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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0년~2016년
1.1. 성년식
2011년 10월 23일, 만 20세로 성년이 되었다. 조부모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에게서 보관훈장[1]을 받으며 마코 공주의 티아라가 공개되었다. 와코(和光)[2]에서 제작하였으며 비용은 3,000만엔. 국비로 지출되었기 때문에, 마코 공주가 시집갈 때 국고에 반납된다.
성년 기념 기자회견에서의 인터뷰에 따르면, 여동생 카코 공주와의 관계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나이가 엇비슷하기 때문에 이야기가 잘 통해, 날이 갈수록 사이가 좋아지고 있습니다. 밤늦게까지 같이 이야기하기도 하는 날도 많습니다."라며 자매애를 과시했다. 실제로 카코 공주는 언니 마코 공주를 잘 따랐고, 마코 공주도 3살 어린 여동생을 잘 챙겨주었다. 카코 공주가 언니와 같은 국제기독교대학 교양학부 예술과학과에 진학한 데는, 언니의 영향도 있었던 듯하다.
한편 어릴 때는 아버지 후미히토 친왕을 잘 따른다고 했지만, 아버지에 대해서 "예전에는 화를 잘 내셨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당시 후미히토가 늦둥이 아들 히사히토의 탄생 이후 성격이 둥글어졌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마코 공주가 그걸 확인시켜 준 셈이다.
1.2. 학업 및 탈(脫) 가쿠슈인 - 국제기독교대학 입학
본래 일본 황족들은 모두 가쿠슈인에서 공부하는 것이 관례였다. 애초에 가쿠슈인은 황족과 화족을 위해 세워진 학교였기 때문이다. 패전 이전에는 '황족이 다니는 학교는 가쿠슈인'이라고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패전 후에 이 법은 없어졌으나, 그래도 황족들은 모두 가쿠슈인에 입학하는 것이 암묵의 룰이었다(해외유학 제외).그러나 2008년 9월, 이 룰이 깨졌다. 아키히토 덴노의 5촌 조카딸인 쓰구코 공주가 와세다대학 국제교양학부에 입학한 것이다. 그녀는 가쿠슈인 여대와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를 중퇴하고 와세다대학 국제교양학부에 입학했다.[3]
쓰구코 공주의 사례를 시작으로, 황족들의 탈(脫) 가쿠슈인 사례가 줄을 이었다. 이듬해인 2009년 4월에는 아야코 공주가 죠사이(城西) 국제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진학, 큰언니 쓰구코 공주의 뒤를 이어 가쿠슈인을 이탈했다. 2010년 4월에는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의 3남매 중 마코 공주와 히사히토 친왕이 '탈 가쿠슈인' 대열에 합류했다.
2010년 4월, 마코 공주는 개신교 계통의 미션스쿨[4]인 국제기독교대학 교양학부 예술과학과에 입학했다. 같은 시기, 남동생 히사히토 친왕도 가쿠슈인 유치원이 아닌 국립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유치원에 입학했다.
가쿠슈인대학과 가쿠슈인여대에 워낙 학과가 없어서[5], 일반교양과 어학을 공부한 뒤 전공을 선택하기 위해 국제기독교대학을 제1지망으로 지원했다고 한다. 서류와 면접으로 합격 여부가 정해지는 'AO 입시'[6]라는 전형에 지원하여 합격했다. 국제기독교대학과 궁내청 측에서는 "일반 학생들과 똑같이 경쟁했으며, 경쟁률은 결코 낮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참고로 마코 공주가 국제기독교대학 합격 통지를 받은 날은 2009년 10월 23일, 즉 만 18세가 되던 생일이었다고 한다.
한편, 5년 후인 2015년 4월에는 여동생 카코 공주도 가쿠슈인대학을 중퇴하고 언니 마코 공주와 같은 대학 같은 학과에 입학하여 화제가 되었다. 본래 카코 공주는 초등교사를 목표로 2013년 4월 신설학과인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교육학과에 입학했으나, 1년 반만에 중퇴하고 다시 대학입시를 준비하여 국제기독교대학 교양학부 예술과학과에 합격했다. 카코 공주는 대학을 옮긴 배경을 '유치원부터 쭉 가쿠슈인만 다녀 새로운 환경에서 공부해보고 싶었고[7], 국제기독교대학의 수준 높은 영어교육과 폭넓은 교양교육(liberal arts)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로서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의 3남매가 모두 가쿠슈인을 이탈하여 다른 학교로 간 셈이다.
2010년 4월, 국제기독교대학 입학식 때.[8]
대학에 진학한 후 스키 동아리의 MT 때 남학생들과 술을 마시고 취한 모습의 사진이 인터넷에 유출되어, 이미지가 다소 하락했다. 이후 마코 공주는 동아리를 탈퇴했고, 어머니 키코 비에 의해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 모두 무기한 동아리 활동 금지를 당했다.사진
2012년 9월, 영국[9]의 에든버러 대학교로 교환학생으로서 유학을 떠났다. 기간은 대략 반 년 정도였으며, 영어 외에도 미술품의 수복 등에 관심이 있어 미술 분야를 배웠다고. 어학 연수였는지 장기 유학을 위한 준비 과정이었는지, 이미 대학 1학년 때 아일랜드에서 1개월 동안 영어를 배우기도 했다. 유학 당시에는 소탈한 모습으로 현지 학생들과 어울렸다고 한다.[10]
2014년 3월, 국제기독교대학을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한동안은 황족으로서의 공무에만 전념하는 듯 했다. 많이 늙은 할아버지 아키히토 천황과 할머니 미치코 황후를 대신해 공무를 한다고 선전되었고, 테니스 협회 총재직도 맡았다. 그러다가 2014년 9월, 영국의 레스터 대학교 대학원으로 진학했다. 전공은 박물관학. 레스터대학 대학원에서 약 1년간 공부한 후, 2016년 1월 석사학위를 받았다. 석사 논문의 주제는 <박물관 전시물의 해석 가능성>이며, 큐레이터 자격도 취득하였다고 한다. 어릴 때 꿈이 화가라고 한 것도 그렇고, 미술에 관심이 있는 듯하다.
국제기독교대학 3학년이던 2013년 7월에는 첫 단독 지방 공무를 했다. 후쿠오카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하였다고 한다.
1.3. 영국 대학원 졸업 이후
2016년 영국의 대학원을 졸업,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했다. 할머니 미치코 황후는 마코 공주가 귀국하자 마음이 놓이고 든든함을 표현했다고 한다. 천황 부부는 맏손녀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크다고 한다. 마코 공주도 조부모의 이러한 마음을 잘 알고 있고, 그만큼 부담감도 크다고 한다.
귀국 후 마코 공주는 도쿄대학과 일본우편이 합작으로 운영하는 도쿄도 내 '인터미디어테크' 박물관에 객원연구원으로 취업, 연구활동 등을 계속하고 있다. 단 황족으로서의 공무가 우선이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고 근무 시간이 긴 정규직원으로 일하지는 못하고, 무급 비정규직원으로 일한다고 한다. [11] 마코 공주가 영국에 유학하고 있는 동안은 여동생 카코 공주가 언니를 대신하여 공무를 했기 때문에, 이제 카코 공주는 대학생활에 좀 더 전념하고, 귀국한 마코 공주가 대신 공무를 더 많이 하게 된다는 것 같다.
귀국한 이후, 2015년의 여동생 카코 공주만큼은 아니지만 가끔씩 공무에 등장한다. 그러나 20대 시절의 어머니 키코 비처럼 해맑고 순수하게 웃던 카코 공주와 달리, 지금의 키코 비처럼 형식적이고 억지로 웃는 느낌이 든다. 일본 황실의 맏손녀라서 천황 부부의 기대가 크기도 하고, 아버지 후미히토에 대한 소문이 유명하기도 한 데다가, 한참 어린 남동생 히사히토 친왕이 차기 왕위 계승자인 만큼, 키코 비는 장녀인 마코 공주에게 많이 의지해서 부담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 존재한다.
언니 마코 공주가 귀국한 이후, 카코 공주는 더 이상 공무에 나오지 않고 성실히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언니처럼 해외 유학을 가거나 댄스 동아리 활동을 하지는 않는데, 그 이유는 공무로 바쁜 부모님과 언니를 대신해서 어린 남동생 히사히토를 돌봐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카코 공주 본인도 해외유학을 가고 싶어 하고, 무엇보다 자유롭게 행동하고 싶어도, 집안의 반대 때문에 하지 못하는 모양. 그에 비해 마코 공주는 황족이라는 틀 안에 딱 맞게 행동하고 있는 느낌이다.
어머니 키코 비는 장녀인 마코 공주를 엄격하게 교육했지만, 일본 황실 내에서는 천황 부부의 맏손녀인 마코 공주를 후계자가 아님에도 맏이 대우를 잘 해주는 듯하다.
한편 2015년에는 카코 공주의 인기가 무척 높았는데, 부모인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는 카코 공주만 주목받아 마코 공주가 상처받을까 봐 무척 걱정했다고. 하지만 마코 공주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고 한다.
박사과정 입학을 앞둔 2016년 9월, 남미 엘살바도르 순방에서 후리소데 차림의 마코 공주. 한동안 아버지 후미히토 친왕과 공무를 하던 마코 공주는 국제기독교대학 대학원 예술과학과 박사과정에 합격, 2016년 9월 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코 공주는 영국 레스터 대학교 대학원에서 2016년 1월에 석사학위를 취득하였지만, 국제기독교대학 대학원에서 박물관학을 중심으로 심화된 연구를 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한다. 4월부터 다니던 도쿄대학 박물관의 연구원으로 근무하며 공무와 공부를 계속할 것이라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2015년의 카코 공주처럼 엄청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게 될 듯하다. 마코 공주 본인로서는 하고 싶은 공부를 위해 직장까지 다니며 대학원 입학을 결심했겠지만, 상황이 이렇다면 결국 공무를 소홀히 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일본 여론은 카코 공주와 마찬가지로 마코 공주가 공무에 나오지 않아도 아쉽지만 이해한다는 분위기였다. '공무와 직장, 공부까지 한다면 힘들 테니 건강에 유념해라.', '공무가 줄어드는 건 아쉽지만 응원한다.', '아키시노노미야 부부도 박사학위[12]를 가진 연구자 집안이니, 역시 공부는 환경이다.', '마코 공주도 힘들겠지만 알찬 연구 활동이 되도록 노력해라.', '아키시노노미야 가문의 자녀들은 아름답고 일본에서 가장 행복한 가족 같다.' 등등. 황태자 일가에 대한 반응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물론 실제로는 이렇게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다. 사실 마코 공주를 응원하는 댓글들은 일본 여론의 표면적인 반응일 뿐이지, 실제로는 마코 공주를 비판하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특히 실제로 연구직으로 근무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누구는 돈이 없어서 석사도 중간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는데, 황족은 놀면서도 세금으로 박사학위를 따나 보다!!!!', '저런 식으로 엄마 마음으로 주는 게 박사학위이면, 나도 ICU 가서 학위 따겠다!!!!'는 분노의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사실 연구직, 그것도 타교로 취직해서 반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저런 식으로 뜬금없이 모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겠다고 하는 게 말이 안 되는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연구직이며 명색이 박사학위인 만큼 하나에 집중해서 공부하는 것이 당연한 직종인데도, 직장은 그렇다 쳐도 공무까지 하면서 박사학위를 받겠다는 건, 적어도 석사 이상 공부를 한 사람은 알겠지만 저건 놀면서 받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본인이 그 정도로 머리가 좋은지는 차치하더라도, 학업과 연구직이라는 직장에 한해서는 굉장히 불성실한 태도임은 변함없다.
후미히토 일가에 대해 넷상에는 비교적 우호적인 댓글이 많이 달림에도 불구하고, 이 소식을 들은 많은 이들이 '키코 비는 늘 돈이 없다고 불평하면서도 자녀들을 뒷돈으로 입학시키고 뒷돈으로 학위를 따게 한다!'는 불만의 반응도 많았다. 심지어 칠촌 고모이자 일본 황실 최초의 여성 박사(미술사)인 아키코 공주조차도 이런 마코 공주의 태도를 비판했다.[13]
한편 여동생 카코 공주는 공무로 바쁜 가족들을 대신해서 막내 남동생 히사히토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유학을 포기하는 와중에, 마코 공주가 대학원에 입학한다는 것이 이상하다. 독립은 하지 않았지만 이미 직장까지 다니기 때문에 어머니 키코 비가 그런 큰딸에게 간섭하지 않고 오히려 작은딸을 더 단속해서 그런가 하는 의견도 있다.
늦더위가 한창이던 2016년 10월 2일, "마코 공주가 연애 중"이라는 기사가 떴다. 남자친구와 커플링까지 했고, 사귄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평범한 옷차림으로 지하철[14]에서 가벼운 스킨십을 하며, 남자친구는 마코 공주를 다정하게 "마코 짱"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남자친구가 가쿠슈인 동창이라고 하니, 아마 어린 시절부터도 비록 친하진 않았더라도 서로를 아는 사이일 거라 추정된다. 게다가 남자친구 또한 가쿠슈인 출신이라고 하니, 꽤나 부유하고 지체 높은 가문의 아들인 듯하다.[15] 넷상에서는 구황족 또는 화족 가문의 아들일 가능성도 있다는 추측이 있었다.[16] 한참 논의되던 안 중 하나인 여성 미야케가 마코 공주를 당주로 하는 미야케 창설안과 관련 있는 부분이다 보니 나온 추측이다. 일본 국민들 대부분은 열애설 소식에 '마코 공주도 칠촌 고모 센게 노리코처럼 빨리 시집 가라.'는 반응이다. 아마도 36세에 시집 간 고모 구로다 사야코의 전례가 있기 때문에 더 빨리 결혼을 요구하는 듯하다. 한편 마코 공주가 연애한다는 기사에 부정적인 반응은 없지만, 카코 공주 때만큼의 엄청난 관심은 없고, 오히려 '지나친 보도는 삼가 달라.'는 반응이었다.
2. 결혼소동 (2017년부터 지금)
2.1. 반응
마코 공주가 2017년 5월부터 일으킨 코무로 케이와의 결혼 논란으로 자신의 가족들과 친척들에게까지 민폐를 끼쳤다.2.2. 논란
일개 방계공주지만 장녀의 결혼 소동으로 인해 왕위계승을 노리던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의 이미지를 뒤집었다.3. 구황족 복위 논란
또 오래 전부터 황실 재진입을 노리던 구황족들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인지도를 어느 정도 높이는 데 성공했다.특히나 슬하에 미혼 남성들이 있어서 전후 황적이탈가 된 11개 구궁가 중에서 그나마 수십 년 이상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은 3개 구황족 집안 다케다노미야, 가야노미야 그리고 히가시쿠니노미야[17]과 이들의 복권을 강하게 주장하는 일본 극우세력들은 기대감을 높히고 있으나[18], 문제는 이들이 황적이탈이 된 지 [age(1947-10-14)]년이나 지난 탓에 다들 일반인에 가까운 상태라서 이들을 다시 복원시켜서 황족으로 삼기에는 일본인들의 저항이 크다. 실제로 과거 히사히토가 태어나기 전 일본 내에서 여성 미야케 창설 등의 논의가 컸을 때 구황족 부활에 대한 여론조사를 한 결과 당시 국민들의 70% 가까이가 반대를 했었을 정도. 일본 대중들 사이에서는 이미 [age(1947-10-14)]년 전에 황실을 떠났다가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이 황족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이유만으로 황실 대우를 받으면서 일본 국민들의 세금으로 구성된 황실 비용을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반감이 심한 것이다.
결국 미혼인 여성 황족과 결혼하는 방식으로 황실에 들어가야 하는 게 그나마 일본 황족과 국민의 반발이 제일 적은 방식이긴 한데, 문제는 구황족 집안 중에서 남성들이 복수인 몇 안 되는 집안들의 현 상황이다. 히가시쿠니노미야의 미혼 남성들은 히사히토와 비슷한 또래들인 2000년대 중반~2010년대 전반 출생자들이라 현 여성 황족들과는 지금 당장 결혼하기 어렵고, 다케다노미야는 구성원 중 하나인 다케다 일본 올림픽 위원회 회장[19]에게 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국제 올림픽 위원회 회원들을 상대로 로비를 했다는 의혹으로 인하여 JOC/IOC 자리에서 임기 만료를 핑계로 사임했다, 그 회장의 장남은 대놓고 황족 출신임을 선전[20]하면서 대대적으로 극우활동을 하다가 유튜브 채널 차단을 당하고 그 위 형들 중 하나의 자녀는 대기업 사원으로 근무하면서 마약을 하다가 경찰에게 체포되기도 하는 등 집안 자체가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집안으로 오래 전부터 세간에서 상당히 유명[21]한 것도 있지만 애시당초 해당 가문의 2대 당주는 731 부대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고 당주 본인은 해당 부대 근무 경력을 부정하지 않는 등 사실상 전쟁범죄에 동조한 자이기에 이러한 것을 아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현 천황 내외가 이러한 자신과 역사적인 인식이 결여된 집안과의 혼인을 배제할 가능성이 높다.[22] 그나마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결점이 없는 가야노미야 쪽과 연결을 하는 게 맞다고 평가받지만, 이들 가문에 소속된 미혼 남성 역시도 2019년 기준으로 20대 초중반[23]인지라 직장 문제 등이 있어서[24] 자칫 잘못하면 제2의 마코 공주 사태 같은 문제가 터질 수 있어서 이쪽도 지금 당장은 무리라고 판단하는 경우가 있다.
참고로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에 대해서 다케다노미야 가문 출신인 다케다 올림픽 위원회 회장[25]의 장남이자 극우 활동가로 유명한 다케다 츠네야스는 대놓고 "황실을 이용해서 이익을 얻고 있는 코무로 케이와의 결혼을 파기하고 구황족 출신 남성과 결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이번 사태를 이용해서 구황족의 복권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으나, 일본 극우 세력 외 반응은 뜨뜻 미지근한 편이다. 그 이유는 이 발언을 하는 사람은 분명 구황족 혈통이긴 하지만 구 황실전범 등에 의하면 황적이탈 후에 태어난 3남의 자식이기에 과거 전통에 비추어 볼 때 아무리 잘 쳐줘도 화족 수준으로 봐줄 수 있는 존재[26]인데 그런 주제에 메이지 덴노의 현손[27] 운운하면서 그걸 이용해서 극우들 사이에서 돈벌이나 하는 걸로 악명이 상당히 높은 사람이기에 "맞는 말이긴 한데 니가 할 소리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일본 내에서 상당히 강할 정도로 좋은 인식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
2019년 3월 20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국회에서 황실 후계자 부족 문제에 대한 질의에 여성 미야케 창설이나 여성 천황, 여계 천황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면서도 구황족들의 부활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보도에 대해서 대부분 일본인들은 '갑자기 생전 모르는 사람이 황족이라고 설치는 것보다는, 잘 아는 여성 황족이 결혼 후에도 계속 황족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게 맞다'라든지 '황실 문제에 대해서는 아베 총리의 의견에 동조한다.'는 등의 표현을 하기도 했다. 물론 일본 극우 입장에서는 아베 총리의 해당 발언을 두고 역시 아베가 조선인의 후손이라서 저런다는 식으로 강하게 부정[28]하면서 "차기 천황이 될 나루히토가 진정으로 일본 황실을 위한다면 구황족을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단 일본 궁내청과 황실 내에서는 만일을 대비해서 구황족들 중에서 여성 황족과 결혼할 만한 집안에 대한 조사를 기존보다 더 정밀하게 실시한 것으로 보인다. 언론 등에 의하여 알려진 데에 의하면 여러가지 문제가 많은 다케다노미야는 배제되었으며, 가야노미야나 히가시쿠니노미야를 중심으로 조사하고 있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히가시쿠니 가문이다. 쇼와 덴노의 장녀이자 현 아키히토 덴노의 첫째 누나인 히가시쿠니 시게코가 시집간 가문으로, 그래도 구황족들 중에서는 현재의 황실과 상당히 가까운 촌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계 천황 문제를 해결해줄 가능성이 구황족들 중에서 가장 높은 히가시쿠니 가문의 아들 두 사람[29]들을 집중적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5월 1일 이후 구황족 집안 출신의 극우 활동가 다케다 츠네야스는 각종 언론 등을 통해서 여성 미야케 창설 및 여성 천황 창설에 결사 반대하는 의사를 표시하고 구황족의 부활 혹은 황실전범 수정을 통해 현 황족이 구황족을 양자로 들이는 방식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 중이며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시대착오적 여성차별주의자라는 등의 항의를 할 경우 이들의 비난을 회피하기 위하여 내세우는 주요 논리는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장기간 황실이라는 타이틀이 소멸된다는 것[30]보다도 가장 큰 논리가 바로 만일 여성 미야케가 허용될 경우 코무로 케이 같이 황족이 될 자격이 없는 존재가 국민들의 세금을 받으면서 황족 취급을 받으면서 활동하게 된다는 것을 언급하는 등 구황족들이 앞으로 자신네들의 복귀를 강하게 요구할 경우 코무로 케이 핑계를 주요한 방패막으로 내세울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5월 10일에는 한 방송에서 황실 전문가의 의견을 토대로 만일 여성 미야케가 허용된 이후 코무로가 마코 공주와 결혼해 황족으로 들어간 경우, 그에게는 연간 1,500만엔 가량의 비용[31]이 지급되게 될 것이라는 게 나온 이후 일본 내의 극우들은 이러한 것을 이유로 여성 미야케 창설을 강하게 반대하고 대신 구황족의 복귀를 요구하는 자기네들의 이론에 아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2019년 5월 10일 전후로 일본 여론 조사 결과 80% 이상이 아이코 공주의 천황 즉위를 요구하고 여성 미야케를 허용한다는 결과가 나오자 주간지 등에 의하여 다시 구황족의 복귀 여론을 지피기 시작한 상태이며 여기에 맞춘 것인지 2019년 5월 21일 총리 보좌관은 한 라디오에 출연한 자리에서 여성 미야케 허용보다 가장 좋은 건 구황족의 복귀라면서 구황족의 젊은 남성을 현 황족의 양자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미야케에 넣자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 이후 아이코 공주의 천황 요구 여론이 높아지게 되자 이에 위기를 느낀 자민당 내부 우익 의원 수 명이 이를 반대하기 위한 조직을 창설하고 연내에 여성 미야케 금지,여성 천황 금지 등을 담은 보고서를 일본 총리에게 제출할 계획이라고 밝혔지만 이미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로 시작해서 현재 필두 미야케인 후미히토 일가 전체에 대한 천황 승계 반대 여론이 일본 국민들 사이에 깊게 박힌 상태인 데다가 7월 21일 중의원 선거를 앞두고 야당 거의 대부분이 아이코 공주의 천황 승계를 찬성하는 여론이 강하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선거에서 자민당이나 공명당이 압승을 거두는 등 여러가지 조건이 없는 이상 이들의 요구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개헌 가능선을 아슬아슬하게 미달한 이후 아베 및 일본회의 일파들은 전략을 바꾸어서 국론 분열 등을 이유로 논의를 2020년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가 황사 책봉 예식인 입황사의 예라는 역사상 유례없는 의식[32] 이후로 연기하려고 하면서 언론 등을 동원해서 그에 대한 선전을 강화하고 있는 상태이지만 일반 국민들의 반응은 싸늘하기 짝이 없는 데다가 여당 내에서도 한 고위간부가 기자들 앞에서 대놓고 아베 총리 및 관방장관의 요구가 자민당의 공식이라는 경고를 할 만큼 여당 자민당 내부에서도 아이코 공주의 천황 즉위 여론이 제법 강한 상태라서 앞으로 어떻게 될 지는 미지수인 상황이라고 한다.
2020년 4월에 들어오면서 코로나 19의 만연에 따른 아베 총리의 긴급사태선언과 함께 입황사의 예가 전격 취소되면서 그동안 아베 정권이 황실의 안정적인 승계 논의 역시도 연기되었으나 비공개로 전문가들로부터 의견청취를 하고 있으며 4월 말에는 산케이 신문 등 친 아베 성향의 신문을 통해서 그동안 거들떠보지 않던 도시노미야 아이코 내친왕과 구황족 남성과의 결혼도 검토하고 있는 떡밥을 던졌으나 일본 내에서의 반응은 싸늘한 데 그도 그럴 것이 아베 일당이 고려하는 해당 결혼은 어디까지나 히사히토 친왕으로의 덴노 승계를 확정한 상태에서 히사히토 직계 남성이 없는 걸 대비하기 위한 목적이기에 아이코 공주의 덴노에 방해되는 여계 덴노 논란을 회피하기 위한 차원에서 구황족 남성과의 결혼을 찬성하는 것과 전혀 다른 점이다.물론 2020년 3월 즈음에 내친왕 한정으로 여성 미야케를 허용하자는 논리[33]와 연결해본다면 아베 등 극우 일파들은 3명의 내친왕들 중에서 마코 내친왕 및 카코 내친왕은 구황족과 결혼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진행하는 게 아닌가라는 추측도 가능한 상태이다.
일본국민들의 반발 속에서도 11월 8일 입황사의 예가 거행되자마자 자민당 내 극우 단체 2개[34]가 잇달아 현 총리대신인 스가 요시히데를 찾아가서 황적이탈된 구황족의 복귀를 요구했으나 임기가 1년 이내로 정해진 스가 총리 입장에서는 원칙적인 대답 이외에는 하지 않았다고 하며 이에 대한 일본 내부의 여론도 코무로 문제로 인해서 더욱 더 안 좋아진 상태라는 게 함정이다.[35] 거기에 11월 13일 오후 2시에 마코 공주가 여전히 코무로와의 결혼 의사가 있음을 밝힌 이후에는 구황족 재추대 논의에 대한 반발이 더더욱 강해진 상태. 결국 2021년 들어 구황족 재추대 논의는 흐지부지된 상황이다.
[1] 군주국이라면 대체로 존재하는, 여성에게 수여되는 훈장이다. 대한제국의 경우 서봉장이 그런 역할이었다.[2] 도쿄 긴자에 있는 고급 백화점. 일본의 시계회사 SEIKO의 자회사이다.[3] 쓰구코 공주가 영국 유학을 중도에 그만두고 귀국한 이유에 대해, 일본 황실과 궁내청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쓰구코 공주의 아버지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이 2002년 사망한 후 다카마도노미야 일가에 주어지는 생활비가 줄어들어, 경제적 이유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유학을 그만두게 된 진짜 이유는, 쓰구코 공주가 해외에서 방탕하고 문란한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4] 참고로 일본 황실에서는 신토라는 일본 고유의 종교를 믿는다. 어? 그런데 왜 개신교 학교로 간 거지?[5] 가쿠슈인대학에는 법학부ㆍ경제학부ㆍ문학부ㆍ이학부의 4개 학부뿐이고, 가쿠슈인여대에는 국제문화교류학부라는 학부 하나에 일본문화학과, 국제커뮤니케이션학과, 영어커뮤니케이션학과 3개뿐이다. 가쿠슈인대학에는 40년 동안 새로운 학부가 설치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6] 게이오기주쿠대학에서 처음 실시한 전형. 내신 성적, 활동 보고서, 학습 계획서, 지망 동기서, 면접, 소논문 등으로 지원자의 개성과 적성을 다각적인 평가를 실시하는 전형이다. 한국의 수시전형과 비슷하며, '자기 추천전형'으로 불리거나 2개 다 존재하는 대학도 있다. 일본에선 이 전형 때문에 대학 입학생들의 평균 학업능력이 저하되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오보카타 하루코도 AO전형으로 와세다대학에 합격했다.[7] 카코 공주는 2014년 12월 29일의 성년(만 20세) 기념 기자회견에서, "중학생 때부터 가쿠슈인대학이나 가쿠슈인 여자대학이 아닌 다른 대학에 진학해보고 싶었다."라고 밝혔다.[8] 일본에서는 대학 입학식 때 검은 정장을 입는다고 한다.[9] 일본 황족들은 영국으로 유학을 많이 간다. 같은 섬나라에 입헌군주제 국가라서 친근감을 가지는 듯.[10] 한 네티즌이 유학 당시 마코 공주를 만나 인증했다. 해당 글에서 "알고 있는 게 많지만, 말했다간 문제가 생길 것 같다." 하고 언급하기도 했다.[11] 마코 공주의 고모 구로다 사야코도, 결혼 전 조류 연구소에서 비상근 연구원으로 일한 바 있다. 한편 이때 주간지에는 "마코 공주가 일하면서 운명의 상대를 만나지 않을까??"라는 기사가 뜨기도 했다.[12] 후미히토 친왕은 어려서부터 말썽꾼에 공부 못 하기로 유명했다. 키코 비는 오차노미즈여자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그녀의 박사학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자세한 것은 키코 비/결혼 후 참조.[13] 토모히토 친왕이 일본 황실의 어그로꾼이라 알려지긴 했지만, 그조차도 옥스퍼드 대학교로 유학 가 박사학위를 받으려는 큰딸 아키코 공주에게 '세금으로 공부하는 거니 넌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고 조언했고, 아키코 공주도 아버지의 말에 따라, 그리고 본인이 취업하는데 황족이라 유리했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공부와 연구에만 파고들어서 순수하게 자기 실력으로 박사학위를 땄다. 그에 비해 마코 공주는 박사학위를 준비하는 가운데서도 공부, 연구, 공무 셋 다 하겠다고 하고 있으니, 정말 도를 지나친 것이 사실이다.[14] 단 경호원들이 근처에 숨어 있으면서 마코 공주를 경호한다고 한다.[15] 패전 후 가쿠슈인은 관립학교에서 사립학교로 전환되었고 평민에게도 개방되었으나, 여전히 지체 높고 부유한 가문의 자제들이 많이 다닌다.[16] 물론 나중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저 사진에 나오는 모자이크가 걸린 남자는 바로 문제의 코무로 케이로서, 여기에 나오는 추측들은 전부 사실과 완전히 다르다.[17] 나루히토 현 천황의 큰고모이자 아키히토 상황의 큰누나, 즉 마코 공주의 고모할머니인 히가시쿠니 시게코가 시집간 가문으로서 구황족 복권시 현 황족들과 가장 가까운 친척이기에 가장 복권 가능성이 높은 집안이다.[18] 사실 구황족의 복위는 꼭 극우만 지지하는게 아니다. 일본의 군주제에 대해 우호적이거나, 최소한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온건 좌파나, 우파 세력들도 구황족의 복위를 지지하는 경우가 꽤 있는데, 이들의 황적이탈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전범들을 처벌하는 문제와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본래 연합국 측은 일본의 전쟁 범죄와 연루된 황족들의 황적이탈만 요구했는데, 당시 황족의 일원이던 히가시쿠니노미야 가문의 당주이자 자신의 황족 신분을 무지 싫어했던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이 전범들뿐만 아니라, 자신이 앞장서서 황적이탈을 하겠으며 이참에 다른 방계 황족들도 황적이탈을 해달라고 요구해서 전범이 아닌 황족들도 모조리 황적이탈되는 아스트랄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이 결국 오늘날에 일본 황실의 남계 자손들이 상당히 귀해지는 문제를 낳았다. 웃기는 건 이렇게 황적이탈된 구황족 가문들 중에서 차기나 차차기 천황의 배출이 가장 유력한 가문은 이 사태를 만든 장본인들인 히가시쿠니노미야 가문이다(...). 실제로 구황족들 중에는 쇼와 덴노의 자녀와 결혼한 자녀가 있기에 그나마 현 황족들과 촌수가 가까운 편이다.[19] 현 3대 다케다 당주에게는 막내동생. 그가 태어날 때는 이미 집안 전체가 황적이탈이 된 상태라서 단 한 번도 황족인 적이 없다. 하지만 그의 형, 누나들은 전부 황족이었다가 황적이탈되었다.[20] 사실 이 사람은 구 황실전범을 근거로 아무리 좋게 봐도 구 화족 수준 정도 밖에 안 된다고 한다. 실제로 3남 이후 남성들은 화족로 격하되든지 아니면 집안의 이익 등을 위해 화족의 데릴사위로 보내지는 편이었다고 한다.[21] 사실 일본 내에서 구황족들에 대한 인식이 안 좋은 게 전부 다케다노미야 가문 사람들의 온갖 활약(??)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22] 애시당초 히가시쿠니노미야가 단체 황적이탈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당시 GHQ에서는 모든 황족의 황적이탈이 아니라 전쟁범죄에 가담한 황족 가문에 한 해서 강하시키려고 했었는 데 만일 GHQ의 생각대로 했다면 다케다노미야와 함께 난징대학살에 가담한 아사카노미야와 이방자 친정이자 국가신토 중심인 이세 신궁 신주를 지낸 나시모토노미야 가문만 황적이탈당했을 가능성이 높은 집안이였다. 참고로 당시 대다수의 황족들/왕공족들은 일본 본토에서 군 복무를 하고 있었기에 중국 본토에서 근무한 경험을 가진 황족이라고 해봐야 다케다노미야 츠네요시 왕,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 그리고 다이쇼 덴노의 막내아들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뿐이였다.물론 다카히토 친왕은 아주 잠깐 중국 본토에서 사령부 참모로 지내다가 다시 본토로 돌아갔고 돌아간 이후에는 한 번 쿠데타 모의에 가담한 적도 있었으며 일제 패망 후 난징대학살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사과 등을 주장하면서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지만 나머지 두 사람은 패전 후에도 자신들이 한 죄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다.[23] 각각 1996년생([age(1996-01-01)]세), 1998년생([age(1998-01-01)]세)[24] 이는 한 언론의 취재에 응한 가야노미야 가문 사람이 직접 이 두 사람은 안정된 직장을 가지지 못했다면서 혼담이 들어오는 시기에 따라서 다르지만 현 시점에서는 황족을 받아들일만한 여유가 없다고 밝힌 적이 있다.참고로 이 두 남아의 부친은 가야노미야 3남의 자녀로 현 나루히토 덴노의 가쿠슈인 동창생에 현 마사코 황후의 외교관 선배라는 덴노 내외와 여러가지로 인연이 깊은 편이라 도시노미야 아이코 내친왕이 태어난 이래로 히가시쿠니노미야 가문과 함께 종종 언급되는 사람이기도 하다.[25] 현 다케다노미야 당주에게는 막내동생으로 그가 태어나기 전에 황적이탈이 이루어졌기에 이 회장은 단 한 번도 황족인 적이 없었다.[26] 보통 차남정도까지는 만일을 대비해서 황족으로 취급하지만 그 이후 태어나는 남성부터는 화족 집안에 데릴사위로 보내버리거나 그것도 아니면 결혼을 통해서 화족으로 격하시키는 경우도 있었다.[27] 사실 메이지 덴노의 6황녀가 다케다노미야 초대 가주와 결혼하면서 다케다 가문이 메이지 덴노와의 접점이 생겼기에 굳이 츠네야스가 굳이 현손이라는 칭호를 쓰고 싶다면 메이지 덴노의 외현손이라고 하는 게 사실상 맞는 표기. 즉,자신을 황족 출신이라면서 여계를 비난하는 데 사실 본인 가문도 여계로는 메이지 덴노와 이어지지만 남계로 따지고 들면 13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현 직황족과의 공통조상이 튀어나오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애시당초 구황족의 황적이탈을 할 때 히가시쿠니노미야가 내세운 논리 중 하나가 이거였다.[28] 극우들 입장에서는 만세일계를 해치는 여성 천황, 미야케, 여계 천황 모두 거부하며 이 중 하나라도 긍정하면 저런 망발을 퍼붓는다.근데 아베는 친가,외가 모두 한국계일 가능성이 높다는 소문이 있다.[29] 히가시쿠니 모리히로(東久邇盛厚)와 히가시쿠니 시게코의 장남 히가시쿠니 노부히코(東久邇信彦)의 유일한 손자인 2010년생([age(2010-01-01)]세) 남자아이와 모리히로와 시게코의 3남인 히가시쿠니 나오히코(東久邇眞彦)에게도 유일한 손자인 2004년생([age(2004-01-01)]세) 남자아이가 있다.[30] 이러한 주장은 극우들의 주요한 주장.[31] 황족의 배우자에게 지급하는 비용은 결혼한 황족에게 지급하는 비용의 절반을 받게 되는 규정을 적용.[32] 아키히토 상황이 태어나기 전까지 약 7년간 황사로서 활동했던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의 경우에는 이러한 의식도 없이 조용히 황사직을 맡았다가 아키히토 상황이 태어나자 조용히 자리에서 물러났는 데 그것에 비하면 분명 나루히토 덴노에게는 슬하에 아이코 내친왕이라는 황태자로 삼을만한 직계 황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황사이라는 직책을 둔 것부터 시작해서 어떤 의미에서는 황태자가 없을 때 임시직에 해당되는 황사를 무슨 황태자가 되는 마냥 의식을 치르냐면서 전통적 보수층에서 반발하는 원인이 되었다.참고로 아이코 공주는 2019년 12월 1일자로 만 18세가 되면서 황태자 의식을 치르더라도 하등의 문제가 없는 만큼 후미히토의 유례없는 의식을 취소하고 대신 아이코 공주의 황태자 등극 의식을 하자는 의견도 높아지고 있는 상태.[33] 이럴 경우 현존하는 미혼여성 황족 6명 중 미카사노미야 및 다카마도노미야의 여성황족 3명은 '내친왕'보다 격이 아래인 '여왕' 신분이기에 3명만이 결혼 후에도 황족 지위를 유지하는 데 문제는 그 3명 중 하나는 여전히 코무로와의 결혼을 하고 싶어하는 마코 공주라는 점이다.[34] 그 중 하나는 일본회의쪽 단체[35] 실제로 코무로 케이의 등장으로 인해서 여성 미야케 창설론이나 구황족 복귀 등 일반인을 황족으로 올리는 것에 대한 거부반응이 종전보다 커진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