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ujahrskonzert der Wiener Philharmoniker
영어: New Year's Concert of Vienna Philharmonic Orchestra
프랑스어: Le Concert du nouvel an de l'Orchestre philharmonique de Vienne
그 유명한 "2014 빈필 신년음악회 라데츠키 행진곡 박수". 지휘자는 다니엘 바렌보임
라데츠키 행진곡을 하지 않고 퇴장하는가 싶더니, 돌아와 모든 단원과 악수를 시작, 그리고 라데츠키 행진곡!
1. 개요
공식명칭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Neujahrskonzert der Wiener Philharmoniker)로, 매년 빈 무지크페라인에서 1월 1일 정오에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요제프 슈트라우스,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 등 빈 출신 작곡가들이 작곡한 왈츠와 폴카, 행진곡, 서곡 등을 연주하는 가벼운 콘서트다.하지만 공연 끝나고 며칠 지나 CD가, 1주 뒤에는 DVD가 음반 매장에 쫙 깔릴 정도의 대인기를 자랑하며, 입장권 구하기도 전세계의 클래식 음악회들 중 가장 어려운 퀘스트로 손꼽힌다. 때문에, 원래 전전날(30일)[1]과 전날(31일) 진행하던 리허설을 조금 손봐서 각각 '프리뷰 콘서트'와 '이브 콘서트'로 격상하여 진행하지만, 이 티켓들도 구하기 어렵긴 마찬가지다.
평소와는 다르게 빈 음악협회 황금홀을 이탈리아의 산 레모(1980~2013), 빈 시립 정원들(2014~) 등에서 조달한 수많은 꽃들로 장식하고, 일반 음악회에서는 보기 힘든 여러가지
보통 음악회가 저녁 시간에 있는 것에 비해 오전 11시 15분에 열리는 음악회로서 꽃들과 함께 화사한 영상을 보여준다. 또한 텔레비전 중계 때는 공연 전에 미리 촬영해 놓은 빈 국립오페라 발레단의 발레를 함께 볼 수 있고, 2008년부터는 그 발레 단원이 공연장으로 난입(...)하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다. 명성이 예전만 못하다는 소리를 종종 듣지만, 클래식 시장이 전반적으로 침체기임을 생각할 때 여전히 상업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상품임에는 틀림없다.
2. 역사
1939년 송년음악회(12월 31일)로 시작되어 1941년부터 매년 1월 1일 열리고 있다. 시기가 시기였던 만큼 당시 나치 독일의 입김이 있었다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으며, 결국 빈 필 측도 이것을 연구한 음악학자 올리버 라트콜브의 논문을 자신들의 홈페이지에 올려 이 공연의 시작 역시 빈 필의 나치 시대 부역 행위와 함께 나치 정권의 개입이 있었다는 것을 사실상 인정했다. 논문 전문(pdf 파일) 실제로 이 전통의 시발점이 된 1939년 송년음악회는 당시 히틀러 유겐트의 최고 지도자이자 빈 대관구장(Gauleiter)이었던 나치 고위 관료 발두어 폰 시라흐의 지시에 따라 전쟁의 겨울 구호(Kriegswinterhilfswerk) 일환으로 개최된 관제 자선 공연이었다. 다만 이 음악회에서 슈트라우스 일가의 작품들 외에 나치 찬양 작품들은 일절 연주되지 않았고, 또 전후에도 큰 잡음 없이 계속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시작은 좀 구질구질했지만 악단의 전통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은 여전하다.1939년부터 1954년까지의 공연 지휘는 주로 클레멘스 크라우스(Clemens Krauss)가 맡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인 1946년과 1947년에는 크라우스를 비롯한 다수의 독일/오스트리아 지휘자들이 나치 부역 행위에 대한 연합군 군정 당국의 제재 조치의 일환으로 공연 활동 금지를 당했기 때문에, 전쟁 중 유대인 아버지를 뒀다는 이유로 활동 금지를 당하고 유고슬라비아에서 종전 때까지 식품 공장 노동자로 강제 징용되었던 요제프 크립스가 대타로 음악회를 지휘했다.
1954년 클레멘스 크라우스가 자신의 마지막 신년음악회를 지휘한 뒤 그 해 5월 16일 멕시코 시티에서 급사하자, 빈 필은 후임 지휘자로 놀랍게도 전문 지휘자가 아닌 악단의 악장(콘서트마스터)이었던 빌리 보스콥스키(Willi Boskovsky)를 선정했다. 보스콥스키는 생전에 슈트라우스가 했던 대로 지휘대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지휘하던 포어가이거[2] 방식을 재현했고, 1955년부터 1979년까지 무려 25회의 신년음악회를 지휘해 역대 최다 출연 지휘자가 되었다. 이 기록은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아울러 빈 필이 전속 계약을 맺고 있던 음반사 데카에서 매년 신년음악회 준비와 병행해 여러 음반을 녹음했고, 10여종의 빈 왈츠, 폴카 음반이 발매되어 빈 왈츠가 보급되는데 크게 기여했다. 1974년에는 빈 신년음악회 실황영상물을 녹화하기도 했고, 1979년 신년음악회는 라이브 녹음으로 발매되었다.
보스콥스키가 1979년에 정년과 건강 문제를 이유로 빈 필에서 은퇴한 후 1980년부터 1986년까지는 빈 국립가극장 음악감독으로 새로 취임한 로린 마젤이 지휘를 맡았다. 로린 마젤 역시 수준급의 바이올린 실력을 지녔기 때문에 지휘대에서 자주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지휘하는 전통을 이어갔다. 다만 보스콥스키에 비해서는 지휘봉을 사용하는 빈도가 훨씬 높았다. 어쨌거나 이후 현재까지도 신년음악회 무대에서 이러한 포어가이거 전통을 보여준 지휘자는 보스콥스키와 마젤 뿐이다.
마젤의 빈 국립가극장 음악감독 임기가 끝난 후, 1987년부터는 매년 지휘자를 바꿔가며 무대에 세우고 있는데, 그 첫 번째 주자로 놀랍게도 라이벌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이기도 한 세기의 거장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선정하면서 큰 화제를 모았다.[3] 카라얀은 거의 관현악 버전으로만 연주되던 봄의 소리 왈츠에 소프라노 캐슬린 배틀(Kathleen Battle)을 기용하여 오리지널 버전으로 연주하여 큰 반향을 얻기도 했다. 캐슬린 배틀은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에 초청된 최초의 협연자였다. 카라얀이 지휘하는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는 1987년 단 한 번 성사되었다.
카라얀의 다음 타자는 로린 마젤의 후임으로 빈 국립오페라극장의 음악 감독이 된 클라우디오 아바도였다. 아바도는 1988년 신년음악회 이후 1991년 신년음악회도 지휘했는데, 1991년에는 모차르트 서거 200주년 기념으로 모차르트의 작품 3곡과 함께 로시니나 슈베르트, 비제 등 빈 신년음악회의 전통에서 꽤 벗어난 곡들을 대거 선곡해서 논란을 빚기도 했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곡 2곡을 오케스트라곡으로 편곡해서 연주하기까지 했다. 결국 1991년 신년음악회는 아바도에게는 마지막 무대가 되었다.
1989년에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오페레타 박쥐 1975년 레코딩으로 유명해진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등장했다.[4] 1992년에는 원래 레너드 번스타인이 내정되어 있었지만, 번스타인이 1990년 10월 18일 폐기종으로 세상을 떠난 바람에, 빈 필은 번스타인의 대타로 클라이버를 다시 한 번 초빙했다.
이후 1990년대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는 주로 로린 마젤(지휘자를 매년 선정하는 방식으로 전환한 후에는 1994년 최초 초빙), 주빈 메타(1990년 최초 초빙), 리카르도 무티(1993년 최초 초빙) 3인방(일명 3M)이 로테이션을 돌며 신년음악회를 지휘했다.
2000년대 초반 잠깐 새로운 얼굴들이 등장했는데, 시대연주 쪽에서 거장으로 손꼽히던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2001년과 2003년)와 빈 국립오페라극장의 신임 음악 감독이 되었던 오자와 세이지(2002년)였다. 하지만 이 둘은 빈 왈츠에 녹아들지 못했다는 평가와 함께 단발성 출연에 그치고 말았다. 결국 아르농쿠르와 오자와 이후 2004년부터는 기존 3인방인 마젤, 메타, 무티가 다시 전면에 재등장했다.
2000년대 후반부터는 다시 새로운 얼굴들이 등장하는데, 빈 필 정기연주회 지휘자로 활동하던 마리스 얀손스(2006년), 다니엘 바렌보임(2009년)이 새로 합류했으며, 빈 국립오페라를 정기적으로 지휘하고 있으며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객원지휘자를 역임하여 오스트리아 빈 시민들에게 친숙한 조르주 프레트르(2008년과 2010년)도 초빙되었는데, 2008년 당시 프레트르는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 역사상 최고령 지휘자로 선정되어 화제가 되었다. 2011년에는 새로 빈 국립오페라 음악감독에 취임한 오스트리아 출신 프란츠 벨저-뫼스트가 초빙되었다. 얀손스(2006-2012-2016), 바렌보임(2009-2014-2022), 봘저-뫼스트(2011-2013-2023) 등 3명은 비엔나 현지에서의 반응이 매우 좋았어서, 모두 총 3회씩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에 초빙되었고, 얀손스는 2019년 12월 1일 세상을 떠나면서 2016년이 그의 마지막 신년음악회 지휘가 되었다.
2017년부터는 다시 새로운 얼굴들이 합류하는데, 구스타보 두다멜(2017년)에 이어 크리스티안 틸레만(2019년)과 안드리스 넬슨스(2020년)가 차례로 초청되었다.
2021년 음악회에는 리카르도 무티가 2018년에 이어 6번째로 초청되었고,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세계 대유행의 영향으로 역대 신년음악회 사상 처음으로 관객 없이 열렸다. 오스트리아는 물론 세계 각국에서 사전에 신청한 관객들에 한해 온라인 실시간 화상 관람이 이뤄진 것으로 보이며 관객의 박수 소리는 녹음된 채로 재생됐다. 다만 현장 관객이 없는 탓에 지휘자 리카르도 무티는 관례와 달리 객석이 아닌 연주자들을 보고 라데츠키 행진곡을 지휘했으며 박수도 없었다.
2022년 신년음악회부터는 다시 관객이 입장한 가운데 다니엘 바렌보임의 3번째 초청으로 열렸고, 2023년 신년음악회는 프란츠 벨저 뫼스트가 다시 지휘자로 초대됐다. 2024년에는 2019년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 지휘를 맡았던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다시 한 번 지휘봉을 잡을 예정이다.
3. 특징
연주 중에 재미있는 이벤트가 많은데, 이를 테면 상술했듯이 지휘자의 바이올린 연주, 나팔(경적) 취주나 철제 모루 타주, 단원들의 연주 중 합창[5], 공포탄 격발, 새해 인사 후 터뜨리는 꽃가루 폭죽과 화환 등이 있다.이런 이벤트는 지휘자의 성향을 많이 타는데, 특히 빈 필에서 잔뼈가 굵은 노장 지휘자들이 이런 이벤트를 많이 즐기는 편이다. 60~70년대의 보스콥스키나 80년대 이후 마젤이 특히 이러한 이벤트가 많았다. 보스콥스키가 지휘봉을 잡던 70년대의 영상을 보면 주로 타악기 단원 프란츠 브로셰크(Franz Broschek, 1919~2008)가 노상강도 갈롭의 강도, 폭발 폴카의 발파공, 불연성 폴카의 대장장이, 기수 폴카의 한량(?) 등으로 코믹 연기를 선보이며 흥을 돋궜다. 보스코프스키를 이어 신년음악회를 맡게 된 마젤 역시 이런 이벤트를 많이 즐겼다. 87년부터 매년 지휘자가 바뀌고 영상물도 발매되기 시작한 후에도 이벤트가 이어졌는데, 87년 카라얀이 천둥과 번개 폴카를 연주했을 때 연주가 끝나자 공포탄이 터졌는데 이에 카라얀이 총에 맞은 듯한 시늉을 한다든가(...) 하는 반응을 보여준 적도 있다. 89년 초청되었을 때 라데츠키 행진곡에서 관중을 보지 않고 지휘해 논란이 일었던 클라이버는 대신 관광열차 폴카에서 직접 경적을(...) 울리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이런 이벤트를 가장 많이 하는 지휘자는 마젤이었다. 다재다능한 천재답게 자신이 주로 타악기를 대신 연주하면서 코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벤트를 즐겼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로 새로 등단하는 지휘자들이 많아지면서 이벤트들이 전반적으로 점잖아(?)지고 있는 추세.
또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개그도 있는데, 2006년에는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의 프랑스풍 폴카 <전화>를 공연했을 때 마지막에 갑자기 지휘자 얀손스의 호주머니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울려서 얀손스가 정색하는 개그를 넣었다. 2008년에는 오스트리아와 스위스가 공동 개최하게 된 유로 2008을 기념해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스포츠 폴카'를 공연할 때는 단원들이 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머플러를 착용하고 연주했는데, 중간에 콘서트마스터 베르너 힝크가 연주를 하다 말고 머플러를 객석에 흔들어보이며 딴청을 피우자 지휘자 프레트르가 옐로 카드를 들어 경고하고 곡이 끝나자 마자 경고를 받은 힝크가 되레 레드 카드를 꺼내 지휘자에게 퇴장 명령을 내리는 개그를 선보였다.
연주곡들도 슈트라우스 일가 외에 슈트라우스 1세의 친구이자 빈 춤곡 스타일의 정립에 큰 역할을 했던 요제프 라너나 슈트라우스 2세와 요제프, 에두아르트의 라이벌이었던 칼 미하엘 치러, 빈 오페레타의 초기 거물 작곡가였던 프란츠 폰 주페의 오페레타 서곡들, 빈 필 바이올린 단원 출신이었던 작곡가이자 지휘자 요제프 헬메스베르거 2세 등의 작품도 종종 오르곤 한다. 이외에도 빈 필 창단자이기도 한 오토 니콜라이의 희극 오페라 <윈저의 명랑한 아낙네들> 서곡도 빈 필 창립 ~5주년이나 ~0주년 때 특별 선곡된다. 선곡은 기본적으로 지휘자와 악단, 빈 슈트라우스 협회 3자 간의 의견 교환으로 이루어지며, 되도록이면 앙코르를 제외한 곡들이 전년도 공연과 겹치지 않도록 하고 그 동안 신년음악회 무대에 오르지 않았던 곡들도 전체 프로그램에서 1/4 정도가 되도록 추가하는 것이 보통이다. 다만 1987년의 경우 카라얀이 워낙 파워가 셌던 관계로 연주곡은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폴카 <사랑스러운 안나>를 제외하면 모두 일반적으로 유명한 곡들만 선곡되었다.[6]
이 상궤에서 벗어난 선곡도 종종 있는데, 주로 유명한 작곡가들이나 인물, 역사적 이벤트 등을 기리기 위한 경우가 많다. 1978년에는 슈베르트 서거 150주년으로 이탈리아풍 서곡 제2번이, 1980년에는 프랑스의 오페레타 거장이었던 자크 오펜바흐의 서거 100주년 기념으로 오페레타 <지옥의 오르페(천국과 지옥)>서곡이, 1991년에는 상기했듯이 모차르트 서거 200주년 기념으로 콩트르당스 두 곡과 독일 무곡 한 곡이, 2006년에는 역시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 기념으로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서곡이, 2009년에는 하이든 서거 200주년 기념으로 교향곡 제45번 <고별> 4악장이,[7] 2011년에는 리스트 탄생 200주년 기념으로 메피스토 왈츠 제1번이, 2013년에는 바그너와 베르디 탄생 200주년 기념으로 각각 오페라 <로엔그린>의 3막 전주곡과 오페라 <돈 카를로>의 발레 음악 중 프레스티시모가, 2014년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탄생 150주년 기념으로 오페라 <카프리치오>의 달빛 음악(Mondscheinmusik)이 특별 선곡되었다. 2016년에는 UN 창설 70주년 기념으로 로베르트 슈톨츠가 작곡한 <UNO 행진곡>이 첫 곡으로 연주되었으며, 2018년에는 루돌프 황태자의 탄생 160주년을 맞아 그와 벨기에 공주 스테파니의 결혼식 때 이들에게 헌정되었던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 <미르테꽃>과 알폰스 치불카의 스테파니 가보트 두 곡이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다. 선곡 외에도 인물이나 역사적 이벤트를 기리기 위한 퍼포먼스를 마련한 경우도 있는데 2023년에는 인터섹션에 빈 엑스포 개최 150주년을 맞아 그에 따른 컨셉 영상이 올라가기도 하였다.
그리고 빈 춤곡 만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것이 단조롭다는 이유로 1985년에 마젤이 베를리오즈의 서곡 '로마의 사육제'를, 1991년에 아바도가 로시니의 오페라 '도둑 까치'서곡과 슈베르트의 피아노 독주용 폴카와 갈롭을 브루노 마데르나가 관현악 편곡한 것을 끼워넣기도 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선곡 전통이 한층 유화적으로 변해서 독일의 베버와 브람스, 덴마크의 한스 크리스티안 룸비예, 러시아의 차이콥스키, 프랑스의 레오 들리브 등의 가벼운 춤곡들이나 소품들이 한두 곡 정도 섞여 들어가기도 한다. 또한 빈 왈츠-폴카-오페레타의 흐름과 연관이 있는 프랑스의 에밀 발퇴펠, 20세기에 빈 춤곡과 유행가 전통을 지켰다고 평가받는 로베르트 슈톨츠 등의 가벼운 춤곡이나 서곡, 행진곡 같은 작품들이 종종 무대에 오르고 있다.
음악회의 마지막 앙코르는 거의 늘상 빠른 폴카 혹은 갈롭과 요한 2세의 왈츠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요한 1세의 라데츠키 행진곡 순으로 고정되어 있다. 다만 이 관례가 완전히 확립된 것은 1959년부터였고, 2005년에는 후술하겠지만 모종의 이유로 행진곡이 생략되었다.
보통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연주하기 전에 지휘자가 새해인사를 하는데, 언제부턴가 지휘자가
지휘자: 빈 필하모닉과 저는 여러분께 기원합니다: (Die Wiener Philharmoniker und ich wünschen Ihnen,) 악단원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Prosit Neujahr!)
간혹 이 인사를 하는 시점에서 폭죽을 터뜨리기도 한다. 이 새해 인사는 지휘자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독일어가 그다지 능숙하지 않은 경우에는 저렇게 기본 인사만 하고 끝내기도 하고, 마젤이나 메타 같이 유럽 무대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며 유창한 독일어를 구사하는 지휘자들은 특별한 메시지 전달이나 간단한 연설을 그 전에 하기도 한다. 1990년에는 메타가 당시 동유럽 혁명의 열기를 반영해 특별히 "Ihnen liebes Publikum, und ganz besonders, die Freunde in den osteuropäischen Ländern... (친애하는 청중 여러분, 그리고 아주 특별히 동유럽 나라들의 친구들에게...)"이라고 운을 띄우며 새해 인사를 전했다. 2002년에는 단원들이 유럽 각국의 언어들인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헝가리어, 체코어/슬로바키아어, 폴란드어, 루마니아어, 러시아어, 스웨덴어로 새해 인사를 전했고, 마지막으로 지휘자 오자와가 모국어인 일본어로 새해 인사를 전하려고 했지만 일본인 여성과 결혼해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던 콘서트마스터 라이너 퀴흘이 자기 차례를 빼앗는 바람에(...) 중국어로 새해 인사를 한 뒤 마지막으로 관례가 된 독일어 인사로 마무리했다.[8]2005년에는 공연 며칠 전에 발생한 남아시아 대지진으로 30여만 명의 사망자와 실종자가 발생하는 대참사가 벌어졌기 때문에 다소 무겁고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공연이 개최되었는데, 2부 첫 곡이었던 주페의 오페레타 '아름다운 갈라테아'서곡 연주 직후에 빈 필 단장 클레멘스 헬스베르크가 무대에 나와 남아시아 대지진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지휘자 로린 마젤과 빈 필의 모든 단원들이 음악회 출연료 115,000 유로 전액을 당시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 이종욱에게 지진 피해 지역에 공급하기 위한 식수 구입을 위해 기부하기로 했고, 또 희생자들에 대해 조의를 표하기 위해 음악회 앙코르 중 가장 마지막에 연주할 라데츠키 행진곡의 연주를 생략한다고 독일어와 영어로 공지했다. 마젤도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연주 직전 으레 하는 신년사에서 자진 희생자들에게 애도를 표하고 부상자와 이재민들을 최대한 돕자는 취지의 연설을 역시 독일어와 영어로 했다. 메타는 2007년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의 유럽연합 가입을 환영한다는 메시지를 영어와 독일어, 루마니아어, 불가리아어 4개 국어로 전했다. 바렌보임은 2009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기원하는 말을 영어로 덧붙였다.
라데츠키 행진곡은 특정 부분과 마지막 부분에서 관객이 박자에 맞춰 박수를 치는 관례가 있는데[9] 이 관례가 점점 퍼져서 우리나라나 다른 여러나라의 여러 악단들도 이 곡을 연주할 때면 박수를 유도하기도 하고 관객들도 곧잘 따라 친다.
가끔 관객들 중에 유명인이 있기도 한데, 플라시도 도밍고가 관람한 적도 있다. 또한 기모노 차림의 일본인이 적잖이 눈에 띄는 것도 특징. 2016년에는 UN 창설 70주년을 기념해 당시 UN 사무총장이었던 반기문이 특별석에 초대되어 공연을 관람했다.
한편 TV 중계는 발레 애호가들에게도 관심이 쏟아지는데, 그나마(...) 지상파에서 세계적인 수준의 발레를 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
이외에 협연자나 단체가 종종 나오기도 한다. 1987년에는 카라얀이 미국 소프라노 캐슬린 배틀을 특별 초청해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 '봄의 소리'의 오리지널 버전을 연주하기도 했다. 독창자 출연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10] 빈 소년 합창단(Wiener Sängerknaben)이 1977년과 1982년, 1988년, 1998년, 2012년, 2016년 여섯 차례 특별 출연해 폴카 두세 곡을 협연했다. 2017년에는 빈 악우협회 합창단(Wiener Singverein)이 처음 출연해 오토 니콜라이의 오페라 '윈저의 명랑한 아낙네들'중 3막에 나오는 월출(Mondaufgang) 합창을 협연했다.
4. 중계
생방송 중계는 오스트리아의 공영방송 ORF 주관으로 제작하여 유럽방송연맹 가맹국 중심으로 뿌린다. 이미 1960년대부터 흑백으로 중계를 시작했는데, 최근에 유튜브에 60년대 실황 방송이 대거 공개되고 있다. 오스트리아 이외 국가에서는 미국 PBS, 독일 ZDF, 영국 BBC, 일본 NHK가[11] 매년 꼬박꼬박 중계를 해 주고 있다. 공교롭게도 PBS, ZDF, BBC, NHK 모두 각 나라의 대표적 공영방송 채널들이다.대한민국도 다른 나라처럼 대표적 공영방송인 KBS가 상당히 오래 전부터 중계를 해왔다. 과거 자료를 보면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1월 1일에서 1월 2일로 넘어가는 심야 또는 1월 2일 낮에[12] 공연 실황을 녹화중계했다. 아쉽게도 여태껏 동시 생중계는 한 적이 없는데 이는 현지와의 시차와 상대적으로 열악한 클래식 애호가의 규모 때문이다. 음악회가 열리는 시간은 한국시간으로 1월 1일 저녁 7~9시인데 국내 지상파 TV 방송 여건상 황금 시간대에 속한다. 온 가족이 TV 앞에 모여 수준 높은 클래식 음악회를 관람하기에는 딱 좋은 시간대이지만 클래식 음악의 대중성은 K-Pop 등에 비하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적 문제 탓에 다른 나라와 달리 음악회를 녹화중계하고 있다. 1월 2일이 휴일에서 해제된 1999년부터는 1월 1일 이후 돌아오는 첫 번째 일요일[13] 심야에 녹화중계를 편성하고 있다.
클래식 애호가라면 세계인이 함께 하는 이 음악회가 푸대접을 당하는 현실이 개탄스러울 법도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나마라도 공영방송으로서의 사명을 잊지 않았는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음악회 중계를 지속하고 있는[14] KBS에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처지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이 때문에 일부 클래식 팬들은 우리도 일본처럼 EBS나 KBS 1FM을 통해 생중계를 실시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한다.[15]
KBS의 음악회 중계는 클래식 애호가들이 쉽게 보기 힘든 심야 시간대에 녹화중계를 한다는 점 외에도 현지 실황을 그대로 내보내지 않고 중간중간 끊어서 음악인 1인과 아나운서 1인이 스튜디오에서 해설하는 장면을 함께 내보낸다는 점이 단점으로 꼽힌다. 공영방송이라는 특성상 클래식 입문자를 배려한 것이겠지만 클래식 애호가 입장에서는 현장감이 뚝뚝 끊어져서 싫어하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2000년대 이후에는 국내 대형 멀티플렉스 체인인 메가박스에서 위성 지연 중계를 해주고 있는데 극장의 넓은 스크린과 웅장한 음향으로 음악회를 실시간 감상할 수 있다.[16] 오스트리아와 한국의 시차 때문에 한국에서는 저녁 7시부터 감상할 수 있다. 전국 각 지역의 상영관에서 KBS보다 훨씬 일찍 음악회를 감상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인기는 꽤 높은 편이다. 다만 일반 영화 관람료보다는 몇 배 비싸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5. 음반/영상물
1950~60년대에는 클라우스 크라우스, 요제프 크립스, 빌리 보스콥스키 지휘로 데카에서 여러 차례 빈 왈츠 음반이 나왔다. 당시 기술상의 한계 및 실황녹음을 싫어하던 데카 엔지니어들[17]의 성향 등으로 인해 실황녹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주로 신년음악회 전에 약 열흘간 주어지는 리허설 기간 동안 스튜디오 녹음으로 제작된 경우가 많다. 크립스의 경우에는 1947년 이후에는 신년음악회를 지휘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년음악회와는 관계없는 별도의 세션 녹음으로 이루어진 듯 하다.1955년부터 1979년까지 신년음악회를 지휘했던 빌리 보스코프스키는 1950년대 후반 이후 1960년대 후반까지 거의 매년 데카와 녹음을 남겨 방대한 디스코그라피를 남겼다. 현재 총 8장의 CD로 묶어 발매되고 있다. 웬만한 레퍼토리는 다 녹음된 60년대 후반부터는 녹음이 뜸해졌다가 1975년 최초로 실황으로 음반이 나왔다. 두번째 실황 음반이자 보스콥스키의 마지막 신년음악회 앨범인 1979년 음반은 공연 전체가 담긴 최초의 음반이자 유럽 최초로 발매된 디지털 녹음 음반이었다.[18]
신년음악회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녹음된 것은 아니지만 1971년 당시 빈 필을 사실상 이끌고 있던 칼 뵘이 빈 필과 왈츠 및 폴카를 녹음하기도 했다. 사실은 칼 뵘과 빈 필의 베토벤 교향곡 전곡 녹음 세션이 양자간의 완벽한 호흡 덕분에 너무 빨리 끝나버리는 바람에 남은 세션을 활용하여 이루어진 녹음이었다.
로린 마젤이 신년음악회를 이어받고 나서는 DG에서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실황음반이 발매되었다. 1984~1986년은 음반이 녹음되지 않았고, 이후 카라얀을 필두로 지휘자들이 매년 바뀌게 되면서 매년 꾸준히 음반이 나오고 있다. 다만 공연 전부가 수록되지는 않았고 일부 곡을 빼고 한 장의 음반으로 만들어 발매되었다. 누락되는 곡 없이 공연 때 연주된 모든 곡들의 녹음을 담기 시작해 두 장짜리 CD 세트 발매가 기본이 된 것은 1996년(로린 마젤 지휘)부터이다. 또 오스트리아 방송 자료실에서 크라우스가 지휘한 1940년 12월 31일의 공연 실황을 담은 아세테이트 디스크가 약 50여 년 뒤에 발견되어 CD로 출시되기도 했고, 크라우스의 마지막 신년음악회였던 1954년 1월 1일 공연의 실황중계 방송을 익명의 애호가가 사적으로 녹음한 에어체크 테이프도 약 60년 뒤에 아르히폰과 오푸스 쿠라 등의 음반사에서 CD로 복각되었다. 1974년 공연의 실황 영상(화면은 컬러, 녹음은 모노)도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DVD로 발매된 바 있다.
영상물도 1987년 카라얀 이후 거의 매년 나왔지만, 오래된 영상물은 절판되어 구하기가 힘들다.[19] CD도 절판된 건 마찬가지로 구하기 힘들지만[20], 1980~90년대 영상물의 경우 적은 수요에 따라 적게 찍어내었고, 더군다나 지금은 안쓰이는 LD(!) 매체였기 때문에 더더욱 구하기가 힘들다.
역대 음반 목록
1987년 이후 매년 꼬박꼬박 음반 발매가 이루어지고 있는 음악회인 만큼, 빈 필 측에서는 출연 지휘자들에게 예외 없이 '공연 실황으로 제작된 음반과 영상물 발매에 동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음반과 영상물 녹음에 상당히 까탈스러웠던 카를로스 클라이버도 1989년과 1992년에 출연하면서 이 약관에 동의했지만, 지휘자의 성격 상 언제 파토내고 먹튀할 지 몰라서 빈 필 측에서는 클라이버 몰래 대역 지휘자를 섭외해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고 중계 방송사인 오스트리아 방송 측도 평상시에는 녹화하지 않는 12월 31일 공연을 미리 녹화해 놓기도 했다. 그런데 사실 세간의 이미지와 달리 금전 관계에 상당히 밝았던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음반과 영상물의 판권을 각각 다른 회사와 계약하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생각해냈고 실제로 실행에 옮겼다. 노먼 레브레히트에 따르면 1989년 신년음악회를 앞두고 클라이버는 세 대의 전화기를 놓고 동시에 통화하며 계약금을 올려갔다고 한다. 그리하여 1989년 신년음악회 음반은 CBS(SONY)에서, 영상물은 DG-Unitel에서 각각 발매되었다.[22][23]
쇤브룬 여름밤 음악회와 함께 OTT 메디치TV에서 2009년도부터 VOD버전으로도 관람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모두 영상 음반과 음향 전용 음반의 발매처는 1991년과 1993년, 2000년, 2001년 이렇게 네 연도를 제외하고는 모든 연도에서 불일치한 것이 된다. [24]
2020년 비디오.
6. 역대 출연 지휘자 목록
지휘자명에 링크 처리가 된 연도가 해당 지휘자의 첫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 지휘 이력이며 그 옆에 해당 지휘자의 국적을 기재하였다. 괄호 안 총 횟수는 기재된 연도가 해당 지휘자의 마지막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 지휘 이력이다.- 1939 : 클레멘스 크라우스오스트리아
- 1941~1945: 클레멘스 크라우스
- 1946~1947: 요제프 크립스오스트리아 (총 2회)
- 1948~1954: 클레멘스 크라우스 (총 13회)
- 1955~1979: 빌리 보스콥스키오스트리아 (총 25회)
- 1980~1986: 로린 마젤미국[25]
1987년 신년음악회부터는 매 년 지휘자를 선정 후 초빙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 1987: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오스트리아 (총 1회)
- 1988: 클라우디오 아바도이탈리아[26]
- 1989: 카를로스 클라이버오스트리아
- 1990: 주빈 메타인도[27]
- 1991: 클라우디오 아바도 (총 2회)[28]
- 1992: 카를로스 클라이버 (총 2회)[29]
- 1993: 리카르도 무티이탈리아
- 1994: 로린 마젤
- 1995: 주빈 메타
- 1996: 로린 마젤
- 1997: 리카르도 무티
- 1998: 주빈 메타
- 1999: 로린 마젤
- 2000: 리카르도 무티
- 2001: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오스트리아[30]
- 2002: 오자와 세이지일본 (총 1회)[31]
- 2003: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총 2회)
- 2004: 리카르도 무티[32]
- 2005: 로린 마젤 (총 11회)[33]
- 2006: 마리스 얀손스라트비아[34]
- 2007: 주빈 메타
- 2008: 조르주 프레트르프랑스[35]
- 2009: 다니엘 바렌보임아르헨티나
- 2010: 조르주 프레트르 (총 2회)
- 2011: 프란츠 벨저-뫼스트오스트리아[36]
- 2012: 마리스 얀손스
- 2013: 프란츠 벨저-뫼스트 (총 2회)[37]
- 2014: 다니엘 바렌보임[38]
- 2015: 주빈 메타 (총 5회)
- 2016: 마리스 얀손스 (총 3회)
- 2017: 구스타보 두다멜베네수엘라 (총 1회)[39]
- 2018: 리카르도 무티
- 2019: 크리스티안 틸레만독일[40]
- 2020: 안드리스 넬슨스라트비아 (총 1회)
- 2021: 리카르도 무티[41]
- 2022: 다니엘 바렌보임 (총 3회)
- 2023: 프란츠 벨저-뫼스트 (총 3회)
- 2024: 크리스티안 틸레만 (총 2회)[42]
- 2025: 리카르도 무티(예정, 총 7회)[43]
7. 관련 문서
[1] 1980년대 중반까지는 오스트리아군 장병들을 초청해 송년 위문음악회 형식으로 공연한 바 있다. 현재는 오스트리아 내에 있는 전세계 외교수장과 유명인사를 우선 초청하고 입장권 판매를 시작한다. 한국의 경우 매년 빠지지 않고 주오스트리아 한국 외교 대사 부부가 한복을 입고 참석한다. 덕분에 DVD나 중계, 유튜브 영상들 초입에 관객 입장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한국대사 부부에 영상이 클로즈업 된다. 빌리 보스콥스키와 로린 마젤이 지휘한 신년음악회 사진에서 악단 왼쪽과 오른쪽에 정복 차림의 장병들이 앉아있는 경우 이 공연 때 찍은 사진이다.[2] Vorgeiger. (악단) 앞에서 (vor)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Geiger)라는 뜻으로, 19세기 무도회 악단 지휘자들은 대부분 이렇게 바이올린과 지휘를 겸했다. 유럽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겸 지휘자 앙드레 류(André Rieu)가 대표적인 케이스.[3] 엄격하고 근엄한 음악의 제왕 이미지가 강한 카라얀이지만, 빈 신년음악회의 초청을 받은 것에 대단히 기뻐했으며 진심으로 신년음악회를 즐겼다고 한다. 실제 실황 영상을 보아도 빈필의 자질구레한 이벤트(...)에도 죽을 잘 맞춰주며 즐거워 한다.[4] 클라이버는 고액 출연료 외에 서비스로 아우디 A8 제공을 요구했고, 음반 판권 수익을 늘리기 위해 음반과 영상 판권을 각각 다른 회사에 판매하는 아이디어를 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본인이 직접 전화기 3대를 동시에 놓고 음반사들과 협상전을 벌였다.[5] 실제로 단원들에게 노래를 부르라는 지시가 들어간 작품들일 경우에 행한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이집트 행진곡이나 농부 폴카, 요제프 슈트라우스의 빠른 폴카 '걱정 없이'같은 곡들이 대표적인 사례.[6] 보기 드문 예외로, 1987~89년 동안 신년음악회 무대에서 요한 2세의 오페레타 <박쥐> 서곡이 3연속으로 올라오는 진기록이 수립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이후 공연에서는 이 곡을 되도록 피하다가 2002년에야 13년 만에 프로그램에 포함시켰다.[7] 이 곡 연주 때 단원들이 실제로 무대를 빠져나가는 연출을 코믹하게 집어넣었다.[8] 오자와는 만주국 출신이라 중국어도 어느 정도 할 줄 알았기 때문에 미리 계획한 퍼포먼스이기도 했다.[9]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시종일관 박수를 치지 않는다. 특정 대목에서만 박수를 강하게 친다. 초반부터 박수를 신나게 치면 지휘자가 조용히 하라고(...) 손짓을 한다.[10] 봄의 소리 왈츠는 소프라노 협연 버전이 연주되는 경우가 매우 드물고 보통 관현악 버전으로 연주된다. 소프라노를 따로 섭외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을 뿐만 아니라 곡의 기교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이를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소프라노가 세계적으로 매우 드물다. 또 관현악 버전은 소프라노의 호흡을 고려하지 않고 따른 템포로 왈츠의 특징을 살려 연주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게다가 관현악 버전은 도입부가 한 옥타브 높은데 작은 차이지만 상당히 화려한 느낌을 준다. 반면 오케스트라가 한 옥타브 낮게 시작하는 소프라노 버전은 상당히 둔하게 들린다. 이러한 여러가지 요소로 인해 소프라노 버전이 연주되는 경우가 드물다. 빈 신년음악회에서도 여러차례 공연된 곡이지만 1987년 카라얀을 제외하면 모두 관현악 버전으로 연주되었다. 하지만 카라얀이 지휘한 소프라노 버전은 캐슬린 배틀의 절창에 힘입어 좀처럼 듣기 힘든 소프라노 버전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는 의의가 있다.[11] NHK는 교육 텔레비전과 FM 라디오를 통해 생중계하고 있다.[12] 1998년까지는 1월 2일도 신정 연휴에 포함되는 휴일이었기 때문에 2시간에 달하는 클래식 음악회의 낮 시간대 녹화중계가 가능했다.[13] 2023년에는 1월 8일 밤 11시 50분에 중계를 시작한다.[14] 1992년에는 건너뛰기도 했는데 클래식을 방영하던 매체가 매우 한정되어 있던 때라 음악 애호가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는 인터넷이 없고 전화 항의 말고는 방법이 없던 때라 조용히 넘어갔다.[15] KBS 1FM은 오후 8시 - 10시에 'FM 실황음악'을 편성하고 있고 '실황특집 중계방송'으로 클래식 공연 실황을 생중계하고 있다.[16] 서울 코엑스, 남양주 현대아울렛, 안성 스타필드 등 3개의 상영관은 돌비 사운드 시스템이 특화돼 있어 선명하고 웅장한 음질로 들을 수 있다.[17] 존 컬쇼와 그의 팀은 실황 녹음에 매우 부정적이었는데, 당시 바이로이트에서 행해지던 실황 녹음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었다. 사실 데카 엔지니어들은 1955년 바이로이트에서 요제프 카일베르트가 지휘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실황을 녹음하기도 했는데 끝내 이를 발매하지 않았다. 이 녹음은 반세기 넘게 묻혀있다가 2000년대 이후에야 테스타먼트에서 음원을 인수하여 발매되었는데, 당시 기술이라 믿어지지 않을 만큼 뛰어난 음질로 놀라움을 주었고 단숨에 명반의 대열에 합류했다. 도대체 왜 당시에 음반으로 발매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많았다. 그런데 LP로는 이 녹음이 발매된 적이 있다. 독일 데카 지사에서 50년대에는 모노럴로 발매되었고, 영국 데카 본사에서는 "eclipse"시리즈로 스테레오 녹음이 발매된 적이 있다. 이베이에서 검색해보면 독일 데카 지사의 50년대에 발매된 초반은 물론 eclipse 시리즈로 발매된 스테레오 LP도 튀어나온다. 다만 스테레오녹음이 CD로 발매되지 않았을 뿐으로 보인다. 모노럴 녹음은 당시 독일 데카 지사도 겸했던 텔레풍켄의 후신인 텔덱에서 Historic 시리즈로 CD를 낸 적이 있다.[18] 유럽 최초의 디지털 녹음은 1978년 12월 4~6일에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 지휘로 빈 필이 녹음한 멘델스존의 교향곡 4번과 서곡 '핑갈의 동굴', '고요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였다. 하지만 이 녹음으로 제작된 음반은 1979년 6월에 나왔고, 1979년 신년음악회 녹음은 두 달 전인 1979년 4월에 나와 음반 발매 순서로는 밀렸다.[19] 다만 부분적으로 업스케일링 등을 경유해 재발매하는 사례는 존재한다. 후술한 1987년은 대표적인 사례이다.[20] 이 역시도 도이체 그라모폰과 SONY에서 다수 연도를 묶어 심지어는 첫 연도부터 현 연도까지 모두 재발매한바 있다. 현재 2020년도까지 재발매목록에 있다.[21] 이 연도들도 다수는 DVD화 했고 1987년의 경우 1988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제야 음악회와 함께 블루레이로 까지 재발매했다.[22] 칼르로스 클라이버가 맡았던 다음 연도인 1992년도 역시 이러한 영상 음반과 음향 전용 음반의 발매사를 별도로 발매했다.[23] 영상물과 음향 전용 음반의 발매사의 일치는 1991년 아바도 지휘를 최최로 역시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지휘한 이듬해 1992년을 뛰어넘어 1993년 일치(이 년도는 단 VHS등의 비디오 테이프 등등으로만 발매 후 DVD등의 디지털 광 디스크로는 발매하지 않았다.)한 후 한 동안 영상물을 발매하지 않았다가 2000년에 일치로 돌아왔다가 2001년 까지는 일치로 발매한 후 2002년과 2003년의 불일치(각기 CD는 필립스와 도이체 그라모폰이 발매 DVD는 모두 TDK또는 아트하우스발매; 이들은 이 연도들만 발매했고 또한 영상음반만 발매했다. CD만의 발매는 구 BMG 레이블(1996, 1998, 1999년 3개년)이 해당한다.)) 그리고 2004년부터 일치하고 있다. 다만 2004년부터 8년 까지 스튜디오 원음에 해당하는 음향을 Sony에서 발매해 이 부분을 보면 불일치로 볼 수 있다. 2009년에서 2011년 까지는 이러한 발매를 아직은 하지 않아 일치로 볼 수 있고 2012년 부터는 영상물까지도 Sony가 담당해 늦어도 일치인 상황이 된다. VOD제공으로 인한 불일치는 후술한 부분 참조.[24] 물론 이들도 만약 서비스를 제공하면 모두 불일치한 셈이된다.[25] 신년음악회 역사상 非오스트리아 출신 첫 지휘자. 이 기간 중 1982년부터 2년 동안은 빈 국립 오페라단의 총감독 및 음악감독이었다.[26] 신년음악회 최초의 이탈리아인 지휘자이다.[27] 신년음악회 최초의 남아시아 출신 지휘자이다.[28] 1991년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사망 200주년이기도 하여 해당 작곡가의 곡이 포함되었다. 아바도가 빈 국립 오페라단 음악감독에서 물러나는 해이기도 하다.[29] 원래 지휘자로 레너드 번스타인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1990년 10월 18일에 급작스럽게 타계하여 카를로스 클라이버로 교체되었다.[30] 첫 곡이 라데츠키 행진곡의 원전판이어서 화제가 되었다.[31] 신년음악회 최초의 동아시아 출신 지휘자이다. 2002년은 한일 월드컵이 개최되는 해였으며, 오자와 세이지가 빈 국립 오페라단 음악감독에 취임하는 해이기도 하다.[32] 2004년은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탄생 200주년이기도 하다.[33] 쓰나미 피해자를 기리는 의도로 앵콜에서 라데츠키 행진곡을 제외하였다.[34] 신년음악회 최초의 동유럽 내지 북유럽 출신 지휘자이다. 2006년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탄생 250주년이기도 하여 해당 작곡가의 곡이 포함되었다.[35] 최초 연주 기준 신년음악회 역사상 최고령 지휘자. 생일 기준으로 만 83세 때 지휘를 맡았다. 신년음악회 최초의 프랑스인 지휘자이다.[36] 2011년은 프란츠 리스트의 탄생 200주년이기도 하여 해당 작곡가의 곡이 포함되었다.[37] 2013년은 동갑내기인 리하르트 바그너와 주제페 베르디의 탄생 200주년이기도 하여 해당 작곡가들의 곡이 프로그램에 포함되었다.[38] 2014년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탄생 150주년이기도 하여 해당 작곡가의 곡이 포함되었다.[39] 최초 연주 기준 신년음악회 역사상 최연소 지휘자. 생일 기준으로 만 35세 때 지휘를 맡았다.[40] 신년음악회 최초의 독일인 지휘자이다.[41] 코로나-19로 인해 신년음악회 역사상 유일한 무관중 공연[42] 2024년은 안톤 브루크너의 탄생 200주년이기도 하여 해당 작곡가의 곡이 프로그램에 포함되었다.[43] 2025년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탄생 200주년이기도 하다. 무티는 요한 1세의 탄생 200주년에 이어, 그 아들의 탄생 200주년 신년음악회도 맡아, 이 점만 보아도 그가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에서 가지는 위상이 얼마나 큰 지를 가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