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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시기 포이팅거 지도에서 '도시의 여왕'으로 묘사된 안티오크
1. 개요
Antakya (튀르키예어, 안타키아)Ἀντιόχεια (그리스어, 안디오히아)[1]
Antiochia (라틴어, 안티오키아)
Antioch (영어, 앤티옥/앤티악)
현대 튀르키예 남부의 도시. 역사가 오래된 도시로, 고대의 정식 명칭은 '오론테스 강변의 안티오키아' 혹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이다. 왜냐하면 이름이 안티오키아인 도시가 한둘이 아니기 때문.[2] 가령 오늘날 튀르키예의 가지안테프(Gaziantep)의 헬레니즘 시절 명칭은 '타우루스 산맥의 안티오키아(Antiochia ad Taurum)', 아다나는 '킬리키아의 안티오키아(Antiochia in Cilicia)'였다. 물론 이것은 헬레니즘 시대 이야기이고, 로마 시대 이후로는 상관없다.[3] 헬레니즘 시기에는 안티오케아라는 도시가 다수 지어져 이란 서부의 나하반드 역시 고대에는 안티오키아 페르시스였을 정도이다.
고대 시리아 지역의 중심지였다는 역사적 설명 때문에 착각하기 쉬운데, 현재 안타키아는 시리아가 아니라 튀르키예 땅이다.[4] 현재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하는 시리아 국가의 영역은 고대에는 코엘레 시리아(Coele-Syria)[5]라고 불렸으며, 안티오키아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 시리아[6]였다. 하지만 우마이야 왕조가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정한 이래[7] 점차 지역 중심지의 자리를 다마스쿠스에게 내주기 시작하면서 자연히 시리아 지역의 범위도 변하였다. 개역성경을 중심으로, 개신교 계열에서 쓰이는 성서에서 '안디옥\'[8]이라고 쓰이기도 한다.
찬란한 역사와 비례하여 유달리 참혹한 지진 피해를 자주 입은 지역으로도 유명하다. 이 지역 근처로 동아나톨리아 단층이 지나가기 때문이다.
2. 역사
로마 시대의 페가수스 모자이크 | 19세기에 묘사된 안티오크 성벽 유구. 동로마 ~ 십자군 시기 동안 꾸준히 보강되었다 |
2.1. 건설
원래 메로에(Meroe)라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알렉산드로스 3세의 부하였던 셀레우코스 1세가 디아도코이 전쟁에서 시리아를 차지하면서 신도시로 계획 건설했다. '안티오케이아'라는 이름은 그의 아들인 안티오코스에게서 따왔다. 셀레우코스 1세는 그 외에도 많은 도시들을 틈 날 때마다 만들었는데, 그중 오론테스 강변의 안티오케이아가 가장 빨리 성장했기 때문에 결국 그 아들 안티오코스 1세 시대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로 정해졌다.2.2. 고대 로마 시대
고대 안티오크 복원도
얼마 남지 않은 고대 시기의 유적. 신전 기단부로 추정된다
로마 제국 시대에는 인구가 무려 50만[9]에 달할 정도로 거대해졌다. 당대에는 수도 로마와 이집트의 중심 도시 알렉산드리아의 뒤를 이은 3번째로 거대한 도시였고, 알렉산드리아와는 헬레니즘 세계를 대표하는 최고의 도시를 놓고 자웅을 겨눈 '(로마 세계 내의)동방 최고의 도시'였다. 그 전성기에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자웅을 겨루며 '동방의 여왕'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고, 유라시아의 중간 가교 역할을 하며 값비싼 유리 세공품과 향신료 무역 등으로 거상도 오갔다.
도시 규모와 상징성, 경제력이 대단해진 만큼, 유흥 문화 역시 로마 서방과 수도 로마까지 유명해졌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안티오키아식 서커스였는데, 이 경기와 경기장 시설 규모는 로마인들에게 다른 로마 경마, 전차 경기와 다른 스타일로 그 명성이 대단했다. 이 외에도 여러 황제들은 이 도시에 빵과 서커스를 황제 이름으로 하사하기도 했고, 지진 등의 피해가 일어날 경우 로마 황제의 이름으로 원로원 의원들이 진상파악을 위한 대표로 파견될 정도로 그 위상이 엄청났다.
로마 공화정 후기와 제정 시대의 로마 권력자들, 특히 황제들에게 있어 안티오크의 중요성은 대단했다. 로마 황제들은 안티오키아 내에 여러 공공건축물을 지어줬고, 안티오키아에 부임한 총독에게는 중근동 및 레반트, 아르메니아와 파르티아, 사산왕조 페르시아와의 일로 벌어지는 일의 사관 역할이 부과됐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로마 제국 속주 총독 중 지중해 동쪽 관할을 총책임지는 속주 총독의 '꽃'인 시리아 코일레 속주(시리아 속주) 총독이 머무는 총독 관저, 사저가 위치했다. 따라서 로마 시대의 여러 기록을 보면, 동방에서의 주요 국방, 외교 문제에 안티오키아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언급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런 기록처럼 로마 황제들에게 있어 특정인사를 안티오크로 파견한다는 이야기는 그에게 동방 문제를 맡긴다는 정치적 상징성이 대단했다.
그러나 그냥 대도시가 아닌 중동에 위치한 대도시였던지라, 결국 이곳이 기독교도들의 본거지가 되어 로마 제국 내 다른 곳들로 기독교를 퍼뜨리는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된다.[10] 물론 예루살렘이 더 유명하긴 하지만, 예루살렘은 유대인 때문에 가장 반항이 잦은 속주인 유대 한가운데 위치한 관계로 그만큼 탄압도 심했다. 대도시이면서도 예루살렘 근처에 있고, 유대 속주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변방에 위치한 안티오키아 쪽은 탄압을 피해 온 그리스도교인들로 넘쳐나게 되었다고 한다. 총 인구들 중 1/5가 기독교도였다니 말 다한 셈. 이후 그리스도교의 성지들 중 하나로서 자리매김했다. 로마,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예루살렘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고대 그리스도교 세계의 5대 총대주교구의 일원이었다. 심지어 콘스탄티노폴리스 건설 이후의 로마 후기 시절부터 전해오는 원본을 13세기에 그대로 옮겼다고 하는 포이팅거 지도 (Tabula Peutingeriana)에는[11] 안티오크가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3대 도시로 그려졌다.
그러나 50만 명에 달하던 이 거대한 도시는 강력한 지진으로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안티오키아에는 여러 번 지진이 일어났으나 그중 가장 피해가 컸던 지진은 서기 115년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당시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 원정을 위한 행군 도중 안티오크에 머물다 대지진을 경험했다. 이 원정에는 트라야누스의 양아들이자 후계자 하드리아누스도 참가했기에 최악의 경우 자연재해로 로마 황제와 그 후계자가 동시에 사망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날 뻔했으나, 다행히도 두 사람 모두 별 상처 없이 무사히 탈출했다. 하지만 일반 시민들은 그렇지 못해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가 최대 26만 명에 달한다고 추정된다.[12][13] 전승이 아닌 실제로 역사적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지진이며, 현재의 건물과는 달리 석조를 쌓아 만들었던 로마 건물의 특성상 많은 사람들이 생매장당하고 말았다.[14] 그래서 현대에 고고학자들이 안티오크를 발굴하니까 발굴된 거의 모든 모자이크가 이 115년 대지진 이후에 만들어진 모자이크였다고 한다. 이후 많은 로마 황제들이 이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 도시 이름을 바꾸기도 하고, 공중 토건 사업을 진행하는 등 노력했으나 이후 서서히 쇠락했다. 대중의 인식과는 달리 실제로는 수백 년에 걸쳐 천천히 쇠락했는데, 이유는 후술하는 항구 기능의 쇠퇴와 관련이 깊다.
2.3. 동로마 제국 치하
파일:터키 안타키아 성벽.jpg | |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세운 성벽. 산성 부분은 일부 잔존한다 |
사두정치와 동/서로마 분단 이후 안티오키아는 동로마 제국에 속하게 되었으며 이후로도 5대 총대주교좌 중 한 곳이자 제국 동방의 주요 도시로 기능하였으나 526년 또 지진이 일어나 25만~30만 명이 사망했다. 637년 라쉬둔 왕조의 공격으로 이슬람 세력에게 함락되었고, 북시리아의 중심지는 이때부터 알레포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8세기 초반 그리스도교 세계에 가하는 이슬람의 대규모 공세가 좌절된 이후, 동로마군의 공세 이전까지 전쟁 양상이 서로의 영토에서 유격전을 하는 양상으로 바뀌었다. 이슬람군의 습격과 동로마군의 반격으로 인해 양측의 국경지역 일대가 완전히 폐허가 되었는데. 안티오키아 역시 국경지역에 있는 고로 이 피해를 피할 수 없었다.
이때부터 안티오키아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안티오키아는 동로마의 본진이라고 할 수 있는 아나톨리아로 향하는 입구이자 시리아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요지이며 총대주교좌가 설치되었을 정도로 중요한 대도시였기 때문에 동로마는 이후 도시를 탈환하기 위해 수없이 시도를 하였고 마침내 969년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이 안티오키아를 수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1085년 경 튀르크 세력에게 다시 안티오키아를 빼앗겼고, 쉴 틈도 없이 1차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자 십자군에게 점령당했다. 게다가 십자군 지휘관 중 하나였던 타란토 공작 보에몽이 이곳을 개인적으로 차지하여 안티오키아 공국(Principality of Antioch)을 세웠다.
그러나 안티오키아 공국은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2세에게 패배하여 명목상으로는 가신국이지만 실제로는 동로마의 영토가 되었다. 이런 상황은 요안니스 2세를 이은 마누일 1세 시대까지 이어졌다. 그런 이유로 이 시기의 동로마 영토를 표기할 때 안티오키아는 로마 땅으로 나온다. 이때가 안티오키아의 마지막 전성기라고 볼 수 있다.
2.4. 쇠퇴
12세기 십자군에 의해 세워져 19세기 프랑스에 의해 복원된 성 피에르 성당
13세기에 모스크로 개조된 기존 비잔틴 성당 (하빕 이 넥카르 모스크)
그 후 십자군의 주요 거점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십자군 세력이 약해진 13세기 맘루크 왕조의 술탄 바이바르스에게 점령당한 후 주민들은 모두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팔려가고 도시는 철저히 파괴되었다. 그 이후로 안티오크는 별볼일 없는 깡촌으로 전락했고, 알레포가 안티오키아의 자리를 완전히 대체하였다.
다만 깡촌이 된 이유는 바이바르스의 파괴 행위도 있지만 항구기능을 잃어버린 탓이 더 크다. 원래 안티오크는 내륙으로 약간 들어간 만에 있는 강에 항구를 두었기 때문에 도시 자체는 해안선에서 20 km나 떨어져도 충분히 수운을 담당할 수 있었다. 허나 장기간에 걸쳐 강이 운반하는 퇴적물이 많아지면서 강바닥이 상승하고 만도 서서히 메웠기 때문에 큰 배가 드나들 수 없게 되었다. 만약 항구도시로 계속 기능할 수 있었다면 설령 주민들을 학살하고 내쫓았더라도 그대로 도시를 버려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2.5. 현대
하타이도 관광지도 | 하타이도 행정구역 지도 |
현대 시가지 풍경
지금은 터키 소속으로 안타키아라는 이름의 인구 20만짜리 고만고만한 국경 근처에 있는 작은 지방 소도시다.
중심지인 안타키아市를 비롯해 총 15개 시군이 있다. 서쪽으로는 지중해, 서북쪽으로는 아다나(Adana) 도, 북쪽으로는 오스마니예(Osmaniye) 도, 북동쪽으로는 가지안테프(Gaziantep) 도와 킬리스(Kilis) 도와 접하며 동쪽과 남쪽으로는 시리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도 중심지인 안타키아를 기준으로 시리아 국경까지는 15 km 정도 떨어져 있다. 인구는 도 전체 기준으로 150만 3066명(2013)이며, 안타키아 시만으로 한정지으면 35만 4768명(2014)이다.
전통적으로 시리아로 여겨져 온 지역이고 오스만 제국시절에는 인접한 시리아 제2의 도시 알레포, 가지안테프, 킬리스와 함께 할렙 빌라예트(Halep Vilayeti)에 속해 있었으며 1921년 이후 시리아 본토와 함께 프랑스의 위임통치를 받아 터키와 분리되었으나 이 지역의 거주민은 터키인이 다수였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터키에 합병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었다. 때문에 1938년, 터키와 프랑스의 합의로 국민투표에 부쳐 1938년 9월 7일에 안타키아를 수도로 하는 하타이 국(Hatay Devleti)으로 독립하였다. 당시 터키 대통령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하타이 국의 초대 대통령인 타이푸르 쇠크멘(Tayfur Sökmen, 1892~1980. 터키와 합병된 뒤로 터키 국회의원으로 재임했다.)에게 축하 전보를 보냈을 정도로 터키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으며, 1년도 채 못된 1939년 6월 29일에 터키의 한 도로 병합되었다. 터키로 병합되면서 기존의 3개 군 - 되르트욜 (Dörtyol), 핫사(Hassa), 에르진(Erzin)군을 하타이 도에 편입시키고 되르트욜 군에서 파야스(Payas)군을 분할시켜 오늘날에 이른다.
시리아와 매우 가까운 지역이기 때문에 터키인이 다수를 구성하는 지역이지만 수니파 아랍인, 마론파 아랍인, 시리아 정교회 아랍인,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등 다양한 민족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하타이국 시절부터 아랍어와 프랑스어가 터키어와 더불어 공용어였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아랍어(시리아 방언)를 아는 주민의 비중도 상당히 높다. 바로 밑에 시리아 알라위파의 중심지인 라타키아와도 인접하기 때문에 알라위파의 비중도 높은 편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특산품으로는 올리브와 밀, 오레가노가 있으며, 오렌지와 목화, 감초 생산도 활발한 지역이다.[15] 또한 전통적으로 가죽제품이 유명하다. 오스만 제국시절부터 알레포와 같은 경제권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터키에 편입된 이후로도 교역이 활발했으며, 특히 시리아 내전당시 상당수의 시리아 난민들이 아무래도 언어가 통하기도 하고 가깝기 때문에 이 지역으로 많이 유입되어 거주 중이다.
전통음식으로는 늙은호박을 시럽에 절여서 만드는 카박 타틀르스(Kabak Tatlısı), 얇은 국수처럼 뽑은 밀가루반죽을 차곡차곡 쌓고 그 사이에 치즈를 넣어서 숯불에 구운 다음 시럽을 끼얹고 피스타치오를 뿌려내는 퀴네페(Künefe), 매운 고추 페이스트를 빵반죽 위에 바르고 구운 비베를리 에크멕(Biberli Ekmek), 오레가노를 비롯한 각종 향신료를 곱게 빻아서 빵과 함께 먹는 아침식사용 반찬인 자흐테르(Kahvaltılık Zahter), 신선한 오레가노로 만드는 자흐테르 살라타스(Zahter Salatası)가 유명하다. 또한 시리아와 가깝기 때문에 정통 시리아식 아랍 요리를 맛볼 수 있는 터키 내에서 몇 안 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2023년 2월 하타이도 전역을 덮친 2023년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의 영향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대한민국에서 파견된 해외긴급구조대도 안타키아에 투입되어 수색구조임무를 수행했다.
[1] 헬레니즘 시절의 코이네 발음으로는 안티오키아라고 불렸다. 그러다가 고대 로마 후기, 중세 로마(동로마) 시대가 되면서 중세 그리스어로 변하면서 음운이 여럿 바뀌었는데 이 발음이 거의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암튼 여기에서는 'ντ'(nt)처럼 ν(n) 뒤에 τ(t)가 올 때는 고대까지의 'ㅌ' 발음에서 'ㄷ'발음으로 바뀌었고, χ(ch)의 음가가 'ㅋ'과 'ㅎ'이 섞여서 한국어로 정확히 표기할 수 없기는 하지만 어쨌든 고대까지는 'ㅋ'음가가 우세해서 편의상 'ㅋ'으로 쓰는 반면, 중세부터는 'ㅎ'음가가 우세해져서 편의상 'ㅎ'으로 표기한다.[2] 안티오키아라는 지명은 그리스 인명 안티오코스에서 나왔다. 디아도코이들 중 안티오코스 3세를 포함하여 여러 헬레니즘계 군주들이 자기 이름을 도시에 붙였다. 그러니 알렉산드리아(동음이의어)와 마찬가지로 동명의 도시가 여럿 생긴 것이다.[3] 현대에 안티오크라는 지명을 봤다면 100% 여기에서 딴 것이다.[4] 다만 시리아와의 국경지대에 꽤 가깝다. 실제로 1차 대전 이후에는 프랑스령 시리아에 속해있다가 하타이 국을 거쳐 1939년 튀르키예 영토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아랍인 비중이 매우 높고 문화도 아랍풍이다. 대신 튀르키예 땅인만큼 여행 가도 처벌받을 일은 없다.[5] 대강 레반트의 중부지역.[6] 대강 레반트의 북부지역. 참고로 남부지역은 유대(팔레스타인)이다.[7] 안티오키아는 동로마와의 국경지대에 너무 가까워서 수도로 삼기에 부적합했다는 점과, 그리스도교 5대 총대주교좌가 있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셀레우코스 제국의 수도이기도 했어서 그리스-로마-기독교의 잔향이 너무 짙었던 점이 작용했다.[8] 정확히는 수리아 안디옥이다. 안타키아보다 북쪽에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은 현재 얄바츠로 불린다.[9] 안티오크가 쇠퇴하고 1300여년이 지난 현대의 안타키야보다도 인구가 갑절쯤 많다. 물론 인구 30만 명이면 중국이나 인도같이 인구가 극단적으로 많은 나라가 아닌 이상 웬만한 국가의 중견급 도시지만, 고대의 안티오키아에 비하면 현대의 안타키야의 위상은 매우 초라하다.[10]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처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린 곳이 안티오키아였다고 한다.[11] 주요 도시와 주요 도로망이 표시되어 있다.[12] 원래 있던 시민에 더해서 황제 행차를 수행하러 온 군대와 민간인까지 변을 당해서 피해가 더 컸다는 이야기도 있다.[13] 사실 남유럽 전체 피레네 산맥-남프랑스-알프스산맥-달마티아-발칸반도-소아시아(아나톨리아)는 아프리카 판과 유라시아 판의 경계로서 알프스-히말라야 조산대를 이루며, 환태평양 화산대 다음으로 지진과 화산이 많다.[14] 한 그리스인은 공회당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테이블에 앉은 순서를 떠올려가며 훼손된 시신의 신원을 확인했다고 하는데, 이를 응용해 기억술이라는 분야를 발전시켰다.[15] 가지안테프, 카흐라만마라쉬 도를 포함해 이 지역에서는 감초를 우려낸 즙을 음료수처럼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