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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08:03:36

네덜란드 튤립 투기 파동

튤립 버블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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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 열광
Tulpenmanie | Tulip 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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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이후 가격 데이터가 존재하지 않아 갑자기 급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 개요2. 사건 진행
2.1. 역사적 배경2.2. 튤립 열풍의 시작2.3. 대폭락
3. 튤립 파동의 결과4. 경제학적 분석5. 여담6. 관련 문서

1. 개요

17세기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벌어진 과열 투기 현상으로, 종종 튤립 중 아주 희귀한 색깔을 가진 꽃이 피는데 이걸 부유층에 팔면 100년 동안 놀고먹을 부가 쏟아져 빈곤층부터 유명인까지 전 재산을 탕진하면서 튤립 투기에 뛰어들면서 생긴 거대한 버블이 폭발한 사건이다.

그러나 3달만에 유행이 사그라들기 시작하면서 튤립 키우기에 몰두한 이들이 하루 아침에 거지가 되어 버린 사건이다.[1]

사실상 자본주의 최초의 버블 경제 현상으로 인정되고 있다. 영국남해회사 거품 사태, 프랑스 왕국미시시피회사 거품 사태와 더불어 고전 경제기의 경제위기 중 하나로 꼽힌다.

튤립 파동이란 용어는 이제 거대한 경제적인 거품을 가리키는 은유로 자주 사용된다.

2. 사건 진행

2.1. 역사적 배경

거대 제국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네덜란드에서 과중한 세금과 프로테스탄트의 급격한 성장 등이 원인이 되어 1568년에 독립전쟁이 발발했고 1648년 마침내 네덜란드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국제적으로 공식적인 독립국으로 인정받았다.

저지대 지역 가운데 가장 부유하고 증권거래소와 은행이 밀집했던 도시인 안트베르펜이 포함된 남부 지역이 1578년 에스파냐에 점령당한 뒤 암스테르담이 새로운 금융 중심지로 각광받으면서 전문인력이 대거 몰리기 시작했다.[2] 이 때문에 종교적 박해를 피해 도망 온 유대인들과 위그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막대한 자금을 들고 와서 금융업에 뛰어들었다. 1609년에 암스테르담에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가 설립되어 영국과의 국채 거래로만 매년 2,500만 길더 이상의 수익을 얻는 등 너무 빨리 돈이 돌자 금융업자들은 경기과열을 막기 위해 은행을 만들어 다른 사업을 펼쳤다.

얼마 안 지나 네덜란드 전역에 은행과 증권거래소가 들어섰는데 이들은 실물 상품은 물론이고 주식, 외환, 신용대출까지 손을 대기 시작했다. 게다가 스페인의 군사적 위협이 사라지고 독일 지역에서 벌어진 30년 전쟁의 여파로 보헤미아와 체코 등의 직물 산업이 붕괴되자 네덜란드 업자들은 독점 속에서 호황을 누렸다.

한마디로 요약해 국가에 돈이 썩어나는데 이를 투자로 더 불리고 싶어서 찾은 것이 튤립이었다.[3]

2.2. 튤립 열풍의 시작

이런저런 사업 덕분에 엄청나게 불어난 자본은 다른 투자 대상을 물색하기 시작했는데 이내 눈을 돌린 것이 신비의 꽃인 튤립이었다. 튤립은 원래 유럽에는 없는 꽃이었는데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에 주재하던 오스트리아 외교관이 튤립을 선물로 받아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져왔다. 이후 플랑드르의 식물학자인 샤를 드 레클루제가 튤립을 손에 넣어 1593년에 레이던 대학의 교수로 임명될 때 가지고 왔다고 한다. 이전에는 부호나 식물 애호가만 알고 있었던 튤립이 이때 네덜란드에 들어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고 한다. 단색의 평범한 튤립은 저렴한 가격으로 거래되었지만 희귀한 튤립은 무척 비싸서 희귀한 튤립의 보유 여부가 부의 척도로 간주되어 부유층들이 앞다퉈 희귀종을 찾았다.

그러니 희귀종을 잘 키우면 돈이 되고 더욱 아름다운 변종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면 더욱 큰돈을 벌 수 있게 되어 네덜란드 전역에서 튤립 알뿌리(구근) 확보 전쟁이 일어났다. 게다가 튤립 재배는 작은 나라에서 사는 네덜란드인의 취향과 환경에도 딱 맞았다. 좁은 집에서 주로 살면서 마당 한 모퉁이에 꽃을 키우던 서민들은 튤립을 재배하며 일확천금의 꿈을 키웠다. 당시 잘 나가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주식을 사고는 싶었지만 돈이 없었던 사람들은 꿩 대신 닭이라는 생각으로 튤립 재배에 모든 것을 걸었다.

변종을 일으킨 튤립일수록 비싼 가격이 매겨지는 가운데 400여 종의 가까운 품종이 개발되었고 튤립마다 황제, 총독, 제독, 영주, 대장 등의 군대 계급과 비슷한 이름이 붙었다. 서민들에게는 올라 버린 가격이 부담스러웠지만 마침 이때 흑사병이 재발해 네덜란드 인구의 8분의 1이 죽자 사람들은 더욱더 격렬하게 투자하기 시작했다. 투자의 대상은 주로 알뿌리[4]였는데 변형에 변형을 일으킨 특이한 종자나 족보가 확실한 알뿌리는 곧 희귀품이 되었고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1636년 내내 오르던 튤립 알뿌리의 가격 상승세는 1637년 1월에 절정에 달했다. 하루에 두세 배씩 오를 때가 있었고 한 달 동안 몇천 퍼센트나 상승하기도 했다.

파일:Semper Augustus.jpg

이때 튤립 알뿌리의 가치는 정말 상상할 수도 없었는데 1636년에 가장 비쌌던 "영원한 황제(Semper Augustus)"라는 튤립[5]은 하나에 2500길더였다.

엄청난 금액인 것은 틀림이 없는데, 대략 당시 소 1마리가 120길더였다.[6] 그러니 희귀한 품종의 튤립 가치가 당시 숙련된 장인의 연수입의 10배에 달한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 되었으며, 튤립 광풍 후 렘브란트 하르먼손 판 레인이 자신의 걸작 야경으로 받은 수수료가 1,600길더였다.

당시 네덜란드에서 거래된 튤립 알뿌리의 거래 총액을 보면 1633~1637년 하를럼과 암스테르담에서 거래된 금액이 각각 2,000만 길더였다. 다른 10곳의 거래소 규모가 암스테르담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고 해도 4년 동안 네덜란드의 알뿌리 거래 총액은 최소한 4,000만 길더를 넘었다는 것이었다. 매매에 관련된 사람만 수만 명이었고 계약서가 주식처럼 거래되었음을 고려하면 거래 총액은 이보다 훨씬 많았을 수도 있다. 이 거래량이 얼마나 많은지 다른 곳과 비교하자면 암스테르담 은행의 예치금이 350만 길더, 황금알을 낳은 거위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체였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최초 투자금이 650만 길더였다.

2.3. 대폭락

하지만 이 현상이 오래가지는 못했는데 이유는 여러 가지로 꼽힌다. 히아신스가 원예용으로 개량되어 대체재가 생겼다는 설, 정원의 유행이 바뀌었다는 설 등이다. 어쨌거나 1637년 2월 5일 갑자기 가격이 하락세로 돌변하기 시작했다. 너도나도 튤립 재배에 뛰어들자 어느덧 공급이 수요를 넘어서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사람들이 ‘단순한 꽃을 이렇게 비싸게 살 필요가 있나?’고 새삼 깨달은 순간 구매자가 사라지다 하락이 시작되었다.1637년 2월 3일 시작된 하락은 2월 9일까지 이어지다 이후 데이터가 사라진다.[7] 또한 적극적인 공매도가 이뤄지면서 네덜란드 정부가 공매도를 금지하는 지경에 이르렀었다.

2개월 만에 나온 5월 자료에서는 최고점에서 95~99퍼센트가 빠져있었다. 세계 대공황 때 2년 동안 75퍼센트가 빠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역사상 단기간 최악의 폭락세였던 것이다. 금보다 귀했던 튤립 가격이 하루아침에 휴지 조각으로 전락해 버린 셈이다.

그 바람에 여기저기에서 어음이 부도났고 줄소송이 이어졌으며 채권자와 채무자가 길거리에서 멱살을 잡고 싸우는 등 네덜란드 전체가 난장판이 되었다.

이렇게 혼란스러워지자 결국 정부 측에서 1636년 11월을 기점으로 이전의 계약을 모두 무효로 하고 이후에 맺어진 계약에 대해서는 투자자가 생산자에게 계약 금액의 10퍼센트를 물어주는 방안을 냈고 모두가 그 방안에 합의하기로 했으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3. 튤립 파동의 결과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사실 튤립 파동이 네덜란드 경제에 끼친 영향은 미미하다. 튤립 파동 이후에도 희귀 튤립 파종은 여전히 고가를 유지하였고 많은 이들이 찾는 품목이었으며 튤립 파동이 다른 산업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료도 발견되지 않았다. 주식시장 역사상 수많은 주가조작 사례들처럼 그저 일확천금을 꿈꾼 이들만 크게 피해를 본 해프닝성 일화로 알려졌을 뿐이다.

일각에서는 이 튤립 파동 때문에 네덜란드가 크게 타격을 입어 영란전쟁에도 패배하면서 영국에게 경제 대국 자리를 물러주고 쇠락했다고 하지만 튤립 파동과 영란전쟁은 근 20년 이상의 시간 차이가 있고 더욱이 영란전쟁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영란전쟁에서 네덜란드는 (굳이 말하자면) 승리한 쪽이다.[8] 네덜란드의 몰락은 튤립 파동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17세기 황금기를 구가하던 네덜란드에게 이웃국가들이 유럽 특유의 정신인 "한놈이 잘나가면 합심해서 때리기"를 발동시켜 그것을 상대하다가 네덜란드의 진이 빠져 버렸기 때문이다. #[9]

다만 자본주의가 막 싹을 트는 시기에 벌어진 일이다 보니 이전에는 튤립 파동만큼 드라마틱하게 전개된 투기붐이 드물었던 탓에 네덜란드인에게는 칼뱅주의적 금욕정신에 의거한 교훈으로 남았고 전 유럽인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나아가 지금까지 무분별한 투기의 대표적 사례로 언급되고 있다.

4. 경제학적 분석

이 튤립 파동은 비효율적인 시장의 증거로 자주 인용되지만미국 경제학자 얼 톰슨(Earl Thompson, 1938 ~ 2009)에 의하면 이 튤립 가격은 오히려 합리적인 움직임이라고 한다.[10] 톰슨은 가격 급등의 이유가 법적으로 튤립 선물 계약 만기시에 행사가의 3.5%만 내면 인수를 하지 않을 수 있게 하는 권리를 주려고 했고 이에 따라 튤립 선물이 일시적으로 옵션의 성격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만약 원래 1만원에 튤립선물계약이 체결되었는데 만기에 튤립현물 가격이 5천원이면 만기 시 5천원만큼 손해를 보게 되어 있다. 그런데 만약 저 권리가 보장되었다면 1만원의 3.5%인 350원만 주고 계약을 취소할 수 있으므로 손해폭은 최대 350원이 된다. 위 예시에서 투자자가 만기 때 50% 확률로 2만원, 50% 확률로 0원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면 기대값은 2만원*0.5-0원*0.5=1만원이고 따라서 1만원에 매수하면 딱 적정가격을 준 셈이 된다. 그러나 저 법안이 통과되었을 경우 기대값은 2만원*0.5-(1만원-350원)*0.5=14825원이 된다. 기대값은 수익확률*예상수익금-손실확률*예상손실금이라는 공식으로 결정되는데 예상손실금이 크게 줄어들게 되므로 적정가격도 크게 올라가는 것이다.

논문 저자에 따르면 (잠시 옵션화되었을 때) 튤립선물의 적정가격은 현물이 12.5일 때 179에서 192가 되어야 한다고 하니 14~15배 상승인데 이런 가격은 합리적인 결과이고 당시의 가격추이를 볼 때 이론적인 예상치와 잘 부합한다고 한다.

반면 미국 경제학자 제임스 브래드포드 드롱(Bradford DeLong, 1960 ~ )은 이런 주장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에 따르면 Thompson의 주장에는 결함이 있는데, 역사를 네덜란드가 아닌 독일의 관점에서 해석했다는 점, 이론적으로 볼 때 합리적 시장은 사고파는 물건이 무엇인지 잘 알려져 있다는 점, 이론적으로 합리적 시장에서 변동성은 불확실성의 발생이 아니라 불확실성이 해소될 때 일어난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톰슨(Thompson)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콜옵션화될 가능성이 더 높아진 1637년 2월 24일에는 가격이 오르는 게 정상이나 실제 가격은 오히려 2월 11일 즈음부터 떨어지고 있었다는 점 등의 문제가 있다.

5. 여담

튤립 품종 중에서도 가장 비쌌던 Semper augustus(영원한 황제)라는 품종은 현재 구할 수 없다. 유행이 지나서도 아니라 이 품종은 튤립 깨짐 바이러스(TBV)에 감염된 구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품종의 씨앗을 받아 보면 그냥 밋밋한 단색 꽃이었다고 한다. 결국 감염된 구근을 통해 번식하다 보니 병 때문에 점점 약해져서 멸종하고 말았다. 그리고 요즘은 감염된 구근을 판매하는 것이 불법인 국가도 있다.

화가 얀 판 호이엔(Jan van Goyen, 1596 ~ 1656)은 튤립 알뿌리 투기에 빠져 본업도 잊고 지내다가 거품이 꺼지자 천문학적인 빚을 껴안았는데 죽기 전에 갚긴 갚았다. 평생 거의 2000점에 가까운 그림과 데셍을 팔아치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도 그는 네덜란드 미술사에서 가장 다작한 화가로 여겨진다.

야사로 이 튤립 거품이 절정에 달하던 시절 한 네덜란드인[11]이 튤립 알뿌리를 양파인 줄 알고 요리해서 먹어 버린 일이 있었다. 이 때문에 알뿌리 값을 물어내라는 소송을 당했으나 법원에서는 '튤립은 튤립일 뿐이다'라면서 양파 값만 물어내라는 판결을 내렸다고. 이 이야기가 퍼지면서 튤립 거품이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사실 19세기 영국 철도 버블 당시 찰스 맥케이가 쓴 책에 나온 이야기로써 당시 투기 파동에서의 대중의 광기를 비판하기 위해 과장되어 재생산된 루머다. 이외에도 맥케이는 자신의 저서에 튤립 파동 당시 저소득층 또한 튤립 투기에 뛰어들었다고 서술했지만 실제로 튤립 파동에 투자한 대부분은 부유층이었다. 저소득층은 튤립을 살 돈도 없었다.

2018학년도 수능특강영어독해연습 지문에도 나왔다.

암호화폐 시장이 2017년 들어 폭발적 성장과 급락을 반복하면서 이를 경계하는 측에서는 튤립 파동에 자주 비유한다. 채굴을 튤립 재배로 대입할 수 있다. 튤립 파동 당시 "황제"라는 구근이 오늘날 가치로 약 25,000달러까지 상승했는데 암호화폐 시장에서 BTC 역시 그 정도의 가치를 보였다. 당시 숙련된 장인이 아무리 일해도 튤립 가격의 상승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고 하는데 오늘날에도 그렇다.

튤립 피버는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소설이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2005년 4월 2일 방영된 스펀지 74회에서 소개되었다.

대항해시대 오리진의 네덜란드 국적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에르네스트 로페스의 스토리 중 교역 튜토리얼 대사에서도 일종의 메타발언으로 언급된다. 로페스가 나중에는 튤립이라는 희귀한 꽃이 유행하여 비싸진다고 하자 부관인 스타텐이 일개 꽃이 비싼 이유를 잘 모르겠다며 그러다가 갑자기 값이 폭락하면 어떻게 되냐고 물어본다. 그러자 로페스는 대답을 얼버무리면서 대화를 끝낸다.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도 이를 기반으로 한 이벤트가 있었는데 이때는 초반에 구근가격이 오르는 묘사를 보이다가 마지막에 구근가격이 떡락하며 돈대신 물건들하고 바꿔준다는 식으로 하우징용 가구라거나 장식품등으로 교환이 가능했다. 하지만 당시 하우징 가구가 상댕히 고액으로 거래되던 물건들이라 유저들은 이익을 봤다.

의외의 사실이 있는데 이 사건이 미연시에서도 다뤄진 적이 있다. PULLTOP의 2006년작 아득히 우러러본, 아름다운에서 이 소재가 직접 나온 적이 있다. 언급되는 루트는 하시바 유우나 루트.

2018년부터 2022년까지 몬스테라 텔리시코사(보르시지아나) 알보 바리에가타, 몬스테라 아단소니 바리에가타의 잎 한장 당 가격이 수십만원에서 많게는 수백만원까지 뛰는 현상이 있었다.[12] 가장 큰 이유는 바나나선충으로 인해 수입이 막혀버려 공급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22년 말부터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격 폭락의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 번식하기 너무 쉽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더 과거에는 하월시아나 다육이 같은 식물도 광풍이 분 적이 있었다. 그 중에서 하월시아는 성장이 엄청 느리고 번식하기 엄청 힘들어서 조직배양이 나오고 나서야 가격이 하락한 편이지만 2022년 초반에 코로나 버블이 꼭지점에 달했을 때에 중국에서도 비슷한 식으로 그 역사가 재현된 적이 있는데, 바로 황금콩 투기 열풍이다#. 물론 해당 년도에 전세계적으로 자산시장 버블이 붕괴하면서 당시 황금콩에 많은 돈을 투자했던 이들은 모두 막대한 손해를 봐야 했다.

영화 월 스트리트:머니 네버 슬립스에서도 제이콥 무어가 게코를 찾아갔을 때 거품 경제의 예시로 고든 게코에 의해 언급된다.

6. 관련 문서



[1] 미술 교과서에 나오는 예술가인 호이엔도 빚을 지면서 튤립 팔기에 몰두했다가 일평생을 빚을 갚기 위해 살아야 했다.[2] 공교롭게도 안트베르펜 점령 당시 용병이 대다수였던 스페인군은 임금체불이 지속된 상황이었고 도시가 함락되자 그야말로 아작이 났다. 남미의 포토시 은광과 함께 스페인 제국의 재정의 쌍두마차였던 안트베르펜은 이 사건으로 그 지위에서 내려와야 했다.[3] 현대에는 글로벌 경제이니 해외투자라는 해법이 있겠지만 당시엔 그런 거 없다. 글로벌 경제여도 경기가 좋을 때나 경기가 좋을 것으로 전망되는 국가가 있어야 미래를 바라보고 투자할 수 있는 거다.[4] 튤립을 재배하려고 살 때 알뿌리, 즉 구근 형태로 거래되는 것도 튤립 붐을 부추겼다. 구근만 봐서는 품종을 알기 힘들었기 때문에 운만 따라 준다면 나중에 큰돈이 되는 품종을 비교적 소액으로 사는 게 가능했다. 즉 로또처럼 소액으로 대박 맞는 게 가능해서 튤립 재배의 사행성은 더욱 높아졌다.[5] 그 중에서도 모자이크 병을 앓아서 꽃잎에 줄무늬가 있는 것이다.[6] 2022년 대한민국의 돈 가치로 환산하자면 거세한우 기준 마리 당 평균가는 744만 7,000원이고(출처), 따라서 2,500길더로 살 수 있는 소 20.833…마리의 가격은 약 1억 5,500만원 정도 된다. 다만 후술된 장인의 연수입에 관한 언급으로 미루어 보아 과거에는 소의 가치가 현대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7] 학자들은 이를 통해서 2월 어느날 갑자기 급격하게 가격이 내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8] 4차 영란 전쟁까지 내려가면 영국의 승리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때쯤 되면 이미 100년 이상 지난 후의 얘기다.[9] 영란전쟁이 궁극적으로 끝난 원인도 네덜란드 총독 빌럼 3세가 영국의 윌리엄 3세로 즉위하면서 동군연합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윌리엄 3세는 네덜란드의 선진적 자본주의 금융시스템을 영국에 그대로 도입해서 영국이 대영제국으로 발전할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10] The Tulipmania: Fact or Artifact? (2007), 무료링크[11] 선원으로 일하다 막 돌아와서 튤립 소동에 대해서 까맣게 몰랐다는 이야기가 있다.[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