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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2 20:28:21

양가창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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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기효신서》의 양가창4. 현대의 양가창5. 무협물 속의 양가창법
5.1. 《사조영웅전
5.1.1. 초식
6. 관련 항목

1. 개요

양가창법(楊家槍法)은 을 사용하는 중국무술의 하나로, 무협물에서는 무공으로 재해석된다. 양가창(楊家槍)으로 줄여 부르기도 하고 달리 이화창(梨花槍)이라고도 부른다.

2. 상세

중국 전통 무술 중 대표적인 창법의 하나이다. 양씨 가문에서 유래한 것이라 것이라 '양가창법'이라고 부르나, 그 기원에 대해서는 불명확하다.

양가창이 거론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송나라 사서인데, 난세였던 금나라 말기에 홍오군(紅襖軍)의 수령인 양안아(楊安兒)의 누이이자 철창 이전(李全)의 부인이며, 양안아의 뒤를 이어 금과 몽골 제국에 항전하다 남송에 투항한 여장군 양묘진(楊妙眞)이 이화창(梨花槍)의 명수였다고 한다. 이 양묘진이 전한 창법을 일러 양가창법이라고 한다.

허나 양가창이 널리 언급되는 것은 명•청 시기이므로 정말로 송대에 만들어졌는지, 그 이전에 존재했던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양가창이 척계광의 명저 《기효신서》와 그를 인용한 《무비지》에도 등장하는 것을 보아, 명대의 저명한 창술이었음은 확실하다. 길게 잡으면 남송 말기에 생겨난 것이고, 그 외의 좀 더 확실한 기록을 따르자면 명•청시대에 널리 유행한 창법이 될 것이다.

《기효신서》에 따르면 양가창이 '이화창'(梨花槍)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변화가 무쌍하고 끊임이 없이 기묘해서 마치 배꽃이 휘날리는 것 같아서였다고 한다.[1] 당시 마가창(馬家槍), 사가간자(沙家杆子), 이가단창(李家短槍) 등의 유명한 창법이 존재했는데 각기 그 묘(妙)가 있으나 양가창은
창대의 뿌리 쪽을 잡아서 길게 찌르기 때문에 뻗으면 몹시 길고, 허허실실과 기기정정이 있어서 나아감은 날카롭고 물러남은 빠르며, 기세는 준험하고 마디가 짧으니 움직이지 않으면 산과 같고 움직이면 우레와 같다.
고 칭송했다. 그래서 여러 창법 중에서도 이화창을 가장 으뜸으로 쳐주었다.

3. 《기효신서》의 양가창

《기효신서》에 실린 양가창은 양가육합팔모창법(楊家六合八母槍法)이라고 부르는데, 양가창의 6합의 기법과 8모의 기법을 싣고 있기 때문이다.

8모(八母)의 기법은 창법의 여덟 가지 기본 동작을 말한다. 여덟 개의 모태가 되는 기술이라 하여 '8모'라고 부르는 것이다. 8모의 기술은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대체로 이하의 여덟 가지 기법을 가리킨다.
6합창은 1합(一合)에서 6합(六合)까지의 여섯가지 합(변식, 연계식)을 이르는 것으로 이하와 같다.
이 창법 초식들은 꽤나 복잡한 초식이다보니 어리석은 병사들이 전부 익히기는 어려울테고, 단지 써놓을테니 관심있는 자가 알아서 익히라고 적혀 있다. 병사를 가르칠 때는 단지 봉(封), 폐(閉), 착(捉), 나(挐), 상란(上攔), 하란(下攔)의 여섯 기법만을 쓰고, 봉(封), 폐(閉), 착(捉), 나(挐)의 기법은 대문(大門)과 소문(小門)이 있으니 그 차이를 두어 연습시키면 충분하다고 했다.

척계광이 말하기를 산동, 하남 각지의 무술 사범들이 양가창법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들의 창법은 좌•우로 나(挐)의 기법으로 상대의 창을 감는 기법이 우수하지만 힘있게 찌를 때 보법이 따라가지 않는 단점이 있다. 고로 척계광 자신이 개발한 보법을 혼합하여 깊게 찌르면서 짧고 잘게 발을 내딛으며, 연속적으로 추격해나가 쉼없이 찌르면, 상대가 한 번이라도 선수를 빼앗기면 도저히 반격할 수 없는 무적의 창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4. 현대의 양가창

근현대의 여러 전통권 유파에서 6합창(六合槍), 대이화창(大梨花槍) 등으로 수련되는 것들은 대부분 양가창을 기원으로 한다. 조선시대 후기의 무술 교범인 《무예도보통지》는 《기효신서》의 영향을 받아 쓰여졌기 때문에, 《무예도보통지》에 등장하는 장창술이 곧 양가창법이다.[2] 길게 찌를 때 당구 큐대 잡듯이 왼손은 가만히 있고, 오른손으로 쭉 밀어 찌르고, 너무 깊게 찔러서 창대 끄트머리만 잡게 되거나, 좌•우로 휘휘 감는 동작이 많다면 양가창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면 된다.

5. 무협물 속의 양가창법

무협소설에 등장하는 양가창법 역시 실제 무술 양가창을 모티브로 삼고 있으나, 이름만 따왔을뿐 초식이나 상세는 전혀 다르다.

5.1.사조영웅전

《사조영웅전》에 나오는 양가창법의 창시자는 남송의 명장인 악비의 심복으로 역시 명장이었던 양재흥(楊再興)이다. 양재흥이 송나라 군사 3백 명을 이끌고 소상교(小商橋)에서 금군 4만 명을 상대하여 스스로도 2천 명을 해치웠으나 아깝게도 수에 못 이겨 장렬하게 전사했다. 하지만 이 소상교 전투로 금나라 군대도 양가창법을 경외하게 되었고, 중원에서도 양가창법의 명성이 널리 퍼졌고 한다.

대대로 양씨 집안의 장남에게 물려주었다고 하며, 《사조영웅전》 작중에서는 양강의 아버지 양철심이 사용했다. 양철심은 창법을 거의 완벽하게 구사할 수는 있었지만 아쉽게도 선조만큼 위력적이지는 못했다고 한다.

양강은 양철심으로부터 직접 배우지는 못했지만 구처기로부터 양가창법을 전수받았다. 양강의 양가창법에 대항하기 위해 곽정은 파창식을 열심히 수련했지만 양강과 무기를 가지고 대결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헛수고가 되었다. 양철심과 양강도 다른 사람에게 전수하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이후로는 실전된 듯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 양철심과 양강이 양가창법을 보여준 것도 각각 한 번씩일 뿐이다.

총 72개 초식이 있다고 하지만 당연히 전부 다 나오지는 않았다.

여담으로 양재흥이 양가창법의 사용자라는 설정은 《사조영웅전》 오리지널이 아니고, 악비가 주인공인 청대의 소설 《설악전전》에서 이미 언급된 바 있다. 송나라에 대항하는 양재흥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악비가 나섰으나 둘의 무예는 호각이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었고, 이에 악비가 고민하던 참에 양재흥의 조상인 양업[3]이 꿈에서 나타나 충신 가문의 후손이 계속 그릇된 길을 걷게 할 수 없다며 양가창법의 파훼법인 살수간을 전수한다.

5.1.1. 초식

6. 관련 항목


[1] 다만 《군기도설》에는 장창 끝에다가 '이화'라고 부르는 화염과 유황연기를 뿜는 통을 달아서 적에게 들이대는 무기가 등장하는데, 이화를 단 창을 '이화창'이라고 불렀다. 양가창법의 '이화창'과는 이름만 같을 뿐이다.[2] 다만 《무예도보통지》의 장창술은 24세 중 12세만 기효신서에서 배워온 것이고 나머지 12세는 조선 군관 한교가 개발한 것이기에 양가창법과 완벽히 같지는 않다.[3] 북송 초기의 명장으로 실존인물이다. 단, 양재흥의 조상이라는 건 창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