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토회 수사(남자 수도자)들.
베네딕토회 수녀(여자 수도자)들.
1. 개요
베네딕도는 오늘날 "서방의 아버지"라는 유일무이한 경칭을 얻었다. 실제로 서방의 그리스도교는 베네딕도 수도제도의 형성 없이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역사적으로 발전하였다. ... 베네딕도는 (교육에 적대적이었던 이전의 수도원 생활방식과 달리) 완전한 수도제도를 위해 학문과 지적 활동을 강조하면서 규칙서 안에 이러한 내용을 실었다.
......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서가 가장 성공적인 수도서가 된 반면,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서와 이전의 다른 수도서들이 그렇지 못한 근본 이유는 베네딕도 수도서처럼 인간에 대한 깊은 깨달음, 비판적으로 숙고된 체험, 여기서 귀착되는 적절한 균형, 동시대적 적응력을 바탕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Hubertus R. Drobner 지음, 하성수 번역, 《교부학》Lehrbuch der Patrologie 633-637쪽.
......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서가 가장 성공적인 수도서가 된 반면,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서와 이전의 다른 수도서들이 그렇지 못한 근본 이유는 베네딕도 수도서처럼 인간에 대한 깊은 깨달음, 비판적으로 숙고된 체험, 여기서 귀착되는 적절한 균형, 동시대적 적응력을 바탕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Hubertus R. Drobner 지음, 하성수 번역, 《교부학》Lehrbuch der Patrologie 633-637쪽.
1964년 10월 24일 교황 바오로 6세는 성 베네딕도를 "구라파의 주보"(Patronus Europae)로 선포하고 7월 11일을 그 축일로 제정하였다. 이보다 앞서 성 베네딕도는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 그리고 "기술자와 건축가와 개간자들의 주보"로 불리고 있다. 그에게 붙여진 이러한 여러가지 명칭은 그의 생애에도 근거하지만 특히 그의 규칙서를 지키며 그를 사부로 모시는 후대의 제자들이 역사 안에 이루어놓은 업적에 근거하고 있다. 로마 제국의 문화가 야만족의 침입으로 인해 붕괴되고 와해되는 혼란한 시기에 "기도하고 일하는"(Ora et labora) 베네딕도 수도자들이 문화 유산을 보존하였으며, 정치적인 안정을 되찾은 구라파에 문화를 발전시키고 꽃피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의 규칙서는 12세기까지 서방교회의 대부분의 수도원들에서 지켜졌으며, 그후에도 서방교회의 수도생활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이형우 번역, 《베네딕도 수도규칙》 해제, 20쪽
Ordo Sancti Benedicti-이형우 번역, 《베네딕도 수도규칙》 해제, 20쪽
O.S.B.
이탈리아어: Ordine di San Benedetto
독일어: Benediktinerorden
영어: Order of Saint Benedict
수도규칙 열람: #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토가 쓴 베네딕토 규칙서를 따르는 그리스도교의 수도회. 약칭 OSB. 사실 정확한 한국어 명칭은 베네딕'도'가 들어간다. 국내 한정으로 '베네딕토'를 한자로 음차하여 '분도'(芬道)라고도 하기 때문에, 베네딕토회를 '분도회'라고 하기도 한다. 연합회의 모토는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
서양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수도회인데, "중세 초기의 혼란기에 수도원들이 서구 문명을 보존" 어쩌고 하는 흔히 들어봤을 법한 설명에 등장하는 그 수도원들이 바로 베네딕도회이다. 비록 베네딕도회가 최초의 수도자들도,[1] 최초의 공주(共住)[2] 수도자들도,[3] 최초의 서방 수도자들도[4] 아니었지만 베네딕도는 선배 수도자들의 시행착오를 종합하여 중용을 갖춘 《수도규칙》을 저술했으며, 이는 12세기까지 서방의 수도규칙을 거의 통일하다시피 했고 이후에도 수도생활의 기초가 되었다.[5] 1000년 넘게 이어가고 다른 수도회에도 최중요 참고서가 되어줄 중용의 규칙을 입법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고려한다면, 베네딕도 수도규칙의 위대함을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베네딕도회는 브리타니아와 북유럽의 게르만족 대상 선교 과업을 수행함으로써, 신흥 민족들을 그리스도교화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이 수도회는 정주 서원을 하고 소속 수도자는 수도승이라고 불린다. 여자는 수녀승. 그러나 활동수녀회는 베네딕토 규칙서를 사용하더라도 수녀승이 아닌 수녀라고 불린다. 기본적으로 베네딕토회는 정주와 봉쇄가 기본이지만 연합회의 성격에 따라 변화된 곳도 있다. 대표적으로 한국에서 유명한 왜관수도원과 툿찡수도원이 속한 선교 베네딕토회라고 불리는 오틸리아 연합회가 그러하다. 올리베따노라고 불리는 몬떼올리베또 성 마리아 연합회에 속한 수도원들도 시대적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다고 적시했다.
베네딕도회는 다른 수도회들과는 달리 중앙집권적인 구조가 아니라 여러 개별 수도원들이 하나의 울타리 안에 옹기종기 모인 형태이다. 물론 이 개별 수도원들이 묶인 베네딕토회 연합회가 로마에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스위스 연방정부 같은 느낌. 베네딕토 규칙서만 따르면 베네딕토회라고 칭하는 아주 느슨한 구조라, 성공회에도 베네딕토회가 있다. 다만 연합회에는 소속되지 않았다.
중세 서방교회에서 베네딕토회가 모든 서방 수도회의 모범이 되면서, 베네딕토회는 아니어도 베네딕토 규칙서를 따르는 수도회들도 생겼다. 시토회[6], 트라피스트회 등이 '베네딕토 규칙서를 따르긴 해도 베네딕토회는 아닌' 수도회로서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아울러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의 왜관 대수도원장(아빠스 Abbas/ 영 Abbot/ 독 Abt)은 한국 가톨릭의 유일한 자치수도원구장 서리를 맡고 있다. 그밖에 분도출판사 본사와 서울 분원이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에 있지만, 대로변에서 벗어난 주택가에 자리잡아 수도분원이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이 수도회의 이름을 딴 술도 있다. 항목 참조.
한국 전쟁 중 흥남 철수 당시 피난민들을 싣고 남쪽으로 내려온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제너드 라루 선장은, 전쟁 후 베네딕토회에 입회하여 수도자가 되었고, '마리노'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마리노 수사는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고, 2001년 사망했다. 그 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고, 마리노 수사가 지내던 미국 베네딕토회 수도원이 경영난으로 폐쇄되려는 것을 한국 왜관 베네딕토회 수도원에서 복구했다. 이 이야기는 소설가 공지영 마리아의 장편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의 모티브 및 소재가 되기도 했다.[7]
여담으로 해당 수도회가 있는 산토 도밍고 데 사일로 수도원에서 1995년에 발매한 앨범에 있는 성가 중 하나가 언더테이커의 드루이드들의 등장곡으로 쓰였다.
2. 대한민국에서
한국의 천주교 교구 | |
서울관구 | 서울 · 인천 · 수원 · 의정부 · 춘천 · 원주 · 대전 · 평양† · 함흥† |
대구관구 | 대구 · 부산 · 안동 · 마산 · 청주 |
광주관구 | 광주 · 전주 · 제주 |
교황청 직속 | 군종 · 덕원자치수도원† |
※ 밑줄: 대교구 ※ 위 첨자†: 침묵의 교회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의 오딜리아 연합회 소속 성 마오로-쁠라치도 대수도원 전경.
대한민국에서는 가장 먼저 세계 선교(특히 동아시아)를 위해 1884년 독일 보이론(Beuron) 수도원의 수도승이었던 안드레아스 암라인(Andreas Amrhein) 신부에 의해 독일에서 창설된 오딜리아 연합회가 경성부 백동이라고 불리던 서울 혜화동(현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상트 오틸리엔 베네딕도회는 숭신학교(사범학교), 숭공학교(기술학교) 등을 운영했다. 숭신학교는 2년 만에 폐교했고, 숭공학교가 그래도 10여 년 가까이 존속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여파와 교구 분할 등의 이유로 오딜리아 베네딕도회는 1927년 서울에서 완전히 떠나 함경남도 덕원-원산 지역으로 향했으며, 덕원을 포함한 북부 지방과 간도에서 활동하였으나, 8.15 광복과 6.25 전쟁을 겪으면서 일부 남쪽으로 옮겨왔다. 북한에 남아있던 수도자들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되었고, 덕원에 있던 대수도원과 신학교 건물은 '원산농업대학'으로 용도가 변경되어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6.25 전쟁 중에 불에 탄 대수도원은 없어졌다.
남자 수도회로는 현재 독일 오딜리아 연합회[8]와 이탈리아 올리베따노 연합회[9] 2곳이 국내에 진출해 있다.
여자 수도회도 두 회가 국내에 진출해 있는데, 하나는 부산광역시에 본원이 있는 올리베따노의 성 베네딕도 수녀회, 하나는 대구광역시와 서울특별시에 있는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툿찡 분도회라고도 부름). 2곳 모두 병원을 운영하고, 군종교구 본당에 수도자를 파견한다.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 시인으로 유명한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가 소속된 곳이다.
- 까말돌리(카말돌리) 수도회 - 로무알도 성인이 1012년 설립한, 최초의 은수 수도회. 1450년부터 천연재료로 약품, 화장품, 와인, 식료품 등을 만들어 보급하는 사도직을 했다. 1831년 9월 9일 조선대목구를 설정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이 수도회 출신이기도 하다.# 2016년 한국에 진출했으며, 명동성당 앞 가톨릭회관 2층에 전통 약방을 열었다.# 화장품도 비싸지만 품질이 좋다.
이 외에도 베네딕토회는 아니지만 엄률 시토회(일명 트라피스트 수녀회)가 베네딕토 규칙서를 사용하는 수도 공동체이다.
3. 기도하며 일하는 수도 활동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는 모토가 있어, 모든 수도자들은 열외 없이 1가지 이상 노동에 종사한다.여기서는 왜관 수도원의 노동들에 대해 설명한다. 대표적으로 출판사업인 분도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분도출판사의 노동 이외는 그야말로 육체노동이 대부분이다. 왜관 수도원 내부에 농장이 있어 농업을 맡은 수사님들이 직접 농사를 짓고 있으며, 공방에서 미사나 기도에 쓰일 밀랍초, 성물 등을 제작하는 수사님들도 있다. 이처럼 직접 제작한 성물의 경우 가격이 비싸지만 품질은 우수하며, 분도출판사 유통망을 통해 성물도 같이 공급되고 있다.
아울러 왜관 수도원에 가구 공방도 존재하며, 성당에 쓰이는 가구도 직접 제작하며 유통한다. 제대에서부터 긴 의자[10] 등 성당에 쓰이는 모든 가구를 생산 중이다. 이 역시 굉장한 수준을 자랑한다.
또한 정통 독일식 수제 소시지인 분도소시지를 제작하는 곳이기도 하다. 한 번만이라도 먹어본 사람은 다같이 칭송할 수준의 명품 수제 소시지이다. 유래는 1909년 독일에서 오신 독일인 수사님들이, 고향에서 먹던 소시지가 그리워 직접 소시지를 만들던 것이 지금까지 내려오는 것. 이후 한국인 수사님들이 독일에 자리한 수도원으로 소시지 제조 방법을 전수받으러 유학까지 갔다와서 정통 독일식 소시지 제조법 그대로 만들고 있다. 전분이나 대두단백 등을 일절 섞지 않고, HACCP 인증도 받는다. 전통 독일 방식으로 제작되는 수제이기에 가격이 비싸긴 하지만 먹어본 사람들에게는 평이 굉장히 좋다. 최근에는 일반 유통사에도 납품하고 있어, 네이버 페이 등지에서 관련 검색어로 검색하면 택배로 받아볼 수 있다. 명동성당 앞 가톨릭회관 1층 분도출판사에서 판매하니, 궁금한 사람은 구매해서 먹어보자.
2017년 하반기부터 홈페이지가 오픈해, 3만원 이상이면 택배로도 배달 가능하다. 분도식품 홈페이지 참고로 원래 소시지는 수도원 내에서 만들었으나, 법인화하면서 수도원 옆 농어촌 공사 뒷편에 공장을 새로 지은 후에는 그곳에서 생산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노동에 종사해야 하는 수도 규율 아래 생산된 상품들이기에, 대부분 수제 혹은 정통 제조방식대로 만들고 있다. 그렇기에 값은 굉장히 비싸지만 맛과 품질은 반드시 보장되는 것이 특징이다.
4. 수도생활 체험학교
다른 남녀 수도회들처럼, 베네딕토회도 성소자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수도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수도자가 되길 원하는 청소년/청년들을 위한 모임이다. 또한 베네딕토회 왜관수도원에서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여름과 겨울에 '수도생활 체험학교'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수도원에 2박 3일~3박 4일간 머무르며 기도, 미사, 성무일도, 노동 등 수도원 생활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이다. 남자 수도원이지만 여자 청년들도 참가가 가능하며, 가톨릭 신자가 아니더라도 참가할 수 있다. 실제로 개신교 신자들도 꽤 참가하는 듯.
5. 관련 문서
[1] 시대적으로 이집트의 성 안토니오 등 이집트 은수자들이 앞선다.[2] 사막이나 동굴 등에서 혼자 생활하던 은수자들과 달리, 수도원에서 집단으로 생활함을 의미.[3] 최초의 공주 수도생활은 이집트의 성 파코미우스(Pachomius, 290?-346/347년)가 창시하였다.[4] 서방 안으로 한정하더라도, 아우구스티누스가 베네딕도보다 먼저 공주 수도생활을 하였다.[5] 이는 위대한 교부이자 베네딕도보다 앞서서 수도생활을 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수도규칙도 누리지 못했던 명예이다.[6] 1, 2, 3, 4, 6으로 0부터 9999까지 표기 가능한 숫자를 발명하기도 했다.[7] 주인공 정 요한 신부의 할머니가 흥남 철수 때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남쪽으로 피난 왔으며,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 정 신부의 아버지가 태어났다. 훗날 정 요한은 베네딕토회에 입회하여 수도사제가 되었고, 미국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복구하는 일에 참여하게 된다.[8] 경상북도 칠곡군의 성 마오로-쁠라치도 대수도원(왜관수도원)이 모원이다.[9] 경상남도 고성군의 성 베르나르도 똘로메이 대수도원이 모원이다.[10] 교회에 있는 신자들이 앉는 길다란 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