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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34:32

악의 문제/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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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특징3. 우리 세상이 그나마 가장 좋은 세상이다4. 인간의 악과 신의 악은 다르다5. 고통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6. 악도 필요하다7. 자유의지
7.1. 자유의지는 존재하는가7.2. 기회 문제7.3. 처음부터 악의 발생 자체를 막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7.4. 전지전능7.5. 자유의지는 정말 악의 근원인가7.6. 자유의지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8. 신은 악에 대해 직접적으로 대처하지 않는다9. 신도 악을 지녔지만 행하지 않는다10. 악은 경고이다11. 인간은 신을 이해할 수 없다12. 신의 영광을 위해 악이 존재한다
12.1. 반박
13. 악은 선의 결여이다

1. 개요

악의 문제이론에 대해 정리한 문서.

2. 특징

악의 문제를 무마하고 신이 옳다고 변호하려는 신학적 시도를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이라고 한다. 신의론(神義論), 변신론(辯神論), 호신론(護神論)이라고도 한다. 현재 나무위키에는 별도의 문서로 가톨릭 신정론이 있다.

리스본 대지진은 본격적으로 가톨릭의 신정론이 위협받게 된 대표적인 사건이다. 하필 만성절에 발생한 대지진으로 인해 수도원과 성당에 모인 신자들은 큰 피해를 입었으나 타락한 곳이라며 지탄받던 집창촌은 오히려 피해가 적었기 때문.
"...리스본 참사 이후 하느님의 도덕적 인격이 이런 재난을 허용할 수 있다는 논증은 처음에는 철학자들에게, 나중에는 신학자들에게도 그 견인력을 잃기 시작했다. 리스본 참사는 중세적 사유에서 일어난 피로골절(stress fractures)을 아주 극적으로 드러냈으며, 한때는 이런 참사를 포용할 수 있었던 윤리적, 신학적 범주를 단숨에 압도해 버렸다... (중략) ...만일 이런 끔찍한 사건을 일으킨 지적 존재가 있다면 그것이 누구든 간에, 피에 굶주린 그의 폭력성은 무작위적이고 무분별하다고 볼 수 있었다. 모든성인대축일에 일어났던 리스본 참사 배후에 도덕적 의지가 존재했다면, 그것이 전달할 수 있었던 도덕적 교훈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 의지적 잔인함은 극단적이었다."
- 《고통과 씨름하다》, 토머스 G. 롱, p.41
"리스본의 지진은 볼테르에게서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이라는 질병을 제거하기에 충분했다."
- 《부정 변증법》, 테오도르 아도르노, p.361

20세기에는 세계 대전홀로코스트가 발생하여 신정론을 위협한다.# 이와 관련하여 생겨난 것이 홀로코스트 신학(Holocaust theology)으로 일부 유대교 신학자들은 유대인이 심판 받은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고 일부 개신교 신학자들도 유대인이 용기를 발휘하고 고귀해질 기회를 얻었다라거나 하나님의 섭리라는 식의 주장을 하였다.관련 사진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죽이고, 삶아서 비누로 만들고 머리 털로 벼게를, 뼈가 비료가 되게하고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버려진 그들의 무덤에 대해, 신학자들이나 율법학자들은 비존엄과 죄로 인한 결과라는 비난으로만 남겨지게 하고 있다.” “어린 자녀의 몸뚱이가 불 타고 있는 현장 앞에서 어떠한 말과 신학적 견해도 있을 수 없다”[1]
- 랍비 어빈 그린버그

현대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20세기의 세계대전과 대량학살 같은 거대한 파국을 겪은 후 악의 문제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신정론)는 설득력을 잃었으며 악을 정당화하려는 논리가 때로는 폭력성을 내포할 수도 있음을 지적하면서,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악에 의해 고통당하는 타인의 얼굴에서 자신의 책임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헌신하는 실천 속에서 비로소 신과의 만남이 가능해진다고 역설하였다.

3. 우리 세상이 그나마 가장 좋은 세상이다

신의론(神義論)이라고도 번역되는 이 단어의 어원은 그리스어의 theos(神)와 dike(義)이며 '신의 의로움'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세상에 존재하는 악으로 인해 생겨나는 신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려는 주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변신론에서 연구의 주요한 초점은 “우주에 명백히 존재하고 있는 악의 실재에도 불구하고 신의 선(善)과 섭리를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는가”이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악의 기원과 의미에 대해서 많은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숙고해 왔다.

페르시아 종교와 같은 이원론에서는 세계란 선과 악이 서로 투쟁하는 전쟁터이고, 결국에는 선이 승리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일신교의 경우에는 신의 전능과 사랑이 현세의 악과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에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오리게네스는 악의 존재를 피조물이 자유를 남용한 죄의 결과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계몽주의시대의 회의주의자 베일(P. Bayle, 1647-1706)은 매력적인 변증법을 사용하여 악이 실재한다는 사실과 신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 격론을 불러일으켰다. 라이프니츠(C.W. Leibniz)는 그의 저서 ≪변신론≫(Essais de Theodicee, 1710)에서 이에 답하여 현실의 세계는 가능한 한 최고선의 세계이고, 회화(繪畵)에서 그림자가 전체의 미와 조화를 산뜻하게 부각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처럼, 가시적인 악은 보다 높은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인정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 그의 극단적인 낙관론을 피력하였다. 이렇게 변신론이란 단어는 라이프니츠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근대에 들어오자 자연적인 악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악이 크게 부각되면서 변신론은 신학적인 중심논제의 위치에서 밀려났다. 즉 사회악이 신의 사랑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근대신학은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노력을 통해서만 신의 사랑과 섭리가 관철될 수 있음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특히 1, 2차 세계대전은 인간성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를 뿌리째 뽑아 버렸기 때문에 인간생활에 존재하는 악의 실재와 신의 사랑에 대한 문제가 논쟁의 촛점이 되었다. 이제 변신론은 이 문제의 중대성에 밀려 더 이상 논급되지 않는다. 다만 신에 대한 형이상학의 한 부분적 학문인 자연신학(natural theology) 속에서 언급될 뿐이다.
가톨릭 대사전, <변신론> 항목 中

독일의 철학자 고트프리트 폰 라이프니츠는 근대 합리론자의 입장에서 악의 문제를 다루면서 변신론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이것은 악이 존재하기 때문에 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주장, 그리고 신이 왜 인간을 완벽하지 않으며 악한 존재로 만들었느냐는 공격에 대하여 신의 권능과 선함을 변호하려는 이론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결국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고 그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선택하고 욕망 대로 선택하게 되었고 결국 이러한 인간의 선택에 악은 부가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것이며 악이 단순히 나쁜 것만이 아니라 뒤에 따라오는 행복과 선을 조금 더 극대화시켜주는 역할까지 하며 세계를 최선의 형태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악은 음악으로 비유하자면 순간의 불협화음적 요소로써 오히려 음악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존재이다.[2] 유한한 존재에게는 아무리 선을 행하려 한다 해도 그 선 때문에 누군가 피해 보거나 고통 받는 악이 뒤따르게 되며 인간은 악을 선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의지가 있는 세상이 오히려 의지가 없는 세상보다 최선의 세상이며, 결과적으로 악도 하나의 선을 실행할 수 있는 방편이며, 결국 선이 존재하기에 악이 존재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악은 결국 신의 의지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내용이다.

사실 다른 사람도 아닌 라이프니츠가 이런 주장을 한 근본적인 이유는, 본인이 18세기의 과학자이자 신학자로서 근대 과학기독교 신앙을 결합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이프니츠는 근대 자연과학의 기계론적이고 결정론적인 세계관을 수용하여 우주 자체를 신이 창조한 하나의 거대한 기계로 보았다. 그런데 이런 우주의 법칙성과 인과성을 유지하는 범위 안에서는 신이라고 할지라도 마음대로 선을 창조하거나 악을 없앨 수 없고, 부분적으로 악을 이용해서 선을 추구할 수 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의 철학에 나오는 예정조화설, 단자론, 충족이유율 등의 어려운 개념들도 모두 당시의 합리주의와 종교를 매개하기 위한 목적이 바탕에 있다. 물론, 이것은 결국 신의 전능을 제약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기독교에서 정론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모든 것들이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철학사에서 낙관주의의 대명사로 불린다. 사실 이런 낙관적 믿음이 근대 유럽인들에게는 일반적인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러한 낙관론은 라이프니츠 사후에 일어난 리스본 대지진과 같은 재앙으로 인해 강력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프랑스의 계몽주의자 볼테르는 자신의 소설 《캉디드(Candide)》에서 라이프니츠의 주장을 풍자했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 팡글로스 박사는 온갖 불행을 겪지만(위의 포르투갈 대지진도 경험한다.) 자신이 그래도 가장 행복하다고 착각하면서 살고 있다. 애초에 신에 비하면 지성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인간조차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할 수 있고 그것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신이라는 존재가 그런 세계를 상정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실에선 한낱 인간들조차 을 만들고 치안을 확립하며, 도덕윤리를 교육하여 사회를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그 중 상당수는 실제로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다. 인간도 할 수 있는 일을 전지전능한 신이 못한다는 것인가? 인간 사회의 변화는 지금 이 세상이 완성형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이 주장은 자체로 신의 전지전능함을 부정하는 셈이다. 그리고 신이 악으로 가득찬 세상에 인간을 내던지고 인간이 악전고투하며 문제를 해결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인간은 무엇 때문에 신을 섬겨야 하는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에게 '선한 의지'로 '악한 상황'을 초래하게 하는 신이 과연 숭배할 가치가 있는가?

라이프니츠의 논리가 오늘날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단순히 볼테르가 편협하다거나 라이프니츠의 사고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현대의 기준으로 볼 때 논리 수준이 빈약하여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장 현재 신실한 신학자들조차 라이프니츠의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만 봐도 이 사실은 자명하다.

4. 인간의 악과 신의 악은 다르다

선이든 악이든 생명체의 방어 기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은 이런 현상들을 선과 악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보면 참 모호하다. 기본적으로 정의 자체가 매우 주관적인데 의도는 좋았다, 결과는 좋았다 등이 있고 악이 있어서 성장한다는 논리도 있다.

인간이 아무리 어떤 현상을 악이라고 규정한다 한들 그것은 상대적 관점일 뿐, 절대적인 신의 관점에서는 악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인문학의 발달에 따라 문화상대주의의 영향을 받아 선악 자체가 인간이 만들어낸 가상의 개념이라고 보는 관점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절대선이라는 단어는 그 어떤 존재가 보기에도 상대적으로 다른 의미를 가지지 않고 절대적으로, 공통적으로 선하다고 평가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상대선을 의미하는 이 주장은 앞서 서술했듯 다신교의 입장에서라면 모를까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입장에서 이러한 의견을 제시한다면 논점을 처음부터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3]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 인간은 결국 초월적인 신의 뜻을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 주장 또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전지전능한 신 개념과 상충한다는 점이다. 만약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어째서 인간에게 자신과는 다른 관점을 주었단 말인가? 신은 인간 또한 살인과 폭력 같은 행위들을 선으로 여기게끔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 신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위의 문항과 유사하게 종교인들 스스로의 행위를 부정한다는 점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종교인들은 그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신의 뜻을 교리 혹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확신하고 연구하며 실천하는 동시에, 그 기준을 타인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그들의 믿음이 틀리거나, 진정한 신의 뜻이 전혀 다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예정설이 주장되기도 하는데, 어차피 태초부터 인간은 은총으로 택함받아 천국으로 들어갈 무리와 지옥으로 갈 무리로 나뉜다는 것이다. 소위 전도행위란 이미 예정된 사람을 부르는 행위일 뿐, 비신자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어차피 비신자들은 애초에 신이 선택하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에 신의 뜻을 영원히 알 수 없다는 것이 교리이다. 그리고 성경에 그렇게 쓰여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 밖의 관점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변명하고자 만들어낸 궤변에 불과하고, 일종의 Ad Hoc 같은 주장이다.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그러한 신의 뜻 자체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럴 것이라고 믿을 뿐이다. 애초에 악의 문제 자체가 악의 존재에 대한 논리적 의문에 의하여 제기된 것인데 신이 원래 그렇게 정해놓아 인간은 알 수 없다는 식으로 논리 자체를 막아놓는 것이므로 반박이나 답변이 될 수 없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신의 기준으로 볼 때 인간 기준의 악행은 선으로 보인다고 한다면, 그러한 행위를 긍정하는 신을 어째서 믿는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믿음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나오게 된다. 소소한 것에서부터 차마 형용하기 힘든 것까지 모든 악행을 선, 하기에 마땅한 행위라고 간주한다는 점에서 이는 그저 강자에 대한 복종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반박이나 악마숭배자의 사상이 혼재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인간의 눈으로는 악으로 보이는 것이 신에게는 선한 것으로 정당화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인간을 해치는 재앙을 일으키거나 방조하면서 선한 것으로 간주하는 그런 신을, 인간은 왜 따라야 할까? 신의 선한 의지로 발발한 최악의 결과에서 인간이 얻을 것이 과연 무엇일까? 인간은 느낄 수도, 얻을 수도, 알 수도 없는 '선'을 신만이 인지한다면, 그 선은 인간에게 어떠한 가치가 있을까?

악의 방치와 같이 인간 입장에서 비상식적으로 보이는 신의 행동을 절대선이라고 믿는다면, 신은 보통의 선한 인간보다 더 신뢰할 수 없는 예측불허의 존재가 된다. 따라서 언제든 언약을 저버리고 천국 갈 사람을 지옥 보내는 등 인간 입장에서 온갖 비상식적인 행동을 할 수 있고, 비위를 맞추고 숭배할 의미가 없다. 물론 신은 절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고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는 성경 구절들이 있긴 한데, 신이 자기가 말한 것을 지킨다는 것 역시 상식의 영역일 뿐, 이미 인간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몰인정한 부분이 있는 신이 꼭 상식적으로 행동할 거란 보장이 없다.

창작물에 따라서는 이 주제에 더더욱 극단적으로 몰아가는 경우도 있는데, 바로 신은 인간에게 악하고 해로운 존재지만 너무 강해서 어쩔 수 없이 복종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코즈믹 호러와도 맥을 같이하며, 특히 크툴루 신화는 선악의 개념이 다른 초월적 존재 앞에서 무력한 인간과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절대자'를 극단적으로 드러낸 사례이다.

반대로 이를 뒤집어 인간 입장에서 신을 악으로 간주하고 죽여버리는 충격적인 전개와 결말을 보여주기도 한다. 바로 신 죽이기란 클리셰. 이 문서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YHVH인류의 적으로서 처단당하는 진 여신전생 2/진 여신전생 4 FINAL이 가장 직접적으로 이 문제를 찌르고 있다.

5. 고통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도 신이 되고 싶어서 선악과를 먹게됨으로써 모든 인간은 죽음에 근거한 고통(선악을 알게하는 지식)이라는 기준이 생겼으며, 이에따라 인간은 자신의 고통에 근거하여 이 세상을 선과 악으로 구분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다음 명제를 전제하고 있다.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은 신의 고유한 권한이며[4], 오직 자신에게 주어지는 고통의 유무에 의하여 인간이 스스로 선과 악을 정의하는 것은 신 앞에서 인정되지 않는다
신의 관점에서 악이란,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공의동시에 충족시키지 못하는 모든 것이다.
이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인간의 악과 신의 악은 다르다에서 다룬 논의가 동일하게 반복된다. 각자가 생각하는 방향에 따라서 신은 선신이 될수도 있고 악신이 될수도 있다.
  1. 이 주장에서 신은 최초에 인간과 세상을 완전하게 만들었다. 즉 성장을 위한 고통이 굳이 필요없도록 만들었으며 자연계에는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도 없었다. 그러므로 죽음, 고통, 두려움 등의 부정적인 모든 것은 하나도 없었다. 태초에는 인간의 정신도 성장이 전혀 필요하지 않도록 세상이 완벽했다는 의미이다.
  2. 그러나 인간은 성장을 위한 아무 노력도 없이 간단한 방법으로 신과 동등해지려는 반역을 시도했다. 인간이 선택한 그 간단한 방법은 인간에게는 금지되었던 지식인 죽음 곧, “고통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이었다.
  3. 바로 이 “죽음에 근거한 고통에 대한 지식”은 인간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공포와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근거하여 인간은 선악의 개념을 알게 되었다.
  4. 이에 분노한 신은 자신도 신이 되리라는 의도를 가지고서 인간이 갈구한 금지되었던 지식(영지주의), 고통을 통해서만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세상을 불완전하게 변화시켰다.

6. 악도 필요하다

이 모든 게 신의 섭리이고 악도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스카리옷 유다가 예수를 팔았기에 예수가 인류를 구원할 수 있었다는 식으로, 결국 인간은 신의 손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한 존재라는 주장. 하지만 이렇게 되면 불쌍한 유다는 하느님으로부터 처음부터 배신자로 만들어졌고 배신자로서 지옥에 떨어지는 운명이 고정된 것이기에 당연히 명확한 해답이 되지 못한다.

유다에게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결국 본인이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 게다가 베드로의 경우 3번 부인하고 회개했지만 유다는 그냥 자살해버렸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유다도 회개했더라면 예수가 용서해줬을 것은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미 유다의 배신을 알고 있었고, 유다는 태어나지 않는 게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좋은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고, 마치 낚시하듯이 시험한 것은 결국 신이며 예수인데, 한낱 인간인 유다가 더 나쁘다는 것은 비상식적이다.

이 경우에는 신은 전지전능할지는 모르나 절대선은 아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 유다를 희생시킨 것이기에 차라리 이 뒤에 배신에 대한 벌은 주겠지만, 벌을 다 받고 나면 뭔가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면 이 모순이 조금은 해결될 수 있겠지만 그런 것도 없다.

카르마윤회전생[5]과 신과의 합일을 믿는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중 일부의 경우에는 강경한 유대 민족주의자였던 유다가 예수를 배신했다는 죄책감에 자살한 후 여러 전생을 거치며 업을 갚고 다시 신의 품에 돌아왔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결국 죄를 씻고 구원을 받았음으로 신의 지선(至善)에 대한 모순이 해결되었다고 볼 여지가 있다. 다만 이러한 견해는 주류 그리스도교의 교리와는 다르며 주류 기독교(개신교, 가톨릭, 정교회) 입장에서는 이단에 해당된다.

밀턴의 실낙원 같은 경우, 이런 부류로 야훼를 해석해서 루시퍼의 타락도, 아담의 타락도 알았던 것으로 나오며, 대개 이런 주장의 경우 욥기를 같은 맥락으로 해석해 범위를 넓게 잡아놓는 편이다.[6] 대표적으로 C. S. 루이스가 이 부분에 대해 고통의 문제를 서술한 바 있고, 그는 타락한 우주, 부분적으로만 구원받은 우주에 있는 악과 선에 대해 4가지의 분류를 제시했는데, 곧 (1) 하느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순수한 선, (2) 반항하는 피조물들이 만들어 내는 순수한 악, (3) 하느님이 구원의 목적을 위해 그 악을 이용하시는 경우, (4) 그 결과 만들어지는 것으로서 고난을 받아들이고 죄를 회개함으로써 증진될 수 있는 복합적인 선이다. 다만 하느님이 순수한 악으로부터 복합적인 선을 만들어 내실 수 있다고 해서 순수한 악을 저지른 사람들의 책임이 면제되는 -하느님의 자비로 구원받을 수는 있어도- 것은 아니다. 이런 구분은 아주 중요하다.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지만,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화가 임한다. 죄는 확실히 은혜를 더하게 하지만, 그것을 빌미로 계속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전 체계는 선한 자와 악한 자의 충돌을 '고려해서' 만들어졌으며, 어떤 행동을 하든 위의 분류에 따라 결국에는 하느님의 계획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유다처럼 섬기느냐 요한처럼 섬기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자유의지의 존재 여부를 모호하게 만드는 데다가 인간이 마치 도구처럼 쓰이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전지전능이라는 것은 제약의 부재를 의미한다. 손가락을 튕겨서도 세상을 완벽하게 만들 수 있는데, 그걸 굳이 유다 같은 사람이 자살할 정도로 정신적인 충격을 받게 하는 방식을 채용하는 존재가 과연 절대선일까?

7. 자유의지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고 인간이 그 자유의지를 사용했기에 악이 발생한다는 주장이다. 기독교 내에서는 악에 대한 해명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으나, 여전히 허점이 많아 악의 문제에 대한 설득력 있는 답이 되기엔 부족한 상황이다.

7.1. 자유의지는 존재하는가

일단 이것부터가 확실치 않다. 애초에 자유의지의 정의는 천차만별이고 결정론 계통에서는 근본적인 입장으로 자유의지를 부정하기도 한다.[7]

이 문제에 대해 한 신학자는 '신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지만 너는 신이 아니라 정답을 모르고 선택의 순간에 네 의지대로 행하였으니 전지전능함과 자유의지는 충돌하지 않는다.'라는 답을 한 적이 있으나, 이런 식의 답변은 결국 '선택의 결과가 정해져 있는데 과연 그게 진짜 자유의지인가'라는 제일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는 바로 아래의 문제로 이어진다.

7.2. 기회 문제

높은 자리에 있으면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모두 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그러나 나쁜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높은 사람에게는 천부의 저주다. 왜냐하면 나쁜 일이라면, 제일 좋은 조건이 그러한 마음을 먹지 않는 것이요, 그 다음이 그럴 수 있는 여건에 놓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베이컨, "베이컨 수필집(김길중 역, 문예출판사)" 중 '높은 지위'
(전략)그때 현문스님이 다니던 성당의 주교님은 폴란드에서도 가장 존경 받는 카를 보티라[8] 추기경이었다. 이분이 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되신 바로 그분이다. 현문스님은 카를 보티라 추기경이 교황이 되기 1, 2년 전에 견진성사 의식에 참여한 것이다. 그러니 그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얼마나 영광된 일이었겠는가.
수련 마지막 날, 추기경님은 학생들에게 그 동안 가르침에 대해 질문이 있으면 하라고 했다. 현문스님이 번쩍 손을 들었다. 그는 당시 어린 나이였는데도 일찍 삶과 죽음의 근원적 의문에 휩싸였다. 세상의 많은 불공평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그였기에 견진성사를 받기 전에 반드시 이 의문을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문스님이 입을 열었다.
“신부님, 하느님께서 우리를 똑같이 사랑하신다면 왜 장애인들을 만드셨을까요?”
신부님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건 우리가 장애인들에게 동정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우리가 나쁜 일을 하면 그렇게 태어날 수 있다[9]는 것을 경고하시기 위함이지.”
현문스님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만약 그러한 신이라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순간 성사를 받을 수 없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신부님 말씀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성당을 나와버렸다. 그리고 난 뒤 성당에는 아예 발길을 끊었다.
현각, 《만행(萬行):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10] (열림원) 중 '나의 도반 스님들'

어째서 자신의 피조물을 사랑하사 그들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길 바라는 전지전능한 신은 악을 행할 가능성이 있는 자유의지를 주었는가? 본래 야훼를 비롯한 아브라함 계열 종교의 입장으로는 창조주는 인간을 만들 때 자신을 닮도록 했고, 인간을 자신의 아들 딸이라고 부른다. 현 세태를 생각하자면 옆집에 도박장이 있는 집에 이사간 거나 다름없다.
다른 관점에서는, 많은 현명한 부모들이 자기 자식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며 자기 자식의 꿈이 자신의 생각과 달라도 인정해 주는 것처럼 신 또한 피조물들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구약을 통째로 부정하는 것이다. 이집트인들이 유대인을 어떻게 억압했건 간에 그건 이집트인들의 자유의지로 이루어진 결과이기 때문에 신이 직접 나서서 이집트인들을 학살하면서까지 유대인들을 가나안으로 이끌면 안 되는 것이다. 신이 유대 민족을 이끌면 유대인들과 이집트인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 된다.

이에 관하여 기독교에서는 천국은 창조주와 함께 하는 자리고 지옥은 창조주가 결여된 장소라 표현하는데, 교리에 따르면 사후 그 자가 어떤 삶을 (그것이 악하든, 선하든) 살아왔든 간에 그는 우리 모두를 사랑하기에 이대로 자신과 함께하길 원하지만 함께하길 원치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를 존중한다고 말한다. 신과 함께하고 싶지 않은 자가 당도하게 되는 자리가 바로 지옥, 즉 신이 결여된 장소인 것이다. 따라서 구약과는 달리 신약 이후의 기독교에 가장 중요한 방향성이라면 이와 같이 무조건적인 자비와 선이고, 이는 종파에 따라 다르지 않다. 한 때 동성혼에 대해서 찬반논란이 과열되고 일부 극단주의자들이 동성애자들은 천벌 받을 죄인이라고 매도할 때 당대 교황이었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비록 동성애자가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내 앞에서 진실로 하느님을 구한다면 내 어찌 이들을 품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고 한 것이 이와 일맥상통한다. 예수가 과거, 현재, 그리고 앞으로 인류가 지을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임당한 이래, 무조건적인 자비와 사랑은 현 기독교의 핵심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다만, 이는 교리가 그렇다는 것이며 여전히 믿음의 문제로서 이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이 바라는 합리적인 답변은 되지 못하는, 다시 말해 내수적으로나 해결책이 될 수 있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단순히 개인이 신을 거부하여 지옥에 간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무고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상황을 신이 바로잡아 주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식의 의사를 존중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이 아닌 삶을 택하는 것을 인정해준다 하더라도, 그가 타인과 사회에 해를 입히는 행위를 하는 것까지 내버려두고 방관한다면 대체 그를 어떻게 좋은 부모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7.3. 처음부터 악의 발생 자체를 막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상제아당(亞黨)을 만들어서 인류의 조상으로 삼았다면 그 신성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찌 상제가 마귀의 거짓말을 곧이 듣고 마귀를 시켜서 아당의 마음의 진솔성 여부를 시험하였겠는가.[11] 설사 아당이 참람되고 망령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상제로서는 의당 다시 주의를 주고 권면하여 고치게 하기를 훌륭한 아버지가 자식에게 하듯이, 좋은 스승이 제자에게 하듯이 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 상제로서 이런 일을 하였겠는가.
안정복, "천학문답"
신이 인간을 사랑하고 전지전능하다면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들이 서로 싸우지 않도록 안배하는 것이 옳다. 식량이 부족해서 싸우지 않도록 모든 이들에게 만나를 베풀고 땅이 부족하지 않게 아름다운 목초지를 약속해야 한다. 그러나 재화는 늘 부족하고 불공평하게 분배되며 이로 인하여 싸움과 전쟁이 끊이질 않는다. 요약하자면 자유의지는 허락하되 악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방도를 전지하다면 알아야 하고, 전능하다면 가능해야 하고, 절대선이라면 이를 이행해야 한다.

창세기에서만 해도 사시사철 푸르른 목초지에 과실이 무한히 열리며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는 나무 등이 있었다고 하나, 인간의 범죄 이후로 지구 전체가 야훼에게 저주를 받아 무한한 생명력을 잃었다고 한다. 신의 관점에서 보면 스스로 죄를 지어 저주를 받아놓고 왜 자신들에게 무한한 자원을 베풀지 않는 것이냐며 원망하는 꼴이다.

그러나 비신자들에게는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전지하고 전능하며 선한 존재가 세상을 창조했다면 이 이야기는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지하기 때문에 그 결과를 미리 알고 있었을테고, 지선하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인간"들이 죄를 범하게 놔두지 않았을테고, 전능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떤 과학자 A가 인공지능을 탑재한, 인간과 같은 외관을 가진 로봇을 만들었다고 가정하자. A는 로봇이 단순한 기계를 넘어서길 원했기 때문에 위험성을 알면서도 몇몇 행위(이를테면 살인)를 금지하는 프로그램을 탑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로봇은 연구실을 벗어나자마자 한 행인을 살해했다. 이 경우 A는 그저 만들었을 뿐 로봇에게 살인을 명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다.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절대적으로 선하지도 않은 인간 과학자에게도 책임이 있는데, 전지전능하고 지선한 신은 그렇게 될 줄 알았고, 그런 일을 사전에 막을 수 있었음에도 방관했거나 일부러 그랬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사실 자유의지가 없더라도 주어진 환경이 좋지 않다면 악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전지전능하고 선한 신이라면 자유의지를 주는 동시에 상황도 더욱 좋게 이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앞으로 위험에 처할 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막을 힘도 갖추었지만 상황을 통제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에피쿠로스의 말처럼 그런 존재를 선하다고 하기는 문제가 있다. 실제로 창세기에는 이 땅이 저주를 받았다고 나와있다. 아담과 하와의 죄로 아무런 조건 없이 무한히 소산을 내놓던 땅은 이제 인류가 스스로 경작해야 했으며 경작을 방해하는 잡초나 엉겅퀴들이 생겨났다. 즉 성경에 따르자면 원래 이 세상은 100% 완전하게 창조되었으나 죄가 들어오면서 야훼의 저주를 받아 이 꼴이 되었단 얘기다. 그러나 또 반복되듯이 전지전능한 신이 실재한다면 그러한 저주도 해결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럴 수 있는데 그러지 않는다는 것은 절대선이 아니라는 의미다.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오류가 없어야 하며 야훼는 행동을 번복할 수 없다. 때문에 에덴은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최후의 날에 현 우주를 멸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고 한다. 즉, 언제인지도 모르는 최후에는 아무튼 가능하지만 당장은 안 된다는 것인데, 전지전능한 존재치고는 많이 궁색한 변명이 아닐 수 없다.

신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 어떤 자원도 부족하지 않고 풍족한 지구라고 해도 과연 다툼이 없을 것 같은가? 답은 그래도 있을 것이다. 당장 학생들이 밥 한 숟갈 더 먹자고 교실에서 다투는 일이 얼마나 되는가.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싸움은 기본적인 자원이 부족해 싸우는게 아니라 풍부한 자원의 토대 위에서 싸우는 것이다. 즉 있는 사회임에도 인간의 욕심 때문에 싸우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그러나 모든 전쟁이 욕심이라는 개인적 동기로 인해 발생하지는 않는다. 토마스 무어의 유토피아에 나오는 구절을 빌리자면, "결핍의 공포가 없음에도 욕심을 부리는 동물은 없다". 학생들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마찰과 자원전쟁을 동급으로 놓는 것은 무리다. 단순히 국가의 창고를 좀 더 채우려는 욕망 때문에 그것 이상의 엄청난 희생을 가져올 수도 있는 전쟁을 일으킬 사람은 거의 없다. 누구나 노력에 따라 균일하게 자원을 얻을 수 있다면 다른 이가 가진 영토나 재산에 눈독 들일 일은 없겠지만, 애석하게도 자원은 대개 특정 지점에 편중되어 있다. 국가 간 무역이 진행되면 이러한 차이로 격차가 생길 수밖에 없고, 이것은 장기적으로 국가 간의 다툼을 불러오게 된다. 역사상의 거의 대부분의 전쟁은 이러한 경제문제 해소나 요충지 확보를 위해서였다. 근대에 제국주의가 등장한 근본적인 원인도 단순히 유럽인들이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다른 지역의 자원이 유럽에는 없고, 이를 각국이 들여오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경쟁이 발생하기 때문에, 여기서 뒤쳐지는 것을 장기적으로 큰 위협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혹은 지금은 안전해도 언젠가 자원이 부족하리라는 위기의식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국가를 경영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복잡하며 더 많은 자원이 필요하다. 따라서 지도자들이 탐욕스럽지 않아도 전쟁만이 돌파구인 순간이 올 수도 있다. 어떤 독재자나 전제군주가 개인의 영달을 위하여 전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역사를 돌아볼 때 그런 강력한 체제가 등장한 배경 자체가 거의 분배 문제로 인한 혼란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놓인다고 누구나 똑같이 악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나, 사실 인간 본성에 대해서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결국 누군가가 손에 피를 묻힐 것임은 거의 확실하다.
이에 대한 신학적 반론으로 장 칼뱅과 마르틴 루터는 자유의지는 분명 존재하고, 또 인간에게 주어졌으나 인간 본성의 악함(원죄로 인한)으로 인간은 자연히 악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아우구스티누스-히에로니무스의 은총 교리는 애초에 인간이라는 족속 자체에 신 없이는 구원- 참된 선은 존재할 수 없다고 보며 인간이 자유의지와 그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논리는 가톨릭, 개신교 구분 없이 이단이다(펠라기우스주의 참조).

물론 이 반론은 애초에 반론이 되지도 못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본성도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요소라는 것이다. 제작자가 나몰라라 할 상황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만든 당사자가, 자기 말 안 들으면 무조건 나쁜 놈이고 지옥 간다고 협박하는 꼴이니 적반하장이다. 종교에서 어떻게 보는 지가 대체 무슨 답이 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보는 것에 어떤 납득할 만한 근거가 있는 지가 중요한 것이다. 특히 이러한 논리는 도덕, 윤리가 종교에 귀속될 수밖에 없어서, 실제 도덕, 윤리가 종교적 교리로 왜곡될 위험성이 있다. 즉, '신의 뜻 = 진정한 선'이 되기 때문에 현실에 맞지 않는 비윤리적인 행위들도 신의 이름 하에 버젓이 행해지는 근거가 된다.

신학에서는 위에서 말한 조건들, 모두에게 자원이 공평하면서도 풍족하게 분배되는 조건 하에서만 선하고 그렇지 않으면 바로 악해지는 게 어찌 선한 것이냐며 반론하기도 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진정으로 선한 사람이라면 풍족하고 평화로운 상태가 충족되어야만 선한 것이 아니라 설령 지옥불에 온몸이 활활 타고 있어도 선함을 잃지 않아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는 풍족한 지역, 가난한 지역, 고귀한 태생, 천한 태생, 천재와 범재 등등 사람을 선하게도, 악하게도 만드는 이루 말 할 수 없이 다양한 삶의 양식이 스며들어 있고 그 안에서 삶의 기쁨을 누리던 고단함에 고통을 받든지 간에 인간 스스로의 자유의지로서 선하게 살아야 구원 받는다고 한다. 신적인 존재가 선하게 살 만한 오만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줘서 비로소 선하게 산다면,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신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선하게 살도록 신적인 힘으로 유도, 혹은 강제하는 것이기 때문. 신의 은총 아래에서 운명의 과실이 그 즙이 줄줄 흐르는 속살을 알아서 벌려주는 삶, 그렇게 삶의 고통을 모른 채 오직 즐거움만 누리면서 선해봐야 무의미하다. 삶의 단맛뿐 아니라 쓴맛, 매운맛, 떫은맛을 보았음에도 그래도 스스로 선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로서 구원의 길을 걷는 것이다. 라는 게 그들의 논리다. 문제는 인류 개개인마다 태생이나 환경 등의 차이가 있어 모두가 공평하게 삶의 단맛 매운맛 떫은맛 다 적절히 보면서 살다가 어떻게 살아갈지 선택권이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부유한 집안에서 훌륭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났는데 이 경우는 상대적으로 삶의 단맛을 다른 이보다 더 많이 보게 될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하층민 집안에서 장애까지 가지고 태어났는데 이 경우는 당연히 삶의 쓴맛, 떪은맛, 매운맛만 주구장창 맛보게 된다. 이렇게 서로 다른 태생과 환경은 그 사람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과 자세, 행동양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정말로 인간의 인생에 오만가지 유형의 맛이 주어지고 그러한 것들을 모두 경험해보면서 자기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게 신의 의도라면 지금 70억 인류에게 각각 빈부, 외모, 국적 등의 차이가 있는 것이 설명이 안 된다. 시험을 치를 것이라면 당연히 모두가 같은 문제지를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또 다른 문제로, 위는 결과에 따라 자유의지 정의를 달리하고 있다. 각종 고통이 동반되는 삶에서도 자유의지로 선하게 살아야 구원 받는다고 한다면, 적어도 이 때 자유의지는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반면, 신이 오만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서 선하게 살게 되는 것은 자유의지가 무시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인간이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확고한 자유의지가 있다면, 신이 은총을 베풀어도 자유의지가 상실된다고 볼 이유가 없다. 즉, 자유의지의 정의를 그때 그때 달리하고 있다. 나쁜 환경에 둘러 쌓인 사람을 예시로 들 때 자유의지는 외부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 절대적인 자유의지인 반면, 신의 은총과 자유의지를 함께 거론할 때 자유의지는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7.4. 전지전능

"...나는 더 이상 종교적인 주장들과 삶의 현실들을 조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특히 세계의 상황을 볼 때 선하고 전능한 신이 존재하는지, 그 분이 이런 세상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는지 더 이상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은 고통과 괴로움으로 점철되어 있다. 나는 선하고 친절하게 행동하기 원하는 통치자가 있고, 그가 이 세상을 책임진다는 사실을 순순히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신은 신이 사랑과 능력이 많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어머니를 위해 꽃 몇 송이를 손에 들고 집으로 걸어가던 어린 소녀가 음주 운전자의 차에 치여 즉사했고 신이 그것을 가로막지 않은 것에 대해 당신은 설명해야 한다..."
바트 어만(Bart D. Ehrman)[12]
유일신을 기반으로 삼는 종교들은 신을 전지전능한 존재로 묘사한다. 그런데 정말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하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신이 알아야 한다. 즉 신이 전지전능한데 그럼에도 '악이 창궐하는' 자유의지를 주었다면, 신은 실제로는 전지전능하지 않든지, 아니면 전지전능하지만 해결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든지 한다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쉽게 예를 들자면, 전지한 신이라면 뱀이 인간을 유혹하여 인간이 선악과를 먹는 죄를 범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신은 뱀을 창조했고, 결국 인간에게 벌을 내린다. 즉, 인간이 죄를 짓도록 자신이 설계한 주제에, 정작 인간이 죄를 지으니 그에 대한 벌을 내리는 것이 된다.

7.5. 자유의지는 정말 악의 근원인가

모든 악이 자유의지로 인해서 나타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사이코패스만 보더라도 순수하게 자유의지 때문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이런 답은 악을 개인의 의지 문제로 국한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만하다. 어떤 이들은 선천적인 결함을 지닌 존재가 모두 악인이 된다는 것은 아니며, 장애가 있거나 뇌해부학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그들에게는 순수한 자유의지가 없냐고 주장한다. 단적으로 말해 왜 사이코패스와 장애인들의 자유의지가 우리와 같은 순수한 자유의지가 아니라고 멋대로 단정 짓는 것인가? 이다. 그러나 이것은 얕은 생각인데, 사이코패스는 의학적 정의상 공감 능력 자체가 없는 이들이다. 이들도 자유의지는 있다. 오히려 자유의지가 있는데 공감능력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자유에 따를 때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다. 겉으로 선량하게 행동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그들 역시 악에 대한 처벌을 분명히 인지하기 때문이고, 자신의 천성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공감능력의 부재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자유의지에 따라 그들이 선택한 특성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자유는 있지만 그 자유로 택하게 되는 것은 자유롭게 택할 수 없고, 그것의 궁극적 원인이 신이라면 책임을 물 수도 있는 것이다.
여차저차 하지만 무신론자들과 기독교인과의 기본적인 의식의 차이는 현실에서의 죽음과 고통이 '악'인가라는 질문을 통해서 갈리게 된다. 무신론자들은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사후의 보상으로 현실에서의 고통이나 죽음을 상쇄할 수 없고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위해 현재 이런 고통을 치르는 이유에 의문을 던지며, 기독교인들은 사후의 영생과 구원을 믿고 현세의 고통이나 죽음을 신의 의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관점을 받아들이면, 현세에서의 가치판단 기준이 모호해진다는 것이다.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나도 신의 의지로 받아들이면 끝이니 문제 해결에 적극적일 수가 없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또한, 이 부분에 대해 어폐라는 주장도 있다. 정말 오래 살았거나 미치지 않은 이상 고통과 죽음이 왔을 때 신을 원망하지 않는 자는 없다는 말인데,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 원망할 대상이 필요한 것이 일반적인 사람으로서 당연하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운명이나 남을 원망하는 등 신자들이라면 그 대상이 신이 되기가 쉽다. 게다가 애초에 이 이야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관점에서 무신론자보다는 덜하다는 것이지 기독교인도 신을 원망하게 된다고 해서 어말이 되지 않는다. 사후세계를 믿는 사람이 죽으면 끝이라는 사람보다는 죽음에 대해 덜 나쁘게 받아들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무신론자 관점에서는 심판을 기다리는 죽은 자보다 오히려 걱정을 덜 한다고 본다. 또한 심판을 기다릴 필요 없이 진정한 '끝'으로 받아들이므로 실질적으로는 무신론자가 편안히 죽는다고 볼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선과 악에 대한 판단 기준이 문화적, 사회적, 시대적, 정치적 배경에 따라 조금씩 바뀌는 것 때문에 개인의 자유의지와는 무관하게 악이 일어날 수 있다. 이 경우엔 선악에 과연 절대적 기준이 있는가 하는 점이 먼저 문제가 된다. 종교인들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악의 판단 기준이 아니라 신의 뜻을 선의 기준으로 삼는다고는 하는데, 문제는 신의 뜻이랍시고 나오는 종교 교리조차도 문화적, 사회적, 시대적, 정치적 배경에 따라 바뀌어 왔다는 것이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신의 뜻이 변하면 안 된다는 것 또한 무신론자들이 만들어낸 편견일 뿐이라고 하는데, 사실 논점이 매우 어긋난 반박이다. 또한 근본적으로 기독교인들의 유일한 근거인 '성경은 100% 사실이다'가 무너진다 .여기서 말하는 변하는 교리란 것은 무슨 구원이나 심판에 대한 교리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런 건 어차피 종교인들에게만 중요한 내용이니 비종교인들이 그런 부분까지 문제삼는 경우는 드물다. 여기서 말하는 교리는 선악에 대한 부분, 윤리적인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구약에서는 현대인의 눈으로 볼 때 비윤리적인 행위들이 많이 나오는데, 야훼가 그 당시에는 그런 행위들을 방조하거나 조장한 뒤에 이제 와서 변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한다면, 과연 그런 신이 선악을 논하는 것에 어떤 위엄이나 권위가 있겠냐는 말이다. 다른 부족을 공격해서 갓난아기까지 몰살시키는 행위에 대한 선악 판단이 시대에 따라 바뀌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다. 그 판단 주체가 인간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신은?

이것 역시 기독교에서는 야훼가 당시 사람들의 문화와 윤리 수준을 맞춰준다고 한다. 당장 적은 삼대를 멸하고 여자는 끌고 가서 종으로 부리는게 아주 합당한 시절에서 불살주의를 주장하며 신약의 예수마냥 "다 용서해라."라고 한다면 어느 인간이 미쳤다고 신을 따르겠는가? 당시 유대 민족으로부터 자신의 거룩함과 영광을 알려 만민을 구원하려는 계획을 가진 야훼로서는 추후 자신의 계획을 방해할 가능성이 있는 것들은 모두 제거하는 게 답이기는 하다. 대를 위하여 소를 희생하는 격. 심지어 당시만 해도 유대인들은 야훼가 주는 이익을 믿고 야훼를 따랐지 야훼가 신이라 따른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가나안 입성 전부터 삐긋거리더니 입성 후에는 뒤통수만 수십 번.
물론 이것도 같은 수준에서 반박이 가능하다. 애초에 신이 당시 사람들의 문화와 윤리 수준에 맞춰준다고 하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 전지전능한 신이 인간들을 일깨워주고 계몽하기는 커녕 비위를 맞춘다는 뜻이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잘못된 윤리기준을 바로잡아야 할 신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스스로의 윤리, 도덕적 기준이 아닌 인간들의 윤리 기준에 맞춰준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 무엇보다도 어느 인간이 감히 대홍수를 일으키고 도시를 통째로 불태우는 신이 말하는 것을 자신들의 문화에 어긋난다고 안 따를리가 없다. 신으로서의 위엄 한 번 선보이면 자신들의 문화고 뭐고 당장 따르지 않았을까? 심지어 아브라함은 신이 자신의 아들을 바치라고 하자 실제로 바치려 들었을 정도다. 도저히 이익을 믿고 따른 자의 행동이라고 볼 수 없다.

7.6. 자유의지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자유의지에 해당하는 부분을 제외하더라도 악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다는 이야기. 쉽게 이야기해서 길 가던 의사가 뺑소니 사고를 목격했다고 치자. 이 의사가 사고 피해자를 구해주는 것이 뺑소니 운전자의 자유의지를 침해하는 일일까? 전혀 아닐 것이다. 자유의지를 존중해서 뺑소니 운전자가 사고를 치는 것을 방관하는 것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그로 인해 무고한 피해자가 생겼을 때 충분히 도와줄 능력이 있음에도 구해주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한낱 인간들조차 무고한 피해자들을 돕고자 하는데, 충분한 능력을 갖춘 신이 방관한다는 것은 변명이 불가능하다.

원죄론은 답이 될 수 없다. 원죄론으로 악의 문제를 답하려는 시도는 전형적인 애드혹으로서, 너네는 기억도 없겠지만 태어날 때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나 고통스러운 것이니 그런거 따지지 말고 열심히 믿기나 해라는 식의 회피에 불과한 것이고, 실질적으로는 악의 문제에 대해 아무런 답도 안 하는 것 이상으로 매우 악질적인 행위다. 상대가 잘못했다고 윽박질러서 주눅들게 하고 스스로가 잘못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노예 농장주들이나 인신매매범들, 독재자들이 자주 하는 행동이다. 또한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언제일지 모를 먼 훗날의 보상이 과연 지금의 고통보다 나은 대가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고통이란 게 무슨 숫자로 치환되는 대상도 아닌데, 지금 아프리카 내전에서 산 채로 불에 타죽은 어린아이의 고통이 과연 훗날 천국에 드는 것으로 보상이 될 리 없다. 제아무리 극상의 기쁨과 즐거움이 주어진다고 해서 산 채로 불에 타 죽거나 그에 준하는 고통들에 대한 보상이 과연 될지 생각해보자. 그런 생각을 가진 신이 과연 인간의 관점에서 선한 신이 될 수 있을까?

8. 신은 악에 대해 직접적으로 대처하지 않는다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지금은 구약 시절 때마냥 죄악이 난무한다고 소돔과 고모라에 신이 손수 메테오를 후려치던 시절이 아닌 예수가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모두 짊어지고 죽음으로써 인간의 죄악이 모두 면제된 신약 이후의 시대다. 구약과는 달리 인간의 죄로 인해 신과 인간 사이에 단절이 이어진 지금 같은 시대에서 더 이상 신은 구약 시대마냥 직접적으로 함께하지 않는다. 다만 영적으로 함께하며 피조물이 시련이나 위기에 빠졌다면 이를 이겨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올바른 길로 비춰줄 뿐이다. 그것에 응하고 자신의 의지로 걸어갈지는 피조물의 선택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우화로도 제시된다.
지나친 폭우로 인해 홍수로 침수될지 모르는 마을에 한 청년이 있었다. 라디오에서 이를 경고하며 경찰들이 조기에 주민들을 피난시키려 하자 마을 사람들이 피난하는데 청년은 피난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자네, 도망치지 않고 뭐하는 건가?" 라고 물으니 청년은 기도하면서 "괜찮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지켜주실 거니까요." 라고 말했다. 이윽고 마을이 침수되기 시작하고 구조대의 구조선이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 도착했으나 다른 주민들과는 달리 여전히 청년은 주님이 지켜주실 거니까 괜찮다며 구조를 거부했다. 조금 있은 후, 이번엔 구조 헬기가 아직 구조되지 못한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 날아왔지만 마찬가지로 청년은 주님이 지켜주실 거라며 구조를 거부하고 가만히 기도했다. 그리고 결국 마을 전체가 침수되면서 청년은 익사했다. 사후, 청년은 하느님 앞에 서게 되자 굉장히 억울한 얼굴로 따지고 들었다. "주님! 전 주님이 절 지켜주실 거라고 믿고 마지막까지 기도했는데 어찌하여 절 지켜주시지 않으신 겁니까!" 그러자 하느님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그래서 내가 너한테 세 번이나 구조대를 보냈잖아!"
기독교 교리의 기본은 예수가 인류 대신 피흘려 죄를 면제해 주었다는 것, 즉 '사람과 신 사이에는 단절이 없다'이다. 그렇다면 '신은 최소한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도 실질적으로 개입하여 구원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성경에서는 간절히 기도하면 들어준다는 구절도 많이 있다.[13] 이런 구절들의 의미를 위에 사례에서 구조대를 보내준 것 처럼 기회를 주어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허나 이 문제의 논점은 잘못을 저지른 자가 자기의 실수로 악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잘못을 저지른 이의 행위 결과를 아무 상관없는 이가 받았다고 할 때 그 책임은 분명 저지른 자에게 있지만 그것의 결과를 '무고한' 이가 당한다면?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 남의 행동에 피해를 입는 일은 일상다반사이고, 이것이 부당함에도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신이 아무 조치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어떤 신의 뜻이 있다 해도 그것을 모르는 인간이 이에 항의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위의 우화가 묘사하는 바와는 달리 현실에서는 설령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재난이나 사고로 미처 도움을 구할 여유도 없이 목숨을 잃거나 돌이킬 수 없는 고통에 빠지는 사례들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에서 충분한 비유로 보기에 어려움이 있다.

9. 신도 악을 지녔지만 행하지 않는다

신은 선의 코드와 악의 코드를 모두 가지고 있으면서 "오직 선만을 행하는" 존재라고 규정하는 방법이다. 이 경우 천사와 같은 신의 수족은 "선의 코드만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아브라함계 종교의 사탄과 같은 적대자는 "악의 코드만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규정된다. 인간은 마치 신과 같이 선과 악의 코드를 모두 가지고 있으나 둘을 같이 행하는 존재로 규정된다.

대표적으로 헤겔은 악도 신 자신에 의해 정립되는 것으로, “세계의 모든 것은 신적 정신 혹은 (Geist)으로서의 신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여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변증법적 운동으로부터 온다.악은 정신의 변증법적 자기활동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필요한 요소이며 정신에 의하여 부정되고 고양 된다”고 했다.[14]

이것은 굉장히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설명으로, 결국 신은 자신과 같은 존재를 원해서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계 종교의 야훼를 설명하는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는데, 야훼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므로, 야훼의 창조목적이 자신과 같은 존재를 얻는 것이라면, 인간이 그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야훼처럼 "스스로 존재할 수 있어야한다." 따라서, 악은 인간이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즉, 선택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인 "악이냐 선이냐?"를 구성하기 위하여 악과 선이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이 해석은 신의 창조 사유가 인간이 자손을 얻고싶어 하는 욕구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전제를 요구한다. 따라서 이 전제를 사용하지 않는 종교에서는 이 해석을 사용할 수 없다. 또한 이 해석은 인간이 신에게 악의 방치를 항의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신의 목적이 애초에 스스로 선을 선택하는 존재의 생산에 있기 때문에 신이 악을 제거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가톨릭에서도 이레나오와 같은 교부들이 이와 비슷한 논지의 말을 남긴 바가 있다. 이레네오의 경우에는 흔히 이단논박으로 알려진 "거짓 지식의 폭로와 반박"에서 세상을 인생이 인간이 스스로 선택을 통해 신적 존재로 훈련받는 곳으로 보았고, 아예 신으로 불리는 존재는 "하느님과 그의 아들, 그리고 '입양된 자' 뿐이다."란 서술을 했다.

성 바오로의 서신 중에는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가 언급된다. 또한 욥기에서도 사탄은 정죄의 대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이것은, 신을 악과 선을 둘다 행할 수 있으면서 선만을 골라 행하는 존재로 보는 해석과 상당히 부합하는데, 이 해석 하에서는 사탄이 그저 인간이 선을 행하는 연습을 하기 위한 스파링 상대에 불과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접근법에도 약점은 있다. 신이 만일 인간이 자신과 같은 권한을 수행할 수 있는 위치에 서기를 바랬다면, 전지전능한 신이 아직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또한, 신이 두 코드 중 항상 선 만을 택한다고 주장함은 기존 죄의 문제에서 논란이 되었던 사항을 그대로 반복하는 선에서 그친다.

10. 악은 경고이다

악은 신이 인간이 무엇인가를 잘못하고 있을 때 보내는 일종의 경고라는 의미이다. 물론 아래에서처럼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11. 인간은 신을 이해할 수 없다

신은 우리를 훨씬 초월하였고 우리의 판단과 사고를 통해 이해하지 못하며 신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어떤 것이기에 악하다고 주장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카렌 암스트롱이 저서 《신을 위한 변론》에서 주장한 논리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만으로는 상식에 기댈 수 없는 '불가해한 괴물'을 굳이 믿고 따라야 할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인간이 감히 신의 뜻을 어찌 헤아리겠냐는 식의 논리는 '신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면서 아는 척하는' 신학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암스트롱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는 신이 선하지도 지혜롭지도 않다'고도 말한다.
“암스트롱의 책은 상당 부분 회피와 모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증거적 악의 문제 같은 반박이 제기되면, 암스트롱은 자신이 믿는 '신'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존재라며 망토를 덮어 자신의 주장을 보호한다. 하지만 자신에게 편리할 때는 살짝 걷어내 세속의 종교인들이 그 안들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동시에, 그녀가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신성한 존재'-절대 선과 아름다움, 질서, 평화, 질서, 정의로서 묘사될 수 있는-의 속성을 슬쩍 내비친다. 이러한 행동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의미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의미 사이를 편의에 따라 시소처럼 왔다 갔다 하는 의미적 시소 전략의 예이기도 하다.
스티븐 로, “왜 똑똑한 사람들이 헛소리를 믿게 될까”, 와이즈베리,(2011), P. 192

이러한 주장은 '전지전능'에서부터 문제를 일으킨다.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들에게 자신의 의사를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며 애초에 어떤 이유로든 '의사를 전달할 수 없다' 라는 것 자체부터가 성립될 수가 없다. 차라리 신은 죽어라 말하는데 인간이 듣지 않는다가 더 합리적인데, 이 역시도 자유의지 문제로 이어진다. '왜 인간이 신의 말씀을 여태껏 듣지 않고만 있는가?' 하는 질문인데,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기에 논리는 궁지에 몰린다.

12. 신의 영광을 위해 악이 존재한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골로사이서 1장 16절
이 백성은, 나를 위하라고 내가 지은 백성이다. 그들이 나를 찬양할 것이다.
이사야 43장 21절
그런데 우리의 불의가 하느님의 의를 드러나게 한다면,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하느님이 불의하시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으로 내가 말해 본 것입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겠습니까? 다음과 같이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나의 거짓됨 때문에 하느님의 참되심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서 하느님께 영광이 돌아간다면, 왜 나도 역시 여전히 죄인으로 판정을 받습니까?" 더욱이 "좋은 일이 생기게 하기 위하여, 악한 일을 하자" 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그런 말을 한다고 비방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심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로마서 3장 5~8절
성경에 따르면 모든 천지 만물은 야훼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그리고 인간과 천사는 타락할 가능성을 가지고 창조되었는데, 이것은 절대로 타락할 수 없는 기계 같은 존재에게 찬양을 받는 것보다 타락할 자유의지가 있는 존재에게 찬양을 받는 것이 더욱 하느님에게 영광이 되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15] 성경에 따르면 그 결과로 타락한 천사는 마귀가 되었고, 인간은 타락하여 대대로 죄의 본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서에 따르면 인간이 죄로 더럽혀졌다고 해서 신의 영광이 가려질 수는 없는데,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 있으나) 죄인인 인간과 신이 대비되어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기 때문이고, 또한 죄를 심판함으로써 신의 공의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진실로 하느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
욥기 34장 12절
주님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고, 주님의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의 하느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 너희에게서 얼굴을 돌리셔서, 너희의 말을 듣지 않으실 뿐이다. 너희의 손이 피로 더러워졌으며, 너희의 손가락이 죄악으로 더러워졌고, 너희의 입술이 거짓말을 하며, 너희의 혀가 악독한 말을 하기 때문이다.
이사야 59장 1~3절
만약 신이 죄에 대해 공의롭게 심판하지 않는다면 그의 영광이 더럽혀지기에 결코 공의를 굽히지 않으며 그렇기에 신이 인간들의 각종 악행들을 그냥 지켜만 보는 것 역시 그저 공의를 따라 죄인들이 죄로 인해 고통받도록 내버려 두는 것일 뿐이므로 신의 영광을 가리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하느님께서는 이 예수를 속죄제물로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피를 믿을 때에 유효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주심으로써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서 3장 25절
그러나 신은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하여, 심판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기회를 주는 한편 모든 인간에게 억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지 않고, 오히려 각종 미혹과 죄의 유혹 등 구원에 방해가 되는 각종 악조건들을 허락하였다.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에 떨어지는 걸 감수하더라도 악조건 속에서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 영광을 받는 것이, 모든 사람들이 억지로 믿어서 구원 받는 것보다 신에게 더 영광이 되기 때문이다. 양보다는 질인 것이다. 당장 인간적인 관점으로만 봐도 다 큰 어른이 개미들 상대로 힘자랑 하는 것을 보면 한심해 보이는데, 나약하기가 짝이 없는 인간들을 상대로 힘자랑 해서 억지로 자신을 찬양하게 하는 것이 영광이 될 리가 없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야훼는 인간들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영광이 가장 잘 드러나는 방식으로 세상에 개입한다는 말이다. 신은 인간들이 죄를 짓고 지옥에 가는 것을 기뻐하지는 않으나, 그것을 막는 것보다 더욱 상위에 있는 원칙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위하여 하느님이 악을 허용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자신의 품위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영혼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마귀와 엄청난 핸디캡 게임을 하고 있는 셈이다. 참고로 '하느님의 영광이 잘 드러난다'는 것은 전적으로 종교적인, 야훼와 천사의 입장에서의 관점이다.

12.1. 반박

이는 논리를 서로 뒤집어도 해도 논리적인 하자가 없다. 즉, “악은 선의 부재”와 “악은 선의 부재”라는 논리적으로 동등 하듯이 말이다. 신이 악을 창조하고 그 악을 위해 선을 “허용”하였으며, “자유의지”로 악을 선택하는 것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문제라고 한다는 주장도 논리적으로 동등하다. 예수를 보낸 것도 예수라는 스스로 “패널티”를 입고도 인간이 악을 선택하는 것이 신에게 더 영광된다고 해도 논리적으로 문제가 없다.

이러한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선을 일방적으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악은 선의 부재에서도 겹치는 문제이지만, 이는 선을 이타성 같은 사회적 관계로 보는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신에 의해 판단되는 것으로만 보고 있고, 신을 선하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한 도구로 '선의 정의'를 내리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이 무엇인가 정의하기 어렵지만, “선”이라는 것은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인간을 만든 도구에 선악이 따로 없는 것은, 그것은 도구와 인간은 사회성 있는 교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구로 인해 사람이 해를 입거나, 도구가 의도대로 작동하지 않아도 그 잘못은 인간의 오용이나, 잘못된 설계이지 도구가 사악하기 때문이 아니다. 따라서, 신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것이라면, 지선은 커녕 선한가 조차 논의하는 것이 부적절하다. 인간은 그저 신의 귀속템 같은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버려진 고아를 입양하는 일은 인간과 다른 동물 모두에서 나타는 이타적 행동이다. 한 암컷 침팬지는 젖이 부족하여 새끼를 여러 번 잃었는데, 나는 그 암컷에게 입양한 새끼 루체에게 우유병으로 젖을 먹이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 암컷은 루체와 그 뒤에 태어난 자기 새끼들까지 우유병으로 길러냈다. 이 암컷은 평생 내게 고마워했다
프란스 드 발, “착한 인류”, 오준호 옮김, 미지북스, 2014, P. 180
당장 위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도덕성에 대한 연구도 “이타성”을 중점으로 연구하고 있다. 이타성, 즉, 타인을 위하는 마음을 중점으로 보고 있지, 누군가에게 귀속되었는가는 보고 있지 않다.
이런 선의 정의를 기독교의 교리라는 식으로 회피하는 것은 적절치 못 하다.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신과 선은 게임 규칙 같이 특정한 내부에서만 통용되는 규칙이 아니라, 우주적인 보편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렇기에 선의 정의가 매우 보편적이어야 한다.

또한 자유의지를 주장하는데, 신을 위해 창조되었지만, 인간은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의 능력이 매우 강력해서 상시 인간을 감시하고 있고, 재앙도 내리며, 최후의 심판과 지옥을 준비하고, 구원 또한 준비해두면서 기회를 주고 있다는 말에서 앞뒤가 맞지 않다. 이렇게 자신의 권능을 계시로 알려주면서, 힘자랑하고 있지 않다는 것도 맞지 않다. 이를 “억지로 믿게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박해받은 적이 없다. 아니 박해할 수가 없다. 자유의지를 정의할 때, 신이 주는 불이익 속에서조차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다고 정의할 수 있다면, 인간이 인간에게 주는 불이익은 인간을 통제할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이 단락의 주장은 “악은 선의 부재이다”와 마찬가지로, 선의 정의와 자유의지 문제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13. 악은 선의 결여이다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는 이 세상에 내재하는 '악'의 사실을 설명하기 어려웠었다. "왜 신은 만든 자유로운 존재인 인간과 천사가 그 자유를 악 때문에 남용함을 막지 않는 것인가?" 이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노는, 악이 그 자체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선'한 것으로서 만들어진 의지가 자신의 놓여 있는 질서에 배반할 때에만 악이 존재한다는 것, 이 의지의 반역 즉 '죄'를 회개하지 않는 죄인은 그 악에 대하여 당연한 벌을 받게 되며, 이리하여 악도 신의 섭리 안에 들어 있음을 밝혔다. 성서 가운데에는 신의 전능과 악의 존재에 관한 논리적인 해석이 제공되어 있지 않으므로, 근대에 와서 여러 각도에서의 신학적인 주장이 펼쳐졌다.

여기서 특히 가톨릭에서 해석하고 있는 '악'이라는 용어를, evil과 wrong의 경우 두 가지로 나누어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evil : 당연히 있어야 할 선, 자연히 본질적으로 속해 있어야 될 선의 결여를 '악'(evil)이라 한다. 즉 자연히 갖추어져 있고, 어떤 존재에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을 이 경우의 '악'으로 본다.
② wrong : 바르지 않은 것, 틀린 것을 이 경우의 '악'(wrong)이라고 말한다. 인간 행위에 적용하였을 때, 당연히 나아가야 할 길, 인간의 최종 목적인 천국에 다다르는 길에서 벗어남을 지칭한다. ①②가 마찬가지로 '악'의 의미로 쓰이지만, 엄격히 말해서, 'wrong'은 '진리'에 반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evil'은 '선'에 반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가톨릭 대사전, <악> 항목 中

대표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러한 주장[16]을 했으며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악은 선의 부재(nicht gut)로 보았다. "선은 옷이고, 악은 옷에 생긴 구멍이다."와 같은 비유를 통해 선과 악의 관계를 설명하려 하는 경우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가톨릭의 자세한 교리를 보고 싶다면, 악의 문제/가톨릭 문서를 참조하자.

악은 사실 존재하지 않고 단지 선이 결핍된 상황을 뜻할 뿐이라는 것. 즉, 악은 선의 결여(privatio boni)라는 주장.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것에 명사를 부여해서 그것을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으로 생각을 한다. 가령 어두운 방에 대해 '어둡다'라고 표현하는 경우를 보자. 이 때 어둠은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취급되지만 사실 어둠이란 대강 말해 빛의 유무에 따른 현상이며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악에 대해서도 유사하게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악'이라고 호칭하기 때문에 악이 선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사실 악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단지 선이 결핍되어 나타난 현상일 뿐이다. 빛이 비치지 않는 곳은 어둡다. 이는 '어둠'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빛이 거기에 없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는 검은색과 추위 등도 동일하다.

가톨릭에선 이것이 '인간이 선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교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악은 '창조된 것'이 아닌, '선의 결핍', '창조된 것의 결핍',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설명되기에, 인간이 초월자로부터 나온 '선'을 따라야할 이유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주의할 점은, 악은 선의 '결핍적 부재'이지 '부정적 부재'는 아니라는 점이다. 악이란 '있어 마땅한 것'의 결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가톨릭에서조차 "있어 마땅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는 그것이 뭔지 모른다"는 입장이다.

가령 아이가 물에 빠졌고 길가에 쓰레기가 떨어져있다면 쓰레기를 줍느라고 아이를 늦게 구하는 것은 (아이를 구하는 일이 훨씬 더 긴급하므로) 악하다고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특수한 상황이다. 우리는 쓰레기를 줍는 행위가 어떠한 악덕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이 주장은 결국 '자유의지'와 거의 똑같은 비판을 받게 된다. 즉 신이 인간에게 허락해준 자유의지로, 인간이 '선이 결여된 언행'을 하여서 타락하게 되는데 왜 신이 이것을 바로잡아 주지 않느냐는 점이다. 세부적인 비판은 자유의지와 거의 겹친다. 악마끼리 싸우기 때문에 악이 악이라고 정의해도, 인간의 원죄를 가지고 와도 문제. 애당초 선으로 충만한 세계라면, 악마가 있을 이유도, 원죄가 있을 이유도 없다.

또한 악을 선의 결여로 표현하면서 사용한 비유들은 그대로 선을 악의 결여로 표현하는데에도 사용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수많은 역사를 통해 선의 기준에 어느 정도 공통된 요소가 존재한다고 반론하는 경우가 있는데, 똑같은 이야기는 악에도 적용이 가능하다는 것을 간과한 이야기다. 악 역시도 역사를 통해 어느 정도 공통된 요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선과 악 어느 쪽으로 결정하기 힘든 문제들에 대해서는 결핍적 부재, 부정적 부재라는 모호한 말로 분리해서 넘어가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다. 악이 명확하게 존재해서가 아니라 선 역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카르네아데스의 판자 같은 문제를 보자. 결핍적 부재에 해당하는 사례지만, 그렇다고 그게 악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다같이 빠져 죽는 것이 '있어 마땅한 것'일까? 이에 대해 가톨릭에선 그것도 악이고 소죄라는 식으로 넘어가지만, 냉정히 보면 악의 문제에 대한 답이 못 된다. 그냥 신이 그런 상황에서 구해주거나 애초에 그런 상황이 오지 않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즉, 악의 문제에 다시 걸리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악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신에게서 멀어지면 그게 악이다'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악의 실재성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악의 문제를 무효화하려는 논리이다. 그러나 설령 이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왜 악이 존재하는가"라는 처음 물음이 "왜 선의 결핍이 존재하는가"로 표현만 바뀔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결여의 원인이 인간의 자유의지라고 말하면 앞선 자유의지 문제로 되돌아가는 것밖에 안되고, 여러 자연적 악이나 우연적인 악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의 문제도 그대로 남는다.

게다가 선이 신으로부터 온다는 부분에 이르면, 신과 관련을 맺지 않는 세속윤리(secular ethics)는 불가능한가?(도덕과 종교의 관계)라는 질문과 비판도 여전히 지속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 논리대로면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이 전파되기 전에는 세상이 온통 악의 구렁텅이였어야 한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마지막으로 이 주장은 일반적인 직관에도 심각하게 반하는데, 선은 아니지만(선의 결여이지만) 악도 아닌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거의 틀림없는 사실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해당 주장은 선과 악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흑백논리에 불과할 따름이다. 예를 들어 다리 떨기 같은 행위는 일반적인 사회 인식상 선이라고 간주되지 않는데, 이 주장에 따르면 다리 떨기는 선의 결여이므로 악이라 보아야 할 것이나, 실제로 다리 떨기를 악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1] 홀로코스트 희생자 중 100만명 가량이 어린이였다.#[2] 이 견해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톨킨의 견해와도 비슷한 면이 있다. 톨킨은 그의 저서 실마릴리온반지의 제왕을 통해 악(惡)까지도 일루바타르의 계획이며 결국에는 선(善)의 도구가 된다는 견해를 묘사했다. 일루바타르의 거대한 음악 작업에 그의 창조물인 멜코르가 자신의 뜻대로 불협화음을 만들었지만 결국 그것이 음악을 더 아름답게 만들었고 이것 또한 일루바타르의 뜻이었다는 것이다.[3] 기독교의 경우 애초에 인간과 똑같은 악의 예를 제시한다. 예를 들어 십계명을 어길시 대죄(악)로 인식되기때문. 특히 살인은 인간의 사회에선 악의 대명사 중 하나로 여겨진다(장애를 앓고 있는 환자라면 위에 서술된 자유의 유무존재와 충돌된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에선 납득할 수 없는 이론이다.[4] (딤전3:2)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중략) (6)새로 입교한 자도 말찌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5] 불교와는 조금 다르게 인간은 오직 인간으로만 환생한다는 설[6] 어째서 넓게 잡는다는 부분이 서술되었느냐 하면, 결국 욥기에서도 명확한 해답은 내려 주지 않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고.[7] 예를 들어 내가 식당에 들어가 다양한 음식 중 순두부찌개를 골라 점심식사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내가 순두부찌개를 선택한 것은 개인의 자유의지의 결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대한민국에 태어나 유아기부터 길들여진 식습관과 식사를 할 때의 날씨, 건강상태, 기타 다양한 환경의 결과로 순두부찌개가 선택될 수밖에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하다못해 며칠 전 본 순두부찌개집 광고가 머릿속에 남아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순두부찌개가 먹고 싶어진 것일 수도 있지만, 자기는 그 사실을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 나는 내 의지로 선택을 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것에 불과하고, 사실은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모여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고, 나의 생각은 정해진 결과를 그저 따라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이런 입장에서는 자유의지와 전지전능한 타자는 양립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신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면 인간은 자유롭지 않은 것이고, 인간이 스스로 운명을 선택할 수 있다면 신은 전지전능하지 않은 것이다.[8] Karol Wojtyła, 실제 발음은 '카롤 보이티와'에 가까우며 '카를 보티라'라는 이름은 폴란드어 인명에 무지한 역자의 오타로 보인다.[9] 기독교는 윤회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이 부분 역시 역자의 오역으로 추정된다. 원래 의도는 후술할 3.5 문단에서 처럼 '악은 인류의 죄에 대한 경고이며 그 경고 중 하나가 장애란다'였을 것으로 추정된다.[10] 해당 저서에서는 현각 역시 자신이 다니던 성당의 수녀에게서 비슷한 의구심을 품은 일화 또한 언급된다. 허나 아예 기독교에 등을 돌린 현문과는 달리 저서에서도 지속적으로 성경의 문구를 인용하고 천주교 관련 인사들에게 일괄적으로 '분', '하시다' 등으로 존중의 의미를 담는 등, 악의 문제에 대해서만 의구심이 있을 뿐 반기독교 성향이 있지는 않아 보인다. 아래에서 인용한 바트 어만과 비슷한 예라 볼 수 있다.[11] 한 가지 오류가 있는데, 이 대목은 창세기가 아닌 욥기에 언급되는 내용이며, 창세기에서도 사탄의 거짓말을 곧이 들은 인물은 야훼도, 아담도 아닌 하와이다.[12] 『성경 왜곡의 역사』라는 저서로 유명한 성서학자. 실제로 그는 개신교 근본주의 풍토에서 수학했으나 이후 악의 문제로 인해 불가지론자가 되었다. 막상 그가 연구했던 성경의 오류나 변개 등은 신앙에 별 영향을 안 줬다고 한다.[13] 마태복음 7;7-11, 21;22[14] 김균진, 기독교조직신학, 제 1권 (서울:연세대학교출판부,1991),371[15] 이 글은 예정론을 지지하지 않는 입장에서 서술되었다.[16] 자료: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아우구스티누스가 두 저술에서 말하는 ‘악(惡)의 문제’에 우선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에게 ‘악’의 문제는 소크라테스 이후 그리스와 로마 정치철학자들이 이해하던 ‘이성’과 ‘감정’의 불균형이 초래한 퇴행이 아니었다. 그에게 ‘악’은 선한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악을 선택하려는 ‘의지’(voluntas)의 산물이며, 인간은 신의 은총이 없이는 이러한 의지를 유발하는 욕구를 거부하고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한다. 즉 그에게는 ‘악’이란 감정에 압도당한 이성이나 무절제한 삶이 가져온 결과가 아니라, 신으로부터 벗어난 인간의 본원적 무능력에서 기인한다고 본 것이다. …(중략)…한편으로는 신이 창조한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이유는 신과 무관하다는 신학적 정당화, 다른 한편으로는 공동체 속의 개인이 아니라 신과의 일대 일의 관계를 갖는 개인이 부각되는 계기를 효과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출처: 곽준혁, “정치철학 다시보기아우구스티누스왜 로마는 야만족에게 붕괴되었는가?”, 네이버 지식백과, 링크, 접속일 : 2023.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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