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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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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영향력4.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5. 업적

1. 개요

파일:마이클 잭슨 실루엣.jpg
King of Pop
팝의 황제[1]
마이클 잭슨을 상징하는 별명
마이클 잭슨의 위상에 대해 정리한 문서.

2. 상세

마이클 잭슨의 등장은 20세기 대중문화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자 변화로 평가되며, 단순히 음악계를 넘어 20세기의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 중 한 명이다.[2] 미국 팝 시장에서 흑인 가수의 비율이 높지 않았던 시절, 전 세계적 문제였던 인종차별을 음악을 통해 완화시키며 문화 예술의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마이클 잭슨 이전까지 미국 팝시장의 주도권은 늘 백인 싱어에게 쥐어져 있었으나, 잭슨이 등장한 이후 최초로 미국 흑인이 가요 시장의 주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마이클 잭슨의 등장 이후, 대중음악의 주류 장르는 록 음악에서 팝 / 알앤비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의 등장이 대중음악을 주름잡는 장르의 종류마저 변화시키게 된 것이다.

그의 압도적인 성적에 걸맞게, 마이클 잭슨은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상업 수익을 남긴 아티스트 중 하나이다. 전체 앨범 판매량은 비틀즈와 엘비스 프레슬리 뒤를 이은 3위이고, 단일 앨범 판매량[3]은 압도적인 1위이다. 또한 마이클 잭슨은 생전과 사후 합쳐 약 800여개의 상을 수상하며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많은 상을 수상한 아티스트로 이름을 올렸고, 1970년대부터 1990년대에 걸쳐 빌보드 핫 100 1위를 달성한 최초의 아티스트로 기록되어 있다.

마이클 잭슨은 위대한 음악가였지만 사회 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는데, 금전적인 자선활동 외에 자신의 음악을 통해 세계의 평화를 바라는 메세지를 전달하였다. Heal the World, Black or White, Earth Song, We Are the World, What more can I give 등의 곡들이 대표적. 이러한 곡들을 통해 잭슨은 세계 평화, 친환경 운동, 전쟁 반대, 테러 반대 등의 메시지를 던졌다.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이자 휴전국가인 대한민국에서도 공연을 가지며, 한국의 통일을 기원하고 실제 통일하면 공연하러 오겠다는 멘트를 남기기도 했다.[4] 이 날 공연에서 역시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가 담긴 퍼포먼스가 공연 중간에 등장하기도 했다.
마이클 잭슨은 역사상 가장 성공한 연예인[5]으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되었고, 20세기의 큰 영향력을 지닌 아티스트로 평가받으며 이는 21세기까지 현재진행형이다. 또한 그는 팝 역사상 가장 많은 기부를 한 인물[6]이기도 했다.

1980년대 마이클 잭슨의 등장은 하나의 사회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의 앨범 Thriller는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되었고[7] We Are the World, Heal the World와 같은 음악 활동과 기부로 박애주의적 활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Bad, Dangerous 등을 성공시키며 대중에게 전례 없는 많은 사랑과 지지를 받았으며 이는 사회적 현상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1990년대 본격적으로 시작된 대중문화의 세계화에 처음 등장한 서구 문화의 상징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잭슨은 작사/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으며 대중가수로서는 최초로 미국 국립 무용수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중후반부터 성추문 루머로 인해 언론들에게 완전히 먹잇감이 되어 버렸고 그를 정신이상자[8][9]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팽배했으며, 안타깝게도 그에 대한 언론의 매도는 그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10]

2005년 2차 아동 성추문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그는 대부분의 음악활동을 중단하고 몇 년간 칩거 아닌 칩거를 하게 되었다.[11] 이 과정에서 건강이 심하게 악화되었으며 사실상 정상적인 활동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그러던 2009년 3월, 마이클 잭슨은 4년만에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런던에서의 콘서트 투어[12] 계획을 발표하며 활동 재개를 선언했다. 같은 해 7월부터 런던에서의 콘서트를 시작으로 활동 재개가 눈 앞에 왔지만, 6월 25일 주치의였던 콘레드 머레이의 프로포폴 과다 투여로 인한 심장마비로 향년 5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지속되는 그에 대한 수많은 더러운 루머들은 그의 문화적 유산과는 별개로 그의 위상을 추락시켰으며, 전문가들은 그의 이름이 음악사에서 잊힐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이후 그의 행적에서 발견되는 여러 선행에 따라 재평가를 받게 되었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 [age(2009-06-25)]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대중음악의 영원한 전설로 기억되고 있다.

3. 영향력

파일:마이클 잭슨 슈퍼점보.jpg
마이클 잭슨이 그의 뒤를 잇는 팝스타들에게 끼친 영향력은 마치 산소와 중력의 영향력을 말하는 것과 같다. 특히 동서고금을 막론하여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이룬 Thriller 이후 잭슨의 영향력은 너무나도 방대하고 광범위해져 이후 잭슨의 성공 공식들을 따라하지 않은 아티스트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Rolling Stone #
엘비스 프레슬리비틀즈와 마찬가지로 잭슨이 음악 세계에 미친 영향력을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The New York Times #
영국 퀸 메리 런던 대학교임페리얼 칼리지 런던 연구팀이 17,000개의 빌보드 핫 100에 오른 곡들을 분석한 결과 대중음악계는 1964년(비틀즈, 롤링 스톤스를 중심으로 한 브리티시 인베이전) 1983년(마이클 잭슨, 더 폴리스, 유리스믹스 등의 팝스타와 신기술의 유행) 1991년(힙합의 황금기) 3차례의 혁명기를 맞았다고 한다. 1983년은 마이클 잭슨이 Thriller 앨범으로 차트를 완전히 휩쓸던 시기로[13] 당시 타임지는 마이클을 비틀즈 이후 가장 거대하며 엘비스 프레슬리 이후 가장 인기있는 단일현상이라고 보도했고 롤링 스톤은 1977년 디스코 열풍 이후 대중음악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설명하고 마이클 잭슨을 흑백 인종의 벽을 부순흑인인가수라 평가했다. 2013년 네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오늘날의 뮤지션들에게 가장 많이 영향을 주는 1980년대 뮤지션으로 미국인들의 61%가 마이클을 1위로 뽑았다.[14]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기존의 미국 흑인 음악 스타일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흑인이라면 마땅히 소울이나 진한 펑크 음악을 해야 하며[15] 록은 할 수 없다는 것이 당시의 고정관념이었다.[16] 허나 뉴욕 타임스의 당시 칼럼 내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인지 펑크(Funk)인지 아니면 디스코인지 한 가지로 딱 명확하게 정의내리기 힘든 독특한 음악이었다. 즉, 흑인 음악적 뿌리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백인들도 납득할 수 있는 음악을 들려주며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의 크로스오버로 새로운 사운드가 탄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17] 이는 결국 대중음악사에서 전례없는 성공을 이끄는 계기가 된다. 고영탁 음악평론가는 '소울, 펑크, 재즈 등 대표적인 흑인음악과 록, 팝, 발라드 같은 백인음악이 그의 음악에 하나로 녹아있다. 말하자면 흑백 음악의 통합을 이뤄낸 것으로 전례없던 인종대화합의 음악'이라고 평했고 비평가 게리 멀홀랜드는 '그 이전 30년 동안 미국 대중음악의 근간을 이루었던 흑인=솔/백인=록의 등식을 영원히 바꿔 놓음으로써 대중음악사를 새로 썼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

이러한 마이클의 음악은 당시 공공연하게 남아 있었던 인종적 취향의 벽을 아울렀다는 의미에서 '뉴팝'이라고도 불렸고[18]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1960년대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후 영국 음악의 영향력에 억눌려 있던 미국의 음악이 다시 주도권을 탈환하고 세계 대중음악을 선도하게 되는 분수령이 되었으며[19] 동시에 의 시대에서 의 시대로 음악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20] 다만 마이클 잭슨이 헤비메탈에서 팝메탈로 발전하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는 임진모의 평가는 전후가 잘못되었다. 팝메탈은 따져보면 그 뿌리가 하드 록이었는데 하드 록의 전성기는 70년대였고 정작 헤비메탈은 마이클 잭슨이 활동하던 80년대가 전성기였다. 또한 팝메탈은 70년대 후반 UFO나 레인보우 저니등이 전신이다. 임진모의 평가는 아직 정립되지도 않은 장르가 시작도 전에 시들해졌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마이클 잭슨은 록의 사운드를 팝에 접목하는 시도를 했고, 이 시도를 통해서 파워 팝이 발전하게 되었다.
잭슨이 프로듀서 퀸시 존스와 함께 만든 사운드는 펑크(funk), 올드스쿨 소울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재즈, 디스코 그리고 락의 요소도 매끄럽게 혼합되어 있어 크로스오버 팝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러한 사운드는 1979년작 Off The Wall 앨범에서도 관찰할 수 있지만 완전히 구현된 것은 흑인음악과 백인음악, 가볍게 즐기기 위한 음악과 그렇지 않은 음악, 댄스무대용 음악과 헤드폰용 음악의 경계를 허물며 메인스트림 팝을 완전히 뒤바꾼 1982년 발매된 걸작 Thriller 앨범에서였다.
앤 파워스 음악평론가 / LA 타임스 A performer who kept transcending boundaries
인종 부분만 보더라도 정말 그 당시 백인들은 흑인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아무 저항감 없이 받아들였다. 심지어 흑백차별의 나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조차 Thriller는 광풍을 일으켜 "잭슨이 아파트헤이트의 갭에 다리를 놓아주었다(1984년 타임즈 기사)"는 말까지 나왔다. 실로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크로스오버의 정체이다. 인종의 벽은 말할 것도 없고 세대의 벽, 성의 벽, 국가의 벽을 넘어선다. 이것이 바로 크로스오버의 정확한 의미이기도 하다. 크로스오버라는 어휘가 중요성을 갖는 것은 한편으로 그만큼 인종에 따라, 세대에 따라, 성에 따라, 국가에 따라 각각의 음악이 구별되어 있기 (또는 되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 흑인들의 음악이 있고, 백인들이 즐기는 음악이 있다. 백인, 흑인의 음악 영역은 사라지고.. 잭슨은 인종분리 구획을 훌쩍 뛰어넘으며 크로스오버 물결이 확산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크로스오버의 경향은 90년대 들어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제 그것은 새로울 것도 없다. 한마디로 지금은 지겨울 정도로 크로스오버 음악이 판치는 세상이다. (웅진뮤직 기고문)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중국에서도, 남아공에서도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통했던 것입니다. 당시 마이클의 음악이 대단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의 음악은 1970년대에 등장했던 펑크 음악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흑인이라면 흑인음악인 솔이나 진한 펑크 음악을 해야 마땅한데 마이클은 백인들도 납득할 수 있는 팝 음악을 들려주었습니다. 마이클 음악의 성공 비결은 바로 이 크로스오버에 있었습니다. 전 세계를 아우르는 음악 형태를 창조하였습니다. 마이클의 영향으로 당시 대중음악계에 크로스오버 음악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가장 먼저 프린스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마돈나도 빼놓을 수 없고 비록 계열은 다르지만 스탠다드 팝의 휘트니 휴스턴도 마이클의 크로스오버 유산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국의 경우에는 유리스믹스, 웸과 같은 뮤지션이 해당됩니다. 이들은 모두 백인이었음에도 흑인음악의 색깔을 들려주었습니다. 당시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보이 조지의 컬쳐 클럽도 마이클의 크로스오버 열풍의 편린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서 '젊음의 코드, 록')
임진모 음악평론가
파일:마이클 잭슨 그래미.jpg
1984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8개의 그래미 상을 수상한 모습[21]
시대가 이전보다는 좋아졌다고 하지만 1980년대는 인종차별이 여전히 극심한 시절로 많은 언론 권력들이 흑인 대중음악가들을 외면했다. 데이비드 보위는 1983년에 진행한 MTV와의 인터뷰에서 대놓고 MTV는 백인중심주의라고 비난할 정도이다. 1970년대 중반에 디스코 열풍으로 흑인 뮤지션들의 차트 진입이 활발한 적도 있었지만 1980년대에 열기가 식으면서 차트에서도 흑인 뮤지션들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마이클이 Thriller 앨범을 내기 전, 1981~1982년 2년간 빌보드 200에서 1위를 기록한 흑인 뮤지션은 단 한 명도 없었고 hot 100 차트에서는 흑인 뮤지션의 곡은 단 4곡만이 1위를 차지했다. 빌보드는 아직 디스코 열풍이 한창이던 1979년과 비교했을 때 1982년까지 핫100 차트에서 흑인 뮤지션의 비중이 거의 80%나 감소했다며 당시 흑인음악의 존재감은 거의 바닥이었다고 분석했다. 디스코 열풍의 시기에도 물론 흑인 뮤지션들은 백인 뮤지션들에 밀려 주류로 대접받지는 못했다.
1970년대 이 디스코 음악에 수많은 흑인 뮤지션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대표했던 밴드는 비지스라고 하는 백인 3인조 형제 밴드였죠. 그리고 앞서서 '토요일 밤의 열기'(디스코 영화) 영화의 한 장면을 보셨습니다만 흑인들은 등장하지 않아요. 백인들끼리 모여서 춤을 춥니다. 그 시대의 스타들은 이미 흑인들 쪽에도 준비가 돼 있고 백인들 쪽에서도 준비가 돼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는 흑인들의 스타를 아직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흑백의 인종차별이 여전히 존재했던 미국 사회에서 백인들이어야만 아주 폭넓은 슈퍼스타가 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80년대 이 스타의 등장은 한 시대를 가르는 혁명적인 등장이며 또한 완전히 다른 시대로 넘어가는 계기점이 됩니다. 누굴까요? 마이클 잭슨입니다.
김태훈 음악평론가/ tvN 어쩌다 어른, '시대가 요구한 스타'
마이클 잭슨은 Off the WallThriller를 통하여 이 순환을 깨부쉈으며 근 20년간 대중음악계의 정상 자리에 올라 황제로 대접받았다. 롤링 스톤은 흑인 아티스트들의 출연을 거부했던 로큰롤 TV와 라디오 방송국의 굳게 닫혔던 문이 그에 의해 무너졌다며, 그 뒤로 모든 것은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고 평가했는데 특히 Billie Jean을 시작으로 수많은 흑인 아티스트들이 큰 히트를 쳤다고 분석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일이 80년대를 설명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최대의 음악 매체 MTV의 장벽을 돌파한 일이다. 1981년 뮤직 비디오 전문 방송사를 표방하며 개국한 MTV의 사장 밥 비트먼은 백인 로큰롤 위주로 음악 방송을 편성했고 이렇게 되니 대다수의 방송 구성에서 흑인은 거의 제외됐다. 비트먼은 '로큰롤'을 핑계로 흑인의 음악방송 출연을 거의 불허했던 것이다. 흑인들은 이런 MTV를 인종을 차별하고 있다며 거센 비난을 쏟았다. 그로 인해 마이클이 Billie Jean 뮤직 비디오를 제작했을 때도 MTV는 방영을 거부했다. 그러자 MTV에서 방영되는 대다수 백인 아티스트들의 소속사였던 CBS는 MTV에 잭슨의 뮤직 비디오를 방영하지 않을 경우 모든 자사 소속 가수들을 MTV에서 빼버리겠으며 MTV의 인종차별적 발언을 폭로하겠다고 통지했다. 결국 MTV는 이에 굴복하여 마이클의 노래와 뮤직 비디오를 방영했다. 거대 소속사가 흑인 가수를 위해 이렇게 움직였는데 흑인들이 자부심을 안 느낄 수가 있을까, 이후 MTV를 포함한 많은 언론 권력들이 마이클 잭슨의 거대한 영향력에 휩쓸려 흑인 대중음악가들을 더욱 더 많이 방송에 내보냈고 이로 인해 흑인 대중음악가들의 성공이 활발해졌다. 휘트니 휴스턴은 마이클이 흑인 아티스트들에게 길을 열어줬다며 감사를 표했다.

흑인의 음악이 백인 로큰롤 청자들에게도 뜻깊게 전달돼 미디어는 마이클이 흑인을 다시 음악의 주류로 올려놨다고 평가했다. 겨우 1980년대 초반에 마이클 잭슨은 앨범을 단 두 장만 발매했음에도 백인들의 스타인 비틀즈와 엘비스 프레슬리에 비견될 정도로 화제였다. 음악으로 세계를 제패했다는 사실로 흑인들은 잭슨을 영웅으로 생각했으며 1984년 타임지는 잭슨의 이름이 아프리카에 끼쳐 인종차별을 해소하고 있다고 보도했을 정도이다. 이런 엄청난 영향으로 유색인 협회에서 상을 받았고 잭슨 사후 마틴 루터 킹 3세와 매직 존슨 등에게 흑인을 위해 많은 일을 해줘 감사하다는 애도를 받았다. 특히 흑인 인권 운동가 알 샤프턴 목사는 타이거 우즈버락 오바마 이전에 흑인 뮤지션들이 세계 대중문화에 진출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사람이 바로 마이클 잭슨이며 덕분에 어릴 때부터 흑인 뮤지션들을 흉내 내며 자란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성인이 되어 흑인 대통령 오바마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
마이클 잭슨 이전에도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 같은 엄청난 슈퍼스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엘비스 프레슬리나 비틀스는 영미 사회에서 주로 백인들에게 인기를 누렸던 반면 마이클 잭슨은 흑백 사회 모두에서 폭발적 반응을 이끌었습니다. 그래서 '흑백 크로스오버 시대'를 이끌었다는 평을 받는 거지요.

가수로 보면 빌리 할리데이, 레이 찰스, 샘 쿡, 아레사 프랭클린, 오티스 레딩, 마빈 게이, 스티비 원더 등등 마이클 잭슨 이전에도 흑인 스타 가수는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스타들이었지만 그들이 미국 사회에서 상기한 엘비스 프레슬리,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엘튼 존, 믹 재거,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등 백인 가수들을 누르고 진정한 1등을 차지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그때까지 명백히 백이 흑의 위에 있었지요.

흑인 가수로서 백인을 뛰어넘어 진정으로 1등에 오른 인물은 마이클 잭슨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마이클 잭슨이 등장하면서 대중음악의 헤게모니가 백인에서 흑인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거지요. 1982년이 대중음악에서 전환점이란 말이 그래서 나옵니다. 바로 이 해에 백인 음악의 대변자이자 상징인 이글스(Eagles)가 해산하고 아프로 아메리칸 스타 마이클 잭슨이 등장했으니까요. 한편으로 미국의 문화유산이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이 만들어낸 블루스와 재즈라고 한다면, 또 거기에서 로큰롤이 파생했음을 전제하면 흑인문화가 마이클 잭슨에 와서 비로소 본래의 주도적 위상을 탈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임진모 음악평론가 - 마이클 잭슨 9주기 : 영상시대 이끈, 대중음악 현대화의 단일 주체
확실히 흑백 사이에는 깨질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장벽이 존재했는데 특히 아이들은 서로 무슨 음악을 듣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MTV와 라디오 채널은 철저히 백인 음악 위주로 편성됐다... 하지만 MTV가 마이클과 함께 성공하면서 다른 흑인 음악가들의 비디오들도 빠르게 방영되기 시작했고 팝 라디오에서 자취를 감췄던 흑인음악도 다시 들리기 시작해 대중들은 이제 흑인 음악가와 백인 음악가의 비디오를 같은 채널에서 보고, 그들의 음악을 같은 라디오에서 듣는 데에 익숙해지게 됐다... 스릴러 시대에 흑인음악은 차트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프린스의 싱글 '1999'조차도 1982년 처음 발표됐을 땐 라디오에서 아웃됐다가 1983년 중반에 재발표된 후 MTV에 모습을 보여 팝 라디오에서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마이클과 MTV의 조합은 실로 거대한 파워 그 자체였으며 레이건 시대 초기 쪼개져 있던 대중문화를 재통합하는 데에 도움을 줬다. 흑인음악은 다시 주류로 부상했으며 오늘날까지도 스포트라이트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빌보드 #
파일:빌리진 뮤직비디오2.jpg
흑인 뮤지션 사상 최초로 MTV에서 헤비 로테이션된[22] Billie Jean 뮤직 비디오의 촬영 중 잠깐 쉬는 장면.
파일:뱅가드 어워드.jpg
MTV 평생공로상인 마이클 잭슨 비디오 뱅가드 어워드. 1991년부터 마이클의 이름을 따서 시상하고 있다.
또한 마이클은 이전처럼 귀로만 음악을 듣고 만족하는 듣는 음악의 시대를 넘어 눈과 귀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이른바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연 주인공으로 현대 팝 음악산업의 길을 제시했다. 마이클과 함께 음악의 중심은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이동했다.[23] 뮤직 비디오댄스의 대중화와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했고 획기적인 무대 장비와 연출을 선보였다. 빌보드는 "화려한 이미지와 무대효과 연출을 통해 잭슨은 라이브 무대 퍼포먼스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며 이는 아직까지도 힙합, 컨템포러리 R&B, 팝, 로큰롤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분야의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사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라디오가 여전히 주요 음악 소비 매체 중 하나였고 지금에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당시만 해도 음악을 영상과 함께 본다는 개념 자체가 생소하고 익숙지 않아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MTV는 초기엔 그저 그런 케이블 채널로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좀비 소재를 이용해 최초로 13분짜리 단편영화 콘셉트를 차용해 제작된 마이클의 <Thriller> 뮤직 비디오가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면서 MTV는 종일 마이클의 뮤직 비디오를 방영했고 덕분에 비로소 대중적으로 막강한 파급력을 가진 채널이 될 수 있었다.[24]

영구보존작으로 선정[25]돼 현재까지도 미국 의회도서관에 보관 중인 유일한 뮤직 비디오이자 'MTV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뮤직 비디오 1위, 또 제작 과정 등을 담은 필름 영상만 900만 부 이상 팔려 역사상 가장 성공한 뮤직 비디오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된 것이 바로 마이클의 <Thriller>이다.[26] 빌보드는 <Thriller> 뮤비에 대해 "획기적인 시각 효과와, 스토리라인, 그리고 복잡한 춤 동작들로 뮤직비디오를 예술 형식으로 바꿔 놓았으며 이러한 독창적인 쇼트 필름의 충격은 뮤직 비디오의 예술성을 대중문화 속에 집어넣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이는 뮤직 비디오를 음반 산업 깊이 효과적인 홍보 수단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평가했다. 마이클의 이와 같은 대성공을 보고 다른 뮤지션들도 뮤직 비디오와 보는 음악의 위력을 실감하게 됐고 대중음악의 패러다임이 바뀌게 된 것이다.

뉴욕 타임스의 존 파렐스 음악평론가가 마이클이 댄스 음악의 정의를 만들었다고 평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전엔 댄스 음악, 댄스 가수라는 수식어가 없다가 세계적으로 보편화되고 주도권을 갖게 된 것이 바로 마이클과 함께였다.[27] 잭슨 파이브 시절에는 로봇춤을 유행시켰고 이후 <Beat It>, <Thriller> 등 뮤직 비디오에서 환상적인 집단 군무를 선보여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문워크와 린댄스라는 획기적인 춤도 선보여 사람들에게 큰 문화충격을 선사했다. 이외에도 수백 개의 영화 장면을 응용한 <Dangerous>의 안무 등 마이클은 참신한 시도를 마다하지 않았다. 뉴욕 대학교 공연연구학 교수 타비야 녕오는 "프레드 아스테어 이후 그 어떤 댄서도 마이클 잭슨만큼 댄스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사람은 없었다"라고 평가했을 정도. 이러한 공로들을 인정받아 마이클은 앞서 말한 프레드 아스테어와 같은 전설적인 댄서들이 이름을 올렸던 미국 국립 무용 박물관 명예의 전당에 2010년 헌액 됐는데[28], 이는 전문 댄서가 아닌 팝과 록을 겸비하는 뮤지션으로서는 최초이자 현재까지도 유일한 기록이다. 많은 사람들이 마이클처럼 춤을 추고 싶어 했고 제2의 마이클이 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댄서가 되기 위해 도전했다.[29] 마이클 사후, 유명 댄서들은 춤의 아버지를 잃었다고 슬퍼했다.

단순히 멋진 춤을 췄다는 것만이 아닌 특수 연출을 통하여 시각적인 효과도 매우 많이 만들어냈다. 한상철 팝 칼럼니스트는 특히 Dangerous World Tour가 대중음악 공연의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며 우리가 90년대 이후에 볼 수 있었던 대형 공연들의 특수효과 및 안무들은 바로 이 투어의 기술에서 비롯된 것들이라 해도 크게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고 평가했다. 대표적으로 공연의 시작과 함께 땅에서 튀어나오는 토스터 기법, Thriller를 부르고 끝부분에 관에 들어간 다음 관에 큰 송곳을 박아 넣고 불을 지른 다음에 전혀 다른 곳에서 다음 곡을 시작하는 것, Black or White의 끝부분에서 벽 밑에 깔리는 것, Earth Song 공연에서 뒤에 무대장치들과 탱크를 동원하여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점, Smooth Criminal 공연에서 등장하는 초대형 스크린 등 그냥 넘어가는 부분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우 많은 기법을 사용하여 다양한 효과를 냈다.
잭슨이 역사상 처음으로 춤을 추는 팝 스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팝 스타를 댄서로서 규정한 최초의 아티스트였다. 도나 섬머는 디스코의 여왕이지만 아무도 그녀의 무브를 신경 쓰지 않았고 베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Billie Jean 이후 댄싱은 팝 스타들의 일부가 되었다. 심히 춤에 재능이 없는 스타라도 모두 그들의 히트곡을 부를 때 대중들 앞에서 댄스를 선보여야만 했다. 휘트니 휴스턴도 라이오넬 리치도 심지어 브루스 스프링스틴도 말이다.
롭 셰필드 음악평론가 / 2009년 롤링 스톤 'A New Kind of Hollywood Musical'
현대화된 댄스 팝을 거론할 때 한국을 넘어 전 세계에 걸쳐 마이클 잭슨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케이팝의 경우 무대 구성이 매우 중요한데, 노래와 안무 등을 통해 얼마나 화려한 무대를 연출하느냐에 있어서는 마이클이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랩을 하면서도 동시에 비보잉을 해야 하는 게 케이팝의 특성.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때부터 그랬는데 이들이 아크로바틱한 댄스를 한 것도 마이클의 영향이 크다. 이후에 나온 유승준, 비 등 솔로 남자 가수들도 마찬가지다.
김성환 음악평론가/ 텐아시아 또 다시 마이클 잭슨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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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이 처음으로 문워크를 선보인 1983년 모타운 25주년 기념 Billie Jean 공연의 한 장면.[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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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iller> 뮤직 비디오의 한 장면[31]
마이클의 앨범은 사운드 엔지니어링 측면에서도 유행을 선도했다. 마이클은 사운드에 유난히 민감하고 엄격한 귀를 가졌던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마이클의 영원한 음악적 동지였던 사운드 엔지니어 브루스 스웨디언이 밝힌 일화에 의하면 마이클이 <Billie Jean> 사운드를 계속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무려 91번이나 믹싱을 반복해야 했다고 한다.[32] 이러한 노력들 때문인지 마이클의 앨범이 스피커플레이어 개발시에 단골 레퍼런스 디스크로 이름을 떨쳤다는 것은 레코딩 업계에서는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며 마이클의 음반을 믹싱, 마스터링했던 전문 스튜디오 엔지니어들이 이후 수많은 팝 아티스트들의 집중적인 주문 공세에 시달렸던 것은 물론이다.[33]

임진모 음악평론가도 "마이클의 앨범 사운드 자체가 굉장히 섬세하고 시대를 앞서가 옛 스튜디오 엔지니어들 책상에는 항상 마이클의 앨범이 꽂혀 있었을 정도"라고 말하며 "마이클의 음악을 들으면 녹음과 음향 수준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야말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마이클은 앉아서 만족할 수 있는 사운드가 나올 때까지 계속 '다시'를 외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될 만큼 사운드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기가 막히다. 특히 엔지니어들이라면 마이클의 음악은 반드시 들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34] 실제로 마이클의 80년대 음악들은 약간 복고적인 느낌을 풍기는 곡들도 있긴 하지만 전형적인 80년대의 사운드와는 거리가 멀어 현대인들도 적응하기 좋고 특히 이준오 영화음악 감독이 아날로그 믹스의 바이블 같은 앨범이라고 칭하기도 한 1991년작 <Dangerous>부터는 사운드에 더더욱 공을 들인 티가 팍팍 나서 요즘 나온 음악처럼 세련되게 느껴질 수 있다.
사실 마이클 잭슨의 앨범들은 엄청난 자본이 투여된 레코딩 기술의 결정체다. 스테레오 효과를 극한까지 끌어올려서 녹음/믹스다운/마스터링한 것이라 보면 된다. 팝 레코딩의 교과서라고도 할 수 있다.
ice J 음향엔지니어/ 개인 블로그
저는 음악 듣는 걸 좋아하고 지금도 음악과 오디오에 관련된 글을 쓰면서 먹고사는 사람이지만 마이클 잭슨의 앨범을 들을 때면 아직도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그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마이클 잭슨의 감성과 메시지가 완성도 높은 사운드 품질 덕에 느껴지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마이클 잭슨의 앨범은 다른 가수들의 그것과는 다른, 뭔가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한지훈 음향엔지니어/ 멜론 뮤직스토리 그가 팝의 황제인 이유: Michael Jackson [Thriller]
ai 보컬이 등장한 후 많은 팬들이 여려 유명곡들을 마이클 잭슨 보컬로 편곡하면서 2020년대에서도 여전히 높은 영향력과 인기를 누리고 있다.

4.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

마이클 잭슨의 등장은 대중문화 다방면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로 인해 후대에 등장하는 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연예인답게 연예인들의 연예인으로도 뽑힌다.

저스틴 비버는 자신의 롤 모델이자 우상은 마이클 잭슨이라고 직접 밝혔다. 2010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서 남자 가수상 수상 소감으로 마이클 잭슨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그 누구도 마이클 잭슨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라고 소감을 마무리했다. 마이클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기를 끈 것은 음악이 다양하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기 때문이니 내 목표도 마이클 잭슨처럼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고 활력을 주어 모두와 인연을 맺고 싶다고 말했다. 또 잭슨이 존경을 받는 이유는 깨끗한 삶 때문이기에 자신도 마이클 잭슨을 본받아 깨끗한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다고 했다. 한편 최근 인터뷰에서 가장 좋아하는 잭슨의 노래는 'Dirty Diana'라고 밝혔다.

레이디 가가는 마이클 잭슨이 입었던 옷, 장신구들을 대량으로 구매하여 마이클 잭슨 박물관을 건립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할 정도로 극성적인 팬이다. 한 번도 마이클을 안 좋아했던 적이 없다고 한다. 또한, 그녀의 곡 'Love Game'에 등장하는 지하철역이 바로 마이클의 노래 'Bad'의 촬영 장소이고, 마이클이 죽었을 때[35] 백댄서들과 함께 울었다고 한다. 2016 미 대선 당시, 힐러리 지지 연설에 마이클 잭슨이 Bad 시절에 입던 나폴레옹 자켓을 입고 나와 화제가 되었다.

셀린 디온은 마이클 잭슨이 자신의 아이돌이었다고 말했다.[36]15살 때 tv에서 마이클을 보고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으며 마이클 때문에 영어를 배우고 영어로 노래 부르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이 시절 그녀의 방 천장에는 마이클 잭슨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20살 무렵에는 마이클의 복장까지 챙겨 입고 'Bad'의 무대를 커버한 적도 있다. 또한 자신의 전성기 때에 마이클의 가족들과 공연을 펼친적도 있다.[37]또한 1995년 셀린이 월드 뮤직 어워드에서 공연을 할 때 마이클 잭슨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마이클이 사망한지 2년 뒤엔 자신의 라스 베가스 콘서트에서 마이클의 곡인 Man In the Mirror을 열창하면서 그를 추모하기도 했다. 덧붙여 셀린 디온은 자기가 음악계에서 본 최고의 작곡가 3명으로 데이비드 포스터,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함께 마이클을 꼽기도 했다.[38]

비욘세는 마이클 잭슨은 그 어떤 뮤지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영향력을 남겼고 마법이었고 우리 모두가 꿈꾼 존재라며 추모했다. 비욘세는 마이클 잭슨의 'I Wanna Be Where You Are'을 커버한 적도 있고 2016년 슈퍼볼에서는 마이클 잭슨의 복장을 오마쥬하고 나왔다.

어셔는 마이클 잭슨을 무척이나 존경했고 같은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30주년 공연)에 대해 감사하며 그는 음악으로 경계를 무너뜨렸고 그가 남긴 음악은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으며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저스틴 팀버레이크는 마이클 잭슨이 'Invincible' 앨범을 발매하기 전 현재 대중음악계의 흐름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 이 둘의 팝 뮤지션과 미팅을 한 적이 있었다. 이때 브리트니와 저스틴이 마이클에게 'Thriller' 뮤직 비디오의 대성공 등에 관해 이것저것 묻고 칭찬하자 마이클이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한다. 브리트니는 마이클 잭슨 사망 이후 그는 내 평생에 영감을 줬다고 말했으며 저스틴은 천재를 잃었다고 말했다.

마돈나는 마이클 잭슨의 'Billie Jean'을 직접 공연 중 선사한 바도 있고 그녀의 히트곡 'Like a Virgin'도 빌리 진과 흡사하다. 마이클 잭슨이 사망한 뒤 '그에게서 영감을 받지 않은 아티스트를 모른다, 모두가 마이클 잭슨을 경외하며 자랐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그린 데이, 브루노 마스[39], 크리스 브라운, 칸예 웨스트, JAY-Z, 휘트니 휴스턴, 머라이어 캐리, 마룬 5, The Weeknd[40], 테일러 스위프트, 아리아나 그란데, 퍼렐 윌리엄스, 등 주요 뮤지션들이 영향을 받았다. 한국에서 나얼스티비 원더와 함께 자신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뮤지션이 마이클 잭슨이라고 이야기 했다. 박진영 역시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미국에서 살던 시절 마이클 잭슨의 <Off the Wall> CD를 사서 듣고 어린 나이에 충격에 빠져 한국에 돌아와서도 AFKN만 뚫어져라 보며 춤연습을 했다고 한다.

마이클 잭슨이 대중음악과 대중문화에 미친 파급력은 산술적으로 계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대하다. 또한 단순한 음악가 이상으로 다방면의, 수많은 이들에게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 결정적 이유가 바로 대중문화를 중점으로 하여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마이클 잭슨은 사회적 사건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5. 업적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예인
BET #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위대한 연예인
베리 골디 (모타운 설립자) #
마이클 잭슨에 대한 주요 매체들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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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 롤링 스톤 선정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35위[41]

2018년 영국 더 가디언은 <Best 보이밴드 맴버 Top 30>에서 마이클 잭슨을 1위로 선정했다. 마이클은 11살 때인 1969년, 형제들로 구성된 그룹 잭슨 파이브로 본격 데뷔해서 모타운에서의 첫 싱글 <I Want You Back>을 시작으로 10대 초반의 나이에 이미 4곡의 빌보드 1위 곡을 연속으로 배출했다. 이는 그룹 역사상 최초로 4개의 싱글이 연속으로 빌보드 1위를 석권한 것이었다. 또 13살 때 발표한 솔로 싱글 <Ben>도 1위를 기록하면서 사실상 잭슨에게 무명기간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기는 영원할 수 없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마이클은 차트에서 이전만큼의 성적을 거두지는 못하며 하향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러다 1978년에 발매된 앨범 잭슨스의 <Destiny>가 성공하고 본인이 작곡에 참여한 Shake Your Body(Down To The Ground)가 빌보드 7위를 차지하면서 다시금 인기가 오르기 시작했고 1979년 성인이 되고 제작한 첫 솔로작인 <Off the Wall> 앨범이 2,000만 장 이상 팔리고 비평적으로도 극찬을 받으면서 마이클은 다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기조는 1990년대 초중반까지 쭉 이어졌다. 1982년 발매된 <Thriller> 앨범은 현재까지 6,600만 장을 팔아치우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라는 대기록을 세웠고[49] 1985년 마이클과 라이오넬 리치가 공동 작사/작곡하고 20명 이상의 미국 레전드 뮤지션들이 함께 부른 <We Are the World> 역시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싱글만 2000만 장 이상이 팔려 나갔는데 이는 80년대 가장 많이 팔린 싱글이자 현재까지 역대 가장 많이 팔린 싱글 8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1987년 발매된 <Bad> 앨범도 3,500만 장의 판매고[50]를 올리고 한 앨범에서 역대 최다 기록인 5곡의 빌보드 1위 곡을 배출하는 등 신기록을 세우면서[51] 80년대 마이클 잭슨은 정규앨범을 단 2장만 발표하고도 인기의 최고조를 유지했다. 마이클은 1990년 백악관에서 당시 조지 H. W.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데케이드(decade) 아티스트 상을 수상했고 빌보드는 앨범 판매량, 라디오 에어플레이 횟수 등 상업성 측정 지표들을 종합하여 마이클 잭슨을 80년대 대표 뮤지션으로 산정했다.[52]

1991년 발매된 <Dangerous> 앨범도 3,200만 장 이상 팔리며[53] 마이클 잭슨은 전성기를 이어갔는데 당시 앨범 수록곡 <Black or White> 뮤직비디오는 27개국에 동시 방송되어 5억 명 이상의 시청자를 끌어모아 기네스 세계 기록에 TV 역사상 가장 많이 본 뮤직 비디오 Premiere로 등재됐다. 1992년 미국의 유료 케이블 채널 HBO는 마이클의 <Dangerous Tour: Live in Bucharest> 공연을 방송하여 시청률 21.4%를 기록했는데, 이는 당시 HBO 역사상 최고의 시청률이었다. 1993년 마이클이 게스트로 출연한 <오프라 윈프리 쇼>는 현재까지도 TV 인터뷰 방송 역사상 가장 많은 시청자가 본 방송으로 남아있는데 약 9,000만 명이 본 것으로 집계됐다.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큰 축제 중 하나인 슈퍼볼 하프타임 쇼도 마이클 잭슨이 출연한 1993년부터 개념이 정립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마이클 이전에는 주로 대학 밴드들의 공연이나 디즈니 헌정 공연 등이 하프타임쇼를 메꿨지만 마이클 잭슨의 하프타임쇼가 본경기보다 더 높은 시청률을 보인 최초의 사례가 되면서 이후 U2, 프린스 등 슈퍼스타들이 대거 출연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들의 62%가 마이클 잭슨을 인간적으로 존경한다고 답할 만큼 마이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많이 긍정적이었지만, 1993년 첫 번째 아동성추행 의혹이 터진 이후로는 부정적인 반응들이 대부분이었다. 1980년대 후반 Wacko Jacko 논란으로 이미지에 피해를 입은 적은 있지만 그건 당시까지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성추행 의혹 사건이 마무리된 이후에도 결혼과 이혼의 반복, 백인동경설과 성형중독 의혹 등으로 인해 명예는 계속해서 실추됐다. 1995년 발매된 <HIStory> 앨범은 2,3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마이클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상업적으로 전작들과 비교하면 떨어지는 수준이었고, 2001년 발매된 마지막 정규앨범 <Invincible>은 800만 장의 판매고에서 그치며 비평적으로도 실패작으로 취급받는 등 이때가 마이클 잭슨의 음악 커리어 사상 가장 침체된 시기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3년에는 두 번째 아동성추행 혐의로 기소돼 재판까지 갔는데 2005년 미국 갤럽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들의 75%가 마이클을 유죄라고 생각한다는 충격적인 결과가 있었을 정도로 여론은 극도로 악화됐다. 같은 해 재판 결과가 무죄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반응은 여전했다. 판결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재판결과를 믿는다는 응답은 34%에 그쳤고 믿지 않는다는 응답은 48%나 됐다. 아울러 미국인들의 40%는 마이클이 더 이상 음악 활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응답했고 70%나 마이클에 대해 부정적이라고 응답했다. 이 시절 마이클은 4년 연속 가장 어리석은 미국인 1위 자리에 오르는 불명예도 겪었다.

이후 마이클 잭슨은 별다른 외부활동을 하지 않다가 2009년 3월 영국 런던의 기자회견장에서 컴백 콘서트를 열겠다고 발표하는데, 당시 이 장면을 CNN, ABC, BBC 등 영미권 주요 언론사들이 정규방송까지 중단하며 긴급속보 체제로 들어서며 생중계했다. 영국 O2 아레나에서 열릴 50회 분량 75만 장의 티켓이 단 4시간 만에 모두 매진되었으며, 이는 신기록이었다. 마이클이 공연을 한다면 런던에 10억파운드의 경제적 효과가 창출될 것으로도 예측되었다. 그러나 마이클 잭슨이 6월 25일 갑자기 사망하면서 컴백 콘서트는 결국 이뤄지지 못했고 대신 마이클 잭슨의 사망 소식은 세계적으로 엄청난 후폭풍을 일으켰다. 마이클 잭슨의 사망은 21세기 인터넷 산업 역사상 가장 큰 반응을 이끌어온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CNN, BBC 등 세계 각국의 언론들은 긴급속보 체제로 마이클 잭슨의 사망소식을 연일 특집으로 보도했고 수억 명의 사람들이 검색 사이트에 'Michael Jackson'을 두드리면서 구글이 트래픽 과부하로 다운됐다. 당시 구글은 자신들이 디도스 공격을 받고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도 마찬가지였다. 2009년 세계 3대 검색 사이트 구글, 야후, 빙의 연간 인기검색어 1위가 'Michael Jackson'이었다. 아마존 닷컴의 데이비드 셀링거는 "그때 사상 최초로 사람들이 다 같이 인터넷을 무너뜨렸다. 거대한 규모로 전 세계를 하나로 모은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타임지는 9.11 테러 이후 처음으로 특별판을 발행했고 미국 의회에서는 재시 잭슨 목사의 주도하에 마이클 잭슨을 기리는 단체 묵념이 있었다. 이후 잭슨의 추모식은 FOX, CNN, BBC 등에서 생중계되어 세계적으로 약 10억 명이 시청한 것으로 알려졌고 TV 역사상 가장 많은 시청자들을 끌어모은 방송 중 하나가 됐다.[54] 마이클은 2009년 그해 가장 많은 앨범을 판 뮤지션으로 집계됐고[55] 사망 이후 1년간 세계적으로 약 3,500만장의 앨범판매고를 올렸다. 당시 마이클의 폭발적인 앨범판매량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빌보드는 메인차트 중 하나인 <Billboard 200> 차트의 기존 규정을 변경하기도 했다.[56] 2010년 VH1은 마이클 잭슨의 사망을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순간 1위로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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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29일 마이클의 생일에 걸린 구글 로고.

사망 이후 마이클 잭슨에 대한 여론은 기존의 부정적 기류에서 급격히 바뀌기 시작했다. 가령 2009년 CNN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들의 51%가 마이클의 팬이라고 응답한 것이나 CBS가 2013년 실시한 '미국인이 가장 다시 살리고 싶은 유명인' 설문조사에서 다이애나 비, 스티브 잡스에 이어 마이클이 3위에 오른 것, 또 2014년 <Yougov>가 진행한 여론조사에서도 미국인들의 61%가 마이클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69%가 각종 루머와 가십이 아닌 음악으로 마이클이 기억될 것이라고 응답, 또 가장 위대한 로큰롤 뮤지션 2위로 뽑는 등 실추됐던 명예가 서서히 회복돼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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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마이클 잭슨에 대해 긍정적/부정적이십니까?
2003년 갤럽 조사 - 긍정 18% 부정 65%
2014년 Yougov 조사 - 긍정 61% 부정 32%

역사상 가장 위대한 로큰롤 뮤지션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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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엘비스 프레슬리 36%
2위 마이클 잭슨 21%
3위 존 레논 9%

참고로 2002년 ABC에서도 같은 여론조사를 했었는데 결과는 엘비스가 40%였고 마이클이 2%였다.

사후에도 인기는 꾸준하다. 유튜브, 스포티파이 등 대표적인 스트리밍 사이트들에서 마이클은 사후 10년이 지났음에도 인기 아티스트 탑 100 차트에 거의 항상 이름을 올리며 누적 스트리밍 횟수 그리고 구독자수에서 역대 70위 안에 들고 있다.[58] 틱톡에서의 인기도 웬만한 현역 인기 뮤지션들에 밀리지 않는다.[59] 2014년 세계 최대 음악 데이터 분석 업체 <EchoNest>가 무작위로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 회원 20만명의 가입정보에서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 항목을 조사한 결과 대부분 2000년대 이후 인기가수들이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와중에도 마이클이 여성에서 31위/남성에서 13위/종합 21위를 기록했다. 2017년 뉴욕타임즈의 조사결과 마이클은 당시 미국에서 현재 가장 인기있는 뮤지션 20위로 집계되었다. 또 2019년 미국 여론조사 기관 <YPulse>에서 13~37세의 사람들 1,000명을 대상으로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을 설문조사한 결과 마이클이 7위에 올랐다. 2021년에도 <YPulse>에서 13~39세 북미인/서유럽인 각각 1,300명을 대상으로 같은 조사를 실시했는데 마이클이 북미에서 18위, 서유럽에서 5위를 차지했다.

디지털 음원 세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이클은 RIAA 공식 인증 미국내 디지털 싱글 다운로드에서 4,100만회로 역대 29위이기도 하다. 2010년에 소니와 맺은 레코드 계약은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역대 최대 레코드 계약금액 기록을 세우기도 했는데 계약금은 2억 5천만 달러였다.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에 의하면 2021년 기준 마이클의 음악 저작권 가치는 3억 7500만 달러로, 1위인 존 레논-폴 매카트니 듀오(5억 달러)에 이어 2위로 조사되었다. 포브스는 순수 잭슨 본인의 음악만으로 1년에 약 2000만 달러의 수익이 창출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위키피디아에서 가장 많이 본 문서 7위는 'Michael Jackson'이며 페이지뷰가 1억 2,500만이 넘는다. 페이스북에서도 마이클은 2018년 기준 약 7,400만 명의 팬을 보유하여 20번째로 팬이 많은 계정이기도 하다. 마이클의 음악은 현재까지도 다른 뮤지션들에 의해 많이 차용되고 있는데, 실제로 음악 분석 전문 사이트 <Whosampled>에 의하면 가장 많이 샘플링/커버/리믹스된 아티스트 순위에서 마이클은 각각 8위/5위/4위에 랭크됐다.

빌보드 200 연말결산에서 마이클은 사후 2013년을 제외하고는 2020년까지 매해 70위 안에 들 정도로 앨범 역시 지금도 꾸준히 잘 팔리고 있다. 앨범판매량 집계 사이트 <Mediatraffic>에 의하면 마이클은 비틀즈, 엘비스 프레슬리에 이어 약 3억 ~ 3억 5,000만장의 판매고로 역대 누적 앨범판매량 3위인데 이는 목록에 가장 많은 이름을 올린 아티스트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성인 이후 사망할 때까지 마이클 잭슨이 30년 동안 발매한 정규앨범은 6장 밖에 되지 않지만 그중 5장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 100위> 안에 들었다는 것이다.[60] 피지컬 판매량만 고려한 <Mediatraffic>과는 다르게 스트리밍, 음원 다운로드 등도 판매량 집계에 반영한 <Chartmasters>에서는 마이클의 전체 판매량을 3억 2,800만장으로 보고 비틀즈 다음으로 2위에 랭크했다. 위키피디아에서 공식 인증 판매량을 통해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마이클 잭슨의 앨범 판매량은 2억 7,700만 장이고 엘비스 프레슬리는 2억 3,100만 장이다. 또한 요즘 팝스타들은 디지털 음원 판매량을 기본적인 앨범 판매 수치에 합산하고 실물 음반 판매량보다 디지털 싱글과 디지털 음원 판매 수치가 더 높은 경우도 많다. 뿐만 아니라 실물 음반의 생산없이 디지털 싱글만 발매하여 온라인으로 유통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것 또한 앨범 판매량으로 집계된다. 그래서 디지털 음원 판매량까지 합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방식이다.

참고로 마이클의 미국내 판매량은 RIAA 공식 인증 8,900만장으로 6위이다. 2014년에는 사후앨범 <Xscape> 수록곡 <Love Never Felt So Good>이 빌보드 HOT 100 차트 9위까지 오르면서 마이클은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50년대 연속 HOT 100 차트 Top10 안에 각기 다른 곡들을 진입시킨 유일한 뮤지션이 됐다. HOT 100 차트 1위곡이 13곡인 마이클은 가장 많은 빌보드 1위곡을 보유한 뮤지션 5위인데, 사실 잭슨 파이브 경력과 <We Are the World>까지 간접 포함하면 1위곡은 18곡에 달하나 솔로 기록과는 분리해서 보기 때문에 개인 기록으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한편 영국에서도 마이클은 인기가 많았는데 <Thriller> 앨범과 <Bad> 앨범은 각각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 6위와 9위에 해당하며 또 싱글과 앨범을 합쳐 UK 차트에서 최장기간 머문 뮤지션 순위에서 엘비스 프레슬리, 에 이어 마이클이 2020년 3월까지 누적 2141주간 머물러 3위를 유지 중이다. 2011년 NME에서 주관해 1,000만표 이상이 모여 순위를 정한 '가장 위대한 가수 Top 20' 투표에서 마이클이 1위에 올랐으며 2016년에는 영국인 2,000명을 대상으로 한 '가장 좋아하는 남성 뮤지션' 설문조사에서 4위에 뽑혔다. 2017년엔 영국인 2,000명을 대상으로 최고의 음악 레전드는 누구인가를 설문조사했는데 마이클이 5위에 올랐다.[61] 또 2018년에는 영국 성인 2,000명을 대상으로 '자기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앨범 Top 40'을 조사한 결과 <Thriller> 앨범이 1위에 올랐다. 2020년에는 영국의 대표적인 음악 라디오 채널인 <SmoothRadio>가 자국민 청취자 7만명 이상을 대상으로 'Best 500 Songs'를 조사했는데 마이클은 총 20곡을 리스트에 올려 가장 많은 곡을 올린 뮤지션 순위에서 21곡으로 1위인 조지 마이클 다음으로 2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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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경향신문에서 11~14세 학생 2,395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마이클이 인기가수 4위에 이름을 올렸다.

사실상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2010년 프랑스 TF1 채널이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아마조니아 원주민들에게 그의 공연 영상을 보여주고 누군지 아냐고 물었더니 아이부터 노인까지 전원 이름까지 대며 안다고 대답했다.

마이클 잭슨은 대중문화의 중심지인 미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하나의 현상으로 간주되었다. 냉전 시대의 막이 내리고, 이후 각 나라에 국한되어 있었던 대중문화는 초강대국인 미국을 중심으로 하여 세계로 뻗어 나가는데, 1980년대를 시작으로 당시 미국 대중문화의 상징이었던 마이클 잭슨은 코카콜라, 맥도날드와 마찬가지로 다른 국가 사람들이 처음으로 보게 되는 미국의 상징이 된 것이다. 미국을 포함한 다른 국가의 사람들에게 마이클 잭슨은 미국의 기업가 정신과 인도주의 전형을 대표한다. 그는 당시 미국의 여러 기업이 자회사의 상품을 폭발적으로 수출한 것과 마찬가지로, 존재 자체로 1980년대, 1990년대를 소비한 모든 사람들에게 문화의 상징이자 자본주의의 대명사였다. 이것이 그가 20세기, 21세기에 걸쳐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한 명이 된 결정적인 이유이다.

한국에서의 인기도가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시대를 산 사람들이 증언하길 산골 밭에서 일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알 정도였다고 말했다. 1984년 경향신문 보도를 보면 멀리 떨어진 전라남도 다도해 섬에서도 주민들이 마이클의 노래를 콧노래로 흥얼거린다고 나와있다. 동아일보는 '한창 인기가 절정인 조용필의 이름은 몰라도 마이클 잭슨의 이름을 모르는 젊은이는 없다던가. 국민학교 어린이까지도 그의 음악에는 열광한다'고 보도했는데 실제로 국민학교 학생 2,000명을 대상으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조사한 결과 마이클이 에이브러햄 링컨, 레이건, 에디슨에 이어 4위로 나온 적도 있다. 1989년에도 마이클은 국민학생 1,500명이 뽑은 가장 좋아하는 외국가수 1위에 올랐다. 시간이 흘러 마이클은 KBS2 연예가중계가 2015년 전국 성인남녀 무작위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남성 팝 아티스트> 설문조사에서 1위로 선정됐고 2018년에도 같은 조사방식으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댄스가수> 부문에서 국내가수들을 모두 제치고 1위로 뽑혔다. 2019년에는 <한국인이 가장 다시 보고싶은 별이 된 해외스타> 1위에 뽑혔다.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2006년 이후 지난 12년간 가장 많이 선곡된 뮤지션 순위에서도 마이클은 비틀즈, 에 이어 3위에 올랐다.

또한 북한의 경우 김정은이 유학시절 유독 좋아했던 가수가 마이클과 휘트니 휴스턴이었다고 김정은의 동창이 밝힌 적이 있는데 2013년에 방북하여 김정은과 시간을 보낸 미국 농구선수 데니스 로드먼이 밝힌 일화를 봐도 만찬이 끝난 후 김정은 부부와 함께 마이클의 음악을 틀어 놓고 춤을 췄다고 하니 어느 정도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북한은 2013년 미국을 미사일로 타격하는 선전영상에서 <We Are the World>를 무단 도용해 배경음악으로 사용한 전력이 있다. 아울러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는 마이클 잭슨이라는 이름도 한번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많은가보다. 가디언지보도를 보면 찰스 젠킨스라는 한국전쟁 포로는 2004년에 탈출해서 2008년 기자와 인터뷰할 때 90년대 이전에 그가 접한 한국음악 이외의 유일한 음악은 러시아로부터 수입된 민족주의 노래뿐이었다고 말했다. 그 결과, 밀수입된 마이클의 카세트 테이프가 그의 손에 들어오게 된 90년대 중반까지 그는 마이클이 누구인지도 몰랐다고 한 것을 보면 북한은 역시 어쩔 수가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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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의 1993년 러시아 모스크바 방문

공산국가들에게 마이클 잭슨은 큰 문제였다. 소련은 국영매체까지 동원해 '흑인의 영혼을 팔아 백인의 이익에 봉사하고 있으며 미국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당면한 문제들로부터 눈을 돌리게 함으로써 레이건 행정부를 돕는다'던가 '레이건의 파시스트 졸개이며 동족 흑인 전통의 반역자이며 이익을 위해 영혼을 파는 사기꾼'이라고 하기도 하고 '잭슨 열병이라는 바이러스균이 이제는 남미로 남하해 남미의 금을 모두 짜내려 한다'는 등 마이클에게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마이클의 음악은 사람의 혼을 빼놓는 것이라며 레코드점에서도 마이클의 앨범을 구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당시 타임즈보도에 의하면 소련에서도 불법 복제된 마이클의 카세트가 암암리에 널리 교환되고 소중히 여겨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마이클은 문호를 개방한 소련의 TV 광고에 등장한 첫 서방 연예인이 됐고 1993년엔 러시아에서 월드스타로서는 최초로 콘서트를 열기도 했는데 러시아 출신 대중음악 연구가 드미트리 바비치에 의하면 당시 마이클 잭슨의 콘서트는 단순히 대중문화뿐 아니라 러시아 역사 전반에서 큰 사건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마이클 사후 러시아 방송국 프로듀서 블라디미르 이바넨코는 러시아인들에게 미국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고 마이클이 바로 그 미국의 왕 같은 존재였다고 회상했다.

1988년 마이클의 서독 베를린 공연을 앞두고 동독의 비밀경찰인 슈타지가 비상상태였다는 비밀문서도 공개됐다. 슈타지는 베를린에 온 마이클 일행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일일이 행적을 문서로 남겼다. 장벽 인근에서 열릴 마이클의 공연으로 인한 사회 혼란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마이클의 공연을 보기 위해 동독 청년들이 경찰과의 충돌도 불사하며 장벽으로 몰려가 수습하기 힘든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슈타지는 고민 끝에 대형 스크린으로 마이클의 공연을 중계하여 이를 막는 계획을 세웠으나 정작 공연이 열리는 날 이 계획은 시행되지 않았고 결국 장벽으로 몰려든 청년들을 경찰들이 진압하다가 유혈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마이클 열풍은 대단했는데 언론들은 마치 태풍이 휩쓴 것 같다 하여 'Typhoon Michael'이라고 불렀다. 한때 '감기에 걸려도 뉴스에 나올 사람이 일본에 세 명 있는데 마이클 잭슨, 욘사마, 고이즈미 수상'이라는 농담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켄 오타케 소니 뮤직 일본 사장은 "마이클 잭슨은 비틀즈 이후 일본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엔터테이너이며 일본 사람들의 마음에 항상 남아있는 존재"라고 말했다. 마이클의 사망 소식에 일본 언론들은 며칠간 많은 시간을 마이클에게 할애했고 특히 후지TV는 고정시청률 20% 이상의 최고 인기 프로그램이던 <퀴즈 헥사곤II>의 방송도 취소하고 2시간짜리 마이클 특집 방송을 편성하기도 했다. 정부 수석대변인과 장관들도 애도의 뜻을 전했다. 2019년 후지TV는 개국 60주년을 기념하여 헤이세이 시대 메자마시 테레비의 지난 25년간 6,000회 이상의 방송을 분석하여 출연횟수를 기준으로 가장 인기가 많았던 해외 연예인을 발표했는데 마이클이 1위였다.

폐쇄적인 기조를 유지한 중국에서도 마이클은 유독 인기가 있다. 중국 최대 포털 사이트 바이두가 매주 집계하는 서양 인기스타 목록에서 마이클은 2019년에도 거의 매주 1위에 오르고 있다.[62] 한 중국인 사업가는 '80년대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개방 시대를 처음 맞은 중국인들에겐 서양 문화를 상징하는 주제곡이었다'고 회상했다. 마이클의 사망 소식에 국영방송 CCTV는 바로 특집으로 소식을 전했고 바이두는 특별 추모 사이트까지 개설했으며 거의 대부분의 신문사들이 1면을 마이클의 일생과 업적을 다루는 데에 할애했다. 좀처럼 서양 연예인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중국임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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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27일 중국 주요 신문들의 1면.
정작 마이클은 중국에서 공연했던 적이 없었다.

아프리카에도 마이클의 이름이 알려져 인종차별을 해소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보도됐다. 소니 뮤직 남아공 마케팅 디렉터인 던컨 깁본은 마이클 잭슨의 음악이 그동안 깊이 분열됐던 남아공 사회가 통합되는 분기점이 됐다고 말했다. 남아공 라디오는 인종적으로 철저히 분리되어 있었으나 마이클의 음악이 처음으로 백인 팝 방송국과 흑인 R&B 방송국에서 동시에 울려퍼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조는 마이클의 남아공 콘서트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흑인과 백인, 젊은이와 노인 관객이 모두 한데 어우러지는, 이전에 본 적 없는 광경이 연출됐다. 남아공 방송국 DJ 루피 응카이사는 "마이클은 흑인 가족들이 개인주의와 인종을 둘러싼 문제들에 대해 더욱 진지하게 토론하도록 하게 했다. 그래서 그의 문화적 영향력은 단순히 음악 이상의 것이다"라며 마이클을 추모했다. 아프리카의 흑인 빈민촌 소년인 제이콥은 제2의 마이클 잭슨이 되기 위해 춤을 따라 하고 있다니 아프리카의 빈민촌에도 그의 이름은 유명했다.

유럽에서는 마이클 잭슨이 방문하거나 콘서트를 하면 뉴스 메인 1면을 도배를 했고 그나라 대통령이나 최고인사들이 마이클 잭슨을 만나곤 했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칠레 등 남미와 멕시코, 캐나다 등 북미 및 호주에서도 마이클의 앨범들이 역대 베스트 셀링 순위에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63] 특히 남미 최대의 음악시장인 브라질에서 마이클은 외국 뮤지션 중에는 두번째[64]로 높은 판매고를 올렸는데, 마이클의 사망소식에 리우데자네이루 시장은 바로 도시에 동상을 세우며 마이클을 기리기도 했다.[65] 멕시코에서는 2009년 8월 마이클을 추모하기 위해 멕시코시티 광장으로 약 14,000명이 집결하여 마이클의 노래에 맞춰 춤을 선보였는데(영상) 이는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플래시몹으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도 등재됐다. 이시기 멕시코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대규모의 마이클 헌정 플래시몹 열풍이 불었다.

또 <Thriller> 앨범이 나왔을 당시 이스라엘에 있었다는 S-Curve 레코드사의 창립자 스티브 그린버그에 의하면 마이클은 중동동남아에서도 미국과 유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거대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중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사 중 하나인 <Arab News>는 2019년 마이클 사망 10주기를 기념한 기사에서 "잭슨은 중동에도 거대한 팬덤을 가지고 있다. 80년대 걸프 지역에서 처음 라디오가 잡혔을 때 헤비 로테이션으로 들을 수 있었던 최초의 슈퍼스타였다... 아마 잭슨은 본인의 음악이 중동에서 남녀노소 모든 세대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끼쳤는지, 얼마나 많은 팬들이 지금 여기에 있는지, 또 그가 시련을 겪을 때 팬들이 얼마나 헌신적으로 그를 믿고 견뎌왔는지 몰랐을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마이클 사후 필리핀에서는 1,500명의 죄수들이 마이클을 기리고자 감옥에서 마이클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춰 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영상) 월드 투어가 열린 나라마다 지도자를 만났던 유일한 가수다. 25개국 국가 수장들과 만났으며 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에서는 5개의 부족장들과도 만났다. 특수부대까지 출동한 대통령급 경호 대접을 받았다. 이렇게나 많은 국가 지도자를 만난 아티스트는 마이클 잭슨이 유일하다.

한상철 팝 칼럼니스트는 “가장 거대한 임팩트(impact)를 가진 지구상 가장 완벽한 팝 뮤지션”이라고 평가하였으며 팝 DJ 김광한 씨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로큰롤의 제왕이라면 마이클 잭슨은 장르를 초월한 황제이다"라고 평가하였다. 뉴욕 록 라디오 방송국 WNEW-FM의 피디인 찰리 캔달씨는 “그가 굉장한 목소리와 다양한 스타일을 가졌으며, 귀신같이 춤을 잘 춘다는 걸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는 모든 연령대와 모든 종류의 팝 청취자들에게 어필하죠. 이런 가수는 한 시대에 한 명 나올까 하는 가수죠”라고 평가하였으며 <빌리지 보이스>는“지금까지 스스로 작사, 작곡, 프로듀싱, 어레인지먼트, 의상, 스타일, 안무, 퍼포먼스, 영상, 자신의 이미지 로고 등을 직접 소화해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고독하겠지만 팝은 천재를 만난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각종 매체에서 선정하는 최고의 아티스트 순위에서 최상위권에 위치해 있다. 2007년 Q 매거진 편집자 선정 '음악사를 바꾼 21인'(무순위)에 마이클이 포함됐고 2010년에는 VH1에서 200명의 음악전문가와 현역 가수들을 상대로 한 투표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Top 100' 2위를 차지했다. 롤링 스톤은 2004년 로큰롤 탄생 50주년을 기념해 특집 기사를 내보내는 가운데 롤링 스톤 선정 100대 아티스트에서 마이클을 35위로[66], 2008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 100'에서는 25위[67]로 선정했다. 2005년 미국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선정한 '가장 위대한 미국인 100인'에 포함되었다. 또한 2015년 빌보드는 마이클을 편집자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알앤비 아티스트 Top 35'에서 1위 그리고 2016년에는 12명의 브라질 음악평론가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완벽한 아티스트 Top 50'에서 2위에 랭크했다. 2014년에는 영국문화원이 설립 80주년을 기념하여 각계각층의 저명한 전문가 25명이 선정하고 전 세계 10,000명의 성인에게 투표를 실시하여 순위를 정한 '지난 80년간 세상을 형성한 가장 중요한 사건 Top 80'에 컴퓨터 발명, 핵 개발 등의 사건들과 함께 마이클 잭슨 음악의 영향력이 49위에 뽑혔다. 또 같은해 미국 정부 예산으로 운영되는 스미소니언 교육재단에서 전문가들이 분석하여 발표한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100인'에도 이름을 올렸고 한국에서는 1999년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음악전문가 81명과 청취자 1,556명을 대상으로 투표를 실시한 '20세기 최고의 팝 아티스트'에서 전문가와 청취자 모두 마이클이 3위에 선정됐다. 또한 2019년 빌보드에서 선정한 '차트 역사상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에서 7위, 이후 '빌보드 선정 탑20중 가장 좋아하는 아티스트'에서 450만 표 이상을 받아 1위에 자리했다.

인터넷에서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 마이클 잭슨'이란 말의 의미를 다소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이 3명은 대중음악 역사상 각자의 시대에서 가장 압도적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으며 단순히 음악적 경계를 떠나 하나의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된 전설 3인방(추가적으로는 스탠다드 팝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프랭크 시나트라도 여기에 드나 한국에서는 시나트라의 존재감이 거의 없기에 언급이 잘 안 된다.)을 뜻할 때 자주 쓰이는 것이다. 즉, 이 아티스트들이 다른 아티스트보다 더 위대하다거나 우열을 나누는 그런 걸 뜻하는 건 아니다. 엄밀히 정의하자면 로큰롤의 태동 시기인 50년대, 60년대와 팝의 시대인 80년대를 비교하기에는 대중음악은 사회-정치적 문화와도 긴밀히 연관되기 때문에 비교할 수도 없다.

마이클 잭슨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 개선될 여지가 많다. 90년대 중후반부터는 아동 성추행 논란과 Wacko Jacko 이미지 때문에 평단이나 미디어들, 대중들에게 하도 까여서, 지난날의 명성들이 먹칠을 당했지만 잭슨의 사망 이후에는 그의 각종 루머의 진실과 음악적 커리어를 재조명하는 분위기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1] 번역을 올바르게 하면 '팝의 왕' 혹은 '팝의 제왕'이 알맞으나 한국에선 '팝의 황제'로 굳혀졌다.[2] 대중 가요에서는 프랭크 시나트라,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와 함께 필수적으로 언급된다.[3] <Thriller>[4]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생전에 이 공연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고, 6.25 전쟁이 일어난 날 사망했다.[5] Most Successful Entertainer of All Time[6] 공식적으로 39개의 자선단체를 지원하며 생전 5,000억 원 가량을 기부하였다. 이는 팝스타가 지원하는 최대의 자선단체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되었다. 그러나 이런 그의 인도주의적 행적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근 20년간 지속된 언론의 루머가 이를 가려버렸기 때문이다.[7] 공식 기록 6,600만 장, 비공식 기록 1억 장 이상[8] 일명 Wacko Jacko. 2000년대에도 이 루머는 지속되어서 당대 디스로 제일 유명했던 에미넴에게도 디스당한 바 있다.[9] 사실 그는 2002년 독일을 방문했을 때 독일의 한 호텔에 머물면서 아이를 보여달라는 팬들의 성원에 생후 8개월 된 어린 자녀를 호텔 창문 밖으로 내미는 시늉을 해서 비판받았다. 이는 언론이 의도적으로 영상을 느리게 보이게 해서 아이를 오랫동안 발코니 밖에 내미는 것처럼 보이게 했기 때문이다. 직후 마이틀은 공개 서한에서 "순간의 흥분에 사로잡혔다", "나는 내 아이들을 위험에 처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끔직한 실수였다"고 사과하였다. 위의 사실을 바탕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언론이 너무 무책임하다며 비판했다.Michael Jackson dangles his baby over a hotel balcony[68][10] 다만 이는 미국과 영국 등의 영미권 국가와 한국 등의 국가에서 그런 것이고 독일이나 프랑스 등 유럽 국가나 일본 등의 국가에선 상술한 발코니 논란과 성추행 추문 이후에도 여전히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11] 사실 그의 재판이 시작된 2004년부터 그의 활동은 거의 정지상태였다.[12] 그의 리허설 영상은 마이클 잭슨의 디스 이즈 잇으로 제작되어 개봉되었다.[13] 1982년 말 발매된 스릴러 앨범은 빌보드 앨범차트에서 37주간 1위를 기록하며 1983~84년 두 해 연속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 되었다. 발매 1년 3개월 만에 핑크 플로이드의 <The Dark Side of The Moon> 앨범을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됐고 현재까지도 누적 6,6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기록을 유지하고 있다. 사실 스릴러 앨범 발매 전 세계 음반시장은 전례없던 역대 최악의 불황기였다. 미국의 CBS 직원들은 1982년 8월 13일을 검은 금요일이라 불렀는데 이날 대규모 해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릴러가 대박나면서 음반시장은 다시 초호황기를 맞았다. 마이클도 앨범 발매 전에는 200만 장만 팔아도 성공한 것으로 알고 만족하자는 소리를 주변에서 많이 들었다고 한다.[14] 2위 마돈나 17%, 3위 U2 12%. 미국 성인남녀 1,000명 대상, 오차범위 ± 3.1%.[15] 임진모 음악평론가, 저서 '젊음의 코드, 록' 171 페이지[16] 박광순 문화평론가, 벅스뮤직 추천앨범 리뷰, 물론 그럼에도 지미 헨드릭스, 척 베리 등 록음악을 하는 흑인 뮤지션들은 이전에도 드물지만 있었다.[17] 박은석 음악평론가, 전설이 된 잭슨, 그의 음악과 인생[18] 박은석 음악평론가, 2010년 SBS 그것이 알고싶다 '누가 마이클 잭슨을 죽였나' 편[19] 정일서 KBS 라디오 PD('365일 팝 음악사' 저자), ‘X&Y’ 빌보드 3주 연속 1위 … 미국 시장서 선전[20] 김작가 음악평론가, 모든 것을 초월한 음악을 남기고[21] 올해의 앨범상, 올해의 레코드상 등 8개 부문을 휩쓸어 한 해 가장 많은 그래미 어워드를 수상한 뮤지션으로 기록됐다. 후에 2000년 산타나도 8개 부문을 수상해 동일 기록이 됐다. 참고로 1984년은 그래미 역사상 가장 압도적으로 시청자수가 많았던 해이기도 하다. 시청률 30.8%에 미국내 시청자수만 5,167만명으로 집계됐다.[22] 마이클이 MTV에 나온 최초의 흑인 뮤지션이라는 뜻이 아니다. 1983년 데이비드 보위가 MTV와의 인터뷰에서 지적했듯이 흑인 뮤지션 중 극소수만, 그것도 주로 새벽시간대에만 방영이 허가되는 등 시간적 제약이 있었던 것을 24시간 언제든 방영될 수 있는 헤비 로테이션으로 마이클이 흑인 뮤지션으로서는 처음으로 길을 냈다는 의미이다.[23] 임진모 음악평론가, 위클리 공감 기고문 '팝의 제왕, 전설이 되다'[24] 차우진 음악평론가, 뮤직 비디오, 보는 음악으로의 시대를 열다[25] #[26] MTV 선정과 기네스 등재 자료 출처[27] 임진모 음악평론가, SBS 김성준의 시사전망대 흑인음악-아프로 아메리칸 뮤직 & 위클리 공감 기고문 '팝의 제왕, 전설이 되다'[28] #[29] 미국의 인기 댄스오디션 TV프로그램《So You Think You Can Dance》의 총괄 PD이자 심사위원이었던 나이젤 리스고에 의하면 수많은 지원자들이 춤을 추게 된 계기로 마이클 잭슨을 꼽았다고 한다.[30] 음악평론가 앤서니 디커티스는 저서 'Present Tense'에서 '이 공연 이후 모든 것은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공연은 2013년 미국 여론조사기관 해리스 폴이 자국 성인 2,003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지난 50년간 일어난 사건들 중 가장 다시 보고 싶은 사건> 7위에 올랐다. 1위는 닐 암스트롱의 달 착륙, 2위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 3위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31] 가사를 그대로 드라마처럼 옮기거나 콘서트를 스튜디오에서 재현하던 기존의 스타일에서 벗어나 한편의 단편영화처럼 제작해 뮤직 비디오의 개념을 바꿨다. 참고로 는 오늘날 미국에서 매년 할로윈 시즌만 되면 울려퍼지는 대표적인 할로윈송이 되었다. 2021년에는 빌보드 핫 100 19위까지 올랐을 정도.[32] 근데 결국 2번째로 믹싱한 사운드가 최종 결과물로 채택된 건 함정..[33] 김영대 음악평론가, 음악취향Y '마이클 잭슨' 특집[34] 문워크에서 털기춤까지…보는 음악 새 지평 열어 & 저서 '젊음의 코드, 록' 172 페이지[35] 레이디 가가는 원래 'This Is It' 투어의 오프닝을 맡기로 되어 있었다. 잭슨이 신인이던 레이디 가가를 보고 자신이 직접 투어의 오프닝을 맡을 가수로 추천했다고 한다.[36] 두 사람 다 그 할리우드 연예계에서 유일한 성자로 불린다.[37] 이때 마이클을 비롯한 마이클의 식구들이 셀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기웃거리는 모습이 인상적이다.[38] 출처: 2019년 개봉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David Foster: Off the Record'[39] 위켄드가 마이클의 보컬과 비슷하다면 브루노는 마이클의 춤 실력과 라이브 퍼포먼스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을정도로 마이클 잭슨과 매우 유사한 퍼포먼스로 매우 유명하다.[40] 위켄드의 딸꾹질하는 듯한 창법과 맑은 미성을 듣고 마이클을 떠올린 사람들이 많았으며, 실제로 마이클의 곡 Dirty Diana를 커버한 버전을 믹스테이프 Echoes of Silence에 싣기도 했다. 현재 활동하는 가수 중 가장 마이클 잭슨의 보컬과 유사하다. 위켄드가 수 차례 인터뷰에서 마이클 잭슨의 Off the Wall 등 잭슨의 주요 앨범들과 곡들을 어릴 때부터 따라부르며 노래를 연습했다고 밝힌 바 있다.[41] 뮤지션, 작곡가, 기타 음악산업 중진 등 총 56명의 패널로 구성된 전문가 집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하였다. 2011년에 한 차례 개정하였으나 리스트에 변동은 거의 없었고 마이클 잭슨은 기존과 같은 35위를 유지하였다.[42] 롤링 스톤 집필진들이 직접 선정하였다.[43] 어클레임드 뮤직은 개인의 취향을 모두 배제하고 음악 평론가들, 또는 잡지 등의 매체들이 매긴 순위를 종합해서 포인트를 줘서 순위를 매기는 사이트다. 순위가 매겨진 앨범과 곡의 리스트를 공개된 공식을 바탕으로 합해 올타임 아티스트들의 순위도 매긴다.[44] '모든 음악'이라는 사이트 이름에 걸맞게 장르와 국적을 불문한 전 세계 온갖 음반, 뮤지션과 그에 관한 정보와 리뷰를 찾아볼 수 있다. 세계의 300만 장 이상의 온갖 음반, 100만 명 이상의 음악가의 데이터, 3,000만 이상 트랙의 데이터를 가지고 있으며, 수집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다른 아티스트들에게 가장 많이 영향을 준 아티스트의 순위를 매겼다. 구체적으로는 뮤지션들이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인터뷰 자료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그 누적 언급빈도를 바탕으로 선정되었다.[45]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뮤지션들 중에서만 뽑은 것이라서 명예의 전당 헌액 조건들 중 하나인 데뷔 후 경력 25년을 채우지 못한 뮤지션들은 모두 제외됐다.[46] 음악평론가와 현직 뮤지션, 기타 음악산업 종사자 등 총 200명 이상에게 투표를 실시하여 선정하였다. 1998년에도 VH1은 같은 주제로 현역 뮤지션들에게 투표를 실시하여 리스트를 발표했는데 이때 마이클 잭슨의 순위는 40위였다.[47] 빌보드 집필진들이 직접 차트 성적이나 판매량 기준이 아닌 영향력, 음악적 유산 등을 고려하여 선정하였다.[48] 전문가 81명이 투표한 결과이다. 청취자 1,55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도 마이클 잭슨은 3위에 올랐다.[49] 미국 내에선 RIAA 공식인증 3,300만 장의 판매고로 이글스 베스트앨범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앨범이다. 참고로 2006년 기네스 세계 기록Thriller 앨범에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라는 타이틀을 공식 인증해 주면서 판매량을 1억 400만 장으로 발표한 것을 이유로 아직까지도 판매량을 1억 장 이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나 1억 장 얘기는 신빙성이 없다. 기네스는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이후 자신들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판매량을 6,600만 장으로 수정했기 때문이다.[50]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 10위권[51] 후에 케이티 페리가 2010년에 발표한 <Teenage Dream> 앨범에서도 5개의 빌보드 1위 곡이 나오면서 동일 기록.[52] 잭슨 파이브도 1970년대 순위에서 6위에 올랐다.[53]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 10위권[54] 정확한 수치는 사실 모른다. 5억으로 보는 곳도 있고, 10억, 20억, 25억으로 보는 곳도 있다. 닐슨 집계에 의하면 마이클 잭슨의 추모식은 미국내에서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다이애나 비에 이어 세 번째로 TV로 가장 많이 본 추모식이었다.[55] <Mediatraffic>에 의하면 2009년 가장 많이 팔린 앨범 Top 40 순위에서 마이클이 앨범들이 5/6/11/13/19/20/24/25위를 차지했다.[56] 원래 빌보드는 발매되고 18개월 이상된 앨범은 아무리 많이 팔려도 <Billboard 200> 차트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규정이 있었다. 즉 최신 앨범들만 해당차트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이클 잭슨의 앨범들, 그중에서도 특히 베스트 앨범인 <Number Ones>가 당시 <Billboard 200> 차트 1위에 올랐던 다른 가수의 앨범보다도 더 많이 팔렸음에도 해당차트에 오르지 못하는 사례가 발생하자 형평성 논란이 일었고 결국 빌보드는 2009년 12월부터 발매시기 제한을 없애게 됐다. 18개월 이상된 앨범은 <카탈로그 차트>라고 해서 별도로 순위를 집계했었는데, 카탈로그 앨범이 <Billboard 200> 차트 1위에 오른 앨범보다 더 많이 팔린 경우는 앞서 말한 마이클 잭슨의 <Number Ones>가 최초였다.[57] 또 2018년 미국인 2,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기분전환하고 싶을 때 가장 듣고 싶은 뮤지션' 설문조사에서 마이클은 비틀즈, 이글스에 이어 3위에 올랐다.[58] 유튜브가 매주 집계하는 인기 아티스트 차트 그리고 스포티파이 Monthly Listners 항목 참고. 2022년 8월 기준 누적 스트리밍 횟수는 유튜브에서 마이클이 111억 이상으로 전체 뮤지션들 중에서 44위에 해당하고, 스포티파이에서는 96억 이상으로 69위에 해당한다. 구독자수는 유튜브에서 2400만대로 전체 음악 채널 중 37위이고, 스포티파이는 2,380만대로 44위이다.[59] 2021년 8월 기준 틱톡에서 #Michael Jackson 해시태그가 달린 영상들의 총 조회수가 90억회가 넘는데 이는 테일러 스위프트와 비슷한 수준이다.[60] <Mediatraffic>에 의하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림 앨범 순위에서 Thriller 앨범이 6,600만 장으로 1위, Bad 앨범이 3,500만 장으로 10위, Dangerous 앨범이 3,200만 장으로 16위, Off the Wall 앨범과 HIStory 앨범이 2,000만 장으로 나란히 70위, 71위에 랭크됐다.[61] 1위 데이비드 보위(65%), 2위 비틀즈(61%), 3위 (59%), 4위 엘비스 프레슬리(58%), 5위 마이클 잭슨(58%)[62] 중국 자국 연예인들까지 포함한 종합 순위에서도 마이클이 100위 안에는 거의 매주 들어가 있다.[63] 출처 참고. 브라질,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칠레, 멕시코, 캐나다, 호주[64] 1위는 스페인 가수 Julio Iglesias[65] 1996년 마이클이 They Don't Care About Us 뮤직비디오를 리우데자네이루 Dona Marta 지역에서 찍었는데 당시엔 마약범죄로 심각한 골머리를 앓고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뮤직비디오 촬영 과정에서 마이클이 보여준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과 선행, 그리고 뮤직비디오가 방송에 나간 후 높아진 도시에 대한 관심으로 오늘날 마약범죄에서 자유로운 안전한 도시로 변했고 여기에 마이클의 공로가 컸다고 판단하여 동상을 세웠다고 한다.[66]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 순위는 아티스트들간의 우열을 내림차순으로 정리한 순위가 아니다. 순위를 보면 80년대와 90년대를 대표하는 아티스트들의 순위는 최고가 20위권~30위권대이다. 이 말은 즉슨 80년대와 90년대가 긴 록앤롤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음악적 영향력이 50~70년대 록앤롤 시대를 만든 선구자 아티스트들보다 낮다는 것으로 롤링 스톤 평론가(엄밀히 말해 다 평론가는 아니다, 롤링 스톤은 업계 관계자들에게 투표하라고 했다고 소개했었다.)들은 평가했다는 것이다. 즉 마이클 잭슨이 80년대 팝의 역사에서 음악 산업을 뒤흔든 위대한 전설 중 한 명이 됐지만 그 영향력이 선대 로큰롤 선구자들과 비교하면 로큰롤 음악사에서 가지는 영향력은 낮다고 본 것이다.[67] 이 외에도 위대한 ~ 시리즈를 몇 차례 더 뽑았는데 롤링 스톤의 이런 순위들은 당연하게도 위의 설명한 것처럼 로큰롤 역사 관점에서 본 것이기 때문에 50~70년대 로큰롤을 확립한 선구자들이 높은 순위를 차지한다. 여기서 SInger는 좀 더 목소리, 보컬로서의 의미를 둔 것인데 가창력 순위는 절대 아니니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68] 영상 제목에는 "자신의 아이를 "흔들었다""로 표기되어있으나 실제로는 자신의 아이를 발코니 밖으로 살짝 내민 것이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