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나이 술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cf1126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letter-spacing: -1.0px" {{{#181818,#e5e5e5 | <rowcolor=#cf1126>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무하맛 샤 | 압둘 마지드 하산 | 아흐맛 | 샤리프 알리 | |
<rowcolor=#cf1126>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술라이만 | 볼키아 | 압둘 카하르 | 사이풀 리잘 | |
<rowcolor=#cf1126> 제9대 |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
샤 베루나이 | 무하맛 하산 | 압둘 자이르 아크바 | 압둘 자이르 자바 | |
<rowcolor=#cf1126>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제16대 | |
무하맛 알리 | 압둘 하클 무빈 | 무히딘 | 나스루딘 | |
<rowcolor=#cf1126> 제17대 | 제18대 | 제17대(복위) | 제19대 | |
후신 카마루딘 | 무하맛 알라우딘 | 후신 카마루딘 |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1세 | |
<rowcolor=#cf1126> 제20대 | 제21대 | 제22대 | 제23대 | |
무하맛 타즈딘 | 무하맛 자마르 아람 1세 | 무하맛 칸줄 아람 | 무하맛 아람 | |
<rowcolor=#cf1126> 제24대 | 제25대 | 제26대 | 제27대 | |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2세 | 압둘 모민 | 하심 자이르 아람 아카마딘 | 무하맛 자마르 아람 2세 | |
<rowcolor=#cf1126> 제28대 | 제29대 | 제30대 | ||
아흐맛 타즈딘 |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3세 | 하사날 볼키아 |
<colbgcolor=#f7e017><colcolor=#d00c33> 브루나이 다루살람 제29대 술탄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3세 Omar ali Saifuddien III | |
| |
이름 | Mullah Begawan Sultan Sir Muda Haji Omar Ali Saifuddien Saadul Khairi Waddien ibni Sultan Muhammad Jamalul Alam II 물라 베가완 술탄 무다 하지 오마르 알리 사이푸디엔 사둘 카이리 와디엔 이브니 술탄 무하마드 자말룰 알람 2세 |
출생 | 1914년 9월 23일 |
반다르 브루나이 전군주리 (現 반다르스리브가완 전군주리) | |
사망 | 1986년 9월 7일 (향년 71세) |
반다르스리브가완 | |
재위기간 | 1950년 6월 4일 ~ 1967년 10월 4일 (17년 4개월) |
자녀 | 하사날 볼키아, 제프리 볼키아 등 4남 6녀 |
1. 개요
브루나이의 제29대 술탄으로 현 제30대 술탄인 하사날 볼키아의 아버지이다. 브루나이를 대표하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2. 생애
2.1. 초기 생애
1914년 9월 23일(이슬람력 1332년 11월 3일) 반다르 브루나이(Bandar Brunei; 현 반다르스리브가완)의 전군주리(Kampong[1] Sultan Lama)에서 태어났다. 그는 당시 술탄 무함마드 자말룰 알람 2세와 왕비 라자 이스터리 파티마의 자녀 10명 중 둘째이며 아들 중에서도 차남이다. 형인 아흐마드 타주딘은 훗날 술탄이 된다.1932년 자신의 조국과 마찬가지로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말라야로 건너갔으며 페락 주의 쿠알라캉사르 소재 쿠알라캉사르 말레이대학교에서 수학하다가, 졸업 후 브루나이로 돌아가 쿠알라블라잇의 산림청에서 사관후보생으로 일했다. 이 때부터 자신의 리더십을 서서히 확보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일하면서 현지 주민들과 소통하기 시작했고 주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1938년 그는 쿠알라블라잇에 계속 남았지만, 직위를 법률부로 이전했으며, 그곳에서 영국 관리로부터 민형사소송법에 대해 배웠다. 후에는 영국계 기업 하에서 사업을 하다가, 일본 제국이 쳐들어온 뒤에는 총독부에서 일했다. 그러다가 해방 후 브루나이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후에 종교법원장이 되었다.
2.2. 술탄 집권 시기
1950년 6월 4일 술탄을 지내던 형 타주딘이 급서하자, 후계자로 내정되어 있던 사이푸딘은 이틀 후 왕위를 승계했다. 물론 정식으로 즉위한 것은 아니고, 일종의 유훈통치를 한 것이었으며 1951년 5월 31일 정식으로 즉위하면서 본격적인 사이푸딘 시대를 열었다. 동년 영국 왕실로부터 세인트마이클앤드세인트조지 훈장을 받았고 얼마 후 메카에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1953년 작성이 시작되어 1954년 완성된 브루나이 헌법 작성에 크게 관여하였다. 사이푸딘은 영국이 요구한 의회민주주의 수용을 거부하고 입법회외 행정부에 왕실 임명 의석들을 늘릴 것을 요구하면서 갈등을 빚었다. 브루나이의 독립 열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1959년, 우여곡절 끝에 사이푸딘의 헌법이 효력을 발휘하면서 브루나이는 영국으로부터 사실상 자치권을 얻어 브루나이 술탄은 브루나이 내정에 있어 실권을 되찾았다. 이 헌법은 발효년도에서 이름을 따 "1959년 헌법"이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브루나이는 여전히 영국의 보호국으로 남아 외교권, 군사권은 영국에 일임된 상태였고 왕실에서 상정된 법안은 여전히 영국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었다. 헌법이 명실공히 존재하는데도 실제로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주민 불만은 계속되었고 반영, 반식민주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1960년대에 브루나이의 독립을 위한 방안으로 두가지가 제시되었다,
첫째는 말라야 연방 초대 총리 툰쿠 압둘 라만와 싱가포르 초대 총리 리콴유가 제안한 것으로, 브루나이가 싱가포르, 사라왁, 사바와 함께 말라야 연방과 동등한 지위로 신생 연합 말레이시아에 가입하는 것이었으며 사이푸딘이 지지한 방안이였다. 말라야는 독립 이래 말레이인들의 통합 및 반식민주의를 주장한 인도네시아의 위협을[2] 받고 있었고 이러한 위협을 타개하기 위해 구 영국령 말레이계 식민지들과 통합을 꾀하였다. 또한 말라야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로부터 위협을 느낀 말라야의 보수 정치인들은 말레이계가 절대다수인 북보르네오 3개주와 통합을 모색하여 브루나이에 접근하였다. 사이푸딘은 브루나이가 말레이시아에 가입할 시 1950년대 이후 태동중이던 브루나이의 석유 산업이 중앙정부 차원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을거라 기대하며 사라왁과 사바의 가입을 설득하였다.
둘째는 브루나이 인민당 당수 A. M. 아자하리가 주장한 것으로, 브루나이가 사라왁, 사바과 통합하여 북보르네오 연방이라는 별개 국가로 독립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사라왁과 사바 모두 말레이계 지역들이며 과거 브루나이 술탄국의 일부였음으로 말레이인 민족주의와 실지회복주의 차원으로 주장되었다. 브루나이 인민당은 말레이시아와의 통일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북보르네오의 통일을 통해 체급을 늘리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사이푸딘은 브루나이가 저개발 지역들인 사라왁과 사바와 통일 시 브루나이의 오일머니로 저개발지역들을 부양하게 될 것이라 우려하였으며 브루나이에 비해 인구가 훨신 많은 사라왁, 사바와 통합할 시 브루나이 왕가의 권력 보전이 어려울 것이라 전망하여 반대하였다.
A. M. 아자하리. 브루나이 인민당 당수. 브루나이인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아 '브루나이의 총리(Perdana Menteri Brunei)'라고 불리웠지만 실제로 총리는 아니었다.
아자하리는 입헌군주제와 사회주의를 주장하여 이슬람주의, 말레이 귀족 중심 보수주의와 반공주의를 표방하며 전제군주제를 옹립하고자 한 사이푸딘과 갈등을 빚었는데 이러한 갈등은 1962년 폭발한다. 브루나이는 1959년 헌법에 따라 1962년 지방선거가 실시되고 지선 결과에 따라 의회를 구성할 계획이었다. 이어진 1962년 브루나이 지방선거에서 브루나이 인민당은 총 55개 의석 중 54개 의석을 차지하여 압승하였고 브루나이인들은 입헌군주제와 북보르네오 연방 수립에 대한 지지를 표했지만 사이푸딘은 의회 구성을 거부하고 말레이시아 가입을 강행하였다.
그 결과 브루나이 인민당은 인도네시아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고 사이푸딘은 비상사태를 선포, 영국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진압하였다. 1962년 지선과 반란으로 표출된 말레이시아 가입에 대한 반대 여론은 사이푸딘의 말레이시아 가입 강행에 부담을 주었다. 반란 진압 이후 브루나이의 말레이시아 가입 협상은 계속되었으나 말레이시아 조약은 브루나이의 석유수입 독점권을 10년밖에 보장해주지 않고 신생 말레이시아가 각국 술탄이 5년 임기로 돌아가면서 국왕 직을 맡는 입헌군주제로 결정되면서[3] 전제적 권력독점을 지향하던 사이푸딘은 결국 말레이시아 가입 계획 또한 철회하였다. 그리고 아자하리의 북보르네오 연방 계획 또한 사바와 사라왁이 1963년 9월 16일[4] 말레이시아 수립에 참여하면서 최종 무산되었다.
브루나이 인민당은 금지되어 1962년 지선 결과 또한 무효화되었으며 아자하리와 브루나이 내 민주주의자들은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타국으로 망명했다. 사이푸딘이 1962년 선포한 계엄령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세계 최장기 계엄 기간을 이어나가고 있으며 1962년 이후 브루나이에서 선거는 치뤄지지 않고 있다. 브루나이의 행정부와 입법회 구성원은 국왕에게 임명되며 브루나이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버금가는 전제군주제로 자리잡았다. 나아가, 권력 공고화를 위해 사이푸딘은 이슬람주의 교육 과정을 도입하여 교육 언어를 아랍어로 바꾸고 종교교육 중심 커리큘럼으로 교체하였고 전국의 종교시설을 확충하였다.
암이 있다면 명도 있는데, 사이푸딘 시기 쉘 plc과의 협업으로 브루나이의 석유산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어 오늘날 브루나이의 경제에 주축을 담당하는 석유와 천연가스 산업이 세워졌다. 오일머니를 기반으로 공공위생시설, 보건시설, 항구와 공항 등의 기초인프라 확충이 이루어졌다.
1962년 사태의 영향으로 브루나이는 영국의 보호령으로 잔류하여 1984년이 되어서야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다. 유럽 식민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아시아 국가들 중 가장 늦은 것이었다.
하지만 브루나이와 달리 말레이시아에 가입한 사라왁과 사바의 결과도 좋지 못하였다. 북보르네오 중 경제력이 월등하였던 브루나이가 말레이시아 가입을 철회하고 연방국가 말레이시아 건국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리콴유의 싱가포르는 인종갈등으로 인해 말레이시아에서 축출되면서 말라야에 맞서 사바와 사라왁의 입장을 대변할 힘이 사라졌던 것. 냉전기 사라왁과 사바의 자치권은 북보르네오 공산반란을 빌미로 무시되어 동말레이시아는 말라야(서말레이시아) 주도의 국가폭력을 겪었으며 동말레이시아의 석유수익은 쿠알라룸푸르 중심의 경제 정책에 따라 소외되어 쿠칭과 코타키나발루의 경제력은 서말레이시아에 비해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나아가 툰 푸아드 스티븐스과 같이 북보르네오 주들의 재분리를 시도한 이들은 의문사를 당하였고 연방 정부의 분리주의 탄압으로 지역이 초토화에 가까이 되어버렸다. 한마디로 들어가는 건 마음대로 였겠지만 나가는 건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 반면교사인 셈.
2.3. 말년
말년의 모습. 참고로 옆에 서 있는 남자는 당시 왕세자인 하사날 볼키아이다.
말레이시아 가입 계획이나 북보르네오 연방 수립 계획이 취소되면서 브루나이의 독립은 늦춰졌지만 대신 영국이 브루나이에 보다 큰 자치를 약속했고, 1960년대 중반이 되자 브루나이는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부문에서 전면 자치권을 얻게 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 접어들자 술탄 재임기 사건사고가 많았고 본인의 건강 또한 약화되면서 사이푸딘은 더 이상의 집권은 포기하기로 결심했고, 1967년 10월 4일 장남인 하사날 볼키아에게 전면 왕위를 이양했다. 이후 하사날은 1968년 8월 1일 공식 취임식을 가졌고 왕위는 성공적으로 이양되었다. 그러나 이런데서 그냥 쉽게 물러날 사이푸딘이 아니라서, 그러고도 본인은 아들의 배후에서 상왕으로 군림하며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1979년 브루나이는 영국이 쥐고 있던 외교·국방권마저 되찾았고, 이어 1984년 1월 1일,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 사이푸딘은 신설된 브루나이의 국방장관으로 취임했고 동년 7월 26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수장 야세르 아라파트를 초대했다.
2.4. 사망
사이푸딘의 묘. 브루나이의 스케일답게 묘소도 화려하다.[5]
1986년 9월 7일, 온 국민들이 보는 앞에 향년 71세[6]로 사망하였다. 브루나이의 완전한 독립 2년만이었다. 사후 금수산태양궁전 격인 라파우에 안치되었다.[7]
후임자인 하사날을 비롯한 해외 각계의 대대적인 추모가 이어졌다. 다음은 각계의 추모 및 평가이다.
As a son of a dear father, I still feel the feelings of sadness and grief, and will always be felt, which is not limited to a period of time. Because his death is a great loss for me and my family. Moreover he is not only a father who always pour a friendly affection to his children, he always gave me advice up to the end of his life.
사랑하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지금도 너무너무 슬프며, 앞으로도 슬플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지금만의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대의 죽음으로 저희는 매우 큰 것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단순히 저희를 친근히 대해주셨던 아버지가 아니요, 그대는 죽음의 시기까지 저를 조언해주신 조언자입니다. - 하사날 볼키아, 1986년 10월 20일 연설 中
사랑하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지금도 너무너무 슬프며, 앞으로도 슬플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지금만의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대의 죽음으로 저희는 매우 큰 것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단순히 저희를 친근히 대해주셨던 아버지가 아니요, 그대는 죽음의 시기까지 저를 조언해주신 조언자입니다. - 하사날 볼키아, 1986년 10월 20일 연설 中
I know the Paduka Seri (Sir Omar) since 1959. My late father was so close to him. I also highly respect him because to me he was a brilliant man.
저는 1959년부터 그 분(사이푸딘)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 선친이 그 분과 각별한 사이셨기 때문이지요. 저는 언제나 현명한 그 분을 존경한답니다. - 아흐마드 샤(파항 주 술탄), 1984년 4월 25일 우투산 말레이시아와의 인터뷰 中
저는 1959년부터 그 분(사이푸딘)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 선친이 그 분과 각별한 사이셨기 때문이지요. 저는 언제나 현명한 그 분을 존경한답니다. - 아흐마드 샤(파항 주 술탄), 1984년 4월 25일 우투산 말레이시아와의 인터뷰 中
I highly respect Al-Marhum because of his heartfelt character which becomes a memories which will not easily forgotten. I consider him as my own father... (omitted)
전 고인을 매우 존경한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매우 진심어린 분이셨고 지금도 쭉 잊혀지지 않아요. 마치 제 아버지와도 같아요. (이하 생략) - 이스칸다르 샤(조호르 주 술탄이자 9대 말레이시아 군주)
전 고인을 매우 존경한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매우 진심어린 분이셨고 지금도 쭉 잊혀지지 않아요. 마치 제 아버지와도 같아요. (이하 생략) - 이스칸다르 샤(조호르 주 술탄이자 9대 말레이시아 군주)
The Late Highness had a vision, for sightedness and wise leadership coupled with his outstanding services to his people.
故 전하께서는 밝은 미래관과 현명한 지도력으로 인민들에게 훌륭한 봉사정신을 발휘하셨습니다. - 후사인 무함마드 에르샤드(방글라데시 대통령), 그를 향한 찬사 中
故 전하께서는 밝은 미래관과 현명한 지도력으로 인민들에게 훌륭한 봉사정신을 발휘하셨습니다. - 후사인 무함마드 에르샤드(방글라데시 대통령), 그를 향한 찬사 中
The Late Sultan Haji Omar Ali Saifuddien III is a honourable special friend to Britain. His death were deeply felt by the United Kingdom.
故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3세 술탄께서는 우리 영국의 영예롭고 특별한 벗입니다. 그대의 죽음은 곧 우리 영국의 슬픔이지요. - 엘리자베스 2세(영국 여왕)
故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3세 술탄께서는 우리 영국의 영예롭고 특별한 벗입니다. 그대의 죽음은 곧 우리 영국의 슬픔이지요. - 엘리자베스 2세(영국 여왕)
The Late Highness had a unique position in the history of Brunei and in the hearts of all who knew him in Britain.
역사에 있어, 가슴에 있어, 우리 영국은 故 전하께서의 특별함을 이해합니다. - 마거릿 대처(영국 총리)
역사에 있어, 가슴에 있어, 우리 영국은 故 전하께서의 특별함을 이해합니다. - 마거릿 대처(영국 총리)
1986년 10월 17일 사망 40주일에 맞이하여, 하사날의 동의 하에 그를 추모하기 위한 특별 수라 야신(꾸란의 36번째 장)이 발매되었다.
3. 가족 관계
1937년 다양 시티 아민과 결혼했으나 자식 없이 1944년 이혼하고 1941년 다밋과 재혼했으나 1979년 사별하였고, 동년 하자 살하와 재혼했으며 1986년 그의 사망과 함께 미망인이 되었다.두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슬하 4남 6녀를 두었으며, 장남 하사날 볼키아, 차남 모하메드 볼키아, 3남 수프리 볼키아, 4남 제프리 볼키아, 장녀 마스나 볼키아, 차녀 노르아인 볼키아, 3녀 우미 볼키아, 4녀 라키아 볼키아, 5녀 나시바 볼키아, 6녀 제프리아 볼키아를 두었다.
한때 브루나이와 함께했던 북보르네오(오늘날 사바)에 먼 친척을 두었는데, 크닝아우 출신으로 북보르네오 최초의 현지인 지도자인 페힌 오랑 카야카야 코로 빈 산툴란이 있다. 그 친척의 아들로는 말레이시아령 사바의 前 국무위원인 스테픈 코로, 5대 총독인 토마스 코로가 있다. 카야카야는 브루나이의 제25대 술탄 하심 잘릴룰 알람 아카마딘의 후손이며 원주민인 무룻인 출신이었다.
4. 평가
브루나이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인 만큼 두 평가가 크게 엇갈린다.4.1. 긍정적 평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에 있어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은 국민적 영웅이자 브루나이의 국부이다.생전 영국과의 협상을 통해 브루나이의 독립을 이룩하였으며 끝내 말레이시아 가입을 거부한 것은 오늘날 브루나이가 석유 부국으로서 발전할 수 있게 하였다. 재임 도중 인프라 확충 및 석유 산업 진흥은 오늘날 브루나이 경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브루나이의 폭넓은 복지체계를 확립하여 브루나이가 세계적인 부국이 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또한 "현대 브루나이의 건축가"로도 평가받는데, 허허벌판에 수상가옥이 전부였던 반다르스리브가완을 나름 화려한 도시로 재개발하였으며 오늘날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아시아 최대의 모스크인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3세 모스크를 개축하였으며, 세계적으로도 호평을 받는다.
독실한 말레이인 무슬림으로서, 이슬람 신앙을 빼놓지 않았으며 말레이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인민들에게 언제나 강조하곤 했다.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 널리 알리고자 한, 민족의 아버지였다.
4.2. 부정적 평가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에 있어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은 권력 야욕에 몰두한 전제군주이다.1962년 브루나이 인민당 반란을 진압한 이후로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했으며, 즉각 의회를 해산하고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그 후에도 줄곧 반대파와 반국가세력으로부터 나라를 지킨다는 명목 하에 2년마다 계엄을 연장했는데, 이것이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무려 63년 계엄을 기록했고, 이는 악명높은 대만의 38년 계엄, 시리아의 48년 계엄보다도 훨씬 더 긴 길이이다.
사이푸딘은 브루나이인들에게 폭넓은 복지혜택을 제공하는 대신 표현의 자유를 철저하게 탄압했으며 정부에 약간이나마 반대하는 이들은 즉각 체포되어 전근대적인 처벌이 집행되었다. 1962년 한 차례의 지선 이후 그 어떠한 종류의 선거나 조차 치뤄지지 않고 있으며 입법, 행정 권력이 모두 국왕에 의해 선출되는 나라로 유사 사례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오만밖에 없는 전제군주제이다. 브루나이의 모든 정당활동은 금지되었으며 1980년대 이후 창당된 야당들은 국제적 비난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어용, 구색정당에 지나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술탄에게 절대적인 충성만을 하는 모종의 단체일 뿐이다. 사이푸딘 사후인 2004년 술탄의 권위가 더 강화된 것은 브루나이의 절대왕정이 현재진행형인 것을 보여준다. 극단적인 주장으로는 브루나이 왕정이 신민들을 가축마냥 사육한다는 말도 나올 정도.
석유를 통해 축적한 막대한 부의 활용에 대해서도 비판점이 많다. 브루나이의 국부는 브루나이 경제의 장기적인 존속이 아닌 사이푸딘과 브루나이 왕가를 신격화하는데 활용되었으며 실질적인 경제활동에 기여하지 못하는 이슬람주의 교육과정을 도입하여 신민들을 우민화하였다. 그를 향한 브루나이인들의 충성과 찬양은 사실상 신민의 의무였으며, 이 때문에 북한 못지않은 살벌한 분위기를 깔아놓았다. 또한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3세 모스크과 같이 순금으로 치장한 치적사업들에 막대한 부가 투입되었지만 두바이, 카타르와 같은 타 석유 기반 왕정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국가 현대화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오늘날 브루나이 체제의 근간이 되는 말레이이슬람왕정(Melayu Islam Beraja; MIB) 제도를 확립하며 말레이·이슬람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댓가로 말레이시아와 같이 인종차별적 정책을 강행했는데, 이는 말레이시아의 악명높은 부미푸트라 정책보다 한술 더 떠서 종종 문제가 된다. 말레이·이슬람사상을 보존하는 전제로 중국인과 같은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을 대대적으로 가했으며, 현재 이들은 국적조차 받을 수 없으며 차이나타운도 금지되어 있다. 기독교와 같은 적성종교에 대한 탄압도 큰 논란거리인데, 크리스마스를 금지시키고 툭하면 교회를 폐쇄시키는 정책은 각계의 큰 비판을 받고 있다. 또한 종교법인 샤리아가 도를 넘어서 문제인데, 저게 신앙심을 지키고 범죄척결에나 사용되면 모를까, 개개인의 사생활까지 탄압해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고 있다.[8]
5. 유산
- 그의 고향이자 브루나이의 수도인 반다르브루나이가 반다르스리브가완으로 개명되었다. '브가완'은 그의 호칭으로 뜻은 '지도자', '영도자'이고, '스리'는 '존경하다'를 뜻하는 국빈인사들을 위한 말레이 호칭이다. 즉, 새 이름이 갖는 뜻은 '위대한 영도자의 도시'이다.
- 반다르스리브가완의 국립 모스크인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3세 모스크
- 반다르스리브가완의 하지 무다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경 동(潼)
- 술탄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대학교
- 스리브가완 종교대학교
- 브루나이 다루살람 대학교의 술탄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이슬람학과
- 파두카 스리브가완 과학대학교
- 카티마하르 리(里)의 파두카 스리브가완 술탄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모스크
[1] 고어 표기, 현대 표준으로는 kampung이 맞으나, 고유 명사의 경우 만약에 고어 표기로 되어 있으면 무조건 그 표기로 적어야 한다.[2]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을 통해 독립한 인도네시아는 독립 초기에 영국과 타협하여 자치를 얻어낸 말레이시아를 신식민주의의 산물로 간주하여 인도네시아와의 통일을 주장하였고 수카르노 축출 전까지 말레이시아의 국체를 인정하지 않았다.[3] 군주국 중 말레이시아 가입이 가장 늦었던 브루나이는 말레이시아 국왕 승계 순위는 최후순위가 될 예정이었던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현실 말레이시아 국왕들의 임기와 대조해볼 시 브루나이가 말레이시아에 가입했다면 사이푸딘이 일러야 1994년, 궐위를 감안하면 2002년이 되어야 브루나이 술탄의 말레이시아 국왕 승계 차례가 왔을 것이니 사이푸딘이 생전 말레이시아 국왕으로 즉위하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4] 원래는 말라야의 독립기념일인 8월 31일에 맞춰 1963년 8월 31일을 예정하였으나, 이런저런 일로 보름이나 늦게 미뤄졌다.[5] 원칙적으로 이슬람의 장례식은 매우 간소하다. 화장은 엄금이고, 대게는 돌무덤이 전부이다. 국부이다 보니 예외를 둔 것.[6] 생일을 겨우 며칠 앞두고 사망했으므로 72세가 아니라 71세가 맞다. 다만 이 정도 쯤은 그냥 72세로 부르곤 한다.[7] 이 곳에는 전직 술탄들도 안치되어 있다.[8] 예를 들어 밤에 남녀가 한 테이블에 앉아 저녁하는 것도 사실상 금기사항일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