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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어: élan vital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의 철학 용어로 '삶의 약동', '생의 비약'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이다. 그는 생명이 가진 능동적이고 근원적인 힘을 표현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2. 청년 튀르크 파벌의 군사사상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공격정신 / Offensive à outrance, Attaque à outrance이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정신론적 공세주의로, 공세주의 중에서도[1] 정신력을 승리로 인도해주는 형이상학적인 무언가로 여기는 공세주의다.
실제 사상의 명칭은 Offensive à outrance 혹은 Attaque à outrance이지 엘랑 비탈이 아니다. 엘랑 비탈과 연관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버트런드 러셀의 수학 원리,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 예수회의 사관학교 입시교육 전략으로 인한 프랑스 장교단 내 가톨릭 신앙의 부활, 사회진화론, 사회진화론과 생물학과 민족주의가 섞이며 나타난 사이비스러운 문화이론[2] 등도 영향을 끼쳤다. 오히려 군중심리가 청년 튀르크들의 대장격 인물이었던 그랑메종에게 삶의 약동 철학보다 훨씬 큰 영향을 주었으니 엘랑 비탈 운운하는 건 프시콜로지 데 풀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우스운 일이다. 프랑스군에서 엘랑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긴 했으나 이건 기세라는 의미에 불과하고, 심지어 한국군에서 기세라는 단어가 사용될 때와 용례까지 비슷하다. élan을 기세로 번역 안 하고 엘랑으로 음차하며 의미부여 하는 건 공격을 아따끄로 음차하는 것과 다름 없다.
청년 튀르크는 프랑스군에 존재했던 에콜 드 게르 출신 젊은 참모장교 파벌을 의미한다. 스스로를 청년 튀르크라고 부른 것은 아니고, 남들이 오스만 제국의 청년 튀르크당에 빗대 붙여준 멸칭이다. 이 멸칭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이들의 스승 중 하나였던 에콜 드 게르 교수 필리프 페탱 혹은 에콜 드 게르를 경멸한 식민지 학파의 조제프 갈리에니로 추정된다.
리델 하트의 헛소리와 달리 그랑메종은 지배적인 영향력을 가진 적이 없다. 일단 그랑메종은 고작 중령에 불과했다. 중령이 기성 장성진의 사고를 지배했다는 주장이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게다가 그랑메종이 작전부장이었던 시절은 프랑스군에서 총참모부가 그저 전쟁부의 행정보조 조직에 불과한 때였고, 총참모부가 진정한 의미의 총참모부로 개혁되고 조프르가 참모총장 겸 전시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당시엔 대령으로 진급하고 연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랑메종이 이끈 청년 튀르크 파벌이 아가디르 위기로 인해 우리 교리가 너무 낡은 거 아니냐고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프랑스군에 정신론적 공세주의 군사사상으로 활력을 불어넣고, 개혁된 총참모부에 편승해 영향력을 획득하긴 했지만 사상과 이론은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군사사상의 분열이 극심했기 때문에 총참모부에서 교리적으로 뭘 추진한다 해서 그게 제대로 교육될 수가 없는 구조였고, 무엇보다 청년 튀르크들의 직접적인 비판 대상이었던 장군들은 물론 에콜 드 게르 교수진도 정신론적 공세주의인 Offensive à outrance를 매우 안 좋게 보았다.
같은 사상을 공유하는 파벌이라 할지라도 그 사상에서 이끌어낸 이론엔 각자 차이가 있으나, 대장인 그랑메종의 이론은 그가 CHEM에서 운영한 두 강의인 '전선의 핵심 본질과 방호 개념', '대부대 교전의 양상'의 강의록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두 강의는 작전술에 관한 강의다. 그랑메종은 이론을 만들 당시엔 대대 이상을 지휘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작전적 수준에 관한 실제 경험이 전무했는데, 이 때문에 경험 부족을 추상적인 정신론으로 보충했다. 기술적 내용을 보자면, 에콜 드 게르의 앙리 보날 장군이 주도해서 1895년에 발간된 프랑스군 최초의 현대식 군사교리인 Décret du 28 mai 1895 portant règlement sur le service des armées en campagne를 특히 비판했다.
전투를 통해 정찰하고, 측면을 방호하고, 기지를 구축하고, 공격을 지원하고, 후퇴를 준비하고. 예비대는 말할 것도 없고... 점검표가 필요할 지경이다.
루이 그랑메종
루이 그랑메종
그랑메종의 이론에서 핵심은 다음과 같다.
- 공격 속도가 그 자체로 측방에 대한 방호를 제공한다.
- 공격부대가 만들어내는 진전은 부대 간 연락을 의미없게 만든다.
- 공격은 전선 전체에서 동시적으로 극한까지 밀어붙이며 진행되어야 한다.
- 후퇴전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건 1번이다. 그랑메종은 1번의 맥락에서 보날이 나폴레옹 전쟁을 독일 크릭스아카데미의 방식으로 연구하여 만들어낸 아방가르드, 즉 작전 전위대를 존재할 이유가 없다며 직접적으로 비판했다. [3] 공격 중엔 연락이 의미없다거나 후퇴전이 불가능하다거나 군사적 지식이 없는 사람이 봐도 의구심을 느낄 법한 주장이다. 특히 1번의 주장은 적어도 당시의 군사적 수단으로는 공자의 작전 템포가 느렸기 때문에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작전적 수준에 대한 경험 부재를 추상적인 정신론으로 보충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다.
그래도 그랑메종의 주장엔 타당한 세부사항이 존재한다. 그랑메종은 1895년 작전교리가 권고하는 중앙집중적 지휘를 '체스 두듯이 지휘'한다 표현했고, 이는 위험하고 어리석은 지휘라 비판하며 예하부대에 강력한 주도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랑메종이 작전에 대해서만 강의하긴 했지만, 1905년에 출판한 '공세 전투를 위한 보병 조련'에서 전술에 대해 논한 적이 있다. 사실 그랑메종의 이론은 전술에 관한 것이 훨씬 재미있는데, 이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4] 이 책을 집필할 당시 그랑메종은 소령이었다. 이 책은 분대[5] 단위까지 다룬다. 그랑메종은 여기서도 정신론을 기반으로 깔아놓기는 하지만, 작전 이론과는 다르게 맹목적인 공격과 총검돌격을 옹호하긴 커녕 우회기동을 통해 적을 포위공격하는 기민한 접근법을 강조할 뿐더러, 이를 위한 아방가르드 운용법을 제시하기까지 한다. 즉 그랑메종은 작전 전위대는 공격 속도를 늦추니 없어야 하지만 전술 전위대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무엇보다 그랑메종은 저 책에서 보병에만 집중하고 포병을 고려하지 않으면 잘못된 길로 간다고 경고한다.
그랑메종을 위시로 청년 튀르크들은 프랑스군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고, 사상자에도 기여했다. 프랑스 장교단에서 정신론적 공세주의의 영향을 받은 장교들은 청년 튀르크들의 합리적인 전술 이론엔 철저하게 무관심했고, 마침 프랑스군은 전술과 작전술의 혼동이 심했기 때문에[6] 작전적 수준에 대한 이론을 전술적 수준에 적용했다. 그리고 더 최악이면서 더 흔했던 경우로는, 이론이 아닌 사상만 적용했다. 동시에 실천에서 발생한 이런 왜곡은 청년 튀르크들의 군사사상이 사상자의 핵심 원인이기는 불가능하고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 곳에 있음을 시사한다. 그랑메종의 교리라고 알려진 1913년 작전교리인 Conduite des grandes unités : service des armées en campagne, Décret du 2 décembre 1913, portant règlement sur le service des armées en campagne : Service en campagne[7]의 목차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총론에선 정신론적 공세주의를 옹호하지만 그랑메종의 이론을 그대로 반영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교범에서 대부대 방호를 위한 작전 전위대 운용을 길고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교리 제작자 명단에 그랑메종은 있지도 않다.
프랑스군 전사자의 40%가 1914년 기동전 중에 발생했다. 전투가 8월에 시작되었음을 생각하면 기동전이 얼마나 치명적이었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럼 참호전에선 이들의 책임이 어땠을까? 청년 튀르크들은 참모장교로 육성된 집단이므로 야전에서 지휘하기도 했지만 당연히 총사령부 이하 GQG 참모부, 그 중에서도 작전부인 제3부에서도 일했다. 이는 교리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는 뜻이다. 청년 튀르크들의 작전교리는 명백히 1915년 프랑스군이 입은 사상자의 핵심 원인이다. 그러나 이는 사상의 문제 이전에 경험 부족과 GQG 제3부 전체가 하나의 파벌이었기 때문에 발생한 폐쇄성에서 기인한다. 참호전이 시작된 당시엔 현 상황에서 기동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로 논쟁이 있었다. 역사는 1918년 전까지는 후자가 정답이었음을 증명하나, 1915년 당시에도 전자를 지지하는 장교가 많았다. 제3부는 전자였다. 이들은 프랑스군의 첫 참호전 교리의 목표를 돌파로 삼았다. 참호전의 특징은 야심찬 전략이 전술적 실패를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프랑스군의 전술적 실패를 보장했다. 참호전의 또다른 특징은 가장 효과적인 전술이 전략적 실패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과 경험 부족이 겹쳐 제3부는 같은 교범 내에서 훌륭한 전술을 제시하느라 작전 템포를 늦추는 동시에, 돌파를 위해 작전 템포를 최대한 빠르게 만들며 오락가락 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우유부단은 파벌의 폐쇄성 때문에 1915년 말까지 지속된다. 총사령관인 조프르는 작전에서 무능했기 때문에 여기에 개입하긴 커녕 마냥 지지해주었고 말이다. 프랑스군이 선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법은 빠르면 1916년, 늦으면 1917년에 돌파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1915년엔 철저하게 교환비를 목표로 작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포슈, 페탱, 파욜 등 이런 방식을 지지하는 장교가 적지 않았고 초급장교들은 당연히 전술에만 관심이 있었으니 떠올리지 못할 방법도 아니었고, 청년 튀르크들 스스로도 전술 교리 개발에선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이런 측면에선 청년 튀르크들이 받는 비난은 정당성이 있는 것이다.
결국 청년 튀르크들 스스로도 대가를 치루어야 했다. 아마 기성세대보다 높은 대가를 치루었을 것이다. 에콜 드 게르는 1925년에 50주년 기념식에서 대전쟁 중 전사한 졸업생들에게 경의를 표했는데, 그 수는 장성급 25명, 영관급 223명이었다.
2.1. 프랑스군의 무모한 돌격 편견에 대한 반박
하지만 엘랑 비탈을 반자이 돌격에 가깝게 묘사하는 것은 역사 왜곡에 가깝다. 한국에는 "엘랑 비탈"로 알려진 공격 정신(Attaque à outrance)이 위에서는 무모한 돌격으로 곧잘 묘사되지만 그렇게 사람을 갈아 넣었을 뿐이라면 프랑스군은 1918년까지 버티기도 전에 몰살 당하고 파리가 함락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제1차 마른 전투에서 승전을 한 이후 독일의 전투력을 점점 따라잡다가 마지막에 가선 협상국 중 유일하게 독일군을 대등 이상의 교환비로[8]로 박살냈다.정말로 프랑스군이 그런 바보 집단이었다면 거기에 당한 독일군은 그 이상의 바보 집단이며 프랑스군보다 못 싸웠던 다른 협상국 군대는 생각 없이 돌격하는 것도 못 해서 프랑스군보다 1.5~2배씩 죽어나간 희대의 머저리 집단이 된다. 오히려 엄밀히 따지면 이러한 돌격 전술을 신봉했던 것은 영국군 그리고 미군이었다. 초기 영국군은 참호전의 대표적 상징인 기관총을 경멸했다.
더글라스 헤이그는 기관총에 대해 1915년 과대평가되었으며 대대당 두정이면 충분하다고 발언했다가 그 해 벌어진 솜 전투에서 전투 당일에만 6만명의 사상자를 내고 나서야 뒤늦게 기관총을 대대적으로 도입했다. 또한 수류탄도 없어서 1915년 밀스 수류탄이 도입되기 이전까지 안자크군은 잼 핀 수류탄이라고 불린 수류탄을 급조해야 했다. 또한 헤이그는 프랑스군과 달리 포병의 위력에 대해서도 무지했고 때때로는 날씨와 지형, 그리고 포병의 사격 가능 범위를 넘어서 공격할 것을 명령하며 오히려 일반적인 돌격에 가까운 명령을 남발했다며 도살자 헤이그라고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윈스턴 처칠을 위시로 한 영국 중동 사령부는 갈리폴리 전투에서 안자크 군단을 밀어넣었다가 보급부족과 오스만군의 참호 방어선에 25만명의 사상자를 내며 패배해 죽을 때까지 처칠의 오명으로 남았다. 하지만 1980년 기점으로 파스샹달 전투와 솜 전투의 도살자라고 욕먹었던 헤이그에 대해 당대 영국군의 전술, 전략적 상황상 불가피했다 라는 입장을 가진 역사학자들도 나오는 만큼 프랑스에게 돌격하다가 독일군 기관총에 쓰러져갔다는 묘사를 뒤집어 씌우는 것은 부당하다.
미군은 한술 더 떠서 전면전 교리가 반세기도 더 지난 남북전쟁시대에 머물러 있었으며 당시 미군의 군수산업은 전투기나 전차, 중포는 커녕 7~8mm 구경대 중기관총조차 스스로 자급하지도 못할정도로 처참했고[9] 무려 1917년까지 남북전쟁 시기 경험을 기반으로 한 포병 경시와 보병 우월주의 그리고 정신력으로 화력과 장애물을 돌파하는것을 강조하다 훨씬 진보한 화력체계들 앞에서 무참하게 갈려나간 뒤 프랑스군에게 군장싸는법부터 다시 배워야했다.
왜 미국 단위계가 기본값인 미군에서 155mm, 105mm, 75mm, 120mm, 81mm, 60mm 같은 미터법기반 구경들이 뿌리내렸을까? 그것은 1차대전~전간기 시기 화력체계 운영법을 모조리 프랑스에서 배워왔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군이 정말로 화력체계 운영법을 경시하고 돌격만 하는 집단이었다면 상식적으로 벌어질 수 없는 일이다.
비록 프랑스가 무리한 공세를 펴다가 많은 사상자를 낸 것은 사실이지만, 프랑스가 무리한 공세를 펼친건 기존 낭설처럼 무슨 똥별들이 무지성 공격정신에만 미쳐서도, 지휘관들이 사람 목숨을 껌값으로 봐서도 아니다. 프랑스가 무리해서라도 지속적인 공세를 펼친 이유는 크게 2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공자는 방자보다 무조건 불리하고 피해가 클 것이라는 전제는 거짓이기 때문이다. 배틀필드 1같이 역사물을 가장한 엔터테인먼트 판타지물들에서 묘사되는 공자는 지휘관이 호루라기를 삑 불면 단체로 적의 참호로 우와아아아 함성을 외치며 정면돌격하고 방자는 기다렸다는 듯 편하게 기관총으로 보병들을 수확하는 장면들이 수많은 대중들에게 방자가 공자보다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잘못된 환상을 심어주었고, 당연히 실제 1차대전 전장과는 몇광년이나 떨어져있는 묘사들이다.
하다못해 흔히 참호전의 프리퀄이자 러시아의 요새화 된 기관총 앞으로 반자이를 하다 쓸려나간 일본군의 이미지로 유명한 뤼순 공방전도 정작 일본군 전사자는 15000명 근처인데 반해 러시아군 전사자는 최대 16000명 이상까지 추산되는, 역설적으로 방자가 공자보다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편견을 재대로 깨버린 또 다른 사례에 불과했다. [10]
1차대전 참호전의 만능 최종병기마냥 묘사되는 기관총이라는 물건 자체가 실제론 문제점들도 대단히 많았을 뿐더러 게임 체인저는 더더욱 아니었다. 당시 기관총들은 본체만 해도 평균적으로 무게가 25kg는 우습게 넘어가는데다 삼각대와 냉각수를 합치면 최소 60kg가 넘어가는 흉악한 무게를 자랑해 기동력이 최악이었고, 따라서 상황이 약간이라도 불리하게 돌아가면 도수운반도 못하고 그냥 버리고 후퇴해 적들에게 노획당하는 일들도 빈번했다.
21세기의 기관총들도 고성능 사통장치와 반동 억제 기계장치의 도움 없이는 자동사격 정확도를 기대하면 안 되는 마당에 19세기 말 기술 기반인 당시 기관총들의 자동사격 정확도는 굳이 말을 할 필요가 없을것이다. 평균적으로 최소 수천발은 쏴야 어쩌다 한명이 얻어맞는 식의 극심한 탄약소모와 처참한 명중률을 자랑했다.
거기다 두꺼운 공랭식 총열을 채택한 호치키스 기관총 정도를 제외하면 수랭식 냉각을 채택한 기관총들은 물탱크에 손상이 나거나 냉각수가 떨어지면 곧바로 무력화되었으며, 마찬가지로 강철 보탄판을 쓴 호치키스 기관총 정도를 제외하곤 당시 켄버스 소재로 된 탄띠를 쓰던 맥심기관총 파생형들은 탄띠가 수분을 먹으면 기능고장이 빈번하게 일어나던게 1차대전 당시 기관총들의 현실이었다.
또한 기관총 사수는 이미 1914년부터 보병 침투반, 포병 관측반, 항공 정찰, 저격수, 공병대의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고, 오히려 일반 알보병보다 매우 위험한 보직이었다.
거의 대부분 1차대전 기관총 사수들이 맞이한 현실은 대규모 보병들의 무지성 돌격이 하니라 머리위로 떨어지는 다양한 구경들의 고폭탄과 독가스탄, 몰래 침투한 침투조가 여러개 까던지는 수류탄 세례나 지하에 공병대가 땅굴파고 설치한 다이너마이트 뭉치들의 공격들이었다. 1916년 이후엔 전차 주포의 고폭탄과 전투기의 기총소사, 항공폭탄도 추가되었다. 이로 인해 전쟁 내내 죽어나간 기관총 사수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는 말 할것도 없다.
이미 75mm니 105mm니 155mm니 194mm니 210mm니 420mm니 원래 사람 살던 마을들이나 숲이었던 지역들을 성경 구절에서나 나올법한 지옥같은 폐허로 뒤엎어버리고 고작 한방에 수영장급 구덩이를 만드는 위력을 내던 포병들이 판치던 판이었고 실제로 당시 사상자 75% 가량은 포병에서 비롯되었다. 즉, 당시에도 7-8mm 구경대 중기관총은 그저 중대/대대급 특정 거점 접근방지 견제용 전술화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신세였다.
“적이 방어선으로 올 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적이 오면 우리는 적을 편하게 갈아엎는다” 라는 말이 현장에서 침투니 공세니 하면서 쉴새없이 전장을 뛰어다니던 병력들이나 사상자를 줄이고 싶은 고위급 장성들과 정치인들에겐 달콤하게 들려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실 전쟁에선 적이 무지성으로 단단한 방어선에다 자기 병력들 꼴아박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때가 훨씬 많았다.
방어선에 발이 묶인채로 냅두고 기동전을 걸어 포위전으로 방어선을 무의미하게 만들거나, 방어선에 병력을 직접 투입시키기 전에 포탄의 비를 뿌려 방어선에 충분한 데미지를 입힌 뒤 투입시키거나, 둘을 적절히 섞어가며 대응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프랑스군이 방어선 만능주의에 빠져서 공세와 기동에 극도록 소극적으로 나서고 방어선에만 짱박히다 독일에게 주도권을 내주고 역으로 쌈싸먹힌 아주 교과서적인 사례가 얼치기 밀덕들이 엘랑 했다며 놀려먹느라 우려먹는 보불전쟁과 프랑스 침공이다.
실제론 1914년 10월을 넘어가면 공자측도 보병을 투입시키기 전에 정찰기로 적의 위치를 파악한 뒤 공격준비사격[11], 이동탄막사격[12]등으로 방자에게 포탄과 화학무기를 잔뜩 뿌려주었고,이미 1914년부터 공세를 위해 포를 너무 쏴댄 나머지 포탄 소모량이 감당이 안 될 수준까지 가버리니 1915년 1월 조제프 조프르가 총사령관 명령으로 이동탄막사격을 일시적으로 금지시키기도 했었다.
1916년쯤 되면 진격 과정에서 보병 뿐만 아니라 전투기와 전차까지 앞세우는 제병합동 전술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론 베르됭 전투, 솜 전투, 니벨 공세, 루덴도르프 공세, 백일 공세 등 각종 네임드급 전투들만 보더라도 방자측도 공자 못지않게, 심지어는 공자 이상으로 갈려나가는 일들도 부지기수였으며, 서부전선의 가장 정석적인 공세로 평가받는 말메종 전투같은 경우는 방자측이 최대 3:1 교환비로 밀리고 3중 방어선을 고작 며칠만에 무력하게 뺏기는 일이 벌어졌다.
두번째는 정치외교적인 이유였다.
먼저 프랑스 제3공화국은 인구가 4000만 남짓한 국가였고 독일 제국은 6800만에 가까운 국가였다. 즉 1:1로 붙기엔 체급이 딸려 프랑스는 독일과 전쟁하기 위해서라면 영국과 러시아 제국과의 동맹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그러나, 각자의 이해관계가 떨어져서 맺는 군사동맹에선 “나는 짱박혀서 방어만 할테니까 너네들이 대신 고기방패 해줘~” 라는 외교적 시그널을 보내는건 그냥 동맹을 깨달라는 소리나 다름없었고, 동맹국을 잃는것이 곧 전선 부담의 급증을 의미하던 프랑스에게 있어서 “우린 절대 짱박혀서 가만히 있는게 아니라는것”을 동맹국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프랑스에겐 지속적인 공세가 사실상 반강제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러시아 제국은 이에 보답해 내부에서 혁명이 터져 전선에서 이탈하기 전까지는 동쪽에서 독일에게 끊임없이 압박을 가해줬다.
이게 결코 기우가 아니었던것이, 후에 나치 독일의 팽창을 막고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영국과 프랑스를 모스크바로 초대한 뒤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라는 자신의 최측근을 회담에 보내면서까지 과거처럼 다시 하나로 뭉치자는 집단안보 계획을 적극적으로 제안했지만, 프랑스는 이에 군부 내 서열 40위 단위 대장을 파견했고, 영국은 더 나아가 소장을 파견하여 유사시 4개 사단 파병 운운하며 안보협력 의지 자체를 보여주질 않는걸 넘어 대놓고 소련군에게 고기방패 해달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자 재대로 열받은 스탈린이 그냥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어버려 서방연합군은 나치독일의 침공에도 소련과의 군사협력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결국 서부유럽에 전쟁이 개시된지 2달도 안 된 1940년 7월쯤 되면 소련은 뒷짐지고 수수방관했고, 프랑스는 수도가 털렸으며, 영국군은 무기까지 다 내팽겨치고 몸만 간신히 건져서 탈출했다. 연합국들은 각자도생식으로 방어로만 일관하며 “너가 먼저 희생해라“ 식으로 서로 등 떠밀다 깔끔하게 각개격파 당하고, 겉잡을 수 없이 커진 나치독일을 상대로 흘릴 필요가 없었던 훨씬 더 많은 피를 흘렸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처럼 공세주의가 무모하고 어리석으며 방어만이 최선이라는 담론은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는 2차대전 초기 서부전선이 증명해주었다. 특히 1939년 까지만 했어도 폴란드 침공 당시 폴란드군 상대로도 공세종말점이 왔을 정도로 취약했던 당시 독일군의 실상을 상기해보면, 공세주의를 포기하고 방어로만 일관하기로 선택한 전간기의 프랑스의 선택이 얼마나 비합리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셈이다.
보불전쟁 시기 프랑스군은 종래의 공격 대열인 '퓌리 드 프랑세즈'를 폐기 하고 무기의 카탈로그 스펙에 의존하여 다가오는 적에게 화력을 쏟아붓자는 '푸 드 바타용'이 주류가 되었지만 '고속으로 기동하여 전선을 분단하고 각개격파를 추구하는' 직접접근-섬멸론의 프로이센군에게 대패 하였다.
이후 화력론파가 틀렸다는 군부 자아비판 여론이 강해지고 고속기동과 전선 돌파를 위한 보병의 정신론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프로이센 육군의 정신론을 그대로 직수입. 능동 기동하여 전선을 돌파하고 각개격파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바뀌면서 큰 틀에서 프로이센과 비슷해진다.
여기서 흔히 포슈를 돌격 바보로 왜곡하게 되는 부분이 나오는데 정작 포슈를 포함하여 조제프 조프르, 조제프 갈리에니, 에밀 파욜 등은 보불전쟁 당시 상대의 움직임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며 방어에 급급하려 한 결과 몰트케의 기동에서 뻔히 약점을 드러낸 상황에서도 그것을 구경만 하다가 주도권을 넘기고 오히려 돌파 당해 버렸던 경험에 의거하여 공격 정신을 주장 했고 포슈의 유명한 말[13] 역시 적들의 움직임을 구경만 하며 짱박혀 있지 않고 아군 측에서도 적극적으로 반격에 나서야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상식적인 말이다. 그 말이 나온 시점을 감안하면 독일군에게 밀리는 상황이지만 겁먹지 않고 용감히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지만 국내에서는 이러한 맥락을 전부 잘라내고 포슈와 프랑스군을 비하하는 용도로만 쓰였다.
사실 1913년 교리를 창안안 그랑메종은 1915년 전사하기 전까지 실전에서 상당한 공훈을 올리고 대령에서 소장으로 급속 승진한걸 보면,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교리 자체의 실전성이 아예 없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실제로 1913년 초 프랑스군의 실전 기동훈련을 본 독일군은 '결단력 부족, 겁에 질려있음, 안전해지려는 과도한 욕구, 병사와 부사관의 무기력함, 대담성이 없음, 극도의 조심성'이라는 혹평을 남겼는데, 그랑메종의 초공세 교리는 이런 맥락에서 프랑스군의 문제점을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1913년 교리는 분명히 여러 측면에서 극단적이고, 한계점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또한 그랑메종의 초공세 교리는 당시에는 엄밀히 구분되지는 않았지만, 오늘날의 작전술적 영역에 관한 것이었는데, 작전술과 전술의 교리가 분화되기 전 시점의 프랑스 장교들 다수는 작전술적 초공세를 전술적 측면의 초공세로 인지하는 오류를 범했다. 정말로 이들은 적극성을 강조한 그랑메종의 교리를 전술적 돌격로 착각해버리고, 정작 그랑메종조차도 평지에서의 보병 정면 공세는 불가능하다고 했음에도 평지에서 보병들만 데리고 정면 돌격을 감행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면 돌격도 원래 프랑스군은 행진 간 사격(feu de marche)이라 하여 전진간 기관총 사격으로 방어측을 압도한다는 개념을 1903년 도입해 경기관총 쇼샤를 개발해 전쟁 내내 26만정을 보급했다. 비록 쇼샤는 초창기 물량분에는 품질관리 문제가 있었지만 최소한 프랑스군은 돌격간 엄호를 위해 방자를 압박한다라는 개념이 분명히 잡혀있었고 이를 위해 무기 개발도 나섰던 것이다. [14]
결국 1차 대전 초기 프랑스의 졸전은 여러 분열상 때문에 현대전을 준비하기 위한 통합된 교리조차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지, 이러한 여러 문제를 '엘랑 비탈'이라는 교리 문제로 퉁쳐버리는 것은 지나치게 피상적인 이해라 할 수 있다.
돌아와서, 프로이센의 보병 기동 전술을 직수입 해와 발전 시킨 프랑스군은 17계획으로 독일 서부에 비해 프랑스 동부는 철도망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차량을 동원해 독일군과 비슷한 속도로 전선에 병력을 전개 시키는 업적을 달성 했다. 이후 1914년 여름의 전투는 프랑스와 독일이 양측 모두 보병 돌격을 통한 고속 전선 돌파를 시도하는 형태로 이루어졌고 프랑스는 초전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반격해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을 섬멸 시켰다.
하지만 기관총과 철조망으로 대표되는, 1871년에 비교해 진지구축능력과 화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해 양측 모두 상대방의 전선을 돌파하는 것에 실패 하여 고착 되었다. 이 와중에도 니벨 등의 장군들은 여전히 돌파가 가능하다고 믿었지만 당시의 기술력 수준으로는 적군의 전선을 완전히 돌파하여 적을 분단 시키는 것은 불가능 했다.
2.1.1. 알자스-로렌을 향해 돌격한 프랑스군?
일반적으로 프랑스군의 제17계획을 군인을 강제로 돌격시켜서 기관총 앞에 갈아버린 무능의 극치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1919년 5월 프랑스 국민의회에서는 패배의 원인 분석과 지휘관 질책을 위해 주요 장군들을 소환해서 청문회를 열었다. 여기서 제17계획을 세운 중심인물이었던 노엘 드 카스텔노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프랑스군 작전참모들이 17계획에 작전계획(Operation Plan)을 포함시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우리는 동원계획(Concentration Plan)에 대해서만 의논했다."
여기에 대해 의원들이 동원계획과 작전계획의 차이점에 묻자 참모총장 조제프 조프르가 작전계획은 군사작전의 세부사항까지 정의한 것이며 동원계획은 병력을 제 위치에 배치함으로써 전투를 준비하는 성격의 계획이라며 둘의 차이점을 설명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17계획이 병력 동원계획이며 아르덴 공세를 포함한 작전은 17계획에 포함되어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공세작전은 적군의 군사 배치에 관란 첩보를 입수한 후 참모총장이 결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따라서 초기 프랑스군의 공세와 그에 따른 피해는 17작전 때문이 아니라 조제프 조프르 개인의 무능함 탓이며 엘랑 비탈과는 상관없다. 오히려 수백만의 육군을 전쟁 직전에 국경에 배치한 동원 계획으로 봤을 때 17작전에 한해서는 성공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17작전이 군사작전으로 알려진 것은 전간기 프랑스의 좌파 세력이 정치적인 이유로 17계획 = 공세주의 무능작전이라고 선동하고 영국에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탓이다.
2.1.2. 프랑스군은 돌격만 했다?
1915년 중부에 출간된 "총공세를 위한 목표와 조건"(But et conditions d'une action offensive d'ensemble-Goals and Conditions for a General Offensive Action) 혹은 노트 5779이다. 1914년말과 1915년초에 프랑스군이 참호전과 화력전을 치르면서 쌓은 경험을 집대성한 결과물로 참호전을 휘어잡는 과정에서 출간된 첫번째 걸작이라 할 수 있다.이 문서는 후일 독일군의 발명물로 취급받는 침투 전술(혹은 '후티어' 전술)을 사실상 최초로 다룬다. 그리고 실제로 프랑스군은 서부전선에서 공세를 담당하며 1916년의 베르됭 전투까지 방어에 일관한 독일군보다 더욱 공세 전술을 발전할 기회가 많았고 그로인해 궁극의 공세 전술인 침투 전술을 개발해내는 것도 어색한 일이 아니라는게 조나단 크라우스(Jonathan Krause) 교수의 설명이다.
- 보병돌격의 목표는 1차 참호선의 탈취로 멈추지 않고 더 후방의 목표를 노릴 수 있는 요충지를 탈취해야 한다.
- 보병 소대는 경보병과 같이 산개하여 움직이며, 적을 향해 근접하는 동안 지속적으로 엄폐물을 향해 움직여서 총탄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
- 공세에 있어서 1차로 파견되는 보병은 강습부대로써 적의 방위거점을 위해 최대한 깊숙히 돌파해야 한다. 2차로 파견되는 보병은 참호 청소병(nettoyeurs de tranchée)으로써 리볼버, 트랜치 나이프, 수류탄 등으로 무장하고 참호에 돌입해야 하며 이를 위해 특수한 훈련을 시켜야 한다. 참호 청소병들을 엄호하기 위해 공병들은 평소의 장비와 별개로 추가적인 기관총, 가시철사, 폭파용 폭약, 모래주머니, 박격포 등으로 무장하고 엄호한다.
- 포병은 공세에 있어서 체계적인 공격으로 적을 압박하고 아군을 엄호한다.
이 전술교리는 보병 돌격의 목표가 적군의 1차 참호선의 탈취뿐만 아니라 후방의 목표를 공략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주목적-적방어선의 돌파-을 달성시킬 수 있는 요충지를 장악한다.” 따라서 이 문서의 본문은 ‘무한 전투’(continuous battle)를 강조하고, 포병을 다루는 부록에서는 ‘체계적인 전투’(methodical)를 중시한다. 그리고 보병을 다루는 부록에서는 다시 돌파를 중심으로 한 무한 전투를 강조한다. 이 부록의 설명에 따르면, 보병은 마치 척후병처럼 산개형 대형(dispersed formation)을 유지하면서 여러 엄폐물에 몸을 숨기며 적군을 향해 다가가야 한다. 이는 전전(戰前-pre-war)의 이론과 맥락이 닿는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nettoyeurs de tranchée, 혹은 ‘참호 청소병’(trench clearers)에 대한 언급이다: 이 참호 청소병들은 정립된 교리 내에서 수 차례 반복되는 첨투전술에 대한 서술 중 최초로 등장하는 사례로서, 특별훈련과 장비를 지급받은 병사들이다. 부록에 의하면, 1차로 파견된 보병들은 적 방위거점을 피해 최대한 깊숙이 돌파해야 한다. 또한 2차로 파견된 참호 청소병들은 앞서 강습 부대(assault troop-앞서 언급된 1차로 파견된 보병)가 회피한 적 방위거점을 제거해야 한다. 이 참호 청소병들은 리볼버(revolver-회전식 연발 권총), 참호검(trench knives), 수류탄이 지급되어 근접전을 대비하고 이를 위한 특별훈련을 받는다.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공병들은 평소의 장비와 별개로 기관총, 폭발물(petard), 가시철사(barbed wires), 모래 주머니, 박격포(trench mortar)를 지급받는다. 침투 전술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공세작전을 기획하면서 가장 필수적인 전술로 사용된다. 이는 ‘후티어’ 전술로도 불리며, 독일군의 발명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으나 실은 프랑스가 먼저 개발한 것이다.
하지만 후티어 전술 등 침투 전술을 개발할 당시에는 프랑스군은 여전히 "돌파"라는 구시대의 개념이 아직 가능한지 긴가민가한 상태였다. 페르디낭 포슈, 필리프 페탱, 에밀 파욜 등의 지휘관들은 "체계적인 공세", 즉 포격으로 확실히 짓밟고 보병은 잔해 처리 및 깃발 꽂이역으로 활용하는 그러한 방식의 공세로 기울었지만 빅토르 위르발같은 지휘관은 여전히 돌파가 가능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끝없는 인력을 목표를 향해 공격하는 "무한 전투"를 선호했다. 그런 의미에서 위에서 언급하는 노트 5779는 프랑스군의 참호전에 대한 해답이 아닌 과도기를 넘어가는 순간의 이정표라고 봐도 무방하다.
프랑스군의 공세정신은 오인된 측면이 많고 포슈의 최대 비판자이자 프랑스군의 공세정신에 대해 여러 서술을 보인 리델 하트조차도 주장하지 않은 것들이 실려 있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군은 1915년의 과도기를 거쳐서 1916년에 이르면 상당한 전술능력을 갖춘 덕분에 영국군이 공세 첫날에 5만의 사상자를 낼 때 프랑스는 겨우 1000명 정도의 사상자를 내고 훨씬 더 많은 영토를 얻는 대성과를 얻었다. 이러한 점을 부각하지 않고 1차대전의 프랑스군에 대한 항목은 전초의 군복이나 초반의 공세로 인한 피해를 비웃기 바쁘고 1차대전을 승리했다는 점, 또한 2차대전의 패배나 입은 피해로 인해 무마하고 조롱으로 일관하기 바빴던 것이 사실이다.나폴레옹 이후 프랑스 최고의 명장이라 할 수 있는 페르디낭 포슈조차도 제대로 무슨 역할을 했는지 알려지지 않은 채로 프랑스의 츠지 마사노부인양 까인 것은 이러한 풍조의 일환이라 보인다.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의 프랑스군의 전술/전략의 발전은 상당히 복잡한 분야지만 로버트 다우티 교수의 "The Pyrrhic Victory"나 "The Seeds of Disaster"을 참고하는게 좋으리라 보인다. 조금 더 첨언하지면, 프랑스군이 1918년에 개발해낸 해답은 결국에는 돌파라는 개념을 버려서 이뤄낸 것이다. 포격으로 적진을 박살내고, 포병의 사거리까지 보병을 진격시키고, 포병 또한 앞으로 들이밀고, 다시 포격으로 적진을 격파한다는 것을 전술적인 국면에서 반복했다. 전략적인 국면의 경우에는 한 전장에 집중하는 개념을 버리고 여러 전선을 서로 다른 타이밍에 공격해서 적을 조금씩 조금씩 밀어내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해서 독일군이 방어점을 찾지 못하고 계속 묻매를 맞도록 강요했다. 결국에는 2차 마른 전투에서부터 독일군은 거의 120일간 제대로된 반격을 못하고 완전히 완패하며 벨기에와 프랑스에 장악한 영토를 죄다 토해낸 다음에 11월 11일에 사실상 항복하는 결과를 낸다. 이는 "The Pyrrhic Victory"에서 다루는 1918년의 성과이다.
1918년의 교전은 4년만에 부활한 기동전이라는 측면이 부각되긴 허나 화력전 및 소모전으로 말 그대로 독일군의 마지막 전력을 빨아먹어서 군 자체의 붕괴를 이끄는데 주력했지 우월한 기동력으로 적군을 돌파하고 유린하는 방식(가령 1940년의 프랑스 침공이라던가)은 프랑셰 데스페레 장군이 마케도니아 전선에서 불가리아군을 상대로 실현했다. 사실상 그 시점에서 영불 모두 허덕이던 시점에 미군은 애송이에 불과한다는 점에서 1918년에 연합군이 보인 분투는 놀라운 수준이고 그만큼 독일군 또한 그간의 피해가 심각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즉 연합군은 4년동안 버틴 대가를 받아간 것이다.
2.1.3. 왜 이렇게 비하적인 이미지가 박혔는가?
결론적으로 1차대전 당시 프랑스군은 모든 군대 중 가장 현대적인 군대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이미지가 실추된 가장 큰 이유론 이후 세계 2차 대전 시기에 프랑스가 6주 만에 파리까지 정복당해 정부가 그대로 항복했고 그로 인해 프랑스의 군사적 업적 전체가 완전히 비웃음거리로 전락해버렸던 점에 있다.
이는 단순히 1차 대전의 승전국 이미지가 망가진 수준이 아니다. 프랑스군이 수백년 동안 숱한 전쟁을 치르며 쌓아올린 강군의 이미지를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정도의 대참사였다. 물론 프랑스 침공 문서에 나오듯이 프랑스군 입장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며 분명 나름대로 싸울 만큼 싸운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6주 만에 항복했다는 대참사를 완전히 무마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희안하게도 엘랑 비탈은 1918년까지 포슈의 손을 거치면서 도태된 전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2차 대전 프랑스 침공 당시 프랑스를 패배로 몰아넣은 구시대적 전술로서 비하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사실 엘랑 비탈로 알려진 총력 공격 전술 'Offensive à toutrance'은 사용되었던 1차 대전 국경 전투 당시 패배의 원인으로 꼽는 것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다. 파리 소르본 대학 피에르 미겔은 '공세적이며 신중하며 사려 깊은 개념'이며 방어, 화력, 기동의 균형을 제시한다고 분석했고[15] 해당 교리가 작성되었던 것이 1911년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프랑스군 전군에 대해 미친 영향이 극도로 미미했다라는 주장조차 있다.
이는 전술한 국경 전투 당시 독일군에게 돌격하다가 쓸려나간 프랑스군 행적에 대한 설명으로 살펴보았듯 오히려 조프르의 군사적 실책이라는 논의도 있을 정도로 총력 공격 전술에 의한 실패 논의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오히려 국경 전투 당시 독일 제국군 좌익의 임무는 프랑스군의 공격에 맞아 영토를 조금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우익의 주공이 포위하려 올때까지 버티는 것이었지 프랑스 주력군을 격퇴해버리는 것이 아니었고 이는 타넨베르크 전투(1914)와 함께 독일 제국군이 제1차 마른 전투에서 패배하는 요인으로 작동했다.
더 나아가 비하적 이미지를 가지게 된 사건의 근원인 2차 대전까지 확대를 해보자면 2차 대전기 프랑스군의 전술은 포슈의 교리를 나름대로 현대적인 면으로 발전시키는 과정 중에 있었지 총력 공격 전술과는 거리가 매우 멀었다.
하지만 이러한 엘랑 비탈 전술이 2차 대전 프랑스 침공 당시 프랑스의 패배를 비하하는 것으로 쓰인 것은 전후 생존했던 독일 국방군 장성들과 2차 대전 승전에 있어서 큰 지분을 차지했던 영국과 미국의 오해와 자신들의 전공을 추켜새우면서 1940년 서부 전역 당시 프랑스군이 구시대적인 전술을 사용했다고 적었기 때문이다.
1940년 5월 프랑스군의 전술이 구시대적이었던 것은 독일군의 전격전이라는 환상을 깨뜨린 것으로 평가받는 칼 하인츠의 전격전의 전설에서도 인정하는 부분이지만 지적받은 프랑스군의 구시대적인 전술은 문제의 엘랑 비탈이 아니라 보병 선형 전술과 기갑부대를 보병의 보조적 역할로 보고 보병 부대에 분산배치 한 것, 공군 운영의 오류, 무전기의 부재, 첩보의 무시였다.[16]
돌격과 총검을 활용한 백병전을 주장한 총력 전술대로라면 영불 최고전쟁평의회가 1939년 9월 자르 침공 당시 프랑스군 내 반대 여론을 무마하고 중포를 이유로 지크프리트 라인 앞에서 물러나 마지노선에 틀어박힌 것, 그리고 1940년 5월과 6월 당시 가믈랭의 딜 라인과 베이강의 베이강 선이 갖추고 있던 중대전술기지나 강력한 방어력으로 유명했던 마지노선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엘랑 비탈때문에 프랑스군이 2차 대전에서 패했다는 것은 프랑스군 입장에선 억울해 팔딱 뛸 말이다.
이러한 오류는 구데리안와 프란츠 할더를 비롯한 독일군 생존 장성들은 전후 이들을 높이 평가했던 영미 연합국과 교류를 하는 과정에서 많은 학자들이 주목했던 '눈부신 성과를 거둔 독일군이 패배한 이유'를 자신들의 부족한 전략적 식견에 대해선 입 닫고 오로지 히틀러에게 전과하거나 리델 하트와 같은 자신들이 상대한 영미 장교들을 기동전의 스승이라는 식으로 치켜세워주기도 했다.[17]
프랑스의 조기 패전으로 인해 2차 대전 당시 활약할 수 있던 자유 프랑스군의 병력이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승전의 스포트라이트는 수천만명을 갈아마시면서 나치를 밀어낸 소련, 연합군의 든든한 무기고이자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이끌며 프랑스를 해방시킨 미국, 프랑스가 항복한 상황에서 홀로 나치에 맞서 싸웠던 영국에게 향했다.
반대로 이로 인해 나치의 찬란한 군사적 영광의 한 페이지를 내주었던 프랑스에겐 우리 덕분에 살아남은 거야!라는 식으로 조롱이 쏟아지게 되었다.2025년 사례 이 과정에 이른바 프랑스의 구시대적인 전술로 패배했다는 독일군 장성들의 입장에 따라 갑자기 1차대전때부터 이미 프랑스군 내부에서 비판이었던 엘랑 비탈이 사용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끌려나오게 되었다.[18]
즉 2차 대전에서의 엘랑 비탈에 대한 비하적 이미지는 각자의 전공을 치켜새우기 위한 과정과 냉전, 그리고 동맹이라고 하기엔 다소 복잡한 영불관계와 미국-프랑스 관계에 따른 산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으로 독일의 전격전, 라스푸티차와 렌드리스빨로 이긴 소련, 독일을 통해 배워온 미군의 놀라운 공지 기동전이라는 2차 대전에 대한 오해가 쌓이게 된다.
그러한 대표적인 저술이 바로 라이프 제2차 세계대전.[19]
게다가 엘랑 비탈을 더 이상하게 베낀 곳이 있었으니, 바로 일본군이다. 프랑스군이 1차 대전 당시 독일의 공세를 돈좌시키는 모습을 본 일본군 수뇌부는 "독일처럼 비싼 돈 들여서 기동전 펼쳐도 프랑스처럼 돌격하면 다 소용없구나!"라는 이상한 교훈을 얻었다.
그래서 엘랑 비탈 교리에서 백병전 교리만 따와서 일본군사연구소 중 하나였던 토야마학교에서 "총검술, 양손군도술 교육의 범례(銃剣術、両手軍刀術教育法の範例)"라는 이름으로 백병전 교리를 완성시킨다. 이렇게 완성된 일본군의 백병전 교리는 장교가 병사를 이끌고 앞장서서 돌격할 것을 강조했으며 이를 위해 장교들에게는 군도가 기본적으로 지급되었다.
1916년에 이런 짓거리를 했으면 그렇게까지 이상할 건 없지만 1944년이 되어서도 "군도의 사용법 및 시참요령" "단기속성 일격필살 훈련요령" 같은 교본을 일선에 배포하며 반자이 돌격을 했다.[20] 일본군의 이 정신나간 행적은 엘랑 비탈 교리 자체마저 일본군식 정신력 우월주의, 의지 드립으로 오해하기 딱 좋게 만들었다.
사실 그 일본군도 미군을 상대하기 전엔 오히려 화력전을 구사했던 군대였다. 그야 말은 많아도 일단 항공모함까지 뽑아내는 국가가 일본 제국이었던 데 반해 당시 기관총 하나 제대로 못 뽑을 정도로 처참했던 군수산업 자립력의 중국 대륙과 규모도 작고 증원해 줄 본토가 지구 반대편에 있던 동남아시아 주둔 유럽 군대들은 화력에선 일본군에게 상대가 되질 않았고 오히려 중일전쟁 내내 장제스 사단같은 일부 독일식 정예사단을 제외하면 중국군 쪽이 항일대도 같은 물건을 써가며 일본군에게 먼저 근접전을 걸어왔다. 대미개전 이후 이젠 자신들이 화력에서 상대가 안 되니 중국군이 하던것 처럼 근접전으로 승부보려고 했던 것일 뿐.
2.2. 인터넷 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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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밈이 탄생된 유로파 유니버셜리스 갤러리 등에서는 프랑스를 '엘랑스'라고 부르고, '항복'이란 뜻으로 '엘랑했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21][22] 대표적인 표현이 2차 대전에서 독일에 6주 만에 항복한 걸 비꼬는 "6주 엘랑".
게임 Hearts of Iron IV의 프랑스는 기본적으로 '분열된 정부'라는 국민정신을 달고 시작하는데, 매일 정치력을 0.8 소모하고, 안정도가 10% 감소하며, 항복 한계치가 무려 50%나 감소한다. 이 수치는 협력정부로 깎이는 것(항복 한계치 -30%)보다도 높은 페널티로, 다시 말해 항복도가 2배로 올라 파리 같은 주요 승점 지역이 고작 몇 개 점령되는 것으로 항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23] 이는 게임 밸런스적으로 프랑스를 독일이 공략하지 못하면 독소전쟁 발발시 양면전선이 형성되어 순식간에 망하기 때문에 주어진 페널티로, 해당 페널티를 땐 프랑스는 국토 전역을 점령해야 항복할 수준으로 끈질기게 버티며 육군메타를 가는 순간 1차대전 당시의 불굴의 프랑스로 단숨에 체급이 떡상한다. 독일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를 위시로 한 몇몇 국가들 역시 프랑스를 먼저 점령하고 시작할 수 있으며, 이 "선엘랑"은 아무리 약한 나라여도 파시로 정부를 바꿔주고 10공수만 준비해주면 열강 하나가 1937년에 사라지는 마법을 부릴 수 있는 게임의 가장 쉬운 날빌 빌드로 통한다.[24] 그래서 멀티플레이에서는 분열된 정부를 빠르게 제거할 수 있는 공산주의나 국민 부흥(파시즘) 루트를 간다.
[1] 혹시 착각하지 않도록 말하자면 청년 튀르크 파벌이 아니라고 공세주의자가 아니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참호전을 예언한 이론가들도 전부 공세주의자였을 정도로 공세주의 자체는 프랑스군을 넘어 유럽 전체 민간 사회에까지 만연했을 정도로 매우 보편적이었다.[2] 프랑스인의 민족성은 용맹하고 주도적이므로 공세에 유리하다.[3] 보날의 제자인 페르디낭 포슈의 이론에서도 작전 전위대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는 포슈의 이론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이기도 했다.[4] 파벌 구성원들의 계급과 경험을 생각하면 당연하지만 이건 청년 튀르크 대부분의 공통점이다.[5] 여담으로 이 시기 프랑스군은 분대가 15명으로 구성되었다.[6] 당시엔 작전술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 그나마 독일군이 작전술에 대한 인식에서 가장 앞서나갔다.[7] Décret du 28 mai 1895 portant règlement sur le service des armées en campagne를 갱신한 교리다.[8] 1:1~1.1:1, 러시아군 1:1.5 ~ 1:2.5 , 영국군 1:1.2 ~ 1:1.5[9] 라이트 형제가 미국에서 그렇다 할 관심을 못 받고 프랑스에다 첫 공장을 세운건 유명한 이야기이며, 마찬가지로 맥심 기관총, 루이스 경기관총, 호치키스 등 각종 영프산 자동화기들은 본래 원산지가 미국이었지만, 미국에서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아 개발자들이 각자 영국과 프랑스로 건너가 기업과 공장을 세웠다. 1차대전 당시 미군의 제식 경기관총은 호치키스 M1909, 쇼샤 였으며, 미군의 제식 중기관총은 호치키스 M1914, 미군의 제식전차은 르노 FT, 미군의 제식 포병은 슈나이더 M1917C 155mm 곡사포, 1897년식 75mm 야포, GPF 155mm 야포, 미군의 주력 전투기는 뉴포르, 스패드였다.[10] 사실 러일전쟁 시기 일본은 서구의 문물이라면 무조건 배끼고 보던 시기였기에 일본군 역시 서구식 화력주의를 바탕으로 싸우던 군대였다. 사실 그 유명한 반자이 돌격 자체가 기동전,공세는 해야겠는데 일본의 공업력으론 도저히 포탄 소모량이 감당이 안 되니 기합으로 화력을 극복한다는 이상한 결론으로 도달한 결과물이다.[11] 보병 진입 전 대규모 포격을 적에게 날리는 개념[12] 포병이 적진을 때려부술동안 아군 보병을 진격시키고, 아군 보병이 목적지에 도착할 때 쯤엔 포병은 다음 목표지점으로 재방렬하여 재포격하고 보병은 이미 포병이 뒤집고 간 적진을 정리한 뒤 다시 목표물로 진격하는것을 작전 종료까지 반복하는 개념[13] "나의 중앙은 무너지고 있고 우익은 철수중이니 그야말로 최고의 상황이다. 나는 공격할 것이다." 포슈 본인의 항목에도 쓰여져 있듯 실제로 한 말은 아니고 당시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용감히 싸우는 포슈를 언론에서 부각시키면서 창작된 말이다.[14] 또한 타국군의 동급 병기들이 프랑스보다도 나앗다고 보긴 어려운데, 영국군에겐 루이스 경기관총, 독일군에겐 MG08/15가 있었으나 이들 역시 쇼사보다 생산량이 10만정 가까이 부족했고, 이동간 사격은 고려하지 않은 설계였던데다 MG08/15의 경우는 아예 거점방어용 수랭식 중기관총을 어거지로 뜯어고친 물건이라 독일군 내부에서도 노획한 루이스와 쇼샤보다도 덜 선호받던 물건이었다. 그나마 미군이 M1918 브라우닝이라는 쇼샤 대비 확실한 상위호환 무기를 만들어서 투입시켰지만, 종전 6주전에 투입된 물건이라 1차대전에서의 활약은 제한적이었다.[15] Pierre Miquel, Le gâchis des généraux : les erreurs de commandement pendant la guerre de 14-18, Paris, Plon, coll. « Pocket » (no 11640), 2003 (1re éd. 2001), 242 p.[16] 보병의 선형 전술의 경우 독일군 내부에서도 이견이 있었던 부분이었지만 독일군은 그 형태가 애매했다고 하지만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이라는 타협안으로 나왔고 히틀러를 비롯한 보수파 장교들의 방해을 받아야했지만 독일군의 승리를 이끌었다. 독일 공군의 운영 역시 스페인 내전과 전략 폭격론자였던 발터 베버의 죽음 속 도출된 결과였다. 즉 하인츠가 전격전 전설에 쓴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작전술적 측면에서의 성과 확대에 몰빵한 군대가 바로 독일 국방군이었다. 이로 인해 독일군의 전략적 사고방식은 독일 제국군 수준에서 발전한 것이 없는 구시대적이었다.[17] 가령 미군 공식 전사를 작성할 당시 미군은 독소전쟁에 대해 소련 장교를 불러다가 물어볼 수 없었으니 프란츠 할더를 불러다가 적었는데 프란츠 할더는 자신이 소련을 얕본건 쏙 빼고 히틀러가 다 했어, 소련 날씨가 추워, 렌드리스때문에 우리가 밀렸어로 서술했다.[18] 이것도 웃긴 것이 독일군 장성들이 프랑스의 구시대적 전술을 비웃었다고 하지만 엘랑 비탈이라고 불리는 총력 공격 전술을 언급하며 비웃은 적은 없었다. 독일군 장성들이 비웃은 것은 왜 전차로 올거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참호전만 생각했는가?였다.[19] 독소전과 프랑스 침공에서의 오해를 넘어 여기에 적힌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한 서술 역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에 대해 에리히 만슈타인의 말을 무시하고 히틀러의 고집대로 버티다가 항복한 우유부단한 장군으로 묘사되지만 사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초기 단계부터 이미 파울루스의 6군은 누더기였다. 자세한 내용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참고[20] 이때 백병전 위주를 완성시켰던 토야마학교에서는 전후 일본검도 토야마 유파로 살아남아서 유명해졌다.[21] 다만 이렇게 밈으로서 조롱받는 것과는 별개로 유로파 내에선 엘랑은 10%만 올라도 감지덕지인 육군 사기를 20%나 늘려주는 덕에 그야말로 사기적인 종특으로 여겨지고 있다.[22] 사실 Europa Universalis 시리즈에서 1티어 급, 특히 육군 최강인 육각본능 왼쪽 파란 거에 비해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Hearts of Iron 시리즈에선 열강이긴 하나 별 볼일 없고 어느 나라가 침공해도(심지어 베네룩스나 스위스에게도) 독일이 정석대로 안슐루스, 뮌헨협정 루트 타주고 기갑 뽑으면 낫질할 필요없이 마지노선에 무지성 웨이브로 돌격해도 뚫리는 등 패배하기 바쁜 국가로 나오는 영향이 크다. 특히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는 나라에 상관없이, 협력정부 없이도 수도인 파리만 함락시키면 분열된 정부 페널티를 떼지 못한 민주 프랑스는 그대로 항복하고 사막에서 개싸움을 해야 되기 때문에 멀티에서 프랑스는 십중팔구 파시즘으로 독일에 붙거나 공산주의(프랑스 코뮌), 비동맹으로 갈아탄다. 연합국에 남는다면, 워낙 악명이 높으니 미국, 영국에서 병력을 개때 같이 보내 프랑스에 몰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23] 해당 영상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가 협력정부를 박고 프랑스 남부에 공수 조금 한 것만으로 프랑스를 항복시켰다.[24] 그래서 이러한 점이 개선된 The Road to 56 모드 같은 경우 프랑스가 뻐기면서 1차 대전의 재림을 보여주기도 한다. 뭐 그래도 십중팔구는 망하지만 바닐라에선 그것도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