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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건국대학교의 박물관. 실제로는 '상허기념관'과 '박물관' 명칭이 혼용되고 있으며, 원래는 종로구 낙원동 282번지에 있었으나 건물을 그대로 가져와 지금 위치[1]에 복원해 놓았다. 건물 자체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오래되고 규모도 작아 박물관인지 모르는 재학생들도 많다.1층에는 건국대학교 설립자인 상허 유석창 박사에 대한 소장품이 전시된 상허기념전시실, 2층에는 기획전시실로 정기적으로 전시품이 바뀌는 역사유물전시실이 있다. 건국대학교의 설립자인 상허 유석창 선생을 기리는 '기념관'이자 교내 '박물관' 기능을 동시에 구비하고 있다. 1963년에 개교했을 때는 중앙도서관 1층(지금의 언어교육원)에 있었지만 1985년에 낙원동에 있던 서북학회 회관을 건국대 교내로 이전하여 박물관으로 사용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박물관은 고고, 역사, 미술, 민속, 학교역사자료 등 4,500여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동국정운(국보 제142호), 율곡 이이 선생가 분재기(보물 제477호) 등 국보, 보물급 유물도 소장하고 있다. 소장하고 있는 유물은 많지만 박물관 공간이 매우 협소하여 전시되지 못하고 있는 유물이 많아 대부분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다. 그래서 위 사진에서도 확인이 가능하지만 밖에 전시되어 있는 고인돌과 같은 유물도 있다.
일반인들을 상대로 인문학 강좌와 유적답사도 실시한다. 최근 도깨비에서 공유가 박물관 건물 앞에서 촬영하면서 공유를 따라 사진을 찍는 사람이 늘었다고 한다(...)
입장료가 없고 일감호 동선에서 가까이 있기 때문에 방문하는 사람이 많다. 특히 대학 탐방을 하는 중고딩들의 단골 코스. 실제로 건국대 박물관에서는 고교생들을 위해서 직업 체험(학예사) 교육 등을 제공하고 있다. 이 밖에 박물관에서 주관하는 행사들이 많은데 이는 건국대학교 홈페이지 공지 사항을 참고하도록 하자.
다가오는 건국대학교 건학 100주년을 맞아 상허기념관, 언어교육원, 상허기념도서관으로 이어지는 구릉 형태 공간 일대를 역사/미술/건축/조경이 어우러지는 캠퍼스의 명소로 가꾸고자 건립 기금을 모으고 있다.
2. 유래
건국대학사(史)와 단국대학사(史)의 자료를 참고하면 일제강점기부터 건국대학교 설립자인 상허 유석창 박사와, 단국대학교 설립자인 범정 장형 선생은 서로 인연이 깊어 만주에서 같이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범정 장형 선생은 백범 김구 선생이 있는 중국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일원으로 대외적인 독립운동을 지속했고 상허 유석창 박사는 경성으로 귀국한 다음 경성의전에서 의학을 수료해 민중병원을 세운 다음 대내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해나갔다. 이러한 인연은 해방 이후에 조선정치학관(前身 건국대학교)과 단국대학(前身 단국대학교)의 설립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3. 역사
3.1. 해방 전
이 건물은 1908년 종로구 낙원동에 애국계몽단체인 ‘서북학회’[2]의 회관으로 지은 붉은 벽돌 건물이다. 그래서 서북회관으로도 알려져 있다. 서북학회 소속 33명이 돈을 모아 청나라 기술자를 초빙하여 지은 당시로써는 현대식 건물이었다.준공 후 서북협성학교 교사로 쓰다가 이후 1910년 신식 교육기관인 오성학교로 개편해 교사(校舍)로 사용되었고, 1918년 오성학교 강제 폐교 후 약 4년 동안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가 교사로 사용하였다.
화신백화점의 설립자로 유명한 친일파 박흥식이 이 건물의 이사장으로 있었으며 이후 유석창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3.2. 해방 직후
해방 직후 낙원동[3] 낙원학사에서 건국대학교(建國大學校), 단국대학교(檀國大學校), 두 학교가 함께 기초 교육기관으로 발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단국대학교는 1947년 11월 1일[4], 건국대학교는 1949년에 낙원학사에서 미군정 문교부로부터 설립인가를 받았다. 낙원학사는 건국대학교 측이 조선정치학관 옛 건물로 매입하여 낙원동 캠퍼스 교사로 사용되었다.[5] 오늘날 건국대학교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한민당 본부로도 사용된 적이 있다고 한다.
3.3. 신익희의 계획
해방이 되자 해공 신익희가 중국에 있던 임시정부에서 돌아와 낙원동 교사에 대학 설립 계획을 세웠다.[6] 이 기성회에 참여한 이사 가운데는 대종교의 장로 범정 장형[7]과 그를 후원하는 백범 김구도 뜻을 함께 하고 있었다. 대학을 세우려면 교지확보가 필요한데 당시 국민대학설립기성회의 재단 이사였던 범정 장형은 백범 김구와 대학 교지 확보를 물색하던 도중 낙원동 학사를 찾았고, 교사에는 그보다 먼저 상허 유석창[8] 박사가 자리하고 있음으로 해서 서로 인연을 이어가게 되었다. 상허 유석창 박사 역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약하던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만주 땅에서 독립운동을 한 인물이다.[9] 이런 점에서 본다면 백범 김구, 범정 장형, 상허 유석창 이들은 다 같이 중국 땅에서 독립운동을 한 공통점이 있으며 해방이 되자 이들이 함께 낙원동 교사에서 반갑게 만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낙원동 교사가 대학 산실로 자리잡게 된 것은 상허 유석창 박사의 노력이 큰 힘을 발휘했다. 그는 1945년 10월에 사설강습소 건국의숙을 시작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교육사업에 뛰어들어 1946년 2월에 조선정치학관의 신청을 경기도에 제출하고 5월에는 학생을 받아 본격적인 낙원동 교사 시대를 열어 나갔다. 조선정치학관의 명칭은 그 후 정치학관으로 바뀌는데 이는 신생 한국의 정치다운 정치를 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는 설립자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한편 이 교사에서 수립된 1946년 3월에 발족한 국민대학설립기성회는 상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범국민적인 민족대학 설립 의지를 표명해 임정의 주 요인을 비롯해 백낙준, 이태규, 조윤제 등 교육계 인사 40여명이 이사진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당시 민족대학 설립을 경계한 미군정청의 견제에 부딪쳐 난항을 거듭했다. 특히 이 기성회는 설립 당시 5만평의 토지 기부를 약속했던 박기홍의 미망인 조희재 여사와 이사진으로 참여한 백범 김구, 범정 장형 등 임시정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손을 떼면서 재단을 구성할 교사 하나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 이는 국민대학관의 건학 운동이 사실상 신익희와 신민동지회가 주축이 되어 전개되면서 서로의 뜻이 맞지 않았다는 표면상의 이유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는 초기 김구 노선을 따르던 신익희가 한민당에 입당해 이승만 노선을 지지하면서 김구 노선을 지향하던 장형과는 정치적으로 대립 관계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였다.
한편 낙원동 교사에 있는 조선정치학관[A]은 아직 완전한 대학이 아니었다. 대학령에 의한 특종학교로 정규대학 학위를 수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문교부가 신교육제도 실시 이후 몰려들기 시작한 대학 설립 신청에 대해 일정한 기준을 정한 데서 비롯됐다. 1946년 11월 미군정청 문교부가 발표한 대학 설립 기준에 따르면 3개 이상의 단과 대학을 종합한 규모의 대학을 '종합대학', 인문 혹은 자연과를 한 단위로 한 기관을 '대학', 주야를 불문해 입학 자격은 고등 중학 졸업 정도로 수업연한 2개년 이상의 교육을 시키는 기관을 '대학관', 1년 미만의 고등학술강습을 하는 기관을 '학관'으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3.4. 갈등 및 해결
하지만 1947년 6월부터 이 교사 일부를 빌려쓰던 단국대학교가 그 해 11월 백범 김구에 의해 문교부로부터 정식 대학 설립인가를 받아 간판을 걸게 되면서부터 기존에 두 대학간에 갈등이 표출되기 시작했다.조선정치학관이 처음 학생을 받은 것은 1946년 5월 15일이었다. 당시 체제는 정치학과 20명, 경제학과 20명으로 각각 주·야간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인가가 난 것은 그 해 8월 29일. 초대 이사장에는 보성전문학교[11] 출신의 강기덕이 취임하고 초대 관장에는 김정실이 임용되었다. 그런데 이듬해 김정실이 단국대학으로 자리를 옮기면서부터 미묘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정치학관은 대학으로 인가되지 않은데다가 뚜렷한 자산이 없다는 이유가 약점이었으며, 여기에 백범 김구계 사람들이 떠난곳에 남아있던 신익희 중심의 국민대학기성설립회 간 명의이전이 제대로 되지 않아 소유권 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 반면 단국대는 1947년 11월 1일 문교부로부터 정규 대학으로 인가되면서 조선정치학관에 나란히 단국대학 간판을 걸고 대대적인 학생 모집에 착수해 19∼20일에 입학검정시험을 치렀다. 11월 30일에는 사학자 장도빈이 초대 학장에 취입하고 12월 3일 입학식이 거행되었다.
12월 8일에는 낙원동 교사와 이화동의 배영학관 교사에서 정식 강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시기에 조선정치학관과 단국대 학생들 중에서 비정규 학제로 들어온 학생들간에 갈등이 일어났다. 그 동안에는 한 교사에서 조선정치학관[A]과 단국대학이 나란히 간판을 걸고 수업을 해도 문제가 없었고, 조선정치학관과 단국대 두 교육기관끼리는 같은 교사 안에서 학내 교류도 활발히 있었지만, 정규 학제에 속한 학생들과는 달리 비정규 학제로 온 학생들 간에는 갈등 도화선이 일어나서 서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비정규 학제 내에서는 두 학교간에 학생들이 다른 곳으로 무료 편입하거나 정규학제로 재입학하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낙원동 학사 소유주인 상허 유석창 박사가 낙원동 학사를 공동 소유하는 방향으로 단국대학과 서로 합치자는 의견을 범정 장형에게 제기했지만 결국 두 사학재단의 긴밀한 협력과 의논끝에 조선정치학관은 1949년 9월 9일 조선정치대학으로 설립 인가되었고 단국대학은 그 해 12월 조선전기주식회사[13]가 관사로 사용하던 신당동의 조선전업협화장 건물 7백 평을 인수해 그곳으로 이사하면서 비로소 막을 내렸다.
3.5. 현대
지속적으로 낙원동 캠퍼스의 교사로 사용되었다가 1977년 도시계획에 의해 해체되었고, 1985년 현재 건국대학교 캠퍼스로 이전하여 상허기념관이자 박물관이 되었다. 이후 구 서북학회 회관은 2003년 6월 30일 등록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되었다.[14]4. 의의
낙원동 교사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광복 이후까지 무려 고려대, 건국대, 단국대의 전신을 수용한 교육 명문 건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5. 관련 사이트
건국대학교 박물관 홈페이지건국대학교 박물관 블로그
[1] 서울특별시 광진구 능동로 120. 건국대학교 서울캠퍼스 안이다.[2] 1908년 생긴 애국계몽운동 단체로 한양과 북부지방에서 활동한 지식인들이 설립한 단체다. 이 단체 출신 독립운동가로는 안창호, 이동휘, 박은식 등이 있다.[3] 참고로 대학 50년사를 보면 대학설립의 비사를 어느 정도 살펴볼 수 있는데 해방후 새롭게 정립한 '민족정기'로 1946년 8월 22일을 서울대학교의 '개교일'로 잡아 지금까지 기념해 오고 있듯이 설립 인가서를 기준으로 구제전문학교 형식이던 이화여자전문학교가 신청일자가 1946년 6월 24일로 기록된 제1호 인가서를, 연희전문학교는 1946년 7월 31일부로 기록된 제2호 인가서를 미군정청 학무국으로부터 받았고 보성전문학교는 신청일자가 1946년 8월 5일부로 기록된 제3호 인가서를 받아 8월 15일, 고려대학교라는 종합대학 승격의 법률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종로구 낙원동의 단국대학교는 1947년 11월 1일에 광복 최초 4년제 대학으로 정식 설립인가를 받았다. 1948년에는 숙명여자대학교, 중앙대학교, 한양대학교, 1949년에는 건국대학교, 홍익대학교가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1949년에 가인가를 받았던 경희대학교는 1952년에 정식 설립인가를 받았고 일제 때 평양에 있다가 폐교되었던 숭실대학교는 1954년 4월 15일, 당시 문교부로부터 정식 설립인가를 받았다.(한국대학신문의 광복이후 정규대학 설립인가 현황(1946년~1954년) 참조)[4] 단국대는 설립인가를 허락받은 대학들 중에서 백범 김구 선생에 의해 가장 먼저 4년제 대학으로 편제되었다.[5] 낙원동 캠퍼스는 주로 이부대학(야간대학) 학생들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가 광진구 캠퍼스로 통합되었다. 지금도 낙원동에는 건국빌딩 등 건국대학교 소유의 건물들이 남아있다.[6] 그는 임시정부의 법무장관, 문교부장, 외교부장 등 화려한 경력을 지닌 사람으로 국민대학설립기성회 이사장이 되고 국민대학교 건학의 기초를 닦았다.[7] 후일 단국대학교를 설립[8] 후일 건국대학교 설립[9] http://news.joins.com/article/2098756[A] 훗날 건국대학교[11] 훗날 고려대학교[A] [13] 현 한국전력[14] 구 서북학회 회관의 역사를 소개하는 동영상 https://youtu.be/ohweZXU4Nj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