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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18:39:13

선동열 vs 최동원

최동원 vs 선동열에서 넘어옴

파일:2017051609540153074_1.jpg
해태 타이거즈 No.18 롯데 자이언츠 No.11
선동열
Sun Dongyol
최동원
Choi Dong-Won

1. 개요2. 맞대결
2.1. 첫 번째 경기2.2. 두 번째 경기2.3. 세 번째 경기2.4. 잘 알려지지 않은 2번의 경기
3. 여담4. 관련 링크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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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동원 vs 선동열' 역사상 가장 위대한 라이벌 #17 [크보연구소]
야구는 90%가 정신력이다. 나머지 반은 몸이고.(Baseball is 90% mental. The other half is physical)
- 요기 베라
KBO 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라이벌이라고 불리는 최동원선동열의 선발 맞대결.

최동원과 선동열은 서로가 정반대인 요소들이 정말 많았다. 출신지역(경상도 vs 전라도), 출신대학(연세대 vs 고려대), 소속팀의 연고지(부산광역시 vs 광주광역시), 소속팀의 사정(약팀 롯데 vs 강팀 해태),[1] 서로 라이벌이었던 모기업(롯데그룹 vs 해태그룹), 종교(개신교 vs 가톨릭), 심지어 결정구 구종(커브 vs 슬라이더)까지 대결구도로 엮을 요소들이 정말 많았다.[2] 심지어 2022년 진행된 프로야구 40주년 레전드 올스타 40인 투표에서도 나란히 1, 2위를 차지했다.

아직도 두 구단을 대표하는 최고의 선수로 꼽히는 이 둘의 승부는 선발 등판 3번 중 1승 1무 1패로 동률이며, 나머지 두 번의 언급되지 않은 대결은 선발 등판한 최동원의 완투승 한 번과, 구원 등판한 선동열의 승리 한 번으로 마감되었다. 즉 비공식 대결까지 합해도 2승 2패 1무이다.

2. 맞대결

2.1. 첫 번째 경기

첫 번째 맞대결은 1986년 4월 19일 사직 야구장에서의 대결. 최동원이 3회 송일섭에게 선제 솔로홈런을 내주면서 1실점. 그리고 그것이 결승점이었다. 선동열은 데뷔 이후 첫 완봉승이었고 최동원은 완투패로 12연승을 마감해야 했다. 이날 경기 인터뷰에서 최동원은 "몸이 늦게 풀렸다"고 했다.
이름 이닝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실점 투구수 기록
최동원 9 5
(1피홈런)
2 5 1 118 완투
선동열 9 6 1 5 0 121 완봉

2.2. 두 번째 경기

두 번째는 1986년 8월 19일 역시 사직 구장에서 벌어졌다. 선동열은 시작부터 불안했다. 1회 선두타자 정학수를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를 시켰고 2번타자 조성옥은 보내기 번트를 시도, 홍문종이 내야 안타를 치며 1사 1,3루의 상황. 이때 홍문종이 기습 도루를 시도하면서 해태 포수 김무종의 송구를 해태 2루수 차영화가 받았으나 3루 송구과정에서 3루수가 공을 놓치는 바람에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3루주자 정학수가 득점을 성공, 1점을 내주었다. 이어 김용철의 우전 안타를 기록하며 2:0.

이날 2실점은 모두 비자책이었다.

반면 최동원 역시 실점을 하지 않았지만 매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1회부터 6회까지 매회 주자를 출루시켰던 것. 하지만 무실점으로 막으며 2:0 승리를 가져갔다.

선동열은 통산 롯데전에서 패전투수로 기록된 경기는 이때가 유일하다.

2.3. 세 번째 경기

당시 영상
1987년 5월 17일 조선일보 기사[3]

마지막 대결은 1987년 5월 16일. 이번에도 사직구장이었다. 이 경기는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로 손꼽히는데 무려 연장 15회까지 가고도 끝내 2-2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이 경기에서 최동원의 투구수는 209, 선동열의 투구수는 232개로 선동열의 투구수는 여전히 한경기 최다 투구 기록으로 남아있다. 현재 야구 선발 투수가 특별히 못해서 조기강판되지 않는 한 대략 100개 정도 던지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것. 이 둘의 선발 대결은 모두 사직구장에서 벌어졌고, 모두 완투를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3경기를 모조리 완투를 시켰고 그것도 마지막 경기 내용이 어마어마해서 혹사 논란이 나올수도 있었지만 관련 언급은 없는 편인다. 감독들도 당연히 투수교체에 대한 고려도 여러 번 했지만 팀의 승패 이전에 부산/광주라는 대조되는 두 팬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 대한민국 최고의 두 투수 간의 엄청난 자존심 대결[6] 때문에 중간에서 감히 강판시킬 수 없었다고 한다.

9회 초 포수 장채근의 대타로 김일환을 투입한 해태는 포수가 없어(김무종 선발-대주자 이순철-포수 장채근) 내야수 백인호(2017년에 백인수로 개명)가 교체 투입되어 포수 마스크를 쓰고 7이닝 동안 선동열의 볼을 받는 진풍경도 연출했다. 이 때문에 선동열은 오로지 직구만 던져서 마지막 이닝까지 마무리 지었다.[7]

경기가 끝난 후 최동원이 선동열의 손을 맞잡으며 "동열아, 우리 끝날 때까지 함 던지볼까?"라고 묻자 선동열이 "형님, 한번 해 볼까요?"라고 웃음지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선동열의 회고에 의하면 다음날 최동원을 만나 "만약 16회, 17회까지 넘어가는 경기였다면 어떻게 하려고 그랬어요?"라고 묻자 최동원은 "야, 계속 던져야지."라고 답했다고 한다(!!!).

5월 16일의 연장 15회 혈투가 끝난 후, 선동열은 4일 휴식을 갖고 5월 21일에 등판하나 허리 통증으로 1.1이닝만을 투구하고 자진강판한 후 5월 내내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최동원이 5월 20일(3일 휴식, 9이닝 완투승) - 5월 24일(3일 휴식, 9이닝 완투승), 5월 28일(3일 휴식, 9이닝 완봉승)을 기록하는 등 엄청난 저력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이 마지막 승부를 주제로 만든 영화가 퍼펙트 게임이다.
이름 이닝 타자 타수 피안타 사사구 사구 탈삼진 폭투 보크 실점 자책점 투구수 기록
최동원 15 60 51 11 6 2 8 0 0 2 2 209 완투
선동열 15 56 50 7 5 1 10 1 1 2 2 232 완투

2.4. 잘 알려지지 않은 2번의 경기

언급되지 않았지만, 최동원과 선동열이 동시에 마운드에 오른 적은 총 두 번이 더 있다.


하지만 네번째, 다섯번째 경기는 일반적으로 맞대결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최동원도, 선동열도 "우리 맞대결의 결과는 1승 1무 1패"라고 이야기를 하고 언론에서도 이 경기들을 언급하지 않는다. 둘 다 마무리보직을 경험했지만 한국 프로야구 역사를 대표하는 선발투수임에는 틀림없기에 모두가 입을 모아 맞대결은 각각 선발로 맞붙었던 3번이라고 한다.

3. 여담

4. 관련 링크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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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경상도 팜을 삼성과 롯데가 반반으로 갈라먹은 반면, 해태는 군산상고와 광주일고를 비롯한 우수한 호남 선수 팜을 온전히 독식할 수 있었다.[2] 이 내용은 영화 퍼펙트 게임에서도 언급된다.[3] 여담으로 해당 기사에 이적행위란 말이 나온다. 현대어로 번역(?)하자면 김봉연 선수가 중요한 경기에서 병살타를 두번 때리는 역적짓을 했다는 뜻.[4] 롯데에서 뛰다가 해태로 이적하였다.[5] 영화 퍼펙트게임에서는 가상의 포수 박만수 캐릭터가 동점 홈런을 날린다. 배우는 마동석.[6] 선동열은 작고한 최동원의 빈소를 조문하며 응한 인터뷰에서 해당 경기를 회상하며 지금으로 보면 상상할 수 없다면서도 '자존심 대결'이었음을 확실히 언급했다.[7] 훗날 백인수가 이야기 하기로는 포수마스크를 쓰고 앉자 주심이 "너 똑바로 잡아라 안 그러면 내가 죽는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다행히 선동열이 완벽한 제구를 보여줘 미트를 갖다대는 족족 잘 들어갔다고. 반대로 얘기하면 선동열이 9회가 넘어서도 지치지 않고 구속, 제구 모두 완벽한 피칭을 했다는 것이 된다.[8] 두 사람이 동시에 등판한 경기 중 유일하게 사직 야구장이 아닌 곳에서 열린 경기다. 이 경기가 열린 시점(1985년 7월)의 사직 야구장은 마무리 공사 중이었고 석 달 뒤인 1985년 10월에 개장했다.[9] 참고로 1985년은 선동열이 데뷔한 해로, 한국화장품 야구단과의 계약 파동때문에 7월 2일에야 데뷔전을 치렀다. 즉, 프로에 입문한지 한 달도 되지 않은 루키였다는 것.[10] 7회초 김무종에게 2점 홈런을 맞았다.[11] 만루에서 조성옥의 내야땅볼 후 홍문종의 안타로 3실점[12] 선발투수였던 강만식의 승계주자이므로 본인의 자책점으로 기록되진 않는다.[13] 홍문종의 안타 후 김용철의 2루타로 1실점[14] 선동열은 1987년 당시에는 전문 마무리 투수가 아니었다. 1987년 중반에 허리 부상으로 한 달을 쉬기 전까지는 선발로도 꾸준히 출장했다. 게다가 11경기나 선발로 출장했기 때문에 전문 마무리라고 할 수는 없다.[15] 잘 알다시피, 최동원은 전설의 1984년 한국시리즈 이전에도 고교-대학-실업야구 기간동안 상상을 초월한 혹사를 당하고 전성기가 지난 다음에야 프로에 와서 초인적인 투구를 펼쳤다. 진작에 망가져도 이상하지 않았던 상황인 것.[16] 말이 트레이드였지 사실상 선수협 결성에 앞장선데 대한 보복성 방출이나 다름 없었다.[17] 물론 두 선수는 이후로도 선수 생활을 이어가긴 한다. 다만 혹사의 여파 탓인지 최동원은 점점 폼이 떨어지더니 얼마 안가 은퇴했고 선동열도 혹사 여파로 어깨에 건초염이 생겨 92시즌을 통째로 날려야 했으니 허구연의 걱정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선동열은 이 시합의 여파였는지 3번째 맞대결 4일 후인 태평양전에서 허리 부상을 당해 남은 5월을 통째로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