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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7 23:25:28

MBC 창작동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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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MBC 창작동요제
파일:MBC 창작동요제 로고.svg
<colbgcolor=#000> 방영 국가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기획・주관 문화방송
제작 MBC프로덕션
채널 MBC TV
방영 형식 생방송
방영 횟수 28회
방영 기간 1983년 ~ 2010년 매년 5월 5일 어린이날

1. 개요2. 역사
2.1. 담당 부서2.2. 행사 관련2.3. 폐지 이후
3. 역대 대상 수상 곡들
3.1. 대상 이외 역대 수상 곡들
4. 역대 사회자5. 특징
5.1. 참가자 관련
5.1.1. 노을의 작곡자 논란
6. 기타7. 관련 문서

1. 개요

1983년부터 2010년까지 문화방송에서 개최하였던 대한민국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동요제.

2000년대 이후 MBC 홈페이지에서 윈도우 미디어 플레이어 기반으로 다시보기가 가능했으나 2010년대 이후 홈페이지 개편으로 중단되었고, 2016년 MBC Archive 개설 후 유료로 다시보기가 가능하다.[1] 그리고 창작동요제 CD에 수록된 원곡들도 찾아보면 많이 올라와 있으니 참고.

방송제작의 경우 1983년 1회 창작동요제부터 2008년 26회 창작동요제까지는 4:3 비율 SD 방송으로 제작되다가, 2009년 27회부터 HD 방송으로 전환했다.

2. 역사

역대 대회의 행사, 심사위원, 시상 내역, 본선진출곡 등에 관한 사항은 위키백과 항목 참고.

1970년대부터 텔레비전이 국민들에게 보급되기 시작해 대중문화가 발달하고 1980년대부터 컬러 텔레비전이 도입되면서 어린이들이 성인들의 가요를 동요 대신 부를 것이라는 걱정 때문에 동요계에서 위기가 있었고, 당시 전두환 정부에서 3S 정책을 펼치던 영향 때문인지 이 부분을 받아들여 이 동요제가 생기게 되었고, 이후 KBS 창작동요대회 등이 생기게 되었다.

명실상부한 최고의 동요으며 후술할 대상을 받은 노래들 뿐만 아니라, 아기염소, 아빠 힘내세요[2] 등 유명한 동요가 많이 발표되었다.

진행 방식은 해당 곡의 악보와 곡을 녹음한 CD를 보내 본선 진출자를 가리고[3] 어린이날5월 5일TV라디오로 방송되는 생방송으로 최종 결선을 치르는 방식이다.[4] 특이한 점은 MBC TV로 생중계되지만 주최자는 라디오본부라는 것이었다.[5] 28년 동안 400여 곡들이 배출되고 수상곡 중 20여 곡이 음악 뿐만이 아닌 여러 교과서에도 실렸다. 남북한 교류가 활발하던 2006년 24회 때는 북한금강산 온정각에서 개최한 바 있다.

하지만 1990년대 중후반부터 의상이 지나치게 화려해지고 입상에만 치중한 곡들이 속출하면서 수상곡의 인지도가 급격히 낮아지기 시작했다. 입상에 치중한 곡이란 음역대가 높고 길이가 긴 가곡 형태의 곡들이나 혹은 곡 중간에 박자가 갑자기 바뀌는 곡, 즉 노래가 어렵고 가창자의 가창력이나 기교가 크게 강조되는 곡들. 다르게 말하면 어른들이 듣기엔 좋으나 곡에서 순수한 동심이 느껴지지 않고 정작 어린이들이 따라부르기 지루하고 너무 어려운 곡이다. MBC 창작가요제냐 이에 따른 대회의 어린이 경연장화가 문제가 되기 시작했고, 2000년대 들어서는 어린이의 방송계 진출 수단으로까지 변질되었다. 이 때문에 동요 문화 변질을 부추겼다는 비판 역시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997년부터 대중성 있는 동요도 잘 나오지 않아 초기 창작동요제의 명성이 퇴색되었다. 심지어 2003년을 기점으로 인터넷 플래시 동요의 유행으로 인해 창작동요제 출신 동요가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최대 피해자 21회 게다가 그나마 성공한 곡인 '함께 걸어 좋은 길' 마저도 대중적 인지도는 높지 않다. 또 기업체의 협찬이 줄어들었다. 1997년 외환 위기의 여파[6]로 경기가 어려워져 제작비 지원도 줄어들었고, 오랫동안 제작비의 일부를 협찬하던 국내 아동복 시장[7]이 사양길을 걸으면서 기업체의 협찬도 줄어든 게 컸다.

1989년 제7회부터 2005년 23회까진 2부로 나눠서 진행했고 방송시간도 2시간 가량이었다.[8] 하지만 시청률이 매우 저조해지는 등의 이유로 2006년 24회 이후 1부 분량으로 축소되었고 참가자 수도 줄었다. 마지막회 직전인 27회에는 방송 분량이 1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2010년 제28회를 마지막으로 잠정 중단되면서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다.

2.1. 담당 부서

제1회부터 TV제작국 제작2부가 맡아왔으며 연출진은 라디오제작국 제작1부와 TV제작국 제작2부에서 차출된 PD들이 맡았다. 5~7회는 <뽀뽀뽀> 제작 부서였던 TV제작국 제작3부 PD 5명, 8~10회는 라디오국 제작2부 PD 1명이 각각 했으며 9회 땐 담당 기획부서가 TV제작국 어린이·청소년담당으로 바뀌기도 했다. 1992년 4월 해당 부서가 예능3담당으로 흡수된 뒤 7월 CP제 도입에 따라 예능3CP로 개편, 11회부터 라디오국 제작1부와 함께 연출진을 꾸렸다. 1994년에는 '팀' 단위로 바뀌고 1997년에는 TV제작국의 해체로 예능국[9]으로 기능이 이관되어 라디오국(2001년 이후 라디오본부) 간부들과 함께 돌아가며 맡다가 2003년 제21회부터 외주제작 체제로 전환되어 자회사 MBC프로덕션에 위탁했다.

2.2. 행사 관련

어째 사건 사고나 논란 거리가 많다.

2.3. 폐지 이후

정말로 2011년 어린이날에 MBC 창작동요제가 방송되지 않자 MBC는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에 어린이날에 뭔가 한다는 생색은 내야겠지만, 그렇다고 돈 써가면서 개최하긴 싫으니 지역 계열사울산MBC에서 개최하는 서덕출 창작동요제[26]를 2012년부터 전국에 방송하기 시작했다. 서덕출 창작동요제 또한 MBC 창작동요제가 중단되기 전[27]부터 개최되었으므로 MBC 창작동요제를 더 이상 개최하지 않으면서 서덕출 창작동요제를 전국으로 방송하는 것은 MBC 창작동요제의 역사를 이어가는 의미라기보다는 기존 대회의 공백을 메꾸는 것에 가깝다.[28] 그러나 2016년부터는 그마저도 포기했고, 서덕출 창작동요제도 다시 지역에서만 방송하고 있다.[29][30]

3. 역대 대상[31] 수상 곡들

||<width=80> 제1회
1983년 ||<width=100> 새싹들이다 ||* 작사, 작곡: 남제주 성산국민학교 좌승원. 1946년생으로, 교감, 교장을 거쳐 제주국제교육정보원장 역임 후 정년퇴임 하다 2024년 2월 18일 향년 78세에 세상을 떠났다. 역사상 최초의 창작동요제 대상 수상자라는 상징성 때문에 KBS 창작동요대회에서도 심사위원으로 초대되었다. 심지어 MBC 창작동요제에서 심사위원으로 위촉한 것은 KBS 창작동요대회보다 한참 뒤이다.
* 노래:이수지(남제주북국민학교). 이수지 어린이가 말하길, 당시엔 최우수상을 탈거라곤 생각도 못했다고. 제주도에 살아서 서울에서 하는 행사에 참가하기 힘들어서 역대 대상 수상자가 노래부를 때 새싹들이다는 다른 사람이 대신 부른 적도 있다.[32] 1991년에 이화여자대학교 영어교육과에 진학[33]한 뒤에는 제9회 대회부터 12회 대회까지 내리 초대되었고 이후에도 심사위원을 맡는 등 제1회 대회 대상 수상자의 소임을 톡톡히 했으며, 1995년 5월 11일 <그사람 그후>에선 초등학교 영어교사로 근무한다는 근황이 전해진 바 있다.[34]
* 여담으로 금영엔터테인먼트 번호가 4444다... 하지만 동심을 파괴하는 것과는 절대 관련없는 것이다. ||

3.1. 대상 이외 역대 수상 곡들

대상 수상곡들 말고도 찾아보면 좋은 곡이 많다.
이 밖에도 숨은 명곡이 많다. 자세한 정보는 링크 참고.
라디오 김이나의 별이 빛나는 밤에 라디오 우수상 축하합니다. 라디오 우수상 작년도

4. 역대 사회자

5. 특징

창작동요제라는 말 자체가 1983년에 MBC에서 만든 고유명사이지만, MBC 창작동요제를 고유명사로, 창작동요제는 일반명사로 취급[51]해서 '창작동요제'라는 이름을 쓰는 행사가 많다. [52]가족동요창작경연대회나, KBS창작동요대회, [53]창작국악동요제, EBS 고운노래발표회처럼 행사 운영 방식은 창작동요제와 똑같으면서 이름은 피해간 경우도 있다.

KBS의 누가 누가 잘하나에 이 동요제 출신 동요를 부르는 사람들이 나오기도 한다. 부채춤을 부른 신델라는 아예 MBC 창작동요제 당시 입었던 한복 색깔과 비슷한 한복을 입고 그 노래를 다시 부르기도 했다.

5.1. 참가자 관련

5.1.1. 노을의 작곡자 논란

1984년 제2회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노을'의 작곡가는 당시 국민학교 교사였던 안호철이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당시 서울음대 학생이었던 최현규가 작곡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58]

최현규는 군 복무 중에 노래 '노을'의 일부를 작곡해 뒀다가, 제대한 후에 곡을 완성하였다. 그 후 MBC 창작동요제에 곡을 출품하려 했지만, 당시 대회 참가 자격은 현직 초등교사로만 제한[59]되어 있었던 시절이기 때문에, 최현규는 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할 수 없이 당시 경기 평택 성동국민학교 교사였던 안호철의 이름을 빌려 출전하게 된것이다.

그러나 이 곡이 아무도 예상치 못한 대상을 받았고, 그후 현재까지도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동요 순위 1위에 꼽힐 만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큰 사랑을 받게 되었다.[60] 그 때문인지 동요제가 끝나면 곧바로 작곡가의 이름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던 안호철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나도 작곡가의 이름을 돌려주지 않았다. 안호철은 1996년에 제14회 MBC 창작동요제에서 제2회 대회 대상 수상곡의 작곡자 자격으로 심사위원까지 했다. 더군다나 제2회 대회에서 대상과 함께 받은 문교부 장관상을 근거로 서울로 전근까지 한 상태였다.[61] 작곡자의 이름을 돌려주는 것은 수상자격도 반납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서울로 전근한 근거까지 사라지는 것이 된다.

결국 1998년, 평택 안일여자고등학교(현 경기물류고등학교)장을 지낸 신귀복 한국음악저작권협회부회장이 이 사실을 전해듣고는 안호철, 최현규와 3자 대면 자리를 주선하게 되고, 그 자리에서 안호철은 자신이 '노을'의 작곡가가 아님을 분명히 밝혔으며, 작곡자 명의를 돌려줄테니 최현규에게 그해 가을까지 기다리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현규는 그 약속을 믿고 기다렸는데 안호철은 이후 목사 안수를 받고 교회 목사가 되었으며, 2년이 더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없이 잠적을 하였다. 이에 원 작곡자 최현규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게 되어 결국 2005년, 신귀복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이름으로 '노을' 곡에 대한 저작권 등록을 마쳤다고 한다.

6. 기타



7. 관련 문서



[1] 2회와 5회는 올라와 있지 않다. 대신 이곳에서 2회와 5회를 포함해 많은 회차를 무료로 볼 수 있다.[2] 1997년 대회에서 입선된 노래. 그 당시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다가 IMF 외환위기 이후 수많은 아버지들이 어려움을 겪던 과정에서 아버지들을 응원하던 노래로 서서히 알려졌다. 그러다 2004년 비씨카드 광고 음악으로 사용되고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 실리기도 하면서 자연스레 명곡이 되지만 표절 논란을 겪은 적도 있으며, 성차별 논란에 휘말리기도 한 나름 우여곡절이 많은 노래기도 하다. 자세한 건 문서 참고.[3] 2004년 22회 부터는 3차 실연심사도 거쳐야 했다.[4] 1984년 2회는 5월 4일에, 2002년 20회는 5월 3일에 방송. 83년 1회, 2006년 24회, 2007년 25회, 2009년 27회는 사전녹화 후 어린이날 당일 방송.[5] 이는 MBC 강변가요제도 마찬가지. 그래서 대학가요제와 달리 MBC 라디오를 통해서 동시 방송되었다.[6] 보통 120분 방송을 1부와 2부로 나눠 중간광고까지 포함해서 30분 정도 광고 시간이 들어가는데,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대회 때에는 광고조차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서 120분 가운데 광고시간이 10분 뿐이었다.[7] 최대 협찬자는 해피아이 아동복이었다. 막간공연을 하는 MBC어린이합창단 단원들이 옷을 여러 번 갈아입은 이유[8] 단 제20~21회는 1시간 40여분 내외.[9] 2001년 9월부터 2003년 3월 조직개편 전까지 'TV제작2국' 명칭이기도 했다.[10] 경연 때 이름없는 새를 부른 손현희, 대상 받고 이름없는 새를 다시 부른 손현희[11] 녹화방송에서 생방송으로, TV 단독 방송에서 TV, 라디오(AM), FM 동시 방송으로. 반주와 특별공연을 외주(ㅇㅇㅇ 실내악단과 리틀엔젤스 합창단)에서 MBC 관현악단과 어린이합창단으로. 거기다가 사전 제작한 출연자 영상도 추가.[12] 1989년 이전에는 '라디오제작국'이었으며 2001년 9월 조직개편에 따라 '라디오본부'로 변경.[13] 1회는 민용기(1933~2023), 12회는 차인태.[14] 리틀엔젤스 예술회관은 1981년 11월 준공된 당시에는 최신식이었다. 2007년 이름이 유니버설아트센터로 바뀌었고 2009년 현 모습으로 객석이 리모델링되었다.[15] 그나마 5월 3일에 행사한 걸 녹화해서 어린이날에 방송했다면 모를까, 5월 3일에 생방송으로 송출했다. 매년 5월 5일에 하던 행사를 5월 3일에 방송하면 사전에 관심을 갖고 정보를 찾는 사람만 알고 볼 수 있다. 평소에 관심이 없다가 "어린이날이 되었으니까 창작동요제를 볼까?"라는 생각으로 신문의 편성표를 뒤적거리던 사람은 "올해는 창작동요제를 안 하나?"라는 생각과 함께 신문을 덮어버리게 되는 것.[16] 결성은 1991년 9월, 앨범 발매는 3월 23일.[17] 거기다가 성인합창단이나 전속 개그맨, 문화인형극회 등도 참여했고, MBC미술센터(현 MBC ART)에서 직접 제작한 무대의상은 말할 것도 없고 대형 방송사가 주관하는 만큼 특별공연에 섭외되는 연예인의 수준도 장난 아니었다. 1985년 제3회 MBC창작동요제에는 조용필(!!)과 이선희를 섭외했을 정도였으니. 무엇보다도 이 시절에는 공연에 쓸 음악을 직접 만들었다.[18] 그나마 14회 대회는 MBC어린이합창단만 노래친구들로 바뀌었을 뿐 성인합창단, 전속 개그맨, 인형극단이 참여하는 공연의 수준은 유지했는데, 15회 대회부터는 공연 출연자가 노래친구들 밖에 없었다.[19] 출연자를 인터뷰하던 개그맨 서승만의 마이크가 꺼져서 사회자인 신동엽이 마이크를 바꿔줬다.[20] 사회자인 정려원의 마이크가 꺼져서 스탭이 마이크를 바꿔줬다.[21] 북한이탈주민 어린이였다.[22] "마이크 꺼졌어." "빨리 마이크 새로 갖다 줘."와 같은 말[23] 내가 하다하다 이제는 창작동요제까지 보러 가야 하나?라는 반응이 많았다고 한다.[24] 행사를 며칠 앞두고 동방신기의 교통사고 소식이 보도되었고 이에 동방신기의 출연 여부를 묻는 팬이 많았지만, 주최 측에서 확실히 알려주지 않아서 이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행사장을 찾았던 팬들은...[25] MBC창작동요제가 25회를 맞은 것을 기념해 초한 역대 참가자들은 25회까지 MBC창작동요제의 역사를 만들어온 사람들이니, 절대로 홀대받을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MBC가 역대 참가자들을 초대해놓고 홀대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니, 2004년 제22회 대회 때에도 한국동요 80주년(반달 문서 참고) 기념이라고 역대 참가자들을 초대해놓고는 홀대했던 것. MBC는 그 때 누구를 초대했는지 명단도 파악하지 않았다. 불과 3년만에 같은 행태를 반복한 것이다.[26] 울산 출신의 동요 작사가인 '서덕출'(1906~1940)의 이름을 땄다.[27] 서덕출 탄생 100주년을 맞은 2006년부터 시작하였다.[28] 이에 비해, KBS창작동요대회는 KBS창작동요대회(1989~1993)가 없어진 뒤에 KBS부산 창작동요대회(1994~2003)가 시작했고, KBS부산방송총국이 더 이상 창작동요대회를 개최하지 않게 되면서 다시 서울에서 개최(2004~)하기 시작했으므로, 대회 주체가 서울 → 부산 → 서울로 옮겼을 뿐 연속된 행사라고 볼 수 있다.[29] 어린이날에는 삼성문화재단이 개최하고 KBS가 중계하는 '초록동요제'도 방송되었는데, 공교롭게도 2016년부터 삼성문화재단이 더 이상 '초록동요제'를 개최하지 않는다고 결정했고 이에 KBS가 2014년부터 3월 초에 방송하던 KBS 창작동요대회를 어린이날에 방송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어린이날에 방송되는 창작동요제는 MBC 창작동요제(1985년~2001년, 2003년~2010년) -> 울산MBC 서덕출 창작동요제(2012년~2015년) → KBS 창작동요대회(2016년~2019년, 2021년~ )로 바뀌었을 뿐 계속 이어지고 있다.[30] MBC 창작동요제가 1983년과 1984년에는 5월 4일에, 2002년에는 5월 3일에 방송되었고 2011년에 폐지, 2020년에는 코로나 때문에 KBS 창작동요대회를 개최할 수 없었다.[31] 3회까지는 최우수상이었으나, 제4회부터 대상으로 변경되었다.[32] 물론 이러한 행태는 욕을 바가지로 먹었고, 그 다음부터는 꼬박꼬박 이수지를 초대했다.[33] MBC 창작동요제 역대 사회자 가운데 가장 실수를 많이한 이문세는 이걸 또 영문과라고 잘못 소개했다.[34] 자기 딸이 자신이 불렀던 노래를 부르면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고 후에 인터뷰했다.[35] 훗날 이 곡의 작사자는 아동 성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고.[36] 대회에선 상을 받지 못 했지만, 그 해 연말에 IMF 외환위기가 터지며 시대를 앞서간 노래가 되었고, 나중에는 CM송으로 쓰이면서 다른 의미로 유명해졌다.[37] 6번 참가자를 소개해야 하는데 7번 참가자를 소개했고 이에 차인태가 뒤늦게 수습하는 사고가 있었다. 녹화로 진행된 당시 방송에선 1번을 뺀 모든 출연자의 사회자 멘트와 인터뷰를 통편집한 채 노래부르는 모습만 나왔기에 이 실수가 당시에는 공개되지 않았고, 1년 뒤에 나온 창작동요제 음반에 수록되면서 공개되었다.[38] 참가자 인터뷰를 개그맨 김병조가 전담했기에 두 사람은 사회자석에서 나올 일이 없었고 중간중간 둘이서 주고받는 말만 했다.[39] 어린이에 맞추어 다정다감한 말투로 진행한 다른 사회자들과는 달리, 전혀 어울리지 않은 깍쟁이 말투로 진행했다.[b] 베테랑 라디오 DJ이건만, 유독 MBC창작동요제를 진행할 때 만큼은 대본을 보지 않고 자기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다가 말이 꼬여 얼버무리던가 말실수를 하는 편이 잦았다.[41] 이 대회에서 이문세가 말실수를 많이 했지만, 마지막엔 김은주가 14번 참가자를 15번 참가자로 착각해서 아직 노래부르지 않은 한 팀을 부르지 않고 마무리멘트를 하려고 하는 대형 사고를 칠 뻔했고 반대로 이문세가 그 말실수를 막아주었다.[b] [b] [44] MBC창작동요제를 진행할 때마다 말실수가 잦은 이문세이지만, 이 해에는 참가 학생들 외모 비하, 지역과 사투리 비하 등의 대형 사고를 쳤다.[45] 1967년생 방송인 겸 연기자[46] 이문세가 창작동요제를 진행할 때마다 말실수가 잦으니 이 해에는 아예 출연자 인터뷰도 없이 사회자들이 노래만 소개했다. 그럼에도 이문세는 작곡자 김범영을 김순영으로 잘못 부른데다가 아기염소 작곡자인 이순형과도 헷갈리는 방송사고를 냈다.[47] 역시나 짜증나는 진행은 여기서도 계속되었다.[48] 배기성이 제2회 MBC창작동요제에 출연해서 금상 수상곡인 소풍길(3회 대상곡인 즐거운 소풍길과는 다른 노래)을 불렀다는 얘기가 있지만, 소풍길을 부른 합창단은 서울신양국민학교 합창단이고 배기성은 부산토성국민학교를 졸업했으므로 잘못된 정보이다. 이에 대해 사회자로 나온 배기성이 밝히길 제2회 대회에 합창단원으로서 출연할 뻔 했지만 감기에 걸려서 객석에서 지켜봤다고 한다. 그런데 제2회 대회 본선 진출자 가운데에는 부산 출신 참가자가 아예 없으니 부산토성국민학교 합창단은 본선에 진출하지 못 한 것을 알 수 있다. 배기성, 합창단, 제2회 대회 등의 단편적인 정보가 뒤섞여서 배기성이 제2회 대회에 합창단으로 출연했다는 잘못된 소문을 만들어낸 것이다.[49] 전년도 대상 수상자인 조연정조여정이라고 잘못 부르는 방송사고를 냈다.[50] 이 때의 아이유는 이제 막 이름을 알리는 라이징 스타였다. 해당 해에 잔소리좋은 날이 연속으로 히트를 치며 국민 여동생으로 거듭난다.[51] 이름이나 제목의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는 대법원 판례도 있다.[52] 초록동요제의 전신으로 1984년부터 1992년까지 개최된[53] 국악동요제의 전신인[54] 1990년대 까지 당시 고무줄 놀이는 거의 여자아이들만 했고, 그 놀이를 할 때에는 동요를 불러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동요를 좋아하게 된 아이들이 많았다.[55] 1989년 제7회 창작동요제 대상곡 연날리기 작곡, 대표곡은 아빠 힘내세요.[56] 교사만 참가할 수 있었는데, 교사가 아닌 사람이 출품한 노래를 본선에 올렸다.[57] 같은 노래교실에서 출전한 다른 팀에 합류했다.[58] 아래의 내용은 작사자인 이동진의 개인 블로그에 정리된 내용이다.[59] 중고등학교 음악교사로까지 확대된 것은 1986년, 일반인 작곡가까지 가능해진 것은 1995년이다.[60] '새싹들이다'가 초등학교에서 많이 불린 것에 비해 대외적으로는 제1회 대회의 대상 수상곡이라는 정도의 위상 뿐인 반면, 노을은 일반인들도 많이 불렀다.[61] 문교부 장관상 수상자는 자기가 원하는 지역에서 근무할 수 있고, 보통 지방에 근무하는 교사가 서울로 전근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