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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中キャンプ 1996 | Long Season 1996 | 宇宙 日本 世田谷 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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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당시 멤버. 왼쪽 뒤부터 모테기 킨이치 · 카시와바라 유즈루 · 오지마 켄스케 · 하카세 선 · 사토 신지. |
<colbgcolor=#fff><colcolor=#000>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결성 | 1987년 |
미나토구 메이지가쿠인대학 | |
데뷔 | 1991년 10월 21일 |
싱글 < ひこうき > | |
데뷔 앨범 | |
해체 | 1999년 |
재결성 | 2005년 ~ |
멤버 | 사토 신지†(보컬, 기타, 코넷) 모테기 킨이치 (드럼, 보컬, 샘플링) |
전 멤버 | 오지마 켄스케 (기타, 보컬) 카시와바라 유즈루 (베이스) 하카세 선 (키보드) |
장르 | 시부야계, 네오 사이키델리아, 드림 팝, 덥, 다운템포 |
레이블 | 포니 캐니언, 폴리돌 레코드 |
[clearfix]
1. 개요
フィッシュマンズ (Fishmans)1987년 일본 도쿄도에서 결성된 네오 사이키델리아 밴드.
2. 연혁
1987년 도쿄도 미나토구에서 결성된 피쉬만즈는 사토 신지의 풍선 바람 빠진 듯한 독특한 보컬, 모테기 킨이치의 빈틈 없는 드럼과 카시와바라 유즈루의 그루브한 록스테디[1] 베이스라인으로 유명하다. 비록 밴드가 해체되는 1999년까지도 주목 받지 못했지만 후에 앨범 空中キャンプ(공중 캠프), Long Season과 宇宙 日本 世田谷(우주 일본 세타가야)로 국제적인 컬트를 축적하여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특히 드림 팝과 네오 사이키델리아, 시부야계 장르의 형성에 영향을 끼친 선구자격 뮤지션으로 평가 받는다.음악적으로는 사토는 MUTE BEAT[2]의 앨범 'STILL ECHO'에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3] 모테기와 카시와바라는 밥 말리의 'Burnin' '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멤버 전원이 영향 받은 앨범으로는 커티스 메이필드의 'Live' ,[4] 제임스 브라운의 Doing It to Death, Carlton & The Shoes의 'This Heart Of Mine'[5], 카에타누 벨로주의 'Tropicalia 2'[6] 등의 영향을 받았다.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들을 전체적으로 보면 덥, 소울에서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활동 당대로선 크나큰 명성을 얻는 정도는 아니었지만,[7] 팬클럽 Neri를 기반으로 컬트적인 팬덤을 거느리고 있던데다 평론가의 푸시를 받은 끝에 밴드 해체 이후로도 힙스터를 중심으로 입소문이 점차 퍼져나는 대기만성을 이룩하던 뮤지션이었다. 특히 평론가들 사이에선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롤링 스톤 재팬 선정 100대 명반 등 일본내 명반 리스트에선 거의 결석을 찾기 힘들 정도다. 재팬 타임즈에서는 피쉬만즈의 앨범인 空中キャンプ와 Long Season을 두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본 록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로 평가하고 있다.[8]
범세계적으로도 Rate Your Music의 찬사를 한몸에 받는 밴드로서 Long Season은 올타임 31위, 연도별 1위 음반에서 1996년 1위, 비영어권 국가 중 랭킹 1위, 세계 장르별 랭킹에서 드림 팝, 네오 사이키델리아, 프로그레시브 팝의 세 장르에서 랭킹 1위의 평가를 받고 있으며, 宇宙 日本 世田谷는 앰비언트 팝 1위, 다운템포 장르에서 4위를 차지하고 있고 라이브 앨범인 98.12.28 男達の別れ는 라이브 앨범 1위, 올타임 39위를 차지하고 있다. 보어덤스, 코넬리우스와 함께 세계 힙스터들의 사랑을 받는 일본 뮤지션이다.
한국에도 피쉬만즈의 영향을 많이 받은 뮤지션들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공중그늘[9], 한받 등이 있다.
3. 멤버
3.1. 사토 신지
<colbgcolor=#fff><colcolor=#000> 사토 신지 佐藤 伸治 | |
본명 | 사토 신지 (佐藤 伸治) |
별명 | 사토짱 (サトちゃん) |
생몰 | 1966년 2월 16일 - 1999년 3월 15일 (향년 33세) |
출신지 | 일본 도쿄도 세타가야구 |
직업 | 음악가, 싱어송라이터, 기타리스트 |
경력 | Fishmans 프론트맨 |
악곡에 따라서는 기타나 코넷 등의 악기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피쉬만즈의 거의 모든 악곡의 작사, 작곡도 다룬다.
기본적으로 힘이 빠진 굉장히 가늘고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노래하다가 간간히 꽥 소리를 질러 포인트를 주는 특이한 창법이 특징으로, 국내 팬들의 비유로는 스폰지밥 목소리 같다는 평도 있을 정도로 사토의 보컬은 피쉬만즈의 정체성 중 하나이다. 다만 너무 개성이 강한 창법 탓에 진입장벽을 호소하는 이도 종종 있다.
고등학교 재학 때부터 록 밴드를 결성해 활동했다. 또, 메이지가쿠인대학 재학중에 입회한 써클 송 라이츠 내에서도 '시간' 등 몇 개의 밴드를 결성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드럼을 담당하였으나 후에 보컬로 변경하였다.
1987년, 학내의 이벤트에 참가하기 위해서 모테기 킨이치, 오지마 켄스케, 하시마츠 4명이서 피쉬만즈를 결성. 대학 졸업 후에도 활동을 계속하여 1991년에 메이저 데뷔.
1999년 3월 15일 오후 3시 55분, 도쿄시 내의 병원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하였다.[10] 향년 33세.
3.2. 모테기 킨이치
<colbgcolor=#fff><colcolor=#000> 모테기 킨이치 茂木 欣一 | |
본명 | 모테기 킨이치 (茂木 欣一) |
별명 | 킨짱 (欣ちゃん) |
출생 | 1967년 12월 15일 ~ ([age(1967-12-15)]세) |
일본 도쿄도 | |
직업 | 음악가, 드러머, 보컬 |
경력 | Fishmans 리더, 스카파라 드러머 |
재결성 후의 활동에서는 악곡에 의해 메인 보컬을 담당하기도 한다. 결성 때부터 메이지가쿠인대학의 동아리 '송라이츠'에서는 사토의 2년 후배이다.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늦어도 하카세 탈퇴 전부터 피시만즈의 리더로 지명되어 그 임무를 맡고 있다.
현재는 2001년 도쿄 스카 파라다이스 오케스트라에 가입, Mari Mari rhythmkiller machinegun에서도 드러머를 담당하고 있다. 카시와바라 유즈루, 카토 타카시[11]와 'Somany tears'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다.
3.3. 카시와바라 유즈루
<colbgcolor=#fff><colcolor=#000> 카시와바라 유즈루 柏原 譲 | |
본명 | 카시와바라 유즈루(柏原 譲) |
출생 | 1968년 12월 20일 ~ ([age(1968-12-20)]세) |
일본 | |
직업 | 음악가, 베이시스트, 프로듀서 |
경력 | Fishmans 멤버 |
1988년부터 1998년까지 재적.동아리 '송 라이츠'에서는 사토의 2년 후배이자 모테기의 동기였다.
1998년 12월 28일의 98.12.28 男達の別れ 투어 파이널을 가지고 밴드를 탈퇴해, 음악 업계에서도 일시 은퇴했지만, 사토가 죽은 후에 복귀. 2005년부터 재시동한 피쉬만즈 활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소마니테어스, 폴라리스, 오토타 멤버로서의 활동과 다른 아티스트의 프로듀싱도 하고 있다.
3.4. 오지마 켄스케
<colbgcolor=#fff><colcolor=#000> 오지마 켄스케 小嶋 謙介 | |
본명 | 오지마 켄스케(小嶋 謙介) |
출생 | 1966년 1월 28일 ~ ([age(1966-01-28)]세) |
일본 | |
직업 | 음악가, 기타리스트, 보컬, 그래픽 디자이너 |
경력 | Fishmans 멤버 |
일부 악곡에서 작사, 작곡도 했다. 오지마가 작사·작곡하고 자신의 탈퇴 후에도 피쉬만즈 라이브로 연주되고 있던 악곡으로는 '토요일의 밤' 등이 있다.
탈퇴 후 그래픽 디자이너로 그린을 설립해 음악 영화 관련 디자인을 하고 있으며 DJ로도 활동하고 있다.
1999년 3월 20일, 사토의 음악장에 기타로 참가. 탈퇴 이후 처음으로 피쉬만즈 멤버들과의 연주를 선보였다.
2005년 피쉬만즈 재결성 후에는 기타리스트로 라이브에 출연하기도 하며, 피쉬만즈 관련 아트워크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3.5. 하카세 선
<colbgcolor=#fff><colcolor=#000> 하카세 선 HAKSE-SUN | |
활동명 | 평소엔 하카세, 솔로활동은 하카세 선 |
출생 | 1967년 ~ ([age(1967-01-01)]세) |
일본 | |
직업 | 음악가, 키보디스트 |
경력 | Fishmans 멤버 |
일부 악곡에서 작사 작곡과 리믹스도 했다. 하카세가 작사·작곡하고 자신의 탈퇴 후에도 피쉬만즈 라이브로 연주되던 악곡으로는 'オアシスへようこそ' 등이 있다. 또 레코드판 MELODY에 수록된 'NIYABINGHI BABY'[12]는 하카세의 손에 의하여 자주 REMIX 되며, 좋은 평가를 받는 곡이다.
탈퇴 후 솔로[13]와 LITTLE TEMPO, KODAMA AND THE DUB STATION BAND의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UA의 '悲しいジョニー'[14]를 작곡하기도 하였다.
1999년 3월 20일, 사토의 음악장에 키보드로 참가. 탈퇴 이후 처음으로 피시맨즈 멤버들과의 연주를 선보였다.
2009년부터는 재시동한 피쉬만즈의 라이브에 참가하고 있다.
4. 역사
1987년 사토 신지, 오지마 켄스케, 모테기 킨이치, 하사마츠[15] 4명으로 결성. 당시 전원이 메이지가쿠인대학의 학생이었고 사토와 모테기, 하사마츠는 송라이츠, 오지마는 L.M.S[16]라는 음악 동아리에 소속되어 있었다.[17] 이후 1988년 하시마츠가 탈퇴하면서 카시와바라 유즈루가, 1990년 하카세가 가입해 5인 체제가 된다.밴드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멕시코에 실재한 복면 레슬러, 피쉬맨으로부터 사토가 명명했다고 결성 당시의 인터뷰에서는 대답하고 있다.[18]
1991년 싱글 'ひこうき'로 버진·재팬으로 데뷔.1995년에 걸쳐 5장의 앨범을 남긴다.
초기의 피쉬만즈는 레게나 록스테디를 기조로 한 팝적인 곡을 연주하고 있었지만 라이브 및 레코딩 경력을 거듭함에 따라 이들 장르의 요소에 더해 덥, 일렉트로니카, 록 음악, 펑크, 힙합 등의 요소를 도입한 독자적인 사운드를 구축하여 스튜디오 제작·라이브 퍼포먼스 양면에서 전개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는 당초 PA 엔지니어였던 ZAK의 레코딩 참가, 코지마 하카세 등 데뷔 초 멤버의 탈퇴와 그에 따른 서포트 뮤지션의 참가, 레이블 이적에 따른 제작 환경 변화라는 다양한 상황 변화가 있었다.
1995년 폴리도르 이적 후 발표한 첫 싱글 나이트 크루징이 차트인. 1996년 앨범 空中キャンプ는 그 높은 완성도와 독창성으로 호평을 받으며 음악계에서 일약 주목을 받게 되었다. DJ 등 클럽 음악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고 이때부터 테크노 잡지나 서브컬처 잡지에도 자주 오르내리게 됐다.
이어지는 앨범 Long Season에서는 35분이 넘는 표제곡 1곡만 수록하는 시도에 도전.
와이키키 비치/하와이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마지막 작품이 된 1997년 앨범 宇宙 日本 世田谷에서는 평온하고 내성적이면서도 그루브를 느끼게 하는 독자적인 사운드를 확립. 긴장감과 고양감을 합친 이들 일련의 작품군은 나중에 세타가야 3부작으로 불리며 90년대 후반 일본 음악씬에서 큰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라이브 활동도 정력적으로 실시해 데뷔 이래 기른 리듬대의 강고한 그루브와 서포트진을 포함한 입체적인 앙상블, 사토의 유일무이한 보컬에 더해 대작 Long Season의 라이브 재현이나 기존곡을 스튜디오판에서 대담하게 리얼레인지 하는 야심찬 퍼포먼스에 의해 라이브 밴드로서의 평가도 확고해져 갔다. 한편, ZAK의 이탈이나 와이키키비치/하와이 스튜디오의 폐쇄 등, 밴드를 둘러싼 환경은 계속 변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1998년 98.12.28 男達の別れ투어 마지막 공연을 끝으로 카시와바라가 탈퇴하며 밴드는 재편을 거듭하게 되었다.[19]
최후의 라이브 투어 후 불과 몇개월 뒤 1999년 3월 15일, 사토가 심부전으로 급사[20]하면서 밴드는 사실상 종지부를 찍게 된다.
2004년, OOIOO[21], UA와 같은 다양한 아티스트들의 커버를 포함한 헌정 앨범 Sweet Dreams for Fishmans가 발매 되었다.
2005년에는 공중과 우주의 컴필레이션 음반이 발매되었는데, 이 음반에는 베스트 히트곡과 함께 희귀곡과 미발매곡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피쉬만즈가 마지막으로 대중에게 공개한 10분 길이의 포스트 록 트랙인 A Piece of Future가 있었다. 이 곡은 나중에 코넬리우스, 사카모토 류이치, 나나오 타비토 등 다른 많은 일본 음악가들과 피쉬만즈 멤버들을 포함하는 프로젝트인 트리뷰트 프로젝트 Fishmans+에 의해 리믹스 되었다. 같은 해 11월 22일, RISING SUN ROCK FESTIVAL에서 재결성 라이브를 감행. 메인 보컬은 모테키 외 게스트 보컬리스트들이 맡았으며, 이후에도 다양한 게스트 뮤지션을 맞이하며 간헐적으로 라이브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18년 8월, 피쉬만즈의 모든 음악은 스트리밍 목적으로 스포티파이, 아이튠즈 및 유튜브에 제공되었지만 덜 알려진 자료의 대부분은 여전히 그 행방이 모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피쉬만즈의 팬층, 특히 북미와 유럽의 해외 팬층을 크게 늘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2021년 결성 초기부터 현재까지의 영상 소재와 역대 멤버·관계자들과의 인터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영화: 피쉬만즈」가 개봉되었다.
5. 디스코그래피
5.1. 스튜디오 앨범
- Chappie, Don't Cry (1991)
- King Master George (1992)
- Neo Yankees' Holiday (1993)
- Orange (1994)
- 空中キャンプ (1996)
- Long Season (1996)
- 宇宙 日本 世田谷 (1997)
5.2. EP
- Corduroy's Mood (1991)
- I Dub Fish (2016)
5.3. 라이브 앨범
- Oh! Mountain (1995)
- 8月の現状 (1998)
- 98.12.28 男達の別れ (1999)
- Long Season '96~7 96.12.26 Akasaka Blitz (2016)
- 若いながらも歴史あり 96.3.2@新宿LIQUID ROOM(2021)
6. 음악적 성향
초기 (1991, ひこうき) | 중기 (1996, すばらしくて Nice Choice) | 후기 (1998, ゆらめき In The Air) |
피쉬만즈의 초기 작품은 록스테디를 팝으로 승화한 느낌이 강하였다. 그 후 활동을 거듭하여 Mute Beat의 코다마 카즈후미의 프로듀싱의 영향으로 덥 요소가 들어갔고, 사토 신지의 취향인 펑크와 모테기의 힙합 등이 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노래는 시부야계에서 영감을 받은 음악을 향한 밴드의 방향을 예고하고 있었다.
세타가야 삼부작부터는 프로듀서 ZAK의 활약과 와이키키 비치에서 더 몽환적인 사운드를 낼 수 있는 새로운 스튜디오를 제공 받음으로써 드림 팝과 네오 사이키델리아 장르에 더욱 가까워졌다. 특히 35분이 넘는 반복적인 신디사이저 라인과 진화하는 멜로디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Long Season은 궁극적으로 드림 팝보다 클래식 교향곡에 가까운 록 음악을 만들어 녹음하였다.
그러나 1997년 宇宙 日本 世田谷 제작 도중 데뷔 초기부터 피쉬만즈에 많은 영향을 준 프로듀서 ZAK이 사토와의 음악적 갈등으로 인해 앨범이 발매되기 전에 밴드를 떠나게 된다. 이후 피쉬만즈는 1998년 Walking in the Rhythm과 それはただの気分さ의 확장과 ゆらめき In The Air 등 몽환적인 포스트 록 풍으로 다시 한 번 큰 변화를 가져왔다.
피쉬만즈는 한국에서는 평범한 시부야계 밴드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지만 덥, 드림 팝, 네오 사이키델리아, 레게, 사이키델릭 록, 프로그레시브 록, 얼터너티브 록, 포스트록, 팝 록, 앰비언트 록 음악, 시부야계, 사이키델릭 팝 음악, 힙합 등 수많은 장르들을 시도한 록밴드였다.
피쉬만즈는 음악적인 성향에서 많은 변화를 거친 록밴드이며 이러한 밴드는 비틀즈, 핑크 플로이드, 라디오헤드,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 플리트우드 맥 등 극소수를 제외한다면 이렇게 다양한 변화를 거친 밴드는 찾기 어렵다.
7. 영화
2021년에 개봉한 모테기 킨이치, 하나레구미, UA 등 중요 인물들의 인터뷰와 보컬 사토 신지의 노트, 인물과 역사 해설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피쉬만즈 결성 초기부터 현재까지 그려졌다.▼ 피쉬만즈 1차 예고편
▼ 시놉시스
90년대 도쿄에 그저 순수하게 음악을 추구했던 청년들이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피시만즈. 프라이빗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세타가야 3부작, 라이브 음반 1998.12.28 男達の別れ를 비롯하여 그들의 작품은 지금도 국내외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 길은 평탄하지 않았다. 세일즈의 부진, 음반사 이적, 잇따른 멤버 탈퇴, 1999년 보컬리스트 사토 신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홀로 남겨진 모테기 킨이치는 밴드를 해산하지 않고 사토의 악곡을 계속 울리는 길을 선택한다. 그 생각에 동료들이 공명해, 활동 재개. 그리고 2019년 사토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째 되는 봄, 피시만즈는 어떤 특별한 각오를 가지고 무대로 향한다. 과거 영상과 현재 라이브 영상, 사토가 남긴 말과 멤버•관계자의 증언을 이어가며 데뷔 30주년을 맞은 피쉬만즈의 궤적을 더듬는다.
그러나 그 길은 평탄하지 않았다. 세일즈의 부진, 음반사 이적, 잇따른 멤버 탈퇴, 1999년 보컬리스트 사토 신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홀로 남겨진 모테기 킨이치는 밴드를 해산하지 않고 사토의 악곡을 계속 울리는 길을 선택한다. 그 생각에 동료들이 공명해, 활동 재개. 그리고 2019년 사토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째 되는 봄, 피시만즈는 어떤 특별한 각오를 가지고 무대로 향한다. 과거 영상과 현재 라이브 영상, 사토가 남긴 말과 멤버•관계자의 증언을 이어가며 데뷔 30주년을 맞은 피쉬만즈의 궤적을 더듬는다.
[1] 1960년대 중반 등장한 자메이카의 음악 장르로 스카와 레게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2] 일본의 영향력 있는 덥 밴드였다. 종종 애시드 재즈, 앰비언트 및 트립 합의 선구자로 간주되며 이러한 장르가 등장하기 전에 비슷한 사운드의 음악을 연주하였다. 후에 Chappie, Don't Cry에서 MUTE BEAT의 트럼펫 코다마 카즈후미가 프로듀싱에 참여하기도 하였다.[3] 특히 피쉬만즈의 미발매곡중 'Happy Man'이라는 곡이 해당 앨범의 수록곡 'No Problem'에서 인스피레이션을 받았다고 한다.[4] 사토는 특히 커티스의 데뷔 앨범인 'Curtis'를 좋아했다고.[5] 특히 'Neo Yankees' Holiday』 에서는 'Give Me Little More'의 문구가 인용 되었다. 空中キャンプ(공중캠프)에 수록된 'Baby Blue'와 느낌이 비슷하기도 하다.[6] 특히 모테기는 인터뷰에서 세상에 완벽한 앨범이란 없다고 생각하지만 제일 완벽한 앨범을 고르라고 한다면 이 앨범을 고른다고.[7] 공중캠프로 오리콘 차트 88위를 기록한 정도가 최고 성적이었다. 동시대 플리퍼즈 기타나 피치카토 파이브가 오리콘 한자릿수대 순위를 기록하거나 NHK 홍백가합전에 출연하는 점에 비해선 상업적으론 큰 성공이라 칭하기는 힘든 편이다.[8] https://www.japantimes.co.jp/culture/2019/02/13/music/twenty-years-frontman-shinji-satos-death-fishmans-still-walking-rhythm/[9] 밴드 이름부터가 피쉬만즈 앨범 공중캠프에서 왔다.[10] 구체적인 사인은 공표되지 않았다.[11] 도쿄 스카 파라다이스 오케스트라의 기타리스트[12] 후에 베스트 앨범 '공중' Disc-2에도 수록[13] HAKASE-SUN 명의[14] UA의 대표적인 히트곡으로 유명하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고.[15] 피쉬만즈의 결성 멤버 였으나 1년도 안 돼서 탈퇴하였다.[16] 라이트 뮤직 소사이어티[17] L.M.S 동아리였지만 송라이츠에 자주 놀러가게 되면서 친해졌다고.[18] 그러나, 후의 인터뷰에서의 회답과 일치하지 않아 진상은 불명. 그러나 사토는 실제로 프로레슬링 애호가였으므로 유력하다. 덧붙여 라이브의 MC 때만 정관사를 붙인 더·피쉬만즈(The Fishmans)라고 자칭하는 일이 많다.[19] 탈퇴 이후 밴드 해산까지 밴드 차원에선 라이브나 작업 등 괄목할만한 행적은 없었기에 이 라이브가 사실상 피쉬만즈의 마지막 활동이었다. 카시와바라로선 탈퇴했음에도 밴드의 마지막까지 함께했던 셈이었다.[20] 일단 공식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져 있지만 사토 신지의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오랜 지병이나 인플루엔자 감염, 감기약의 부작용으로 사망했다는 소문도 있고, MUTE BEAT의 멤버이자 초기 작품의 프로듀서 였던 코다마 카즈후미는 자살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21] 보어덤스의 드러머 요시미 P-We가 만든 밴드로 멤버 전원이 여성으로 이루어진 밴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