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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진/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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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성 라이온즈 1기 시절
1.1. 1995년1.2. 1996년1.3. 1997년
2. 롯데 자이언츠 1기 시절
2.1. 1997년~2000년2.2. 2001년2.3. 2002년2.4. 2003년2.5. 2004년
3. 삼성 라이온즈 2기 시절
3.1. 2004년3.2. 2005년3.3. 2006년
4. 롯데 자이언츠 2기 시절5. LG 트윈스 시절

1. 삼성 라이온즈 1기 시절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40214105825548.jpg
(출처 : 포토로)
초기에 입단했던 삼성 라이온즈 1기 시절

1.1. 1995년

경남고등학교단국대학교를 졸업하고 삼성 라이온즈에 신고선수로 입단했다. 연습생이었지만 입단 첫 해인 1995년 6월 1군에 등록되어 활약했을 정도로 유망주였다. 선발과 불펜 안가리고 전천후로 나와 시즌 최종 27경기 등판(선발 12경기) 72⅔이닝 동안 4승 6패 ERA 4.71을 기록했다.[1]

1.2. 1996년

1996년에는 전년도보다 선발로 등판하기보다 거의 롱릴리프로 나와 23경기 등판(선발 3경기) 57⅔이닝 동안 2승 2패 2세이브 ERA 4.68을 기록했다. 표면상 기록은 썩 눈에 띄지 않았지만 입단 2년차라는 것을 감안하면 성장 가능성은 확실히 보인 1, 2년차였다고 볼 수 있다.

1.3. 1997년

그러다가 1997년 6월 이동수와 함께 김종훈, 박동희를 상대로 고향 팀인 롯데 자이언츠트레이드되었다.[2][3]

2. 롯데 자이언츠 1기 시절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10503192310674G.jpg
(출처 : 포토로)
고향 팀으로 이적한 롯데 자이언츠 1기 시절[4]

2.1. 1997년~2000년

롯데에서 이적한 후 선발투수와 불펜투수를 오가며 1999년 11승으로 최전성기를 누렸다.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승부 중 하나로 꼽히는 1999년 플레이오프에서 MVP로 선정되기도 했다. 특히 플레이오프 6차전의 선발 등판이 발군이었는데, 7회 1사까지 퍼펙트 게임을 이어 나가다가 김종훈에게 볼넷 하나를 내주고 교체되었다.[5]

2.1.1. 2000 시드니 올림픽

1999년의 활약을 바탕으로 2000 시드니 올림픽 야구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벼랑 끝에 몰려있던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선발로 나와 8이닝 무실점 역투를 포함하여 5경기에 등판하는 등 노예역할에 충실하며 맹활약,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국제전(특히 미국, 중남미전) 비밀병기나 다름없는 사이드암 투수 계보의 시작이 되었다.[6] 대한민국의 올림픽 남자 구기종목 두번째 메달[7] 획득한 대표팀에서도 공헌도가 가장 높았던 선수들 중 한 명으로 프로선수가 참가한 1998년 대표팀 이후 처음으로 단일 대회 5경기를 등판한 투수이자, 15⅔을 던지며 가장 많은 이닝[8]을 소화한 투수로 이름을 남겼다. 미국과의 4강전에서 덕 민케비츠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은 것이 유일한 옥에 티.
파일: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화이트 로고.svg
① 2021년 8월 기준 / ② 이닝-연도 순
이름 대회 출전경기 선발등판 불펜등판 이닝 홀드 세이브 탈삼진 ERA
박석진 2000
시드니 올림픽
5 1 [9] 4 15⅔ 2 1 0 0 11K 1.72
정현욱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5 0 5 10⅓ 1 0 1 0 13K 1.74
차우찬 2015
WBSC 프리미어 12
5 0 5 10⅓ 1 0 0 0 13K 0.87
이영하 2019
WBSC 프리미어 12
5 0 5 8⅓ 1 0 0 0 6K 1.08
구대성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5 0 5 8 1 0 0 0 3K 1.18
조상우 2021
도쿄 올림픽
6 0 6 8 1 0 1 0 10K 1.13
윤석민 2008
베이징 올림픽
5 0 5 7⅔ 2 0 0 1 6K 2.35

2.2. 2001년

2001년 구원 투수로 방어율왕에 올랐다. 47경기 출장(선발 11경기)하여 133이닝이닝 동안 44자책으로 ERA 2.98. 하지만 4승 10패 14세이브라는, 이 당시 야구를 못 본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스탯을 기록했다.[10] 이는 박석진의 보직이 시즌 시작때는 선발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2000년 개막전 때도 그렇고 2001년 개막 직후에도 또 등근육통 부상으로 인해 연습량이 부족했음에도 오프스피드볼을 적절하게 쓰면서 타자들의 타이밍을 뺐는 투구가 절정에 올랐었기 때문에 가능한 보직변경 이었다. 심지어 5월 초까지는 무려 ERA 1.77로 압도적인 리그 1위를 하고 있어 이를 조명하는 기사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그러나 6월 들어 삼성과 현대를 상대로 각각 6이닝 4자책, 6⅓이닝 8자책이라는 부진투로 선발 로테이션을 한번 쉬는 와중에 당시 마무리였던 강상수의 부진과 임시 마무리였던 문동환마저 팔꿈치 수술에서 복귀한지 얼마 안되어 연투가 불가능했기에 결국 박석진이 롱릴리프 겸 마무리로 보직이 변경하게 된다.#[11] 이후 마무리로 멀티이닝은 물론 3~4이닝도 투구를 하며 기어코 규정이닝을 넘긴 채 시즌을 마치게 되었다.

전성기 시절 롯데에서 박석진의 존재감은 절대적이었고, 믿을맨(미들맨) 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선발이면 선발, 불펜이면 불펜, 전천후로 투입되었고, 일단 투입 되면 반드시 제 몫을 해내는 투수. 길지 않은 전성기였지만, 그 시기만큼은 롯데팬과 삼성팬이 국내 최고 옆구리 투수로 박석진과 임창용을 각각 내세우며 다투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었을 정도.[12]

2.3. 2002년

하지만 2000년부터 시작된 부상을 관리하며 투구해야 되었음에도 당시 롯데 투수진 중 박석진 만큼 믿을맨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혹사를 당했고, 이 여파로 인해 2년 동안 1군에서 2⅔이닝밖에 던지지 못했다. 2002년은 개막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하다가 6월 복귀를 시도했으나 팔꿈치 통증을 느껴 결국 시즌 통째로 개점휴업하였다.

2.4. 2003년

2003년도 시즌 초반에는 던지지 못 했고 중반 이상이 지나간 8월에나 겨우 5경기에 2⅔이닝 등판한 것이 전부였다.

2.5. 2004년

2004년에는 6월에서야 1군에 합류했는데 부활에 성공하면서 6월 한 달 동안 14경기 등판 25⅓이닝 동안 2승 1패 ERA 3.20으로 다시 믿을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7월에도 트레이드 직전까지 4경기 동안 9⅓이닝을 소화하면서 단 1점만 내주는 짠물피칭으로 시즌 ERA도 2.60까지 낮추며 승승장구 하던 중 갑작스럽게 트레이드 대상이 되어버렸다.

3. 삼성 라이온즈 2기 시절

파일:200508140805391100_1.jpg
다시 친정 팀으로 돌아온 삼성 라이온즈 2기 시절

3.1. 2004년

2004년 7월 12일, 시즌 도중 김대익과 함께 김승관, 노장진을 상대로 친정 팀인 삼성 라이온즈에 트레이드되어 복귀하게 되었다.[13]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 되고나서 잠시 2군에서 정비할 시간을 가진 후 7월 20일자로 삼성의 계투조로 복귀한 박석진은 김현욱의 노쇠화로 인해 비어버린 사이드암 계투 자리를 도맡아 권오준과 같이 사이드암 불펜으로 활약하며 삼성의 정규시즌 2위에 제 역할을 했고, 플레이오프와 한국시리즈에 총 8경기 등판하여 9⅔이닝를 소화하는 등 굳건한 모습을 보였다.

3.2. 2005년

2005년에는 새로 부임한 선동열 감독의 불펜 야구의 핵심 요원으로써 무려 70경기에 등판하여 62⅓이닝을 소화했고 8승 1세이브 15홀드 ERA 3.47로 팀의 정규시즌 1위 등극에 공헌을 했으며 한국시리즈 우승도 맛보게 되었다.

3.3. 2006년

그러나 전 해의 혹사 여파였는지 2006년에는 등판할 때마다 피안타를 허용하는 불안한 피칭이 계속되었고[14] 7월 초 다시 1군에 복귀했으나 불안불안한 피칭은 여전하더니 결국 7월 16일 롯데전에서 1이닝 동안 무려 6피안타 2사구 5실점의 피칭으로 완전히 눈 밖에 나버리면서 승리조에서 추격조로 격하당하기에 이른다. 해당 경기 이후 또 한 달 동안 2군에 있다가 8월 말 경 복귀한 이후로는 시즌 끝까지 1군에는 있었으나 대망의 한국시리즈의 엔트리에 승선하지 못하면서 팀의 한국시리즈 2연패를 함께하지는 못했다. 이미 권오준이 성장하여 사이드암 필승조 자리를 대신했기 때문.

결국 2006년 11월 24일, 박석진은 라형진과 함께 보류 선수 명단에서 제외 되었고, 자유계약선수로 풀리게 되었다. 선동열 감독이 더 이상 두 투수들을 기용하지 않을 것이며, 잡아둘 이유가 없다고 함에 따라 본인이 직접 방출 요구를 했고, 프런트는 비슷한 처지였던 강영식처럼 타선 보강을 위한 트레이드 카드로라도 쓰려 했으나 당시 우승 2번을 한 선 감독의 파워나 입김이 워낙 강해 그러지 못했다고 한다.#

4. 롯데 자이언츠 2기 시절

파일:박석진 롯데 2기 시절.png
(출처 : 포토로)
푸대접받고 세 번 다시 오지 못할 롯데 자이언츠 2기 시절

결국 방출된 이후 2007년 롯데에 자유계약선수로 입단했다. 연봉은 그 동안의 성과를 기반으로 책정된 1억 5천만원. 하지만 문제는 롯데에도 자리가 없었다. 전투경찰에서 제대한 임경완, 2005년 1차 지명으로 데려온 이왕기, 2006년 2차 1라운드에서 지명한 나승현과 4라운드에서 지명한 배장호 등의 젊은 사이드암 투수들에게 밀려 크게 기회를 잡지 못했다. 결국 2007 시즌 중 최길성, 최만호를 상대로 손인호[15]와 함께 LG 트윈스트레이드되었다.[16]

5. LG 트윈스 시절

파일:박석진 LG 시절.png
(출처 : 포토로)
LG 트윈스 시절

하지만 예전의 기량을 회복하지 못한 채 2008년에는 평균자책점 36.00을 찍은 후 웨이버 공시되었다.

그렇게 삼성과 롯데를 오가면서 선수 생활을 했던 그는 LG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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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탯티즈에서 제공하는 FIP는 3.59로 리그 평균 이상이었다. WAR은 0.83[2] 당시 트레이드의 메인은 이승엽, 김한수에게 밀려 백업이 된 이동수, 그리고 부상으로 몰락한 한때 롯데의 에이스였던 박동희였는데, 정작 이동수는 롯데에서도 실패해 쌍방울로 갔고, 박동희는 노쇠화+부상의 여파로 불만지르다가 2002년 쓸쓸히 은퇴했다.[3] 그리고 이런 네임벨류가 있는 선수들과 묶여서 이적한 박석진은 롯데의 필승조로 1999~2001년에 좋은 활약을 했고, 김종훈은 2007년까지 주전과 백업을 오가며 전천후 외야수로 잘 해주었다.[4] 2001 시즌이다. 모자에 쓰인 20번은 경기 중에 갑작스럽게 쓰러져 투병했던 임수혁의 등번호.[5] 아이러니하게도 김종훈과 박석진은 1997년 삼성과 롯데가 맞트레이드를 단행할 때 서로 맞바뀐 선수들이다.[6] 시드니 올림픽 당시 대표팀 엔트리에 든 사이드암 투수는 박석진, 임창용, 정대현 이 세 명이었다. 이 셋은 당시 대표팀에서 일본 외 나라들과의 대결에서 생소한 투구폼의 특징 덕에 쏠쏠히 기용되었고 특히 박석진과 정대현은 선발로도 나서 역투했을 정도.[7] 여자 구기종목의 경우 1976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배구 대표팀이 동메달을 따내며 한국 최초의 올림픽 구기종목 첫 메달을 목에 걸었고, 1984 LA 올림픽에서 농구 대표팀이 은메달을, 1988 서울 올림픽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핸드볼 대표팀이 2연속 금메달을 획득했었던 반면 남자 구기종목의 경우 1988 서울 올림픽에서 핸드볼 대표팀의 은메달 이후 올림픽 메달이 하나도 없었다가 2000 시드니 올림픽에 와서야 야구대표팀이 동메달을 따냈다.[8] 네덜란드 선발 전을 빼면 순수 불펜 등판은 4경기 7⅔이닝.[9] 네덜란드전에서 선발 등판해 8이닝을 던졌다.[10] 참고로 다승왕은 같은 팀 동료 손민한. 펠릭스 호세가 출루율 0.501로 신기록을 세웠던 해이기도 하다. 방어율왕이 10패를 한 것을 보면 엄청난 물타선 같아보이지만 당시 롯데의 팀타율은 0.280으로 8개 구단 중 전체 1위.[11] 선발로는 총 68⅓이닝 동안 4승 4패 ERA 3.29를 기록했다.[12] 99년 플레이오프 혈투 이후 롯데-삼성 팬들 간에 이런저런 다툼이 많았다. 박석진-임창용 외에 호세-이승엽도 주된 떡밥이었다.[13] 박석진이 트레이드 시장에 나온 것은 당시 롯데 팀 사정이 있었다. 2004년 양상문이 롯데 감독으로 부임하기 전 롯데 투수진은 말그대로 처참했는데, 롯데의 좌완 에이스였던 주형광은 2001년부터 팔꿈치 부상에 시달리다가 수술 후 어찌어찌 복귀하였으나, 다시는 선발로 뛰지 못하고 불펜으로 뛰며 부진한 모습을 보이다가 무려 만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은퇴했고, 손민한도 2001년 다승왕에 오른 뒤 2002~2003년은 백인천과의 불화로 폭망하나 싶었다. 그나마 양상문 체제에서 마무리 투수로 변신하지만 정작 시원찮았다는게 문제. 그리고 박석진과 같이 필승조였던 외국인 투수 에밀리아노 기론도 혹사의 여파로 2001년 초 방출되어 롯데를 떠났으며, 강상수가 하락세를 타면서 불상수로 전락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그나마 남은 박지철이나 염종석이 선발진을 지켰고, 가득염, 김영수 같은 불펜 투수들은 방화를 일삼으며 팬들의 눈을 썩게했다. 그 와중에도 2002년 2차 1픽 투수인 좌완 유망주 고효준이 백인천 감독의 판단 때문에 바로 방출되었는데 이 고효준이 바로 SK로 입단하면서 조공한 꼴이 되어버린 것은 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무리 공백으로 골머리를 썩던 롯데는 트레이드를 통해 노장진을 데려와서 마무리를 확보하고, 임시 마무리였던 손민한을 다시 선발로 전환시킬 수 있었다.[14] 어느정도였냐 하면 4월 4경기와 5월 2경기에서 총 3⅔이닝 동안 무려 10피안타를 허용하는 투구로 선동열 감독의 믿음을 꺾이게 할 정도였다.[15] 손인호는 이승화정수근에 밀려 자리를 잡지 못한 상황이었다.[16] 당시 LG는 박용택, 이대형, 안치용과 같은 젊은 외야수들이 있어 최만호는 백업정도에 그쳤다. 그리고 최길성도 같은 2군 본즈박병호, 정의윤 등의 거포 유망주들이 있었던 데다가 본인이 1군만 오면 조급증이라도 있는지 부진했던지라 LG에서는 터지지 않던 유망주였다. 반면 LG는 방화신기로 대표되는 약한 계투진이 있었기에 박석진이 필요했고, 좌타자가 부족했기 때문에 손인호까지 영입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