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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3 20:52:47

펠렐리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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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렐리우 전투
작전명
Operation Stalemate(스테일메이트[1] 작전)
시기
1944년 9월 15일 ~ 11월 27일
장소
일본 제국 남양군도, 팔라우 제도 펠렐리우 섬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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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명칭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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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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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
지휘관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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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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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명
]] 윌리엄 H. 루퍼터스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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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명칭
]][[틀:깃발|
파일: 깃발.svg
깃발 명칭
]][[틀:깃발|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문서명
]] 나카가와 쿠니오 †
병력 28,500명 13,000명
피해 규모 2,336명 전사
8450명 부상[2]
10,695명 전사
결과
미군의 승리
기타
필리핀 탈환전을 위한 초석이었으나 쓰이지 않고 방치됨.
Battle of Peleliu
ペリリューの戦い
파일:attachment/Peleliubat23.jpg
펠렐리우 해변가에 상륙을 시도하는 미합중국 해병대 제1사단. 사진에서 보이는 LVT의 대열이 첫 번째 웨이브이다. 첫 번째 상륙한 병사들은 일본군의 저항에 의해서 해변에서부터 심한, 크나큰 피해를 입게 된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영상

1. 개요2. 배경3. 양측의 대비4. 경과
4.1. 상륙4.2. 비행장 공격과 100고지 혈전4.3. 피투성이 코 능선 전투
5. 결과6. 창작물에서의 묘사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1944년 9월 15일부터 동년 11월 27일까지 태평양에 있는 현재 팔라우에 속하는 펠렐리우 섬에서 미군일본군이 벌인 전투. 민간에는, 일반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오지마 전투오키나와 전투 못지않게 미군에게 많은 피해를 강요한 전투로서, '교착작전'으로 명명되었다. 물론 일본군은 태평양 전쟁에서의 그들의 운명이 그렇듯이 그대로 몰살당했다. 펠렐리우를 공격하는 데는 정치적으로 필리핀이 상당히 중요했던 더글러스 맥아더의 입김이 많이 작용했다고 한다.

미군필리핀마닐라에서 약 1,675km 떨어져 있는 이 펠렐리우 섬의 비행장을 획득해서 필리핀 탈환전을 위한 교두보로 삼고자 했지만, 필리핀의 일본군이 너무 쉽게 무너지는 바람에 결국 펠렐리우 전투 후 방치되었다. 사실 펠렐리우 섬은 위치상으로는 점령해도 그닥, 별로 쓸모가 없기도 했다.

FPS 게임인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HBO가 제작한 TV 미니 시리즈 더 퍼시픽에 펠렐리우 전투의 참혹함이 그대로 생생히 잘 묘사되어 있다. [3]

2. 배경

1944년 여름 무렵, 일본군은 개전초기의 기세는 어디로 내다버렸는지 남서태평양과 중부 태평양에서 연이어서 참패를 면치 못했다. 일본군을 연파한 미군은 필리핀 해 해전에서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라고 명명된 대규모 공중전의 승리를 통해 일본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문자 그대로 재기불능에 빠트렸고, 이제 일본 본토로 안전하게 폭격기들을 날려 보낼 수 있는 교두보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의 전략에서 체스터 니미츠 제독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의견 차이가 발생했다. 맥아더는 필리핀과 오키나와를 함락한 이후 일본 본토로 진공할 것을 주장했고, 니미츠는 필리핀에 대해서는 신경을 끄고 타이완 섬과 오키나와를 점령하고 일본 본토로 진공할 것을 주장했다. 니미츠의 경우에는 이미 본토와 연결이 끊긴, 필리핀을 포함한 남서태평양 해역의 잔존 일본군은 쉽사리 괴멸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았고, 맥아더의 경우에는 필리핀을 탈환해야만 거대한 일본군 기지가 뒤에 남아서 배후를 위협하는 사태를 막을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동남아 루트를 확실하게 끊을 수 있다고 보았다.[4] 그러나 두 장성의 전략계획에는 이유가 다르긴 했지만 모두 펠렐리우 침공이 포함되어 있었다.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은 진주만을 방문해서 두 장성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본 후 맥아더의 전략을 채택했다.

펠렐리우 침공의 주력은 미 해병 제1사단으로 선택되었고, 파부부에서 재정비를 하고 있던 해병대 제1사단은 1944년 9월초, 펠렐리우로 출발했다.

3. 양측의 대비

3.1. 일본군

펠렐리우 섬을 수비하고 있던 일본군의 주력은 제14보병사단으로 약 1만 1,000여 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이 인원 중에는 조선과 오키나와의 징용 노동자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일본군의 방어전략을 총지휘한 것은 14사단 2연대장 나카가와 쿠니오(中川州男) 대좌였다. 그는 이전의 일본군의 섬 방어 전략의 실패를 잘 숙지하고 있었고, 이를 보완한 그의 방어대책 때문에 미군은 많은 출혈을 강요당해야만 했다.

당시 나카가와 대좌는 솔로몬 제도, 마리아나 제도, 마셜 제도의 섬들을 잇따라 잃게 된 원인을 분석해서 섬의 방어전략을 바꾸게 된다. 그는 해변가에서부터 방어진지를 구축해서 미군을 막는 행위는, 미군 전함들의 함포에 병력을 무의미하게 소모하는 행위임을 직시하고, 모든 시설들을 지하화하고 철저히 요새화시켰다.[5] 모든 일본군은 지하에 굴을 파고 엄폐, 은폐했다가 미군이 등을 보이거나 하는 취약한 순간을 노려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나카가와 대좌는 만세돌격, 반자이 돌격 역시 전력을 불필요하게 소모하는, 아예 전혀 쓸모 없는 행위로 보고 반자이 돌격을 지시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피투성이 코 능선'[6]에 올라, 미군의 섬 내 모든 움직임을 훤히 볼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 즈음 일본군의 섬 요새화 작업은 거의 완료되어, 일본군의 거의 모든 동굴과 벙커는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상륙을 방해하기 위해 해변가에 장애물들을 잔뜩 깔아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3.2. 미군

그러나 일본군이 그 전 답지 않게 이렇게 철저한 방어준비를 하는 동안 미군은 상당히 안이한 대처를 했는데, 심지어 타라와 전투에서 많은 피를 보고서도 일본군의 새로운 방어태세에 대해 전략을 바꾸지 않았다. 미 해병대의 고급장교들은 전투가 사나흘 정도, 3~4일 이내로 끝날 것이라고 보았고[7], 철갑탄으로 해안을 콩가루로 만든 뒤 항공기들로 공습을, 폭격을 가하면, 퍼부으면 그대로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고 오판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군은 해병 제1사단에서 17,490명을, 앙가우르 전투를 치른 육군 제81보병사단에서 10,994명 등 약 3만 명을 펠렐리우에 파견했다.

4. 경과

4.1. 상륙

파일:attachment/Peleliu_map_1.jpg
1944년 9월 15일 오전 8시 32분, 해병 제1사단은 섬의 남서쪽 해변, 즉 지도에서도 볼 수 있듯이 비행장과 가장 가까운 해변에 상륙했다. 1연대가 해변의 북쪽, 5연대와 7연대가 각각 해변의 중앙부와 남쪽을 담당했다.[8] 그러나 요새화된 벙커와 동굴에 숨어있던 일본군들은 20mm 기관포와 47mm 포를 동원해서 상륙하려는 해병대를 거세게 저지했고, 상륙개시이후 1시간만에 거의 60대 가량의 상륙주정을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유명한 해병대 지휘관 체스티 풀러 중령도 역시 타고 가던 LVT가 박살나서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겼다고 한다.

다행히 해변 중앙부에 상륙한 5연대는 상대적으로 적은 피해를 입고 가장 멀리까지 전진했다. 그들이 비행장으로 막 진입하려는 찰나, 일본군의 보병과 전차들이 갑작스레 반격을 가해왔으나 곧이어 상륙한 미군의 전차가 비행장 남단에 돌입해서 일본군을 금세 뭉개놓았고, 5연대는 비행장 공격을 준비한다. 공격개시 첫 날에 미군은 고작 3.2 km를 전진하는 데 그쳤으며, 1연대의 경우 일본군의 반격에 고생하다가 거의 전진하지 못했다. 첫 날 미 해병대의 사상자는 전사 200여 명에 부상 900여 명에 달했다. 바로 상륙 첫 날부터 전력의 10% 가량을 손실한 것이다.

4.2. 비행장 공격과 100고지 혈전

어쨌든 첫 날 상륙에 성공한 미군은 전열을 정비한 후 다음날 일제히 펠렐리우 비행장으로 돌격한다. 그러나 펠렐리우 비행장은 엄폐물도 거의 없는 넓은 개활지대였고, 미군은 일본군의 집중포화를 고스란히 뒤집어 쓰면서 전진해야만 했다.[9] 많은 피해를 입은 후 미 해병대는 겨우 비행장을 점령했으며, 잔존 일본군 병력을 산으로 몰아낸 뒤 섬의 동쪽 끝까지 빠르게 전진했다. 섬 남쪽의 일본군 수비대는 7연대 병력에 의해서 궤멸되었다.

그러나 미군의 피해도 급증하고 있었는데, 섭씨 46도까지 올라가는 기온에 열사병으로 쓰러지는 병사들이 속출했으며, 특히 식수부족 문제는 미군을 몹시 괴롭혔다. 사실 식수는 계획대로 충분한 양을 드럼통에 실어서 성공적으로 양륙시켰으나, 그 식수를 담던 드럼통이 이전에 항공유를 담았었던 통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미 해병대가 작전을 준비하며 휴식하던 파부부 섬에서 해병대원들이 직접 이 드럼통들을 세척했으나 끝내 세척이 덜 되는 바람에 식수에 기름이 섞여서 이를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10] 하지만 이러한 각종 여러가지의 어려움 속에서도 5연대와 7연대는 섬 남쪽과 동쪽을 점령하는 임무를 일단은 완수했으며, 이제 1연대의 섬 북쪽으로의 진출만이 남아 있었다. 미군은 상륙 사흘째부터 비행장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F4U 콜세어를 띄워서 일본군이 요새화한, 요새화해놓은 '피투성이 코' 능선에 네이팜탄을 비롯한 대규모 공습을, 항공공격을 마구 퍼붓기 시작했다.

한편 체스티 풀러 중령은 섬 남쪽이 대부분 정리되자 1연대 3대대 K중대로 하여금 'The Point (100고지라고도 불린다)'를 점령하게끔 한다. K중대는 부족한 보급과 충분하지 못한 중화기 화력에도 불구하고[11] 고지를 함락하지만, 곧 일본군의 대규모 반격이 개시되었고, K중대는 고지에 고립된 채 무려 30시간 동안이나 일본군의 네 차례 대규모 역습을 맞았다. 마지막에는 중대원들도 거의 다 사망하고 탄약도 다 떨어져 대검과 돌덩어리를 집어 던지면서 싸웠다고 한다. 지원군이 도착했을 때에는 K중대에서 멀쩡한 사람은 18명밖에 없었으며, 이 중대에서만 157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참사가 벌어지고 말았다.

4.3. 피투성이 코 능선 전투

100고지를 함락한 이후 해병 제1연대는 피투성이 코 능선으로 진격한다. 이 피투성이 코 능선에 일본군의 주력이 주둔해 있었으며, 1연대는 거세게 공격하지만 모두 실패하고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공격로가 매우 좁은 길이었던 것도 한 원인이었고, 일본군이 너무 땅 속에 깊숙히 박혀 있다 보니 함포나 네이팜 샤워도 별다른 효과가 없었던 것도 한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일본군 저격수들은 부상자가 생기면 일단 가만히 있다가 부상자를 옮기려는 미군을 저격해서 사상자를 더욱 늘리기도 했다.[12]

게다가 미군이 피투성이 코 능선으로 접근하자 일본군은 또다시 반자이 어택을 시도하기 시작했는데, 일반적인 반자이 어택과는 달리 땅굴 속에 잘 숨어있다가 밤에 갑자기 튀어나와서 미군을 공격하는 나름 발전된 형태였기 때문에 미군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격렬하고도 치열한 혈전 끝에 해병 1연대 1대대의 손실률은 무려 71%에 달했다.[13] 해병 1연대전체로는 3,000명 중 1,749명으로 약 60%의 손실을 입었다. 이에 미군은 육군 제81사단을 추가적으로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육군 321연대가 펠렐리우 섬의 서쪽 해변에 상륙했고, 육군 321연대와 해병 5연대 및 7연대가 해병 1연대와 교대하여 함께 일본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공격조차도 그닥 효과가 없었기에 해병 5연대와 7연대는 거의 50%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이로인해 전투를 지속하기 상당히 어려운 상태가 되자, 미군사령부는 결국 해병 1사단 전체를 철수시키고 구역 자체를 육군 81사단이 담당토록 한다. 이에 육군 323연대가 추가적으로 섬에 상륙하고, 해병 제1사단은 파부부로 돌아간다. 육군 제81사단은 한 달여를 더 공격한 끝에야 일본군을 완전히 격파할 수 있었고, 일본군은 지휘관인 나카가와 쿠니오 대좌가 11월 24일 할복 자살하였으며 잔존 병력은 반자이 돌격 끝에 모두 전멸한다.

이어 1944년 11월 27일, 미 육군 제81사단 323연대가 일본군 최후의 거점을 함락하고, 펠렐리우에서의 일본군의 조직적인 저항이 모두 끝났음을 알렸다. 석 달 간의 혈전 끝에야 펠렐리우 전투가 끝난 것이다.

5. 결과


미군의 피해는 상륙 당일과 피투성이 코 능선 전투에서 특히 많이 발생했다. 미군전체의 피해는 10,000여 명을 넘는 극심한 피해에, 일본군과 크게 나을 것 없는 수준이었고, 이는 어떻게 보면 그 참혹했다는 이오지마 전투보다도 더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미군이 흘린 피에 비해서 섬의 전략적 가치는 너무나도 미미했고, 곧이은 필리핀 탈환전에서 일본군은 별 힘도 못 쓰고 필리핀을 너무나도 쉽게 내줘버린 덕분에 결국 이 섬은 그대로 방치되고 말았다.

게다가 작전이 금방 끝날 것으로 다들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종군기자들 역시 6명 정도밖에 오지 않았고, 뒤이은 이오지마 전투에서도 어마어마한 지옥도가 펼쳐진 데다가 오키나와 전투 역시 참혹하기로는 뒤지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전투가 되고 말았다. 한편, 일본군이 펠렐리우 섬에 동굴 진지를 워낙 잘 구축해놓은 덕에, 1945년에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일본군 패잔병들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일본 육군소속 야마구치 히사시(山口永)소위 및 휘하 육해군 패잔병 및 해군군속 33명이 동굴에 숨어 항전을 계속하다, 1947년 4월에 항복했다. 그들은 전쟁이 끝난 것을 모른채 항전 중이었고, 옛 상관이 전쟁이 끝났으니 항복하라고 권유하자 그제서야 항복했다고 한다.

이들 중 한명이 투항을 제안했지만, 야마구치 소위는 그를 처형했다. 그러나 일본 해군 제54경비대소속 츠치다 키요카즈(土田喜代一) 일본 해군상병이 탈주를 감행하여, 지나가던 미군 차량을 세워서 포로가 된후, 전역한 후 일본 본토에서 민간인으로 살고있던 옛 상관과 연락이 닿아, 나머지 동료들을 설득하여 투항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들이 2차 세계대전에서 정식으로 항복한 최후의 추축군이었다.

이후 츠치다 상병 본인야마구치 소위, 일본 육군 일등병이었던 도미야스 히로시(富安博), 해군육전대 소속 카메타니 나가나리(亀谷長成), 일본 육군 군조였던 나가이 케이지(永井敬司)씨 등이 NHK에 증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후 츠치다 키요카즈 씨는 2018년 9월, 일본 측 펠렐리우 참전자들 중 최후까지 생존해있던 나가이 케이지 씨는 2019년 11월에 98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1950년에도 펠렐리우 섬 북쪽의 엔게스부스 섬에서 일본군 한 명이 발견되어 송환되기도 했고, 1955년에는 일본 해군 설영대 소속 강제 징용 노동자였던 조병기 씨(1916년생)가 민가에서 식량을 훔쳐 먹다가 붙잡혀서 송환되기도 했다.[14]

6. 창작물에서의 묘사

7. 관련 문서



[1] 체스 용어로 킹이 체크 상태에 있지 않음에도 아예 움직일 수가 없는 교착상태를 말한다.[2] http://www.stamfordhistory.org/ww2_peleliu.htm[3] 특히 더 퍼시픽은 10부작으로 과달카날 전투부터 오키나와 전투까지 총 5개의 전투를 다루는데, 5회부터 7회까지 무려 3회를 펠렐리우 전투에 할애한다. 특히 펠렐리우 비행장 전투의 치열함과 참혹함은 이 드라마 이후 다시금 조명을 많이 받게 된 듯하다.[4] 필리핀 탈환전 항목에도 나오지만 전쟁 전 미국의 식민지인 필리핀 탈환과 70년 동안의 일본 식민지 통치로 이미 상당히 일본화가 진행되었던 대만 침공은 그 난이도가 크게 차이날 수 밖에 없었던 요인도 있다. 더불어 대만은 중국 본토와 너무 붙어 있어서 거점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기도 했고. 아무튼 필리핀으로의 진공의 효과는 바로 확인 되었는데, 필리핀 상실 시 연합함대의 작전 행동 능력이 사실상 끝장난다는 것을 인식한 일본해군이, 보유한 각종 전함들을 총동원해서 미군에게 한 타 싸움을 걸었던 것. 그것이 사상최대의 해전으로 호칭되는 레이테 만 해전.[5] 이 전략은 이오지마 전투를 총지휘하던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중장이 시작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사실은 펠렐리우가 먼저였다.[6] Bloody nose ridge. 후일 미군이 붙인 이름이다. 이 능선에서 미군이 상당히 많은 피를 흘렸음을 짐작할 수 있는 이름.[7] 실제로 타라와에서 상륙하면서 피를 많이 보기는 했어도, 전투 자체는 3일만에 끝났다.[8] 더 퍼시픽 5화에서 잘 묘사되는 장면이다.[9] 더 퍼시픽 6화에 잘 묘사되어 있다.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에서는 펠렐리우 섬 전투가 3파트가 있는데 비행장이 개활지라서 아군 탱크와 추락하거나 파괴된 비행기, 항공기의 잔해 등을 엄폐물 삼아서 진입해야만 한다.[10] 드라마 '더 퍼시픽' 5화에 문제의 드럼통 세척장면이 나온다. 드라마에서도 나오듯이 이 통이 뭐에 쓰일지 해병들에게 설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병대원들은 드럼통 세척에 그리 열성적이지 않았고 그 댓가는 결국 스스로 치러야만 했다. 침전 용사들도 억지로 먹었다가 토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11] K중대는 상륙 당시 기관총의 상당수를 잃어버렸다.[12] 다만 이런 전술은 이미 서부전선에서도 독일군 저격수들에 의해서 사용되고 있었다.[13] 71%의 인원이 모두 전사한 것은 아니고, 각종 부상자와 실종자들을 포함한 수치다.[14] 조병기 씨는 1941년 징용되었다가 돈을 많이 준다고 해서 그곳까지 흘러갔다. 같은 조선인 징용자 2명과 섬에서 숨어 지냈으나 한 명은 사살되고 한 명은 잡혀간 후 이후 운명은 모른다. 일본에서 보상금조로 11년간 밀린 임금을 받고 한국에 돌아와보니 부인은 남편의 전사 통보를 받고 이미 재혼한 지 오래였고, 서울에서 가난하게 지내던 아들의 집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이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봐선 불우한 여생을 보냈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