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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시칠리아 왕국 Regno delle Due Sicilie Regnum Utriusque Siciliae | |||||
국기[1] | 국장 | ||||
국가 | Inno al Re 국왕 찬가 | ||||
<nopad> | |||||
양시칠리아 왕국의 강역 | |||||
1816 ~ 1861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시칠리아 왕국 | 이탈리아 왕국 | ||||
나폴리 왕국 | |||||
위치 | 이탈리아 남부 | ||||
수도 | 팔레르모(1816년~1817년) 나폴리(1817년~1861년)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1816년~1848년) 입헌군주제(1848년~1861년) | ||||
국가 원수 | 왕 | ||||
주요 국왕 | 페르디난도 1세(1816년~1825년) 프란체스코 1세(1825년~1830년) 페르디난도 2세(1830년~1859년) 프란체스코 2세(1859년~1861년) | ||||
언어 | 라틴어 나폴리어 시칠리아어 | ||||
민족 | 이탈리아인(나폴리인, 시칠리아인) | ||||
인구 | 9,300,000명 (1861년) | ||||
종교 | 로마 가톨릭 | ||||
면적 | 111,900㎢ (1861년) | ||||
통화 | 양시칠리아 두캇 | ||||
현재 국가 | 이탈리아, 크로아티아[2] |
언어별 명칭 | |
이탈리아어 | Regno delle Due Sicilie[3] |
나폴리어 | Regno dê Doje Sicilie |
시칠리아어 | Regnu dî Dui Sicili |
스페인어 | Reino de las Dos Sicilias[4] |
프랑스어 | Royaume des Deux-Siciles |
영어 | Kingdom of the Two Sicilies |
한문 | 兩西西里王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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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세기 전반 이탈리아 남부에 있던 왕국으로 수도는 나폴리였다.1816년 12월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이 공식적으로 합쳐지면서 양시칠리아 왕국이라 불리게 되었다. 나폴리 왕국은 원래 시칠리아 왕국의 영토였다가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으로 분리되어 통칭 나폴리 왕국으로 불렸지만 공식 명칭은 시칠리아 왕국을 유지했기 때문에 양(Due, 兩)시칠리아 왕국으로 불렸다.
영토는 현대에 남부 이탈리아로 분류되는 지역 중 사르데냐 섬을 제외한 것과 거의 일치한다.
2. 역사
1282년 시칠리아 만종 사건 이래 갈라진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은 15세기 말부터 스페인 트라스타마라 왕조, 압스부르고 왕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지배 아래 동군연합 상태였다. 즉 실질적으로 이미 한 몸이나 다름없는 상태였지만 두 왕국이 정식으로 재통합한건 1806년 앙드레 마세나 휘하 프랑스군의 침략으로 부르봉 왕조의 페르디난도 4세(나폴리)/3세(시칠리아)가 쫓겨나고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으로 추대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조제프와 그 후임인 조아킴 뮈라는 명목상으로는 시칠리아까지 포함한 옛 시칠리아 왕국령 전체의 왕이었지만, 지중해를 장악한 영국 해군으로 인해 실제 지배는 이탈리아 반도 남부로 한정되었고 시칠리아에는 부르봉 왕조가 도피해 있었다. 이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몰락하면서 페르디난도 왕이 복위하였고, 페르디난도 왕은 1816년 동군연합을 청산하고 두 왕국을 실질적, 형식적으로 통합시켜 양시칠리아 왕국을 선포, 페르디난도 1세로 즉위했다.이탈리아 통일 이전 이탈리아반도의 여러 국가들 중 가장 큰 국가로 당시 이탈리아 면적의 40%, 이탈리아 인구의 1/3을 차지했으며, 수도 나폴리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 제2의 도시 팔레르모는 이탈리아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였다. 이탈리아를 통일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을 찍어누르는 면적과 인구를 가졌으나 농업 위주 경제와 높은 교회 소유 토지 비율,[5] 높은 문맹율 등으로 내실이 빈약했기에 허무하게 무너졌다.[6]
특히 3대 국왕 페르디난도 2세의 자유주의 탄압이 결정타였는데, 페르디난도 2세는 1830년 즉위 초기만 해도 민생 개선 노력과 적극적인 산업화 노력, 자유주의에 대한 호감, 제1차 이탈리아 통일 전쟁 참전으로 인해 몇몇 이탈리아 통일 운동가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1837년의 헌정 실시 요구 집회에 대한 무력 진압을 기점으로 보수화되어 자유주의 세력의 헌정 실시 요구를 거부하고 이를 탄압으로 일관하여 대중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그러다 전 유럽을 휩쓴 1848년 혁명을 계기로 페르디난도 2세는 결국 헌정을 승인하였으나 얼마 안 가 의회와의 갈등을 계기로 의회를 강제로 해산하여 전제군주정으로 회귀하였고, 이후의 치세 동안 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탄압을 지속하였다. 결과적으로 국내외의 여론이 악화하면서 양시칠리아 왕국에 대한 대내외적 인식도 나빠져, 통일론자들은 물론 영국과 프랑스 등 외국도 양시칠리아 왕국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페르디난도 2세는 1856년의 암살 시도 때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1859년 사망하였고, 양시칠리아 왕국은 프란체스코 2세가 막 즉위한 혼란기 속에서 이탈리아 통일전쟁을 맞이하게 된다.
1860년 4월 시칠리아에서는 부르봉 왕가에 대한 주세페 마치니 파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5월 주세페 가리발디의 붉은 셔츠단 천여명[7]이 시칠리아 섬에 진격, 시칠리아의 중심지 팔레르모를 점령 후 9월에는 나폴리에 입성하였고 가리발디의 나폴리 점령에 호응해 나폴리로 남하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사르데냐-피에몬테군은 테아노에서 가리발디가 자신이 점령한 영토를 모두 국왕에게 바치면서 이탈리아 남부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직후 10월에 실시한 주민투표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사르데냐-피에몬테와의 통합 결정이 나면서 양시칠리아 왕국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으로 편입되었다. 한편 국왕 프란체스코 2세와 왕비 바이에른의 마리 조피는 가리발디가 나폴리로 진격해오자 나폴리 북쪽에 위치한 천혜의 요새인 가에타 요새로 도망쳐 농성했으나 결국 대세를 거스르지 못하고 1861년 2월 가에타를 포기한채 교황령으로 망명하면서 완전히 멸망했다.
3. 역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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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도 1세 | 프란체스코 1세 | 페르디난도 2세 | 프란체스코 2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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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디난도 1세(1816년~1825년)
스페인 왕국 카를로스 3세의 셋째 아들이자, 카를로스 4세의 동생. 카를로스 3세가 스페인 국왕 즉위 이전 나폴리 왕국 국왕일때 나폴리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스페인 국왕으로 즉위하자 나폴리-시칠리아 왕위를 물려받았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침공때 망명했으나 이후 돌아와 복위했다. 배우자는 마리아 카롤리나. - 프란체스코 1세(1825년~1830년)
- 페르디난도 2세(1830년~1859년)
- 프란체스코 2세(1859년~1861년)
4. 역대 국기
1816년~1848년, 1849년~1860년까지의 국기. 백기에다가 왕실의 문장을 세긴 것인데 굳이 백기인 이유는 통치 가문인 보르보네 델레 두에 시칠리에 왕가가 부르봉 왕조 계열의 왕가여서 인 것으로 보인다.[8] 가장 오랜 기간 사용한 국기로 양시칠리아 국기는 보통 이 깃발을 말한다.
1848년~1849년까지의 국기. 페르디난도 2세 제위기 1848 혁명의 영향으로 헌정이 선포되고 1차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 친통일진영으로 참전하며 잠시 이용하였다. 이탈리아/국기의 배색을 활용한게 특징. 1차 통일전쟁이 실패하고 이후 헌정이 철폐되며 기존 국기로 돌아갔다.
1860년~1861년까지의 국기. 프란체스코 2세 즉위 후 친자유주의 개혁을 통해 민족주의, 통일운동 세력을 회유하고 연방제 통일시 양시칠리아 왕실의 지분을 요구하기 위해 이탈리아 삼색기 디자인을 전폭 채용하였다. 하지만 주세페 가리발디의 원정으로 얼마안가 나라가 멸망하며 오래 이용되진 않았다.
5. 국가
6. 멸망 이후 왕가
- 프란체스코 2세(1836~1894) - 요절한 딸 1명만 있어 이복동생 알폰소가 수장 자리를 이었다.[9]
- 알폰소(1841~1934) - 페르디난도 2세의 4남이자 프란체스코 2세의 이복동생[10][11]
프란체스코 2세의 이복 동생의 아들인 페르디난도 피오(Ferdinando Pio, 1869~1960)가 1960년 사망하면서 두 계통(카스트로 계통, 칼라브리아 계통)으로 분열된다. 페르디난도 피오의 큰동생 카를로스(1870년~1949년)가 스페인의 공주 마리아 데 라스 메르세데스[21]와 결혼하기 위해 1900년에 양시칠리아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였는데, 1960년 당시 생존해 있던 최고령 형제인 라니에리가 당주 자리를 계승하자 카를로스의 아들 알폰소가 60년 만에 양시칠리아 왕위 계승권을 다시 주장하고 나선 것이었다.[22]
대부분의 유럽 왕실들은 카스트로 공작위를 쓰는 라니에리의 후손을, 스페인 왕실은 칼라브리아 공작위를 쓰는 카를로의 후손을 양시칠리아 당주로 인정한다. 현재 카스트로 계통의 당주는 카를로(1963년~)[23]이고 칼라브리아 계통의 당주는 페드로(1968년~)[24]다.
7. 기타
국기를 그리기가 매우 어렵기로 유명하다. 국기안에도 들어있는 양시칠리아 국장에 여러 나라와 가문의 깃발, 왕관, 장식등을 그려넣었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컨트리볼 채널에서는 어려운 국기 때문에 무엇을 그릴까요? 라는 글에 댓글에는 양시칠리아가 정말 100%로 나온다.[1] 1816년~1860년까지 사용했던 국기. 자세한 내용은 4번 문단 참조.[2] 팔라그루자(Palagruža) 섬 한정. 팔라그루자 섬은 1920년 이탈리아 왕국에 편입되었으며, 무인도이다.[3] 한글로 표기하면 '레뇨 델레 두에 시칠리에'[4] 한글로 표기할때 '레이노 데 라스 도스 시실리아스'[5] 조제프 보나파르트 시기 혁명 프랑스를 본받아 교회 토지와 공유지를 경매에 부치는 개혁을 단행했으나 자영농 비율이 유의미하게 올라간 프랑스와는 달리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개혁 대상 토지들이 모두 귀족 및 부르주아 층에게 돌아가 대지주제가 공고해지는 결과만 낳았다. 가난한 소작농들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경작 조건이 널널하고 착취가 덜한 공유지와 교회 토지를 빼앗기는 꼴이 되었다.[6] 반대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양시칠리아 왕국보다 인구는 부족했을지 언정 토리노, 노바라, 제노바 등의 도시들과 포 강 유역의 풍부한 수력 자원을 중심으로 공업과 상업을 발전시켰고 토리노 대학교, 제노바 대학교 등의 고등교육기관을 통해 경제력과 교육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지녔다.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남이탈리아를 통째로 차지한 양시칠리아한테만 인구와 영토에서 열세였지, 상술했듯 정치와 경제에서는 양시칠리아 왕국을 압살하는 등 국력은 이탈리아 반도 국가들 가운데서 최상이었다. 이미 전신인 사보이아 공국부터 이탈리아반도에서 유일하게 외국과 경쟁할만한 국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았으며,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사르데냐 왕국만이 유일하게 이탈리아 국가들 중 나라답다고 평가를 했을 정도로 17~18세기부터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과 양시칠리아 왕국의 국력차는 벌어져있었다.[7] 이른바 천인대라고 한다. 이탈리아어로는 Spedizione dei Mille.[8] 실제로 프랑스의 부르봉 왕정복고 시절에 아무 문양이나 문장도 없는 통짜 백기를 국기로 사용한 적이 있다.[9] 프란체스코 2세의 부왕 페르디난도 2세는 원래 사르데냐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의 막내딸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결혼해 프란체스코 2세를 두었으나,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프란체스코 2세를 낳고 얼마 안 되어 사망하자 레오폴트 2세의 3남 카를 대공의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와 재혼해 8남 4녀를 두었다.[10] 페르디난도 2세의 차남 루이지는 딸 1명만 둔 채로 형 프란체스코 2세보다 먼저 사망했고, 3남 알베르토는 5세 때 요절했다.[11] 통칭 카세르타 백작(Conte di Caserta)으로 불린다. 자신의 친사촌(프란체스코 1세의 7남 프란체스코 디 파올라의 2녀 중 장녀)인 마리아 안토니에타와 결혼해 8남 4녀를 두었다.[12] 부인은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3세의 차녀 마리아 루트비가 테레지아였다.[13] 스페인 왕가 출신의 첫 번째 부인 사이에서 2남 1녀, 오를레앙 가문 출신의 두 번째 부인 사이에서 1남 3녀를 두었는데, 알폰소는 첫 부인 소생이고, 후처 소생의 3녀는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어머니다.[14] 부인은 파르마 공작 로베르토 1세의 손녀인 알리체 공녀였다. 1남 2녀를 두었다.[15] 부인은 오를레앙 가문 출신으로, 오를레앙 가문의 현 수장인 장의 고모다. 의붓할머니인 루이즈의 조카손녀이기도 하다. 1남 4녀를 두었다.[16] 부인은 소피아 란달루세(Sofía Landaluce)로 스페인 공작의 고손이다.[17] 2021년에 스코틀랜드 귀족의 딸과 혼인하였다. 2024년 3월 기준으로 딸 1명(프란체스카 소피아)만 있다.[18] 이종사촌인 자모이스카 여백작 마리아 카롤리나와 혼인하여 1남 1녀를 두었다.[19] 비왕족인 샹탈 드 셰브롱-비예트와 혼인하여 1남 2녀를 두었다. 큰딸 마리아 베아트리체는 보나파르트 가문의 수장인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의 어머니이다.[20] 부인은 카밀라 크로치아니(Camilla Crociani)로, 이탈리아 여배우 에디 베셀의 딸이다.[21] 알폰소 13세의 누나로 당시 알폰소 13세는 미혼이라 메르세데스가 왕위 계승 서열 1위였는데, 1759년의 나폴리 국사조칙에 의해 스페인 국왕이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국왕을 겸임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만일 메르세데스가 스페인 왕위를 잇게 된다면 카를로스의 자손이 명목상의 양시칠리아 왕위를 잇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상황이었다.[22] 알폰소는 부친 카를로스가 1900년에 양시칠리아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 것은, 카를로스가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게 될 경우에만 계승권 포기가 효력을 발휘한다는 해석을 제시하며 계승권을 주장하였다.[23] 딸 둘밖에 없어 2016년에 맏딸 마리아 카롤리나를 후계자로 정했다.[24] 4남 3녀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