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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FC/울리에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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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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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 현재
초대
바클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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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맥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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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왓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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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대
애시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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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맥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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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패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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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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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
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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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대
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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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샹클리
(샹클리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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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대
페이즐리
(페이즐리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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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대
페이건
(페이건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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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달글리시
(달글리시 체제(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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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대(대행)
모란
(모란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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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수네스
(수네스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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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에반스
(에반스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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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대
에반스&울리에
(에반스&울리에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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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울리에
(울리에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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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대
베니테스
(베니테스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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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호지슨
(호지슨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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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달글리시
(달글리시 체제(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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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로저스
(로저스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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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대
클롭
(클롭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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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대
슬롯
(슬롯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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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어 리그 / FA컵 / EFL컵 / EFL 챔피언십
UEFA 챔피언스 리그 / UEFA 유로파 리그 / UEFA 슈퍼컵 / FIFA 클럽 월드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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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reebok1998.png
파일:리버풀 FC 로고.svg
리버풀 FC
울리에 체제
[[제라르 울리에|
파일:리버풀 감독 제라르 울리에.jpg
]]
제17대 감독
제라르 울리에
<colbgcolor=#d00027><colcolor=#fff> 감독
[[프랑스|]][[틀:국기|]][[틀:국기|]] 제라르 울리에 / 제17대 감독
코치
[[프랑스|]][[틀:국기|]][[틀:국기|]] 파트리스 베르그 (수석 코치)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필 톰슨 (수석 코치)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새미 리 (수석 코치)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조 코리건 (골키퍼 코치)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데이브 맥도노프 (수석 분석관)
주장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폴 인스 / 제 43대 주장 (1997~1999)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제이미 레드냅 / 제 44대 주장 (1999~2001)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로비 파울러 / 제 45대 주장 (2000~2001)[1]

[[핀란드|]][[틀:국기|]][[틀:국기|]] 사미 히피아 / 제 46대 주장 (2002~2003)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스티븐 제라드 / 제47대 주장 (2003~2015)
계약 기간 1998년 11월 12일 ~ 2004년 5월 24일
(5년 6개월 / 2020일)
계약 종료 (성적 부진에 따른 상호 협약 해지)
연봉 €5.9m[2] (감독 / #)
전술 스타일 빠른 속도와 전환 위주의 속공 축구
4-4-2 포메이션
┗ 빠르고 피지컬이 우수한 투톱의 활용
┗ 다이렉트한 전환과 속공
역대 전적 307경기 160승 73무 74패 (승률 52.12%)
우승 경력 2000-01 FA컵 (우승)
2000-01 EFL컵 (우승)
2002-03 EFL컵 (우승)
2001 FA 커뮤니티 실드 (우승)
2000-01 UEFA컵 (우승)
2001 UEFA 슈퍼컵 (우승)

1. 개요2. 감독 선임 과정3. 연혁
3.1. 1998-99 시즌3.2. 1999-00 시즌3.3. 2000-01 시즌3.4. 2001-02 시즌3.5. 2002-03 시즌3.6. 2003-04 시즌
4. 공격 포인트 순위5. 시즌별 주요 성적6.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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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버풀 FC의 제17대 감독 제라르 울리에 체제를 정리한 문서.

2. 감독 선임 과정

1998년 7월, 울리에는 리버풀 FC의 레전드인 로이 에반스와 함께 공동 감독으로 리버풀을 이끌게 되었다. '공동 감독'이라는 보기 드문 체제가 만들어진 것엔 이유가 있었다. 로이 에반스는 전임 감독 그레이엄 수네스가 망쳐놓은 팀을 잘 수습하고 컵 대회를 우승하며 클럽에 활력을 되살리는 데 성공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좋은 전술 능력에 비해 리더십과 선수단 관리 능력이 부족하여 선수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고[3], 스티브 맥마나만, 로비 파울러 등 주축 선수들은 훈련에 빠지는 일이 많았으며 화려한 헤어 스타일, 여자, 클럽 등에 빠진 방탕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그들을 가리켜 당시 영국에서 대인기였던 걸그룹 '스파이스 걸스'를 본떠 '스파이스 보이스'라고 부르며 조롱했다. 그래서 리버풀 보드진은 젊은 선수들을 잘 통제하여 기량을 터트리는 데 일가견이 있던 울리에에게 선수 관리를 맡기고자 했던 것.[4] 하지만 에반스를 바로 내치기엔 에반스는 수네스 체제의 부진을 극복하고 상위권 성적을 구가하고 있던 감독이었으며, 팀의 레전드로서 입지가 단단했기에 명분이 부족했다. 이에 리버풀 보드진은 에반스 또한 감독으로 붙잡아둔 것이었다. 이리하여 울리에는 선수 훈련, 관리 등을 맡고 에반스는 경기 지휘를 맡는 리버풀 역사상 최초의 공동 감독 체제가 성립되었다.[5]
파일:external/static.guim.co.uk/Liverpools-joint-managers-005.jpg
공동 감독 시절의 에반스와 울리에

그러나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공동 감독 체제는 리버풀에게 악재로 작용했다. 두 사람은 팀 운영의 모든 부분에서 자신의 권한을 내세우며 대립했다.[6] 이렇듯 두 감독이 자리 다툼을 했으니 성적이 제대로 나올 리 만무했고, 리버풀은 공동 감독 체제가 시작된 1998-99 시즌 초반 4개월 동안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다. 결국 1998년 11월 토트넘 홋스퍼에게 홈에서 3-1로 패한 것을 끝으로 로이 에반스는 체제의 비합리성을 느껴 자진 사임했고, 11월 12일, 울리에가 비로소 리버풀의 정식 감독으로 계약하여 부임하게 되었다. 단독 감독 체제로는 2대 감독 존 맥케나 이후 최초의 외국인 감독 체제였으며, 리버풀 역사상 최초의 유럽 대륙 출신 감독이었다.

파일:한시적 넘겨주기 아이콘.svg   로이 에반스 체제와 공동 감독 체제에 대한 내용은 리버풀 FC/에반스 체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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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연혁

3.1. 1998-99 시즌

울리에는 본격적으로 지휘봉을 잡은 후, 팀의 리빌딩을 위한 5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12월에 UEFA컵에서 셀타 비고에게 일격을 맞으며 탈락하고 리그에서도 고전하고 있었기에, 그는 우선 겨울 이적 시장을 활용하여 리고베르 송, 지미 트라오레, 장 미셸 페리를 영입해왔고, 팀의 베테랑 제이슨 맥아티어, 스티브 하크니스 등을 떠내보냈다. 그러나 리버풀은 1월에 스티브 맥마나만과 재계약에 실패해 그를 보스만 룰에 의해 떠나보낼 위기에 처했고, 순위를 끌어올리려고 노력했으나 1월에 FA컵에서 탈락한 뒤, 리그에서 계속해서 고전을 거듭했다.

결국 4월 말까지 리버풀은 리그 10위까지 미끄러졌고, 시즌 막판에 순위를 다시 올리긴 했으나 결국 7위로 리그를 마감, 유럽 무대로 복귀한 이후 5년만에 처음으로 유럽 대항전에도 진출하지 못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울리에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후, 스티븐 제라드가 유스에서 1군으로 월반해 무궁한 기회를 부여받으며 성장하게 되었고, 제이미 캐러거가 수비진의 주축으로 자리잡았다. 또한 리그에서만 18득점을 기록하며 2시즌 연속 리그 득점왕에 오른 마이클 오언의 활약이 이어져 미래를 기대할 수는 있었다.

3.2. 1999-00 시즌

최악의 시즌을 보낸 뒤, 첫 번째 풀 타임 시즌에 들어서 울리에호는 '스파이스 보이스'라며 조롱을 받는 선수들의 정신상태를 바로잡고 스쿼드를 젊게 리빌딩해 본격적으로 유망주들을 키우는 데 전력을 다했다. 1999년 여름, 울리에는 폴 인스, 데이비드 제임스, 제이슨 맥디어, 롭 존슨, 토니 워너, 그리고 스티브 할킨스를 방출했고 리버풀의 레전드였던 스티브 맥마나만마저 끝내 자유계약으로 보내버리는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다. 울리에는 방출한 선수들의 빈자리를 젊은 영입생들과 유스들로 채웠다. 사미 히피아와 스테판 앙쇼가 이 때 영입되어 센터백진의 퀄리티를 더했고, 디트마어 하만, 블라디미르 스미체르, 산데르 베스터벨트, 티티 카마라, 에릭 메이저가 영입되었다. 또한 충격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던 군계일학의 원더 보이 마이클 오언과 가파른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던 스티븐 제라드, 제이미 캐러거가 로컬 유스들로서 팀에 자리를 잡았다.

울리에호는 주장이었던 폴 인스를 보내고 제이미 레드냅로비 파울러를 주장과 부주장으로 각각 선임하며 젊게 바뀐 팀을 만들어 시즌을 시작했다. 그러나 리버풀은 시즌 초반 아직 다듬어지지 못한 조직력을 노출하며 9월까지 리그 12위로 처지는 등 좋지 못한 출발을 보였다. 하지만 리버풀은 10월부터 점차 반등을 시작하여 점차 승점을 쌓았고, 박싱데이 이후 에밀 헤스키가 영입되어 공격진의 무게감이 더해지면서 3월에는 리그 2위로 올라섰다. 그러나 리그 마지막 5경기에서 리버풀은 2무 3패를 거두는 부진으로 결국 리그 4위로 시즌을 마감했고, 그나마 UEFA컵 진출권을 확보하며 유럽 대항전에는 복귀할 수 있었다. FA컵은 4라운드, 리그컵은 3라운드에서 탈락하면서 컵대회에서도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3.3. 2000-01 시즌

리빌딩은 2000년에도 계속되었다. 2000년 여름, 울리에는 마르쿠스 바벨, 닉 밤비, 페기 아르펙사드, 에밀 헤스키, 게리 매칼리스터, 크리스티안 지게를 데려오며 또 다시 대거 영입을 감행했다. 반면 데이비드 톰슨, 필 바브, 도메니크 마테오, 스티브 스탄턴, 브래드 프리델 등은 팀을 떠나야했다. 또한 스티븐 제라드, 마이클 오언, 제이미 캐러거가 본격적으로 재능을 만개하며 스쿼드의 퀄리티가 상당히 안정화되었고, 새롭게 영입된 선수들도 점점 팀에 녹아들게 되었다. 울리에의 리버풀은 이전 시즌들보다 훨씬 더 부침없이 리그 레이스를 펼쳤고, 주장 제이미 레드냅의 장기 부상 시즌 아웃과 더불어 박싱 데이를 기점으로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리그 마지막 7경기에서 6승 1무를 거두며 리그 순위를 끌어올려 리그 3위로 시즌을 마감하여 리빌딩의 효과를 보았다.

컵대회에서는 더 확실한 성과를 거두었다. 리버풀은 리그컵에서 첼시 FC, 스토크 시티, 풀럼 FC을 차례로 꺾고, 준결승에 진출해 크리스탈 팰리스를 총합 스코어 6-2로 대파하고 간만에 리그컵 결승전에 올랐다. 2001년 2월 25일에 열린 결승전 상대는 버밍엄 시티. 리버풀은 파울러의 전반 득점으로 무난하게 경기를 끌어갔으나 90분에 페널티킥을 내줘 1-1로 연장에 돌입, 결국 승부차기에 돌입했다. 그러나 침착하게 승부차기를 이어간 리버풀 선수단은 결국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고, 리버풀은 통산 6번째 리그컵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울리에호는 FA컵에서도 마찬가지로 놀라운 모습을 보여줬다. FA컵에서 리버풀은 로더햄 유나이티드, 리즈 유나이티드, 맨체스터 시티, 트랜미어 로버스, 위컴 원더러스를 꺾고 결승까지 가볍게 진출했고, 결승에서 아스날 FC와 격돌하게 되었다. 리버풀은 72분 프레디 융베리에게 선제골을 내어주었으나 83분과 88분에 마이클 오언의 동점골과 역전골이 터져, 2-1로 아스날을 격파, 통산 6번째 FA컵 우승이자 도메스틱 컵 더블을 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즌의 백미는 유럽 대항전에서 있었다. 리버풀은 UEFA컵에서 FC 라피드 부쿠레슈티, FC 슬로반 리베레츠, 올림피아코스 FC를 차례로 꺾고 4라운드에서 AS 로마까지 격파한 뒤 8강에 진출했고, FC 포르투를 제압한 뒤 4강까지 가볍게 올라섰다. 이후 4강전에서 울리에호는 FC 바르셀로나를 만났으나, 1차전 캄프 누에서 골 없이 무승부를 기록한 뒤 안필드에서 게리 매칼리스터의 페널티킥 득점으로 승리해 헤이젤 참사 이후 첫 유럽 대항전 결승전에 올랐다. 결승 상대는 라리가에서 조르디 크루이프와 함께 돌풍을 일으키고 있던 데포르티보 알라베스. 2001년 5월 16일에 열린 결승전에서 리버풀은 이른 선취 득점들로 2-0으로 일찍이 앞서갔으나 26분에 추격골을 허용, 이후 다시 페널티킥을 성공하며 3-1로 스코어를 벌리는듯 하다가 47분과 59분에 실점을 또 허용하며 3-3 동점까지 가는 진땀 승부를 이어갔다. 이후 로비 파울러가 72분에 다시 앞서가는 득점을 터트렸지만 정규 시간 종료를 2분 남기고 데포르티보의 에이스 조르디 크루이프의 동점골이 터지며 경기는 연장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경기 종료 4분을 남긴 116분, 데포르티보의 극장 자책골이 나오며 리버풀은 5-4로 승리, 통산 세 번째 UEFA컵 우승이자 마지막 유러피언컵 우승이었던 1983-84 시즌 이후 실로 오랜만의 유럽 대항전 우승을 달성했다.
파일:external/img.thesun.co.uk/77_hou_1479966a.jpg
UEFA컵 트로피를 들어올린 울리에

이로써 리버풀은 해당 시즌 리그컵, FA컵, 그리고 UEFA컵을 모두 우승하며 미니 트레블을 이룩했다. 또한 울리에 개인으로서는 미니 트레블의 성과를 바탕으로 2001년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UEFA 올해의 팀 감독 부문에 선정되었다. 케니 달글리시 체제 이후 좋지 못한 모습을 거듭하던 리버풀은 실로 오랜만에 유의미한 성과와 더불어 강팀으로서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었고, 울리에 감독 아래에서의 리빌딩이 제대로 이루어졌음이 증명된 시즌을 보낼 수 있었다. 제이미 레드냅이 일찍이 시즌 아웃되며 스쿼드에 위기가 있었지만 로비 파울러가 주장직을 대행하며 팀을 이끌면서 젊은 선수들이 주축이된 새로운 스쿼드가 자리를 잡았고, 유럽 대항전과 국내 컵대회 우승으로 인해 팀에 새로운 활력이 도는 시즌이었다.

또한 이 때, 울리에 감독의 요청으로 멜우드 훈련장이 새롭게 리모델링을 진행하게 되었다. 리버풀은 2001년 1월, 멜우드에 선수들과 코치들을 위한 현대적인 시설을 새로 지었으며, 체육관, 수영장, 사우나와 치료실, 재활실, 식당, 휴식 구역 등 다양한 시설을 확충했다. 새로 리모델링 된 메인 건물은 넓은 창문으로 사무실에서 훈련장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경기 분석을 위한 분석실과 미디어 시설까지 보유하게 되었다.

3.4. 2001-02 시즌

미니 트레블 이후, 울리에는 수비진의 퀄리티 강화를 위해 욘 아르네 리세예지 두덱, 크리스 커클랜드를 영입하며 후방의 안정감을 다졌고, 이제 숙원의 리그 대권 도전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었다. 궤도에 오른 울리에의 스쿼드는 FA 채리티 실드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2-1로 이기고 우승을 차지한 뒤, 리그 개막 이후 12월 중순 15라운드까지 11승 2무 2패를 기록하며 1위에도 오르는 등 호성적으로 상위권을 질주했다.

그러나 그와중의 2001년 10월, 울리에는 리즈와의 7라운드 프리미어 리그 경기를 지휘하다가 하프타임에 심장발작을 일으켰다. 그는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지만, 감독직으로 복귀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울리에는 당시 은퇴까지 고려했지만 필 톰슨 수석 코치가 감독 대행 역할을 맡아주면서 3월에 무사히 복귀[7], 잔여 시즌을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

하지만 리버풀은 11월에 로비 파울러를 이적시킨 이후 박싱 데이에서 무승부를 양산하며 승점을 잃었고, 니콜라스 아넬카가 대체자로 팀에 입성하여 마지막 리그 17경기에서 13승 3무 1패의 호성적을 다시 달렸으나, 아스날 FC에 밀려 결국 우승에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리버풀은 프리미어 리그 출범 이래 최고 순위인 2위를 기록했고, 라이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더블 및 채리티 실드 우승을 기록함과 더불어 그들을 리그 순위에서도 앞서면서 인상적인 시즌을 보냈다.

그러나 직전 시즌과는 다르게 컵대회에서는 무력하게 탈락했는데, FA컵에서는 4라운드에서 아스날을 상대로 패배해 탈락했고, 리그컵에서는 3라운드에서 그림즈비 타운에게 연장전 113분 동점골과 120분 역전골을 얻어맞으며 충격패했다. 다시 돌아온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1차 조별 예선에서 3승 3무, 2차 조별 예선에서 1승 4무 1패로 8강에 진출했으나 미하엘 발락이 이끌며 강한 전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바이어 04 레버쿠젠[8]을 만나 원정에서 4-2로 패배해 합산 스코어 4-3으로 아쉽게 떨어졌다. 하지만 지난 시즌 UEFA컵 우승팀 자격으로 진출한 UEFA 슈퍼컵에서는 저력을 보이며 지난 시즌 챔피언스 리그 우승팀 바이에른 뮌헨을 꺾고 통산 두 번째 UEFA 슈퍼컵 우승을 차지했다.

이 시즌 리버풀은 리그 중반까지 우승 경쟁을 나름 펼쳐내면서 경쟁력을 증명했고, 리그에서의 호성적과 더불어 채리티 실드, UEFA 슈퍼컵을 기분좋게 우승했으며, 리그 19골을 포함 시즌 28골을 기록한 마이클 오언발롱도르를 수상하고, 스티븐 제라드사미 히피아를 필두로 탄탄한 전력을 구축하는 등 소기의 성과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3.5. 2002-03 시즌

그러나 심장발작을 겪은 뒤, 울리에는 사람이 달라졌는지 그때까지 쏠쏠하게 잘해오던 이적 시장에서 큰 실책을 연이어 저지르고 만다. 리빌딩의 방점을 찍고 상위권으로의 확실한 도약이 필요했던 2002년 여름, 울리에는 이른바 '프랑스 커넥션'으로 불리는 영입을 단행했다. 그는 1,000만 파운드에 RC 랑스로부터 엘 하지 디우프를 영입했고 CS 스당으로부터 500만 파운드에 살리프 디아오를 영입했으며 LOSC 릴의 브루노 셰루를 400만 파운드에 영입했다. 반면 리버풀로 임대되어 좋은 활약을 보여주던 니콜라 아넬카는 원 소속 팀인 PSG로 되돌려보내졌다. 또한 울리에는 팀의 주축 미드필더 게리 매칼리스터와 부상으로 제 기량을 펼치지 못한 주장 제이미 레드냅[9], 스트라이커 야리 리트마넨을 처분했으나 그들을 대체할 선수를 구하지 못했다.

그렇게 시작된 새 시즌, 울리에의 프랑스 커넥션으로 영입된 선수들은 시즌 내내 최악의 활약을 펼치며 2002년의 여름 이적시장이 완벽한 리버풀의 패착임이 드러났다.[10][11] 영입 플랜의 참담한 실패는 성적에 악영향을 끼쳤다. 2002-03 시즌, 리버풀은 커뮤니티 실드에서 아스날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고, 본격적인 리그 개막 후 리그 12경기에서 7연승을 포함, 9승 3무로 선두를 독주했지만 곧바로 영입생들의 부진에 의해 11경기 연속 무승이라는 충격적인 부진을 겪었다. 결국 최종전 단두대매치에서도 첼시 FC에 패해 5위로 떨어져 리버풀은 또 다시 챔피언스 리그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울리에호는 B조 조별 예선에서 발렌시아 CF, FC 바젤, 스파르타크 모스크바를 만나 2승 2무 2패로 3위에 머물러 UEFA컵으로 떨어지는 수모를 겪었다. 떨어진 UEFA컵에서는 8강까지 진출했으나 8강에서 셀틱 FC를 만나 홈에서 충격적인 2-0 패배를 당하는 등 부진을 이어갔다. FA컵에서도 4라운드에서 크리스탈 팰리스를 상대로 조기 탈락했다. 그러나 리그컵에서는 끈질기게 올라가 준결승에서 셰필드 유나이티드를 꺾고 결승에 올랐고, 2003년 3월 2일 치러진 결승전에서 숙적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2-0 완승을 거두어 자존심을 챙겼다. 통산 7번째 리그컵 우승이었다.

해당 시즌 리버풀은 라이벌을 꺾고 리그컵 우승을 차지하긴 했으나, 챔피언스 리그에서 조기 탈락한 뒤 리그에서도 초반 상승세에 비해 급속도로 추락해 4위권 수성에 실패하는 좋지 못한 성과를 냈다. 이에 리그 19골, 시즌 28골을 올린 마이클 오언을 비롯한 주축 선수들의 성과도 빛이 바랬으며, 리버풀을 상위권으로 도약시킬 것으로 기대되었던 울리에 감독에 대한 기대도 우려로 바뀌었다.

3.6. 2003-04 시즌

울리에는 지난 시즌의 부진을 씻고자, 리즈 유나이티드의 챔피언스 리그 4강 신화를 이끈 해리 큐얼풀럼 FC에서 걸출한 활약을 보이던 스티브 피넌, 프랑스산 공격수 플로랭 시나마 퐁골을 영입했다. 그러나 리버풀은 개막전부터 패배하더니 줄곧 리그에서 답답한 경기력을 선보이며 초반부터 매우 좋지 못한 출발을 했고, 2003년 10월에 주장을 젊은 유망주 스티븐 제라드로 교체하며 분위기를 쇄신한 뒤, 20라운드가 되어서야 5위권으로 진입해 결국 막판 연승으로 겨우 4위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4위로 챔스 진출권은 얻었으나 우승팀 아스날 FC과의 승점차가 무려 30점이나 됐고, 아스날 FC-첼시 FC-맨체스터 유나이티드 3강을 제외하고는 매 라운드마다 순위가 바뀌던 혼돈의 리그에서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아스톤 빌라 FC, 찰튼 애슬레틱 FC 등과 함께 서로 중상위권 진흙탕 싸움을 시전한 끝에 겨우 얻어낸 4위였기에 이는 팬들에게 큰 감흥을 사지 못했다. 심지어 우승팀과의 승점차보다 최하위 울버햄튼과의 승점차가 더 적었다.

나머지 대회들에서도 FA컵에서 포츠머스에 패해 5라운드에서 탈락, 리그컵에서는 볼튼 원더러스에게 4라운드에서 탈락하는 등 졸전을 이어갔다. UEFA컵에서는 4라운드까지 무난하게 올라가는 듯 했으나, 디디에 드록바가 이끄는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를 만나 패배하여 허무하게 탈락하며 실망만을 남겼다.

해당 시즌 리버풀은 사미 히피아, 스티브 피넌, 욘 아르네 리세, 제이미 캐러거, 스테판 앙쇼, 스티븐 제라드, 대니 머피, 디트마어 하만, 해리 큐얼, 마이클 오언, 에밀 헤스키 등의 멤버들이 코어라인을 형성하여 나름 괜찮은 젊은 전력을 갖추고 있었으나, 엘 하지 디우프, 살리프 디아오, 브루노 셰루, 안토니 르 탈렉, 시나마 퐁골 등의 프랑스-아프리칸 멤버들이 대부진을 이어가면서 결정적인 승부처에서 매번 미끄러졌고, 울리에의 단순한 전술로 계속해서 부실한 경기력을 노출했다. 이에 리버풀은 미니 트레블과 리그 2위 달성 이후 리빌딩을 완전히 실패하며 또 다시 부진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울리에는 많은 이적 자금을 썼음에도 고집스러운 프랑스 커넥션 위주의 리빌딩으로 스쿼드를 망쳤고, 일차원적인 전술로 일관하며 좋지 못한 성적을 내고 있었음에도 팬들에게 뻔뻔함을 내비치는 인터뷰로 시즌 내내 팬들의 신임을 잃었고[12], 결국 시즌이 끝난 뒤 리버풀 보드진의 권유에 따라 구단을 상호 해지로 떠났다.

이후 조세 무리뉴와 함께 당대 최고의 유망주 감독으로 평가받던 라파 베니테스가 부임하여 리버풀을 수습하게 되었다.

파일:한시적 넘겨주기 아이콘.svg   라파 베니테스 체제에 대한 내용은 리버풀 FC/베니테스 체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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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4. 공격 포인트 순위

5. 시즌별 주요 성적

파일:리버풀 FC 로고.svg
제라르 울리에의 시즌별 주요 성적
시즌 EPL FA EFL CS UCL UEL USC 감독
1998-99 시즌[13] 7위
( 4)
4R - - - 3R - 로이 에반스 & 제라르 울리에

제라르 울리에
1999-00 시즌 4위
( 3)
4R 3R - - - - 제라르 울리에
2000-01 시즌 3위
( 1)
우승
(6회)
우승
(6회)
- - 우승
(3회)
-
2001-02 시즌 2위
( 1)
4R 3R 우승
(14회)
8강 - 우승
(2회)
2002-03 시즌 5위
( 3)
4R 우승
(7회)
준우승 조별
리그
8강 -
2003-04 시즌 4위
( 1)
5R 4R - - 4R -

6. 평가

21세기로의 전환점에서 리버풀 중흥기의 시작을 알린 감독으로, 2000년대에 들어와 혁신적인 리빌딩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실현하여 2000-01 시즌의 미니 트레블을 비롯한 적지않은 성공물을 팀에게 가져온 인물. 또한 빌 샹클리 이후 길게 이어지던 리버풀 사령탑의 내부 전통[14]을 끊고 유럽 대륙에서 넘어와 선임된 초대 윌리엄 바클레이, 2대 존 맥케나 이후 최초의 외국인 감독이다. 그러나 2001년 심장병으로 감독직을 떠났다가 다시 복귀한 이후 거듭되는 부진과 영입 실패로 인해 팀을 안정적으로 지속하지 못하는 바람에 평가에 있어서의 호불호가 매우 크게 갈리는 감독이다. 그만큼 리버풀 감독 재임 시절 공과(功過)가 확실하게 나뉘는 인물이기도 하다.

울리에 체제에서 리버풀은 2000-01 시즌 UEFA컵FA컵, EFL컵을 동시에 우승하며 미니 트레블을 달성했으며, 이후 2001-02 시즌에는 UEFA 슈퍼컵FA 채리티 실드를 우승함과 동시에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부임한 이후 최초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보다 윗 순위로 시즌을 마치며 리그 준우승을 차지하는 호성적을 이뤘다. 이후 2002-03 시즌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꺾고 또 하나의 EFL컵을 추가하기도 했다. 당시 오랜 기간 이렇다할 결과물을 만들고 있지 못했던 리버풀에서 천금과도 같았던 다수의 트로피들을 안필드로 가져온 훌륭한 업적이 이어진 이 기간 동안 울리에는 1990년대의 오래된 스쿼드 멤버들을 적극적으로 청산하고 사미 히피아, 스테판 앙쇼, 디트마어 하만, 블라디미르 스미체르, 욘 아르네 리세, 예지 두덱, 스티브 피넌 등의 영입생들을 데려와 스쿼드를 혁신했으며 제이미 캐러거, 마이클 오언, 스티븐 제라드와 같은 로컬 유스들을 필두로 젊고 유망한 팀을 구축했다. 이 당시 팀 리빌딩의 일환으로 구단에 합류했던 인원들은 이후 라파엘 베니테스 감독 아래에서 2000년대 팀의 중흥기를 이끄는 핵심 멤버들로 성장하기도 했기에, 이는 미래를 보고 팀을 설계한 울리에 감독의 명백한 공이다. 울리에로부터 시작한 리빌딩 멤버들의 향후 성과까지 생각한다면, 이 초창기 리빌딩의 성과가 울리에에 관한 평가에서 가장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특히나 공동 감독 체제에서 벗어나 단독으로 지휘봉을 잡은 이후 스티븐 제라드를 발굴한 인물이 바로 울리에이며, 그는 제라드를 적극적으로 1군 경기에 기용하며 어린 나이의 그에게 주장직을 맡기도 했다. 또한 울리에 이전까지 리버풀은 외부적으로 방탕한 팀 규율을 지적받으며 내부적으로 많이 흐트러진 상태였으나, 울리에는 본인만의 리더십으로 팀에 확실한 중심을 잡고 규율을 세워 팀의 유대감과 분위기를 되살리기도 했다.[15] 여기에 더하여 그는 2001년 낙후되어 있던 멜우드 훈련장의 리모델링을 주도하여 21세기로 들어서는 시점에 현대적인 훈련 인프라를 팀에 들여오기도 했다.

그러나 2001년 심장병을 앓아 병상에 있는 바람에 잠시 팀을 떠났다가 다시 복귀한 후, 울리에는 이적 시장에서 이전과는 상반된 비합리적인 모습[16]을 보여주며 프랑스 출신 혹은 프랑스 리그 출신 선수들 위주로 리빌딩을 진행하다가 거대한 실패를 불러오는 엄청난 실책을 저질렀다. 심지어 유스 정책에서도 프랑스 출신들을 선호하며 불확실한 어린 선수들을 사들이며 대부분의 투자를 실패했다. 리버풀은 많은 자금을 들여 울리에의 주도 하에 엘 하지 디우프, 살리프 디아오, 브루노 셰루, 시나마 퐁골 등의 선수를 영입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울리에의 프랑스 커넥션은 구단 역사상 최악의 영입들로 판명났고, 그렇게 겨우 2000년대 초반에 불꽃을 되살린 리버풀의 성적은 다시 추락하게 되었다. 또한 복귀 이후 울리에는 일차원적인 전술을 답습하며 계속해서 경기력면에서도 졸전을 펼쳤다. 그가 영입한 프랑스산 공격수들이 최악의 부진을 거듭하자, 마이클 오언에 대한 의존도는 너무나도 높아졌으며, 괜찮은 수비진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부실한 수비 전술로 인해 팀의 수비력은 흔들리기 일쑤였다. 이에 리버풀은 리그에서 준우승을 달성했을 정도로 초기 전력이 괜찮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뒤로 아스날 FC,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첼시 FC와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멀어지며 중상위권 클럽들과 순위 싸움을 벌이는 부진을 겪었고, 유럽 대항전에서도 바이엘 레버쿠젠, 올림피크 마르세유, 발렌시아 CF 등의 타 리그 다크호스들에게 연이어 탈락하는 수모를 보이며 반등의 기회를 날렸다.

때문에 종합하자면, 리버풀 FC의 감독으로서 울리에는 상당한 공로와 중대한 과실이 동시에 존재하는 복합적인 성적을 가진 감독. 리버풀 커리어 말년에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며 상위권으로 도약할 수 있는 찬스에서 이해할 수 없는 영입 플랜 등으로 팀의 성장에 제동을 걸었기에 그에 대한 박한 평가는 당위성이 있지만, 그가 가져온 우승 트로피의 절대적인 중요성과 향후에 이어진 팀의 상황을 생각하면 충분히 호평할 수 있는 감독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애초에 리버풀이 2000년대 상위권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상황 자체가 울리에의 초기 리빌딩[17]으로부터 만들어졌으며, 그가 남긴 유산아래 라파엘 베니테스가 이룩한 성과도 이어질 수 있었다. 특히 이후 팀을 오래 지탱하며 구단의 상징이 된 위대한 주장 스티븐 제라드를 발굴했다는 점도 굉장한 성과로 볼 수 있다. 또한 무엇보다도 팀이 이후 2010년대까지 암흑기를 지속했기에 그가 2000년도 초반에 이룩한 성과는 구단의 침체기에 팬들의 갈증을 해소하는 상당히 중요한 결과물이기도 했다. 때문에 모든 면을 고려한다면 케니 달글리시 감독 이후 위르겐 클롭, 라파엘 베니테스 다음 가는 결과물을 만들어 21세기 팀의 역사에 확실한 존재감을 새긴 감독인 것은 확실하나, 워낙 말년의 실책들이 두드러졌기에 리버풀에서 역대 다섯 손가락 정도에 꼽히는 감독이라고 평가받는 후임자 라파엘 베니테스보다는 확연히 떨어지는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는 감독.
[1] 제이미 레드냅의 부상으로 인한 대행[2] 590만 유로[3] 전임 감독 수네스가 철저한 규율주의자였던 반면 에반스는 선수단에게 자유도를 많이 주는 스타일이었다.[4] 울리에는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과 프랑스 연령별 대표팀을 오래 지도하며 많은 선수들을 발굴해 1998년 프랑스의 월드컵 우승에 기여한 인물이었다.[5] 리버풀의 초대 감독 윌리엄 바클레이 체제도 존 맥케나와 감독의 역할을 나눠서 수행했던 사실상의 공동 감독 체제였지만 공식적으로 공동 감독을 인정한 것은 에반스-울리에 체제가 최초다.[6] 두 사람이 어찌나 대립했는지, 식사도 따로 할 정도였다고 한다.[7] 2002년 3월 19일, 챔피언스 리그 2차 조별 예선 AS 로마와의 홈 경기에서 복귀했다.[8] 이 시즌 레버쿠젠은 해당 대회 결승까지 진출해 준우승을 차지한다. 분데스리가포칼컵, 챔피언스 리그에 모두 준우승을 차지한 바로 그 시즌이다.[9] 이후 주장직은 사미 히피아에게로 넘어갔다.[10] 특히 엘 하지 디우프는 팀의 주전 공격수를 맡았으나 첫 시즌에 29경기에 나서 3골만을 기록했고 두 번째 시즌엔 33경기 0골을 기록하는 최악의 성적을 거둔데다 타팀 관중에게 침을 뱉고 훈련은 제대로 하지 않는 등 온갖 말썽을 저질렀다.[11] 훗날 스티븐 제라드는 자서전에서 아넬카를 내보내고 디우프에게 공격수 자리를 맡긴 것은 울리에의 최악의 실수였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당시 아넬카가 과도한 계약 조건을 요구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기는 했다.[12] "우리 전력상 4위 정도면 잘한 거 아니냐"는 식의 인터뷰에 팬들은 격노해 멜우드 훈련장 외벽에 스프레이로 "울리에는 에이즈나 걸려라"와 같은 비난 문구를 도배했고, 팀 관계자들이 이런 민심을 수습하느라 진땀을 뺐다.[13] 시즌 중도 단독 부임[14] 샹클리에서 밥 페이즐리로의 승계를 시작으로 로이 에반스에 이르기까지 내부 코칭 스태프진 혹은 팀 레전드 출신으로만 감독직을 이어왔다. 이는 '리버풀 웨이'라는 이름으로 구단 내부에서의 전통처럼 여겨졌다.[15] 로이 에반스체제에서 리버풀은 파티와 사생활을 즐기는 문화에 찌들어있었다. 특히 주장이었던 폴 인스부터가 파티광이었으며, 선수단은 식사와 영양관리도 자기맘대로였다. 울리에 이후 이러한 멋대로식 문화가 모두 청산되고 주장단도 바뀌었다.[16] 멘탈에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월드컵에서 활약했다는 이유로 영입을 단행하기도 했다. 그렇게 영입한 선수가 바로 엘 하지 디우프.[17] 선수 영입 뿐 아니라 선수단 규율을 잡아 구단 문화를 혁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