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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3 03:24:26

코리에르 탄광 참사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사고 내용3. 사고 이후

1. 개요

Catastrophe de Courrières

1906년 3월 10일 프랑스 파드칼레에서 일어난 광산 참사.

2. 사고 내용

사고가 난 광산은 코리에르 광산 회사 소유의 광산으로, 여러 구역을 통로로 연결한 형태였다. 혹여나 한곳에서 화재가 일어나면 그 구역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구역으로 들어간 뒤 통로로 이동해 광부들을 구출할 수 있는 안전한 구조라 판단했다. 하지만 1891년에 홍수가 일어났고, 홍수엔 취약한 형태란 것이 밝혀지면서 통로를 막게 됐다.

사고 며칠 전, 광산 내부의 메탄 가스와 석탄 가루 농도가 짙어졌다. 하지만 회사에선 위험성이 없다 판단해 광부들을 전부 근무시켰다.

사고 당일, 광부 1,800명이 광산 내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다 지하 270m 지점에서 화재가 일어났다. 광부들은 불을 꺼보려 했으나 실패했고, 이내 광산 내에 있던 석탄 가루에 불이 닿으면서 오전 6시 30 분 경에 땅이 흔들릴 정도로 큰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은 연결된 구역끼리 계속해서 연쇄적으로 터뜨렸다. 광산이 무너지고, 인근 마을의 건물도 무너질 정도였다. 사고 직후 500여명의 생존자가 광산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다. 이들은 화상을 입거나 호흡곤란 증세를 보여 병원에 이송됐다.

화재로 일산화탄소까지 퍼졌다.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은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쓰러졌다. 인근 마을의 사람들이 사고 소식을 듣고 구조하러 왔으나 장비가 부족했다. 방독면도 부족해 사람을 구하러 내려갈 수 없었다. 거기다 당시 프랑스에선 광산 사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 구조 방안도 나오지 않았다. 독일에서까지 구조대원이 동원됐고 구조 장비도 지원했다.

폭발 3일 후, 불을 끄기 위해 산소를 차단하러 입구를 막겠다는 얘기가 나오자 희생자 유가족들 사이에서 원성이 자자했다.

12일 후, 간신히 살아남은 14세에서 15세의 광부 30명이 빠져나왔다. 이들은 부서진 잔해를 치워가며 조금씩 움직이고, 흘러나오는 지하수를 마셔가며 간신히 버텼다. 배가 너무 고파 나무 기둥을 부숴서 먹기도 했고, 광산 내에서 물건을 옮길 때 쓰던 말의 사체를 발견해 먹기도 했다. 이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40세, 그리고 39세 생존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24일 뒤엔 Auguste Berthou라는 사람이 구조되기도 했다. 이 사람은 지하 300m 아래에 갇혀있다 구조됐다. 이 사람이 마지막으로 구조된 생존자였다.

사고로 최소 1,099명이 사망했다. 시신이 너무 훼손되어 신원을 파악할수가 없었고, 결국 큰 공동묘지에 갇히 묻혀야 했다. 사고는 유럽 역사상 가장 많은 목숨을 앗아간 광산 사고로 기록됐다.

3. 사고 이후

폭발의 원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사고 현장 근처에 있던 목격자가 전부 사망했기 때문이다. 당시 광산 내에서 쓰인 오일램프는 불이 밖으로 노출된 구조라 화재 위험성이 컸는데, 이로 인한 발화라는 설만 있다.

희생자를 기리는 첫 합동 장례식은 아직 시신이 다 수습되지도 않았던 3월 13일에 열렸다. 장례식엔 15,000명에 달하는 사람이 모였는데, 이들은 전부터 갖고있던 광산 회사에 대한 불만이 사고로 인해 더 커져 다음날인 14일 대규모 파업이 시작됐다. 파업 규모는 점차 커져 나중엔 46,000명에 달하는 사람이 파업에 참여했다.

사고 현장 인근에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