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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01:11:45

코바니 포위전

코바니 전투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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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바니 포위전
حصار عين العرب
Siege of Kobanî
시리아 내전의 일부
파일:Siege_of_Kobani_frontline_progression,_from_October_2014_to_January_2015.jpg
기간
2014년 9월 13일 ~ 2015년 3월 15일
장소
시리아 알레포 주 코바니
교전 국가 및 세력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YPG|]]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페슈메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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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깃발 명칭
]][[P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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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자유 시리아군|]]





ISIL
지휘관
병력
약 3,000명
미국 공군
약 8,000명
피해규모
결과
쿠르드 연합군[1]과 국제연합군의 승리
코바니 시가지의 70% 파괴
영향
파죽지세로 전진하던 ISIL의 기세를 꺾고 전선의 주도권이 넘어오면서 ISIL의 몰락이 시작됨.

1. 개요2. 전개
2.1. 코바니에 드리우는 전운2.2. 자신의 고향을 위해 총과 수류탄을 들다2.3. ISIS의 공세2.4. 쿠르드족의 반격과 승리
3. 전투 결과4. 전투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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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리아 북부 국경 도시 코바니에서 2014년 9월 13일부터 2015년 3월 15일까지 6개월간 이어진 전투.

2. 전개

파일:코바니 시리아 4.jpg
폭격당하는 코바니

2.1. 코바니에 드리우는 전운

ISIL이 인구 45,000명에 불과한 코바니에 공격을 감행한 것은 이곳을 공격함으로써 다국적군의 분열을 야기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다목적군의 지속적인 공세로 인해 공세종말점에 다다른 것으로 판한단 지도부는 쿠르드족의 거주지이자 터키와 시리아의 국경지대에 맞닿아 있는 곳을 전략적 목표로 삼았다. 시리아 정부군은 IS로 부터 수도를 지키기 위해 이곳에서 철수한 상태였고 당시 IS는 타국의 정규군들과 민병대를 상대로 연승을 거두었기 때문에 이런 조그만 도시 정도는 손쉽게 뺏을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거기다 당시 터키는 국경 코앞까지 ISIL이 침공해왔음에도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는데 심지어 미군에게 조차 공군기지를 허용해주지 않아 이라크 인근의 걸프만에서 출격을 감행해 전략 수행시간이 길지 못했다.

도시 자체의 낮은 방어력과 미군의 지원조차 한계에 도달한 상황. 누가봐도 전투 결과는 뻔해보였고 만약 코바니가 함락된다면 쿠르드족은 터키로 이동, 당연히 터키에서는 눈엣가시로 여기는 쿠르드족을 탄압하기 위해 다국적군에 대한 관심을 줄임과 동시에 세속주의를 띄고 있는 쿠르드족을 성스러운 땅에서 사라지게 만들어 낼수도 있다는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미국 또한 시리아 북부의 이 조그마한 도시가 함락 되는 것에 대해 "어쩔수 없다"는 반응을 몇번이고 내비쳤다.

2.2. 자신의 고향을 위해 총과 수류탄을 들다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의 진격에 도망치기 바빴던 이라크 군경과 달리 쿠르드족은 시리아 북부 코바니에서 중무장한 이슬람국가에 맞서 두달 가까이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다. <인터내셔널 비즈니스 타임스>는 탱크와 포 등 중화기로 무장한 이슬람국가 대원 9000여명이 코바니를 포위공격했고, 여기에 쿠르드족 민병대 2000여명이 맞섰다고 전했다.
“나는 쿠르드족 여전사”…‘여성 수비대’ 그들은 왜 총을 들었나
이때 ISIL에 대항하고자 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자신들의 고향을 지키고자 한 쿠르드족이었다. 당시 시리아 정부군은 시리아 내전이 격렬해지면서 2014년 1월에 철군을 시작하였고 이에 자치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여러 조직이 결성 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곳은 역사상 단 한번도 가지지 못했던 쿠르드족을 위한 국가와 정부의 시작점이 될 수 있었고 이런 코바니를 내준 다는 것은 쿠르드족으로써는 용납할수 없었던 것이다.

시리아를 근거로 한 반군 인민방위대(YPG)[2]과 함께 코바니의 주민들 또한 남녀 가리지 않고 모두 무장을 하며 자신들의 고향을 사수하고자 결의들 다졌다. ##

2.3. ISIS의 공세

2014년 9월 13일, ISIL은 코바니 인근의 소규모 마을을 모두 점령하고 코바니를 향한 공격을 감행한다. 바하린 칸달 총사령관이 이끄는 쿠르드연합군은 미군의 폭격 지원아래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미군은 매일 10여차례 공습을 감행하고 양측의 포격전은 이어져 갔다. 그러나 전황은 불리해져만 갔는데 10월 경에는 쿠르드 시가지까지 ISIL이 진입하여 치열한 시가전을 벌이기도 했으며 이에 미 국방부에서 조차 "솔직히 코바니에서 우리가 이길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일 정도였다. 최대 격전지 코바니, IS에 넘어가나

인디펜던트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같다고 묘사했고, 워싱턴 포스트는 "테르모필레 전투의 300명의 전사와 같다."는 평을 하기도 했다. 당시 그만큼 상황이 열세였고 쿠르드족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여겼다.
미국이 이라크에 이어 지난달 22일(현지시간)부터 보름째 시리아의 이슬람국가(IS)를 공습하고 있지만 IS는 위축되기는커녕 더욱 공세적이다. 작전 시간당 2만1500달러(약 2300만원)가 드는 최신예 스텔스 전투기 F-22 랩터와 112만 달러(약 12억원)짜리 토마호크미사일까지 투입했지만 때리면 숨고 사라지면 반격하는 IS의 ‘두더지 작전’에 막혀 효과를 못 내고 있다.
미국이 자랑하는 최신예 무기로 공격했는데 결과는

미국과 동맹국 전투기들이 공습을 퍼부으며 지상의 쿠르드족 인민수비대(YPG)를 지원하고 있으나 IS는 진격을 멈추지 않고 있다. 코바니 전투로 지난 3주간 400여 명이 숨졌다. 전차 등으로 중무장한 IS 군대가 코바니 시내로 진입해 YPG와 치열한 시가전을 벌이면서 점점 공습이 어려워지고 있다. 존 커비 미 국방부 대변인은 “공습만으로는 코바니를 구할 수 없을 것”이라며 한계를 인정했다.
神政주의 vs 세속주의… 목숨 건 ‘코바니 혈투’
사실 이들이 밀리는 것이 당연한게 당시 쿠르드족의 주력이었던 인민방위대(YPG)의 병력도 불과 2,000~3,000명에 불과했고 가지고 있는 무기라곤 AK-47과 수류탄, 그리고 간혈적인 미군의 폭격이 전부였다. 반대로 ISIL은 시리아군, 이라크군등 정규군에 노획한 무기들뿐 아니라 민병대에서 뺏은 게릴라 무기들도 보유하고 있었다.

혼란한 전쟁터 속에서 양측의 여론전도 치열해져 갔다. ISIL은 트위터를 통해 폭격을 당한 코바니시의 상황을 드론으로 촬영하여 "거의 함락 직전"이라는 글을 올렸으나 반대로 쿠르드연합군은 언론을 통해 "ISIL의 공격이 점점 무뎌지고 있다."는 반응을 보이며 쿠바니에 대한 정확한 전황에 대해 알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전황이 점점 바뀌기 시작한 것은 11월에 들어서 부터였다. 코바니 곳곳이 ISIL에게 점령되었던 상황에서 "왜 강건너 불구경 하듯이 보고만 있냐!"는 국제여론에 터키가 한발 물러서 쿠르드족 반군들이 터키 국경을 통해 코바니로 향하는 것을 허가해주었고 이에 10월 29일에는 이라크에 위치한 이라크 쿠르디스탄의 무장조직 페쉬메르가[3], 터키의 쿠르드족 무장단체인 PKK가 합류[4]하게 된다. ## 적은 병력이었지만 쿠르드족의 단결력을 끌어올리기엔 훌륭한 포퍼먼스였고 이들이 가져온 중화기 또한 큰 도움이 되었다.

2.4. 쿠르드족의 반격과 승리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 이슬람국가(IS)가 시리아 북부의 코바니에서 처음으로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했다. IS는 지난 30일 동영상을 통해 "폭격과 형제들의 죽음 때문에 코바니에서 얼마 전 후퇴했다"며 "전투기가 모든 걸 파괴하고, 쥐새끼들(쿠르드 반군)이 오는 바람에 철수할 수밖에 없다"고 인정했다. IS 격퇴 작전의 국제연합군 사령관 제임스 테리 미군 중장도 1일 "코바니를 재탈환하는 데 성공했다"고 확인했다.
브레이크 없던 IS 세력 확장, 쿠르드족 叛軍(반군)에 막혔다

이어 11월 초반부터 쿠르드족은 반격을 개시한다. 11월 11일 코바니 시내에서 벌어진 시가전에서의 승리를 시작으로 11월 25일에는 코바니 북쪽을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2015년 1월 1일에는 거의 점령 당할뻔한 코바니의 70%를 자신들의 영향력에 두면서 ISIL를 코바니 시내에서 밀어내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1월 26일, ISIL이 점령한 도시의 동부지역을 완전히 탈환하는데 성공하며 코바니를 지켜내는데 성공한다. 이로부터 3일후, ISIL은 "우린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말과 함께 패배를 인정하는 트위터를 남겼다.

이후 3월까지 인근 지역의 ISIL의 소규모 진지를 모두 제거하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코바니 포위전은 승리로 마무리 짓게 된다.

3. 전투 결과

IS사태의 기념비적인 전투이자 중요한 분기점.
IS몰락의 신호탄이 된 전투
아무튼 쿠르드 YPG와 YPJ 민병대들의 저항은 완강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코바니 전투는 IS에게 명분과 사활을 건 전쟁이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그동안 잠재적 가담 희망자들에게 꽤 먹혀 들어갔던 IS의 프로파간다 중 하나가 ‘신이 우리를 선택했기에, 우리는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고작 AK-47 소총과 로켓추진 수류탄으로 저항하는 여성 민병대원들에게 밀려 등을 돌리고 달아날 수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IS는 적에게 위치를 노출하지 않는다는 그간의 전술을 깨고 이라크에서 포획한 탱크와 대포들까지 동원해 코바니에 총공세를 가했던 것이며, 그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다.
코바니 전투, 민주주의와 평등을 위한 싸움

쿠르드족은 자신들의 피를 흘려 정치적 기반이 되는 시리아 북부지역을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무기, 병력수, 지원 모든 것이 불리했음에도 코바니가 무너지면 쿠르드족의 모든 것이 사라질수 있다는 것에 분기탱천하여 전력을 다했고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운 탓에 이곳을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이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파죽지세로 전진하던 IS의 기세가 멈추고 차츰 점령지를 잃기 시작한다. 특히 ISIL은 이곳에 집중한 나머지 다른 지역에 대한 공세를 이어나가지 못한데다 패배까지 당하면서 전략적으로 큰 손해를 입게 되었다. 코바니 전투 후 반격에 나선 인민 방위대는 텔아비야드 공세를 통해 코바니와 하사카 사이 지역을 점령하며 분리되어 있던 두 지역을 육로로 잇는 쾌거를 이루게 된다.
IS의 코바니 공격은 IS의 전력 분산 효과를 낳기도 했다. BBC는 서부 이라크 전투로 인해 IS가 분산되면서 연합전선이 코바니에서 오랜 시간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

4. 전투 이후



[1] 시리아 YPG, 이라크 페슈메르가와 쿠르드 독립무장단체인 PKK[2] 주력군 약 2,000~3,000명[3] 대원 150여명 파견[4] 터키의 주장인데 확인된 바는 아니다. 참고로 이들은 미국이 규정한 무장테러단체인데 미국이 묵인해준 것을 생각해보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대변해 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