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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10:19:35

인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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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진
印名鎭 | In Myung-jin
파일:인명진.jpg
<colbgcolor=#808080><colcolor=#fff> 초명 인사봉(印史峰)
출생 1946년[1] 6월 1일 ([age(1946-06-01)]세)
충청남도 당진군 석문면 삼화리[2]
본관 교동 인씨[3]
학력 대전고등학교 (졸업)
한신대학교 (신학 / 학사)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교역학 / 석사[4])
샌프란시스코신학교 (신학 / 박사)
숭실대학교 노사관계대학원 (노사관계학 / 석사[5])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신학 / 명예박사)
종교 개신교 (예장통합)[6]
소속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현직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고문
갈릴리교회 원로목사
약력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 총무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대변인
부정방지대책위원회 위원
한국방송공사 이사
한나라당 윤리위원회 위원장
이명박 정부 통일부 통일고문
안양대학교 교양대학 석좌교수
숭실대학교 숭실평화통일연구원 석좌교수
갈릴리교회 원로목사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
재단법인 한호기독교선교회 제12대 이사장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
여의도연구원 이사장
링크 갈릴리교회 홈페이지
1. 개요2. 생애
2.1. 비대위원장 선임 전2.2.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
2.2.1. 긍정적 평가
2.3. 비대위원장 사임 후
3. 특징4. 박근혜 정부 비판5. 독설6. 여담7. 소속 정당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목사 출신 정치인. 2016년 12월 말부터 2017년 3월까지 새누리당자유한국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이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여파로 인해 새누리당이 자유한국당으로 변모하던 과도기적 시기에 당을 이끌었던 인물.

2. 생애

2.1. 비대위원장 선임 전

인명진은 1946년 6월 1일 충청남도 당진군(현 당진시) 석문면 삼화리에서 니혼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당진상업고등학교 교감을 지낸 아버지 인치희(印致希)와 어머니 남양 홍씨 홍경희(洪敬姬) 사이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인봉환(印鳳煥)이 만석꾼의 대지주였기에 풍족한 어린 시절을 누릴 수 있었으며, 증조모인 청주 한씨[7] 대부터 개신교를 믿기 시작하여 그 또한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목회자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후 구로구 신도림동 소재 갈릴리교회 원로목사[8]로, 목회보다는 민주화 운동을 주로 했다.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맡았고, 이명박 전 대통령이 대선 후보였을 당시 기관지염으로 인한 병역 관련 사항을 날카롭게 지적하여 당황한 이명박 후보가 헛기침을 하는 등 화제가 되기도 했다.

목회보다는 도시빈민운동과 신도림 일대의 공업 지대를 기반으로 한 노동운동에 투신하였고 네 차례나 투옥되었다. 특히 74년 유신정권의 긴급조치 1호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아 억울한 옥살이를 했고 국외 추방도 당한 경력이 있다. 해당 사건은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경실련의 창립멤버로 경제민주화에도 참여했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의 대변인으로 활약했다.

1987년 6.29 선언 이후 25년 만에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상황에서 "YS가 먼저 하고 그 다음 DJ가 하는 패키지를 만들었다. 뒤에 할 사람은 70% 지분을 갖고 당을 장악하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민주화세력의 10년 집권 플랜을 만들었다"며 회고했다. 당시 재야에서는 YS보다 DJ를 선호했으나 인명진은 김영삼에게 호의적이었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볼 때 김영삼 씨가 먼저 대통령 되는 게 좋다고 봤습니다. YS는 정당 기반을 갖고 있었으나 DJ는 그렇지 못하기도 했고요. 현재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양김 씨가 뭐가 다르냐, 두 분 모두 대통령을 지내지 않았느냐고 얘기하겠지만, DJ는 당시 상당수 국민 마음속에서 기피 인물이었습니다.” 관련기사 [9]

6월 항쟁 당시 국본 부산본부에서 활동한 노무현 대통령과 가까웠다. 그러나 노무현의 대통령 출마를 반대했으며, 도와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고 한다. 대통령으로서 준비가 덜 됐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항쟁 때 노무현 씨가 부산 집행위원장이었습니다. 국민운동본부 대변인 하던 나하고도 무척 가까웠죠. 그 후 노동자 대투쟁 때 노 변호사를 대구로, 울산으로 보내는 역할을 내가 했습니다. 현직 변호사로서 구속될 만큼 노동 현장에 뛰어드는 모습을 보면서 놀랐습니다. 그 뒤로는 만난 적이 별로 없는데,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한다고 연락이 왔더랬습니다. ‘노 의원은 대통령 할 만한 사람인데, 섣불리 출마하지 마시라. 대통령이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대통령이 되느냐가 중요하다. 준비가 덜 된 것 같다’고 말해줬습니다. 그러고는 돕지 않았죠. 시기상조라고 생각했어요." 기사

2006년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맡았다. 윤리위원장은 외부인사를 초청하는 일이 많았기에 정치참여로 보긴 어려웠으나, 2016년 12월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내정되어 수락하였다. #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설립 멤버이고 공동대표를 지냈으나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으로 가면서 물러났고, 그 과정에서 정치적 중립 규정 위반을 이유로 경실련에서 영구제명되었다.# 본인은 자신의 불찰이라며 미안한 일이라며 사과했다.

2.2.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

새누리당이 정치하는 데인 줄 알았어요. 그랬더니 와서 보니까 교회더라고. 서청원 집사님이 계신 교회야 이게. 그래서 비대위원장을 성직자를 구했더라고. 근데 나는 교회를 은퇴했거든요. 은퇴한 목사는 교회에 다시 가면 안되는 거거든 법이. 그래서 내가 잘못왔다...
비대위원장 당시 서청원 의원과의 말싸움 중.[10][11]

2016년 12월 23일, "촛불민심 가장 중요한 화두는 개헌. 꼭 추진해야"라고 밝혀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같은 날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비대위원장으로 내정되면서 필요시된다면 탈당 내지 출당 조치까지 염두에 둔 인적쇄신을 거론했으나 새누리당 내 친박계의 반발 기류가 있었고 이 때문인지 윤리위 경고나 사회봉사 대체 가능성을 제기하며 수위를 확 낮추는 모습을 보여 외부에서는 비난을 사고 있다.[12]

친박 주류에 대해 1월 6일까지 탈당할 것을 요구했다. 구체적인 명단까진 거론하지 않았지만 친박 핵심, 총선 참패 책임자, 막말 인사 등에 연루된 의원이 나가야 한다는 식으로 특정인을 지목하지 않고 두루뭉실하게 말했다. # 찔리는 사람은 자진해서 반성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친박은 이런 인명진의 발언에 강하게 반대하면서 일각에서는 당 대표로 인정할 수 없다는 발언까지 나왔다. 상황이 최악으로 흘러가면서 새누리당이 한 번 더 분열할 가능성도 있다. 다만 새누리당에 친박만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라[13] 이에 대해 지지하는 의원도 있다. 관련기사

1월 3일 브리핑을 통해 친박 좌장인 서청원이 당 내 인위적 인적청산에 반대하는 편지를 의원들에게 보냈다고 폭로했고, 이건 당 대표를 떠나 인간 인명진을 무시한 처사라고 비판했다. '일본에서 이런 상황이 일어났으면 할복한다'는 강한 워딩을 사용했다. 지금까지의 행동을 비추어 볼 때 서청원을 비롯한 친박 핵심 세력은 자진 탈당할 의사가 별로 없어 보이며, 인명진이 경고한 6일까지 탈당이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새누리당/2017년 항목에도 나와있는 3차 새누리당 엑소더스가 발생할 가능성이 보다 높아졌다.

서청원과 일촉즉발의 분열 위기를 빚고 있는 가운데 6일에는 서청원을 비롯한 골박계 의원들의 배후로 짐작되는 보이콧으로 인해[14] 새누리당 상임전국위원회가 무산되었다. # 이로써 비상대책위와 윤리위원회를 구성하여 서청원 및 최경환 의원을 축출해 내려던 인명진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새누리당 내에 아직도 골박계의 파워가 건재함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상황. 실제로 인명진의 표정이 이때 심하게 굳어졌으며 이후로 아예 칩거에 돌입하는 행보를 보여주었다. 정우택 원내대표 등이 직접 찾아갔지만 거취 여부에 대해서는 아예 말도 못 꺼냈다고. 반면 서청원은 별도로 기자들에게 "인 위원장에 대해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 '협박죄', '모욕죄' 등을 적용하여 검찰에 고소할 것" 이라고 주장했다. ##

물론 새누리당 사무처가 인 위원장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거두지 않고 있고, 절반이 넘는 의원들이 거취여부에 대해 소위 "백지위임"을 하기는 했지만, 서청원 의원은 다시 "대충 받아낸 것, 전부 강압과 강요에 의한 것" 이라고 일축했다. 덧붙여 "제왕적 통치, 패권 정치를 비판하면서 본인이 제왕적 통치를 시도한다. 여론에 영합하면서 민주주의를 타락시키고 있다. 역사의 시계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것" 이라고도 비난했다. #

특히 이날 서청원 의원은 색깔론을 들어 인 위원장을 공격했다. (상동 연합뉴스) 서 의원은 기자회견에서 "정통 보수 정당을 개혁을 빙자해 정체불명의 좌파 정당으로 만들고 있다. 심각한 도전" 이라며, "여론과 배경을 업고 당을 장악해 왼쪽으로 이끌려고 한다. 과거 인 위원장은 한미군사훈련을 '전쟁 연습' 이라며 반대했고 THAAD 배치에도 반대했던 전적이 있다. (백지위임을 받은 것에 대해서는) 헌법기관인 국회의원들을 수치스럽게 만들고 있으며, 김정은식 통치와도 다를 것이 없다" 고 심하게 공격했다.

이정현 전 당대표, 정갑윤 의원 등 친박 핵심 멤버로 추정 되던 인물들의 탈당계를 '반성하는 모습이 보였다'는 식의 이유로 반려하려다 내부 반발로 10여 분 만에 철회 했다. 때문에 친박과의 대립양상이 사실 약속대련 아니냐는 시각을 보내는 쪽에서는 의혹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1월 19일에는 박근혜 대통령을 두고 "박 대통령과 당원이 똑같은 당원이라 할 수 있느냐", "인간이 염치와 도리와 예의가 있는 것이다", "대통령은 국격이다"는 등의 말을 쏟아내면서 의혹이 더더욱 커져가고 있다. 노컷뉴스가 트위터에서 이를 두고 새누리당 해체를 위한 큰 그림이 아니겠냐며 비꼬았을 정도.

2월 21일에는 안상수 의원의 대선 출정식에 참석하여 '경제가 어려운 시기이니 (정권 교체를 해서는 안 되고) 자유한국당이 계속 집권해야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하였다. # 이에 역사학자 전우용은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경제가 어려우니 정권교체해야한다 하던 사람들이 경제가 어려우니 정권교체를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은 파렴치하다'는 요지로 이 발언을 공격했다. # 여기에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발표된 다음 주인 3월 13(월), 14일(화) 연속으로 주가가 10 포인트 이상 상승하여 연중 최고치인 2,130대 포인트를 기록하고, 신용평가사 무디스가 "대통령 탄핵심판 결과는 한국의 국가신용에 긍정적"이라고 발표한 것은 덤.

다만, 인명진 측에서도 할 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지, 가까운 사람이 푸념을 늘어놓기를, '비박들이 바른 정당으로 탈당해 나가면서 친박농도가 더 높아졌고, 때문에 인명진의 쇄신안을 지탱해 줄 세력이 약해서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성과가 미흡한 것에는 비박들의 책임도 있다'고 했다. # 총선을 앞두고 공천권을 휘두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바에야 인적청산에는 한계가 있다...

3월 29일 기자회견을 열어 자유한국당의 대선후보가 선출되는 즉시 비대위원장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사퇴할 것이라고 밝혔다. 3월 31일 자유한국당 제1차 전당대회를 통해 홍준표 대통령 후보가 선출되자 바로 사임했다.

2.2.1. 긍정적 평가

"당원 투표를 해서 홍준표 후보가 책임당원들의 60%를 받았습니다. 아시는 대로 홍준표 후보는 친박이 아니고, 계파적으로 얘기한다면 비박 아닙니까? 친박이라는 분이 세 분이 나왔는데 이분들 표를 다 합해도 40%가 안 됩니다. 우리 당이 변했습니다. 친박이 아닙니다."
― 비대위원장 퇴임 후 언론 인터뷰에서

태극기 세력을 안고 가야 하는 당으로서는 나름 개혁을 한것이라는 긍정적 평가도 있다. 친박 청산이 흐지부지되어 '도로친박당'이 되었다는 혹평이 많지만 본인의 주장이나 당내 평가는 조금 다르다. 한계가 뚜렷한 상황에서 나름대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는 평이다. 인명진 인적청산이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크게 세 가지 근거를 든다.

첫째, 친박당이었다면 비박 홍준표 전 경남지사가 대통령후보와 당대표에 선출되었겠냐?
둘째, 친박계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결성한 계파인데 박 전 대통령이 탄핵된 마당에 뭐가 남아있겠냐?
셋째, 중간보스급이었던 서청원, 최경환, 윤상현 의원이 징계를 받으면서 계파가 무너졌다.

인명진은 "우리가 추구하는 인적청산은 당내 조직적 계파를 청산하는 것을 그 골자로 하고 있다. 새누리당에는 오랜 기간 뿌리를 가지고 있는 계파가 있다. 이와 같은 조직적 계파가 가장 큰 문제이며 이를 청산하는 것이 이번 인적청산의 골자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즉, 사람을 징계, 처벌하는게 아니라 계파 조직을 해체하는게 목적이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대선을 앞두고 홍준표 후보가 서청원, 최경환, 윤상현 3인의 징계를 해제하고 이정현, 정갑윤을 복당시켰지만 그들이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목소리를 내지는 못 하고 있다. 친박 인사들은 이미 인명진과의 싸움에서 패배하면서 과거의 정치력을 상실했다는 방증이다.[15]

물론 최순실게이트에 분노게이지가 만땅에 오른 국민들 눈에 그 정도 개혁은 눈속임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유한국당은 다른 당들과 달리 영남과 고령층을 중심으로 하는 박근혜 동정론과 태극기 집회 여론을 무시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박근혜 불쌍하다 또는 언론이 박근혜를 탄핵으로 몰고갔다고 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갈 수는 없는 당이라는 것. 그런 당 입장에서는, 인명진이 박근혜가 탄핵되자 바로 여당대표로서 대국민사과를 한 것이나,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어느 정도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홍준표 후보에게 당권을 넘겨 준 것이 최선이었다.

추가 탈당행렬을 막고 당 조직을 재건해서 무너지기 직전에 있던 당을 추스렸다는 시각도 있다.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의 대선출마 포기 덕을 봤지만.

인명진은 비대위원장직 재임 중 종종 인간적 고통을 호소했다. 우선 친박 태극기 집회 측 협박에 따른 공포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재임 중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자택 앞에서 항의시위가 열려서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가족들의 스트레스도 컸다고 하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행사장에서 귓속말로 "톱으로 죽이겠다"고 속삭이며 협박했다고... 충공깽. 관련기사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창립을 주도했던 경실련에서 제명당하고, 숭실대 석좌교수직을 박탈당하는 등... 평생 쌓아올린 명예를 부정 당하는 고통이 컸다고 한다. 그래서 비판자들 중에서도 '그러게 왜 굳이 사서 고생을 하나 쯧쯧' 정도의 동정적인 의견이 나오기도 했었다.

인명진은 자유한국당 의원총회에서 고별사를 통해 "100일간 비대위원장을 하면서 모든 것을 다 잃었다. 명예도 잃었고 개인적인 삶도 다 잃었다. 힘들게 살아왔던 70년 인생을 이 당에다 다 바쳤다"라고 그동안 고통을 호소하면서 "내가 이 당에 마지막 비대위원장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여러분에게 부탁한다. 또 비대위를 구성해서 나 같은 사람을 데려다가 한 사람의 인생을 다 망치는 그런 일이 되풀이돼선 안 되겠다"고 했다. 어지간히 힘든게 아니었던 모양... 관련기사

2.3. 비대위원장 사임 후

이후 홍준표 대통령 후보가 상임선거대책위원장으로 영입하려 했으나 본인이 거절하였다.

2022년 3월 9일 치러지는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22년 1월 14일 기자회견에서 안 후보가 정치 입문 후 10여 년 이상을 여야의 혹독한 검증을 받았지만 본인은 물론, 아내와 자녀에게 아무런 도덕적 흠결을 찾을 수 없고 의사, 교수, IT 기업인, 각 분야의 풍부한 경험을 토대로 거대 양당 체제 속에서도 제3지대 정치 지도자로서 꿋꿋하게 지켜왔으며 그의 정책들이 4차 혁명의 거대한 세계적인 전환기에 과학 기술국으로서 대한민국을 다시한번 세계에 우뚝 서게 할 대단한 정책들이라며 지지 이유를 밝혔다. # 하지만 국민의당 입당에는 선을 그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2월 8일 윤석열 후보가 단일화를 요구하는데도 안철수가 받지 않으면 지지를 철회하겠다고 밝혔다. 인명진 목사는 안철수 후보에 대한 평가는 변함없다면서도 정권교체를 해야 한다는 개념이 더 우선한다고 말했다.#

2022년 3월 2일, 결국 안철수 후보의 지지를 철회하였다.

3. 특징

노동운동, 민주화운동, 경실련 등 시민운동... 등 재야 진보진영과 가까운 경력을 갖고 있다. 성경해석이나 박근혜 정부 정책에 대한 관점을 보아도 진보진영과 가깝다는 평이 중론이다. 그러나 정작 정치 커리어는 계속 한나라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에서 밟았다. 여기에 대해 인명진 본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저에게 있어서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의 일은 한 정파나 한 정당을 위한 일이 아닌 나라와 국민을 위한 봉사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아니, 그보다도 내가 평생 동안 믿고 살아왔던 기독교 신앙인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16]라는 가르침 때문에 이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이 신앙 때문에 지난날 노동자들이 저를 필요로 할 때는 그들에게, 이 나라의 민주화 운동이 저를 필요로 할 때에는 그 최일선에, 그리고 시민운동이 저를 필요로 할 때는 그곳에, 그곳이 어디든 간에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내 일신의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주저 없이 저의 삶을 던지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 수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이번에는 많은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비난을 받고 버림받은 이 당이 저를 필요로 한다고 해서 저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이 당에 왔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저는 저의 모든 것을 이 당을 위해 다 바쳤습니다. 소금은 자기의 의지와 관계없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쓰여져야 하고 흔적도 없이 자기를 다 녹여 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신념이며, 이번에도 나의 기독교적 신앙실천이 자유한국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게 하였음을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 2017.3.29.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 퇴임 기자회견 中

4. 박근혜 정부 비판

2015 개정 교육과정 역사 교과용도서 국정화 논란에 대하여 “예수님에 대한 해석도 넷이나 있는데[17]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 하나만 꼭 가져야 하냐"고 말했다. 이어 새누리당에서 기존 검인정교과서들을 ‘좌편향’이라고 비난하는 데 대해 “정말로 지금 정부가 주장하고 새누리당이 이야기하는 대로 우리 현재 교과서에 문제가 있다고 하면 이 사람들이 그동안 잘못한 것”이라며 “어떻게 그런 교과서를 10년씩이나, 5년씩이나 가르치게 놔뒀냐, 현재 검인정 체제 가지고도 충분히 이 문제 해결할 수 있는 건데 자꾸 국정화한다고 하니까 여기에 무슨 다른 의도가 있는 거 아닌가, 사람들이 추측하게 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

5. 독설

6. 여담

7.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1990 - 1995 정계 입문


[[신한국당|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1995 - 1997 당명 변경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97 - 2000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건설국민승리21|
파일:건설국민승리21 글자.svg
]]
1997 - 1999 창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99 - 2000 신당 창당을 위한 자진 정당 해산


[[민주노동당|
파일:민주노동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00 - 2002 창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02 탈당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svg
2002 - 2012 입당[19]


[[새누리당|
파일:새누리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12 - 2017 당명 변경


[[자유한국당|
파일:자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17 - 2018 당명 변경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18 - 현재 탈당
정계 은퇴


[1] 교동 인씨 인터넷족보에는 1945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2] 교동 인씨 집성촌이다.[3] 참의공파 64세 진(鎭) 항렬.[4] 석사 학위 논문: 이스라엘 신앙의 기원과 전승 형성 (1971)[5] 석사 논문 학위: 勞動爭議 任意調整制度의 實證的 硏究 (1992)[6]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소속의 은퇴 목사 신분이다.[7] 한석리(韓碩履)의 딸이다.[8] 은퇴한 목사 가운데 본 교회에서 20년 이상 목회하여 은퇴 후에 특별한 예우를 받게 된 목사를 가리키는 호칭[9]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인명진 목사가 보수 계열 정당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다는 점, 해당 기사가 보수지인 신동아라는 점을 감안하고 들어야 한다.[10] 출처1출처2[11] 비꼬듯이 한 말이지만 당시 친박세력의 당내 입지와 당 개혁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12] 단 원래 강경파 인사는 아니었기 때문에 친박에서 모셔오려 했던 것이기도 하다. 원래 인명진 스타일은 국소적으로 핵심만 찝어 제거하고 화합 하려는 스타일이지, 대대적이고 전면적인 대청산을 추구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스스로는 자신을 치료를 위해 악성종양만 잘라내는 외과 집도의에 비유한 바 있다.[13] 비례대표제로 국회의원이 된 의원은 탈당할 경우 의원직을 잃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남아있는 의원도 있고 바른정당의 성향에 반대해 잔류해 있는 의원도 있다. 그리고 아직 많은 탄핵 찬성파가 당에 남아 있기도 하다.[14] 정족수에서 두 명이 미달되었다.[15] 이는 홍준표 대표도 비슷한 생각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홍준표 대표는 "선출직 청산은 국민이 한다. 소위 핵심 친박들은 당 전면에 나서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현실적으로 선출직 국회의원들을 강제로 끌어내릴 수는 없으나, 핵심 친박인사들은 전면에 나설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16] 마태복음 5장 13절[17] 4대 복음서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18] 민주화 운동을 했지만 보수 계열 정당에서 활동하는 여러 인사(김문수, 하태경, 심재철 등) 중 한 명이다.[19] 이회창 대통령 후보 지지 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