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67년 3월부터 10월까지 영국령 홍콩에서 일어난 반영 폭동으로, 반영폭동, 6.7 폭동이라고도 불린다.2. 배경
당시 영국령 홍콩은 겉으로는 경제적 번영을 이뤘지만 빈부격차가 심했고 영국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홍콩섬과 국공내전을 거치면서 중국 대륙에서 피난 온 중국계 홍콩인이 주로 거주하던 구룡반도 간의 왕래도 불편했으며 두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수단은 스타페리뿐이었다.[1]부정부패도 심해 '차(茶)값'이라는 은어로 뇌물이 성행하며 소방서에 뇌물을 줘야 화재 진압을 한다든지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와중에 1966년 스타페리 요금이 인상됐고 구룡반도 주민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구룡반도 주민들은 비폭력 시위를 벌였지만 홍콩 총독부는 이를 탄압했다.
3. 진행
이에 일부 홍콩인들과 시위대는 사회 문제를 영국 식민지 체제의 폐단으로 보고 그 해결책을 중국 본토의 문화대혁명에서 찾고자 했다.[2]
마침 1966년 포르투갈령 마카오에서 중국공산당 계열 소학교 인가 문제를 둘러싸고 친공산당 중국계 마카오인의 폭동인 12.3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 포르투갈령 마카오 총독부는 폭동을 강경 진압했으나 마카오인의 민심 이반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폭동 세력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었다. 12.3 사건의 결과는 홍콩 식민지 체제에 반감을 품은 홍콩인들에게 공산당이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암시했다.
중국공산당은 이를 이용하여 홍콩 공회연합회를 중심으로 문혁에 호응하던 일부 학생들과 빅토리아항[3]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1967년 폭동이 발생했다.
홍콩 총독부가 시위를 탄압하자 시위는 곧 폭동으로 격화됐고 조던 로드나 침사추이 일대에서 폭동이 벌어졌으며 홍콩 버스도 폭리를 취하다 걸려 구룡반도의 버스회사 KMB도 공격당했다.
영국령 홍콩 총독부는 이 때 긴급조치법을 만들었고 홍콩 당국은 이 폭동을 긴급조치법을 통해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에 중국이 크게 반발하여 홍콩 홍위병들에 대한 배상과 사죄를 요구하자 홍콩 당국은 이를 가차없이 거절했고 이에 자극받은 중국 본토의 홍위병들이 주중 영국 대표부 점령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홍콩의 친중화민국 세력들과 중국국민당 홍콩-마카오 지부도 영국 편에 서서 폭동 세력에 맞서 양안 간의 대리전이 되기도 했다. 비록 대만의 중화민국도 명목상 홍콩을 자국 영토로 여기지만 당시 영국과의 사이는 그리 나쁘지 않았으며 홍콩이 중국에 넘어가느니 차라리 영국이 지배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 영국 편을 들어준 것이다.
4. 결과
이 사건은 영국령 홍콩 당국이 더 이상 사회 문제를 방치할 수 없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1971년 홍콩의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받는 25대 총독 크리포드 머레이 맥클레호스[4]가 부임하고 1973년 피터 고드버라는 영국계 홍콩 경찰이 430만 홍콩 달러를 전횡하고 출국금지도 어긴 채 영국 본국으로 도망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계기로 염정공서가 창설되었다.
경찰훈련학교, 소방훈련학교, 전문적인 폭동진압 경찰기동대 PTU대, SDU 대테러 경찰특공대가 설립되고 부패 경찰관 전원 해고, 젊은 신임 경찰관 대거 채용 등 홍콩 경찰과 홍콩 소방처의 문제점이 해소된 것도 이 때다.
1976년 크로스하버 터널이, 1979년 MTR 쿤통선[5]이 개통하며 홍콩 섬과 구룡반도간 교통이 개선되고 영국 본토에서 반부패 전문가 초빙, 공중위생을 높이는 클린 홍콩 운동 등을 벌이며 1980년대 이후 홍콩은 지금과 같은 선진도시로 자리잡게 된다.
67폭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홍콩 반환 후 홍콩 특별행정구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는데 이들 중 많은 수가 홍콩 정치계로 진출하여 친중 혹은 친중 성향인 건제파의 일원으로 활동한다.
67폭동처럼 사회 개혁을 요구하였으나 반중공 성향을 띄는 2014년 홍콩 민주화 운동과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을 때 잠시 67폭동이 주목받기도 했다.
5. 같이 보기
- 극좌
- 아시아의 네 마리 용 - 홍콩의 전성기 시작점.
- 문화대혁명
- 천안문 6.4 항쟁
- 홍콩 민주화 운동
[1] 당시에는 크로스하버 터널과 MTR도 없었다. 크로스하버 터널은 1976년에야 개통하고 MTR은 1980년에야 쿤통선(1982년 췬완선으로 이관됐다.) 해저터널 구간이 개통했다.[2] 당시는 문혁의 실상이 알려지기 전이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본토에서 밀려든 피난민들에 의해 문혁의 실상이 알려졌다.[3] 당시에는 빅토리아항이 홍콩의 대표 항구였다. 1991년 콰이청구에 신항이 생기며 점차 위상을 잃어 가다가 2009년 화물선 입항이 금지되고 현재는 일부 여객 기능만 남아있다.[4] 1982년까지 재임했다.[5] 지금과는 달리 쿤통역 ~ 섹깁메이역 ~ 몽콕역(당시 명칭 아가일역) ~ 침사추이역 ~ 센트럴역(당시 명칭 차터역)을 잇는 노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