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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31 06:59:25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우스

제3대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우스
Ignatius Antiochenus | Ἰγνάτιος Ἀντιοχείας
파일:안티오키아의이냐시오.jpg
<colbgcolor=#020703,#020703><colcolor=#60898b,#60898b> 이명 이그나티우스 테오포루스[1]
(Ignatius Theophorus)
이그나티오스 호 테오포로스[2]
(Ἰγνάτιος ὁ Θεοφόρος)
출생 35년경 추정
로마 제국 시리아 속주 안티오키아
사망 108년경/110년경 추정 (향년 73세 혹은 75세)
로마 제국 로마 콜로세움
직업 성직자(총대주교), 신학자, 작가
종교 기독교
재임 기간 제3대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68년경~107년경/108년경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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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2대 3대 4대
에보디오 (53년경/54년경~68년경) 이냐시오 (68년경~107년경/108년경) 헤론 (107년경/108년경~127년경/128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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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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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0703,#020703><colcolor=#60898b,#60898b> 성인명 이냐시오
[언어별 명칭]
라틴어: 이그나티우스 안티오케누스
(Ignatius Antiochenus)
영어: 이그네이셔스 오브 안티오크
(Ignatius of Antioch)
프랑스어: 이냐스 당티오슈
(Ignace d'Antioche)
독일어: 이그나티우스 폰 안티오키엔
(Ignatius von Antiochien)
스페인어: 이그나시오 데 안티오키아
(Ignacio de Antioquía)
포르투갈어: 이나시우 데 안티오키아
(Inácio de Antioquia)
이탈리아어: 이냐치오 디 안티오키아
(Ignazio di Antiochia)
폴란드어: 이그나치 안티오헨스키
(Ignacy Antiocheński)
일본어: 안티오키아노 이그나티오스
(アンティオキアのイグナティオス)
시성 108년경/110년경 이후[3]
칭호 순교자, 교부
상징물 사자
축일 10월 17일[4]
12월 20일[5]
대림절의 네 번째 일요일 이후 월요일[6]
에피프 7일[7]
수호 지중해 동부 교회, 북아프리카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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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안티오키아에서의 활동2.2. 로마로의 호송2.3. 순교와 사후 공경
3. 서간
3.1. 목록
4. 어록5. 여담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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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Theophorus[8]
Θεοφόρος[9]
하느님을 모시고 다니는 자
로마 제국 시리아 속주 출신의 총대주교, 신학자, 그리고 작가.

그는 사도 요한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후 안티오키아 교회의 주교에 오름으로써 해당 공동체가 로마 제국 내 기독교를 확산하는 교두보 역할로 자리잡도록 이끌었다. 또한 그는 서간들을 집필해 훗날 신학과 교회 체계의 기반이 되는 교회론, 성사, 그리고 주교직 수행의 핵심적인 개념들을 확립했고, 무엇보다도 보편교회, 즉 가톨릭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했다.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루터교회 등 기독교 내 대부분의 주류 종파에서는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가톨릭과 성공회 축일은 10월 17일이고, 정교회 축일은 12월 20일이다.

2. 생애

2.1. 안티오키아에서의 활동

이그나티우스의 생애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이 없다. 다만 에우세비우스, 리처드 퍼보, 티모시 반즈 등 다수의 역사가들에 따르면 그는 젊었을 적 기독교로 개종했고 사도 요한의 제자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그는 베드로바울로가 설립한 안티오키아의 교회 수장으로 임명되어[10] 해당 도시를 로마 제국 내 선교 활동의 중심지로 발돋움하도록 노력을 기울였고, 이러한 그의 헌신 덕분에 안티오키아 교회는 로마 교회와 함께 당시 기독교를 떠받치고 있는 양대 교회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로 인해 당시 기독교 신자들 중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로 이그나티우스는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었지만, 그의 활동이 기독교 박해 기조를 유지하고 있던 트라야누스 황제[11]의 귀에까지 들려 결국 로마 제국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재판을 통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국가적 중죄인으로 치부되어 안티오키아에서가 아닌 로마에서 처벌이 집행되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이는 재판이 이루어진 지방에서 기독교도의 사형이 이루어지던 기본적인 관행을 벗어난 매우 이례적인 판결이었다.[12]

2.2. 로마로의 호송

파일:Ignatius-Map.jpg
로마로 호송되는 여정 중 거쳐간 도시들
이그나티우스는 쇠사슬에 묶인 채로 10명의 군인들과 함께 육로와 해로를 통해 아나톨리아 연안과 그리스를 거쳐 로마로 압송되었다. 안티오키아를 떠난 그는 걸어서 마그네시아, 트랄레스, 에페수스, 그리고 필라델피아를 거친 후 스미르나에 잠시 머물렀고, 이후 트로아스에 도착해 그곳에서 마케도니아네아폴리스로 향하는 배에 승선했다. 바다를 건너 네아폴리스에 이른 그는 필리피를 거치고 발칸반도를 가로지른 후 다시 배를 타 마침내 로마에 당도했다. 이 기나긴 여정 또한 매우 이례적인 경우였는데, 당시 법률에 따르면 아무리 중죄 사형수일지언정 로마에 있는 황제 앞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로마 제국의 시민을 쇠사슬을 묶는 것은 금지였고, 먼 지역으로부터 죄수를 호송할 때는 육로가 아닌 주로 해로를 통해 이동했기 때문이다.[13]
파일:saint_ignatius_leaving_antioch.jpg
안티오키아를 떠나는 성 이냐시오
(Saint Ignatius Leaving Antioch)
요한 밥티스트 엔덜레 作, 영국 국립미술관
한편 로마로 호송되는 동안 이그나티우스는 거쳐간 도시마다 그의 소식을 듣고 몰래 찾아온 신자들에게 신앙심을 저버리지 말고 사도적 전통에 충실할 것을 권고했다. 또한 그는 이 과정에서 교회론, 삼위일체, 성사, 주교직 수행 등에 관한 교육적인 내용이 담긴 총 일곱 개의 서간을 틈틈이 집필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을 보고 측은지심이 들었던 군인들은 이따금씩 그가 신자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잠시나마 허용해 주었다. 그는 만나는 이들마다 성실히 설교와 조언을 전했으며, 이중 일부 신자들에게는 여섯 개의 서간은 각 도시의 교회 공동체에게, 그리고 나머지 한 개의 서간은 자신의 친구이자 스미르나의 주교인 폴리카르포스에게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2.3. 순교와 사후 공경

파일:ignatius-of-antioch-in-the-arena.jpg
사자들에 의해 찢기도록 몸을 맡기는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Ignatius van Antiochië laat zich door leeuwen verscheuren)
얀 라위컨 作,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108년 혹은 110년 10월 17일 이그나티우스는 아피아 가도를 통해 로마에 도착했다. 그는 황제와 관료들, 그리고 많은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콜로세움 경기장 한가운데[14]에 세워졌고, 머지않아 사자들로부터 뜯어 먹히는 맹수형이 집행되었다.[15] 그렇게 그는 사자들에 의해 갈갈이 찢긴 채 먹이가 되어 순교했다. 때는 12월 20일경 겨울이었다. 생전에 그는 사자들의 먹이가 되어 이들의 배 속을 자신의 무덤으로 온전히 삼기를 바랐으나, 신자들이 남겨진 그의 유해 일부를 모은 후 그의 고향 안티오키아로 옮겨 안장했다.

313년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밀라노 칙령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 지 약 200년이 지난 5세기에 당시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이그나티우스를 존경하는 의미로 그의 유해를 안티오키아의 티케 신전으로 이장함으로써 그곳을 성당으로 재단장했다. 그러나 637년 이슬람라시둔 칼리파국의 공격으로 도시가 함락되자, 신자들은 그의 유해를 로마에 있는 산 클레멘테 알 라테라노 성당으로 옮겨 매장했다.

많은 신자들은 이그나티우스의 사후 그를 성인으로 공경했다. 가톨릭에서는 그의 축일을 2월 1일로 기록했으나, 시간이 흘러 1969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른 전례력 개정으로 인해 그가 죄수의 몸으로 압송되어 로마에 도착한 날인 10월 17일로 새로이 지정했다. 성공회에서도 가톨릭과 동일한 축일을 따르고 있다. 반면 정교회에서는 그가 순교한 날인 12월 20일을 축일로 지정했다.

3. 서간

이그나티우스가 로마로 호송되는 여정 중에 집필한 편지들로 그가 잠시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마다 틈틈이 일부 신자들에게 전해 준 것이다. 이후 108년 혹은 110년 그가 맹수형으로 순교하자 필리피 교회의 신자들이 폴리카르포스에게 찾아가 그가 작성한 모든 서간들을 필사해 보내 줄 것을 요청했고, 이를 계기로 그리스어, 라틴어, 아르메니아어, 콥트어, 암하라어, 아랍어 등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곳곳의 신자들에게 보급되었다.

평소 독서를 자주 했던 이그나티우스의 지성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글로서 헬레니즘 시대의 편지 쓰는 방식과 수사학적 규칙을 바탕으로 신약성경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생각들을 피력했다. 서간들을 통해서 그는 영지주의 이단을 비판했고, 당시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던 삼위일체에 관한 이론적 틀을 제시했으며, 성사주교직 수행 등에 관한 교회 체계를 정리하는 등 신학을 포함한 교회의 핵심적인 개념들을 확립했다. 또한 그는 보편교회라는 의미로서 가톨릭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현재 그의 서간들은 교회 내에서 단순히 편지를 넘어 신학적 근간을 마련한 중요한 철학서로 자리잡고 있다.

3.1. 목록

이그나티우스의 이름으로 쓰여진 것으로 전해지는 서간들은 많으나 에우세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가 실제로 쓴 것은 일곱 개라고 한다. 이중 여섯 개는 그가 거쳐갔던 각 도시의 교회 공동체에게 보낸 것이고, 나머지 한 개는 스미르나의 주교 폴리카르포스에게 보낸 것이다. 일곱 서간들의 제목은 이러하다.

4. 어록

“믿음은 시작이요 사랑은 완성입니다.”
“ἀρχὴ μὲν πίστις, τέλος δὲ ἀγάπη.”
—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서간 中
“나는 하느님의 밀알입니다. 나는 맹수의 이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Σῖτός εἰμι Θεοῦ, καὶ δι’ ὀδόντων θηρίων ἀλήθομαι, ἵνα καθαρὸς ἄρτος εὑρεθῶ τοῦ Χριστοῦ.”
— 로마인들에게 보낸 서간 中
“이제 출산의 고통이 저에게 다가와 있습니다. (중략) 제가 생명을 얻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고, 또 제가 죽음의 상태에 있기를 원하지도 마십시오.”[16]
“Ὁ δὲ τοκετός μοι ἐπίκειται. (중략) μὴ ἐμποδίσητέ μοι ζῆσαι, μὴ θελήσητέ με ἀποθανεῖν.”
— 로마인들에게 보낸 서간 中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 가톨릭 교회가 있듯이, 주교가 나타나는 곳에 공동체가 있어야 합니다.”[17]
“Ὅπου ἂν φανῇ ὁ ἐπίσκοπος, ἐκεῖ τὸ πλῆθος ἤτω, ὥσπερ ὅπου ἂν ῇ Ἰησοῦς Χριστός, ἐκεῖ ἡ Καθολικὴ Ἐκκλησία.”
— 스미르나인들에게 보낸 서간 中

5. 여담

6. 관련 문서



[1] 라틴어식 표기.[2] 고전 그리스어식 표기.[3] 그의 사후 당시 초대 교회 신자들과 주민들 사이에 성인으로 공공연하게 받아들여졌다.[4] 가톨릭, 성공회 축일.[5] 정교회 축일.[6]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축일.[7] 콥트 정교회 축일.[8] 라틴어. '테오포루스'라고 읽는다.[9] 고전 그리스어. '테오포로스'라고 읽는다.[10] 이그나티우스가 몇 번째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였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테오도레투스는 초대 대주교였던 베드로의 뒤를 이은 제2대 대주교였음을 주장한 반면, 에우세비우스는 제2대 대주교였던 에보디우스의 후임으로서 해당 직책에 임명되었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11] 그러나 트라야누스 황제는 여느 황제들과는 달리 일일이 불심 검문을 하면서까지 기독교도들을 마구잡이식으로 탄압하는 정책은 하지 말 것을 명령했을 정도로 상당히 온건한 태도를 보였다. 즉, 몰래 기독교를 믿는다면 눈 감아 주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지만, 공공연하게 기독교도임이 드러나는 경우에는 가차없이 처벌을 단행했다.[12] 플라비우스 왕조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기를 통틀어 전쟁 범죄자를 제외한 사형수가 로마로 압송되어 처형당하는 것은 이그나티우스의 사례가 유일무이하다.[13] 이는 배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걷거나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것보다 훨씬 더 경제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안티오키아는 항구 도시였기에 이그나티우스를 압송할 때 육로로 여러 도시들을 거쳐 가는 것보다 곧장 해로를 따라 로마로 가는 것이 더욱 경제적·시간적 이점이 컸을 것이다.[14] 에우세비우스는 이그나티우스의 사형이 이루어지는 장소에 대해선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해당 장소가 콜로세움이라고 기록했다.[15] 에우세비우스는 이그나티우스가 맹수들에 의해 뜯어 먹혔다고만 언급했으나 히에로니무스는 사자들에 의해 순교했다고 특징지었다.[16] 이그나티우스는 순교의 고통을 하느님 안에서 새로 태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출산으로 표현했고, 이 문장을 기점으로 교회에서는 기독교도가 순교한 날을 천상 탄일(dies natalis)로 명명함으로써 해당 날을 축일로 지정하는 전통이 생겼다.[17] 이 문장을 통해 가톨릭이라는 단어가 최초로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