick. January 1st 1970.
- Damore, Leo. Senatorial privilege : the Chappaquiddick cover-up. January 1st 1988.
- Kappel, Kenneth. Chappaquiddick Revealed. January 1st 1991.
- Kennedy, Edward M. True Compass: A Memoir. September 25th 2009.
- Farrel, John A. Ted Kennedy: A Life. October 25th 2022.
8. 관련 문서
[1] 목격자, 진술자 별로 시간대가 다름[2] 메리 조 코페크니[3] 테드 케네디[4]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채퍼퀴딕"이 맞으나 한국에서는 구식 표기대로 "차파퀴딕 사건"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5] 국내에서는 코페친이라고 표기되는 경우도 많지만 /koʊˈpɛkni/라고 읽기 때문에 "코페크니"가 원 발음에 가깝다.[6] 테드 케네디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메리 조 코페크니를 개인적으로 알지도 만난적도 없다고 주장했다.[7] 형 3명은 각각 비행기 사고와 두 차례의 암살로 요절했다.[8] 진술서의 서명 여부에 따라 법적 지위가 달라진다.[9] 목에 한 깁스는 쇼라는 말이 많다. 사고 직후 테드 케네디가 아무 문제 없이 별장까지 걸어갔을 뿐 아니라 수영까지 멀쩡히 했기 때문이다. 차파퀴딕 영화에서는 아예 대놓고 동정심을 부추기기 위한 쇼로 묘사된다.[10] Senatorial privilege의 저자인 데이모어 리오는 테드 케네디와 스티븐 스미스가 매사추세츠 지역 경찰과의 인맥을 통해 사건을 축소, 은폐하고 코페크니의 시신에 대한 검시도 없는 일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11] 존 F. 케네디와 맞붙어 패배한 1960년 부통령 후보 헨리 캐벗 로지가 아닌 로지 주니어의 할아버지이자 상원 외교위원장, 공화당 초대 상원 원내대표 등을 지낸 헨리 캐벗 로지 시니어(Henry Cabot Lodge Sr.)를 의미한다.[12] 더 극단적으로는 테드 케네디와 케네디 가문이 대대로 매사추세츠 주 검찰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지역 검사 인맥을 동원해 일부러 자신에게 유리한 검사만을 판결에 배정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13] 테드 케네디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닉슨이 차파퀴딕 사건과 관련되어 자신의 약점을 잡고자 노력했다며 분통을 터트렸는데 케네디가 사망한 지 1년만에 그것이 진실로 드러났다.[14] 코페크니의 부모는 매사추세츠 지역 경찰에게 전화를 받아 테드 케네디가 몰던 차가 바닷물에 빠져 코페크니가 죽었다는 정황을 들었다.[15] DNC 전당대회장으로 가던 경비행기가 매사추세츠 상공에서 추락한 사건을 의미한다. 같이 타고 있던 버치 베이 상원의원은 살아남았지만 케네디의 보좌관과 비행기 조종사는 즉사했고 테드 본인도 허리가 부러져 죽을때까지 허리디스크를 달고 살았다.[16] 조셉 케네디는 아일랜드의 가난한 이민자 출신으로 크게 자수성가한 인물이었고, 야망도 그 못지 않게 커 자신의 아들 중 하나는 반드시 대통령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한 사람이었다. 다만 JFK는 대통령이 되었지만 얼마 못 가 암살당했고, 로버트 케네디 또한 암살당했으며, 마지막으로 테드 케네디 또한 이 꼴이 나버렸으니 마치 원숭이 손에 소원을 빈 것 같은 결과를 맞이해 버렸다. 대권에 앞서 아들 둘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으니...[17] 2017년 개봉된 차파퀴딕 영화에서는 조셉 케네디가 분노해 테드 케네디의 뺨을 때리는 것으로 각색되었다.[18] 1952년 대선 당시 부통령 후보였던 닉슨에게 불법 선거자금 수수 혐의가 불거지자 닉슨은 전국 TV 방송으로 "내가 개인적으로 받은 돈은 없고, 순전히 나만을 위해 받은 건 강아지 체커스 밖에 없다. 어린 아이들에게 강아지가 얼마나 귀엽냐. 불법으로 받은 게 있다면 돌려주겠지만 이미 내 가족이 된 체커스와 이별하기는 싫다"는 해명문을 발표했다. 이는 자신의 불법 선거자금 논란을 강아지를 사랑하는 가정적이고 따뜻한 이미지로 반전시킨 것으로, "변명문" 중에서 최고라고 평가받는다.[19] 한국에서는 "케네디 가의 형제들"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현재는 절판됐다.[20] 에어포스 원 비행기에서 숙취 때문에 구토한 적도 있었다.[21] 리처드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 조사 때문에 테드 케네디에게 빌빌 기어야 하는 비참한 처지가 되었지만 테드 케네디 역시 섹스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1976년에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배했다.[22] 1시간 17분부터 나온다. 방송이다 보니 생략되거나 축약, 왜곡된 부분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