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생
1950년 음력 6월 2일(양력 7월 16일) 충청남도 청양군 비봉면[1] 양사리 156번지에서 태어났다. 이후 한 달만에 6.25 전쟁을 피해 외가가 있던 청양군 대치면 탄정리로 이사했다. 홍성 덕명국민학교[2], 대전중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특별시로 상경하였다. 이후 서울 양정고등학교(53회)에 진학했고, 재학 시절 학생회장을 지내며 한일회담 반대 투쟁에 참여했다가 명동파출소로 연행되어 구타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졸업 후 재수를 통해 1971년 후기 대학이던 성균관대학교 법정대학 행정학과(71학번)에 진학했으며[3][4], 1974년 5월 제15회 행정고시에 합격했다.충청남도 홍성군청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육군 방위병으로 입대하여 국방대학원에서 군생활을 하고 1977년 일병으로 소집해제되었다.[5] 그 후 경제기획원에서 '제4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수립에 참여했다.
1977년 행정고시 합격자 내무부 치안본부 특채를 통해 경정으로 경찰공무원에 입직하였다. 이후 총경으로 진급하여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내무분과위원회에 파견되었고, 1981년 11월 27일부터 1982년 6월 3일까지 제38대 홍성경찰서장으로 근무했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약 3년간 주로스앤젤레스 대한민국 총영사관 내무영사로 근무했다. 1989년 경무관으로 승진하였다. 40대 초에 치안감까지 올랐으며 1991년에는 이형호 유괴 살인 사건 수사본부장을 역임하고 이후 1993년 3월 15일부터 1993년 9월 21일까지 제3대 충북지방경찰청장, 1994년 6월 2일부터 1995년 2월 20일까지 제4대 충남지방경찰청장을 지냈다. 충남경찰청장 시절 도내 모든 파출소를 순시한 영상자료를 2013년 완사모[6]에서 공개하기도 했다.
2. 정치 활동
1995년 경찰복을 벗고, 신한국당의 전신 민주자유당에 입당하면서 정치권에 뛰어든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향이 있는, 충남 청양군 - 홍성군 선거구로 출마했으며 자유민주연합 조부영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당시 충청도 일대, 특히 충청남도지방에 자민련의 녹색돌풍이 무척 거셌는데, 충남 지방의 유일한 신한국당 당선자여서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1998년 정권교체로 공동여당이 된 자민련으로 당적을 옮기고 대변인까지 맡게 된다. 2000년 재선에 성공했고 자민련 원내총무(現 원내대표)가 되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송광호, 이양희, 이재선 의원 등과 함께 자민련을 탈당해 한나라당으로 복당했다. 본래 지역구인 홍성ㆍ청양 선거구가 공중분해되면서[7] 2004년 2월 J1비자를 취득하여 같은 해 3월 6일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에 교환교수로 갔다. 이 때문에 같은 해 4월 치러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다.
2.1. 충청남도지사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충청남도지사 출마를 선언했다. 당초 유력했던 박태권 전 관선 충청남도지사를 경선에서 꺾고 한나라당의 후보로 확정, 본선에서도 한나라당의 열풍에 힘입어 충청남도지사에 당선되었다. 충남지사 시절 무난히 도정을 이끌었다는 평을 받았다. 임기 중에 삼성 1호-허베이 스피릿 호 원유 유출 사고가 발생했는데, 장모상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고 현장을 먼저 찾았다고 한다. 그리고 보령 해저터널을 착공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그런데 임기가 다 끝나가던 2009년 12월 3일, 이명박 정부가 세종시 수정안 추진을 밀어붙이자 이에 반발하여 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도지사직을 돌연 사퇴해버렸으며[8],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는 불출마했다. 한나라당은 우리은행장을 지낸 박해춘을 충남지사 후보로 공천했으나 3위를 기록하며 참패하고, 민주당 안희정 후보가 당선된다.[9][10]
이후 혈액암 투병생활을 하며 잠시 정계와 거리를 두고 있었으나, 2013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부여군·청양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 약 9년 만에 국회로 돌아오게 된다. 이후 2014년에 최경환 원내대표가 임기를 마치면서 새로 선거를 거쳐 새누리당 원내대표직(국회운영위원장 겸임)을 맡기도 했다.[11]
2.2. 국무총리
정홍원 총리의 사임 이후 성균관대학교 출신의 총리감을 찾던 청와대의 눈에 띄어 국무총리 후보로 나서게 되었다.[12] 당시 국무총리 청문회에선 일명 언론외압의혹이 불거져 곤욕을 치렀는데,[13]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역 정치인(국회의원[14])이란 배경과[15] 본인 관련 논란에 대해 대질 전에 미리 해명하는 등의 적극적 모습을 앞세워 끝내 청문회를 통과했다.[16]국무총리가 되자마자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 강하게 정치인들을 압박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죽하면 언론이 너무 오버하는 것 아니냐며 "저러다가 부메랑 되는 것 아냐?"라는 보도를 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과거 MB정부 자원외교 관련 수사를 하면서 경남기업 전 회장 성완종을 상당히 압박했다. 평소 막역한 사이였던 성완종을 이렇게까지 압박한 이유로는 친이계의 자금줄[17] 인 성완종을 압박함으로써 친이계를 견제할 수 있다는 것뿐 아니라, 이완구의 대선 전략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충청권의 잠재적 맹주 반기문과 가까운 편이었던 성완종을 압박함으로써 반기문까지 견제할 수 있다는 것 등이 꼽혔다. 그런데...
2.3. 진짜 친박계의 거물일까?
이완구가 총리직을 떠난 후 호사가들은 의문을 가진다. 이완구 전 총리가 진짜 친박계의 거물이었다면 국무총리가 '거물'의 상징에 맞냐는 것.한국의 국무총리가 행정부에서는 대통령 다음이라지만, 실상은 정권에서 뭔가 안좋은 일이 생겼을 때 대통령을 대신해서 총알받이 역할을 하는 경우가 빈번하고, 그때문에 생긴 별명이 대독총리, 방탄총리, 사과총리[18]일 정도니 말 다했다. 물론 김종필, 박태준, 이한동, 이해찬, 이낙연 같은 예외도 있긴 하다.[19][20].
고로 이완구 입장에선 진짜 거물 행세를 하려고 했는지, 총리 내정자가 된 이후 책임총리가 되겠다는 발언을 했는데, 사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반신반의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2인자에 대한 본인의 의견[21]을 생각하면 국무총리가 자기 밥 그릇 찾는 것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22] 그리고, 결과적으로 책임총리고 나발이고 할 시간도 없이 성완종 게이트가 터지며 불명예스럽게 사임하며 이완구는 자신의 정치경력에 큰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진짜로 친박계의 거물이라면 잘해야 본전인 국무총리 자리를 고사하고 원내대표로서 스탠스를 유지하는 쪽이 본인 입장에서도 나았을 것이란 의견도 있다. 친박계가 지독한 차기 대권주자 부재에 시달려왔다는 점을 감안하면[23] 자신이 예비 잠룡임을 생각해서 관리에 신경썼다면 지금 같이 되진 않았을 것이란 추측. 다만, 지금 와서 보면 성완종 게이트에 혐의가 없어서 무난하게 총리직을 수행했다고 치더라도, 그 뒤에 닥쳐온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헬게이트를 생각하면 오히려 최단명 총리로 끝난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2.4. 무죄 선고 이후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불출마를 선언하고 고향으로 귀향하여 과거 경쟁자이기도 했던 홍문표 의원의 선거 운동을 도왔다. 이후로는 본인이 도지사 시절 추진했던 내포신도시로 이사하여 여생을 보내면서 사실상 정계를 은퇴하였다.3. 사망
지병인 혈액암이 재발하여 치료를 이어오던 중 의식도 잃을 정도로 상태가 위중해졌고, 결국 2021년 10월 14일, 향년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 무죄 판결 이후 정계 복귀를 저울질하다 철회했던 것도 지병이 재발했던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2021년 10월 15일 빈소 |
2021년 10월 16일 서울성모병원에서 발인이 엄수되었다. 빈소에는 문재인 대통령과 박병석 국회의장을 비롯해 각계에서 보낸 조화들이 놓였으며, 여야 당대표와 당시 국민의힘 대선주자들, 충남 지역 국민의힘 국회의원들, 그리고 양승조 충청남도지사를 비롯한 충남도청 관계자들은 빈소를 직접 찾아 조문했다. 유해는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되어 고향인 충남 청양군 비봉면 양사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1] 청양군 비봉면과 홍성군 장곡면 일대는 여주 이씨 홍주파가 많이 사는 곳이기도 하다. 교위공파 26세손.[2] 후에 덕명초등학교로 바뀌었으며, 2019년 광천초등학교와 통폐합.[3] 여담으로, 경기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고입에 2번 도전하였으나 실패하여 대신 양정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서울대학교를 가기 위해 대입에 2번 도전하였으나 서울대도 탈락하는 바람에 삼수 나이인 71학번으로 입학하였다.[4] 당시 성균관대는 후기대학 중 1위였고, 전기대학 1위인 서울대 불합격자들이 많이 합격했다. 후임 총리인 황교안도 똑같은 케이스.[5] 사실 행정고시를 합격하면 장교로 임관하여 의무 복무 후 중위 전역(현재는 중위 임관, 과거 이야기)이지만, 이완구는 병역판정검사에서 보충역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6] 이완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약칭인 정치인 팬클럽[7] 각각 예산군과 부여군에 합구되었다.[8] 이명박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은 참여정부의 원안에서 한참 후퇴한 수준이었고 여당 내에서도 말이 많았다.[9] 무엇보다도 자유선진당 박상돈 후보의 출마로 인해 보수표가 분산된 것도 영향이 컸다.[10] 이후 2022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 김태흠이 충청남도지사에 당선되면서 12년만에 보수정당이 충남지사직을 탈환하게 된다.[11] 임기를 마친 최경환 원내대표는 경제부총리로 입각, 황우여 당 대표는 교육부총리로 입각했다.[12] 이완구는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 재학 중이던 1974년에 행정고시에 합격하였다.[13] 기자들과 식사하던 도중 "(자신의) 전화 한 통화로 기사를 넣거나 뺄 수 있고, 마음에 드는 기자는 키워주거나 아니면 죽일 수도 있다"는 식의 말을 하며 논란을 스스로 자초했다. 이를 녹취한 한국일보 기자가 녹음파일을 까면서 논란이 불거진 것.[14] 국무위원뿐만 아니라 국무총리도 국회의원의 겸직이 허가된다. 이완구 총리는 2006년 한명숙 전 총리 이후 무려 9년여 만에 현역 국회의원으로서 총리를 겸직하는 국회의원이 되었다.[15] 국회의원은 선거라는 과정을 거쳐 올라오는 자리라서 국민에게 이미 한 번 검증된 인사로 여겨 그런 건지, 이러나저러나 자기들과 동류라는 의식이 있는 건지, 야당 의원들도 현역 의원이 국무총리나 장관 후보자로 나올 경우 상대적으로 압박하는 강도가 낮은 편이다. 실제 역대 정부에서 현직 국회의원이 총리나 장관 후보로 나왔을 때 낙마하는 일은 없었다.[16] 애초 야당인 민주당 입장에서는 이완구 전에 내정된 후보자(안대희, 문창극)들을 검증 과정에서 줄줄이 낙마시켜 충분히 성과를 낸 상황이었다. 청와대가 여당 원내대표인 이완구까지 차출했다는 건 거의 마지막 카드나 다름없는 것이라 여겨서 이완구는 다소 무디게 압박한 것 아니냔 분석이 많은 이유다. "뭔 허물이 나오더라도 머릿수로 밀어붙이겠구나" 하고. 당시 새누리당의 의석은 과반수를 넘기는 수준으로, 다른 당이 아무리 결집한들. 단독으로 총리 임명동의안 처리가 가능했다. 게다가 현역 의원을 떨어뜨리면 나중에 민주당이 집권했을시 의원 입각이 힘들어지기도 하고.[17] 성완종은 자민련 출신 국회의원인 김의재를 전문 경영인으로 활용했는데, 그 김의재의 동생이 친이계 핵심 인사인 김효재 전 국회의원/정무수석비서관이다. 한 다리 건너면 친이계에 걸친 셈.[18] 평소에는 존재감 없다가 정권에 안좋은 일 터지면 대통령 대신해서 사과성명이나 낸다고 해서...[19] 김종필은 김대중을 대통령에 당선시켜주는 대신 총리직을 받아 상당수의 권력행사가 가능하도록 딜을 해서 탄생한 연립정부라서 가능했던 거고, 나머지는 대통령의 재량에 따른 책임총리다.[20] 장면은 예외가 아니라 애초에 정치 체제 자체가 다른 케이스였다. 장면 내각은 의원내각제라 국무총리가 정부수반이고, 윤보선 대통령은 천황, 영국과 영연방 왕국의 국왕, 영국을 제외한 영연방 왕국들의 총독, 독일 대통령과 같은 상징적 국가원수였다. 3차 개헌을 이끌어낸 허정 총리도 의원내각제 하 정부수반으로서의 총리였지만, 본인이 총리로서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고 있었다. 물론 윤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장 총리 취임 직전까지 잠시간 총리로서만 있었던 시기도 있긴 하다.[21] 한때 친박계 좌장소리 들었던 김무성이 나중에 박근혜와 각을 지는 과정을 보면 답이 나온다.[22] 박근혜의 권력을 뛰어넘지 않는 선 내에서만 권력을 행사하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 두 대통령 부녀 모두 2인자가 본인의 자리를 넘보면 가차없이 숙청하는 성격이었으므로.. 즉 김대중 시기의 김종필이 아닌 박정희 시기의 김종필처럼 되었을 거라는 얘기다.[23] 이는 자기에게 쓴 소리 할 줄도 아는 2인자를 용납하지 않는 박근혜의 성격도 한 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