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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17:55:16

내가 그린 히말라야시다 그림


파일:내가 그린 히말라야시다 그림 표지.jpg
1. 개요2. 상세3. 줄거리4. 등장인물5. 평가6. 작가의 말7. 기타

1. 개요

대한민국소설. 저자는 성석제.

2. 상세

소년을 스쳐 간 운명의 장난
작가 성석제가 들려주는 선택에 관한 이야기
어린 시절 미술보다 축구를 좋아했던
백선규는 자라서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 하나 있는데······.

3. 줄거리

소설은 '0'과 '1'로 구분되며 이 문서에서는 둘다 '나'로 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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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말해야 했을까? 아니, 모르겠어. 다시 그때가 된다면 내 입으로 말할 수 있을까. 아니 그것도 몰라. 내가 아는 건 내가 말할 수 있었지만 말하지 않은 그 일 때문에 내 삶이 달라졌다는 거야. 그래, 달라졌어. 그 일이 아니었다면 나는 다른 직업을 가졌겠지. 남을 속이는 교활한 장사꾼? 명령에 충실하게 따르는 군인? 뭘 했을지는 몰라도 지금처럼 그림을 그리고 있지는 않겠지.
'나'는 그림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다. 아무도 내 재능을 의심하지 않는다. 나 혼자만 내 재능을 의심한다. 그날 그 일이 있은 뒤부터 그랬다. 이것은 오직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 일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시작된다. 담임 선생님은 천수기 선생님으로 선생님의 아버지의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졸업생이 스무 명도 안되는 학교의 동창으로 두 사람은 그 졸업생 중 가장 친한 친구였다. 한 사람은 교사가 되었지만 한 사람은 자신이 되고 싶어 하던 화가가 되지 못하고 농사를 짓는 사람이 되었다. 졸업한 이후 각자 서른 살이 되기까지 만나지 못했지만 서로를 잊지 않고 있었다.

아버지는 염소를 팔러 나간 길에 장터에서 선생님과 십수년 만에 마주쳤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선생님이 아버지를 어린 시절 친구와 대조해보면서 유심히 살펴보았다. 선생님이 지켜보는 동안 아버지의 염소가 팔려서 손에 돈을 들고 읍내에 하나밖에 없는 화방으로 갔다. 그걸 보고 선생님은 아버지가 어린 시절 친구임을 확신했다. 군 전체 인구가 20만명, 읍내에 사는 인구가 5만명밖에 안 되는 작은 도시에서 화방까지 가서 그림 재료를 살 사람은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아버지를 뒤따라 화방 안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두 사람은 어린 시절처럼 친하게 대화를 나눈다. 여기서 두 사람은 서로의 직업과 사는 곳을 알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와 선생님은 각각 친구가 아들의 담임선생님이라는 사실과 제자 중에 친구의 아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나는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한테서 "읍에서 네 담임 선생님을 만났다. 그 사람이 아버지 친구더라. 그렇다고 너를 다른 아이들보다 잘 봐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오히려 이 아비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으려면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더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조회가 끝난 뒤에 선생님이 나를 부르고는 복도에 세워 놓은 채 말했다. "네 아버지가 내 친구라는 걸 들었겠지. 그렇지만 선생님은 친구의 아들이라고 봐주지는 않는다. 뭐든지 더 열심히 해야 해. 알았느냐?." 나는 두 사람에게 모두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예"라고 대답했지만 두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다.

그때 내가 하고 싶은 건 바로 공차는 것, 즉 축구였다. 나는 축구를 좋아해서 아이들과 같이 공을 차며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운동장에서 놀다가 집까지 십 나 되는 길을[1] 여우를 만날까 도깨비를 만날까 무서워하며 달려가는 일이 매일 반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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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림을 좋아해. 오늘도 미술관에 나와서 전시된 그림을 보았어. 유명한 전시회가 열리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어쩌다 한 번 가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은 화랑과 작은 미술관이 즐비한 거리를 돌아다니지. 걷고 또 걸으며 돌아다니다 눈과 다리가 아프면 찻집 '고갱과 고흐'로 가곤 해. 여기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서 창문 밖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옷차림과 얼굴빛과 하늘의 색깔을 비교해 보지. 사람의 배경이 되는 나무줄기의 빛깔과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에서 무슨 느낌을 얻기도 해.
'나'는 화가는 아니지만 그림을 좋아한다. 나는 그림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한다. 화가라는 직업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화가는 가는 시간을 화폭에 담아서 잡아 놓고 다른 사람의 시간은 마냥 흘러가도 모른 척하는 사람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고도 시치미를 뚝 떼고 "난 잘못한 게 없소"할 인물이다. 그 사람. 백선규.

나는 '백선규'와 같은 고향출신이자 초등학교 동창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상이란 상은 다 받고 다니더니 결국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가 되었다. 이 찻집 '고갱과 고흐'에도 백선규의 작품이 걸려 있다. 진품은 아니고 몇 년 전 어느 대기업의 달력에 인쇄된 그림을 오려서 액자에 넣은 것이다. 그 사람의 값비싼 작품이 이런 작은 찻집에 걸려 있을 리는 없지 않은가.

나는 백선규의 작품을 보며 그가 어떻게 이런 작품을 그릴 수 있는지 상상했다. 나는 인쇄된 작품도 저렇게 잘 그렸는데 그의 진품을 어떨지 상상이 안되었다. 진품이 생산되는 작업실은 아마 무균실 같은 곳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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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린 시절 고향 읍내에서는 5월이면 온 군민이 모두 참여하는 군민 체전이 열렸다. 공설 운동장 주변에는 임시로 장터가 만들어지고 사방이 잔칫집처럼 떠들썩했다. 풍선하늘로 날아오르고 솜사탕을 만드는 자전거 바퀴가 윙윙 돌고 어디선가 브라스 밴드의[2] 연주 소리가 울려 나온다. 브라스 밴드의 연주는 어쩌면 우리들 가슴속에서 대회 기간 내내 울려 퍼지는지도 모르겠다.

공설 운동장 안에서는 예선을 거쳐 올라온 선수와 팀들이 경기를 벌여서 우승자를 가린다. 그렇게 사흘 동안 경기가 벌어지고 내가 좋아하는 축구 결승전은 체육 대회 마지막 날인 토요일 오전에 열렸다. 운동장 곁을 지날 때 사람들의 함성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쿵쾅거렸지만 아쉽게도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이던 해에 그곳에 갈수 없었다. 선생님이 가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내가 얼마나 축구를 좋아하는지 몰라서 그랬겠지만 몰라서 잘못한 게 잘한 게 되지는 않았다. 그 축구 경기를 못 봐서 얼마나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는지 그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내가 그걸 얼마나 기다렸는데. 그때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도 없었고 영화를 보러 손을 잡고 극장에 가자는 사람도 없었다. 라디오에서 농촌의 어느 군민 체전 축구 경기를 중계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때 축구 결승전은 한번 보지 않으면 영원히 못 보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단 한 번밖에 상영하지 않는 영화같은 거였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걸 볼 기회를 빼앗아 간 것이다.
"넌 이번에 군 학예 대회 초등부 사생 대표로 나가야 한다. 반에서 두 명씩 나가서 학교를 대표하는 거다"

군민 체육 대회가 있는 그 주간에 군 전체의 초중고 학생들이 참가하는 학예 대회가 열리고 그 안에 사생(그림) 경연 대회가 있다. 1년 중 가장 큰 문예 행사여서 교장 선생님부터 좋은 성적을 낼 수 있게 조바심을 내며 닦달을 하는 대회다. 선생님들은 말할 것도 없이 각 분야별로 좋은 성적을 내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림 외에도 서예, 합창, 밴드, 글짓기까지 여러 분야가 있는데 그거야 어떻든 간에, 어디까지나 학예 대회는 4학년 이상만 나가는 대회였다. 그런데 선생님은 자신의 친구 아들인 내가, 자신의 친구인 아버지처럼 그림에 대단한 소질이 있다고 믿었다. 선생님은 친구가 재능을 살리지 못하고 농사를 짓고 있지만 그의 아들한테는 최대한의 기회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 방법이라는 게 정상적인 게 아니었다. 4학년 담임 선생님 중에 자신과 친한 선생님에게 말해서 그 반의 대표로 3학년인 나를 내보내기로 한 것이다.

물론 나는 대회에 나가서 내 이름을 쓸 수는 없었다. 4학년 5반 대표 중 하나로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대회장에서는 이름을 쓸 필요도 없었고 써서도 안되었다. 혹시 심사 과정에 부정이 있을지도 몰라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번호를 미리 주고 참가자는 자신의 작품 뒤에 이름 대신 그 번호를 적게 되어 있었다. 그거야 어떻든 상관없었다. 나한테 중요한 것은 그 대회가 열리는 날이 축구 결승전을 하는 날이었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경찰 대표가 결승전에 올라왔고 결승 상대는 진짜 축구 선수가 6명이나 있는 전문학교 대표였다.

사생 대회는 공설 운동장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교육청 마당에서 열렸다. 큰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에 연못이 있었고 거기서 군의 14개 초등학교에서 대표로 나온 아이들 수백 명이 모여서 그림을 그렸다. 플라타너스와 연못 주변의 풍경을 그리라는 게 과제였다.

나는 공설 운동장에서 함성이 들려올 때마다 목이 메었다. 응원하는 노래가 되풀이되다가 누군가 골을 넣었는지 엄청나게 큰 함성과 박수 소리가 들려왔을 때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얼른 그림을 그려서 제출하고 공설 운동장에 가려는 생각도 했지만 시간이 너무 없었다. 결승전이 사생 대회와 같은 시간에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빨리 그려 내고 운동장까지 뛰어간다고 해 봐야 결승전이 거의 끝날 시간이었다. 심사 결과는 그날 오후에 나올 예정이었다. 결국 나는 그해의 축구 결승전을 보지 못해서 눈물을 훔치며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상한 일은 그날 저녁 무렵에 일어났다. 선생님이 자전거를 타고 읍에서 십 리쯤 떨어진 우립 집을 찾아온 것이다. 가정 방문을 하러 온 게 아니었다. 선생님은 손에 술병을 들고 왔다. 선생님은 아버지를 만나서는 어깨에 손을 얹더니 이렇게 말했다.
"축하하네. 자네 아들이 사생대회에서 장원을 했어. 열 살짜리가. 보라구. 겨우 열 살짜리가 저보다 몇 살 더 많은 아이들을 다 제치고 일 등을 했다 이 말이야. 그 애들 중에서는 따로 그림을 과외로 배우는 애들도 있어. 자네 애는 이번에 그림 그리기 대회에 처음 나간 거라면서?"

아버지는 땀 냄새가 푹푹 나는 옷을 젖히면서 친구의 손에서 살그머니 떨어졌다. 그러고는 쑥스럽게 웃는 듯했는데, 그것이 내가 난생처음 사생 대회에서 장원한 것에 대한 반응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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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는 읍에서 제일 큰 제재소를 운영했다. 그 시절은 한창 집을 많이 지을 때여서 제재소를 드나드는 차와 사람들로 문짝이 한 달에 한 번은 떨어져 나갈 지경이었다. 나는 고명딸이다. 아버지는 오빠들이 정구[3] 친다고 하자 정구장을 집 마당에 지어줬다. 나는 피아노를 배웠는데 피아노가 싫다고 하니까 바이올린을 사다 줬다. 그런데 바이올린 선생님이 무슨 일로 못 오게 된 뒤로 나는 그림을 배우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언제나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다.

읍내의 유일한 사립 중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집으로 와서 나에게 그림을 가르쳐 주었다. 선생님은 내가 그림에 재능이 뛰어나다고 계속 공부를 시키면 훌륭한 화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비싼 과외비를 받으니까 그냥 해 본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딸내미가 이쁘게 커서 시집만 잘 가면 됐지. 뭐 그림 그려서 돈 벌 것도 아니고 결혼해서 식구들 먹여 살릴 것도 아닌데 힘들게 공부할 거 뭐 있나"라고 했다. 그 말을 전해 듣고 나는 그렇게 열심히 할 생각이 없어졌다. 원래 열심히 하려던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도 배운 게 있어서 그림을 남들보다 잘 그리게는 됐을 것이다.

4학년이 되어서 나는 특별 활동반으로 문예반에 들어갔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고 보니 글짓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막상 글을 써 놓고 보면 저런 게 돼 버리고, 그것도 여기저기 틀리기도 하고 그렇다. 정말 아버지 말대로 내가 남자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서 글로 벌어먹고 살아야 된다면 엄청나게 힘들 것 같았다. 그래도 문예반이 좋았다

문예반 선생님은 동시를 쓰시는 분인데 아주 유명하기도 했고 참으로 잘생겼다. 가까이 가면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그 냄새가 좋았고 그 냄새의 주인인 선생님은 더 좋았다. 나는 동시를 잘 쓰지 못하지만 선생님이 쓴 동시를 보면 무슨 뜻인지 잘 알 것 같고 참 좋았다. 그런 게 진짜 문학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잘 모르는 사람도 좋아지게 만드는 게 예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해 봄에 나는 군 학예 대회에서 글짓기 백일장에 나가지 못했다. 그건 당연하다. 내가 읍에서 몇 번째 안에 드는 부잣집 딸이라고 해서 누가 봐도 재능이 없는데 글짓기 대표로 내보낼 수는 없다. 그 대신 나는 사생 대회 대표로 뽑혔다. 그때 우리 학교는 한 학년이 다섯 반이고 4학년 이상은 한 반에 두 명씩 대회에 나가니 우리 학교에서만 30명이 참가하는 것이다. 대부분은 미술반에 있는 애들이었다. 문예반에 있는 애들은 학교에서 십 리 이 십 리 떨어진 데 사는 농촌 애들이 많은데 미술반 애들은 거의 다 읍내 애들이고 좀 잘사는 애들이었다.[4]

사생 대회는 토요일 오전에 우리 학교에서 열렸다. 우리가 다니는 초등학교가 군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라서 그랬던 것 같았다. 건물도 오래됐고 나무도 커서 그림을 그릴 게 많았는지도 모른다. 우리 학교를 다니는 애들한테 유리한 것 같긴 하다. 우리는 주최 측이 확인 도장을 찍어서 준 도화지를 한 장씩 받아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그런데 내 뒤에서 그림을 그리던 녀석이 있었다. 옷도 지저분하고 검정 고무신을 신은 데다 간장 냄새가 나던 녀석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그 냄새와 그 꼴이 싫어서 자리를 옮기려고 했지만 이미 노란색 크레파스로 그 앞의 나무와 갈색 나무 교사의 밑그림을 그린 뒤라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냄새는 참으로 머리가 아프도로 지독했다. 그건 한마디로 말하자면 가난의 냄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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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4학년이 되고 나서 미술반에 들어갔다. 천수기 선생님은 문예반을 맡았는데 미술반을 맡은 주은희 선생님한테 나를 특별히 부탁했다고 한다. 아버지 이야기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천 선생님은 자신이 직접 본 사람 중에 가장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아버지라고 했다. 그림과 동시는 분야가 다르지만 천 선생님은 다른 예술에 대한 평가 기준도 상당히 높았다.

아버지는 한때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다가 할아버지한테 혼났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가난한 농사꾼의 자식이 도시의 여유 있는 사람들이 즐기는 예술인 미술을 평생의 직업으로 삼겠다고 했으니 할아버지는 이해를 하지 못 했을 것이다. 그래도 아버지는 고등학교까지는 미술반에서 활동을 했고 같은 또래에서는 제일 그림을 잘 그리는 걸로 인정을 받았다. 서울에 있는 국립 미술 대학에 합격까지 했는데 이것은 그 당시 고향에서는 1년에 한두 명 나올까 말까 한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그 사실을 알고 아버지를 호되게 나무랐다. 그때 아버지는 집을 나가려고 가방까지 쌌었는데 그만 할아버지가 쓰러진 것이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달구지에 싣고 병원에 모시고 가니까 곧 돌아가실 것 같으니 준비를 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때 할아버지는 유언으로 "네 어미와 동생들을 단 한 끼라도 굶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고 아버지는 그러겠다고 맹세했다. 할아버지는 이웃 동네에 살던 친구의 딸을 데려오게 해서 그 자리에서 아버지와 약혼하게 했다. 지금은 이해가 잘 안 가는 일이지만 그때는 20살에 결혼하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간호를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가기 위해 대학 진학을 미뤘다. 그런데 할머니가 그해 봄에 쓰러지고 곧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머니는 주부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가을쯤에 병석에서 일어났고 그해 겨울에 내가 태어났다. 그래서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짓게 된 것이다.

나는 미술반에 들어가서 그림을 많이 그리지는 않았다. 한 해 전인 3학년 때 학교 대표로 나간 건 비밀이었지만 주은희 선생님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연습을 안 해도 못 본 척해 준 것이다. 군 학예 대회에서 사생 부문 장원을 하면 48색짜리 크레파스 다섯 통하고 스케치북 열 권이 상품인데 내가 그걸 받을 수는 없었다. 상품의 무게가 아이들이 나무를 옮길 때 쓰는 지게로 한 짐이나 돼서 열 살짜리가 무거워서 못 받은 게 아니라 나에게 이름을 빌려준 4학년 5반 대표가 받고는 입을 싹 닫아버린 것이다. 그게 알려지면 자기도 망신이기 때문에 비밀은 지켰다.

그래서 나는 그림을 그릴 때 몽당연필처럼 짤막한 크레파스하고 이미 그린 그림이 있는 스케치북 뒷면으로 그림 연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집 형편에 크레파스와 스케치북을 자꾸 사달라고 하기도 힘든 일이었고 아버지에게 염소가 많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동생이 넷이나 되었다.

미술이 별 게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 아버지는 동시로 전국적으로 유명한 천수기 선생님이 인정하는 화가의 재능을 타고났다. 내가 그 아버지의 아들이 틀림없는데 다른 평범한 아이들처럼 죽어라 연습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미술반 아이들과 함께 주 선생님을 따라 산과 들을 다닐 때 열에 여덟아홉은 스케치북을 펴지도 않았다. 가끔 주 선생님이 "관찰도 공부다."라고 하면서 자연과 주변의 물건들을 세세하게 봐 두라고 했다.

아버지는 나한테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염소를 팔아서 크레파스와 스케치북을 사 주던 때는 아버지한테는 좀처럼 잘 없는 특별한 순간이었던 같다. 다시 병석에 누운 할아버지와 우리 식구들을 굶기지 않으려면 정신없이 일을 해야 했다. 생각하긴 싫지만 내가 태어나는 바람에 아버지가 화가가 되는 꿈을 버려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일부러 그림 쪽에서는 모른 척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다시 군민 체전이 열리는 5월이 돌아왔다. 군 전체 초중고 학생들이 참가하는 학예 대회도 당연히 함께 열렸다. 모든 게 작년하고 비슷했다. 내가 떳떳이 반 대표로 사생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는 것이나 대회 장소가 우리 학교라는 게 달랐을 뿐이다. 이번 대회에서 장원상을 받으면 상품으로 그림 연습을 마음껏 할 수 있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크레파스 다섯 통과 스케치북 열 권을 다 쓰기도 전에 다음 대회가 열리게 될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우습다. 상으로 그림 도구를 받아서 그림을 제대로 그릴 생각을 하다니. 그땐 전혀 우습디 않았다. 좀 긴장이 됐다. 차상, 차하도 괜찮다. 크레파스하고 스케치북이 상품으로 나오긴 하니까 모자라는 대로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냥 특선이나 입선은 곤란했다. 공책이나 연필밖에는 안 주기 때문이다. 상장 뒷면에다가 그림을 그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사 준 크레파스를 들고 학교로 갔다. 한 해 전과는 다르게 크레파스 뚜껑이 달아나 버려서 습자지를 덮고 고무줄로 동여맸다. 한 해 전처럼 그림을 그려서 제출할 도화지를 받아 들고 뒷면에 미리 부여받은 내 번호를 적었다. 나는 124번이었다. 잊어버릴 수 없는 번호다. 몇 년 전에 무장간첩들이 남한으로 내려왔는데 무장간첩을 훈련시킨 부대 이름이 124군 부대라서 그런 건 아니다. 아무튼 나는 도화지 뒤에 네모난 보랏빛 칸에 검은색으로 번호를 124라고 분명히 적었다.

내 앞에는 언제부터인가 여자아이가 두 명 앉아 있었다. 한 아이는 낮이 익었다. 같은 반을 한 적은 없지만 천수기 선생님하고 같이 가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자주색 원피스에 검은 에나멜 구두를 신고 있었고 머리에 푸른 구슬 리본을 매고 있었는데 무척 얼굴이 희고 예뻤다. 나와 같은 반이었다고 해도 나 같은 촌뜨기에게는 말을 걸지도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여자애와 나는 비슷한 점이 하나도 없었다. 크레파스부터 한 번도 쓰지 않은 새것과 한 번만 더 쓰면 더 쓸 수 없도록 닳은 것이라는 차이가 있었다. 처음부터 다른 길에서 출발해서 가다가 우연히 두어 시간 동안 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그림을 그리게 되겠지만 앞으로 영원히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 여자아이도 그걸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를 한 번 힐끗 넘겨다보고는 코를 찡그리더니 더 이상 눈길을 주지 않았다 자리를 뜰 것 같았는데 계속 그리기는 했다. 나를 의식하기 전에 밑그림을 그렸던 게 아까워서 그랬던 것 같다.

히말라야시다가 쑥색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 화단이 있고 화단 뒤에 나무쪽에 붙인 벽이, 벽 위쪽에 흰 종이가 발린 유리창이 있는 교사가 있었다. 히말라야시다 앞에 키 작은 영산홍이 서 있고, 화단에 따라 발라진 시멘트 길에 햇빛이 하얗게 비치고 있었다. 축구 결승전이 열리고 있을 공설 운동장은 꽤 멀었다. 멀리 있지 않다고 해도 나에게는 목표가 있었다. 장원, 그리고 다음 군 사생 대회까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크레파스와 스케치북. 나는 그림에 집중했다. 내가 생각해봐도 그림은 잘 그렸다.

마감 시간이 다 되자 나는 그림을 제출했다. 그 여자아이는 진작에 가고 없었다. 그런 아이들이야 재미로 그리는 거니까 쉽고 빠르게 내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때 할아버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림 같은 건 돈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서 하느 놀이라고. 우리 같은 가난뱅이 농사꾼 무지렁이들이 무슨 예술을 하느니 마느니 개나발을 불다가는 쪽박이나 차기 십상이다. 있는 쪽박이나 잘 간수하는 게 주제에 맞다는 할아버지의 말을 말이다.

그림을 제출하고 나면 공설 운동장에 갈 수 있고 잘하면 축구 결승전의 마지막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내가 궁금한 건 심사 결과였으니까 말이다. 축구야 누가 우승하든 어떤가? 어차피 군민 체전이니까 군민들 중 누군가가 이기겠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게 내가 1년동안 성숙했다는 증거였다. 그렇게 되는 데 열 살짜리가 열한 살 이상이 참가하는 대회에 나가서 장원을 했다는 게 큰 작용을 한 건 당연하다.

오후부터 3층짜리 신축 교사 2층 교실 한 곳에서 심사 위원들이 심사를 했다. 나는 예전에 함께 축구를 하던 아이들과 공을 차면서 시간을 보냈다. 나는 예전에 함께 축구를 하던 아이들과 공을 차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이상하게 축구가 재미가 없었다. 자꾸 눈이 심사를 하고 있을 교실을 향한 것이다. 내가 을 집어넣을 수도 있는 기회에서 엉뚱한 데 눈을 주니까 아이들이 나한테 정신을 어디다 파는 거냐고 화를 냈다. 나는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아, 이제 나한테 축구보다 더 중요한 게 생겼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건 크레파스나 스케치북 같은 상품이 아니다. 그건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천부적이고 천재적인 재능을 명백히 확인하고 싶다는 충동이었다.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싶었다. 아무리 시골구석에서 염소나 키우고 닭이나 거위를 장날에 내다 파는 사람이라고 해도 내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심사를 하는 데 이렇게나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 다리가 아프도록 축구를 하고 수도꼭지가 있는 곳으로 가서 몸을 씻고 다 말렸는데도 심사는 끝나지 않았다. 아이들이 풀빵을 사 먹으러 간다고 학교 밖으로 갈 때까지도 말이다. 나는 평소처럼 아이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배가 고팠는데도 교사 앞에서 앉아 있었다. 심사 결과를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다. 그냥 어떤 기미라도, 결과의 부스러기라도 얻고 나서야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들이 가 버리자 학교는 조용해졌다. 그러고도 한 30분은 있다가 다른 군의 학교애서 온 심사 위원들이 걸어 나왔다. 물론 나한테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 선생님이 보였다. 심사를 한 건 아니고 우리 학교의 미술 지도 교사로 참관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주 선생님은 교문과 조금 못 미친 곳에서 심사 위원들과 인사를 나눈 후에 내가 앉아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그때 새하얀 시멘트 길에 떨어지던 새하얀 햇빛과 그 위에 또각또각 찍히던 선생님의 발소리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선생님은 히말라야시다 앞 시멘트 의자에 숨은 듯이 앉은 내게 와서는 불쑥 손을 내밀었다.
"백선규, 축하한다"
나는 이 말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네가 장원이다."
나는 목이 메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목이 죄는 듯한 느낌은 평생 다시는 느끼지 못했다. 그 뒤에 수십 번, 이런저런 상을 받고 수상을 통보받았지만 말이다. 나는 선생님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내가 우는 것을 보고 선생님은 무척 놀라고 당황했다. 하지만 곧 내 어깨를 잡고는 내 얼굴을 가슴에 가만히 안아 주었다. 그 따뜻하고 기분 좋은 냄새를 나는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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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번도 상 같은 건 받아 본 적이 없다. 학교를 다닐 때 그 흔한 개근상도 받은 적이 없다. 상에 욕심을 부려 본 적도 없었다. 내게는 모자란 게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는 부유한 집안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딸로 사랑을 받으며 자랐고 여자 대학에서 가정학을 공부하다가 판사인 남편을 중매로 만나서 결혼했다. 내가 권력이나 돈을 손에 쥔 건 아니라도 그런 것 때문에 불편한 적도 없었다. 아이들은 예쁘고 별문제 없이 잘 자라 주었다. 큰 아이가 중학교 때부터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할 때는 적응에 힘이 들었지만 결국 학생회장까지 지내서 신문에도 여러 번 났다. 나는 상을 못 받았지만 내가 타고난 행운, 삶 자체가 상이다 싶다.

그렇지만 단 한 번 상을 받을 뻔한 적은 있다. 스스로의 실수 때문에 못 받은 거니까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지만 그 실수를 인정하고 내가 받아야 했을 상을 남에게 가게 한 것을 바로 잡을 수 있었을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에게 이야기했다면. 아니면 천수기 선생님한테라도. 왜 안 했을까. 그때 나를 스쳐 가던 그 아이, 그 아이의 표정 때문인지도 모른다. 땟국물이 흐르던 목덜미, 전신에서 풍겨 나던 뭔가 찌든 듯한 그 냄새, 그 너절한 인상이 내 실수와 잘못된 과정을 바로잡는 게 귀찮은 일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 결과로 한 아이가 가지게 될지도 모르는 씻지 못할 좌절감을 내가 약간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뭐 상관없다. 나는 그런 상하고는 담을 쌓고 살아도 행복하다. 그런 스트레스를 받은 것 자체가 싫다. 내가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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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생 대회 이틀 후, 월요일 아침 조회에서 전교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단 앞으로 가서 장원상을 받았다. 글짓기, 서예, 밴드, 합창, 그림 등 전 분야를 통틀어 우리 학교에서 장원상을 받은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게다가 4학년이니까 앞으로 2년간 더 많은 상을 학교에 안겨 주게 될 것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내가 4학년이라는 것과 장원이는 것을 20번도 넘게 언급했다. 크레파스 다섯 통과 스케치북 열 권은 혼자 들기에 좀 무거웠다. 글짓기에서 차하상을 받아서 앞으로 나온 6학년이 크레파스를 대신 들어줬다. 나는 박수 소리가 끊이지 않는 중에 천천히 걸어서 내가 서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조회가 끝나고 교실로 들어갈 때 옆에 있던 아이들이 상품을 대신 들어줬고 나는 상장만 들고 갔다.

교장선생님은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흥분해서 전례가 없는, 그해 학예 대회 입상작을 찾아와서 강당에서 전시회를 가지기로 결정했다. 나는 가 보지는 않았다. 가서 내 그림을 보는 건 뭔가 창피할 것 같았다. 그런 데 가서 그림과 글짓기, 서예 작품을 보고 배워야 하는 아이들은 입상을 못한 평범한 아이들이다. 창작의 재능이 없고 겨우 감상만 할 수 있는 아이들인 것이다. 나는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일주일 동안 진행된 전시 마지막 날 오후, 결국 나는 강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이때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모르겠다.

강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벽에는 전시 작품들이 걸려 있었다. 글짓기는 원고지 여러 장에 쓰인 작품을 한꺼번에 벽에 압정으로 박아 놓고 넘겨 가며 읽도록 해 놨다. 차하상을 바은 동시는 아이들이 넘기면서 침을 묻히는 바람에 글씨가 다 지워지고 원고지 앞장 아래쪽은 먹지처럼 까매졌다. 나는 천천히 그림이 전시된 곳으로 걸어갔다. 내 그림은 맨 안쪽에 걸려 있었다. 입선작 여덟 점을 지나서 특선작 세 점을 지나고 나서 황금색 종이 리본을 매달고 좀 떨어진 곳에, 검은색 붓글씨로 '壯元(장원)'이라고 크게 쓰인 종이를 거느리고, 다른 작품보다 세 뼘쯤 더 높이.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라면 우러러 볼 수밖에 없는 높이에 있었다.

그런데 그 그림은 내가 그린 그림이 아니었다.[5] 풍경은 내가 그린 것과 비슷했지만 절대로, 절대로 내가 그린 그림이 아니었다. 그림에는 아버지가 사 준 내 오래된 크레파스에는 진작에 떨어지고 없는 회색이 히말라야시다 가지 끝 앞 부분에 살짝 칠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가슴이 후들후들 떨려서 두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사방을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나는 까치발을 하고 손을 최대한 쳐들어서 그림 뒷면의 번호를 확인했다. 네모진 칸 안에 쓰인 숫자는 분명 124였다. 124, 북한에서 무장간첩을 훈련시킨 그 124군 부대의 124. 그렇지만 그건 내 글씨가 아니었다.

누가, 왜 자기 번호를 쓰지 않고 내 번호를 썼을까? 실수인가? 이런 실수를 해서 자신이 받아야 할 상을 다른 사람이 받았다는 걸 알면 가만히 있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다른 학교에 다니는 아이라서 자기 실수를 모르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곧 나는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그림은 구도로 봐서 내가 그렸던 바로 그 장소에서 아주 가까운 데서 그린 그림이었다. 그 그림을 그린 아이는 천수기 선생님과 함께 다니던 그 아이인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나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아이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봤을 것이다. 그런데 왜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거지? 상품이 필요 없어서/ 번호를 잘못 쓴 실수 때문에 벌을 받을까 봐? 나라면? 나라면 가만히 있었을까?

왜 내가 그린 작품은 입선에도 들지 않았을까? 비슷한 풍경이고 비슷한 구도인데도? 가만히 그 그림을 보고 있자니 정말 잘 그린 그림이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장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림, 같은 장소에 있었던 나로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부분, 벽과 히말라야시다 사이의 빈 공간의 처리는 완벽했다. 나는 모든 걸 그림속에 욱여넣으려고만 했지 비울 줄은 몰랐다. 그건 나를 뛰어넘는 재능인 게 분명했다. 비슷한 그림에 같은 번호가 써진 걸 보고 심사위원들이 당황했을 것이다. 한 사람이 두 작품을 그릴 수는 없으니 누군가 실수를 했다고 단정 짓고는 혼동을 초래할 지도 모르니까 둘 중 하나는 아예 시상 대상에서 제외를 하자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심사에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그러니까 내 그림은 번호를 착각한 아이의 그림에 못 미치는 그림으로 버려졌던 것이다. 입선에도 들지 못하게 완벽하게. 누구의 생각일까. 주 선생님은 아니었다. 심사 위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심사 중에 불려 들어간 것일지도 모른다. 혼란스러워진 심사 위원들이 번호를 확인하고 그게 우리 학교 학생의 번호인 줄 알고 미술반 지도 교사를 오라고 하면서 모든 것이 주 선생님의 조정을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주 선생님은 이례적으로 결과를 미리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주 선생님 품에 안겨서 울고 말았다. 내가 그리지도 않은 그림을 가지고 상을 탔다고 감격해서 바보같이 울고 만 것이다.

나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면서 강당을 걸어 나왔다. 열 걸음쯤 떼었을 때 강당 문으로 어떤 여자아이가 걸어 들어왔다. 자주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검은색 에나멜 구두를 신고 있었다. 나는 그 여자아이를 지나칠 때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채 열 걸을쯤 걸어가서 다시 눈을 떴다. 내가 주 선생님을 찾아가서 말해야 했을까. 이건 내 그림이 아니라고. 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이라고. 나는 그 사람만 한 재능이 없다고. 실수를 바로 잡아달라고.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주 선생님의 품에 안겨 울지만 않았더라도 찾아갈 수 있었다. 가능성이 높지는 않지만, 내 더러운 눈물로 주 선생님의 흰옷을 더럽히지만 않았더라면 할 수 있었다. 그림의 주인이 선생님을 찾아가서 그 그림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부정할 도리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먼저 선생님을, 주 선생님이든 천 선생님이든,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그 누구도 찾아갈 수는 없었다.

그 뒤부터 나는 늘 의심하면서 살았다. 누군가 나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잇고 누군가 나와 똑같은 대상을 두고 훨씬 더 뛰어난 작품을 그렸고, 앞으로도 더 뛰어난 작품을 그릴 수 있다는 생각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어떤 작품이라도, 그게 포스터물감으로 그리는 반공 포스터라도 내가 가진 능력 전부를, 그 이상을 쏟아부어야 했다. 언제나, 어디서나, 그 결과가 오늘의 나일까. 의심의 결과, 좌절의 결과, 누군가 내 비밀을 알고 있다는 생각의 결과를 말이다.

나는 화가가 된 후로 풍경화를 그린 적이 없다. 나는 그림의 원형, 본질로 돌아갔다. 선과 원, 점, 그리고 바탕이 되는 사물의 원형, 본질을 최대한 추상화하고 이상화한 상태로 만들어 갔다. 내 모든 색깔의 원형은, 이상은 그날 그 하얀 시멘트 길과 그 위의 흰 햇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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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저기 걸어가는 저 사람, 백선규 같네. 저 사람 도대체 무슨 생각을 저렇게 골똘하게 하고 있을까. 인사를 해 볼까? 안녕하세요,라고 해야 하나? 그냥 안녕이라고? 그러고 나서 고향, 연도, 초등학교를 말하면 알아볼까? 아이, 귀찮아. 그런 걸 하면 뭘 해. 우리는 가는 길이 다른데. 나는 그림을 좋아하고 저 사람은 자신의 그림을 열심히 그리면 그만이지. 점점 멀어지네. 사라졌네. 나는 여기에 있고. 나도 곧 가야 하지만.
'나'는 카페에서 우연히 밖에 길거리를 걷는 백선규를 봤지만 그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 나와 그는 가는 길이 달랐기 때문이다.

4. 등장인물

이름은 백선규. 남성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화가다. 그의 재능은 모두가 인정하며 그의 그림은 값비싸게 팔린다. 하지만 그에게는 말 못할 비밀이 있는데...여성으로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화가는 아니지만 그림을 보며 감상하는 것을 좋아하는 애호가이다. 특히 초등학교 동창인 '백선규'의 작품이 가장 관심을 갖는다. 그 이유는...

5. 평가

<내가 그린 히말라야시다 그림>은 우연한 사건 이후 달라진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두 명의 서술자가 교차하여 서술하고 있다는 점으로 또한 현재-과거-현재 순으로 서술하며 같은 사건은 서로 다른 인물의 시점에서 이끌어 가는 독특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0의 서술자 '나'는 모든 사람들이 '나'가 장원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제 와서 그게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아버지나 선생님이 자신에게 실망할까 봐 두려워 사실을 밝히지 못한다. 1의 서술자 '나'는 상을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이었기 때문에 굳이 귀찮은 일을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장원을 했다고 믿고 있는 0의 서술자 '나'에게 좌절감을 느끼게 하기도 싫었다고 말한다. 둘은 사생 대회에서 있었던 일을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고, 한 사람은 유명 화가가 되고 한 사람은 평범한 주부가 되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을 수없이 겪는다. 어떤 선택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으며, 또 어떤 선택은 평생을 따라다니며 자문하게 만들게 하기도 한다. 0의 서술자는 자신의 실력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된 그날의 사건이 자신에게 열등감을 가져다 주어, 자신을 세계적인 화가로 만들어 준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반대로 1의 서술자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는 뛰어난 재능이 있지만 그것을 활용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으며 자신이 상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도 받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바람에 그저 평범한 주부로 남게 되었다. 0의 서술자에게 그림은 치열하게 성취해야만 하는 대상이었지만, 1의 서술자에게 그림은 그저 만족하며 즐기는 대상에 불과했다.
내가 그린 히말라야 시다 그림은 청소년들에게 세상의 기준이나 남과의 비교에서 성공과 실패의 잣대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기준을 세워 나가야 하며,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의미 있는 삶은 무엇인가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6. 작가의 말

작가는 책에 이런 말을 남겼다.
누구에게나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 기회는 대체로 다른 사람이 만들어 준다. 그러니 함께 살아가는 가족과 벗, 이웃이 금쪽같이 소중하다!

7. 기타


[1] 대략 4km에 해당한다.[2] 금관악기를 주체로 한 합주체를 말한다.[3] 테니스의 한자식 표기.[4] 그 이유는 글짓기는 연필하고 지우개, 원고지만 있으면 되지만 미술은 크레용, 화판, 스케치북이 필요하고 그것들을 빨리 써 버리게 되니까 돈이 좀 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으며 1의 서술자는 "그게 나하고 무슨 큰 상관이 있는 건 아니지만"이라고 독백한다.[5] 이때 '그런데'가 4번 반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