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김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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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아들 고윤 | ||
논란 | 논란 | ||
새누리당 대표 직인 날인 거부 사태 · 포항 가짜 수산업자 사기 사건 | |||
기타 | 친무 · 별명 |
1. 정계 입문
역대 선거 벽보 |
그러나 이철승계인 조규창에 밀려 공천 탈락하였다.
2. 김영삼-이회창 시절
6월 항쟁 당시 백골단의 습격을 받은 김영삼을 이끌고 나가는 김무성[1] |
김영삼의 선거 유세 중 태극기를 흔드는 김무성 |
정계 입문 이후에는 대체로 조직이나 정당 내 실무를 담당하는 정치인으로 경력을 쌓아갔다. 또한 기업가 집안의 자제인지라 주로 상도동계의 자금줄 역할을 하였으며, 통일민주당이 창당되자 총무국장으로 당사를 마련하여 김영삼 총재의 신임을 받기 시작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영삼 후보의 재정을 관리하는 선거대책위원회 재정국장을 맡았다. 다만 그가 이른바 정치를 하면서 돈질을 했다는 증언은 거의 없으며, 실제로 박종웅 전 의원은 "민추협 사무실이나 통일민주당 당사를 마련할 때 김 의원이 일정 부분 기여한 것은 사실이나 다 부담했다는 말은 사실과 다르다. 어려운 야당 시절에 당비 납부 등 도네이션(기부)을 꾸준히 한 정도다"라고 증언했다.
반면 그의 실무적인 업무 능력을 꼽는 사람들은 많다. 통일민주당 시절부터 김 의원과 함께 일을 한 새누리당의 한 관계자는 "통일민주당 시절에는 당의 회계가 주먹구구식이었는데 김 의원이 기업에서 익힌 일솜씨로 바로잡았다. 3당 합당으로 민자당이 출범한 뒤 민정계와 민주계, 공화계가 계파싸움을 심하게 했다. 그런데 당시 의원국장 등 당직을 맡은 김 의원은 실력 위주로 사람을 썼다"고 말했다. #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전국구(비례대표) 15번으로 입후보했으나 13번까지 당선되어 국회에 입성하지 못했다. 통합된 민주자유당 내에서 민주계 비례대표들이 의원직 상실, 사퇴, 사망 등으로 인한 승계가 없었기 때문에 1992년까지 승계가 이뤄질 수 없었다. 1990년, 모시던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를 따라 3당 합당에 참여하여 민주자유당에 합류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주자유당 전국구(비례대표) 50번으로 공천을 받았으나 낙선하였다.[3]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취임 이후 대통령비서실 민정2비서관, 사정1비서관, 내무부 차관을 역임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광역시 남구 을에 출마하여 당선된 이래 내리 4선을 했다.
19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신한국당의 당권이 김영삼 대통령에서 이회창 총재에게로 넘어간 이후에는, 이회창으로부터도 신임을 받아 총재 비서실장과 2002년 16대 대선에서의 후보 비서실장을 역임한다. 선거 기간에는 이회창 캠프에서 미디어대책본부장을 맡아 온라인 선거운동을 지휘하는 총책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이회창은 두 번의 대선에서 모두 패배하였고, 16대 대선 패배 후 이회창이 정계를 은퇴하자 1년여 간 별 다른 계파 활동을 하지 않았다.
3. 친박계 시절
2004년 한나라당의 당권이 박근혜 대표에게로 넘어가자 이번에는 박근혜의 신임을 받아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어 당의 살림을 총괄하였다. 박근혜 대표의 최측근 중 1명으로서 비서실장 유승민, 대변인 전여옥과 함께 원조 친박으로 불렸다. 제17대 대통령 선거 경선 때는 박근혜 캠프에서 선거운동을 총지휘했으나[4] 결국 경선은 이명박 전 서울특별시장의 승리로 끝났다.[5]당시 친박계는 리더 - 박근혜, 조직 - 김무성, 정책 - 유승민의 삼각편대였으나 박근혜와 김무성 사이에 의견 충돌이 수시로 벌어졌다고 한다.[6]
김무성 의원은 한나라당 사무총장직을 맡으면서 2004년부터 2005년까지 17대 국회 전반기 재정경제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7] 보통 당 사무총장과 상임위원장을 겸임하지 않는 다는 점을 생각하면 의외인 부분.
또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수위높은 비판 발언을 자주 해서, 친노 인사들 및 지지자들에게 큰 반감을 얻기도 했다. 취임 초였던 2003년 국회에서 열린 한나라당 의원 총회에서 “나는 노무현이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는 발언이 제일 유명하다.[8] 후에도 참여정부 임기 내내 노무현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새누리당 대표로 취임한 뒤 인터뷰에서 과거 노무현을 과하게 비난했던 점을 후회하고 있으며, 공과 과 중 공을 더 생각하겠다고 말하며 입장을 선회시켰다. 봉하마을에 가서 참배를 할 때 자신이 돌 맞아도 할 말 없다고 말했을 정도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친이계는 친박계에 대한 공천 학살을 자행했으며, 이에 김무성 또한 포함되게 되었다. 사실 김무성의 경우에는 원래 이명박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고, 이명박 또한 김무성은 컷오프하지 말라고 했지만, 당 사무총장이었던 친이계 핵심 이방호는 자신이 부울경의 패권을 잡기 위해 김무성을 컷오프하기로 결정했다. # 결국 김무성은 다른 친박계 탈락자들과 함께 탈당하여 무소속 출마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친박 성향 무소속 후보들을 규합하여 친박 무소속 연대라는 이름을 내걸고 선거 연대를 하면서 다시 한 번 당선되었고 곧 한나라당으로 돌아왔다. 이 당시 김무성과 각별한 사이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신의 세력이었던 한나라당의 공천 파동을 전격 비판하면서 김무성을 옹호하였다. 이례적으로 직접 부산의 남구 을 선거구를 찾아서 지원 유세를 해주었을 정도.[9]
4. 비박계 시절
4.1. 이명박 정부 시절
하지만 이후 2009년에 이명박 대통령이, 세종특별자치시에 정부청사를 이전하는 원안을 수정하여, 세종시를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의 교육과학경제중심도시로 개발하는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하려고 했을 때, 원안 고수를 주장한 박근혜와 달리 김무성은 수정안을 지지하면서 박근혜와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박근혜의 "친박에는 좌장이 없다"라는 유명한 말이 이 때 등장했다. 또 2010년 5월에는 친이계의 추대로 한나라당 원내대표에 선출되면서 박근혜와의 정치적 결별을 맞이하게 된다.김무성은 여당 원내대표로서, 이명박 정부의 정책들을 뒷받침하는 입법안들이 국회에 통과되는 데에 최선을 다하는 등 이명박 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당 주류인 친이계의 호평 속에서 한나라당 원내대표직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 하지만 이로 인해 친박으로부터 더더욱 미움을 사게 됐고, 급기야 2011년 12월, 선관위 디도스 사건의 파장으로 인해 홍준표 대표가 사퇴할 정도로 당이 위기에 몰린 때에,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나라당을 망친 사람들 중 한명으로 박근혜를 언급하여 자신이 완전히 친박계에서 벗어났음을 발표하였다. 이 시기부터 사실상 박근혜와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된 셈이었다.
이후 박근혜 의원이 새누리당의 비상대책위원장으로서 전권을 잡았던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또다시 공천에서 탈락하고야 만다. 박근혜는 4년 전 총선에서 친이계가 친박계의 공천 탈락 사태를 빚은 원한을 잊지 않고 있다가 본인이 전권을 맞은 19대 총선에서 역으로 친이계를 대거 공천에서 탈락시켰는데, 이 때 박근혜는 친이계와 협력한 김무성을 배신자로 간주해 똑같이 공천에서 배제시켰다.[10]
하지만 이번에는 탈당하지 않고 당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이 때도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자신처럼 비박계 & 친이계란 이유로 공천에서 탈락한 한나라당 국회의원 약 30여명(유정현, 정미경 등)과 외부의 자유선진당, 보수 성향의 신당이었던 '국민생각'과 힘을 합쳐서 비박계 범우파 신당을 창당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탈당 기자회견 직전에 포기하였다고. 영남에서 한나라당과 신당이 경쟁 시 범보수 신당의 맹주는 당연히 김무성이 될 예정이었고, 자유선진당은 아예 김무성에게 당권까지 넘길 양상이었다. 그러나 만일 이렇게 경쟁하게 되면 어부지리로 야권이 총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크게 높아지고 그렇게 된다면 대선은 해보나 마나라는 예상 때문이었다고 한다. 실제 영남 특히 부산의 경우 야권 단일 후보들이 40%가 넘는 득표율을 기록한 지역이 제법 많았던 점을 보면, 만일 우파 신당이 출현해서 여당표가 분산됐으면 야권이 총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커졌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김무성의 선당후사 자세는 새누리당의 총선 승리를 이끌었다.
그럼에도 박근혜는 김무성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지 않아,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캠프에서 사실상 명예직에 불과한 선대위 부위원장직에 임명했다. 하지만 선대위가 총체적인 난맥상에 접어들면서, 대대적인 조직개편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결국 대선 캠프의 운영을 총괄적으로 지휘하는 총괄선대본부장에 임명했다. 이 때 김무성은 기업인 출신으로서의 효율적인 조직관리 능력과 솔선수범하는 리더십을 발휘하여, 박근혜 캠프가 원활히 돌아가게 된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 ## 실제로 그를 오랫동안 가까이서 지켜봤던 새누리당의 한 관계자도 "그는 일머리가 있어서 막힌 곳을 뚫어준다. 총괄선대본부장이 된 첫날 선대위 본부장회의를 주재하면서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낸 뒤 내가 책임질 테니 사무총장은 이것 하고, 각 본부장들은 이 일을 추진하라고 결정해줬다. 그동안 지지부진하던 선대위가 그때부터 활기를 찾았다. 이런 사람을 어느 누군들 좋아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11] 일선에서 뛰며 갈라졌던 두 사람의 관계는 조금이나마 봉합되는 듯한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4.2. 새누리당 대표
2014년 7월에 열린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실시된 최고위원 경선에서 59.1%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해 친박계를 대표하는 서청원 의원(43.0%)을 이기고 대표 최고위원에 당선되어 새누리당의 수장이 되었다.
당시 새누리당은 안정적으로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었고, 그 당의 대표인 김무성은 유력한 대권 후보로 떠올랐다. 반면 야당은 지리멸렬하여 김무성을 뛰어넘기 어려워 보였고, 반 새누리 성향 네티즌 사이에서는 차라리 킹무성을 찍고 헬조선 탈출한다는 킹찍탈이라는 신조어가 유행했을 정도였다.
세월호 특별법 정국 아래에서 치러진 2014년 7.30 재보궐선거에서 11:4로 압승을 거두었고 2015년 4.29 재보궐선거에서도 새누리당을 승리로 이끌어 '선거의 왕자'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새누리당의 홍보본부장이었던 조동원의 제안을 망설임 없이 실행하는 실행력 만으로도 보통 선거의 귀재가 아니라는 평가를 받았다. 환갑을 넘긴 51년생의 정치인이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반바지에 카우보이 모자를 쓰거나 앞치마를 두르기도 했으니까. 실제로 2015년 7월 3주차에 실시된 당대표 취임 1주년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긍정평가 41%, 부정평가 37%로 나와 긍정평가가 부정평가를 웃돌았으며, 이는 동일한 기간의 박근혜(33%-58%)나 문재인(18%-63%)보다 긍정평가가 높고 부정평가가 낮은 결과다. #
하지만 '할 말은 하는 당대표가 되겠다'던 처음 약속과는 달리 박근혜 정부와 의견 차이가 생길 때마다 자신의 뜻을 번번이 굽혀서 사람들이 붙여준 '무대(무성대장)'라는 별명이 무색해졌다는 소리를 듣게 됐다. 비박계 유승민 의원이 원내대표로 선출된 직후에는 그와 손잡고 청와대를 견제하는 모습도 잠시 보였지만, 국회법 개정안 파동이 일어나자 유승민 원내대표와 청와대 사이의 갈등에서 아무 역할을 하지 못했고, 유승민 의원이 원내대표직에서 쫓겨난 다음에는 아예 청와대에 굴복한 모양새가 되었다.
정의당에서 제작했던 인기 시사 팟캐스트 방송인 노유진의 정치카페에서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금 새누리당 당내 구도를 통해 김무성 대표가 이대로 가면 박근혜 대통령에 의해 축출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한 바가 있다.[12] 유시민 전 장관은 이를 극복하려면 우선 약점이 없어야 하고, 자신의 정치적 자산이 있어야 할 거라고 했는데 김 대표는 태생부터 친일파 집안 출신이고, 국민들에게 피력할 만한 정치적인 업적도 없고, 박근혜 대통령이나[13] 이명박 전 대통령처럼 [14] 당내에 확고한 지지 세력이 있는 상황도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 딸과 사위의 마약 투약 및 봐주기 판결 논란까지 불거졌다.
그래도 유승민 의원이 원내대표로 재직하던 시절에는 유승민 의원과 함께 힘을 합쳐 박 대통령과 대놓고 맞서기도 했지만 유승민 의원이 반 강제로 원내대표직에서 물러나고 친박계에 저자세로 나선 원유철 정책위의장이 원내대표에 취임한 이후에는 박 대통령과 친박계에게 계속 저자세를 보였다. 하지만, 추석 연휴를 기해 박근혜 대통령이 유엔에서 기조 연설을 하려고 출국한 틈을 타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와 당대표 회동을 통해 안심번호 국민경선제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이를 공표함으로써 기습을 가하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의표를 찔린 청와대에서는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는 중. 이를 어떻게 풀어나가느냐에 따라 대권 행보도 결정될 듯하다.
그렇지만 2015년 10월, 2015 개정 교육과정 역사 교과용도서 국정화 논란에 대해서는 박근혜 정부와 김무성 대표 모두 매우 적극적인 자세로 나섰다. 시사 평론가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이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직접 챙기는 일인데다가 역사 문제에 있어서는 본인도 껄끄러운 부분이 있으니 박근혜 대통령의 믿음을 얻음과 동시에 자신의 역사적 약점을 보완하려는 의도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2015년 11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이 사망한 후 장례식장에서 자신은 고인의 정치적 아들이라고 하면서 서청원 최고위원과 함께 빈소를 내내 지켰다고 한다. 서청원 최고위원은 친박계의 좌장으로서 김무성 대표와 사사건건 대립하는 사이지만, 고인이 정계에서 활약하던 시기에는 같은 상도동계의 일원이기도 했다. 그런데 고인의 둘째 아들인 김현철 고려대 지속발전연구소 연구교수는 과거 본인 트위터에 김무성 대표한테 고인이 1년 동안 입원 생활을 했을 때 한 번도 안 찾아올 수 있냐고 비판했던 적이 있다. #
재미있게도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무성 전 대표 모두 김영삼 전 대통령의 손을 잡아 정계에 입문했다. 이렇게들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영입돼 정치적으로 크게 성장한 인물들을 모두 묶어서 'YS 키즈(Kids)'라고 부른다.[15] 3당 합당 후 통일민주당 → 민주자유당으로 이동할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은 노태우 정권 및 민주정의당 세력과 한솥밥을 먹을 순 없다며 김영삼 대통령과 결별했고, 김무성 전 대표는 김영삼 대통령을 따라 민주자유당에 합류했다.
4.3.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김무성 당시 대표를 위시한 비박계는 상향식 공천으로 해야한다는 주장을 줄기차게 이어왔다. 김무성 대표의 처음 목적은 오픈 프라이머리(완전 국민 경선제)였지만 친박계의 견제를 이겨내지 못하고 뜻을 접어야 했다. 대신, 국회의원 후보를 아래에서 위로 공천하는 상향식 공천을 통해 민주적인 공천을 뿌리내려야 한다며 이 부분에 있어서는 양보를 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내비쳤다.사실 김무성 대표의 이러한 입장은 총선이 눈앞에 다가오면서 박근혜 정부의 연이은 실정 탓에 박근혜 대통령의 인기가 점점 떨어지자, 그에 대한 반사 이익으로 유승민 의원으로 대표되는 비박계의 인기가 올라가던 추세였기 때문에 여론조사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상향식 공천으로 방침을 정할 경우 친박계가 경선에서 우수수 떨어질 것이라는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를 잘 아는 친박계는 위에서 내리꽂는 전략공천과 다름없는 '우선 추천식 공천'을 주장하며 김무성 대표와 강하게 부딪쳤다.
김 대표가 위에서 아래로 가는 전략공천(하향식 공천)을 극도로 꺼리는 이유가 또 있다. 위에 서술되어 있는 속셈도 있지만 본인 스스로도 이른바 "공천 학살"의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두 번이나 공천 배제 대상이 된 사람이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한나라당의 당권을 잡은 친이계가 대통령 후보 경선을 거치면서 철천지원수 지간이 된 친박계에 속한 정치인들(김기춘, 홍사덕, 서청원, 이규택, 박종근, 이해봉, 한선교, 김무성, 김세연 등)을 공천에서 대거 탈락시켰다. 이 때 친이계의 '공천 학살'에 극렬히 반발한 친박계는 한나라당을 박차고 나와 친박연대라는 정당을 만들었고 친박연대에 가담하지 않은 나머지 친박계 의원들은 '친박 무소속 연대'를 꾸려 18대 총선에 출마했다. 이 친박 무소속 연대의 주축은 김무성 의원이었고, 이 시기까지만 해도 김무성 의원은 '원조 친박'이자 친박계의 좌장으로 불렸다.
그리고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박근혜 의원이 새누리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이 되면서 그간 비주류였던 친박계가 당권을 장악하게 됐다. 이 때 김무성 의원은 '세종시 수정안 파동'으로 탈박해 친이계 인사로 분류되던 시기였다.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 '친박계 공천 학살'에 대한 복수로 친이계를 공천 학살하였고 배신자로 볼 수 있는 김무성 의원도 타깃이 되어 공천에서 탈락했다. 이때 김무성 의원은 신당을 차려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려고 했지만 대선 승리를 위해서 뜻을 접고 당에 남아 다음 기회를 엿보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었다고 한다.#
공천권을 쥐게 되는 당대표가 된 다음에도 김무성 대표는 청와대와 친박계의 등쌀에 밀려 공천을 관장하는 공천관리위원장도 자기 마음대로 임명하지 못했다. 이른바 '살생부' 파문을 포함해 새누리당의 공천관리위원장이 된 원내대표 출신 친박 이한구 의원은 공공연히 김무성 대표와 각을 세우면서 오히려 '당대표도 공천 심사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등 독설적인 화법으로 김무성 대표와 비박계를 연신 압박했다.[16]
때문에 이 시기 김무성 대표는 엄청난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당원과 여론의 지지를 받아서 당대표가 됐는데, 공천관리위원회 심사장에 들어와서 이한구 위원장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면서 심사를 받거나,[17] 당대표의 권한 중 하나인 비례대표 선정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거나,[18] 심지어 '박근혜의 황태자'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핵심 친박 인사였던 윤상현 의원에겐 취중이라긴 하지만 "김무성 그 새X 죽여버려." 같은 망언까지 들을 정도로 초라한 처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자기 세력 지키기에는 성공해서 이재오 의원 등 대표적인 비박계 인사들이 잘려나가는 와중에도 김무성계 의원들(김성태, 하태경, 정미경, 서용교, 박민식, 김을동)은 제3차 공천 학살에서 살아남았다. 때문에 친박계와 거래를 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었다. 항간에서는 김무성 대표가 몸을 낮춰서 대업을 이룬 한신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새누리당의 공천 전쟁은 친박계의 압승으로 굳어지는 듯 했다.
4.3.1. 새누리당 대표 직인 날인 거부 사태
해당 문서로.4.3.2. 총선 패배 이후
한때 새누리당은 국회선진화법을 완전히 무효화시킬 수 있는 180석을 예상하기도 했고, 운이 좋으면 헌법 개정까지도 밀어붙일 수 있는 200석 이상의 절대 다수 의석을 얻을 거라는 예측이 있을 정도로 확실한 우위를 점했다.
그러다가 총선 막바지에 가서 공천 파동 등으로 점점 기대치가 낮아지면서 한때 엄살 논란이 일었던 자체 여론조사에서 135석을 예상했으나,[19] 20대 총선 결과 현실은 그보다도 못한 122석을 차지하며 원내 제1당 자리를 더불어민주당에게 내주고 마는 폭망을 맛보고 만다. 애초에 180~200석까지 가능하다고 본거에 비하면 민주계열이 나름대로 선방했다.
나중에 탈당 후 당선된 의원들이 복당하며 의석 수가 129석으로 늘어 다시 원내 제1당의 자리를 되찾긴 했지만 그것조차도 130석이 안 된다. 반면 야권 의석은 무소속 의원들까지 모두 합하면 무려 171석에 달한다. 그야말로 폭망.
김무성 대표 자신도 부산 중구·영도구에서 당선되었으나 더불어민주당 김비오 후보에게 40%가 넘는 지지율을 허용하는 성적을 받아들었고[20], 자신의 지지 기반인 부산에서도 김무성계가 대거 낙마하는 끝에 더불어민주당이 5석이나 차지하면서 리더십에 위협을 받았다. 그나마 본인이라도 당선되었기에 망정이지, 본인마저 낙선했으면 아마 그의 정치 생명은 완전히 끝장났을 것이다.[21]
선거 운동 중에는 안철수 의원에게 도전장을 내민 이준석 후보 지지 유세 때 안철수를 찍어 달라는 말실수를 하고,[22] 박근혜 대통령을 '전직 대통령'이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김무성 대표는 전국 지원 유세를 다니며 새누리당 후보를 업어주는 소위 '어부바 유세'를 했는데, 김무성 대표가 업어준 30명의 후보들 중 무려 28명이 낙선하는 흠좀무한 결과가 발생하기도 했다. 다만 이건 100% 당선이 거의 확정되는 새누리당 강세 지역구(주로 TK)에는 주로 친박계 후보들이 공천을 받아 김 대표 입장에선 이들을 업어주면서까지 선거를 도울 마음도, 이유도 없는 반면 그 외의 격전지에서 비박계가 공천 받은 탓에 김무성 대표가 비교적 진심으로 유세를 도왔으나 새누리당에 대한 반감이 워낙 컸던 탓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해석도 있다.
어찌됐든 이 결과에 누리꾼들은 김무성 대표의 어부바 유세에게 '거부바 유세'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게다가 공천 파동 등 일련의 사건들로 민심을 크게 잃어버렸다.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새누리당의 전통적인 강세 지역이었던 서울 강남구, 송파구, 양천구, 경기도 분당구, 부산에서 부진한 성적을 낸 데다가, 새누리당의 철옹성이나 다름없었던 대구에서 김문수가 김부겸에게 관광을 제대로 당했고,[23] 공천 문제로 더불어민주당에서 탈당해 무소속으로 당선된 홍의락 후보에게도 의석 한 자리를 내주는 등 더불어민주당에 대참패를 당하면서, 선거가 끝나고 얼마 안 있어 김무성 대표를 비롯한 새누리당 지도부는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전원 사퇴했다.[24]
다만, 김무성 대표는 총선 이전부터 총선이 끝나면 당이 이기든 지든 대표직에서 물러날 것임을 시사해 오기도 했고, 대선에 출마하려면 어차피 당대표에서 물러나야 하기 때문에 새삼 놀라울 것도 없다는 냉담한 반응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총선 대참패로 입지가 제대로 추락하며, 차기 대권 도전 가도에 빨간불이 켜졌다. 결국 20대 총선을 마지막으로 대권주자로서 잘 나가던 그의 정치 인생은 사실상 끝을 맺게 되었으며, 당내 지지도와 대중적 지지도까지 모두 추락하면서 사실상 2선으로 밀려나게 된다. 결국 이런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게 된다.
선거 당일날 이런 결과를 이미 예상했는지 선거 당일날 자기 지역구에서 투표를 한 뒤 총선 지원 유세를 돌면서 과로하였다는 이유로 여의도 성모병원에 하루 입원하였다가 총선이 끝난 4월 14일 퇴원했다.#
김 대표는 당초 전날 밤 늦게라도 당사에 나와 상황을 지켜볼 것이라고 알려지기도 했으나, 결국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후 한동안 자숙의 의미로 조용하다가 5월 24일 정진석 원내대표, 최경환 의원과 단일성 집단지도체제에 대한 합의를 이루면서 언론에 모습을 비췄는데, 이로서 아직 당내 비박계 거물이라는 여전한 영향력을 입증했다.
6월 20일에는 아버지의 묘소를 방문해 함께 참석했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새누리당이 너무 극우적으로 가고 있다. 그런 이념으로는 도저히 나아갈 수가 없게 된다."고 당에 일침을 놓았다.# 이에 누리꾼들은 "그간 당대표를 하면서 써내려간 어록들을 모두 잊으셨나?"라면서 조롱조의 반응을 보였다.
7월 14일에는 당대표 당선 2주년을 기념해 지지자들과 만찬을 함께하는 자리를 열었다.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있는 한 컨벤션센터에 마련한 이 만찬에서 김무성 전 대표는 '30시간의 법칙'을 비롯해 그동안 자신을 향해 쏟아진 부정적인 평가들을 열거하면서 'X신 소리를 들어가며 참고 또 참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름 앞으로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며 '제가 선봉에 서겠다'고 선언하는 등 사실상 대선 출정식이나 다름없는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8월 4일 민생 탐방을 목적으로 경남 거제시를 방문하였는데 뒤집어진 런닝구를 입고 손빨래를 하는 모습이 공개되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130억 원대(혹은 그 이상)의 재산을 가진 그가 그동안 그와 새누리당이 비판했던 보여주기식 정치, 서민 코스프레 쇼를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근데 사실 그가 문재인 전 대표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설도 있다.(@) 참고로 문 전 대표의 고향은 경상남도 거제다.(...) 이후에도 며칠 동안 계속 여러 곳을 방문하다 다시 국회로 돌아왔다.
당대표에서 물러나고 약 4개월 후인 2016년 8월 9일 진행된 새누리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비박계 단일 후보인 주호영 의원을 공개 지지했었는데, 결과적으로 친박계 이정현이 주호영 의원을 큰 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면서 정치적으로 꽤 큰 타격을 받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비박’ 김무성·오세훈 대권가도 타격. 안그래도 암담한 대권 가도에 더더욱 먹구름이 낀 것이다.
10월 24일에 대통령이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밝히자 김무성 "朴대통령 개헌 추진, 애국의 결단"이라면서 제일 먼저 반겼다. 그리고 최순실이 대통령의 연설문 등을 사전에 받아보고 검토했다는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게 되자 여야 가릴 거 없이 다들 난리인 상황에서도 혼자 침묵하였으나 다음날 조용히 입장표명을 하였다.#
4.4.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10월 26일 위의 최순실 파문을 단독 보도한 JTBC 뉴스룸에서 김종인·김무성 등 VIP 보고용 인물평가 보고서까지 최순실에 전달되었다는 보도를 하였다. 여기서 김무성은 "만약 (다보스포럼에) 정치인을 보낸다면 선거 때 총괄본부장으로 수고했고 차기 정부에서 어떤 임명직도 맡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니 고려해 보실 만한 카드"라고 평가 되어 있다.10월 27일 (최순실 본인이)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그러는 것(귀국 거부는)은 역적이라고 언급하며 "조그만 애국심이라도 있다면 빨리 귀국해서 사실을 사실대로 밝혀야 한다"고 조사에 응할것을 촉구하였다.
11월 1일 "국민의 신뢰회복이 가장 중요한 만큼 단순한 변화만이 아니라 재창당 수준의 혁신을 이루지 않으면 신뢰회복이 어렵다"고 발언해 사실상 새누리당의 지도부 총 사퇴를 은연중에 촉구하였다.이어 야당에게도 야당은 즐길 일이 아니다 야당의 제안을 여당이 수용하겠다[25]고 했음에도 야당에서 거부해버리는 이러한 것이 나라를 위한 길인가[26]라고 하며 야당에 대해 빠른 거국 내각 참여를 재촉하였다.
11월 7일 박근혜 대통령에게 탈당을 요청했다.
11월 13일 당 비주류를 주축으로 열린 비상시국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주장했다.
11월 15일 비박계의 임시 지도부인 비상시국위원회 12인 공동대표중에 한명으로 선출되었다. 비박계의 비상시국위원회 출범에 따른 분노로 이정현 대표가 지지율 합쳐서 10%도 안 되는 대선주자들이 당을 먹칠한다면서 대선 주자에서 사퇴하라고 남경필, 원희룡, 김문수, 오세훈한테 막말을 하였으나, 정작 비상시국위원회를 주도한 김무성과 친박에게 정치 생명을 위협당했던 유승민을 향해서는 대선 주자 자격이 있다면서 칭찬하였다. 김무성에 대해서는 “김 전 대표는 다르게 본다. 당 대표까지 했고 지난 2년 동안 힘들게 당을 이끌어왔고 당의 문제점 정확히 안다”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지지율이 낮아지긴 했지만 충분히 대권주자군으로 경쟁력 가진 분이고 큰 일 하실 분이라 생각한다. 그 분의 주장을 존중한다”라고 말했다.
11월 23일, 19대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대통령 탄핵 발의에 앞장서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제 3차 담화를 기점으로 탄핵에서 대통령이 약속만 해준다면 질서있는 퇴진을 하는 쪽으로 입장이 바뀌었다. 12월 1일 새누리당이 박근혜 대통령 4월 퇴진을 당론으로 채택한 이 후로 비박은 김무성 “대통령 퇴진 약속 땐 탄핵 불참” 유승민 “여야 협상 결렬되면 탄핵 동참”이라는 입장으로 갈려있는 상황이다. 김무성 의원은 대통령이 4월 퇴진 약속을 한다면 여야 협상과 관계없이 탄핵을 할 필요가 없으니 불참한다는 입장이고 반면에 유승민 의원은 대통령이 4월 퇴진 약속을 하더라도 여야 협상이 결렬된다면 탄핵에 동참한다는 입장이다.
12월 4일 격론 끝에 與 비주류 "여야 합의 불발시 9일 탄핵표결 참여로 정해졌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점은 그동안 비박내에서 가장 많은 지분을 보유했던 비박계 좌장 김무성 의원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지분이 적었던 유승민 의원의 의견이 만장일치로 채택된 것이다. 박근혜 탄핵을 원하는 민심의 영향도 있겠지만 세력 구도 재편으로 볼 수도 있는 부분이다. 더욱이 유승민의원이 비박계를 설득하여 탄핵에 동참하도록 설득하였고, 7일까지 기다려보자는 김무성 의원의 의견이 아니라 바로 발표하자는 유승민 의원의 의견을 비상시국회의는 수용하였다. # 이로써 비박계내의 세력 싸움에서도 김무성 의원의 입지에 큰 타격을 받았다.
12월 11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 통과된 이 후로 잠잠하던 친박에서 친박 50명 심야 회동, 모임 결성…김무성 유승민과 결별선언을 하였다. 이 모임의 이름은 혁신과통합연합이며 이인제 전 의원, 김관용 경상북도지사. 정갑윤 국회의원이 공동대표로 결정됐으며 친박계 국회의원 51명이 참여한다. 현재 상황에서 친박이 이런 모임을 결성했다는 것은 나 탄핵 반대했어요!라고 인증하는 것이며 알아서 순장조로 들어가겠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12월 9일 탄핵 직전 비상시국회의에서 김무성의 메모가 찍혔고 거기에는 "인적청산", "불가능", "탈당"이 적혀있었는데 결국 새누리당의 분당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12월 21일 김무성 유승민 등 비주류 의원 35명 탈당 결의, 12월 27일 분당을 선언했다.
4.4.1. 최순실 관련 폭탄발언
10월 27일 "새누리당 의원들 중 최순실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몰랐다고 하면 거짓말"이라는 폭탄 발언을 터뜨렸다. 언뜻 보기엔 새누리당의 거물급 대선주자인데 뜬금없는 자폭으로 보일 만하다. 썰전에서 유시민은 이것을 듣고, '김무성은 새누리당 끌어안고 투신하는 논개인가?'라고 말했다.하지만 해당 폭로는 정치적 이득을 계산한 진실 폭로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해당 주장에 따르면 20대 총선에서 친박은 대부분 여당 텃밭인 영남 지역 위주로 공천을 받아서 매우 쉽게 국회로 들어갔는데, 비박은 새누리당 지지율이 낮은 지역을 공천받거나, 아예 공천 받는 것조차도 철저히 막힐 만큼 기세가 크게 꺾였다. 결국 이러한 친박 패권주의의 만행으로 지지층들의 실망과 분노를 산 나머지 새누리당은 야당들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20대 총선에서 참패했는데, 그 후로도 친박들의 기세는 꺾이질 않고, 총선 참패 이후 전당대회에서조차 새로 당대표로 뽑힌 사람은 박근혜의 남자라고 불리는 이정현이였다. 이 남자는 총선 이후 활동폭이 좁아진 서청원, 최경환의 뒤를 이어 현재 친박계 좌장이다. 때문에 이번에 터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김무성 본인에게 방해거리인 박근혜와 친박을 싸잡아서 공격할 기회(지지율 폭락)와 정당한 명분[27] 둘다가 온것.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때문에 앞으로 친박계는 국민의 지지는 끝났으며, 예정대로 친박계가 지지를 잃는다면 그 반사이익을 비박계의 좌장인 본인이 얻는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새누리당에게 대형 사고지만, 본인으로서는 친박 패권주의를 잠재우고, 영향력을 되찾을 기회다. 그래서 친박을 공격했다. 그리고 이 폭탄 발언은 제대로 터졌는데, 궁지에 몰려서 최순실을 잘 몰랐다고 변명하던 친박들의 정치적 퇴로를 완벽히 차단해버렸다. 실제로 김무성이 진실을 폭로한 뒤부터, 새누리당과 친박에서도 폭로를 시인하는 분위기가 강세다.
이후 김무성은 '"그래도 대통령은 구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국정 능력은 잃었지만, 자리라도 지켜주자는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그 해 11월 12일 광화문에서 열린 주최 측 추산 100만 명이 촛불을 들고 광화문 앞에 모인 바람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바로 다음날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의 이름으로 탄핵의 길로 가야 한다고 본다?"라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러한 폭탄 발언으로 김무성을 비롯한 비박계가 온전히 이익을 본다는 보장은 없다. 애초에 비박 의원 상당수가 원래는 친박이었고, 비박/친박 구분부터가 매우 불분명하다. 실제로는 '박근혜와 얼마나 가까운가'가 이를 구분하는 절대적인 잣대다. 한 예로 김무성처럼 비박계 대표로 꼽히는 유승민은 오랫동안 박근혜 비서실장 역할을 하였다. 김무성 본인도 한동안 친박이었다가, 원내대표 문제와[28] 세종시 수정안 문제 때문에 갈라섰다. 따라서 '그럼 김무성/비박계 의원들은 그동안 뭐했냐'라는 반박도 얼마든지 나오므로, '어디까지나 김무성이 자폭했을 뿐'이라는 의견도 팽팽하다. 단지 김무성으로서는 이 정도는 감수해야 친박에 대한 공격이 가능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4.4.2. 박근혜 대통령 탈당 요구 기자회견
2016년 11월 7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대통령의 잘못과 책임을 추궁하며 박근혜 대통령 개인의 새누리당 전격탈당을 요구하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아래는 기자회견 전문.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박근혜 정권의 탄생 과정에 일익을 담당했고, 1년 9개월 동안 새누리당 대표를 지냈습니다.
박근혜 정권이자 새누리당 정권이 이렇게 국민들에게 참담한 실망을 안겨드린 것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자괴감과 책임감,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저의 온 마음을 다해 엎드려 사죄드립니다.
헌법의 최종 수호자인 대통령이 헌법을 훼손하며 국정을 운영했습니다. 국민이 위임한 대통령직이라는 공적 권력이 최순실 일가가 국정을 농단하고 부당한 사익을 추구하는 데 사용됐습니다. 새누리당의 책임있는 위치에 있던 사람으로서 대통령의 헌법 위반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무슨 말로도 변명할 수 없는 참담함을 느낍니다.
저는 보수를 대표하는 보수정당의 일원으로서 지난 19대 총선 당시 이미 사당화된 정당 권력으로부터 부당하게 공천을 받지 못했지만 보수정권의 재창출을 위해 백의종군했습니다. 지난 대선을 승리로 이끈 후 어떤 임명직도 맡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실천했습니다.
지난 2014년 국민과 당원의 지지 속에 당 대표로 선출된 이후 정당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했고, 정치개혁을 위해 국민공천제라는 공천혁명을 이루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청와대와 당내 패권세력의 발호와 농단으로 정당민주주의를 위한 정치개혁은 유린당했습니다,
저는 대통령 중심제에서 집권 여당의 대표가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과 각을 세우고 대립해서 정국을 불안하게 만들면 안 된다는 일관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대통령과 청와대에 ‘노’라고 얘기했지만, 패권세력에 의해 좌절했고 말할 수 없는 수모도 겪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원칙과 규범, 민주정치의 핵심 가치들이 훼손되는 상황을 막지 못했던 것에 대해 막중한 책임을 느낍니다.
현 정국 상황은 국정 마비를 넘어 국정 붕괴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대통령직 수행을 인정하지 고 분노하면서도, 한편으로 국정 표류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헌법 가치를 위반한 대통령은 탄핵의 길로 가는 것이 헌법정신이나, 국가적으로 너무나 큰 충격이고 국가의 불행이자 국민의 불행으로 이어질수 있습니다.
그런 만큼, 국민과 여야가 정치적으로 합의하여 거국중립내각으로 국정의 공백을 최소화하는 것이 현 상황에서 가장 좋은 대안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국민의 신뢰를 받는 ‘국정의 구심체’를 만들어야하기 때문입니다.
리더십은 신뢰입니다. 국민의 믿음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국가 리더십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저는 국정이 표류하는 현 상황을 타개하고 국가리더십을 복원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조치가 필요하다는 점을 말씀 드립니다.
국정 표류의 시발점이 된 대통령께서는 국민에 대한 도리, 지지층에 대한 도리, 당에 대한 도리를 지켜야 합니다. 국민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내려 놓고 무너진 국격과 국민의 자긍심을 살리기 위해 국민의 목소리를 따라야 합니다.
대통령께서는 대다수의 국민과 정치권 모두가 요구하는 거국중립내각 구성을 즉각 수용하고 총리 추천권을 국회로 넘겨야 합니다. 이를 위해 야당에서 이미 전면 거부하는 김병준 총리 지명을 철회해야 합니다.
대통령께서는 당의 제 1호 당원으로서 ‘선당후사’의 정신으로 당을 살려야한다는 책임의식을 갖고 당적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당의 지지기반인 보수의 궤멸을 막아야 합니다. 저도 다시 한 번 백의종군의 자세로 엄중한 국가적 위기의 극복을 위해 온 마음을 다해 헌신하겠습니다.
여야 정치인 여러분, 우리는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의 구성원으로서 오로지 국민의 뜻에 따라 행동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엄중한 국가적 위기에서 정파적 이익이나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어떠한 행위도 국민에게 용납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만큼, 국 모든 것을 논의하고, 지금의 국정 표류사태를 하루빨리 종식하는 데 모두 합심해 노력해 주실 것을 간절히 호소 드립니다.
저는 박근혜 정권의 탄생 과정에 일익을 담당했고, 1년 9개월 동안 새누리당 대표를 지냈습니다.
박근혜 정권이자 새누리당 정권이 이렇게 국민들에게 참담한 실망을 안겨드린 것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자괴감과 책임감,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저의 온 마음을 다해 엎드려 사죄드립니다.
헌법의 최종 수호자인 대통령이 헌법을 훼손하며 국정을 운영했습니다. 국민이 위임한 대통령직이라는 공적 권력이 최순실 일가가 국정을 농단하고 부당한 사익을 추구하는 데 사용됐습니다. 새누리당의 책임있는 위치에 있던 사람으로서 대통령의 헌법 위반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무슨 말로도 변명할 수 없는 참담함을 느낍니다.
저는 보수를 대표하는 보수정당의 일원으로서 지난 19대 총선 당시 이미 사당화된 정당 권력으로부터 부당하게 공천을 받지 못했지만 보수정권의 재창출을 위해 백의종군했습니다. 지난 대선을 승리로 이끈 후 어떤 임명직도 맡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실천했습니다.
지난 2014년 국민과 당원의 지지 속에 당 대표로 선출된 이후 정당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했고, 정치개혁을 위해 국민공천제라는 공천혁명을 이루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청와대와 당내 패권세력의 발호와 농단으로 정당민주주의를 위한 정치개혁은 유린당했습니다,
저는 대통령 중심제에서 집권 여당의 대표가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과 각을 세우고 대립해서 정국을 불안하게 만들면 안 된다는 일관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대통령과 청와대에 ‘노’라고 얘기했지만, 패권세력에 의해 좌절했고 말할 수 없는 수모도 겪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원칙과 규범, 민주정치의 핵심 가치들이 훼손되는 상황을 막지 못했던 것에 대해 막중한 책임을 느낍니다.
현 정국 상황은 국정 마비를 넘어 국정 붕괴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대통령직 수행을 인정하지 고 분노하면서도, 한편으로 국정 표류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헌법 가치를 위반한 대통령은 탄핵의 길로 가는 것이 헌법정신이나, 국가적으로 너무나 큰 충격이고 국가의 불행이자 국민의 불행으로 이어질수 있습니다.
그런 만큼, 국민과 여야가 정치적으로 합의하여 거국중립내각으로 국정의 공백을 최소화하는 것이 현 상황에서 가장 좋은 대안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국민의 신뢰를 받는 ‘국정의 구심체’를 만들어야하기 때문입니다.
리더십은 신뢰입니다. 국민의 믿음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국가 리더십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저는 국정이 표류하는 현 상황을 타개하고 국가리더십을 복원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조치가 필요하다는 점을 말씀 드립니다.
국정 표류의 시발점이 된 대통령께서는 국민에 대한 도리, 지지층에 대한 도리, 당에 대한 도리를 지켜야 합니다. 국민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내려 놓고 무너진 국격과 국민의 자긍심을 살리기 위해 국민의 목소리를 따라야 합니다.
대통령께서는 대다수의 국민과 정치권 모두가 요구하는 거국중립내각 구성을 즉각 수용하고 총리 추천권을 국회로 넘겨야 합니다. 이를 위해 야당에서 이미 전면 거부하는 김병준 총리 지명을 철회해야 합니다.
대통령께서는 당의 제 1호 당원으로서 ‘선당후사’의 정신으로 당을 살려야한다는 책임의식을 갖고 당적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당의 지지기반인 보수의 궤멸을 막아야 합니다. 저도 다시 한 번 백의종군의 자세로 엄중한 국가적 위기의 극복을 위해 온 마음을 다해 헌신하겠습니다.
여야 정치인 여러분, 우리는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의 구성원으로서 오로지 국민의 뜻에 따라 행동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엄중한 국가적 위기에서 정파적 이익이나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어떠한 행위도 국민에게 용납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만큼, 국 모든 것을 논의하고, 지금의 국정 표류사태를 하루빨리 종식하는 데 모두 합심해 노력해 주실 것을 간절히 호소 드립니다.
요약하자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본인의 대국민 사과문임과 동시에 본인 또한 사당화된 정치권력이 된 친박세력에 의한 피해자임을 호소하고 있다. 이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해 명확하게 대통령의 책임이 있음을 지적하며 박근혜 대통령은 분명히 헌법을 어긴 것이며, 탄핵이 거론될 정도로 심각한 과오를 저질렀음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이후 탄핵이란 강한 후유증과 부작용을 남기기에[29] 탄핵에 대해선 반대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며 보수층의 분열을 막기 위해서라도 대통령이 당에서 탈퇴하는등의 책임을 질 것과 야당측의 의견을 수용할 것을 촉구하며 야당 또한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고 여당과 정부에 협조해 줄 것을 언급하며 마치고 있다.
이후 친박계의 좌장인 최경환과 회담을 통해 조기 전당대회를 통한 새 지도부 구성이 아닌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를 선언했다.
4.4.3. 대선 불출마와 탄핵 추진 선언
하지만 탄핵을 반대하는 입장은 6일만에 바뀌었다. 김무성은 2016년 11월 23일 본인의 차기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발표하며 박근혜 대통령 탄핵및 개헌 추진을 단행하겠다고 선언하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저는 오늘 제 정치 인생의 마지막이었던 대선출마의 꿈을 접고자 합니다. 정식출마 선언을 하지 않았지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권고했고, 저 역시 그간 많은 고민과 준비를 해왔습니다. 이제 이것을 내려놓고자 합니다.
박근혜 정부 출범을 담당했던 사람으로서, 새누리당의 직전 당 대표로서 지금의 국가적 혼란사태에 대해서 책임을 통감하기 때문입니다.
정치는 책임을 질때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저부터 책임지고 내려놓겠습니다. 앞으로 국가적 위기수습을 위해 무너져내린 헌정질서를 복원시켜내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비록 박근혜 대통령은 실패했지만, 이것이 위대한 대한민국의 실패로 이어지지 않도록 제 모든것을 다 바치겠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으로 인해 초래된 보수의 위기가 보수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것을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보수의 썩은 환부를 도려내고 합리적인 보수 재탄생의 밀알이 되고자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양극단의 정치를 배제하고 민주적 협치를 만드는 데 앞장서고자 합니다.
박근혜 정부 출범을 담당했던 사람으로서, 새누리당의 직전 당 대표로서 지금의 국가적 혼란사태에 대해서 책임을 통감하기 때문입니다.
정치는 책임을 질때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저부터 책임지고 내려놓겠습니다. 앞으로 국가적 위기수습을 위해 무너져내린 헌정질서를 복원시켜내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비록 박근혜 대통령은 실패했지만, 이것이 위대한 대한민국의 실패로 이어지지 않도록 제 모든것을 다 바치겠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으로 인해 초래된 보수의 위기가 보수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것을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보수의 썩은 환부를 도려내고 합리적인 보수 재탄생의 밀알이 되고자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양극단의 정치를 배제하고 민주적 협치를 만드는 데 앞장서고자 합니다.
이후 탄핵 발의에는 "개인뿐 아니라 (당)비상시국회의에서 탄핵을 발의하기로 결정 했다고 언급하고, ‘대선 불출마 선언과 개헌이 연관성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를 끝으로 다시는 국민들에게 이런 괴로움을 끼치지 말아야 한다”면서 “그 문제의 해결은 개헌이라고 생각한다. 개헌도 동시에 추진하려고 한다”고 개헌을 동시 추진하는 이유여부도 밝혔다.
이후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을 배신했다. 헌법을 위반한 대통령은 탄핵을 받아야 한다"면서 "야당이 탄핵에 대해서 갖가지 잔머리를 굴리면서 주저하고 있다"고 야당을 비판했다.
비록 총선 참패의 직격탄으로 아우성은 많이 잃었지만, 새누리당 내부에선 대권주자의 위치는 공고했기 때문에 이정현 등을 비롯한 당 내부의 반응은 그야말로 충공깽. 이로서 새누리당의 대권주자는 사실상 반기문과 유승민으로 좁혀졌으며,(탈당한 남경필은 제외) 불출마의 반등으로 유승민의 테마주가 오르는 현상도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대선 탄핵 추진 선언이 무색하게 12월 3일 기준으로 대통령이 퇴진 약속만 해준다면 여야 협상 결과에 관계없이 탄핵에 불참한다는 입장으로 바뀌었으나...당일 헌정 사상 최대 집회가 벌어지며 유승민을 중심으로 한 비박계 의원 40명이 대통령입장과 상관없이 탄핵에 찬성한다[30]는 입장을 발표해 제대로 엿을 먹었다(...).
4.5. 새누리당 탈당
2016년 12월 13일에는 "새누리당을 떠나 신당을 창당할 계획이 있다"는 발언을 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새누리당 재산 얼마인가 우리가 알아보진 않았지만 이 또한 과거 전두환 독재정권 시절에[31] 재벌들을 등쳐서 형성한 재산이라는 점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국가에 다 헌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 발언. 비박계가 새누리당 재산 때문에 새누리당을 나가지 못한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보이지만, 가만히 뜯어보면 이건 대한민국의 유일한 보수정당으로서 한나라당-새누리당으로 이어지는 보수정당 계보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발언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말은 보수정당 지지자들에게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다만 김무성이 민정당 출신이 아니라 상도동계 출신임을 생각한다면 김무성이 이런 발언을 한 것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니긴 하다.
그리고 2017년을 맞은 뒤 김무성은 탈당파들과 힘을 모아 바른정당 창당에 참여하며 새누리당과의 연을 모두 끊었다. 이후에도 새누리당을 '불임정당'으로 표현하는 등 적극적 공세를 펼치는 것은 물론 차별화에 힘쓰는 모습을 보였다.
4.6. 제19대 대통령 선거
바른정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남경필을 지지하였다. 유승민이 후보로 결정되자 선거대책위원장직을 수락하였다.한편 보수단일화를 촉구한다는 명목으로 5월 초 13명의 바른정당 의원들이 대거 탈당했는데, 이들이 김성태 의원을 비롯해 김무성계로 분류되는 의원들이라 이들의 배후에 김무성이 있는거 아니냐는 추측이 나온다. 정작 김무성은 탈당파와 다소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결과적으로 유승민계 사이에 김무성이 고립된(...) 상황에 처했다. 거기에 자기 지역구인 영도에서는 대놓고 문재인이 홍준표를 제압하면서(영도에서의 격차만으로 부산에서 홍준표가 이긴 3구 전체의 격차를 메꾸고도 남는다) 3년 뒤 총선 걱정을 해야하는 건 덤.
4.7. 문재인 정부 시기
4.7.1. 바른정당 탈당과 자유한국당 복당
- 2017년 5월 17일 10시 김무성은 일본으로 출국한다. 수행원도 가족도 없이 혼자 떠났는데 일본으로 떠난 이유는 휴식을 취해서라고 추정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 5월 23일 오후 김무성은 일본에서 귀국한다. 이날 인터뷰는 평이하게 새 정부와의 협치추구와 박근혜를 사례로 들며 분권형 개헌 등을 말했는데, 문제는 김무성 의원이 수행원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자신의 여행가방을 던져서 받게하는 장면이 논란이 되었다. 국회의원이라는 사람이 아무리 자신의 수행원이라도 상당히 예의없이 여행가방을 던지는 장면에 그간 있었던 인성 논란이 재점화되고 있다.영상
- 8월 후반기에는 자유한국당 정진석 의원과 함께 '열린 토론, 미래'를 발족하고 야당 의원들의 참여를 촉구했다. 8월 30일에 원자력발전소 건을 주제삼아 1차 토론회를 진행하기로 했고, 문재인 정부를 저격, 비판하는 내용이 될 예정이다. (#) 때문에 언론들 사이에서 바른정당과 자유한국당이 다시 통합하는 게 아니냐는 해석도 나왔고, 반대로 바른정당 최고의원인 하태경은 자유한국당 지지자들의 성향을 이유로 '홍준표 체제에 대한 자유한국당 분열 가능성'을 암시하는 신호라고 주장했다. (#)
- 2017년 11월 6일, 자신을 포함한 바른정당 소속 9명의 의원과 함께 자유한국당에 복귀했다. 앞으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와 협력해 친박 청산에 힘쓸것으로 보인다.[32]
- 복당 이 후 홍준표 대표와 경쟁 구도가 생길 것으로 예상된 적도 있으니 김영철 방남 저지 집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 외에는 생각만큼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지내고 있으며 이 때문에 조용히 정계은퇴를 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거나 아예 정치 은퇴 수순을 밟게 되는 자리인 차기 국회의장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었으나...
4.7.2. 2018년
6월 3일 부산 서면에서 열린 유세 현장에서 자신을 중심으로 보수 세력의 재건 및 통합에 노력할 것이라고 발언했다.그러나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이 처참한 대패를 기록[33]함과 더불어 김무성의 영역이라 여겨졌던 부산을 죄다 더불어민주당에게 먹히다시피하면서 힘을 잃어버렸고, 여기에 극우 세력들로부터는 일명 옥새런 사건으로 보수 세력의 분열을 부추켜 지금의 상황에 이르게 만든 최대의 대역죄인으로 낙인찍혔다. 지방선거 이후 홍준표를 대신해 당권에 도전하는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지만, 이래저래 사면초가의 상황.
결국 2018년 6월 15일, "보수당의 재건을 위해 헌신하겠다"며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2018년 12월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석방을 주장하였다.
2018년 12월. 내년 자유한국당 2.27 전당대회에 출마할 것이란 관측이 있었지만 "전대는 분열된 당 화합·통합 계기돼야"한다며 불출마 선언을 했다.#
2018년 12월 자유한국당 조직강화특별위원회가 김무성 의원이 조강특위 심사 이전까지 맡고 있던 중ㆍ영도 지역구의 당협위원장직을 되돌려 주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같은 날 홍문종, 원유철, 윤상현, 정종섭, 곽상도 같은 친박의원들과 이종구, 황영철, 권성동, 김용태, 이은재 같은 복당파 의원들도 당협위원장직을 되돌려 받지 못 할 것이라는 심사 결과가 나왔다. 사실상 논란거리를 계속해서 만드는 친박과 복당파를 골고루 정리하겠다는 비대위의 뜻으로 보인다. 다만 김 전 대표는, 이미 6월에 21대 총선에 나오지 않겠다고 선언을 해서 당협위원장직을 박탈해도 큰 상관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4.7.3. 2019년
2019년 4월 23일 김무성은 "정부와 대통령이 앞장서 반일 감정으로 국민을 편가르기해 한일관계를 악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미련하고 바보멍청이 짓"이라며 정부의 대일정책을 비판했다.#2019년 5월 3일 4대강 보 해체 강행하는 반대집회에서 “4대강 보 해체를 위한 다이너마이트를 빼앗아서 문재인 청와대를 폭파하자”고 말해 논란에 휩싸였다. 이 발언 이후 즉각 내란 죄로 김무성을 처벌하라는 국민청원이 친문 성향 네티즌들을 중심으로 수만 명의 동의를 얻기도 했다.
이후 공개적인 활동이 드문드문해지면서 서서히 정계은퇴 절차를 밟는 듯 하였지만 최근 서울 용산에 출마설이 도는 등 아직까진 정치활동을 계속하려는 의지를 보이는 듯 하다.#[34] 다만 과거 보수의 거물 시절만큼 활동이 크지 않다.
4.7.4. 2020년
2020년 2월 2일, 난데 없이 한국당 공관위로부터 김무성 전 대표를 광주광역시로 공천하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다.# 중진인 김무성을 험지인 광주에 공천해서 당 안팍의 분위기를 쇄신하자는 것. 이런 말이 나온 배경에는 김무성의 선친이 광주에 있는 전남방직의 창업주 김용주 전 회장이고 장수군에 집안의 선산이 있는 등 영남 중진치고는 호남과도 인연이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김무성 본인 역시 "야권 통합이 이뤄지면 광주·여수 어느 곳이든 당이 요구하는 곳에 출마하겠다”라고 발언했다.그러나 황교안 대표가 '1회성으로 쓰고 그만두는 이런 배치는 적절하지 않다'라며 반대해서 결국 호남 출마는 이뤄지지 않았다. 하술된 김웅과의 인터뷰를 보면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 진심으로 부딪혀볼 생각이 있었던듯 하다. 물론 김부겸이나 이정현마냥 지역구에 공을 들인 것도 아닌 첫 번째 출마로 당선은 불가능에 가까웠겠지만 김무성 집안의 선산이 전북 장수군에 있어서 호남에 아예 연고가 없는것도 아니고 김무성 정도의 거물이 출마했다면 15% 이상의 의미있는 지지율이나 득표율은 가능했을 수도 있고 미래통합당에게 더하기 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다. 김무성 개인의 입장에서도 정치인생 말년에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 희생하는 인상을 통해 각종 논란에 의해 쌓인 부정적 인상을 상당부분 만회할 수 있었을 것이다.
21대 총선에서 미래통합당이 역대급 패배를 당한 이후 비박계 의원들을 집단으로 불러모아 집단 회식을 거행했다. 강석호, 이종구, 여상규, 홍일표, 김성태, 안상수, 박인숙, 장제원, 김종석, 권성동, 이은재, 김을동이 참석했다. 지금까지 했던 정치적 은거를 깨고 본격적으로 정치 행보를 시작하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2020년 4월 30일에는 한국일보에서 김웅 송파 갑 당선인[35]과 함께 인터뷰를 했는데, 21대 총선의 패배 원인은 민심을 읽지 못하고 진영논리를 내새우다 패배한 것으로 보았고, 제3의 길을 강조하면서 당 또한 젊은 인물들, 민심이 충분히 공감할만한 인물로 전부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
2020년 5월 7일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과 관련해 여야가 진상 규명 및 피해자 보상 입법(과거사법 개정안)을 제20대 국회에서 처리하도록 합의했는데, 이 과정에서 김무성 의원이 적극적으로 중재를 했다고 한다. 국회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피해자 최승우 씨와 즉석으로 면담을 요청했고, 야당 측 인사들과 접촉해 중재에 나섰다. 이후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의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측 간사와 이채익 미래통합당 측 간사가 "조속한 시일 내 과거사법 수정안을 마련하고 본회의를 열어 처리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힌 뒤, 피해자는 고공농성을 끝내고 김무성 의원과 포옹했다. # # #
5월 11일 올라온 위 김웅 당선자와 함께한 후속 영상에서는 극우 유튜버들을 대차게 까며 이들과 싸울 것이라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5월 20일, 결국 과거사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자, 최승우 씨는 김무성을 향해 큰절을 했다. #
9월부터는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 부산광역시장 후보로 언급되고 있다.[36]
10월 들어서 스스로를 킹메이커로 자부했던 김무성의 마포포럼 활동이 본격적으로 가시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호남계 정치인으로 DJ의 측근이었던 장성민 전 의원을 시작으로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을 연사로 초청하였다.[37] 이외에도 마포포럼은 다음 강연자로 원희룡 지사, 오세훈 전 서울시장을 섭외한 상태이고 그 다음 강연자론 유승민 전 바른미래당 대표를 세우기 위해 일정 조율에 들어갔으며 이후 홍준표 의원,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와도 강연 일정을 잡아내겠다고 다짐했다.
12월 안철수 대표의 서울시장 출마에 공헌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4.7.5. 2021년
3월, 야권 서울시장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야권 단일화 촉구를 명분으로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 사퇴를 요구하며 강하게 충돌하였다.1 2 이때문에 3월 24일,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김무성 전 대표를 비롯해 4명을 직접 거명하며 "그런 사람들이 당을 맡아왔으니 당이 오늘날 이 꼴이 됐다"고 비판하기도 했다.3그러나 단일화 여론조사 결과, 오세훈 후보가 안철수 후보를 이겨 보수야권 단일 후보가 되었고, 본 선거에서도 민주당 박영선 전 중기부장관에게 압승을 거두고 당선되면서 안철수를 지지했던 김무성과 친무계는 도리어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는 결과가 되었다.
4.7.6. 2022년
포항 가짜 수산업자 사기 사건 연루로 정치적 행보가 전무했다. 그러다가 윤석열 인수위가 가동되자 갑자기 윤핵관은 인수위까지만 역할 해야 한다며 오랜만에 목소리를 냈다.친이계와 우호적인 관계인 친무계의 보스답게, 2022년 1월 24일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 석방을 촉구하기 위한 전직 국회의원들의 성명서에 이름을 올렸다. #
4.8. 윤석열 정부 시기
4.8.1. 2022년
2022년 8월 18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으로 내정되었다.# 그러나 내정 철회 가능성이 언급되고 결국 김 전 의원 본인이 고사하였다.4.8.2. 2023년
보수정당 원로 정치인들의 모임인 마포포럼의 회장을 맡고 있는데 2023년 초 열린 국민의힘 제3차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권주자들이 거의 빠짐없이 이 마포포럼에 참석해 당 원로들과 토론회와 간담회를 여는 행보를 보여주며 회장인 김무성도 덩달아 언론에 얼굴을 가끔 비추고 있다.###22대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 복귀 여론이 조심스럽게 형성됐지만 본인이 스스로 "여의도 정치 일선으로 돌아갈 뜻이 없다. 마포포럼에서 나오는 얘기를 대통령실과 당에 전달하면서 후방 지원하는 역할에만 충실하겠다"고 출마하지 않으려는듯 말하였다.
4.8.3. 2024년
2023년의 발언들이 무색하게 총선이 다가오자 출마를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1월 16일,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7선 도전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며 정계에 복귀했다. #그러나 2월 15일, 도전 선언 한달만에 불출마를 선언했다. "부산 중·영도구에 등록한 후보들을 한 달간 지켜보니 모두 훌륭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되어 이제 제 역할이 끝났다고 판단했다. 당의 승리를 위해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겠다", "한 달간 열심히 선거운동을 해 오던 중 공관위에서 시스템 공천을 정착시켜 잘 진행이 되고 있는 모습에 큰 보람을 느낀다"면서 당 내 공천 흐름에 화답차원에서 공천 신청을 철회한 것이다. #
정계에서 은퇴한 지 오래된 2024년 12월 15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으로 당의 존립에 위기를 맞은 국민의힘 친윤계에서 김무성 전 의원을 차기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그러나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해당 소식은 가짜라며 부인했다.#
[1] 이끌고 나간다는 표현때문에 사진에서 실제로 이끌고 나가는 마스크 쓴 사람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사람이 아니다. 김무성은 마스크를 안 쓰고 있는 사람이다. 김영삼 바로 옆에 마스크 쓴 사람이 아니고 뒤쪽에서 뛰고 있는 모습의 조금 작게 나온 검은 양복 남성이 김무성이다.[2] 실제 언론에서도 막내라고 많이들 표현하지만, 사실 이성헌이나 김영춘 같이 김무성보다 나이가 적으면서 상도동계에 더 늦게 합류한 경우도 있었다. 김영춘은 이후 2003년 열린우리당 입당을 통해 민주당계 정당으로 아예 진영이 넘어가긴 하지만.... 그러나 상도동계 핵심 인물 기준으로 본다면 김무성이 막내가 맞긴 하다.[3] 이후 민주자유당 전국구 의원들의 사퇴와 탈당 등으로 낙선한 민주자유당 전국구 후보가 승계 권한을 가지게 되었고 그 규모가 큰 나머지 마지막 순위인 53번 후보까지 의원직을 승계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결국에는 빠져나간 인원이 남은 후보자보다 많아지고 그만큼 의원 정수가 감소하는 사태까지 발생하나 김무성은 그 이전에 입각을 위한 탈당으로 인하여 승계 자격이 사라져 원내 입성을 다음 총선으로 미루게 된다.[4] 17대 대선 당시 김무성이 속한 상도동계 대다수는 이명박을 지지했고, 상도동계의 수장인 YS도 이명박을 공개 지지했다. 후문에 따르면 YS가 상도동계 인사들을 자택으로 불러 가진 식사 자리에서 YS가 이명박에게 힘을 모아줄 것을 간접적으로 부탁했는데, 김무성은 이번에는 그 사람(박근혜)을 대통령 만들어야겠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만큼 박근혜에 대한 충심이 상당했다는 의미.[5] 박근혜는 당원 투표에서 모두 1위를 했지만, ARS와 여론조사에서 MB에게 패배해 최종 2위로 밀려났다. 이 때문에 경선 결과에 대한 논란이 당내에서 거세게 불었으며, 일부 지지자들은 경선 불복을 고수하며 이명박의 선거운동 기간 내내 박근혜의 탈당이나 후보 교체를 주장하기도 했다. 물론 박근혜가 경선에 조건 없이 승복하고, 이 후 대선 기간동안 조용한 상태로 지냈기 때문에 당 내에 엄청난 혼란은 일어나지 않았다.[6] 박근혜는 김무성과의 관계를 상하가 명확한 충성관계로 생각한 반면에, 김무성은 나이도 김무성이 위이고(물론 박근혜가 빠른 생일이어서 학번은 같다.) 둘 사이를 수평적인 동지 내지는 협력 관계로 생각했기 때문에 상당한 괴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갈등이 촉발된 것이 원내대표 파동. 당시 한나라당 친이계에서 홍준표 원내대표의 임기가 끝나갈 무렵에 김무성에게 원내대표를 제의했는데, 김무성 측에서는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정작 박근혜 측에서는 친박좌장이니 거절하기를 바랐다. 결국 두 사람이 갈라선 계기가 되었다. 거기에 결정타로 얼마 지나지 않은 2009년 하반기 세종시 수정안을 놓고 원안 고수 입장을 밝힌 박근혜와 달리 김무성은 수정안을 지지하며 김무성과 박근혜는 완전히 갈라서게 된다. 동아일보에서 소개한 한 일화[7] 후임자는 한나라당 박종근 의원[8] 물론 며칠 뒤 비판이 일자 사과하긴 했다. 사실 노무현에 대한 스텐스나 태도는 김무성 뿐 아니라 상도동계 인사들 대다수가 비슷했다.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 때 넘어간 김영춘 정도만 제외하면… 심지어 수장인 YS도 “평가가치 없다” 고 딱 잘라 말하는 등 노무현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이는 노무현이 자신의 정치 성향과 반대되는 인물이기도 해서이지만, 노무현이 3당 합당 당시 자신의 곁을 떠나 라이벌인 DJ의 세력으로 들어가 자신을 비판한 것에 대한 앙금이 두고두고 남아서이기도 했다.[9] 비록 김영삼의 임기 말 상황이 나빴다고는 해도 부산에서 김영삼이 가지던 입지는 상당한 수준이었다.[10] 반면 김무성과 똑같이 비박으로 전환한 유승민은 당시만 해도 완전히 계파를 떠나기 전이었기 때문에 공천을 받을 수 있었고, 대구 동구 을에서 당선되었다.[11] 심지어 이후에는 친박 핵심이 된 윤창중조차도 자신이 연재하는 '윤창중의 칼럼세상'에 역시 김무성, 박근혜 밟고 싸워라! 쌍포 돌격! 이라는 제목으로 김무성을 찬양하는 글을 썼다. 물론 전반적인 맥락은 당시 김무성의 활약을 치켜세우며 박근혜 당선을 위해 직언도 하면서 악역도 마다하지 말아달라는 내용이긴 하다. 다만 돌아온 김무성, 여전히 체통을 중시하는 '여자 박근혜'의 팔을 남자의 뚝심과 완력으로 꺾어 일을 저질러야 한다. 라는 대목이나 박근혜가 하자는대로 따라가면 틀림없이 진다. 라는 구절, 김무성이 박근혜를 밟고 넘어서서 일을 저질러야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 수 있다! 같은 문장은 박근혜를 깎아내리는 표현으로 해석될 여지가 크다. # 후보는 연기만 해라[12] 새누리당 당헌 당규상 최고위원들이 과반 이상 사퇴할 경우 대표 최고위원도 함께 물러나야 한다. 그렇게 되면 새누리당은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려 당을 이끌도록 하고 있다. 이때 김무성 대표를 제외한 최고위원들 모두가 친박계(서청원, 원유철, 이정현, 안대희)이거나 박근혜 대통령에게 대놓고 대립각을 세울 만큼 비박 성향이 뚜렷했던 사람들(이인제, 김태호, 김을동)은 아니었기 때문에 청와대의 지시만 떨어지면 언제든 김무성 지도부는 해체될 수 있을 거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그렇게 될 경우 비상대책위원장직에 친박계 좌장으로 꼽히는 최경환 경제부총리를 앉힐 거라고 예상했다.[13]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가족력 하나만으로도 박근혜의 당 장악력은 보장된다.[14] 현대건설 사장, 서울시장 재직 시절 쌓아놓은 대중적 인지도가 확고해서, 이를 바탕으로 2007년 대선 경선에서 박근혜를 누를 수 있었다.[15] 상도동계의 라이벌이었던 동교동계는 참여정부 이후에 힘을 많이 잃은 상태지만, 김무성, 노무현을 비롯한 상도동계 출신들도 2000년대 들어서 독자적인 노선으로 갈라졌고, 사실상은 국민의정부 끝 무렵에 양김 시대는 끝났다고 보고 있다. 동교동계, 상도동계 모두 목적이었던 민주주의를 달성한 후 각자의 길을 찾아 새누리당 혹은 민주당계로 들어감으로써 양김 시대는 그들의 임기와 동시에 끝난 셈.[16] 물론 친박계라고 해서 다 이한구를 마음에 들어한 것이 아닌지라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는 심하게 고집이 세고 꼬장을 부리던 이한구 공관위원장을 껄끄러워 했을 정도. 최경환은 친박계 중진이지만, 이명박 정부에서는 나름 친박계 중에서도 친이계와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라 평가받아 입각한 이력도 있었다.[17] 이에 대해 전원책 변호사는 도대체 투표로 뽑히지도 않은 공천관리위원장이 무슨 자격으로 당원들의 투표로 뽑힌 당대표를 심사하냐며 당내 민주주의를 철저히 기만하는 행위라고 노발대발하기도 했다.[18] 이는 썰전 특별편 이준석 전 새누리당 비대위원의 발언을 통해 밝혀지는데, 이준석 당시 후보 지원 유세 중 동석했던 비례대표 후보들의 얼굴과 이름조차 몰라볼 정도였다고 한다. 게다가 자신이 영입한 1호 인재도 총선에 나오지도 못 했으니.[19] 공표는 135석 내부에서는 125석.[20] 2013년 재보선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맞붙었을 때에는 김무성 후보가 65.2%, 김비오 후보가 22.3%로 크나큰 격차가 났었다.[21] 특히 김무성의 원 지역구인 부산 남구 을에서도 현직 의원인 서용교가 박살났다.[22] 당시 야권 연대를 경계하던 새누리당 측은 야권 연대를 거부하던 안철수 후보 측을 선거기간 내내 치켜세우는 전략을 취하고 있었다. 베를루스코니는 후보 이름을 잘못 전달받아 말실수를 했다. 안철수를 찍어 달라고 하려던 이 의원에 더 가깝다. 물론 다수는 빡센 유세 스케줄 때문에 컨디션 난조 속에서 그런 말실수를 한 거라고 보고 있다. 실제로 썰전 166화에서 김광진 의원과 함께 출연하였을때 김광진 의원도 김무성 의원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이준석 측은 속에서 천불이 날 일.(...)[23] 그것도 아슬아슬하게 진 것이 아니라 62.3% VS 37.7%라는 현격한 차이로 패했다. 제대로 관광을 당한 셈. 수성구 갑 선거구는 대구의 부촌 중 하나인 범어동이 있는 구역이다. 그렇지 않아도 서울에서는 부촌인 강남구와 송파구에서 제대로 털렸는데, 수성구에서도 제대로 털렸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다만 수성구는 부자 동네라서 그런지 유연한 선택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친노 인사인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도 무소속으로 30% 정도의 득표율을 기록한 적도 있었다. 그것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인기가 바닥을 찍었던 18대 총선에서 말이다. 그래서인지 2018년 지방선거 때 더불어민주당이 대구광역시장 선거 및 수성구청장 선거 때 나름 기대하기도 했으나, 두 곳은 자유한국당에 모두 털렸다.(그래도 임대윤은 나름 선전한 편이다)[24] 또한 정몽준 前 대표가 20년동안 사수했던 지역구였던 울산 동구도 정몽준 본인이 블로그에 '안효대를 지지해주세요.' 식의 글까지 썼음에도 정몽준의 최측근인 안효대 의원이 3선에 실패하고, 통합진보당 출신의 김종훈 前 구청장에게 패했다. 그리고 울산 북구도 윤두환 前 의원이 윤종오 前 구청장에게 패하면서 2석을 뜯겼다. 그러나 20대 총선은 시작에 불과했다. 후술하지만 2년 후 열린 (탄핵 직후 첫) 지방선거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장세용 후보가 구미시장에 당선된 거 하나만으로 설명이 끝날 정도로 자유한국당이 더 심하게 털렸고, 이 여파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사퇴한 후 변호사 사무실을 열며 잠시 정계와 거리를 두었을 정도였다. 다만 김부겸과 홍의락은 21대 총선에서 제대로 털리며, 민주당계 최초의 대구 지역 2선 도전에 실패했다.[25] 물론 일부만 수용한 것이지 전부 한것은 아니다.[26] 야당들은 자신들이 요구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사태에 대해 집권여당으로서 새누리당의 분명한 사과와 책임 인정, 야당측들의 요구들을 새누리당에서 수용할것을 요구하며 거부중[27] 비선에게 국정을 농락당했고 대통령 스스로가 그 과정에서 헌법을 어긴 것. 실제로 김무성이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하는 긴급회견에서 분명히 언급하였다.[28] 2009년 5월 당시 재보선에서 참패한 한나라당 지도부에서 화합 차원에서 김무성에게 원내대표 추대를 제의했고, 김무성 본인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심지어 친박 중진 일부도 긍정적으로 반응했는데도 박근혜 쪽에서 당헌 당규를 운운하면서 반대 입장을 표했다. 왠지 세종시 수정안보다 인지도가 낮지만, 김무성과 박근혜의 관계가 틀어진 시발점은 분명히 이 때부터다.[29] 대통령은 국민에 의해 선출된 공직이기 때문에 실제로 대통령 탄핵은 막대한 정치적 후유증과 부작용을 불러온다. 그렇기에 과거 노무현에 대한 새누리당(당시 한나라당)의 탄핵운동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이 부정적이였는데 새누리당은 결국 이를 강행한 적이 있었다. 그 결과는 새누리당의 개폭망.[30] 야당과 협상이 결렬된다는 전제가 있지만 당시 야당은 퇴진과 관련하여 탄핵 말고 어떠한 협상도 불가하다는 입장이었기에 무조건적인 탄핵이나 마찬가지였다.[31] 여담인 얘기지만 김무성은 전두환에 대해서는 한번도 긍정적인 코멘트를 한 적이 없다. 당 내 강경보수 성향의 의원들이 전두환을 좋게 표현하거나 직접 예방을 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김무성은 이승만이나 박정희를 좋게 띄어줄 지언정 전두환에 대한 스탠스는 늘 부정적이었다. 전두환의 평생 원수였던 YS 밑에서 정치를 시작했고, 6월 항쟁 당시 YS와 함께 신군부에 맞서 싸운 경력이 있으니 김무성이 전두환과 신군부를 부정적으로 보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32] 홍준표는 박근혜를 출당조치 시키면서 친박과는 원수가 되었다.[33] 특히 박정희 대통령의 고향으로 대구광역시와 맞먹는 강 보수 지역인 구미시를 제대로 털린 게 결정적이었다. 서울에서는 서초구 외 지역이 올 블루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선거를 앞두고 가솔린을 부어 버린 정태옥 때문에 인천광역시마저 강화군 빼고 올 블루 확정.[34] 그도 그럴것이 자기 지역구인 부산 중구•영도구에는 이미 불출마 선언을 했고 부산 지역으로 나오는 것 보단 서울 용산으로 지역구를 옮긴다면 중진 의원의 험지 출마라는 자기희생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용산이 최근 선거를 거치며 민주당 강세 지역이 되었지만, 기본적으로 강한 보수세에 현역의원인 진영이 행정안전부 장관이 되어 불출마 할것으로 보인다.[35] 여담으로 두 사람 모두 키가 180cm가 넘는다.[36] 다만 본인은 70세가 넘은 고령으로서 출마 생각이 전혀 없다고 밝혔다.[37] 이 강연에서 김종인 비대위원장은 보수가 변화해야하는 이유를 현대사를 들며 중진들을 설득하고 차후 2021년 재보궐선거에 대한 자신의 복안을 설명했다. 국민의힘 대선주자론 원희룡 지사, 유승민 전 대표, 오세훈 전 시장을 호평했으며 안철수 대표엔 혹평을 가했다. 홍준표 의원이나 김태호 의원에 대해선 언급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