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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15 12:56:28

도이치 그라모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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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리너 그라모폰 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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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CFF43><colcolor=#231F20> Deutsche Grammophon
파일:도이치 그라모폰 로고.svg
사명 Deutsche Grammophon Gesellschaft mbH
창립 1898년 ([age(1898-01-01)]주년)
구분 클래식 음반사
모기업 유니버설 뮤직 그룹
소재지
[[독일|]][[틀:국기|]][[틀:국기|]] 베를린[1]
장르 클래식(고전 음악)
링크 파일:도이치 그라모폰 로고.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2. 연혁3. 특징
3.1. 인터넷
4. 소속 아티스트5. 발매 시리즈
5.1. 정가5.2. 중가5.3. 염가5.4. 박스셋5.5. 창사 기념 박스
6. 기타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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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이치 그라모폰은 곧 클래식음악의 역사입니다.

1898년에 세워진 독일의 클래식 음반사이다. 도이치 그라모폰 또는 도이체 그라모폰이라고도 부른다. 풀이하면 독일 축음기.

2. 연혁

에밀 베를리너가 횡진동 방식으로 재생되는 그라모폰이라는 이름의 축음기 제조사를 만든 뒤 유럽 시장 공략을 위해 영국독일에 지사를 만들었는데, 독일 지사는 1898년에 에밀 베를리너의 조카가 하노버로 건너가서 도이치 그라모폰 게젤샤프트(=유한회사,이하 DGG)라는 이름으로 설립했다. 명칭대로 이 지사가 현 도이치 그라모폰의 직계 모체가 된다.

현재는 상표로 튤립 마크를 사용하고 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전까지는 HMV라는 음반 판매점 체인과 제휴를 했던 관계로[2] HMV의 상징인 "생전에 녹음된 주인의 목소리를 축음기 앞에서 듣고 있는 니퍼(nipper)라는 의 그림"을 쓰고 있었다고 한다. 이 개에 대한 자세한 사연은 His Master's Voice 문서 참고. 그라모폰 측은 프란시스 발로라는 화가가 그렸던 이 개와 축음기 그림을 마음에 들어해서 권리를 사들였고, 훗날 베를리너 그라모폰 전체 계열사의 상표로 취득했다.

참고로 나무위키에서는 HMV 문서에서는 음반 판매점으로서의 HMV를 설명하고, His Master's Voice라고 하면 이 음반 판매점 및 DG와 관련되어 세계 각지로 흩어진(...) 상표권 내용을 설명하고 있으니 자세한 내용은 두 문서를 참고.

DGG는 폴리돌 레코드에게 1917년 인수된다. 폴리돌은 1913년 독일에 세워진 음반사인데 정확히는 폴리폰-무지크베르크 AG의 산하 브랜드 같은 존재였다. 이 회사가 1917년에 DG를 인수했고 1932년에 폴리폰 베르크 공장을 DG와 합병하고 기존에 있던 공장의 가동을 중단한다. DG는 1933년 폴리돌 홀딩AG 밑으로 들어가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이 항복을 하면서 DGG의 상표권을 잃게 되었고, His Master's Voice 상표는 HMV컬럼비아 레코드가 합병한 EMI에게 팔아 넘겨지고, DGG는 지멘스에 인수된다.

이처럼 1~2차 세계대전 전후로 HMV의 상표권은 복잡하게 찢어지면서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외 수출음반에 한해서는 폴리돌 레코드의 상표를 쓰던 시절도 있었다. 유니버설 뮤직으로 들어가기 전 DG음반 뒷면에 보면 폴리돌 인터내셔널이라고 적혀있는데 이게 이런 이유 때문이다.#] 지금의 튤립 무늬 상표는 이 때 새로 만들어진 것으로, 튤립마크 시기부터 한 유대인 여성이 이 음반사를 먹여살려서 EMI가 음반사들 중 가장 역사가 깊음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후반~1970년대 후반까지의 명연은 거의 다 이 쪽에서 쓸었다.[3] 나중에는 필립스 클래식과 합병을 하는데, 이 때의 명칭이 바로 폴리그램이다.[4][5]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한동안 패전국으로서 독일의 어려운 경제 상황의 영향을 겪었다. 특히 DG의 근거지인 베를린[6]은 4개국에 의해 분할지배되었고, 최종적으로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으로 분단되었는데, 문제는 서베를린이 동독의 한복판에 위치하게 되어 다른 서독 지역과 왕래가 쉽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DG는 필연적으로 근거지의 베를린 필과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었다. DG는 베를린 필과 전속계약을 맺었다. 전속계약을 맺은 댓가로 DG는 베를린 필에게 다른 오케스트라보다 40% 정도 높은 개런티를 지불했다. DG와 베를린 필의 전속계약은 80년대 중반 베를린 필과 카라얀이 자비네 마이어 사건으로 갈등을 일으킬 때, 베를린 필 단원 측의 요구로 파기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 때 베를린 필 측이 전속계약을 파기한 것은 카라얀이 아닌 다른 음반사 소속의 지휘자들과도 적극적으로 녹음을 추진하려는 계획 때문이었다. 물론 전속 계약이 파기된 후에도 베를린 필과 DG의 녹음은 가능했지만 프리미엄 없이 다른 오케스트라와 동일한 수준의 개런티가 지급되었다.

전후 DG는 베를린 필과 활동이 가능한 지휘자들을 중심으로 영입하였다. 오이겐 요훔, 칼 뵘, 페렌츠 프리차이 등과 계약을 맺었고 이들은 50년대 DG의 간판 지휘자들이었다. DG는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였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계약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당시 훨씬 규모가 큰 회사였던 영국EMI에 밀렸다. 1951년 푸르트벵글러와 EMI의 프로듀서 월터 레그와 불화를 겪다가 재계약에 실패한 틈을 타 DG는 푸르트벵글러에게 접근했고, 푸르트벵글러가 자신의 교향곡 2번도 같이 녹음하게 해달라는 조건을 받아들여 단기 녹음 계약을 성사시켰다. 자신이 직접 작곡한 교향곡 2번 외에 프란츠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 요제프 하이든의 교향곡 88번이 그 해 12월에 녹음되었다.[7]

그러나 곧 EMI가 레그 대신 로렌스 콜링우드를 프로듀서로 붙여주고 계약금 인상 등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여 푸르트벵글러와 계약을 성사시키면서 푸르트벵글러와 DG의 짧은 동거 기간은 끝났다. 푸르트벵글러가 DG에서 남긴 음반들은 지금까지도 상당한 명연주로 평가받고 있다. EMI에서와는 달리 DG에서는 푸르트벵글러 본인의 수족인 베를린 필과 녹음할 수 있었고, 덕분에 동시기에 EMI에서 빈 필과 녹음한 음반들보다 뛰어난 평가를 받고 있다. 게다가 녹음 음질 또한 EMI보다 DG가 좋았다. 그런 점에서 DG와 푸르트벵글러가 많은 녹음을 남기지 못한 것은 음악 애호가 입장에서도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DG는 클래식 음반사 중에 후발 주자[8]로 인식되고 있었다. 당시 DG의 녹음 기술은 EMI와는 비슷한 정도[9], CBS[10]보다 괜찮았다고 볼 수 있지만, DECCA나 RCA에는 미치치는 못했다. 음반사의 인지도는 독일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다.

1955년 향후 DG의 운명을 바꾸는데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 발생했는데, 바로 카라얀이 푸르트벵글러의 후임으로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에 취임한 것이었다. DG는 EMI에 소속되어 있던 카라얀을 데려오기 위해 회사의 명운을 건 파격적인 제안를 했고 58년 결국 카라얀과 계약을 성사시켰다.[11] 1963년에 완성된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은 전무후무한 대성공을 거두었고 DG에 일대의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

DG는 자사의 중요한 지휘자였던 오이겐 요훔이 1955년 뮌헨에서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을 창단하자 이 오케스트라와 협업을 시작했다. 61년 요훔의 뒤를 이어 라파엘 쿠벨릭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에 취임하자 그를 영입했다. 60년대 DG는 소속 지휘자들을 중심으로 교향곡과 관현악 중심으로 레퍼토리를 구축하였다. 특히 유명 작곡가의 교향곡 전곡 녹음을 추진했다. 카라얀과는 베토벤브람스 전곡, 차이코프스키 후기 교향곡을, 요훔과는 브루크너 전곡 및 하이든 후기 교향곡을, 뵘과는 모차르트, 슈베르트 전곡을, 쿠벨릭과는 슈만, 드보르자크, 말러 전곡 녹음을 진행했다.

한편 당시 베일에 가려있던 소련의 연주자들과의 단발성 녹음을 성사시켜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1956년에 유럽 순회 공연을 나왔던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에 재빠르게 접근해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 6번을 녹음하였는데[12] 이것이 성공을 거두자 4년 후인 1960년 다시 순회공연을 나온 므라빈스키, 레닌그라드 필과 차이코프스키 3대 교향곡을 빈에서 스테레오 녹음으로 다시 재녹음했다. 이것은 공전의 히트를 쳤다. 비슷한 예로 1962년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가 서유럽 순회 공연을 나왔을 때도 재빠르게 접촉하여 카라얀과 협연으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제1번 녹음을 성사시켰다.

한편 DG는 1950년대 말에 뮌헨을 근거지로 활약하던 칼 리히터를 영입하면서 고음악 분야에서도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아예 '아르히브'라는 고음악 전용 산하 레이블을 별도로 만들어 고음악 분야의 선두 주자로 나서게 되었다.[13]

DG는 교향곡관현악 분야를 중심으로 방대한 레퍼토리를 구축한 반면, 오페라의 녹음에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오페라 중심으로 레퍼토리를 구축했던 데카와는 상반되는 행보였는데, 결과적으로는 DG의 전략이 주효했다고 볼 수 있다. 오페라교향곡, 관현악에 비해 제작 비용이 훨씬 많이 들었기 때문에 채산성이 결코 좋지 않았다.

DG가 오페라를 전혀 녹음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DG는 60년대 전반기까지 거의 오페라를 녹음하지 않고 교향곡, 관현악 레퍼토리 구축에 주력했으나, 관현악 레퍼토리가 어느 정도 갖추어지자 60년대부터 모차르트, 바그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독일-오스트리아 계열 작곡가들의 레퍼토리를 중심으로 기본적인 오페라 레퍼토리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오페라 녹음은 예산이 많이 들었던데다가 DG의 전속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은 콘서트 전문 오케스트라였기 때문에 마술피리 때 베를린 필을 기용해본 이후부터는 베를린 오페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 라 스칼라 오페라, 프라하 국립 오페라 등 전문 오페라 오케스트라들과 녹음 작업을 진행하게 된다. 게다가 바그너 녹음에 관심이 많았던 DG 소속 지휘자들의 이해 관계를 조정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DG는 니벨룽의 반지는 카라얀과, 트리스탄과 이졸데,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칼 뵘과, 로엔그린은 쿠벨릭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는 요훔과 녹음했지만 칼 뵘은 니벨룽의 반지를 녹음하고 싶어서 필립스와 새로 계약을 맺었고, 트리스탄, 명가수를 녹음하고 싶었던 카라얀은 EMI와 계약을 맺었다.

이처럼 DG는 데카, EMI 등 타 경쟁사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오페라 녹음에 소극적인 편이었지만, 컬럼비아(CBS) 등 미국 음반사에 비하면 DG도 오페라 음반이 나름 풍부한 편이었다. DG는 모차르트, 바그너독일-오스트리아 계열 작곡가들의 오페라 녹음에는 어느정도 적극성을 띄며 레퍼토리를 구축했지만, 이탈리아 오페라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 그래도 최소한의 레퍼토리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 60년대 초반 라 스칼라와 라 트라비아타, 리골레토를 녹음하였는데, 64년 리골레토의 경우 쿠벨릭과 피셔-디스카우 등 독일계 음악에 능한 사람들을 기용하기도 했다. 이어 빈 국립 가극장을 사임하면서 DECCA와의 계약도 종료된 카라얀과 1965년 길이가 짧은 팔리아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녹음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라 스칼라에서 녹음을 진행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는지 이후 70년대말까지 이탈리아 오페라를 거의 녹음하지 않았다. DG가 독일, 오스트리아 음악 중심으로 아티스트를 영입하고 레퍼토리를 구축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오페라 녹음을 우선 순위에 두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교향곡, 관현악 부문 레퍼토리 구축이 끝난 70년대 후반 이후에는 DG도 정책을 바꿔서 오페라 녹음에 더 적극적으로 임하기 시작했다.

한편 DG는 오페라에는 소극적이었지만, 오라토리오, 미사 등의 대규모 합창곡의 녹음은 다른 음반사들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녹음을 진행했다.

1960년대에 주요 교향곡 전곡 중심의 레퍼토리를 구축하면서 세계적인 레이블로 도약한 DG는 70년대에는 클래식계 최고의 레이블로써의 위상을 확립하였다. 이미 유명한 지휘자들을 대거 보유하고 있었지만 DG는 유망한 지휘자들까지 닥치는 대로 영입하여 지휘자 왕국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1960년대 후반에 신예지휘자 아바도와 계약을 맺었고, EMI 소속이었던 줄리니, RCA 소속이었던 보스턴 심포니의 오자와 세이지, CBS 소속이었던 레너드 번스타인, 신예 카를로스 클라이버 등을 차례로 영입했다.

1950~1960년대 동안 DECCA와 전속 계약으로 묶여있던 빈 필이 1970년 DECCA와 전속을 해지하면서 DG에게 큰 기회를 제공했다. 뵘, 번스타인, 카라얀, 아바도 등 빈 필의 핵심 지휘자들을 모두 DG가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0년 뵘과 빈 필의 베토벤 교향곡 전곡 녹음이 시작되었고, 이후 DG는 뵘, 번스타인, 카라얀, 아바도, 레바인 등의 지휘자를 통해 빈 필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70년대 중반에는 경영진이 교체되면서 정책 변화가 있었는데, 가장 큰 내용은 기존에 자제해왔던 오페라 녹음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로 한 것과 동일 지휘자에 의한 동일 레퍼토리의 재녹음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다른 음반사보다 훨씬 많은 거장 지휘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DG는 지휘자들이 녹음하고자 하는 레퍼토리와 회사의 이익과의 접점이 되는 곡을 찾아 타협해야 했는데,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14] 특히 카라얀은 60년대부터 과거 녹음을 재녹음하고 브루크너 교향곡을 녹음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는데, 요훔과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을 녹음을 진행하고 있던 DG는 중복 투자를 하기 힘든 형편이었다. 이에 카라얀은 69년에 EMI와 별도 계약을 맺고 브루크너 교향곡을 녹음했을 뿐만 아니라 DG에서 몇년전에 녹음했던 차이코프스키 3대 교향곡을 EMI에서 다시 녹음했고 이 음반들은 불티나게 팔렸다. 이는 결과적으로 DG의 정책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는데, 거장 지휘자들이 동일 레퍼토리를 재녹음하는 것을 허용하기로 한 것이다. 1970년대 중반부터 카라얀은 기존에 녹음했던 레퍼토리들을 재녹음하기 시작했다. 차이코프스키 3대 교향곡, 베토벤브람스 교향곡 전곡 등이 다시 재녹음되었다. 칼 뵘도 빈 필과 모차르트 교향곡 전곡을 재녹음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까지 독일 지휘자를 중점적으로 영입했지만, 1970년대부터 세계화를 위한 포석으로 아바도를 필두로 줄리니, 번스타인, 바렌보임, 오자와 등 다양한 지역의 지휘자들을 영입하였다. 1980년대에도 레바인, 시노폴리, 정명훈 등을 영입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과포화된 지휘자 라인에 대한 정리도 이루어졌는데, 오자와가 필립스로 이적한 것을 필두로 바렌보임, 줄리니 등이 타사로 이적하기도 했다. 아바도도 잠시나마 EMI로 완전 이적했으나 다시 DG로 돌아왔다.

1990년대 후반 음반계에 장기 불황을 겪으면서 DG도 예전같지 않았는데, 그래도 다른 음반사들보다는 나은 형편이었다. 1990년대에 틸레만, 2000년대에 두다멜을 영입한 것 말고는 딱히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이지 않고 있다. 2002년에 새로 베를린 필에 취임한 래틀이 EMI 소속이었기 때문에 베를린 필을 EMI에 빼앗겼지만 워낙 음반 시장이 불황이라 EMI에서 베를린 필의 음반이 별로 출시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15]

나중에 폴리그램에 데카도 넘어오게 되고, 이후 음반/음악계에 불화가 생기면서 98년 캐나다(퀘벡)의 주류회사인 씨그램에 통째로 인수되며 지주회사 씨그램의 계열사인 유니버설 뮤직안에 있는 데카 뮤직 그룹에 편입된다.

2018년에 창사 120주년을 맞이했는데, 이를 기념해서 자금성에서 큰 콘서트를 여는 등 마케팅에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또한, 창사 극초기에 녹음한 셸락 SP음원들을 구글과의 협력으로 리마스터링해서 한 음반으로 모아 LP를 출반했다! 이미 저작인접권이 만료된지 오래인 1912~1934년의 녹음으로 발매한 것으로, 어쿠스틱, 그리고 초창기 일렉트릭 녹음 시절의 음원들을 들을 수 있다.

2000년대 녹음부터 관현악단을 통한 녹음의 음질이 좋지 못하다. 이것은 DG만의 단점이 아니라 메이저 레이블의 신보녹음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단점이다.

2020년에 홈페이지를 개편했다. 워너 클래식과 비슷하게 단순화 되었다. 자매 레이블인 데카의 홈페이지는 아직 개편하지 않았다.

3. 특징

클래식 음반 시장의 전성기였던 1960년대 ~ 90년대에 업계를 대표하는 음반사였다. 경쟁사들에 비해 비교적 후발 주자였고, 기술력에 있어서도 초기에는 앞선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국, 영국 등에 본사를 둔 타 경쟁사들에 비해 클래식의 본고장인 독일, 그것도 베를린에 본사를 둔 회사였고, 경쟁 음반사에 비해 클래식 음악의 가치를 파악하는 것에 있어서 타 음반사에 비해 월등히 뛰어났다. DG의 엔지니어들은 지휘자 출신의 오토 게르데스 등 음악적 식견이 뛰어난 사람들이 포진해 있었다.

무엇보다 DG는 음반의 핵심 가치는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에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뛰어난 지휘자, 오케스트라를 섭외하기 위해 비용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칼 뵘, 라파엘 쿠벨릭, 오이겐 요훔, 레너드 번스타인,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등 음악성과 상업성을 겸비한 지휘자들을 끌어 모아 지휘자 왕국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거장 지휘자들 뿐만 아니라 음반 시장의 세계화를 예견하고 1970년대부터 여러 국적의 젊은 지휘자들을 영입하였는데, 이들의 옥석을 구별하는데도 상당히 탁월한 안목을 보였다. 클라우디오 아바도, 다니엘 바렌보임, 세이지 오자와, 제임스 레바인, 주세페 시노폴리, 크리스티안 틸레만, 구스타보 두다멜 등 데뷔 초기에 영입했던 젊은 지휘자들이 대부분 성공을 거두면서 거장급으로 성장했다.

설립 초기부터 회사의 연고도시에 있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DG는 지휘자의 중요성 더불어 뛰어난 오케스트라의 중요성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에 타사보다 수십 퍼센트 높은 개런티를 제공하며 거의 독점 계약을 맺었다. 때문에 베를린 필이 남긴 음반의 대부분이 DG에서 녹음되었다.

1950년대말 스테레오 녹음 기술이 보편화되면서 각 음반사들은 다시 방대한 레퍼토리 구축 작업에 들어갔는데, 도이치 그라모폰은 경쟁사들보다 뛰어난 지휘자, 오케스트라를 선별하여 핵심 레퍼토리부터 전략적으로 녹음해 나갔다. 1960년대 카탈로그 구축 시대에 DG는 자사에 소속된 다양한 지휘자들을 각각의 전문 분야별로 나눠어 동시 다발적으로 방대한 녹음 작업을 벌였다. 당시 비용과 시간이 많이 소비되는 오페라 녹음을 초반에 자제하고 유명한 교향곡부터 중점적으로 녹음하는 전략 덕분에 타사보다 훨씬 빨리 주요 레퍼토리를 녹음하여 방대한 디스코그라피를 구축하며 타사와의 경쟁에서 앞서나갔다. 또 해당 곡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지휘자를 선별해서 녹음했기 때문에 같은 곡 음반 판매량이 타사보다 월등히 높은 경우가 많았다. 또 예브게니 므라빈스키,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등 당시 소련의 유명 음악가들이 서방에 연주 여행을 왔을 때 발빠른 행동력으로 연이어 녹음을 성사시켰고 상당수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말 음반 시장은 서서히 쇠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에 DG는 넘쳐나는 지휘자들을 발빠르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다니엘 바렌보임, 세이지 오자와 등이 이적했고, 지역 안배 등 면밀한 계획 아래 클라우디오 아바도, 제임스 레바인, 주세페 시노폴리 등만 남게 되었다. 게다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레너드 번스타인 등 간판 지휘자들이 연이어 타계하였다. 90년대부터 음반 시장은 급속도로 침체되었고 2000년대 이후에는 거의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클래식 계열에서 가장 거대한 상표라서 일단 음반점의 클래식 코너에 가기만 하면 전부 노란색 밖에 안보인다고 알려져 있다.[16] 그리고 카라얀에 대한 상술이 대단하다. DG에서 나오는 카라얀 음반만 모아도 웬만한 CD장 따위는 가볍게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카라얀 탄생 기념 전집부터 시작해서, 카라얀 2008, 카라얀 골드, 심지어는 카라얀 아다지오 까지 있으며, 클래식 입문자용 음반에는 카라얀이 덩그러니 깔려있다. 더 심한건 박스 4개로 구성된 카라얀 전집 박스 세트도 있다. 급기야 2017년에는 이미 4박스짜리 카라얀 전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라얀이 유니버설 뮤직(데카, DG)에서 제작한 모든 음반과 유니텔에서 만든 영상들을 모아 초메머드급 박스 세트를 만들었다. 이것만 사면 정말 웬만한 클래식 레퍼토리를 감상할 수 있다.

현재는 전성기에 진행한 많은 녹음이 남아 있어 여전히 카탈로그가 방대하지만[17], 1950년대 후반에 스타마케팅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그라모폰 컴퍼니에 약간 뒤쳐진 마이너 레이블에 가까웠다. 1950년대 이전 녹음들 중에 명반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극소수를 제외하고 그라모폰 컴퍼니보다 그시절 녹음에 대한 이야기가 덜 나오는 편이었다.[18]

한국에서는 1990년대만 해도 성음레코드에서 독점 계약을 하여 여기서 연주한 전집을 다 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중반만 해도 음반 가게에 가면 클래식 분야가 노랑색으로 통일될 정도로 국내에서도 제법 많이 발매됐었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디 오리지날이라는 결정반 시리즈 발매에 주력하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갈수록 디 오리지날에 수록할 녹음 대부분의 저작인접권이 소멸하게 되는데 그 때의 미래가 아주 걱정되긴 한다.

최근 클래식 시장이 마이너 레이블 들의 춘추전국시대[19]로 가고 있어 메이저 레이블의 입지가 점점 줄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후에 인수 합병이라는 과정 없이는 생존이 어려워보인다. 마이너 레이블의 신보는 꾸준히 나오고 있는데 메이저 레이블은 재발매와 합쳐서 1년에 나오는 음반이 손에 꼽는다. 그래도 메이저 레이블 중에서는 상태가 가장 좋은 편이라 관현악곡 녹음은 꾸준히 내는 편이다. 예전의 메이저 레이블에서 보이던 돈 안될 것 같은 래퍼토리의 발매는 안하고 있지만..

막스 리히터와 같은 현대음악 작곡가와 계약을 해서 음반을 내기도 한다. 단순히 실험적이기만 할 뿐 아니라 대중성도 다소 챙기는 등 달리 보면 클래식을 내는 음반사가 맞는가 싶은 면을 보이기도 한다. 워너 클래식이나 소니 클래식에서는 시도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3.1. 인터넷

뒤늦게 온라인 음악 시장의 힘을 깨닫고 자사 홈페이지를 통해 판매중인 음반 전부를 무손실 FLAC과 320k MP3로 구입하여 소장할 수 있는 서비스를 개시하였다. 그런데 유럽(정확히는 유로존) 외 지역에서는 무조건 파운드화로 결제해야해서 결과적으로 국내 유저는 이래도 손해 저래도 손해. 미국 달러화 결제를 오픈한다고 하더니 몇년째 소식이 없다. 다행히도 한국어 홈페이지는 오픈했다.

홈페이지의 myDG 코너에서 DG가 발매했거나 발매중인 음반의 샘플러를 다운받을 수 있다. 2012년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한달 내내 하루에 한곡씩 푸는 행사를 했는데, 다 받아서 모아보면 웬만한 컴필레이션 앨범급의 양과 질을 자랑했다.

4. 소속 아티스트

지멘스 AG로 넘어와 튤립마크가 생긴 뒤부터 카라얀이 죽을 때까지 이 음반사와 얽힌 이야기가 진짜 많다고 한다. 하여간 카라얀은 DG에 큰 기여와 간섭을 하였으여 그 수준은 카라얀에게 한 마디 잘못했다가 짤리는 수준이었다고 한다.[20] 카라얀 외에도 칼 뵘과 오이겐 요훔, 라파엘 쿠벨릭, 레너드 번스타인 같은 동시대의 거물급 지휘자들이 전속 계약을 맺고 수많은 음반을 내놓았다. 정명훈도 2000년대 이후로는 전속 아티스트가 아니지만 여전히 이 음반사를 중심으로 녹음 활동을 하고 있고, 서울시립교향악단이 그의 지휘로 2015년 7월 현재 아홉 장의 음반을 발매하며 세계 음반 시장에 발을 들여놓고 있다.

사이먼 래틀EMI쪽에 있어서 그런지 현재 이 레이블에서 지휘자는 그렇게 뜨진 않는 것 같다. 뭐 어느 쪽이건 레퍼토리 발굴이 되지 않는 이상 미래는 없다. 2000년대 후반에는 엘 시스테마의 유명세를 타고 뜨고 있는 베네수엘라의 신예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과 전속 계약해 그의 출세로 이득을 보고있는 듯 하다. 그리고 2015년부터 떠오르는 신예 지휘자인 안드리스 넬손스를 영입했는데, 의외로 많은 음반을 발매하고 있다![21] 또한 야닉 네제-세겡과도 계약을 맺어 멘델스존 교향곡 전집을 발매하는 등 근래에 들어서 다시금 신보들을 활발하게 만들어 내고 있다. 조성진과도 계약을 맺어 한국 시장용 디럭스 음반을 제작하는 등 쇼팽 콩쿠르 우승으로 높아진 조성진 열풍에 적극 호응하는 중이다.

2000년대 들어 한국 아티스트들 중에서도 DG 상표의 음반들을 내놓고 있다. 상술한 지휘자 정명훈을 비롯해 피아니스트 김정원과 백건우, 서혜경, 임동혁, 바이올리니스트 김수연,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 첼리스트 여미혜, 콘트라베이시스트 성민제, 소프라노 조수미 등이 그 예. 다만 이들의 음반은 정명훈의 것을 제외하면 한국 시장용으로만 라이선스를 받아 생산/유통되고 있어서, 본사 홈페이지에서는 검색되지 않으니 주의.[22]

2016년에는 새해가 밝자마자 쇼팽 콩쿠르 우승에 빛나는 조성진과 매년 한 장씩 5년간의 다년 계약을 발표했고, 소프라노 박혜상과도 계약했다. 5년 만인 2021년에는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와 전속 계약을 맺었다. 이로써 DG와 전속 계약 중인 한국 음악인은 3명이 되었다.

참고자료: 유니버설 레코드의 회사 연혁

5. 발매 시리즈

클래식 음반의 일반적인 가격 분류에 따라 소비자가격 2만원 이상은 정가(Top), 1만 5천~2만원 사이는 중가(Mid/Med), 1만 5천원 이하는 염가반(Bud)으로 분류한다.[23] 우리나라에서는 대체로 정가반은 23500원, 중가반은 17500원, 염가반은 그 이하로 판매되고 있다.

디지털 구매와 스트리밍을 통해 음원공급을 하는쪽으로 전략을 수정하면서 대부분의 시리즈들이 폐반되었다. 이때문인지 현재 DG메인 페이지에서 시리즈&에디션이 안보인다. 아예 페이지가 없어진건 아니고 아르히프나 히스토리 같은 하위항목을 아무거나 누르면 시리즈&에디션 항목이 보인다.

중가로 한시적으로 풀렸다가 폐반하는 시리즈도 여럿 있다.

2016년 이후 시리즈의 이름을 달고 음반을 내고 있지 않고 있고 홈페이지에서도 시리즈 페이지를 삭제하였다. 기획 박스물은 시리즈 이름을 달고 나오지 않고 그때마다 개별적인 이름을 달고 발매하고 있다.

5.1. 정가

5.2. 중가

5.3. 염가

영어, 독일어, 한국어가 존재하는 클래시콘이라고 하는 시리즈는 DG 본사 측에서 로컬반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제외한다.

5.4. 박스셋

5.5. 창사 기념 박스

6. 기타

유니버설 뮤직으로 넘어가기 이전에는 dgclassics.com이라는 도메인을 사용했다. EMI가 그랬듯 플래시를 과도하게 사용하던 시기의 홈페이지는 웹아카이브가 있어도 열람하기가 어렵다.

DG의 녹음 및 마스터링을 담당했던 에밀 베를리너 스튜디오라는 곳이 있다. 현재는 분사하여 DG와 완전히 독립한 상태다.

폴리그램 시절 까지는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순으로 조성명 표기를 해왔지만, 유니버설 뮤직으로 넘어간 뒤에는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로만 표기하고 있다.

세계 피아노의 날 특집 라이브 방송에 조성진 출연에 의한 한국인 시청자가 물밀듯이 들어왔다. 그 이후 조성진의 새 앨범인 슈베르트 방랑자 미리듣기 라이브 영상에서는 아예 DG가 한국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번역기를 돌렸다는 설이 있었지만, 아래 사진 이후로는 한국인 직원을 채용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DG는 다양한 한국어를 구사했다. 그러나 해당 영상은 현재 비공개처리되어 다시보기 및 채팅표시를 할수 없게 되었다.

파일:앨범구매고고.png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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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치 그라모폰 소속 주요 음악가
클라우디오 아바도 마르타 아르헤리치 세르게이 바바얀
다니엘 바렌보임 리사 바티아슈빌리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레너드 번스타인 윱 베빙 라파우 블레하츠
피에르 불레즈 조성진 칙 코리아
플라시도 도밍고 구스타보 두다멜 존 엘리엇 가디너
데이비드 가렛 힐러리 한 다니엘 하딩
히사이시 조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예브게니 키신 김봄소리 카를로스 클라이버
기돈 크레머 랑랑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리윈디 브루스 리우 안네 소피 무터
안드리스 넬슨스 박혜상 마리아 조앙 피레스
마우리치오 폴리니 막스 리히터 야니크 네제 세갱
그리고리 소콜로프 스팅 다닐 트리포노프
유자 왕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존 윌리엄스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이 외의 소속 음악가들은 공식 사이트 참조, 성씨 알파벳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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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일에 있는 유니버설 뮤직의 주소와 일치한다.[2] 이 때문에 DGG의 초기 녹음들 중 일부는 EMI와 DG에 판권이 나누어져 있기도 하다.[3] 저 유대인 여성은 엘자 실러(Elsa Schiller, 1897~1973)라는 프로듀서로, 시간제 교수와 방송국 직원을 역임하다가 프로듀서로 발탁되었고, EMI의 월터 레그(Walter Legge, 1906~1979), 데카의 존 컬쇼(John Culshaw, 1924~1980)와 함께 클래식 음반 시장의 황금기를 이끌었다.[4] 폴리돌과 그라모폰의 합성어로 보인다.[5] 지분율은 필립스가 50% 지멘스가 50%이다.[6] 창립당시에는 창립자의 고향인 하노버에 있었다. 1900년에 본사를 베를린에 이전했다가 폴리그램 합병이후 함부르크로 이전했고 지금은 베를린에 본사를 두고 있다. 녹음 스튜디오는 하노버에 있다가 2008년에 분사후 2010년에 베를린으로 이전했다.[7] 원래 로베르트 슈만의 교향곡 4번을 녹음할 예정이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얼마 전 공연했던 하이든을 대신 택해 리허설 없이 바로 녹음했다. 이 때 빠진 슈만 4번은 1953년 5월에 가서야 녹음할 수 있었는데, 그 슈만 4번 녹음은 전설적인 명연으로 지금까지 널리 회자되고 있다.[8] 본사의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DG는 지사로 출발해서 본사에서 분사한 상황이었다.[9] LP시절의 녹음상태를 보면 녹음마다 제각각이긴 하지만 스테레오가 완전히 도입된 시기와 그 이후의 녹음들을 비교해보면 DG의 녹음이 EMI와 비교해도 밀리는 편이다. 아무래도 마땅한 녹음 스튜디오가 없던 DG와 애비 로드 스튜디오라는 최고급 스튜디오를 보유한 EMI의 음향이 차이가 좀 있었다. 낙소스 창사 직후의 녹음상태와 비교하면 못들을 수준은 아니지만 타 메이저 레이블과 비교해서는 많이 아쉽다. 디지털 녹음이 도입되고 나서는 많이 나아졌지만 2000년대 이전까지의 이야기다.[10] 현 SONY[11] 카라얀과 DG의 첫 녹음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영웅의 생애 녹음이었는데, 카라얀으로서도 녹음 전에 순회 연주회에서 베를린 필과 이 곡을 몇 차례 연주한 후에 녹음에 임할 정도로 신경을 썼다.[12] 4번은 당ㅅ 레닌그라드 필의 부지휘자였던 동독 지휘자 쿠르트 잔데를링의 지휘로 녹음되었다.[13]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구스타프 레온하르트를 내세워 공격적으로 고음악을 녹음하던 텔덱과 비교해도 레퍼토리는 뒤지지 않았다.[14] 이런 정책이 독특한 음반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라파엘 쿠벨릭이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과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녹음하려 했을 때는 이미 카라얀의 베스트셀러가 존재해 의미가 별로 없을 듯 하다고 판단한 경영진은 쿠벨릭에게 9개의 교향곡을 9개의 악단과 녹음하자고 제안했다. 쿠벨릭은 각 교향곡에 가장 적합한 오케스트라 9개를 골라 녹음해서 베를린필, 빈필, 런던 심포니,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등 최고의 악단이 등장하는 올스타 전집을 제작하기도 했다.[15] 음반이 잘 나오지 않았던 이유는 막장상태였던 EMI와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사이먼 래틀이 베를린 필에 있을 때 나온 녹음이 많지 않았고 워너 뮤직에 넘어가기 직전에는 듬성듬성 내놓는 수준이었다. 지금은 워너클래식으로 EMI는 역사속으로 사라졌다.[16]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다보니 그 만큼 카탈로그의 수도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비해서 현재 나오고 있는 음반의 수는 적은 느낌. 그것도 그럴 것이 대다수가 폐반됐는데 이런 음반들의 원본을 회사 창고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슬픈 일이지만 관련 연주자가 사망했을 경우 추모하는 의미에서 나오는 박스 세트에 들어가기도 하고, DG 창립 111주년으로 나온 박스에도 폐반된 음반이 포함되어 있다.[17] 전성기 시절에는 정말 별의 별 녹음이 다 있었는데 전속계약된 영국인 지휘자가 없는데다 영국의 음반사가 아니라 녹음할 일이 없을 것 같은데도 엘가 교향곡 1 & 2, 위풍당당 행진곡, 수수께끼 변주곡의 녹음을 보유하고 있으며, 본 윌리엄스의 푸른 옷소매 주제에 의한 환상곡과 날아오르는 종달새, 홀스트의 행성, 브리튼의 테너 호른과 현악을 위한 세레나데의 녹음을 보유하고 있다. 모두 영국인 지휘자나 연주자가 아닌 다른 나라의 지휘자나 연주자가 녹음한 녹음들이다.(다만, 악단은 영국에 있는 경우가 많다.) 단 ,이들 중 일부는 영국의 악단과 하였다. 옆동네에 비하면 빈약하긴 하지만 이쪽은 영국과 프랑스의 음반사가 합병했기 때문에 전성기 시절의 영국과 프랑스 레퍼토리가 풍부한 것도 있다. 도이치 그라모폰은 독일의 음반사였기 때문에 전성기 시절의 독일-오스트리아 레퍼토리는 다른 음반사와 비교해도 탄탄한 편이다.[18]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남긴 녹음이나 아루투르 니키슈의 베토벤 교향곡 같은 역사적인 녹음과 더불어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전시 실황 녹음 등이 있다.[19] 수지가 안맞아서 악단과의 녹음을 음반사가 잘 안하다보니 재정 문제가 생겨 자체 레이블로 돌아선 악단들도 많다. 메이저 레이블에서 독주자나 1인 성악 위주로 음반으로 많이 나오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20] 애초에 카라얀 자신이 공돌이 출신이기도 해서, 음반 녹음 때 프로듀서와 엔지니어의 고유 권한이었던 사운드 조정에도 관여했다고 알려져 있다.[21] 슈타츠카펠레 드레스덴과 함께 한 브루크너 3번 녹음이 대표적.[22] 사실 이런 '로컬 마케팅'은 전세계 메이저 음반사들이 공통적으로 행하고 있는 판매 전략이다. 이미 1980년대 후반에도 서울음반(현 로엔엔터테인먼트)이 클래식 음반 사업을 할 때 RCA 레이블의 한국 라이선스 생산/판매 계약을 따내면서 서울 시향의 첫 단독 음반과 한국 민요의 오케스트라 편곡 음반, 금난새의 초기 음반들 같은 순수 국내 제작반에 RCA 상표가 붙어서 나온 바 있었다. 중국일본에서도 해당 국가의 로컬 아티스트들이 이런 식으로 음반을 제작하고 있는데, 내수용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런 계약을 맺는 것은 메이저 레이블들의 상표 자체가 갖는 권위와 역사성 때문이다.[23] 일반적인 관현악곡에서 염가반은 해설지 내용이 적거나 단순한 표지 및 속지디자인을 제외하면 중가반과 큰 차이는 없다. 오페라나 성악곡 같은 경우 하이라이트만 따로 추려서 1CD안에 담거나 특정한 주제로 유명한 악장을 추려 짜깁기한 음반이 가끔 나오는 것이 염가반만의 특징이다. 중가반의 경우 정가반을 재발매한 음반이라 정가반이 하이라이트나 부분녹음이 아닌 이상 그대로 나온다.[24] 주로 49년 이전에 나온 녹음들을 많이 취급했던 시리즈이다. 여기서 저작인접권이 소멸하지 않은 녹음들은 디 오리지날에서 한 번 더 볼 수 있었다.[25] 다만 매우 드물게 OIBP 리마스터링을 거친 갤러리아 음반들도 있는데, 음반 뒷표지에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