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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00:55:13

킵(건축)

파일:Rochester_zamek_fc11.jpg
영국 로체스터 성의 킵
1. 개요2. 어형3. 역사4. 기능
4.1. 영주의 거주4.2. 방어력
5. 비교사: 동아시아6. 관련 개념과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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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킵(keep)이란 (castle)이나 성채(citadel), 혹은 요새(fortress) 내에서 성주의 지휘소 겸 최후의 방어 거점이다.

2. 어형

영어에서는 물품을 보관하는 (kype)에서 유래하여 (keep)이 되었고, 프랑스어에서는 영주 혹은 주군을 뜻하는 라틴어 domus에서 비롯한 던전(donjon)이라 부르게 되었다. 영어에서는 이후 kype가 사어화되면서 대중적으로는 "지키다"라는 뜻의 keep이 유래라고 여겨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독일어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독일어로는 Bergfried, 불어로는 Donjon이라 한다.

한자문화권에서는 '아성(牙城)'이라고 번역된다. 후술하듯 일본 성천수각은 후대 서양 성의 킵과 매우 유사한 기능을 하지만 일본 성에만 있는 구조물이기 때문에 번역어로는 잘 쓰이지 않는다.

3. 역사

본래 모트 앤 베일리에서[1] 모트, 즉 언덕 위에 세워진 요새화한 영주의 저택이 곧 성의 중앙에 설치한 거대한 탑(던전)으로 발전하고, 그것이 좀 더 다듬어지면서 우리가 잘 아는 네모 반듯한 킵으로 발전했다. 이 킵을 감싸는 성벽이 넓어진 것이 castle(성)과 citadel(성채)이다.

성과 성채가 생기면서 킵 자체는 군사적 최전선에서 벗어났지만, 기원이 모트 앤 베일리인 만큼 그러한 시설들 안에는 여전히 모트의 후계로서 최후의 방어시설로써 성이나 성채의 다른 부분과 좁은 문으로 격리된 탑인 킵을 두게 되었다.

이러한 시설은 높은 탑이라서 시야가 넓다는 점 덕분에 지휘소로 매우 적합했고 모트 시절부터도 그런 역할을 수행했기에, 공성/축성 기술의 발달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방어 능력을 대부분 상실하는 대신에 순수한 지휘 설비로 기능이 변경되어갔고, 끝에는 1차적 목적이 지휘소인 건물이 되었다. 더불어 지휘를 위해 상주해야 하는 까닭에 종종 이전 시대처럼 거주지 기능도 겸하였다.

4. 기능

4.1. 영주의 거주

흔히 킵을 영주가 사는 곳이자 최후의 농성 지점으로 생각하곤 하는데,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니다. 좀 더 정확히는 (유럽에서는) 원래 그런 목적으로 만든 축성물이 맞긴 하지만, 점점 그 기능을 상실하여 목적이 변경된 것이다.

본래 영주의 저택이 있던 자리가 요새화되어 지휘소가 된 것이 킵이므로, 영주의 거주처로써의 기능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또, 시대가 흘러 조금만 공성 규모가 커져도 단독으로 방어 기능을 수행하기는 어려워졌고 킵에만 의지하여 수성을 하는 것은 효과적이지도 효율적이지도 않게 되었다. 따라서 비록 형태는 방어 건물처럼 되어있고 기원도 독자적 방어 건물이지만, 점점 지휘 기능만이 존재하는 시설로 변하게 되었다. 그러나 엄연히 축성물이니만큼 벽이 뚫리고 안뜰(bailey)까지 적이 들어왔을 때 최후의 피난처 역할을 하는 경우도 꽤 있었다.

후술할 방어적 이점 덕분에, 성을 지배하는 군주의 거주 시설이나 집무실은 아성 안에 마련되었다. 예컨대 킵의 1층이 평시에는 군주의 집무실 겸 연회장인 식으로. 대중들이 흔히 떠올리는 "저택"에서 사는 경우는 귀족들이 더는 봉건영주로서 행사하지 못하게 되고 성 자체의 방어적 이점을 상실하게 된 훨씬 후대의 일이다.

4.2. 방어력

중세 극초기의 모트 앤 베일리 시절에는 벽도 허술한 통나무 목책 수준으로 극히 빈약하고 다른 부수적인 탑 등의 방어시설이 거의 없었기에, 킵이 그 자체로 하나의 요새로 기능하였다. 개중에는 방어 목적에서 아예 입구를 2층에 두어 사다리 등으로 오가는 경우도 있었다. 성의 석조화 또한 벽보다 여기서부터 진행되었다. 이것은 후대에 기능적으로 같은 시설인 일본의 천수각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이후에도 중세 초기까지는 완전히 독자적으로 기능 가능한 요새화 설비로써 1층에 창고가 있고 2층에 주거공간을 두는 식으로 웬만한 물자와 설비가 다 들어가 있었고, 영주의 주거지로써의 기능도 (따로 저택이 없는 경우엔) 온전히 수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적어도 이 시기까지는 킵이 어느정도 독자적인 방어 시설이자 거주 시설로써도 기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도 다른 부속시설들은 안뜰에 따로 두고는 했으므로 적이 성내로 들이닥치는 시점에서 해당 성은 끝장난 경우가 많았다.

개나소나 성문공성추를 끌고갈 상황이면 방어측의 허술한 수성 능력에 맞먹게 공성 측의 공성 능력도 개판인 경우가 많았고, 덕분에 킵에서 버텨내는 경우가 꽤 나올 수 있었으나, 탑과 보루 등 다른 구조물들이 덧붙여지면서 성 구조가 발전하여 킵이 아성으로써의 기능을 사실상 상실하고, 순수한 지휘 설비로써의[2] 구조물이 된 후로는 킵에서 최후의 저항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게 되었다. 보통 진지하게 따져볼 만큼 착실히 진행된 공성전에서는 공성추가 성문을 때리는 순간 그 성은 함락된 것으로 판단했고, 이 때문에 공성추가 성문을 때린 순간 상대의 조건부 항복을 인정하지 않는, 즉 재산과 생명의 권리를 박탈당한 것으로 보는 관습이[3] 굉장히 오래 이어졌다.

그러나 아무리 지휘소(겸 종종 영주의 거주지) 기능만을 제공하게 된 후라 해도, 엄연히 축성물로서 커다란 탑, 누각, 장대 돈대 같은 형태를 띠므로 들어가서 농성할 수 있는 건 여전하다. 실제로 이미 성이 함락되었어도 끝까지 아성이나 시타델에 들어가 버티다 장렬히 산화하거나 외부의 구원으로 극적인 승리를 거두는 경우는 중세 초기 이후에도 꽤 많았다.

물론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고 나면, 아성이 작은 요새처럼 생긴 이유는 순전히 요새의 지휘 시설을 만들다보니 자연스럽게 요새의 모양을 가지게 된 것일 뿐, 설치 목적이 최후의 저항을 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게 되어, 모트 엔 베일리 시절의 계보가 사실상 끊기게 되어 전혀 다른 시설로 변한다. 이 시점부터는 일본의 천수각과 같은 설비가 된다. 즉, 훗날의 킵들은 수성전시 벽과 안뜰을 금방 내어주고 아성에서 틀어박혀서 농성하려고 지은 게 아니지만, 일단은 축성물이기 때문에 방어 기능이 존재는 하는 시설이라 하겠다.[4]
영화 아이언클래드(2011)
자신에게 저항하는 봉신의 성을 공성하는 존 왕에게 주인공 일행이 맞서는 장면들.
저렇게 킵 안에까지 침투한 경우는 이미 대세가 기울어 사실상 다 끝난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성벽이 돌파당한 후 다시 밖으로 내몰지 못한다면 처절하게 안뜰에서 막아세우거나 항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고중세 유럽 성에서 아성은 영주의 생활공간과 여러 핵심시설이 안에 몰려있고 주변을 성벽이 감싸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성벽을 악착같이 지키는 것이 수성의 기본전략이고, 아성은 지휘소의 기능을 한다. 물론, 어쩔 수 없이 벽이 뚫렸으나 아직 방어가 가능한 경우에는,[5] 방어측을 압박하기 위해 공격자가 감행하는 Siege Assualt 시도를 견디기 위해 안뜰에서 성문을 보호하면서 농성했고,[6] 재수 없게 실패하여 적의 침입을 허용하였으나 성 전체는 아직 건재한 경우라면 아성 안으로 들어가 농성을 시도했다.[7]

5. 비교사: 동아시아

지휘통제용 시설은 요새화 시설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할 수 밖에 없는데, 한반도에서도 성 내부에서 전망이 좋은 위치에 지휘소를 세우고 장대(將臺)라고 불렀었다. 다만 보통 병영이나 창고, 관저 등은 따로 두고 지휘소는 간단하게 누각만 세웠을 뿐 요새화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게다가 일찍이 관료제 국가가 성립하여 도시를 둘러 방어하거나 산성 등 방어거점에 관료를 보내어 방어를 맡긴 탓에 주거기능은 애초부터 지니고 있지 않았다.

동양의 성 구성요소 중 keep과 가장 유사한 개념은 일본식 성에 있는 천수각(天守閣)이다. 킵과 마찬가지로 경우에 따라 영주의 저택 기능도 할 수 있으며 구조적인 차이들을 제외하면 군사적으로는 지휘통제상 동일한 기능을 한다. 다만 동서양의 건축 양식의 외적인 차이로 일반적으로 천수각은 항상 목조 건물이지만 아성은 후대로 갈수록 석조 건물이라는 차이점이 있었다. 이에 따라 방어력은 썩 좋지 못했고, 거주 기능은 있다고는 해도 매우 미비했다.

요새화된 시설에 반드시 킵에 해당되는 설비가 있어야 하는 건 전세계 어디든 똑같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킵과 동일한 시설인 천수각이 일본에만 있었던 것은 문서의 시타델 문단 등에서 다루듯 동아시아의 대륙권에서는 도시의 근원지가 이었던 경우가 많아 방어 체계도 그를 따라갔기 때문이다.[8] 반면, 근원지가 산이 아닌 대도시들인 경우에는 너무 거대해서 천수각에 해당되는 것을 지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9] 일본은 유럽 이상으로 지주 겸직 무사들이 지배층이었던 나라였기에 심지어 도시라 하더라도 일종의 성관을 끼고 있는 경우가 많아 킵의 기능을 하는 천수각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명 연합군은 왜성에 고전하였는데, 여기에는 천수각과 같은 건물이 주는 전술적 이점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전훈은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아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도 조선도 딱히 천수각처럼 대형의 지휘용 누각을 지은 경우가 없었다. 이 역시 산성에는 천수각처럼 대형으로 지휘소를 설치하기 곤란했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이들 지역이 오랜 중앙집권제의 역사를 지닌 점과 후대로 갈수록 평화기가 길어지면서 주된 적대세력이 유목민족이나 해적들이었던 점도 크다.[10]

다만 비슷한 건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문수산성 장대나 함흥읍성 구천각처럼 돈대 형식의 축성물을 단독으로 건설한 경우도 있다. 이 경우 구조상으론 성 내부의 거대한 탑(던전)과 동일하다. 비교하자면 바스티유 요새가 이런 유형이다. 유럽에서도 종종 아성만 따로 빼서 지은 듯한 건물들이 있는데, 이것은 보통 병영이나 야전 지휘소 같은 시설로써 자체적인 방어 기능은 거의 못 하지만[11] 아성과 비슷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지어진 것들이다.

6. 관련 개념과의 비교

모트 앤 베일리에서 베일리(안뜰, bailey)을 감싸는 성벽이 더 넓고 커지고 보루와 탑을 비롯한 각종 시설이 늘어난 것이 바로 castle(성)과 citadel(성채)이다. 커튼 월(curtain wall)도 원래는 이렇게 킵을 두르고 있던 벽을 가리키던 말로, 이 curtain wall에 탑을 비롯한 각종 방어시설이 덧붙여지고 거기에 keep까지 모두 아우르는 총체적 개념이 castle 혹은 citadel이다.

citadel은 도시(city) 내부에 별도로 벽을 둘러 추가로 요새화된 구역 혹은 그 구성요소 총체를 의미하며, 성채를 둘러싼 도시가 함락되었을 경우에도 지속적으로 저항을 이어나갈 수 있는 요새화된 지역이다. citadel마저 함락될 경우 성채 안에 있는 건물인 keep으로 퇴각하여 저항을 계속하게 된다. 즉, city 안에 citadel이 있고 그 안의 하나의 시설로 keep이 있는 것이다. 'keep'은 탑, 즉 단일 건물에서 기원한 것인 반면, 시타델은 애초부터 도시 방어 시설의 부속품으로 출발했다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한자문화권에서는 citadel, keep을 둘 다 '성채', '아성' 등으로 뭉뚱그려 번역하여 혼동을 빚곤 한다.


[1] motte and bailey. 직역하면 "언덕과 안뜰"이다.[2] 물론 이 때에도 영주의 집일 수도 아닐 수도 있긴 마찬가지였지만...[3] 즉, 이 지경까지 가고나서 함락되면, 십중팔구 지휘관이 약탈을 허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보복 목적으로 약탈을 명령하는 지경이 된단 소리다. 물론 공성추가 대놓고 성문으로 갈 지경으로 가고도 도통 함락시킬 수 없던 경우도 꽤 있고, 이런 경우에는 오히려 방어측이 공격측에게 약탈 기간과 약탈 대상을 제시하는 조건부 항복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어느 식으로든 일단 항복이 받아들여지면 방어 측은 보통 자신들의 깃발을 챙겨서 "명예롭게" 퇴거할 수 있었다.[4] 단순히 생각해봐도 당연한 것이, 킵 안에 공간이 얼마나 있을지는 킵 마다 천차만별이긴 해도, 엄연히 군대가 주둔할 수 있으니 그 자체로 군사 거점이다. 용도가 지휘소라 방어가 주 목적이 아닐 뿐.[5] 대부분 열심히 돌을 던져넣다보니 우연히 성벽이 무너졌으나 그렇다고 성문에 대놓고 공성추를 끌고갈 만큼 공성이 진척되지는 못한 경우다.[6] 벽이 뚫린다 해도 구멍이 원체 좁기 마련이라 병목이 생겨 뚫린 벽에 병력을 밀어넣는 것은 벽을 기어오르는 거랑 그다지 차이가 없는 특공이었다. 따라서 전반적인 방어가 약화된게 아니라면 벽이 단순히 뚫린 정도로는 공성 진척이 그리 많이 되지 못하였다.[7] 변동이 심하던 중세 극초기라면 모트가 함락되면 군주로 있던 전사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으므로 성이 함락된 것이나 다름 없어도 어쩔 수 없이 틀어박혀 버티는 경우가 나왔으나, 이후 어느정도 봉건체계가 자리잡히고 난 후에는 명예롭게 항복하는 선택지가 더 합리적이게 된다.[8] 고구려의 축성양식을 보면 알 수 있듯, 초기에는 주로 방어용 성과 주거지역을 따로 두는 경우가 많았으며, 조선시대에도 산성읍성으로써 이와 유사한 방어체계를 보였는데, 이는 킵보다는 오히려 고대 지중해권에서 나타난 도시국가들의 아크로폴리스 등과 비슷한 양상이었다.[9] 유럽의 사례를 봐도, 도시의 시타델은 사령부 기능을 하긴 하나 킵과 달리 1차 목적이 지휘 기능이 아니라 방어 기능에 있었다. 대도시 정도의 크기가 되면 건물을 아무리 높게 세워도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10] 소규모 약탈자라면 신속한 출동이 가능하도록 군진을 두고 주둔군이 출동하는 사이 대피할만한 장소가 유효하고, 대규모 침략자라면 성벽이나 성채들로 구성된 장성이나 군진으로써 조기에 포착하여 야전군으로 격파하는 것이 일반적으로는 효율적이었다. 양양성 전투를 비롯한 여러 공성전 사례에서 보듯, 막상 본격적으로 준비된 성들의 경우 천수각 같은 시설이 없이도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는 방어력을 보여주었다.[11] 방어 기능은 순전히 거기에 군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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