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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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a11><tablebgcolor=#a11> ||
}}}}}}}}}}}}}}} ||<colbgcolor=#9966cc><colcolor=#ece5b6> 안성후(安成侯) 요숭 | 姚嵩 | |
시호 | 불명 |
작위 | 안성후(安成侯) |
성 | 요(姚) |
휘 | 숭(嵩) |
자 | 불명 |
생몰 | ? ~ 416년 6월 |
출신 | 남안군(南安郡) 적정현(赤亭縣) |
부황 | 태조 무소황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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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진의 황족. 태조 무소황제 요장의 아들이자, 고조 문환황제 요흥의 동생.2. 생애
건원 20년(384년) 6월, 천왕 부견이 두충 등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친히 20,000 군대를 일으켜 후진을 건국한 요장을 토벌하기 위해 출진하였다. 요장은 전진군에게 여러 번 격파당하고 수로까지 끊기면서 궁지에 물렸으나, 서연의 모용충이 전진의 수도 장안(長安)을 습격하면서 부견이 퇴각해 위기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전진군이 모두 물러가자, 요장은 아들 요숭을 서연에 인질로 보내 화친하였다.시기는 불명이나 형인 문환제 요흥 재위기에 진서장군, 진주(秦州) 자사를 역임하였고, 최종적으로는 사공에 올라 안성후(安成侯)에 책봉되었다. 요숭은 경전과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져 정밀하게 연구하였는데, 한번은 요흥이 황후가 보유하던 진주로 된 불상을 요숭에게 선물하자 요숭은 이에 대해 깊이 감사하는 상소문을 올려 말했다.
"신이 황후께서 남기신 진주 불상을 예로써 받들어 봉양하면서 끝없는 그리움을 느껴, 지난 날들을 돌이켜 볼 수록 감회가 더욱 깊어집니다. 신이 전에 폐하께서 친히 불상을 관리하시는 모습을 뵈었고, 그때마다 잠시라도 예를 표하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하였는데, 성은이 다시금 신에게 미쳐 이 불상을 공양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 불상의 예술적 가치와 진귀함은 모두 뛰어나, 그 제작 과정이 신묘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본래 중원에서 본 불상들도 진실로 기이하고 묘하나, 이것과 비할 바가 못 되어, 이를 우러러볼 때면 신은 한없는 기쁨에 사로잡힙니다. 천지를 주신 은혜는 갚을 수 없고, 큰 은혜를 입은 자는 어떠한 말로도 감사를 표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비록 신이 진심을 다해 감사를 드리고자 하나, 부족한 재주로는 그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요흥 또한 요숭에게 회답하여 말했다."예전에 짐이 마음속에 품고 있던 마하연(摩訶衍)의 여러 가지 이치를 담은 조목을 십공(什公)과 더불어 상세히 논의하고자 하였으나, 불행히도 십공이 변고를 당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했고, 그 뒤로도 전쟁이 끊이지 않아 더이상 이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소. 한데, 얼마 전에 사신을 보내어 그 불상을 전달하면서 우연히 상자 안에서 이전에 기록한 조목을 발견하였소. 지금 그 내용을 보내니, 경은 이를 천천히 살펴보시오. 천천히 살펴보면서 만약 부족한 점이 있거든 고쳐주길 바라오. 그리고 경이 오는 날, 이 일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누었으면 하오. 전에 십공에게 성인의 세 가지 통달한 관점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십공이 말한 답변도 함께 보내겠소. 이 모든 것은 이미 지난 일이라, 지금 짐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아, 이를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소."
요흥의 답신을 읽은 요숭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상소하여 아뢰었다.
"신은 폐하께서 보내신 여러 교리와 이치의 깊이를 이해하였는데, 그 문장과 뜻이 맑고 뛰어나, 두 편의 글을 읽고 감탄하였습니다. 비록 그 미묘한 깊이를 다 이해하지 못하였고, 중관(中觀)의 경지에 이른 것을 확인한 뒤, 즐거워하며 종이에 기록하였음에도 마음에는 여전히 만족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참으로 당대의 추앙받을만한 노래이며, 오랜 세월의 모범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신이 어리석고 아둔하며 생각이 깊지 못하여서, 그 현묘한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읽고 또 읽으며, 날마다 읊조리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크나큰 자비와 선한 지도로 부디 신을 인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부족한 점이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질문하여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깨우치고자 합니다.
신이 생각하기로는 이 말은 삼세(三世)를 통달하여 매우 깊은 뜻이 있어, 이미 성인의 마음과 멀리 맞닿고, 여러 해석을 올바르게 제시하였습니다. 이로써 사람들에게 참된 도리를 깨닫게 하고, 깊은 맛을 더욱 즐기게 합니다. 이에 대해 제가 무엇을 더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이를 마음에 새겨 두고 중요한 교훈으로 삼을 뿐입니다.
〈상서(上書)〉에서 '불주법주반야의(不住法住般若義)'라고 하여, 중생이 도에 오르지 못하는 것은 집착이 있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인의 가르침은 항상 집착을 버리는 것을 중시합니다. '불주반야'라는 것은 큰 성인은 현묘한 깨달음으로 끝없는 밝음을 얻더라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착하면 병이 되므로 수행자들은 자아를 잊고, 의지할 곳을 버려야 합니다. 이는 마치 묶이지 않은 배가 의지할 곳이 없는 것과 같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치에 맞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의 현묘한 경지는 진실로 다하지 않지만, '여섯 가지 덕목(六度)'을 표방하면서 집착하지 않음을 최종 목표로 삼았습니다.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밝은 가르침과 같고, 실제로 행하는 일에 있어서는 미치지 못함이 있을 뿐입니다. 무착(無著)은 비록 미묘하나 참된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을 잊게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신은 현묘한 가르침을 깊이 따르며, 만약 더할 것이 있다면 신중하게 말씀을 드려 어리석은 견해를 펼치기를 바랍니다.
경전에서 이르기를, '시자(施者)와 수자(受者)와 재물을 모두 불가득(不可得)하므로, 집착하지 않는 법을 갖추면 단바라밀(檀波羅蜜)을 완성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 가지가 불가득이므로, 셋이 모두 없고 무무(無無)의 이치처럼 환화(幻化)와 같습니다. 이를 추론하면 불주(不住)의 뜻은 참으로 자아를 잊고 의지할 곳을 잃는 것이 아닙니다. 또, 경전에서 이르기를, '대도(大道)는 무위(無爲)를 목표로 삼는다.' 하였는데, 무위가 이루어지면 무엇을 위할 것이 있겠습니까? 깊은 이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구하는 장소에 처해 있으니 본래를 찾아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도의 무위는 무엇을 본체로 삼아야 합니까? 만약 묘(妙)를 목표로 삼는다면, 비록 옛 제왕의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극진한 경지에 이르지 못합니다. 무유(無有)를 묘로 삼는다면, 반드시 불유(不無)의 원인이 있어야 합니다. 이는 모두가 불일(不一)의 도리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논에서 이르기를, '무(無)에 무가 있다면, 반드시 유(有)에 유가 있다.'고 하였으니, 무유(無有)의 상(相)은 길고 짧음의 차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의 이치는 현묘하지만, 단(斷)과 상(常)에 가까워질까 두렵습니다. 상(常)이 불가능한 이상 단(斷)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무의 경계는 변견(邊見)에 머물러 있습니다. 〈중론(中論)〉에서 말하기를, '세속제(世俗諦)를 깨지 않으면 진제(真諦)를 깨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또, 논하여 이르기를, '만약 제법(諸法)이 실체가 있다면, 이제(二諦)가 없고, 만약 제법이 공(空)하다면 죄복(罪福)이 없고, 죄복이 없다면 범성(凡聖)이 구분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범성의 구분이 없다면 도는 무엇을 이롭게 하겠습니까? 이는 신이 어둡고 미혹하여 결국에는 끝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자비로서 다시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경전에서 말하기를, '성인의 가르침은 현묘하여 끝이 없다. 여러 방면에서 감응을 일으키니 하나의 길로 구할 수 없고, 하나의 이치로 추론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거칠게 대하면 거칠게 응하고, 섬세하게 대하면 섬세하게 응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로 인해 큰 광명을 발하여 여러 신변(神變)을 나타내는 것은, 이는 십방(十方) 제대보살(諸大菩薩)이 장차 존위(尊位)를 계승하려는 것입니다. 속세에 처해 거친 것에 접하면 다시 이러한 일을 용납할 수 있습니까?
《아함경(阿含經)》에서 말하기를, '석가모니 부처님이 천축(天竺)에 머무는 40여 년 동안 의복과 음식을 받아들이며 여러 고통을 당하여 사람들과 다름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성인도 사슴과 말을 타고 이를 구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슴과 말에 있다면 어찌 사슴과 말과 다르겠습니까? 만약 사슴과 말과 다르지 않다면 세상의 흐름과 같을 것이며, 이러한 신변이 필요하지 않음을 밝힙니다. 모든 일은 반드시 앞선 사물과 같아야 그 변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 이치는 현묘하여 보통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치지 않는 마음으로 말하지 못한 바를 말하고자 합니다.
만물이 서로 다르고, 정(精)과 추(麤)도 다르며, 그들이 서로 다르더라도 성인의 마음은 항상 하나입니다. 하나이므로 원만하게 응하고, 다르므로 방법으로써 도와줍니다. 비록 사슴과 말과 같으나 큰 도리를 어긋나지 않으며, 비록 신변을 나타내지만 작은 도리를 잊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청명경(淨名經)》에서 이르기를, '여래는 때로는 광명으로 불사를 행하고, 때로는 적막으로 불사를 행한다.'고 하였습니다. 드러내고 감추는 것이 비록 다르나, 결국에는 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대소(大小)의 사이에서는 서로 다른 말을 합니다.
《화수경(華手經)》에서 처음에 부처님이 덕장(德藏)을 위해 큰 광명을 발하여 모든 중생들이 그 은혜를 입도록 하였습니다. 또, 《사익경(思益經)》에 따르면 망명(網明)이 여래의 33종 광명을 물었으며, 그 빛을 만나는 자는 모두 이익을 얻었습니다. 《법화경(法華經)》에서는 부처님이 미간의 상광을 발하여 네 무리와 팔부가 모두 의문을 품게 하였고, 또 어둠 속에 있는 중생들이 각각 서로를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만약 인연이 있다면 비록 작더라도 반드시 이익이 있으며, 인연이 없다면 비록 크더라도 어긋날 수 있습니다. 《반야경(般若經)》에서는 '만약 어떤 중생이 이 빛을 만나면 반드시 무상도(無上道)를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또 신변으로 삼악도 중생들이 모두 천상에 태어나게 하였습니다. 이를 말하면 광명과 신변의 일이 평등하게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이로써 어리석은 생각을 다하였으며, 감히 바라건대 자비를 받고자 합니다. 만약 다시 자비를 베풀어 이끌어 주신다면 어찌 소신만이 그 은혜를 받겠습니까?"
이에 요흥이 서신으로 답하여 말했다.다만 신이 어리석고 아둔하며 생각이 깊지 못하여서, 그 현묘한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읽고 또 읽으며, 날마다 읊조리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크나큰 자비와 선한 지도로 부디 신을 인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부족한 점이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질문하여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깨우치고자 합니다.
신이 생각하기로는 이 말은 삼세(三世)를 통달하여 매우 깊은 뜻이 있어, 이미 성인의 마음과 멀리 맞닿고, 여러 해석을 올바르게 제시하였습니다. 이로써 사람들에게 참된 도리를 깨닫게 하고, 깊은 맛을 더욱 즐기게 합니다. 이에 대해 제가 무엇을 더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이를 마음에 새겨 두고 중요한 교훈으로 삼을 뿐입니다.
〈상서(上書)〉에서 '불주법주반야의(不住法住般若義)'라고 하여, 중생이 도에 오르지 못하는 것은 집착이 있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인의 가르침은 항상 집착을 버리는 것을 중시합니다. '불주반야'라는 것은 큰 성인은 현묘한 깨달음으로 끝없는 밝음을 얻더라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착하면 병이 되므로 수행자들은 자아를 잊고, 의지할 곳을 버려야 합니다. 이는 마치 묶이지 않은 배가 의지할 곳이 없는 것과 같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치에 맞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의 현묘한 경지는 진실로 다하지 않지만, '여섯 가지 덕목(六度)'을 표방하면서 집착하지 않음을 최종 목표로 삼았습니다.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밝은 가르침과 같고, 실제로 행하는 일에 있어서는 미치지 못함이 있을 뿐입니다. 무착(無著)은 비록 미묘하나 참된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을 잊게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신은 현묘한 가르침을 깊이 따르며, 만약 더할 것이 있다면 신중하게 말씀을 드려 어리석은 견해를 펼치기를 바랍니다.
경전에서 이르기를, '시자(施者)와 수자(受者)와 재물을 모두 불가득(不可得)하므로, 집착하지 않는 법을 갖추면 단바라밀(檀波羅蜜)을 완성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 가지가 불가득이므로, 셋이 모두 없고 무무(無無)의 이치처럼 환화(幻化)와 같습니다. 이를 추론하면 불주(不住)의 뜻은 참으로 자아를 잊고 의지할 곳을 잃는 것이 아닙니다. 또, 경전에서 이르기를, '대도(大道)는 무위(無爲)를 목표로 삼는다.' 하였는데, 무위가 이루어지면 무엇을 위할 것이 있겠습니까? 깊은 이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구하는 장소에 처해 있으니 본래를 찾아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도의 무위는 무엇을 본체로 삼아야 합니까? 만약 묘(妙)를 목표로 삼는다면, 비록 옛 제왕의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극진한 경지에 이르지 못합니다. 무유(無有)를 묘로 삼는다면, 반드시 불유(不無)의 원인이 있어야 합니다. 이는 모두가 불일(不一)의 도리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논에서 이르기를, '무(無)에 무가 있다면, 반드시 유(有)에 유가 있다.'고 하였으니, 무유(無有)의 상(相)은 길고 짧음의 차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의 이치는 현묘하지만, 단(斷)과 상(常)에 가까워질까 두렵습니다. 상(常)이 불가능한 이상 단(斷)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무의 경계는 변견(邊見)에 머물러 있습니다. 〈중론(中論)〉에서 말하기를, '세속제(世俗諦)를 깨지 않으면 진제(真諦)를 깨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또, 논하여 이르기를, '만약 제법(諸法)이 실체가 있다면, 이제(二諦)가 없고, 만약 제법이 공(空)하다면 죄복(罪福)이 없고, 죄복이 없다면 범성(凡聖)이 구분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범성의 구분이 없다면 도는 무엇을 이롭게 하겠습니까? 이는 신이 어둡고 미혹하여 결국에는 끝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자비로서 다시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경전에서 말하기를, '성인의 가르침은 현묘하여 끝이 없다. 여러 방면에서 감응을 일으키니 하나의 길로 구할 수 없고, 하나의 이치로 추론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거칠게 대하면 거칠게 응하고, 섬세하게 대하면 섬세하게 응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로 인해 큰 광명을 발하여 여러 신변(神變)을 나타내는 것은, 이는 십방(十方) 제대보살(諸大菩薩)이 장차 존위(尊位)를 계승하려는 것입니다. 속세에 처해 거친 것에 접하면 다시 이러한 일을 용납할 수 있습니까?
《아함경(阿含經)》에서 말하기를, '석가모니 부처님이 천축(天竺)에 머무는 40여 년 동안 의복과 음식을 받아들이며 여러 고통을 당하여 사람들과 다름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성인도 사슴과 말을 타고 이를 구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슴과 말에 있다면 어찌 사슴과 말과 다르겠습니까? 만약 사슴과 말과 다르지 않다면 세상의 흐름과 같을 것이며, 이러한 신변이 필요하지 않음을 밝힙니다. 모든 일은 반드시 앞선 사물과 같아야 그 변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 이치는 현묘하여 보통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치지 않는 마음으로 말하지 못한 바를 말하고자 합니다.
만물이 서로 다르고, 정(精)과 추(麤)도 다르며, 그들이 서로 다르더라도 성인의 마음은 항상 하나입니다. 하나이므로 원만하게 응하고, 다르므로 방법으로써 도와줍니다. 비록 사슴과 말과 같으나 큰 도리를 어긋나지 않으며, 비록 신변을 나타내지만 작은 도리를 잊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청명경(淨名經)》에서 이르기를, '여래는 때로는 광명으로 불사를 행하고, 때로는 적막으로 불사를 행한다.'고 하였습니다. 드러내고 감추는 것이 비록 다르나, 결국에는 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대소(大小)의 사이에서는 서로 다른 말을 합니다.
《화수경(華手經)》에서 처음에 부처님이 덕장(德藏)을 위해 큰 광명을 발하여 모든 중생들이 그 은혜를 입도록 하였습니다. 또, 《사익경(思益經)》에 따르면 망명(網明)이 여래의 33종 광명을 물었으며, 그 빛을 만나는 자는 모두 이익을 얻었습니다. 《법화경(法華經)》에서는 부처님이 미간의 상광을 발하여 네 무리와 팔부가 모두 의문을 품게 하였고, 또 어둠 속에 있는 중생들이 각각 서로를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만약 인연이 있다면 비록 작더라도 반드시 이익이 있으며, 인연이 없다면 비록 크더라도 어긋날 수 있습니다. 《반야경(般若經)》에서는 '만약 어떤 중생이 이 빛을 만나면 반드시 무상도(無上道)를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또 신변으로 삼악도 중생들이 모두 천상에 태어나게 하였습니다. 이를 말하면 광명과 신변의 일이 평등하게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이로써 어리석은 생각을 다하였으며, 감히 바라건대 자비를 받고자 합니다. 만약 다시 자비를 베풀어 이끌어 주신다면 어찌 소신만이 그 은혜를 받겠습니까?"
"경이 묻고 어려워하는 바는 비유와 이치가 풍부하고 그 깊이가 매우 심오하여, 평범하고 얕은 지혜로는 모두 파악할 수 없소. 그러니 지금부터 각각의 질문에 대해 답을 해주겠소.
경이 《반야경》을 인용하여 "만약 어떤 중생이 이 빛을 만나면 반드시 무상도를 얻는다"고 하였는데, 경전에서 말하기를, '보통 사람들 중에서 이 광명을 본 자는 없다' 하였소. 석가모니가 큰 광명을 발하여 온 세상을 비출 때, 그 시점에서 경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당시 이를 이상하게 여기는 자들은 모두 밝은 무리였소. 이를 보면, 광명은 일반인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소. 따라서 만약 중생에 대해 의심이 든다면, 백억의 보살들이 곧 중생이 아니겠소? 그리고 경전에서 다시 말하기를, '밝은 무리가 석가모니에게 와서 향과 꽃으로 공양을 올리며, 그 공양을 올리는 자들은 당연히 모두 그 은혜를 입는다'고 하였소. 그러나 광명의 본질은 본래 선남선녀를 위한 것이 아니므로, 그들은 부차적인 혜택을 받았을 뿐이오. 이는 마치 파리가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 천리를 가는 것과 같소.
경은 다시 신변(神變)을 들어 "삼악도 중생들이 인간과 천상에 태어나게 한다"고 하였는데, 사슴이 사슴으로, 말이 말로 구제되는 것은 신변의 의미가 아니란 말인가? 《화수경》, 《사익경》, 《법화경》 등 여러 경전에서 말하기를, '큰 광명을 발하면 당연히 큰 무리에게 응한다'고 하였소. 만약 하나하나의 광명이 그 앞의 사물에 적합하게 응한다면, 이는 인간과 천상의 일과 통하지 않소. 광명과 적막은 본래 뜻을 발현하는 데에 있어 차이가 있어도 그 목적은 하나일 뿐이오.
경은 경전을 인용하여 "시자, 수자, 재물이 모두 불가득하며, 불주법과 불주반야와 다르지 않다"고 하였는데, 이 두 가지는 처음과 끝의 가르침이며, 전체적으로 보면 모두 집착을 깨는 것을 말하고 있소. 시자, 수자, 재물이 모두 불가득이라면 무엇에 집착하겠소? 이는 집착하지 말라는 것을 밝힌 것이오.
경이 다시 묻기를 "도가 무위인 것은 모든 법이 스스로 공(空)한 것과 같은가?" 하였는데, 《중론》에서 이제(二諦) 사이의 말을 가져와, 그 뜻이 미치지 않는 바를 물었소. 짐의 생각에도 도는 무위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데, 무엇을 종지로 삼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중생이 생사를 이리저리 떠도는 이유는 모두 욕망에 집착하기 때문이오. 만약 마음에서 욕망이 사라지면 다시는 생사가 없을 것이고, 생사가 없으면 신령은 현묘하고 고요하여 공(空)과 합체하게 되니, 이를 열반이라 하오. 이미 경전에서 열반이라고 말하였으니, 그 사이에 다른 이름이 있을 수 없소. 도는 의지할 곳이 없음을 종지로 삼는데, 만약 의지할 곳을 구한다면, 그것은 큰 혼란이 야기하게 될 것이오. 따라서 짐이 생각하는 무위는 곧 존재가 없는 것이오. 이는 의도를 숨기고 찾는 것처럼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 있으니, 앞에서 한 말을 다시 잘 살펴보길 바라오.
경이 인용한 《중론》은 곧 짐이 생각한 뜻과 같소. 제법(諸法)이 공하지 않으면 이제(二諦)가 없고, 제법이 있지 않으면 이제가 있을 수 없소. 이는 유무(有無)가 서로 떨어지지 않음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오. 만약 유(有)만을 말한다면 고귀한 사람들을 구제할 수 없고, 무(無)만을 말한다면 평범한 사람들을 구제할 수 없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성인은 유무를 겸하여 버리지 않는다'라는 말은 바로 이것을 이르는 것이오.
따라서 여러 학파들은 최고의 의(義)를 통달하여 '공(空)은 쥐죽은 듯 조용하다'라 하는 것이오. 만약 성인이 없었다면 이를 누가 알았겠소?"
이에 요숭이 상표하여 감사를 표하였다.경이 《반야경》을 인용하여 "만약 어떤 중생이 이 빛을 만나면 반드시 무상도를 얻는다"고 하였는데, 경전에서 말하기를, '보통 사람들 중에서 이 광명을 본 자는 없다' 하였소. 석가모니가 큰 광명을 발하여 온 세상을 비출 때, 그 시점에서 경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당시 이를 이상하게 여기는 자들은 모두 밝은 무리였소. 이를 보면, 광명은 일반인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소. 따라서 만약 중생에 대해 의심이 든다면, 백억의 보살들이 곧 중생이 아니겠소? 그리고 경전에서 다시 말하기를, '밝은 무리가 석가모니에게 와서 향과 꽃으로 공양을 올리며, 그 공양을 올리는 자들은 당연히 모두 그 은혜를 입는다'고 하였소. 그러나 광명의 본질은 본래 선남선녀를 위한 것이 아니므로, 그들은 부차적인 혜택을 받았을 뿐이오. 이는 마치 파리가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 천리를 가는 것과 같소.
경은 다시 신변(神變)을 들어 "삼악도 중생들이 인간과 천상에 태어나게 한다"고 하였는데, 사슴이 사슴으로, 말이 말로 구제되는 것은 신변의 의미가 아니란 말인가? 《화수경》, 《사익경》, 《법화경》 등 여러 경전에서 말하기를, '큰 광명을 발하면 당연히 큰 무리에게 응한다'고 하였소. 만약 하나하나의 광명이 그 앞의 사물에 적합하게 응한다면, 이는 인간과 천상의 일과 통하지 않소. 광명과 적막은 본래 뜻을 발현하는 데에 있어 차이가 있어도 그 목적은 하나일 뿐이오.
경은 경전을 인용하여 "시자, 수자, 재물이 모두 불가득하며, 불주법과 불주반야와 다르지 않다"고 하였는데, 이 두 가지는 처음과 끝의 가르침이며, 전체적으로 보면 모두 집착을 깨는 것을 말하고 있소. 시자, 수자, 재물이 모두 불가득이라면 무엇에 집착하겠소? 이는 집착하지 말라는 것을 밝힌 것이오.
경이 다시 묻기를 "도가 무위인 것은 모든 법이 스스로 공(空)한 것과 같은가?" 하였는데, 《중론》에서 이제(二諦) 사이의 말을 가져와, 그 뜻이 미치지 않는 바를 물었소. 짐의 생각에도 도는 무위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데, 무엇을 종지로 삼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중생이 생사를 이리저리 떠도는 이유는 모두 욕망에 집착하기 때문이오. 만약 마음에서 욕망이 사라지면 다시는 생사가 없을 것이고, 생사가 없으면 신령은 현묘하고 고요하여 공(空)과 합체하게 되니, 이를 열반이라 하오. 이미 경전에서 열반이라고 말하였으니, 그 사이에 다른 이름이 있을 수 없소. 도는 의지할 곳이 없음을 종지로 삼는데, 만약 의지할 곳을 구한다면, 그것은 큰 혼란이 야기하게 될 것이오. 따라서 짐이 생각하는 무위는 곧 존재가 없는 것이오. 이는 의도를 숨기고 찾는 것처럼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 있으니, 앞에서 한 말을 다시 잘 살펴보길 바라오.
경이 인용한 《중론》은 곧 짐이 생각한 뜻과 같소. 제법(諸法)이 공하지 않으면 이제(二諦)가 없고, 제법이 있지 않으면 이제가 있을 수 없소. 이는 유무(有無)가 서로 떨어지지 않음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오. 만약 유(有)만을 말한다면 고귀한 사람들을 구제할 수 없고, 무(無)만을 말한다면 평범한 사람들을 구제할 수 없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성인은 유무를 겸하여 버리지 않는다'라는 말은 바로 이것을 이르는 것이오.
따라서 여러 학파들은 최고의 의(義)를 통달하여 '공(空)은 쥐죽은 듯 조용하다'라 하는 것이오. 만약 성인이 없었다면 이를 누가 알았겠소?"
"신 요숭은 폐하께서 보내주신 가르침의 조서를 받들어 자세히 살펴보고, 한없는 기쁨과 감격을 느꼈습니다. 폐하께서 덕스러운 말씀을 발하시어, 깊고 은밀한 이치를 밝히시고 도와 의의 문을 넓히셨으며, 여래의 깊은 경지를 드러내셨습니다. 덕분에 숨겨졌던 종지가 다시 드러나고, 감춰졌던 현묘한 문이 다시 열리니, 글 속의 뜻이 환히 밝아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치는 현묘하여 말로 다할 수 없고, 일이 묘하여 흔히 쓰는 말로는 찬미할 수 없습니다. 비록 마음과 입으로 우러러 읊조리고자 하여도 모두 다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이는 신이 어리석고 둔하여 폐하의 과분한 칭찬을 받은 탓이니, 진실로 기쁘면서도 동시에 부끄럽습니다. 신이 미미하게나마 조목을 맛보며 연구하고 읊조리니, 그 깨달음의 이익이 어찌 절반을 넘기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신은 여전히 외직을 맡고 있어 폐하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없었습니다. 매번 먼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할 뿐, 끝없는 감회만 있을 따름입니다. 이 감정을 억누를 수 없어 삼가 거듭 말씀드립니다."
요흥도 요숭에게 다시 서신을 보내 말했다."그대의 표문을 받아 한두 가지를 알게 되었소. 짐은 항상 경전을 가까이하였으나, 근래에 일들이 많아 혼란스러웠고, 일에 치이다가 돌이켜보니 마치 벽을 마주하는 듯하여 도리를 알지 못하였소. 도리에 대해 말하려 했던 것은 경이 현묘한 법을 좋아하기에, 경솔하게 그에 관해 의논하고자 하였던 것인데, 오히려 지나친 칭찬을 받아 더욱 불안해졌소."
홍시 14년(412년) 10월, 문환제 요흥이 후구지의 양성 토벌을 위해 친정하면서 요숭에게 명해 양두협(羊頭峽)으로 나가 후구지를 공격하게 하였다. 요숭은 천수(天水) 태수 왕송총(王松怱)의 반대를 무시하고 출진하였는데, 요숭과 마찬가지로 요흥의 명령을 받은 입절장군 요백수(姚伯壽)가 두려워하며 출진하지 않았다가, 후진군의 선봉인 조곤(趙琨)이 제때 지원을 받지 못하고 양성에게 패하여 토벌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요흥은 요백수만 참수한 뒤에 군대를 물렸다.
영화 원년(416년) 6월, 후구지의 구지공 양성이 진주를 공격해 기산(祁山)을 함락시키고, 진주자사의 치소가 위치한 상규(上邽)를 압박하였다. 후진의 황제 요홍이 후장군 요평(姚平)을 파견해 상규를 구원하니, 양성은 군대를 이끌고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상규를 지키던 요숭은 출격하여 요평과 합류하고 퇴각하는 양성의 뒤를 추격하였으나, 죽령(竹嶺)에 이르렀을 때 양성이 갑자기 군대를 돌려 반격하였다. 요숭은 양성의 군사들과 싸우다 전사하였고, 추격하던 후진군은 오히려 패하여 궤멸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