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더스크롤 시리즈의 책 |
숫자 | A | B | C | D | E | F | G | H | I | J | K | L | M | N | O | P | Q | R | S | T | U | V | W | X | Y | Z (개별 문서) |
1. 개요
Brief History of the Empire엘더스크롤 시리즈에 나오는 책. 제3시대의 셉팀 왕조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엘더스크롤 2: 대거폴에서 처음 등장했으며, 이후 시리즈에서도 꾸준히 등장하였다. 총 네 권으로 이루어져있다.
2. 1권
원문
간략한 제국의 역사, 제1권
제국역사담당관 스트로나흐 크'토이지 3세 지음
타이버 셉팀의 통치 이전에, 전 탐리엘 대륙은 혼돈 그 자체였다. 시인 트래키지스는 그 불안이 지속되던 그 시대를 '피와 원한으로 점철된 나날'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타이버 셉팀이 대륙에 질서를 가져오기 위해서 싸웠던 왕들은 꽤나 욕심 많은 폭군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방탕했던 만큼 체계적이지 못했기에 셉팀은 그의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탐리엘 대륙에 평화를 가져왔다. 2E 896년의 일이었다. 그 다음 해에 황제는 새 시대의 개막을 선포하였으며, 그리하여 제3시대가 시작되었다.
타이버 셉팀 황제는 38년 동안 제위를 지켰다. 이 때는 농노에서 군주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에게 정의가 통용되는 시기였으며, 법이 제대로 지켜지던 경건하며 영광스러운 시기였다. 그가 죽자 마치 전 탐리엘 대륙이 눈물을 흘리는 듯 2주 동안이나 비가 내렸다.
황제의 손자인 펠라기우스가 왕위에 올랐다. 비록 제위기간은 짧았지만, 그는 아버지처럼 강하고 단호한 인물이어서 탐리엘 대륙의 황금기가 지속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셉팀 가문의 알려지지 않은 적대세력이 저주받은 암살조직인 다크 브라더후드를 고용하여, 임페리얼 시티의 신전지구에서 무릎꿇고 기도중이던 황제 펠라기우스 1세를 살해하였다. 그의 제위기간은 3년을 채 넘기지 못했다.
펠라기우스에게는 자식이 없어서 그의 당고모에게 — 타이버의 동생인 아그노리스의 딸 — 제국의 왕관이 넘어갔다. 그 때까지 실베나르의 여왕이었던 그녀는 킨티라 1세라는 이름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녀는 번영과 풍요로운 수확 덕분에 축복받은 제위기간을 지냈을 뿐만 아니라 예술, 음악, 춤에 대해 열렬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녀가 죽은 후, 아들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처음으로 유리엘을 황제의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유리엘 1세는 셉팀 왕조의 위대한 입법자이면서 독립조직과 길드의 후원자였다. 신중하지만 확고한 지원에 힘입어 파이터 길드와 메이지 길드는 탐리엘 대륙 전역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그의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인 유리엘 2세는 유리엘 1세 죽은 3E 64년부터 펠라기우스 2세에게 왕위를 넘긴 3E 82년까지 18년간 제국을 통치하였다. 비극적이게도 그의 치세는 충해, 전염병, 폭동으로 저주받았다. 그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부드러운 성격은 제국의 상황에 맞지 않았고 법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펠라기우스 2세는 아버지로부터 왕위와 더불어 빈약하기 그지없는 재무적, 사법적 관리로 인한 부채까지 물려받았다. 그래서 그는 원로의원회 구성원 전원을 해임하고 막대한 돈을 지불할 의향이 있는 자에게만 다시 지위를 부여했다. 탐리엘 제국의 왕인 봉신들에게도 이런 방식을 취하도록 장려하였는데, 그 결과 그의 17년 치세가 끝날 무렵, 제국은 다시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누구든 돈이 없으면 지혜로운 조언자도 바로 내쫓아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왕위를 이어받은 그의 아들인 안티오쿠스가 이런 정책으로 인한 여러 문제들과 직면해야 했다.
안티오쿠스는 보통 엄숙한 편인 셉팀 가문에서 확실히 눈에 띄는 자였다. 그는 수많은 애인과 부인들을 거느렸으며, 위풍있는 의상과 수준높은 유머감각으로 유명했다. 불행히도 그의 제위기간은 할아버지인 유리엘 2세 시기를 능가하는 내전으로 점철되었다. 3E 110년 발발한 서머셋 전쟁으로 인해 그는 왕위를 물려받은 직후 12년간을 탐리엘 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서머셋 아일즈에서 보내야만 했다. 서머셋의 왕들과 안티오쿠스의 연합군은 변칙적인 폭풍 덕분에 섬 왕국인 피안도네아의 오그넘 왕을 가까스로 격퇴했다. 일화에 따르면 폭풍우의 이면에는 마법을 사용하는 아르테움 섬의 시직 결사가 있다고 한다.
안티오쿠스 이후 왕위를 이어받은 킨티라 2세의 이야기는 제국 역사상 가장 슬픈 이야기 중 하나이다. 그녀의 당숙이자 솔리튜드의 통치자 포테마 여왕의 아들인 유리엘은 그녀의 아버지인 안티오쿠스의 제위 때 임페리얼 시티에서 있었던 수치스러운 스캔들을 언급하면서 그녀를 사생아라고 비난했다. 이런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대관식을 막지 못하자, 유리엘은 하이 락, 스카이림, 모로윈드의 불만을 품은 몇몇 왕들과 포테마 여왕의 지원을 받아 셉팁 제국에 대한 공격을 세 차례 가하였다.
첫 번째 공격은 하이 락과 해머펠을 구분짓는 리악 만에서 일어났다. 킨티라 2세의 측근들은 대량 학살을 당하고 그녀는 포로가 되었다. 그녀는 글렌포인트 혹은 글렌모릴 어딘가에 있는 감옥에서 2년간 고통받다가 비밀스럽게 감방에서 살해되었다. 두 번째 공격은 모로윈드 섬의 해변가를 따라 위치한 제국 수비대를 향해 가해졌다. 킨티라 2세의 남편인 콘틴 아린스가 요새를 방어하다가 죽었다. 마지막으로 이뤄진 세 번째 공격은 원로의원회가 군대를 둘로 나눠 서부 하이 락과 동부 모로윈드를 공격한 직후 이루어졌는데, 임페리얼 시티를 직접 포위공격했다. 쇠약해진 정부는 유리엘의 강력한 공격을 방어할 힘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겨우 2주간의 저항 끝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날 밤 유리엘은 왕위를 계승하고 자신을 탐리엘 제국의 황제로서 유리엘 3세라 선언하였다. 3E 121년의 일이었다. 그 직후 붉은 다이아몬드의 전쟁이 발발하는데, 제2권에서 서술할 것이다.
간략한 제국의 역사, 제1권
제국역사담당관 스트로나흐 크'토이지 3세 지음
타이버 셉팀의 통치 이전에, 전 탐리엘 대륙은 혼돈 그 자체였다. 시인 트래키지스는 그 불안이 지속되던 그 시대를 '피와 원한으로 점철된 나날'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타이버 셉팀이 대륙에 질서를 가져오기 위해서 싸웠던 왕들은 꽤나 욕심 많은 폭군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방탕했던 만큼 체계적이지 못했기에 셉팀은 그의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탐리엘 대륙에 평화를 가져왔다. 2E 896년의 일이었다. 그 다음 해에 황제는 새 시대의 개막을 선포하였으며, 그리하여 제3시대가 시작되었다.
타이버 셉팀 황제는 38년 동안 제위를 지켰다. 이 때는 농노에서 군주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에게 정의가 통용되는 시기였으며, 법이 제대로 지켜지던 경건하며 영광스러운 시기였다. 그가 죽자 마치 전 탐리엘 대륙이 눈물을 흘리는 듯 2주 동안이나 비가 내렸다.
황제의 손자인 펠라기우스가 왕위에 올랐다. 비록 제위기간은 짧았지만, 그는 아버지처럼 강하고 단호한 인물이어서 탐리엘 대륙의 황금기가 지속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셉팀 가문의 알려지지 않은 적대세력이 저주받은 암살조직인 다크 브라더후드를 고용하여, 임페리얼 시티의 신전지구에서 무릎꿇고 기도중이던 황제 펠라기우스 1세를 살해하였다. 그의 제위기간은 3년을 채 넘기지 못했다.
펠라기우스에게는 자식이 없어서 그의 당고모에게 — 타이버의 동생인 아그노리스의 딸 — 제국의 왕관이 넘어갔다. 그 때까지 실베나르의 여왕이었던 그녀는 킨티라 1세라는 이름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녀는 번영과 풍요로운 수확 덕분에 축복받은 제위기간을 지냈을 뿐만 아니라 예술, 음악, 춤에 대해 열렬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녀가 죽은 후, 아들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처음으로 유리엘을 황제의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유리엘 1세는 셉팀 왕조의 위대한 입법자이면서 독립조직과 길드의 후원자였다. 신중하지만 확고한 지원에 힘입어 파이터 길드와 메이지 길드는 탐리엘 대륙 전역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그의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인 유리엘 2세는 유리엘 1세 죽은 3E 64년부터 펠라기우스 2세에게 왕위를 넘긴 3E 82년까지 18년간 제국을 통치하였다. 비극적이게도 그의 치세는 충해, 전염병, 폭동으로 저주받았다. 그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부드러운 성격은 제국의 상황에 맞지 않았고 법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펠라기우스 2세는 아버지로부터 왕위와 더불어 빈약하기 그지없는 재무적, 사법적 관리로 인한 부채까지 물려받았다. 그래서 그는 원로의원회 구성원 전원을 해임하고 막대한 돈을 지불할 의향이 있는 자에게만 다시 지위를 부여했다. 탐리엘 제국의 왕인 봉신들에게도 이런 방식을 취하도록 장려하였는데, 그 결과 그의 17년 치세가 끝날 무렵, 제국은 다시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누구든 돈이 없으면 지혜로운 조언자도 바로 내쫓아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왕위를 이어받은 그의 아들인 안티오쿠스가 이런 정책으로 인한 여러 문제들과 직면해야 했다.
안티오쿠스는 보통 엄숙한 편인 셉팀 가문에서 확실히 눈에 띄는 자였다. 그는 수많은 애인과 부인들을 거느렸으며, 위풍있는 의상과 수준높은 유머감각으로 유명했다. 불행히도 그의 제위기간은 할아버지인 유리엘 2세 시기를 능가하는 내전으로 점철되었다. 3E 110년 발발한 서머셋 전쟁으로 인해 그는 왕위를 물려받은 직후 12년간을 탐리엘 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서머셋 아일즈에서 보내야만 했다. 서머셋의 왕들과 안티오쿠스의 연합군은 변칙적인 폭풍 덕분에 섬 왕국인 피안도네아의 오그넘 왕을 가까스로 격퇴했다. 일화에 따르면 폭풍우의 이면에는 마법을 사용하는 아르테움 섬의 시직 결사가 있다고 한다.
안티오쿠스 이후 왕위를 이어받은 킨티라 2세의 이야기는 제국 역사상 가장 슬픈 이야기 중 하나이다. 그녀의 당숙이자 솔리튜드의 통치자 포테마 여왕의 아들인 유리엘은 그녀의 아버지인 안티오쿠스의 제위 때 임페리얼 시티에서 있었던 수치스러운 스캔들을 언급하면서 그녀를 사생아라고 비난했다. 이런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대관식을 막지 못하자, 유리엘은 하이 락, 스카이림, 모로윈드의 불만을 품은 몇몇 왕들과 포테마 여왕의 지원을 받아 셉팁 제국에 대한 공격을 세 차례 가하였다.
첫 번째 공격은 하이 락과 해머펠을 구분짓는 리악 만에서 일어났다. 킨티라 2세의 측근들은 대량 학살을 당하고 그녀는 포로가 되었다. 그녀는 글렌포인트 혹은 글렌모릴 어딘가에 있는 감옥에서 2년간 고통받다가 비밀스럽게 감방에서 살해되었다. 두 번째 공격은 모로윈드 섬의 해변가를 따라 위치한 제국 수비대를 향해 가해졌다. 킨티라 2세의 남편인 콘틴 아린스가 요새를 방어하다가 죽었다. 마지막으로 이뤄진 세 번째 공격은 원로의원회가 군대를 둘로 나눠 서부 하이 락과 동부 모로윈드를 공격한 직후 이루어졌는데, 임페리얼 시티를 직접 포위공격했다. 쇠약해진 정부는 유리엘의 강력한 공격을 방어할 힘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겨우 2주간의 저항 끝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날 밤 유리엘은 왕위를 계승하고 자신을 탐리엘 제국의 황제로서 유리엘 3세라 선언하였다. 3E 121년의 일이었다. 그 직후 붉은 다이아몬드의 전쟁이 발발하는데, 제2권에서 서술할 것이다.
3. 2권
원문
간략한 제국의 역사, 제2권
제국역사담당관 스트로나흐 크'토이지 3세 지음
1권에서는 영광스러운 타이버 셉팀에서부터 그의 6대 종손녀인 킨티라 2세까지 셉팀 왕조의 8대 황제까지의 삶을 요약하여 기술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킨티라 2세가 포로가 되어 글렌포인트에서 살해당함으로써 셉팀 가문의 순수 혈통이 끊어졌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이 사건은 중요한 전환점이다.
유리엘 3세는 자신을 탐리엘 제국의 황제로 선언했을 뿐만 아니라, 저명한 성을 따와서 황제의 칭호를 유리엘 셉팀 3세라고 명명했다. 사실 그의 성은 아버지 혈통에 따라 만티아코라야 했다. 결국 그는 퇴위당하고 그의 범죄행위도 비방받았지만 황제의 칭호로서 셉팀이란 이름을 취한 관례는 그와 함께 사라지지 않았다.
붉은 다이아몬드의 전쟁이 지속되던 6년 동안 — 붉은 다이아몬드는 셉팀 가문의 유명한 휘장에서 따온 이름이다 — 제국은 제각각 분열되었다. 주요 전쟁 참가자들은 펠라기우스 2세의 남아있는 세 자녀인 포테마, 세포루스, 매그너스와 그들의 자손들이었다. 물론 포테마는 그의 아들인 유리엘 3세를 지지하였고 스카이림 전 지역과 북부 모로윈드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세포루스와 마그누그의 노력으로 하이 락은 변심하여 등을 돌렸다. 나머지 해머펠, 서머셋 아일즈, 발렌우드, 엘스웨어, 블랙 마쉬는 그들의 충성도에 따라 양분되었지만, 대부분의 왕들은 세포루스와 매그너스를 지지하였다.
3E 127년, 유리엘 3세는 해머펠의 이치다그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재판을 하기 위해 임페리얼 시티로 호송하는 도중 폭도들이 죄수를 호송한 마차를 덮쳐 그를 안에 가둬둔 채로 불태워버렸다. 그를 잡은 사람이자 삼촌인 세포루스는 임페리얼 시티로 계속 향하여 군중들의 환호속에 세포루스 1세로 왕위에 올랐다.
세포루스 1세의 제위기간을 특징짓는 것은 전쟁 뿐이었다. 어디를 보더라도 그는 친절하고 지적인 사람이지만 당시 제국에 필요했던 자는 위대한 전사였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는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10년간 끊임없는 전쟁 끝에 누이인 포테마를 패퇴시켰다. 일명 솔리튜드의 늑대여왕이라 불리는 그녀는 3E 137년 그녀가 통치하던 도시에서 농성전을 벌이다 죽었다. 세포루스는 누이보다 단지 3년을 더 살았다. 그는 전쟁 때문에 결혼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동생이자 펠라기우스 2세의 4 번째 자식이 왕위에 올랐다.
매그너스 황제는 왕위에 올랐을 때 이미 나이가 지긋했는데, 붉은 다이아몬드의 전쟁에서 반역을 꾀한 왕들을 처벌하는 일에 남은 정력의 대부분을 소진해야 했다. 일설에 따르면 매그너스의 아들이자 왕위 후계자인 펠라기우스 3세가 부친을 살해했다고 하는데, 그리 신빙성 높은 이야기는 아니다. 펠라기우스가 죽은 포테마 여왕을 대신하여 솔리튜드의 왕위를 이어받은 후, 거의 임페리얼 시티를 방문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펠라기우스 3세는 3E 145년에 왕위에 올랐는데, '광기의 펠라기우스'라고 불리곤 했다. 그의 기괴한 행동은 거의 처음부터 궁정에서 목격되었다. 그의 행동 때문에 정부고관들은 당황스러워 했고, 봉신 야를들은 불쾌해했다. 그리고 목을 매달려고 하는 바람에 제국 무도회장을 폐쇄했던 적도 있다. 결국 오랫동안 고통을 겪던 그의 아내가 제국의 섭정을 맡게 되었고, 펠라기우스 3세는 여러 치료시설과 정신병원으로 보내져 3E 153년 34살의 나이로 죽었다.
섭정을 맡은 아내는 남편이 죽은 후, 카타리아 1세란 칭호로 왕위에 올랐다. 킨티라 2세 죽음으로 셉팀 가문의 혈통이 끝났다는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이 다크 엘프 여성의 등극으로 정말로 셉팀 혈통이 쇠퇴하였다고 여긴다. 반면 그녀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카타리아가 비록 타이버의 후손이 아니지만, 그녀와 펠라기우스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황족의 혈통을 이어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의 부정적인 공세에도 불구하고 카타리아의 46년간 제위기간은 탐리엘 제국사에서 가장 축복받은 시기 중 하나였다. 임페리얼 시티에서의 생활이 마음에 편치않았던 카타리아는 제국 곳곳을 널리 여행하며 돌아다녔는데, 이는 타이버 즉위 이후로 어떤 황제도 한 적이 없던 일이었다. 그녀는 이전 황제가 파기한 동맹과 망가뜨린 외교관계로 인해 발생한 상처의 많은 부분을 복구했다. 국민들은 귀족들보다도 더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블랙 마쉬에서 발생한 소규모 전투에서 그녀가 전사한 사건은 음모론에 빠진 역사가들이 가장 다루기 좋아하는 주제이다. 예를 들어 특권을 박탈당한 셉팀 가문의 일족이 그 전투에 연루되어 있다는 현자 몬타리우스의 폭로는 말그대로 폭로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카신데르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이미 중년의 나이였다. 엘프 혼혈이었던 그는 마치 브레튼처럼 나이를 먹었다. 사실 그는 건강이 약했기 때문에 배다른 동생인 유리엘에게 웨이레스트의 통치권을 이미 넘겨준 상태였다. 그러나 펠라기우스, 나아가 타이버의 순수혈통과 이어져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왕권을 수락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놀랄 것도 없이 황제 카신더는 그리 오랫동안 왕위에 있지 못했다. 2년 후 그는 영원히 잠들어 있는 선대 황제들 곁으로 갔다.
유리엘 라리아트는 카타리아 1세와 펠라기우스 3세 사후 재혼한 남편인 갈리베르 라리아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카신더의 배다른 동생으로, 웨이레스트 왕국을 떠나 유리엘 4세로서 제위에 올랐다. 법적으로 그는 셉팀 가문의 사람이다. 왜냐하면 카신더가 웨이레스트의 왕이었을 때 그를 황실에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로 위원회와 국민들에게 그는 카타리아의 사생아일 뿐이었다. 게다가 유리엘에게는 어머니의 열정이 없었기에, 그의 기나긴 43년간의 제위기간은 선동이 난무하게 된다.
유리엘 4세의 이야기는 3권에서 서술하겠다.
간략한 제국의 역사, 제2권
제국역사담당관 스트로나흐 크'토이지 3세 지음
1권에서는 영광스러운 타이버 셉팀에서부터 그의 6대 종손녀인 킨티라 2세까지 셉팀 왕조의 8대 황제까지의 삶을 요약하여 기술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킨티라 2세가 포로가 되어 글렌포인트에서 살해당함으로써 셉팀 가문의 순수 혈통이 끊어졌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이 사건은 중요한 전환점이다.
유리엘 3세는 자신을 탐리엘 제국의 황제로 선언했을 뿐만 아니라, 저명한 성을 따와서 황제의 칭호를 유리엘 셉팀 3세라고 명명했다. 사실 그의 성은 아버지 혈통에 따라 만티아코라야 했다. 결국 그는 퇴위당하고 그의 범죄행위도 비방받았지만 황제의 칭호로서 셉팀이란 이름을 취한 관례는 그와 함께 사라지지 않았다.
붉은 다이아몬드의 전쟁이 지속되던 6년 동안 — 붉은 다이아몬드는 셉팀 가문의 유명한 휘장에서 따온 이름이다 — 제국은 제각각 분열되었다. 주요 전쟁 참가자들은 펠라기우스 2세의 남아있는 세 자녀인 포테마, 세포루스, 매그너스와 그들의 자손들이었다. 물론 포테마는 그의 아들인 유리엘 3세를 지지하였고 스카이림 전 지역과 북부 모로윈드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세포루스와 마그누그의 노력으로 하이 락은 변심하여 등을 돌렸다. 나머지 해머펠, 서머셋 아일즈, 발렌우드, 엘스웨어, 블랙 마쉬는 그들의 충성도에 따라 양분되었지만, 대부분의 왕들은 세포루스와 매그너스를 지지하였다.
3E 127년, 유리엘 3세는 해머펠의 이치다그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재판을 하기 위해 임페리얼 시티로 호송하는 도중 폭도들이 죄수를 호송한 마차를 덮쳐 그를 안에 가둬둔 채로 불태워버렸다. 그를 잡은 사람이자 삼촌인 세포루스는 임페리얼 시티로 계속 향하여 군중들의 환호속에 세포루스 1세로 왕위에 올랐다.
세포루스 1세의 제위기간을 특징짓는 것은 전쟁 뿐이었다. 어디를 보더라도 그는 친절하고 지적인 사람이지만 당시 제국에 필요했던 자는 위대한 전사였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는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10년간 끊임없는 전쟁 끝에 누이인 포테마를 패퇴시켰다. 일명 솔리튜드의 늑대여왕이라 불리는 그녀는 3E 137년 그녀가 통치하던 도시에서 농성전을 벌이다 죽었다. 세포루스는 누이보다 단지 3년을 더 살았다. 그는 전쟁 때문에 결혼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동생이자 펠라기우스 2세의 4 번째 자식이 왕위에 올랐다.
매그너스 황제는 왕위에 올랐을 때 이미 나이가 지긋했는데, 붉은 다이아몬드의 전쟁에서 반역을 꾀한 왕들을 처벌하는 일에 남은 정력의 대부분을 소진해야 했다. 일설에 따르면 매그너스의 아들이자 왕위 후계자인 펠라기우스 3세가 부친을 살해했다고 하는데, 그리 신빙성 높은 이야기는 아니다. 펠라기우스가 죽은 포테마 여왕을 대신하여 솔리튜드의 왕위를 이어받은 후, 거의 임페리얼 시티를 방문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펠라기우스 3세는 3E 145년에 왕위에 올랐는데, '광기의 펠라기우스'라고 불리곤 했다. 그의 기괴한 행동은 거의 처음부터 궁정에서 목격되었다. 그의 행동 때문에 정부고관들은 당황스러워 했고, 봉신 야를들은 불쾌해했다. 그리고 목을 매달려고 하는 바람에 제국 무도회장을 폐쇄했던 적도 있다. 결국 오랫동안 고통을 겪던 그의 아내가 제국의 섭정을 맡게 되었고, 펠라기우스 3세는 여러 치료시설과 정신병원으로 보내져 3E 153년 34살의 나이로 죽었다.
섭정을 맡은 아내는 남편이 죽은 후, 카타리아 1세란 칭호로 왕위에 올랐다. 킨티라 2세 죽음으로 셉팀 가문의 혈통이 끝났다는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이 다크 엘프 여성의 등극으로 정말로 셉팀 혈통이 쇠퇴하였다고 여긴다. 반면 그녀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카타리아가 비록 타이버의 후손이 아니지만, 그녀와 펠라기우스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황족의 혈통을 이어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의 부정적인 공세에도 불구하고 카타리아의 46년간 제위기간은 탐리엘 제국사에서 가장 축복받은 시기 중 하나였다. 임페리얼 시티에서의 생활이 마음에 편치않았던 카타리아는 제국 곳곳을 널리 여행하며 돌아다녔는데, 이는 타이버 즉위 이후로 어떤 황제도 한 적이 없던 일이었다. 그녀는 이전 황제가 파기한 동맹과 망가뜨린 외교관계로 인해 발생한 상처의 많은 부분을 복구했다. 국민들은 귀족들보다도 더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블랙 마쉬에서 발생한 소규모 전투에서 그녀가 전사한 사건은 음모론에 빠진 역사가들이 가장 다루기 좋아하는 주제이다. 예를 들어 특권을 박탈당한 셉팀 가문의 일족이 그 전투에 연루되어 있다는 현자 몬타리우스의 폭로는 말그대로 폭로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카신데르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이미 중년의 나이였다. 엘프 혼혈이었던 그는 마치 브레튼처럼 나이를 먹었다. 사실 그는 건강이 약했기 때문에 배다른 동생인 유리엘에게 웨이레스트의 통치권을 이미 넘겨준 상태였다. 그러나 펠라기우스, 나아가 타이버의 순수혈통과 이어져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왕권을 수락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놀랄 것도 없이 황제 카신더는 그리 오랫동안 왕위에 있지 못했다. 2년 후 그는 영원히 잠들어 있는 선대 황제들 곁으로 갔다.
유리엘 라리아트는 카타리아 1세와 펠라기우스 3세 사후 재혼한 남편인 갈리베르 라리아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카신더의 배다른 동생으로, 웨이레스트 왕국을 떠나 유리엘 4세로서 제위에 올랐다. 법적으로 그는 셉팀 가문의 사람이다. 왜냐하면 카신더가 웨이레스트의 왕이었을 때 그를 황실에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로 위원회와 국민들에게 그는 카타리아의 사생아일 뿐이었다. 게다가 유리엘에게는 어머니의 열정이 없었기에, 그의 기나긴 43년간의 제위기간은 선동이 난무하게 된다.
유리엘 4세의 이야기는 3권에서 서술하겠다.
4. 3권
원문
간략한 제국의 역사, 제3권
제국역사담당관 스트로나흐 크'토이지 3세 지음
1권에서는 타이버 1세부터 킨티라 2세까지 셉팀 왕조의 첫 8명의 황제 승계 이야기를 서술하였다. 2권에서는 붉은 다이아몬드의 전쟁과 유리엘 3세에서 카신데르 1세까지 전쟁 이후 제위한 6명의 황제에 대해 기술하였고, 끝부분에서 카신데르의 배다른 형제인 유리엘 4세가 어떻게 왕위를 승계하였는지 적었다.
한 가지를 상기시키자면 유리엘 4세는 셉팀 가문의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비록 그의 어머니가 수년간 제국을 통치했지만, 그녀는 정통 셉팀 가문의 황제인 펠라기우스 3세와 결혼한 다크 엘프였다. 유리엘의 아버지는 갈리베르 라리아트라는 브레튼의 귀족으로 펠라기우스 사후 카타리아 1세와 재혼한 사람이다. 카신데르 1세는 황제가 되기 전에 웨이레스트 왕국을 통치하였지만 허약하여 퇴위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는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배다른 형제인 유리엘을 법적으로 받아들인 뒤 왕위에서 물러났다. 7년 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제국을 물려받았다. 그로부터 3년 뒤, 유리엘은 다시 카신더가 남긴 것을 상속받게 된다.
유리엘 4세의 제위기간은 길고도 험난한 시기였다. 그가 법적으로 셉팀 가문의 일원이 되었고, 라리아트 가문이 높은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 당연히 그들은 셉팀 가문의 먼 친척뻘이다 — 원로의원회에서 그를 온전한 타이버 혈통의 계승자로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원로의원회는 카타리아 1세의 오랜 제위기간과 카신데르 1세의 짧은 제위기간 동안 많은 책임을 떠안았기 때문에, 강한 의지를 가졌더라도 유리엘 4세와 같이 외국인 군주가 그들에게 충성을 요구하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위원회와 황제는 여러 차례 반목을 거듭했고, 그때마다 위원회의 승리였다. 펠라기우스 2세 때부터 원로원은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휘두르는 권력은 결정적이었다.
유리엘 4세에 대한 원로회의 마지막 승리는 그가 죽은 후에 있었다. 유리엘 4세의 아들인 안도랙은 평의회 투표에 의해 상속권을 박탈당하고 순수 셉팀 혈통에 더 가까운 사촌이 3E 268년 세포루스 2세로 제위에 올랐다. 세포루스 2세의 제위기간중 첫 9년간은 안도랙을 지지하는 세력과 제국군과의 전투가 이어졌다. 현자 에라인티네가 '타이버 셉팀의 심장이 더 이상 뛰지 않는다고'말한 행위였다. 원로위원회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안도랙에게 하이 락 지방의 숀헬름 왕국을 내주었다. 그리고 안도랙의 후손들은 아직도 그 곳을 통치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보아 세포루스 2세에게는 안도랙보다 더 조심해야 할 적들이 있었다. 에라인티네의 말을 빌리자면 '음산한 악몽에서 튀어나온' 찬탈자 캐모런이란 남자가 데이드라 군대와 언데드 전사들을 이끌고 발렌우드에서 사납게 날뛰면서 왕국을 차례로 정복해 갔다. 그의 맹렬한 공격에 저항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었을 뿐만 아니라, 3E 249년 서서히 피를 흘리며 그나마 저항을 시도하던 자들도 대부분 사라졌다. 세포루스 2세는 찬탈자가 북쪽으로 진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더욱 더 많은 용병을 해머펠로 보냈지만, 그들은 매수당하거나 학살당하거나 언데드가 되었다.
찬탈자 캐모런의 이야기는 따로 책으로 쓸 가치가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팔루스 일트레가 쓴 '찬탈자의 몰락'을 읽을 것을 추천한다. 여기에 간단히 설명하자면, 찬탈자의 세력을 괴멸시킨 것은 황제의 노력과는 거의 관련이 없었다. 그 결과 국지적인 대승리와 함께 무능한 제국에 대한 적대심만 증가하였다.
세포루스 2세의 아들이자 왕위 승계자인 유리엘 5세는 국민의 의견을 제국의 잠재력으로 돌렸다. 그는 제국의 관심을 내부 투쟁으로부터 돌리기 위해 3E 268년 왕위에 오르자마자 일련의 침공을 시작하였다. 그는 3E 271년 로스크레아, 3E 276년 카스노쿠이, 3E 279년 이네슬리, 3E 284년 에스로니엣을 정복하였고, 3E 288년 매우 야심적인 계획인 아카비르 왕국 본토 침공을 착수하였다. 이 계획은 2년 후 아카비르의 이오니스 전투에서 유리엘 5세가 전사하여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탐리엘 제국의 위대한 전사 2명 중 하나로서 타이버 셉팀 다음가는 명성을 떨쳤다.
유리엘 5세의 어린 아들로부터 시작하는 마지막 4명의 황제에 대해서는 시리즈의 마지막인 제 4권에서 기술하고자 한다.
간략한 제국의 역사, 제3권
제국역사담당관 스트로나흐 크'토이지 3세 지음
1권에서는 타이버 1세부터 킨티라 2세까지 셉팀 왕조의 첫 8명의 황제 승계 이야기를 서술하였다. 2권에서는 붉은 다이아몬드의 전쟁과 유리엘 3세에서 카신데르 1세까지 전쟁 이후 제위한 6명의 황제에 대해 기술하였고, 끝부분에서 카신데르의 배다른 형제인 유리엘 4세가 어떻게 왕위를 승계하였는지 적었다.
한 가지를 상기시키자면 유리엘 4세는 셉팀 가문의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비록 그의 어머니가 수년간 제국을 통치했지만, 그녀는 정통 셉팀 가문의 황제인 펠라기우스 3세와 결혼한 다크 엘프였다. 유리엘의 아버지는 갈리베르 라리아트라는 브레튼의 귀족으로 펠라기우스 사후 카타리아 1세와 재혼한 사람이다. 카신데르 1세는 황제가 되기 전에 웨이레스트 왕국을 통치하였지만 허약하여 퇴위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는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배다른 형제인 유리엘을 법적으로 받아들인 뒤 왕위에서 물러났다. 7년 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제국을 물려받았다. 그로부터 3년 뒤, 유리엘은 다시 카신더가 남긴 것을 상속받게 된다.
유리엘 4세의 제위기간은 길고도 험난한 시기였다. 그가 법적으로 셉팀 가문의 일원이 되었고, 라리아트 가문이 높은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 당연히 그들은 셉팀 가문의 먼 친척뻘이다 — 원로의원회에서 그를 온전한 타이버 혈통의 계승자로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원로의원회는 카타리아 1세의 오랜 제위기간과 카신데르 1세의 짧은 제위기간 동안 많은 책임을 떠안았기 때문에, 강한 의지를 가졌더라도 유리엘 4세와 같이 외국인 군주가 그들에게 충성을 요구하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위원회와 황제는 여러 차례 반목을 거듭했고, 그때마다 위원회의 승리였다. 펠라기우스 2세 때부터 원로원은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휘두르는 권력은 결정적이었다.
유리엘 4세에 대한 원로회의 마지막 승리는 그가 죽은 후에 있었다. 유리엘 4세의 아들인 안도랙은 평의회 투표에 의해 상속권을 박탈당하고 순수 셉팀 혈통에 더 가까운 사촌이 3E 268년 세포루스 2세로 제위에 올랐다. 세포루스 2세의 제위기간중 첫 9년간은 안도랙을 지지하는 세력과 제국군과의 전투가 이어졌다. 현자 에라인티네가 '타이버 셉팀의 심장이 더 이상 뛰지 않는다고'말한 행위였다. 원로위원회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안도랙에게 하이 락 지방의 숀헬름 왕국을 내주었다. 그리고 안도랙의 후손들은 아직도 그 곳을 통치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보아 세포루스 2세에게는 안도랙보다 더 조심해야 할 적들이 있었다. 에라인티네의 말을 빌리자면 '음산한 악몽에서 튀어나온' 찬탈자 캐모런이란 남자가 데이드라 군대와 언데드 전사들을 이끌고 발렌우드에서 사납게 날뛰면서 왕국을 차례로 정복해 갔다. 그의 맹렬한 공격에 저항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었을 뿐만 아니라, 3E 249년 서서히 피를 흘리며 그나마 저항을 시도하던 자들도 대부분 사라졌다. 세포루스 2세는 찬탈자가 북쪽으로 진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더욱 더 많은 용병을 해머펠로 보냈지만, 그들은 매수당하거나 학살당하거나 언데드가 되었다.
찬탈자 캐모런의 이야기는 따로 책으로 쓸 가치가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팔루스 일트레가 쓴 '찬탈자의 몰락'을 읽을 것을 추천한다. 여기에 간단히 설명하자면, 찬탈자의 세력을 괴멸시킨 것은 황제의 노력과는 거의 관련이 없었다. 그 결과 국지적인 대승리와 함께 무능한 제국에 대한 적대심만 증가하였다.
세포루스 2세의 아들이자 왕위 승계자인 유리엘 5세는 국민의 의견을 제국의 잠재력으로 돌렸다. 그는 제국의 관심을 내부 투쟁으로부터 돌리기 위해 3E 268년 왕위에 오르자마자 일련의 침공을 시작하였다. 그는 3E 271년 로스크레아, 3E 276년 카스노쿠이, 3E 279년 이네슬리, 3E 284년 에스로니엣을 정복하였고, 3E 288년 매우 야심적인 계획인 아카비르 왕국 본토 침공을 착수하였다. 이 계획은 2년 후 아카비르의 이오니스 전투에서 유리엘 5세가 전사하여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탐리엘 제국의 위대한 전사 2명 중 하나로서 타이버 셉팀 다음가는 명성을 떨쳤다.
유리엘 5세의 어린 아들로부터 시작하는 마지막 4명의 황제에 대해서는 시리즈의 마지막인 제 4권에서 기술하고자 한다.
5. 4권
원문
간략한 제국의 역사, 제4권
제국역사담당관 스트로나흐 크'토이지 3세 지음
제 1권 에서는 타이버 셉팀으로부터 시작되는 셉팀 왕조의 8명의 황제에 대해 간단히 기술하였다. 2권은 붉은 다이아몬드의 전쟁과 그 뒤를 잇는 6명의 황제에 대해 기술하였고, 3권은 그 다음의 세명의 황제인 절망에 가득찼던 유리엘 4세와 능력이 부족했던 세포루스 2세, 그리고 영웅과도 같았던 유리엘 5세에 대해 기술하였다.
먼 바다 너머 아카비르에서 유리엘 5세가 죽었을 때 당시 유리엘 6세의 나이는 겨우 5살이었다. 사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아카비르로 떠나기 얼마 전 태어난 아이로, 유리엘 5세의 다른 자녀라고는 황제가 떠난 지 한달 후에 그의 하녀에게서 태어난 모리하타와 엘로이사라는 쌍둥이가 전부였다. 유리엘 6세는 3시대 290년에 즉위했으나, 그의 어머니 소니카는 유리엘 6세가 성인이 될때 까지, 그의 나이가 어리다는 명목 하에 제한적으로 섭정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카타리아 1세 이후로 언제나처럼 원로의원회가 쥐고 있었다.
원로의원회가 법을 제정하고 그 이익을 취하는 데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유리엘 6세는 3E 307 년, 22살이 될 때까지 왕권을 쥐지 못했다. 그는 몇년 동안 천천히 실권을 차지해갔지만, 원로원과 제한적이나마 섭정을 하던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통치권을 넘겨주고 싶어하지 않았다. 유리엘 6세가 왕위에 올랐을 당시, 그에게 주어진 권리는 오직 거부권 뿐이었다.
하지만, 유리엘 6세는 이 거부권을 자주, 강력하게 행사하며, 3E 313 년에는 탐리엘을 다스리는 것은 자신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지금은 없는 스파이 조직과 특수 부대를 사용하여 원로 위원회의 까다로운 구성원들을 따돌리고 억누를 수 있었다. 유리엘 6세의 이복동생인 모리하타 역시 그의 뛰어난 수완의 가장 충실한 조력자였다. 그녀의 영향력은 그녀가 훗날 윈터홀드의 울페 거슨 남작과 결혼하여 상당한 부와 영향력을 가지게 되면서 더 강해졌다. 유리엘 6 세를 두고 현자 우가릿지는 말한다. '유리엘 5세는 에스로닛을 정복했으나, 유리엘 6세는 원로원을 정복했다.'라고.
그러던 유리엘 6세가 말에서 떨어져 제국 최고의 치료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망하자, 모리하타가 그 왕위를 이었다. 소위 '자기 잇속만 차리는' 외교관들은 25살인 그녀를 탐리엘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라고 묘사하곤 했으나, 그녀는 확실히 두뇌가 명석하고 활발하며, 숙련된 외교관이었다. 그녀는 스카이림의 대마법사를 임페리얼 시티로 불러들여 타이버 셉팁 시대 이래 두 번째 제국 전투마법사로 임명했다.
모리하타는 유리엘 6세가 시작했었던 일들을 마무리하여 황제의 영향력이 미치는 제국의 범위내에서 진정한 정부형태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미 제국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에서 제국의 지위는 서서히 붕괴되고 있었다. 그녀의 할아버지인 세포루스 2세 때부터 이어진 혁명과 내전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태를 매듭짓기 위해, 모리하타는 무리하지 않으며 신중하게 반격하며 저항하는 영지들을 천천히 평정해나갔다.
모리하타의 군사작전은 대단히 성공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은 그녀의 신중한 움직임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토리클 로무스라는 콜로비안식 이름을 가진 아르고니안 의원이 그녀가 블랙 마쉬의 파병요청을 거부했던 것을 반대한 것에 대해 앙심을 품어, 3E 339 년에 자객을 보내 그녀를 살해했다고 알려져 있다. 로무스는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으나 즉결 심판에 회부되어 처형당했다.
모리하타의 자녀들은 모두 죽어 남아있지 않았고, 그녀의 쌍둥이 엘로이사 또한 4년 전 고열로 사망했기 때문에 25세가 된 엘로이시의 아들 펠라기우스가 펠라기우스 4세의 이름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모리하타의 뒤를 이어 서서히 대처하기 까다로웠던 왕국, 공작령, 남작령 들을 평정해나갔다. 하지만, 그는 모리하타의 신중함을 답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만큼 성공하지는 못했다. 오랫동안 제약 없이 지내왔던 왕국, 공작령과 남작령들은 펠라기우스 4세가 가하는 최소한의 제약조차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습했던 모리하타의 정책이 뛰어났던 덕분인지, 펠라기우스 4세가 죽을 때 까지 제국은 안정되고 부유한 나날을 보냈다. 탐리엘은 유리엘 1세 이래 그 어느 때 보다도 안정된 통합체에 가까웠다.
현재의 황제 유리엘 셉팀 7세는 펠라기우스 4세의 아들이며, 그는 그의 이모할머니 모리하타의 부지런함과 큰 할아버지 유리엘 6세의 정치적 수완과, 증조부 유리엘 5세의 군사적 통솔력을 이어받았다. 그의 21년간의 통치기간 동안 탐리엘에는 정의와 안정이 찾아왔다. 그러나, 3E 389 년 그는 제국 전투마법사인 제이거 탄에게 배신당했다.
유리엘 7세는 제이거 탄이 만들어 둔 차원에 갇혀버렸고, 탄은 그의 환영마법을 이용하여 황제의 모습으로 변장하였다. 그 후 10년동안 탄은 제국의 특권을 남용하기만 했을 뿐 유리엘 7세의 재 통합 계획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가 10년 동안 그의 왕으로 가장하는 동안, 그의 진정한 목적과 개인적인 성과가 무엇이었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3E 399 년, 신원을 알 수 없는 어떤 영웅이 제국 궁전의 지하 감옥에서 전투마법사를 무찌르고 차원의 감옥에 갇힌 유리엘 7세를 구출해냈다.
감옥에서 해방된 유리엘 셉팀 7세는 탐리엘을 재통합시킬 전쟁을 부지런히 재개하였지만, 재거 탄의 방해 때문에 전쟁의 추진력이 사라져버린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후 몇 년동안 타이버 셉팀의 지배하에 탐리엘이 번성했던 황금기가 다시 한번 열리리라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간략한 제국의 역사, 제4권
제국역사담당관 스트로나흐 크'토이지 3세 지음
제 1권 에서는 타이버 셉팀으로부터 시작되는 셉팀 왕조의 8명의 황제에 대해 간단히 기술하였다. 2권은 붉은 다이아몬드의 전쟁과 그 뒤를 잇는 6명의 황제에 대해 기술하였고, 3권은 그 다음의 세명의 황제인 절망에 가득찼던 유리엘 4세와 능력이 부족했던 세포루스 2세, 그리고 영웅과도 같았던 유리엘 5세에 대해 기술하였다.
먼 바다 너머 아카비르에서 유리엘 5세가 죽었을 때 당시 유리엘 6세의 나이는 겨우 5살이었다. 사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아카비르로 떠나기 얼마 전 태어난 아이로, 유리엘 5세의 다른 자녀라고는 황제가 떠난 지 한달 후에 그의 하녀에게서 태어난 모리하타와 엘로이사라는 쌍둥이가 전부였다. 유리엘 6세는 3시대 290년에 즉위했으나, 그의 어머니 소니카는 유리엘 6세가 성인이 될때 까지, 그의 나이가 어리다는 명목 하에 제한적으로 섭정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카타리아 1세 이후로 언제나처럼 원로의원회가 쥐고 있었다.
원로의원회가 법을 제정하고 그 이익을 취하는 데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유리엘 6세는 3E 307 년, 22살이 될 때까지 왕권을 쥐지 못했다. 그는 몇년 동안 천천히 실권을 차지해갔지만, 원로원과 제한적이나마 섭정을 하던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통치권을 넘겨주고 싶어하지 않았다. 유리엘 6세가 왕위에 올랐을 당시, 그에게 주어진 권리는 오직 거부권 뿐이었다.
하지만, 유리엘 6세는 이 거부권을 자주, 강력하게 행사하며, 3E 313 년에는 탐리엘을 다스리는 것은 자신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지금은 없는 스파이 조직과 특수 부대를 사용하여 원로 위원회의 까다로운 구성원들을 따돌리고 억누를 수 있었다. 유리엘 6세의 이복동생인 모리하타 역시 그의 뛰어난 수완의 가장 충실한 조력자였다. 그녀의 영향력은 그녀가 훗날 윈터홀드의 울페 거슨 남작과 결혼하여 상당한 부와 영향력을 가지게 되면서 더 강해졌다. 유리엘 6 세를 두고 현자 우가릿지는 말한다. '유리엘 5세는 에스로닛을 정복했으나, 유리엘 6세는 원로원을 정복했다.'라고.
그러던 유리엘 6세가 말에서 떨어져 제국 최고의 치료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망하자, 모리하타가 그 왕위를 이었다. 소위 '자기 잇속만 차리는' 외교관들은 25살인 그녀를 탐리엘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라고 묘사하곤 했으나, 그녀는 확실히 두뇌가 명석하고 활발하며, 숙련된 외교관이었다. 그녀는 스카이림의 대마법사를 임페리얼 시티로 불러들여 타이버 셉팁 시대 이래 두 번째 제국 전투마법사로 임명했다.
모리하타는 유리엘 6세가 시작했었던 일들을 마무리하여 황제의 영향력이 미치는 제국의 범위내에서 진정한 정부형태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미 제국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에서 제국의 지위는 서서히 붕괴되고 있었다. 그녀의 할아버지인 세포루스 2세 때부터 이어진 혁명과 내전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태를 매듭짓기 위해, 모리하타는 무리하지 않으며 신중하게 반격하며 저항하는 영지들을 천천히 평정해나갔다.
모리하타의 군사작전은 대단히 성공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은 그녀의 신중한 움직임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토리클 로무스라는 콜로비안식 이름을 가진 아르고니안 의원이 그녀가 블랙 마쉬의 파병요청을 거부했던 것을 반대한 것에 대해 앙심을 품어, 3E 339 년에 자객을 보내 그녀를 살해했다고 알려져 있다. 로무스는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으나 즉결 심판에 회부되어 처형당했다.
모리하타의 자녀들은 모두 죽어 남아있지 않았고, 그녀의 쌍둥이 엘로이사 또한 4년 전 고열로 사망했기 때문에 25세가 된 엘로이시의 아들 펠라기우스가 펠라기우스 4세의 이름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모리하타의 뒤를 이어 서서히 대처하기 까다로웠던 왕국, 공작령, 남작령 들을 평정해나갔다. 하지만, 그는 모리하타의 신중함을 답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만큼 성공하지는 못했다. 오랫동안 제약 없이 지내왔던 왕국, 공작령과 남작령들은 펠라기우스 4세가 가하는 최소한의 제약조차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습했던 모리하타의 정책이 뛰어났던 덕분인지, 펠라기우스 4세가 죽을 때 까지 제국은 안정되고 부유한 나날을 보냈다. 탐리엘은 유리엘 1세 이래 그 어느 때 보다도 안정된 통합체에 가까웠다.
현재의 황제 유리엘 셉팀 7세는 펠라기우스 4세의 아들이며, 그는 그의 이모할머니 모리하타의 부지런함과 큰 할아버지 유리엘 6세의 정치적 수완과, 증조부 유리엘 5세의 군사적 통솔력을 이어받았다. 그의 21년간의 통치기간 동안 탐리엘에는 정의와 안정이 찾아왔다. 그러나, 3E 389 년 그는 제국 전투마법사인 제이거 탄에게 배신당했다.
유리엘 7세는 제이거 탄이 만들어 둔 차원에 갇혀버렸고, 탄은 그의 환영마법을 이용하여 황제의 모습으로 변장하였다. 그 후 10년동안 탄은 제국의 특권을 남용하기만 했을 뿐 유리엘 7세의 재 통합 계획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가 10년 동안 그의 왕으로 가장하는 동안, 그의 진정한 목적과 개인적인 성과가 무엇이었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3E 399 년, 신원을 알 수 없는 어떤 영웅이 제국 궁전의 지하 감옥에서 전투마법사를 무찌르고 차원의 감옥에 갇힌 유리엘 7세를 구출해냈다.
감옥에서 해방된 유리엘 셉팀 7세는 탐리엘을 재통합시킬 전쟁을 부지런히 재개하였지만, 재거 탄의 방해 때문에 전쟁의 추진력이 사라져버린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후 몇 년동안 타이버 셉팀의 지배하에 탐리엘이 번성했던 황금기가 다시 한번 열리리라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