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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11:48:31

684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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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족으로부터 입수한 684부대 훈련병과 기간병, 간부들의 원본 사진
사각 나무판 위에 인골[1]과 우리의 신조 표어가 박혀 있다.

1. 개요2. 창설
2.1. 진짜 창설 의도
3. 부대원 모집과 출신4. 편성5. 대우 및 실상6. 최후7. 대중매체에서
7.1. 다큐멘터리7.2. 창작물
8.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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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실미도 특수부대

1968년 북한에서 김신조 등 31명의 무장게릴라(124군 부대)를 침투시켜 박정희 암살을 기도한 1.21 사태가 일어나자 이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김일성 암살을 목적으로 몇 개의 북파공작원 부대가 창설됐는데 이 중 하나가 공군 AISU의 제2325전대 소속 684부대다.

2. 창설

1968년에 벌어진 1.21 사태는 당시 정권 핵심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철희에게 각 군에 기존의 첩보부대(HID, UDU)와는 별도로 후방에 침투해 김일성 등 북한 수뇌부를 암살하거나 보복행위를 가할 목적의 새로운 북파공작 부대를 만들 것을 지시했다.

이때 공군 2325부대[2]장이었던 유태원 대령은 이철희에게 "우리 공군참모총장 체면도 생각해 달라. 다른 부대는 다 있는데 우리만 북파공작대가 없다."고 건의했고 이철희 국장은 북파공작을 담당하던 윤진원 공작단장에게 지시하여 공군 2325부대 소속 실미도 부대가 만들어졌다.

이후 중정의 윤진원 공작단장은 공군 2325정보부대의 공작과장 정봉선과 일을 추진하고 현장실무는 김응수 209파견대장이 맡았다. 이런 이중 지휘 체계 때문에 공군 측에서는 부대 창설·작전·해체는 중정 담당이며 자신들은 관리·훈련만 맡았다고 주장하고 중정 측에서는 공군에서 먼저 특수부대 창설을 요구했으며 훈련비를 횡령하며 무책임하게 부대를 운영했고 실미도 사건의 책임도 공군에 있다며 책임전가로 일관했다.

이에 대해 김두만 전 공군참모총장은 부대 해체 건의가 있자 "장지량 때 만든 것이고 공군 문제가 아닌데 뭘 신경 쓰느냐?"는 말을 남겼다. 반면 중정 실무자였던 윤진원 공작단장은 조사위측의 조사에 "공군이 알아서 정리해야지. 중정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하는가?"라고 답변하였다.

당시 중정의 결재라인은 윤진원 대북공작단장 ➔ 아주과장 ➔ 부국장 ➔ 이철희 해외공작국장 ➔ 차장 ➔ 김형욱 부장 순이다. 이후 중정부장이 김계원, 이후락으로 바뀌며 실미도 작전은 붕 뜬다.

군측에선 김순웅 교육대장 ➔ 김응수 209파견대장 ➔ 정봉선 공작과장 ➔ 유태원 2325부대장 ➔ 송격욱 정보국장 ➔ 장지량 공군참모총장 ➔ 김성은 국방부장관 순이다. 이후 참모총장은 김성룡, 김두만 순서였으며 장관은 최영희, 임충식, 정래혁 순서로 하다가 실미도 사건으로 잘렸다.

실미도 부대의 지위는 2325부대 예하 209파견대였으며 별명인 '오소리부대'로 불렸다. 분견대장은 김응수 소령이었으며 부대원들에 대한 호칭은 '공작원'으로 민간인도 군인도 아닌 신분이었다. 창설 준비는 1968년 2월 초 중순경 정봉선 공작과장이 준비하였으며 비밀 훈련을 위해 무인도[3]에 가까운 실미도에 김순웅 교육대장과 3명의 소대장, 기간병 등 10여 명이 부대 정리를 하고 공작원 모집은 김응수 파견대장이 3월 중순부터 시도하였다. 중정의 부대 창설 공문은 3월 7일에 발송되었다.

그리하여 응징보복 목적 부대가 갑작스럽게 각 군별로 하나씩 만들어졌다. 1968년 4월 창설이 결정되어 684부대로 불렸던 "실미도 부대"는 공군 소속이었고 "선갑도 부대"는 육군 소속, "장봉도 부대"는 해군 소속, "마니산 까치부대(MIU)"는 해병대 소속이었다. 침투의 용이성을 위해 북한 지역과 매우 가까운 서해 섬에 하나씩 자리한 형국이었다. 제2325전대가 훈련을 담당했던 실미도 부대에게 부여된 정식 명칭은 "2325전대 209파견대"였다. 이렇게 새로이 창설된 보복목적 부대들의 훈련을 총 책임졌던 건 조천성 HID 대장[4]이었다.

각 부대들의 인원은 김신조 부대와 똑같이 각 31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렇듯 각 군이 비슷한 성격의 부대를 중복 편성한 데는 박정희 대통령의 분노를 달래기 위한 각 군의 충성경쟁이 한몫했다는 게 같은 시기 AIU에 참여했던 특수임무수행자회 김희수 회장의 평가다.

파일:external/pds.joinsmsn.com/htm_2004011408184230003010-004.jpg

2.1. 진짜 창설 의도

이 부대가 '공작원' 하면 생각할 수 있는 형태와 상당히 다르고 관리도 워낙 부실했기 때문에 이 부대의 실체에 대한 파악과 평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온다. 그 중 하나가 이들 보복 목적 부대들이 실제 김일성 암살 등의 현실적인 목표를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상징적인 준비를 통해 대통령에게 충성심 보여주기의 산물이라는 의견도 있다.

정부에서 진짜로 작정하고 김일성을 암살하려 했다면 굳이 신생부대를 급조할 게 아니라 이미 수많은 전문 교육과 훈련을 받고 북파 경험도 많은 기존의 HIDUDU[5]의 베테랑 대원들에게 보복임무를 내리는 것이 훨씬 타당하고 가능성도 높았을 것이다.[6] 상식적으로 적국의 원수를 암살한다는 엄청난 작전을 실행하는데 신출내기들을 모아 열악한 무인도에서 겨우 몇 개월 훈련시키는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한 전력이다.[7]

북파공작을 떠나 특수작전 전문가들이고 수많은 북파 경험과 실전 전투 경험을 가지고 있는 HIDUDU 요원들조차도 주로 변방 지역 침투임무에 종사했지 평양 등 핵심부 침투는 성공하기 힘든 어려운 임무인데 겨우 몇 개월 특수훈련을 시키고 실전 경험도 없는 병력을 투입한다는 건 현실성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군에서 새로운 부대들을 만들어 창설식까지 열고 충성경쟁 법석을 떨었다는 건 역시나 박 대통령에게 보여주기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냥 기존의 부대(HID, UDU)를 시키는 것보다 새로운 부대를 여럿씩 만들어야 더 뭔가 열심히 하는 것 같은 티가 많이 나기 때문이다. 각 부대의 대원 숫자도 김신조 부대원의 숫자와 똑같은 31명씩으로 딱 맞춘 것도 이 부대들이 실질적인 임무보다는 보여주기용이며 상징적인 존재의의가 컸음을 시사한다.

즉, 1968년에 1.21 사태가 발생하자 대응하기 위해 4개의 보복 목적 부대를 창설한 이유는 정말 북한 수뇌부에게 보복하려는 현실성 있고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치밀한 계획으로 만들었다기보다는 적 공비가 청와대 코앞까지 뚫고 들어온 데 대한 대통령 등 통치자들의 분노와 충격, 불안을 일단 달래기 위해 '우리도 가만 있을 수는 없으니 일단 보복 준비를 하는 모양새는 만들어야 한다'는 보여주기 충성용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우리는 당할 뻔했어도 적 수뇌부를 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미리 포기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건 당시 절대권력자인 박 대통령의 눈 밖에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쿨타임이 올 몇 개월 뒤엔 분위기가 달라져서 실행명령을 내리지 않을 가능성도 있으니 일단 각 군에게 경쟁적으로 응징보복부대 명목으로 만들어 놓는 충성용 쇼를 해야만 하는 게 군 수뇌부와 중정의 입장이었을 것이다.

3. 부대원 모집과 출신

영화 실미도의 영향으로 죽으러 가는 거나 다름없는 이 임무에 투입하기 위해 사형수, 조직폭력배, 흉악범 등을 포섭해 특수부대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사회 하층민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모집책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원한 것이다.

원래는 정말 사형수를 포함한 범죄자를 모집하기 위해 중정에서 부산, 광주, 전주, 대구교도소에서 물색하였으나 법무부가 당시 사형수는 120명이었지만 "형 집행 이후 유가족에게 시신을 인도해야 하는데 특수부대에 선발되면 시신을 찾을 수 없어 사회적 문제가 된다."며 반대하였다. 즉, 교도소에 있는 범죄자들은 법무부에 의해 신원이 관리되고 있는 자들이며 무엇보다 가족들이 사형수의 행적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월간조선 2004년 2월호의 보도에 의하면 실미도 난동사건에서 684부대원 1명이 죽기 직전에 당시 정보부대 소속이었던 이명산에게 '국가에서 전국의 형무소를 돌아다니며 젊고 건강한 사형수들 31명을 끌어모았다'고 진술하였다고 한다. 다만 관련자들의 증언들이 나오면서 이 부대원의 진술은 잘못된 것임이 드러났다.

이에 갑자기 증발해도 모르거나 세간에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정도로 돈도 힘도 능력도 빽도 없는 사람과 생활고로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 무연고자 등 사회 하층민들을 모집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했는데 개인적인 반북반공 성향으로 인하여 스스로가 훈련하여 북한으로 잡입했다고 모르쇠로 일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모집 과정은 북파공작원이랑 똑같이 물색관이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사회 하층민들 중 젊고 혈기 좋은 남자에게 경제적인 지원과 양질의 일자리 보장을 조건으로 제안하는 식이었다.
1. 3개월 내지 6개월간 훈련
2. 월급 600달러
3. 신탄진 담배 지급
4. 훈련 종료시 소위 임관
5. 임무 수행 후 미군 부대 등 취직 알선

당시 5원이었던 담배의 12배 가격인 60원짜리 담배 2갑을 이틀마다 지급하겠다고 했고 당시 교사 월급이 1만 원이었는데 600달러(16만 원)를 월급으로 지급하겠다고 하니 가난하고 힘없는 젊은 청년들에게는 집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이었던 셈이다. 거기에 나라를 위해 일하므로 훗날 영웅 대접까지 받을 수 있다고 하니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어디에 있을 것이며 거절하여 지금과 같은 삶을 계속 살고 싶은 청년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번듯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니거나 저학력자[8], 저소득층[9], 무직자에 해당될 가능성이 높다. 시골의 순박한 농민이나 일용직 노동자를 비롯하여 쪼록꾼[10], 운동선수, 요리사, 서커스 단원[11]도 포함되어 있었다.

영화의 원작이 된 백동호의 소설에는 강인찬 같은 전과자들도 있는 반면 막노동으로 가족을 부양하던 한 집안의 가장도 있던 것으로 나온다. 이 사람은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매혈로 돈을 챙기다가 피를 뽑을 수 없게 되자 돈도 많이 벌고 대우도 좋다는 684부대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된다.

실제로 범죄자 출신을 모아서 만든 부대는 실미도 부대가 아니라 같은 성격을 지닌 육군 소속의 선갑도 부대다. 이 부대는 실미도 사건에 놀란 군 수뇌부가 해체해 버렸다.

군필자도 있었는데 모집 당시 만 35세였던 김창구(서커스 단원)는 육군 제1106야전공병단[12] 출신이며 38세의 최고령이었던 심보길은 무려 KLO 출신으로 북파임무까지 수행했다.[13]

종합하면 부대원 몇 명은 과거에 전과가 있긴 하나 범죄자들을 모아서 만든 집단은 아니었다. 모집 지역은 다음과 같다.
옥천 출신은 동네 친구 사이였고 파주 출신은 용주골 출신으로 서로 아는 사이였다. 이들은 모집 지역에 따라 서로를 '파주패', '대전패', '옥천패'로 불렀다. 출신 불명인 3명은 부대 창설식이 임박해서 마지막으로 들어왔는데 제대로 된 인적사항이 남아 있지 않다.

4. 편성

정식 명칭은 '공군 제2325부대 제209파견대'지만 공작원들은 '중앙유격사령부 제684특공교육대'로 기억하고 있었다.[14]

예산 집행 라인은 중앙정보부공군본부 → 2325부대장 → 공작과장 → 209파견대장 → 209교육대장 순서다.

지휘체계도 이와 같을 것으로 보이지만 중정과 공군은 문제가 터지자 서로 자기 소관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실미도 사건 이후 윗선 담당자 중에서 정래혁 국방부장관, 김두만 공군참모총장은 8.23 사건[15]으로 해임되었고 김재엽 2325부대장은 직무유기로 구속 후 선고유예, 이형복 공작과장은 직무유기로 구속되었다.

한편 684부대의 실질적인 지휘 편성은 다음과 같다.

209파견대장은 인천의 제807파견대에서 근무하며 한 달에 2~3번 정도 실미도로 가서 교육대장 면담만 하고 당일 귀환 하는 생활을 하였다.

중정부장부터 소대장까지 중에서 교육대장만 변함 없이 자리를 지켰다. 그렇다고 해서 실미도에만 있는 건 아니고 주말엔 외출하고 몇 달씩 필리핀, 오키나와로 해외 훈련을 떠나 부대를 비우는 일이 잦았다.

부대 관리자들은 가명과 가짜 계급을 사용했는데 부대 운영을 책임지는 공작과장 정봉선 중령은 전봉수 준장으로, 파견대장 김응수 소령은 김호 중령으로, 김순웅 상사는 대위, 각 중사 소대장은 중위 계급장을 사용했다. 공작원들은 계급은 없었으나 각자 군번이라는 것은 받아 기억하고 있었다.

5. 대우 및 실상

실미도 부대에는 월간 총 공작비로 주식비 60,000원, 부식비 280,000원, 봉급 120,000원[17] 등 총 460,000원이 지급되었다. 그러나 공작원들에게 봉급은 최초 3개월 동안 월 3,200원[18]이 지급되었을 뿐 이후에는 위에서 다 떼먹었다. 그나마 받은 월급은 사용할 때가 없어 조장이 갖고 있다가 소대장과 교관에게 외출비로 바쳤다고 한다. 공작원들 까지 내려오지 않아서 문제였지 월급은 1971년 부터는 5,000원[19]으로 인상되었고 중앙정보부에서 실제로 지출되었다.

주·부식은 최초 1개월간 쌀밥에 쇠고기국이 나오고 계란[20]도 하나씩 나왔지만 이후에는 된장국 또는 소금국에 보리밥, 1971년 7월부터는 밀밥이 나왔다. 너무 배고파서 개밥이나 돼지먹이를 몰래 훔쳐서 먹을 정도로 비참한 지경이었다.

위에서 다 떼어먹다 보니 기간병의 사정도 열악했는데 10개월 근무하면서 고깃국은 1~2번 뿐이었다는 증언이 있다. 다만 기간병은 밥은 더 퍼먹을 수 있고 매점에서 빵과 라면을 사먹을 수 있어 굶주리는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교관과 소대장은 쌀밥만 퍼주고 기간병들은 보리밥 중 쌀 위주로 퍼주다 보니 남은 건 보리뿐이어서 훈련병들은 이것밖에 먹을 수 없었다.

영화에서처럼 훈련병들은 잘 먹고 기간병들은 부러운 듯 바라본 것은 허구다. 즉, 첫달은 양쪽 다 잘 먹었고 이후부터는 다 못 먹어 똑같이 보리밥에 소금국을 먹은 것이다. 그러나 장부상으로는 매일 계란 1개, 두부 월 10~20상자와 쇠고기, 돼지고기, 생선이 나간 것으로 되어 있었다.

실미도 부대는 배고파서 청와대로 쳐들어갔다고 이유를 밝혔고 대중매체에서는 관심이 식으며 지원이 열악해진 것을 그 이유로 꼽고 있다. 그러나 따져 보면 주부식비와 월급은 처음이든 나중이든 계속 지출되고 있었으며 열악해지긴 커녕 오히려 지출액이 늘어났다.[21] 그러나 위에서 다 떼먹어서 가장 아래까지는 내려온 게 없다는 것이 진실이다. 가장 먼저 중앙정보부에서 크게 떼먹고 이후 지휘 계통에 따라 조금씩 덜 떼먹었다. 가장 말단인 교관에서까지 싹싹 해먹고 나면 훈련병은커녕 기간병이 먹을 밥도 없었다.

영화에서는 안성기가 대령 계급의 교육대장역을 맡아 엄격하지만 인자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실제 모델인 김순웅 상사는 훈련병과 공작원들이 '악질'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이 먹을 주부식과 월급을 마지막 단계에서 횡령한 범죄자였다.[22] 폭력의 수준이 국군의 구타가 만연한 당시 기준으로도 매우 심각했는데 몇몇은 패죽이고 시신은 임의로 처분하였다. 최종적으로 반란이 일어나는 원인도 김순웅이 소주 사건 때문에 훈련병 조장 3명을 교관실로 불러 과도하게 구타하자 그동안 쌓인 원한이 폭발하여 발생한 것이다. 시스템 탓, 상급자의 탓도 적지 않으나 그렇다고 해서 김순웅 상사의 개인적 악행은 가려질 수 없다. 그러나 후대에 가서는 영화까지 만들어 그를 미화하고 있으니 20세기판 원균이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다.

6. 최후

당초에는 훈련을 마친 후 실전 투입되어 보복작전을 완수하려는 계획이었고 박정희 충성파 관리들이 준비가 다 되었다고 보고했지만 박정희는 변심하여 보류하라고 지시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작전 계획은 계속 미뤄지기만 했다. 게다가 박정희 본인도 처음에는 북한의 무장공비 남파에 상당히 불쾌함과 분노를 했지만 보복을 하면 또 북한이 무장공비를 남파하거나 아예 전쟁을 벌일 수도 있고 미국과도 상의가 되어있지 않은 작전이라 미국을 자극할 수 있는 일이라는 판단을 하였다.

이후 극단적인 상호 보복보다는 남북대화와 화해 쪽으로 가야 한다는 기류가 우세해지면서 네 개의 보복부대들(실미도부대, 선갑도부대, 장봉도부대, 까치부대)은 사실상 버려져 방치된 채 수뇌부로부터 점점 잊혀져 갔다. 그러나 일단 지옥훈련으로 육성한 준 정예부대였기에 보복부대들 예산은 공군측에 꾸준히 지급되었지만 군 상층부는 물론 실미도 부대 고위장교들이 착복하면서 대우는 형편없어지기 시작한다. 이에 극심한 불만을 품은 상황에서 기간병들이 실미도 부대원 2명이 몰래 술마셨다는 이유로 두들겨 패자 실미도 부대원들은 폭발하여 훈련대장을 죽이고 기간병들을 전부 무력화 시킨 뒤 섬을 빠져나오는 실미도 사건이 벌어진다. 이에 놀란 중앙정보부와 군 수뇌부는 실미도 부대뿐 아니라 나머지 세 부대도 차례로 해체했다.

자폭했으나 운 나쁘게도 684부대 공작원 중 단 4명만 살아남아 체포되었고 병원에서 응급조치를 받은 뒤 수감되었다. 이때 국회측에서 조사위원회를 결성해 이들을 찾아가 면담을 했는데 이미 이들은 충성경쟁의 산물임을 감추기 위해 군 상층부들이 미리 접촉해 살려줄테니 절대 입 열지 말라며 구두로 사법거래를 하였다. 국회 조사위원회는 별 소득없이 돌아가자마자 군 상층부는 곧바로 구두로 한 사법거래를 어기고 비공개 군 재판으로 사형판결을 내려 남은 생존자 4명도 총살로 허무하게 사망하고 은폐되었다.

7. 대중매체에서

7.1. 다큐멘터리

7.2. 창작물

8. 기타



[1] 2005년 국방부 실미도 사건 진상조사 T/F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공작원들 사이에서 전염병이 돌자 담력 배양 겸 민간요법으로 실미도 내에 있던 중국 선원의 묘지를 파헤쳐 해골물을 마시게 했다고 한다. 특수 공작원들을 양성하려면 기간병들부터 강해져야 한다는 명목으로 유골을 빻아서 소주와 섞어 기간병들에게 강제로 먹였다고 한다. 남은 유골은 내무반 앞에 걸었는데 그게 부대 표지가 되었다고 한다.[2] 항공작전정보 수집·제공 부대[3] 중국인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아들이 기간병의 총에 맞아 죽고 부대에서 보상을 받은 후 섬을 떠났다고 한다.[4] 육사 8기, 제2대 육군특수전사령관, 한국가스공사 이사장 역임.[5] 1971년 이전에는 UDU가 북파공작을 담당했다.[6] 사실 이때는 휴전하고 20년도 채 안 지난 시점이다. KLO 시절부터 북파작전 해 본 고참 대원들이 현역으로 남아 있었으니 작정하면 단시간 내에 준비 못 할 것도 없었다.[7] 1968년 4월에 창설되어 9월에 작전을 실행할 계획이었다.[8] 무학력자 포함. 참고로 1990년대 이전에는 저학력의 범위는 중졸까지 해당되었으며 저학력의 범위가 고졸까지로 확대된 시기는 대학 진학률이 높아진 1990년대 이후다.[9] 빈곤층 포함.[10] 당시에는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여 매일 병원에 찾아와 본인의 피를 판매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피를 담는 병에 피가 '쪼록'소리가 나면서 채워진다고 하여 피를 파는 사람을 쪼록꾼이라고 한다는 설이 있다. 피를 팔아서 돈을 받아 챙긴들, 그것으로 먹을 것을 사먹어도 뱃속은 여전히 '쪼록'소리를 내며 배고픔이 계속된다는 데서 불리었다는 설도 있다.[11] 돌아가는 원판을 향해 단검을 던지는 장면을 보고 암살에 적합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12]제3공병여단.[13] 원래는 북파임무와 미군 부대 근무로 돈을 많이 벌었는데 노름 빚을 크게 져서 돈을 벌기 위해 684부대로 갔다.[14] 김신조 부대가 침투할 때 '경기도 유격사령부' 견장으로 위장한 것을 본떠 공작원들이 684부대를 '중앙유격사령부'로 인식하도록 위장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공작원들은 자신의 소속을 '중앙정보부가 지휘하는 중앙유격사령부'로 오인했다고. 실제로 공작원들은 '실미도 사건' 당일 "중앙유격사령부나 청와대에 가서 실정을 알리고 실패하면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함께 자폭하자"고 결의했다고도 한다. #[15] 예비역 육군준장 출신인 이세규 의원이 국회에서 실미도 사건을 일으킨 684부대원들이 사실은 북파공작원이었다는 사실을 폭로한 사건[16] 실미도 사건 이후 직무유기로 구속되어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17] 모집책이 공작원을 모집할 때 언급한 월급 16만원의 75% 정도의 금액이다.[18] 월 16만원의 5분의 1.[19] 월 16만원의 32분의 1.[20] 그 당시 계란이 거의 부의 상징이라 여길 만큼 굉장히 희귀한 식품이었다.[21] 훈련 대장이 김응수에서 한총으로 바뀌며 주부식비가 2배 더 보급담당자에게 지급되었다고 한다. 전임자인 김응수가 너무 심하게 해먹었기 때문에 후임인 한총이 깜짝 놀라 자기는 좀 덜 해먹고 남은걸 보급담당자에게 넘긴 것이다.[22] 다만 수차례 북파공작 임무를 수행한 켈로부대 출신인 것은 영화의 고증이 맞다.[23] 1990년 오류동에 있었던 공군 정보부대는 교육 직능만 남긴 채 정보교육대대로 개칭되었고 다른 직능은 818계획에 의거, 정보사령부777사령부로 통합, 이관되었다.[24] 11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