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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7 22:06:29

신상사

신상사파에서 넘어옴
<colbgcolor=#000,#050505><colcolor=#fff> 신상사
申上士
파일:external/pds.joinsmsn.com/htm_201303180435230103011.jpg
본명 신상현(申常鉉)
출생 1932년 3월 20일[1]
경기도 경성부 관수동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수동)
사망 2024년 8월 10일 (향년 92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병역 육군 특무부대 1등상사 전역
(1949년 ~ 1953년)
신체 178cm, 80kg[2]
직업 조직폭력배
별명 명동의 황제[3]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본격적으로 주먹생활을 시작하다2.3. 무교동파와의 충돌2.4. 신군부 집권기2.5. 은퇴 이후2.6. 사망
3. 여담4. 대중매체5.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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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동의 황제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진 대한민국조직폭력배. 명동 신상사파의 두목으로 전국구 주먹으로 유명했다. 군대에서 상사로 전역하여 신상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1932년 경기도 경성부 관수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수동)에서 출생했다. 양복점을 운영한 부친 덕에 경제적으로 궁핍한 생활을 하지 않았다.

학창시절 운동을 좋아해 권투, 유도, 검도를 배웠다. 이후 숭실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일본어를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본인 교사에게 자주 심한 체벌을 당했고, 이 때문에 학업에 충실하지 못해 결국 졸업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1949년 육군에 입대한 신상사는 3개월간 훈련을 받은 뒤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에 투입되었고 이때의 공으로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듬해인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경상북도 영덕군 강구면 강구리 강구항에서 조선인민군과 처절한 전투를 벌이던 중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치료를 위해 후방으로 이송된 그는 잠시 제9보병사단 제30보병연대에 배속됐다가 시험을 통해 국군기무사령부의 전신인 육군 특무부대에 발탁되었다.[4]

2.2. 본격적으로 주먹생활을 시작하다

전쟁이 끝나는 해인 1953년 신상사는 육군 특무부대 1등상사 계급으로 전역했다. 이 선택엔 조선인민군과의 전투에서 입은 총상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후 1년을 경상북도 대구시에서 더 머무른 그는 지역의 알아주는 주먹들을 모두 때려눕혔다. 대표적으로 씨름선수 출신 박치덕과 최시헌, 대구 K2 공군기지군무원 갑빠가 그들이다. 특히 갑빠와의 결투는 "5분 동안 정신없이 때리고 보니 상대가 큰 대자로 누워있어 병원에 실어 보냈다."라고 회고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북도 대구시 병 선거구독립운동가 출신 이갑성자유당 후보로, 이우줄무소속 후보로 출마해 격돌하게 되었다. 당시 이우줄을 낙선시키라는 자유당의 특명이 하달되었고, 신상사는 경찰로부터 도움을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선뜻 제안을 받아들인 그는 이우줄 후보의 유세장에서 난동을 피우며 방해했지만 선거 운동원 수십 명으로부터 집단 린치를 당했다. 선거 결과 역시 이우줄이 당선되었다.[5] 그는 이때를 악몽 같은 순간으로 기억하며 다시는 정치권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1954년 고향 서울특별시로 돌아온 신상사는 중구 명동 중앙극장 옆에 자리 잡았다. 곧이어 양정고등학교, 휘문고등학교, 경복고등학교 등 전통의 명문 고등학교에서 주먹이 제일 강한 1진들을 휘하 조직원으로 두었다.

이후 명동황제 이화룡을 잡기 위해 을지로 태양다방에서 그로 지목된 사람을 흠씬 두들겨 팼다. 하지만 피해자는 이화룡이 아닌 그와 닮은 전파사 사장이었다. 이 소문이 돌자 이화룡의 직계 이영복이 50~60명의 조직원을 이끌고 신상사의 사무실로 쳐들어왔다. 이후 신상사도 5~6명의 부하를 이끌고 이영복의 집을 습격하는 등 항쟁이 계속되었지만, 이화룡의 또 다른 직계 박일갑의 중재로 양측이 화해했다. 이후 신상사는 일단 본인은 부정하고 있지만, 범 명동파의 행동대장이 되었다.

신상사와 이화룡, 가장 오른쪽 인물은 신상사파 부두목 구달웅. 당시 명동파의 라이벌이었던 동대문사단의 행동대장 유지광 휘하에는 신상사파와 달리 학창 시절 2진들이 주류를 이루었기에 고등학교 때부터 신상사파 조직원들에게 주눅이 들어 있었던 그들은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명동 세력에 밀렸다고 한다.

1955년 신상사는 5명의 종로파 조직원으로부터 몰매를 맞고 있던 김응규라는 사람을 구해준 뒤 그를 조직원으로 받아들였다. 김응규는 종로파 두목 아오마스에 대한 복수심이 대단했는데, 신상사는 이후 아오마스가 국일관에서 춤을 추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뒤 그를 찾아가 흠씬 두드려팼다. 당시 아오마스는 도망치기 위해 2층에서 뛰어내렸지만 그만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이 사건은 세간에 국일관 사건으로 불리며 김두한의 후계자 아오마스가 새파란 후배인 신상사에게 개망신을 당한 사건으로 알려졌다.

1956년 신상사는 황금마차 습격사건에서 쳐들어온 동대문사단 조직원들을 박살 내고 1957년 장충단집회 방해 사건을 저지른 뒤 도주하는 과정에서 명동파의 구역을 침범한 동대문사단 조직원들을 때려눕히는 등 두 조직 간 항쟁의 최일선에서 싸웠다. 그러나 1958년 충정로 도끼 사건으로 구속 기소되어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지만 상소하는 과정에서 형량이 1년 6개월로 감형되었다.

출소한 신상사는 명동을 기반으로 조직을 재건했는데, 이 시기에 서울 주먹계를 사실상 평정했다고 전해진다. 기존의 최강 조직이던 동대문사단은 5.16 군사정변으로 두목 이정재가 사형당하고 남은 조직원들이 정종원과 유지광의 세력으로 분열되었기 때문에 전화위복으로 신상사가 무주공산인 되어버린 서울을 접수하기가 쉬웠다. 특히 신상사는 5.16 이후에 마산에서 서울로 상경한 구달웅을 만났고 이후 그를 부두목으로 삼는다.

신상사는 일본 3대 야쿠자 조직 중 하나인 이나가와카이의 중간보스 출신이자 니시야마 미노루란 이름으로 알려진 서순종과 권투 사업 및 여러 사업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 서순종[6]은 대한민국 최초의 권투 세계 챔피언 김기수를 키워냈는데, 그 외에도 유제두, 박종팔, 박찬희, 염동균, 김지원, 최점환 등 다수의 세계 챔피언을 배출했다.[7]

이 시기 신상사는 구달웅을 두목 대행으로 삼아 대부분의 조직 살림을 맡기고 자신은 지방의 거대 조직이나 일본의 야쿠자 조직과 제휴하는 등, 큰일에만 직접 관여했다고 한다.

2.3. 무교동파와의 충돌

오랫동안 서울 주먹계 정점에 서있던 신상사는 이북에서 내려온 대구 출신으로 염천시장을 장악한 조창조와 정학모[8], 오종철을 필두로 무교동을 장악한 호남 출신 폭력배들이 힘을 합친 신흥 세력 무교동파와 충돌을 빚게 되었다.

이에 대표적인 사건으로 서순종 납치사건이 있다. 당시 건설공사 관련 문제로 서순종을 납치한 무교동파는 그를 구하러 온 신상사파 조직원을 무자비하게 린치했다. 격노한 신상사는 구달웅과 전철웅을 투입하여 서순종을 잡고 있던 무교동파의 에이스 이경원을 각목으로 두들겨 패 초주검으로 만들고 서순종을 구출해냈다. 이후 벌어진 사건이 그 유명한 1975년 사보이호텔 습격사건이다. 당시 무교동파는 명동파에게 사과하겠다는 의사를 타진해 와 신상사를 비롯한 간부들이 자신들의 아지트 사보이호텔 커피숍에서 기다렸다. 시간이 흘러도 무교동 측이 오지 않자 신상사와 구달웅은 자리를 떴다. 얼마 뒤 무교동파 행동대장 조양은이 이끄는 조직원들이 회칼과 야구방망이를 들고 난입했다.

당시 조양은이 노린 메인 타깃이자 신상사의 매제인 김수일[9]은 야구방망이로 머리를 맞아 피가 솟구쳤고, 우연히 자리에 있던 목포 출신 한 조폭은 구달웅으로 오인받아 온몸을 회칼로 난자당했다.[10] 김수일은 장시간의 뇌 수술을 받아 겨우 소생했지만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고 온몸을 난자당한 목포 출신 조폭도 마찬가지 과정을 겪어야 했다.

사보이호텔 사건 이듬해 벌어진 남산 도큐호텔 사건 역시 사소한 시비에서 비롯된 충돌 끝에 호남 출신 폭력배들이 신상사파를 습격하여 구달웅의 머리를 도끼로 찍고, 다른 조직원의 다리를 칼로 찔렀다. 당시 칼에 찔린 모 조직원은 도망치는 호남 조폭을 붙잡은 뒤 자신의 다리에 박힌 칼을 뽑아 상대의 귀를 자르고 "귀를 찾으려면 내일 사보이호텔로 나를 찾아오라"라고 말했다.

하지만 당하고만 있을 신상사파가 아니었기에 김태촌을 시켜 오종철을 칼로 난자해 은퇴시키고[11] 결국 조창조의 항복을 받아내는 등 맹렬한 보복과 반격으로 무교동파를 사실상 와해시켰다. 훗날 신상사는 중앙일보와 당시 일을 인터뷰한다. 신상사파 대부 "호텔기습 조양은, 무릎꿇고…"

조창조 역시 2008년 인터뷰에서 “사실 달걀로 바위치기였어요. 부끄러운 얘기지요. 사보이호텔사건으로 신상사파라는 조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됐습니다. 신상사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사건이 나자 서울사람들의 응집력이 강하게 나타나더군요. 평상시 숨어 있던 신상사파의 방대한 세력이 드러났습니다. 힘으로도 돈으로도 백으로도 우리가 이길 수 없었습니다. 당시 양은이가 20대였습니다. 뭘 알겠습니까."라고 언급했다. 시라소니 이후 ‘맨손싸움 1인자’ 조창조가 털어놓는 ‘주먹과 정치’ 이러한 이야기로 알 수 있듯 사실이 한참 와전되어 신상사가 조양은에게 칼부림을 당해 패배하거나 은퇴했다는 말이 꾸준히 잘못 알려져 왔다.

2.4. 신군부 집권기

1980년 신군부가 집권하자 조직폭력배에게 철퇴를 가했다. 당시 신상사파 부두목 구달웅은 군사재판에서 사형 구형을 받고 1심에서 15년형을 받았다. 이에 신상사가 그를 구명하기 위해 당대 제5공화국 권력의 핵심이었던 노태우를 직접 만났다. 결국 노태우가 박재명 육군본부 법무감에게 써준 의견서 덕분에 구달웅의 형량은 6년 4개월로 감형되었다.[12]

1980년 말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신상사는 2개월 동안 훈련을 받았다. 일부 그를 알아보아 위로의 말을 건네는 지휘관과 조교들이 있었지만 일체의 특별대우는 없었고, 새파랗게 젊은 교육생들과 악명 높은 봉 체조 등 모든 훈련을 동등하게 받았다. 신상사는 이때의 경험을 지옥 같은 2개월이라고 묘사하며 수치감을 동반한 심신의 피폐함을 경험했다고 한다. 굳이 특혜를 꼽자면 모든 훈련이 끝난 뒤 대대장이 따로 불러 자신에게 라면 하나를 대접한 것이었다.

이후 신상사는 이태원 미합중국 육군 제8군 사령부에서 다른 조직들이 큰 피해를 본 것과는 달리 신상사파는 유흥업소 갈취 등 서민 대상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고 정권 인맥을 잘 이용해 별 피해가 없었다고 밝혔다.[13]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검경에서 흉악범죄를 저지르고 수배를 피해 잠적한 조폭들을 자수시키기 위해 신상사를 찾아갔다고 전해진다.[14]

2.5. 은퇴 이후

이후 판매점, 수입 자동차 대리업 같은 사업을 하다 2004년 땅 주인으로부터 1억 5,700만 원을 가로챈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는 충정로 도끼 사건 이후 약 46년 만에, 삼청교육대 이후 약 24년 만에 신상사가 구금된 사건이었다. 당시 한 검찰 관계자가 “신씨 소환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후배 조직원 십수 명이 동행하기도 했다. 신씨가 칠순에 접어들었지만 지금도 혼자서 2명 정도는 너끈히 상대할 정도로 몸이 건강하고 날렵했다."라고 전했다. 주먹계 전설 ‘申상사’ 쇠고랑 찼다 또 다른 검찰 관계자는 “진정인들이 가명을 사용해야 할 정도로 ‘신상사’라는 이름에 주눅이 들어 있었다.”라고 전했다. 원로주먹의 ‘못버린 버릇’ 후속 보도가 없는 것으로 보아 합의 등을 통해 실형을 선고받지 않고 흐지부지된 것으로 보인다.

2007년 부산 칠성파 두목 이강환의 아들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했다.

2009년 서울 강남에서 신상사 딸의 결혼식이 열렸다. 유명인들의 축하 화환이 줄을 이었고 부산 칠성파 두목 이강환을 포함한 전국의 조직폭력배와 일본의 3대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구미, 스미요시카이, 이나가와카이의 간부가 포함된 약 4,000명의 하객이 다녀갔다. 거물급 하객의 대부분은 외부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예식에는 참석하지 않고 얼굴만 잠깐 비추고 돌아갔다고 한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경찰관 수백 명이 배치되었고 개그맨 강성범이 사회를 봤다. 서울 강남에 전국 조폭 5,000명이 모인 까닭은?

2010년 수도권 일대에 투견장을 만들어 도박판을 열고 금품을 갈취한 혐의로 경기지방경찰청에 불구속 입건되었으며 폭력 교사, 불법 도박 등의 혐의를 받았다. 왕년의 주먹 ‘신상사’의 말로 그러나 이 사건은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미꾸라지 조폭 두목'에 경찰 속앓이

2013년 월간중앙과 인터뷰를 하고 회고록을 출판했다. 주먹으로 꽃을 꺾으랴

2022년 고령의 나이에 거동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부산 칠성파 두목 이강환[15]의 팔순 잔치에 참석했다. 당시 사회를 맡은 유명 개그맨이 “지금 이 자리에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회장님(신상사)이 계신다. 큰 박수로 맞이해주시길 바란다” 라고 언급했다. ‘깍두기 인사’ 대신 ‘구찌 클러치’ 든 하객… 조폭이 달라졌어요

2023년 6월 6일 어느 결혼식에 참여했는데 전 국회의원 정대철도 보인다.#

2024년 2월 월간중앙이 신상사파의 후신이라고 자칭하는 명동식구파와 그들의 40대 실세 황모 씨에 대해 취재했다. 기사에선 서울 조폭계 한 조직원의 말을 빌려 "명동식구파는 본인들이 과거 명동에서 이름을 떨친 신상사파 계보를 이어받은 조직이라고 떠들고 다닌다. 하지만 허풍인 걸 누구나 다 안다. 들어가는데 제한이 없고 나가도 누구 하나 말리지 않는 조직으로 몰락했다.”고 전하면서 이들이 자동차 매매 상사를 근거지 삼아 신종 사채 사업을 전개하며 MZ조폭 신사업을 흉내 내려 코인 사기를 시도했다고 보도했다. 명동 조폭의 대명사 ‘명동식구파’ 생존 몸부림

2.6. 사망

2024년 8월 10일 노환으로 사망했다. '명동 황제' 신상사 별세…"마지막 남은 1세대 조폭"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빈소에는 곳곳에서 도착한 근조기와 화환들이 들어섰다. 가수 설운도의 근조화환과 태진아의 근조 리본도 놓여 있었다. 전국에서 올라온 조직원들이 빈소를 지켰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송파경찰서와 서울경찰청에서 파견된 형사들이 배치됐다. 조폭 60여명 도열... '명동황제 신상사' 빈소 가보니

한편 오세훈 서울시장김선교 국회의원, 전진선 양평군수, 윤순옥 양평군의회 의장 등 정치인들도 조기를 보냈으나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고 논란이 되자 철거됐다. 신상사 빈소 내 오세훈 시장 조기, 논란 되자 철거 특히 오세훈 서울시장의 경우, "서울시장이 조폭 두목의 장례식에 조기를 보낸 것이 합당하냐"는 지적에 정례브리핑에서 "지인을 통해 요청이 와서 정무 라인이 조폭인 줄 모르고 조기를 보낸 것"이라고 답하며 "부적절한 조치였던 걸 알고 회수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없다."고 해명했다. 유명 조폭 빈소에 서울시장 조기…"오세훈은 과정 몰랐다"

발인은 2024년 8월 12일 오후에 진행됐다. 프랭크 시나트라My Way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관이 장지로 떠났다.[16] 마이웨이 들으며 떠난 '신상사'... 조폭 200명 일제히 고개 숙여 도열한 검은 양복들 90도 인사…마이웨이 들으며 떠난 '1세대 조폭'

3. 여담

4. 대중매체

5. 참고 자료



[1] #[2] #[3] 1950년대에는 신상사의 형님 격인 이화룡이 이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참고로 이화룡은 충정로 도끼사건으로 징역을 산 이후 손을 씻고 주먹계를 떠나 영화제작자와 사업가로서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한다.[4] 당시 육군 특무부대의 위상은 대단했는데, 소속된 군인들이 갖고 다니던 공무집행 메달엔 '본 메달 소지자는 시기 장소를 불문하고 행동의 제한을 받지 않음'이라 적혀 있었다.[5] 하지만 1954년 5월 20일 조선일보 기사에서는 이와 완전히 반대로 설명하고 있다. 기사에 따르면, 신상사는 당시 무소속 후보였던 이우줄의 선거운동원이었다. 마이크를 밀어 쓰러뜨리고 소동을 일으킬려고 하다가 경찰에 구속되었긴 했는데, 사실은 자유당 이갑성 후보측에서 꾸민 소동인 것처럼 사람들이 인식하게끔 꾸민 것이라고.[6] 동생이 이나가와카이의 최고 고문인 니시야마 히테루(서휘)이다.[7] 서순종은 무하마드 알리, 마이크 타이슨, 조지 포먼, 에반더 홀리필드, 훌리오 세자르 차베스, 로이 존스 주니어, 마르코 안토니오 바레라 등을 발굴한 것으로 유명한 국제 권투계의 거물 돈 킹(사진)과 깊은 유대가 있다고 알려진 전호연과 쌍벽을 이루며 한국 권투계의 황금기를 일구어냈다. 여담으로 돈 킹 역시 미국 제일의 마피아 조직인 뉴욕 제노비스 패밀리의 고위 관계자(High-level Associate)로 잘 알려져 있다. 자세한 사항은 빈센트 지간테 문서와 마피아/기타 문서 참고.[8] 목포상고-경희대 태권도부 출신. 진로그룹 왕자의 난 당시 장진호 측 용역깡패로 고용되었다가 장진호의 경영권 장악 후 진로스포츠단 사장으로 취임하며 신분세탁에 성공한다. 진로그룹 부도 후 LG스포츠 사장으로 이직했으나, 김홍일 게이트에 휘말려 구속된다.[9] 조양은에 의하면 김수일은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와 의형제였다고 한다.[10] 이 부분에서 오종철-조양은측과 이야기가 조금 다른데 오종철이나 조양은측은 사보이호텔 사건 당시 회칼이 쓰였다는건 꾸준히 부인한다. 실제로 조씨는 사보이호텔 사건으로는 1심에서 징역 1년, 2심에서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았는데 회칼이 쓰여서 사람이 다쳤다면 그런 형량은 불가능하다. “명동 사보이호텔 기습사건, 배후는 나였다” (오종철 회고)[11] 무교동파 두목 조창조는 이때 부두목 정학모와 오종철의 조직 내 알력 다툼 때문에 오종철을 보호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오종철은 이후 김태촌과 화해하기는 했다.[12] 교도소에 수감된 구달웅은 출소하면 자신에게 사형을 구형한 담당 검사를 살해하겠다고 다짐했고 실제로 그 검사에게 살인을 예고하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교도소 종교행사에서 만난 천주교 사제로부터 원수를 용서하란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한다.[13] 사실 세간의 인식과 다르게 조무래기들이면 몰라도 이름있는 오야붕들은 일반인들을 웬만하면 건드리지 않는다. 건드려봐야 이득도 없고 괜히 건드렸다가 조직 전체가 일망타진당하고 장기수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리어 신상사처럼 성공한 사람들은 조폭 이미지를 벗기 위해 자원봉사를 하거나 기부를 하는 식으로 이미지 세탁을 하기도 한다고.[14] 그도 그럴 것이 신상사의 말 한마디에 움직이는 건달, 그것도 어중이 따중이도 아니고 두목급만도 그 숫자가 얼마인지를 생각하면 당연한 수순이었다.[15] 이듬해 7월 세상을 떠났다.[16] 애초 발인식에 검은 세단 100대가 동원될 계획이었지만 경찰의 제지와 함께 장례위원회가 '조용히 배웅하는 것이 옳다'는 판단을 내려 차량은 동원되지 않았다.[17] 물론 일상적인 조직 운영과 별개로, 신상사가 생존해 있는 한 명동파의 ‘상징적인 두목(큰형님)’은 변함없이 신상사다.[18] 물론 신상사와 직계 동생들은 이미 다 고령이라 일상적인 조직 운영은 진작에 손을 뗐다. 실질적인 조직 운영은 현역 실세 동생들이 하고 있다.[19] 물론 서울에서 신상사와 관련이 없는 독자조직들도 있지만 그들도 신상사를 큰형님으로 존경하며 신상사파와 교류하고 있다.[20] 일설에는 차명으로 강남 테헤란로의 빌딩 수채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신상사가 충우회에 보낸 화환을 보면 주식회사 주경의 회장직을 역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21] 전국구 조폭으로 유먕한 조양은에 따르면 한국자유당 정권 이후로 조직이 도저히 클 수 없는 상황이고 당장 조양은 본인도 조직생활을 떠난지가 십수년이 되었음에도 지역 경찰과 경찰청 정보국 등으로부터 감시를 당하고 있을 정도로 조직폭력배에 대한 감시가 철저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성공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조폭 타이틀을 버리려고 안간힘을 쓴다고 한다. 이런식으로 힘있는 오야붕들은 조폭이 아닌것처럼 행세하고 불법적인 일들은 조선족이나 불체자 등을 이용해 암암리에 행하는 식이라고. 당장 이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신상사는 1960년대 이후로는 1980년대 삼청교육대에 구금되었다가 풀려난 것과 2004년 구속된 사건 이외에는 단 한번도 구속된 전적이 없다.[22] 아이돌 그룹 브론즈 출신.[23] 사실 캐릭터가 그렇다기보다는 신상사가 몸담은 이화룡의 세력이 워낙 의적같이 나와서 덩달아 덕을 본 것이다. 작중 이화룡은 문인들에게도 존중을 받으며 상인들에게도 존경받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