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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colbgcolor=#000000> 1978년 | <colbgcolor=#fff,#1f2023>매리언 앤더슨, 프레드 아스테어, 조지 발란신,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리처드 로저스 |
1979년 | 에런 코플런드, 엘라 피츠제럴드, 헨리 폰다, 마사 그레이엄, 테네시 윌리엄스 | |
1980년 | 레너드 번스타인, 제임스 캐그니, 애그니스 데밀, 린 폰탠, 리언타인 프라이스 | |
1981년 | 카운트 베이시, 케리 그랜트, 제롬 로빈스, 헬렌 헤이스, 루돌프 세르킨 | |
1982년 | 조지 애벗, 릴리안 기시, 베니 굿맨, 진 켈리, 유진 오르만디 | |
1983년 | 캐서린 던햄, 엘리아 카잔, 프랭크 시나트라, 제임스 스튜어트, 버질 톰슨 | |
1984년 | 레나 혼, 대니 케이, 잔카를로 메노티, 아서 밀러, 아이작 스턴 | |
1985년 | 머스 커닝햄, 밥 호프, 아이린 던, 앨런 제이 러너, 프레더릭 로, 베벌리 실즈 | |
1986년 | 루실 볼, 레이 찰스, 제시카 텐디, 험 크로닌, 예후디 메뉴힌, 앤서니 튜더 | |
1987년 | 페리 코모,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베티 데이비스, 네이선 밀스타인, 알윈 니콜라이 | |
1988년 | 앨빈 에일리, 조지 번즈, 마이어나 로이, 알렉산더 슈나이더, 로저 L. 스티븐스 | |
1989년 | 해리 벨라폰테, 클로데트 콜베르, 알렉산드라 다닐로바, 메리 마틴, 윌리엄 슈만 | |
1990년 | 디지 길레스피, 캐서린 헵번, 라이즈 스티븐스, 줄리 스턴, 빌리 와일더 | |
1991년 | 베티 콤덴, 로이 에이커프, 아돌프 그린, 헤럴드 니콜라스, 로버트 쇼, 그레고리 펙 | |
1992년 | 라이어널 햄프턴, 폴 뉴먼, 조앤 우드워드, 진저 로저스,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폴 타일러 | |
1993년 | 자니 카슨, 아서 미첼, 게오르그 솔티, 스티븐 손드하임, 매리언 윌리엄스 | |
1994년 | 커크 더글러스, 아레사 프랭클린, 모튼 굴드, 해럴드 프린스, 피트 시거 | |
1995년 | 자크 당부아즈, 메릴린 혼, 비비 킹, 시드니 푸아티에, 닐 사이먼 | |
1996년 | 에드워드 올비, 베니 카터, 조니 캐쉬, 잭 레먼, 마리아 톨치프 | |
1997년 | 로렌 바콜, 밥 딜런, 찰턴 헤스턴, 제시 노먼, 에드워드 빌렐라 | |
1998년 | 빌 코스비, 프레드 엡, 존 칸더, 윌리 넬슨, 앙드레 프레빈, 셜리 템플 | |
1999년 | 빅터 보르게, 숀 코너리, 주디스 재스민, 제이슨 로바즈, 스티비 원더 | |
2000년 |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척 베리, 플라시도 도밍고, 클린트 이스트우드, 안젤라 랜스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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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와 세이지 | 마리스 얀손스 | 주빈 메타 |
<colbgcolor=#000><colcolor=#fff> 오자와 세이지 小澤 征爾 | Ozawa Seiji | |
출생 | 1935년 9월 1일 |
만주국 펑톈성 펑톈[1] | |
사망 | 2024년 2월 6일 (향년 88세) |
국적 | 일본 |
직업 | 지휘자 |
가족 | 배우자 오자와 베라[2] 장녀 오자와 세이라[3] 장남 오자와 유키요시[4] 조카 오자와 켄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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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15년 10월 1일, 마르타 아르헤리치, 사이토 키넨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본인의 80세 생일 축하 공연 |
일본의 지휘자.[5]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사이토 키넨 오케스트라,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을 역임했으며,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2. 생애
2.1. 유년기 및 청소년기
1935년 만주국 펑톈성 펑톈에서 치과의사이자 만주국 협화회 장춘지부장이었던 오자와 가이사쿠의 3남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당시 가이사쿠가 친하게 지내던 만주군 참모인 이타가키 세이지로(板垣 征四郎)와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1941년 어머니, 형들과 함께 일본 도쿄로 건너왔다.1945년 우연히 피아노를 치는 걸 보고 재능을 알아챈 아버지[6]와 큰 형은 아버지가 시계를 팔아서 산 피아노를 리어카에 싣고 집에 가지고 왔고, 이 피아노로 세이지는 열심히 연주했다고 한다.
1948년 세이죠 학원 중등부에 입학했는데, 당시 집안이 상당히 가난했기에 어머니가 부업까지 하면서 가르쳤다고 한다.
1951년 세이죠 학원 고등부에 입학하게 되자 어머니의 먼 친척이자 지휘자인 사이토 히데오가 운영하는 지휘학원에 입학했고, 사이토의 권유로 1952년 토호여학교 고등부(남녀공학)에 편입하며 1955년 토호단기대학에 입학하여 1957년 졸업하게 된다. 1958년 군마 교향악단을 지휘하거나 도쿄 필하모니 부지휘자로 활동했다.
2.2. 유럽 유학과 미국행(뉴욕 필 부지휘자)
1959년 스승 사이토 히데오의 조언으로 유럽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유럽 유학 당시 오자와는 생계를 위해 유럽에 주재한 일본 기업과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모터사이클 세일즈맨 생활을 했다.1959년부터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제자가 되어 지휘를 배우게 되었다. 카라얀은 제자를 키우는데 거의 관심이 없었던 인물이었지만, 일찌감치 오자와의 재능을 알아채고 그를 제자로 키웠다.
1959년 프랑스 브장송(Besançon) 국제 지휘자 콩쿠르에서 1위를 하며 유럽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브장송 콩쿨의 심사위원이었던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 샤를 뮌슈는 그를 보스턴으로 초청했고 거기서 오자와는 샤를 민쉬와 피에르 몽퇴에게 지휘를 배우면서 탱글우드 페스티벌에 참여하게 되었다.
오자와는 보스턴에 도착하여 뮌슈와 몽퇴에게 지휘를 배운지 얼마 되지도 않아 1960년 쿠세비츠키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뉴욕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그를 주목했고, 1961년 번스타인은 오자와를 뉴욕 필의 부지휘자(assistant conductor)로 채용했다. 뉴욕 필의 부지휘자 시절인 1962년 샌프란시스코 심포니를 지휘하며 서방에서 지휘자로 공식 데뷔했다.
1962년 여름 뉴욕 필 부지휘자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돌아와 일본 최고의 명문 오케스트라인 NHK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게 되었다. 하지만 무척 권위적인 단원들과 아직 20대 후반의 새파랗게 젊은 신참 지휘자였던 오자와는 극심한 마찰을 겪게 되었다. 결국 일부 단원들이 오자와의 지휘를 거부하면서 파국으로 끝나고 말았다.[7] 도쿄에서의 갈등 후에 오자와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고 1964년 번스타인은 다시 그를 부지휘자로 채용했다.
2.3. 토론토 심포니 음악 감독
이듬해인 1965년 토론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면서 뉴욕 필 부지휘자직을 그만두게 되었으며, 본격적으로 지휘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토론토 심포니에서는 1969년까지 재임했다.1965년부터 RCA와 음반을 취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주로 협주곡을 반주하는 녹음을 맡았으나 이듬해부터 RCA는 그를 명문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주선하여 차이코스프키, 베토벤, 슈베르트 교향곡 등을 취입했다.
2.3.1. 베를린 필과 빈 필 데뷔
1966년에는 스승 카라얀에 의해 세계적인 음악 축제인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처음으로 지휘하며 그의 이름을 유럽에 알리게 되었다. 같은 해 하반기에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도 데뷔했다. 1969년에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모차르트 코시 판 투테를 지휘하며 오페라 지휘자로 데뷔했다.2.3.2. 뉴 재팬 필하모닉, 그리고 결혼
1968년 뉴 재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 고문이 되었고, 같은 해에 러시아계 혼혈인 이리에 미키[8]와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작가 오자와 세이라, 배우 오자와 유키요시가 태어났다.2.4.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음악 감독
1970년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여 1976년까지 재임했다. 1972년 필립스와 계약을 맺고 음반을 녹음하기 시작했고, 그와 샌 프란시스코 심포니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샌프란시스코 심포니는 이전까지 사실상 거의 음반 녹음이 없었기에 오자와의 음반 작업은 악단이 크게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1973년 오자와와 샌프란시스코 심포니는 유럽 투어를 이끄는 등 샌프란시스코 시절은 오자와 본인에게나 악단에게나 그 명성을 세계적으로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1973년 오자와가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직을 겸임하게 된 이후 1974년 일본인 바순 단원을 채용하는 문제로 오케스트라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2.5.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역사상 최장기(29년) 음악 감독
1973년 미국을 대표하는 명문 오케스트라 중 하나인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에 취임하여 빈 국립 오페라 극장 음악 감독에 취임하는 2002년까지 29년간 재임하여 악단 최장수 지휘자가 되었다. 보스턴 심포니 음악 감독에 취임하면서 세계적인 음반사인 도이치 그라모폰과 계약을 맺게 되었다. 초기에 그는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프랑스 음악이나 러시아 음악 등을 주로 취입했으나 이는 음반사의 의도였을 뿐 오자와 자신은 카라얀에게 배운 독일적인 음색을 입히기 위해 주력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오자와는 클라우스 텐슈테트, 쿠르트 마주어 등 독일 출신 지휘자들을 보스턴 심포니에 객원 지휘자로 초청하기 위해 각별히 애를 썼다고 밝혔다. 또 오자와는 뉴욕 필 부지휘자 시절 번스타인에게 말러를 배웠고 이후 말러는 오자와의 주요 레퍼토리 중 하나가 되었는데, 77년 보스턴 심포니와 녹음한 말러 교향곡 1번은 젊은 시절 그를 대표하는 명반으로 자리잡았으며, 한국에서도 그의 명성을 확립해준 음반이 되었다. 보스턴 심포니는 1994년 새 탱글우드 콘서트 홀을 건립하여 "세이지 오자와 홀"이라고 명명하였다.2.5.1.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관계
그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주요 객원 지휘자 중 한 명이 되었다. 특히 카라얀은 본인이 그다지 흥미가 없었던 말러 교향곡 연주를 오자와에게 맡겼다고 한다.1980년대 이후 카라얀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로린 마젤, 리카르도 무티, 다니엘 바렌보임, 클라우스 텐슈테트와 함께 베를린 필의 차기 상임지휘자 후보군으로 꼽혔다. 80년대 후반 카라얀을 대신해서 베를린 필의 해외순회 공연을 이끌기도 했다. 그러나 1989년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로는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선출되었다. 대신, 1989년 12월 31일 카라얀 사후 첫 베를린 필하모닉 송년음악회를 오자와가 지휘하면서 베를린 필과의 관계가 여전히 원만함을 보여주었다. 이 송년음악회 당시 오자와는 베를린 필하모니 대공연장에서 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를 지휘하였다.[9] 이 날 공연 호응이 매우 좋았으며, DVD로도 발매되었다.
2.5.2. 빈 필하모닉과의 관계
1980년대 이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주요 객원 지휘자가 되었으며, 특히 1990년대 빈 필을 가장 자주 지휘하는 핵심 지휘자 중 한 명이 되었다. 또한 빈 필의 해외 순회공연을 여러 차례 이끌기도 했다. 1993년 빈 필하모닉과 함께 내한하기도 하였다. 2002년에는 스승 카라얀과 마찬가지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음악회를 지휘했다.[10]2.5.3. 사이토 키넨 오케스트라 창립
1984년 오자와의 스승 사이토 히데오 사망 10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일본 국내 및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이토 히데오의 제자들과 함께 《토호 학원 사이토 히데오 메모리얼 오케스트라》를 결성해서 사이토 히데오 메모리얼 콘서트를 도쿄와 오사카에서 개최했다. 1992년 사이토 키넨 재단이 설립되면서, 오케스트라의 명칭도 《사이토 키넨 오케스트라》로 변경되었다.[11]2.6. 동양인 최초 빈 국립 오페라 극장 음악 감독
2002년 1월 1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음악회를 지휘했다.2002년 클라우디오 아바도 이후 11년간 공석이었던 빈 국립 오페라단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했으며, 이는 동양인 최초이다.[12] 빈 국립 오페라단에서 총감독과 음악 감독을 겸직했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제외하면, 순수하게 음악 감독만 맡았던 지휘자 중에서는 빈 국립 오페라단 역사상 최장기 음악 감독으로 재임했다.[13] 2006년 대상포진과 폐렴에 걸리는 바람에 음악 감독 활동을 일시 중단했지만 회복 후 다시 음악 감독직에 복귀했고 이후에도 수년간 계속해서 활동했다. 2004년에는 빈 필하모닉과, 2007년에는 빈 국립 오페라단과 함께 내한하기도 하였다.
2010년 1월 식도암 진단을 받은 후 음악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같은 해 11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명예 단원으로 추대되었다.
2.7. 2010년 이후
2010년 8월 식도암 수술 후 7개월 만에 무대에 복귀했다.# 복귀한 이후에는 사이토 키넨 오케스트라 외에 다른 악단의 음악 감독이나 수석 지휘자직은 맡지 않았다.2010년 7월 케네디 센터 공로상을 수상했으며, 2010년 11월에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명예 단원으로, 2016년 4월에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명예 단원으로 추대되었다.[14] 하버드 대학교를 포함한 5개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5년 80세를 맞이한 이후로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면서, 하나의 공연 전체를 지휘하는 것도 힘들어졌다. 그래서 80세 이후의 공연들은 대부분 전반부는 악단 내 단원이 지휘를 대신하거나 단원들 간 실내악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오자와는 당일 공연의 후반부 지휘만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16년 10월 1일에는 산토리 홀 개관 30주년 기념으로 열린 빈 필하모닉의 도쿄 갈라 콘서트 중 일부를 지휘했는데, 이 역시도 절반은 주빈 메타, 나머지 절반은 오자와가 맡았다. 마지막 앵콜곡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천둥과 번개 폴카에서는 메타와 오자와가 함께 포디움에 올라 지휘하는 퍼포먼스도 보였다. 이는 오자와가 1966년 8월부터 50년간 관계를 이어온 빈 필하모닉과 공식적으로 함께 한 마지막 공연이기도 하다.[15]
그러다가 2020년부터는 거동 자체가 불편해지면서 휠체어 없이는 이동이 거의 불가능한 정도가 되었고, 공식적인 대외 활동량도 대폭 축소했다.
오자와는 2022년 11월 22일 공연 영상을 우주 탐사선으로 송신해서 생중계하는 프로젝트(One Earth Mission)에 참여했다. 당시는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이었기 때문에 무관중 공연으로 진행되었다. 이날 오자와는 일본 나가노현 마츠모토시에 위치한 킷세 문화 홀[16]에서 휠체어에 앉아 사이토 키넨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을 연주하였고, 연주를 마치고는 눈물을 흘렸다. 무대에서 퇴장할 때 시각장애인 바이올린 단원과의 악수를 빼놓지 않았다. 이 공연이 오자와 세이지의 생애 마지막 지휘이자, 마지막 공식 일정이다.#
2.8. 사망
2024년 2월 6일 일본 도쿄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심부전으로 사망했으며, 관련 보도는 그로부터 3일 뒤에 이뤄졌다.#3. 평가
역사상 가장 성공한 동아시아 출신 지휘계의 거장이다. 그동안 클래식 음악계에서 동양인이 좀처럼 진입하지 못해온 대표적인 영역이 지휘 분야인데, 오자와가 실력과 명성을 인정받으면서 첫 성공 사례가 된 것. 활동 초기에는 동아시아인이 서양인의 음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 그럼에도 오자와는 카라얀과 번스타인이라는 당시 가장 위대한 거장들의 지지를 꾸준히 받아 성장하였으며, 이 두 거장은 자신들이 음악 감독으로 재직하던 베를린 필하모닉과 뉴욕 필하모닉에서 오자와가 객원 지휘를 할 수 있도록 여러 차례 기회를 주었고 오자와는 전부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또한 카라얀은 오자와에게 빈 필하모닉과 빈 국립 오페라단 객원 지휘의 기회도 지속적으로 주선해 주었고, 오자와는 뛰어난 실력과 친화력으로 그 깐깐하다는 빈 필하모닉 단원들의 환대를 받으며 수십 년간 관계를 이어갔다.오자와가 악단을 지휘하는 모습을 보면 단순히 지휘봉을 휘두르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도 음악에 심취한 듯 흥에 겨워 들썩거리는 퍼포먼스가 특징이며, 독일의 일부 언론에서는 '지휘하는 파가니니'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4. 가족
오자와 세이지의 아들인 오자와 유키요시는 배우이다.[17] 그의 둘째 형인 오자와 토시오(小澤俊夫)는 일본의 유명한 독문학자이며[18], 토시오의 아들이자 세이지의 조카인 오자와 켄지는 일본 시부야계를 대표했던 가수이자 사회 운동가이다.5. 저서
6. 여담
-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와 매우 친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둘은 꼭 공연 준비가 아니더라도 골프, 스키 등 레저 스포츠를 자주 함께 즐겼다고 한다. 로스트로포비치의 생애 첼리스트로서의 마지막 공연(지휘자로서의 공연은 2006년까지 이어갔다.)의 지휘를 오자와가 맡기도 했다.[21]
- 오자와 스스로 야구 관람을 매우 좋아한다고 밝힌 바 있다. 보스턴 심포니 음악 감독 시절 보스턴 레드삭스의 경기를 자주 보러 갔다고 한다.
- 1993년과 2004년에는 빈 필하모닉과, 2007년에는 빈 국립 오페라단과 함께 내한 공연을 한 바 있다.
[1] 現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2] 러시아 혼혈의 모델, 여배우. 결혼 전에는 이리에 미키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다.[3] 에세이스트.[4] 배우, 타키가와 크리스텔의 전 연인. 현 부인인 아나운서 쿠와코 마호와는 2021년에 결혼했다.[5] 2002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음악회 당시 라데츠키 행진곡을 연주하기에 앞서 다양한 국적의 연주자들이 자신들의 모국어로 새해 인사를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오자와 세이지의 바로 앞 차례에서 서양인 연주자가 일본어로 인사를 했다. 관중들이 폭소하는 와중에 오자와는 중국어로 새해 인사를 했다.[6] 오자와 가이사쿠는 가족들이 도쿄로 가고 나서 베이징에서 여러가지로 활동했고, 전쟁 말엽에는 중일전쟁에 대한 일본군의 태도를 강하게 비난했는데 당시 그의 뒷배였던 이타가키나 이시와라는 관동군에 없었지만 그들과의 친분 덕택에 결국 일본군에 의하여 일본으로 강제 추방 처리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일본이 패전하게 되었는데 이때 중국측은 그를 현상수배했다고 한다.[7] 훗날 오자와가 세계적인 거장이 된 뒤에도 NHK 심포니와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다가, 30여년이 지난 1995년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화해하며 그 해 1월 23일 일본 도쿄 산토리 홀에서 공연도 하게 되었다. 당시 협연자로는 오자와와 매우 절친한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가 함께 했다.[8] 이리에의 조부는 러시아 백군으로 활동하다 내전 패전 후 만주로 건너갔다. 이후 도쿄로 유학을 간 이리에의 부친은 일본 여성과 결혼하여 한동안 도쿄에서 살다가, 만주에 볼 일이 있어서 간 직후 행방불명되었는데 2019년 NHK 패밀리 히스토리 방송을 통해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패전 직전 만주로 간 직후 소련군이 만주로 진격하는 바람에 도망치지 못한 채 그대로 포로로 잡혀, 스파이죄 등으로 징역 25년형을 선고받아 카자흐스탄 강제수용소에서 수감되어 있다가 수감 9년째에 사망했다.[9] 신유카이 합창단, 소프라노 캐슬린 배틀, 테너 프랑크 로파르도, 바리톤 토마스 알렌 등이 함께 하였다.[10] 다만 전곡 수록 음반은 일본에서만 출반했고 이외 지역에서는 영상 음반 DVD에서만 전곡을 만나볼 수 있었다.[11] 이 악단은 2008년 영국 그라모폰 매거진에서 선정한 세계 악단 순위에서 19위를 기록하기도 했다.#[12] 주빈 메타조차도 이 직책에는 취임한 적이 없다.[13] 오자와 재임 당시 빈 국립 오페라단의 총감독은 1992년부터 18년간 장기 재직한 이오안 홀렌더(Ioan Holender)이다.[14] 베를린 필하모닉 창단 이후 단 6명 뿐인 명예 단원 중 한 명이다. 명예 단원 추대는 2016년 4월 10일 진행된 오자와의 베를린 필하모닉 공연을 위한 전날 리허설 중에 이뤄졌다. 오자와는 이 공연에서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과 합창 환상곡(피아노는 피터 제르킨이 맡았다. 피아니스트 루돌프 제르킨의 아들이다.)을 지휘했으며, 공연 전반부는 지휘 없이 단원들이 모차르트의 그랑 파르티타를 연주하는 것으로 채워졌다. 이 공연이 오자와가 50년간 연을 이어온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마지막 공연이다.[15] 이 날 오자와는 슈베르트의 교향곡 7번 미완성, 타케미츠의 노스텔지아(바이올린 : 안네-조피 무터) 지휘를 맡았고, 나머지는 메타가 맡았다.[16] 사이토 키넨 오케스트라의 상주 공연장[17] 유키요시는 아나운서 타키가와 크리스텔과 교제하였고 결혼 발표까지 했지만, 크리스텔의 섹스 비디오 스캔들이 터진 이후 결별했다. 이후 크리스텔은 2019년 정치인 고이즈미 신지로와 결혼했다.[18] 중일전쟁 시기 일본 제국의 병폐를 직접 본 사람이다 보니, 그는 과거에 대한 반성이 없는 일본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참고로 오자와 토시오는 어렸을 때 얼굴 쪽에 심한 화상을 입었고 그로 인한 안면장애 때문에 학창 시절 집단괴롭힘을 당하는 등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19] 무라카미 하루키와 공저[20] 오에 겐자부로와 공저[21] 2005년 6월 20일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한 것이며, 이 날 지휘와 악단은 각각 오자와 세이지와 빈 필하모닉이 맡았고, 공연 장소는 빈 무지크페라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