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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당(일본)/파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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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구분3. 2000년대 이후
3.1. 파벌 체제 붕괴
4. 문제점5. 파벌 목록6. 역대 자민당 총재의 파벌

1. 개요

자유민주당 파벌의 역사[1]

자민당의 파벌은 역사도 대단히 길고,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크게는 보수본류보수방류, 기타로 나뉘는데, 간단히 정리하면 보수본류(비둘기파)는 평화 헌법 유지 · 미일 안보 하에서 경제 우선 · 대미협조외교 노선을 따르는데 반해 보수방류(매파)는 헌법 개정 · 재군비 · 자주 외교를 기조로 삼고 있다.

2. 구분

2.1. 보수본류

보수 본류는 보수 본류 전체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요시다 시게루로부터 시작되어 보수 본류 양대 파벌[2]의 시조이자 요시다 시게루의 정치적 제자들인 이케다 하야토사토 에이사쿠로 이어지면서 1980년대까지 일본 경제 발전을 이끈 주류 세력이었다. '본류'라는 이름이 붙은 것 또한 자유민주당을 이끌어 나가는 세력이 이 쪽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초기 자유민주당에는 본류와 방류의 대립 이외에도 관료파, 당인파의 대립 등 다양한 대립이 존재하였으며, 70년대부터는 각 유력 정치인들이 자신의 파벌을 바탕으로 세력 대결을 펼친 각복전쟁 시기에 들어서면서 성향과 관계 없이 정치적 이익에 따라 협력과 대립을 반복했기 때문에 '보수본류'라는 이름은 60년대의 정치 구도를 반영한 다소 낡은 이름이다.

70-90년대 총리중 대부분이 본류 출신 총리들이었으며, 그만큼 본류는 한 때 자민당을 대표하던 계파였다. 그러나 본류인 경세회에서 다케시타 노보루, 가네마루 신 등이 파벌을 장악하자, 하타 쓰토무오자와 이치로 등이 반발하여 탈당을 감행했으며, 이는 신생당 창당으로 이어져 40년동안 이어졌던 55년 체제를 붕괴시켰다.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가토의 난으로 인해 본류가 분열되고, 이로 인해 헤이세이 연구회와 함께 양대 본류 계파로 불렸던 굉지회에서 고노 요헤이 중심의 대용회가 결성되어 파벌로 나가떨어지면서 본격적인 분열이 시작되었다. 또한 현재는 자민당 최소 계파가 되어버린 근미래정치연구회도 한 때 저 두 계파 못지않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당시 계파의 수장이었던 야마사키 타쿠가 가토의 난에 참여하면서 반란에 실패하자 최소 계파로 추락하였다.

한편 오늘날의 입헌민주당국민민주당 등 민주당계 정당 역시 보수본류의 계승 세력이라고 볼 수 있는데, 본류의 대표 파벌인 '경세회'[3]의 주도권을 다케시타 노보루, 오부치 게이조, 하시모토 류타로 등이 장악하자 하타 쓰토무, 오자와 이치로[4]이 반발하며 신생당을 창당한 것이 55년 체제의 본격적인 붕괴를 유발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파벌 이탈과 탈당으로 보수본류와 자민당 최대 파벌이던 경세회는 급격히 세력이 축소되고, 후에 방류에게 자민당의 주도권을 뺏기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된다.

2.2. 보수방류

보수 방류는 기시 노부스케[5]로부터 연원을 찾을 수 있는데, 현대에 들어서는 방류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가토의 난 발발 이후 2000년대 중반부터 줄곧 주류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과거 엘리트 관료 출신의 융화적 인물이 헤게모니를 쥔 본류와 달리, 방류는 당인[6]이 주가 되며 그들이 자유민주당의 주류 세력을 차지함에 따라 야스쿠니 신사 참배,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문제가 더 빈번해지는 중이다. 전 총리 아베 신조는 대표적인 보수 방류 정치인으로, 보수방류의 뿌리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이다. 아베 총리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 또한 한 때 보수방류의 대표 파벌인 '세이와 정책연구회'의 수장이었다.

방류의 계파는 세이와 정책연구회 하나 뿐으로, 근본은 기시 노부스케의 십일회, 창설자는 청화회의 전신인 당풍쇄신연맹의 창설자 후쿠다 다케오였다. 당시 후쿠다는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포스트 사토로 한 번, 오히라 연합으로 총재선에서 한 번 패배하여 두 번이나 패배했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각복전쟁을 일으켜 본류파에 반기를 들게 된다. 그렇게 후쿠다가 사망한 이후 2000년대에 모리 요시로가 총리 직에 오르면서 간만에 방류 출신 총리가 탄생하게 되었고, 모리는 당시 혼란스러웠던 청화회를 장악하며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함께 방류의 실세로 떠올랐다. 그리고 모리가 총리로 재임한 시기에 방류 쪽에서 가토의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이후 고이즈미가 총리로 집권하고, 장기 집권에 성공하면서 사실상 20년 넘게 자민당의 주류 계파로 떠올랐다. 가토의 난 이후 아소 다로기시다 후미오, 이시바 시게루를 제외한 모든 총리가 방류 출신 총리로 집권할 정도로 주류로 성장했다.[7]

그러나 2022년 7월에 일어난 아베 신조 피살 사건 이후로는 보수방류의 수장 역할을 할 만한 인물이 사실상 없어지면서 더 이상 당내 주류라고 보기 어려워졌다.

2.3. 그 외

그 외에 1950년대 국민협동당까지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는 중도파들은 자민당 내에서 거의 진보/혁신계열에 가까운 목소리를 내면서 당의 균형을 잡아주던 제3세력이었다. 각 정치인들이 자신의 파벌을 이끌고 세력 대결을 펼치던 1970년대에는 보수세력이 분열한 가운데 세력 대결에 참여하면서 미키 다케오[8]가 일시적으로 집권하기도 했으나, 끝내 소수파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얼마못가서 다시 밀려났다. 이들은 청렴한 정치[9]를 내세우면서 정치개혁을 계속 주장하였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제3세력이던 중도파는 대부분 야당으로 넘어갔고, 미키 다케오의 파벌을 계승했던 '번촌정책연구소'는 현재 아소 다로의 파벌인 '위공회'에 통합되어 '지공회'라는 이름으로 새로 출범하였다.

3. 2000년대 이후

2000년대 들어서는 파벌 정치를 혐오하던 고이즈미의 우정 해산과 정치신인 대거 발탁 그리고 2009년 민주당에게 정권을 뺏겼다가 2012년 다시 찾아오는 과정을 거치면서 기존의 파벌들이 대거 이합집산해서 과거와는 파벌구도가 많이 달라진 상태이다. 자민당의 파벌을 알아야 일본 정치가 보인다.

일본 정치에서 자민당에 이런 파벌정치가 존재했던 이유는, 96년 이전까지 중선거구제를 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중선거구제는 한 선거구에 복수의 당선자가 나오고, 같은 당에서도 같은 선거구에 2명 이상의 후보를 공천할 수 있기때문에 자연스럽게 당내 경쟁이 발생하고 이 당내 경쟁으로 인한 필요이상의 내부 투쟁 후유증은 물론 고비용 선거구도가 유지되기 때문에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파벌을 뭉쳐서 정치세력화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96년부터 소선거구제로 개편되어 선거구에서 1명의 당선자만이 의원직을 얻고, 공천 역시 한 당에서 한 선거구에 1명의 후보만 공천이 가능하게되면서, 적어도 선거 국면에서의 파벌 싸움은 의미가 없어지고 오직 당선 가능성만이 정치인의 생존 여부를 결정하게 되었다. 제아무리 파벌의 힘이 강해도 지역구에서 당선가능성이 없는 후보를 공천하는 것은 정당에 자살행위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점차 정치색 이전에 무색무취의 비주류이자 오직 당선 가능성과 선거운동 실력만 봤던 고이즈미의 세력, 사실상 포퓰리스트들이 자민당에서 입지를 넓힌 중요한 계기였다.[10]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만으로는 당장 파벌이 해체되진 않았는데, 여전히 공천권은 총재가 최종행사했기 때문에 자민당의 총재나 주요 공천권자가 되기 위한 파벌 형성과 단결은 필요했다. 거기다, 일본 정치가 워낙 중앙과 지방간 격차가 커서 지방의 사정을 무시할 수 없고, 자민당 자체가 워낙 거대해서 자민당의 큰 파벌 하나는 유럽식 내각제 연정의 단일 세력정당과 비견할 수 있을 만큼 덩어리가 컸기 때문에, 그 거대 파벌들 여러개의 균형과 견제로 인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상술했듯 자민당 내 파벌들의 크기는 수십명 가량으로 적당히 균형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어느 파벌이 빠지면 과반수가 깨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렇기에 한다 하는 파벌은 죄다 정권에서 지분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아니, 웬만한 파벌은 빠진 적이 없었다. 이러면서 총리는 다른 파벌에서 내보내고 알짜배기(장관)들을 장악하는 일명 킹메이커도 꽤 많았다.[11] 제왕적 총리를 막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결국 그것도 자민당 안에서의 이야기. 더구나 말이 파벌 안배 내각이지, 제대로 말하면 나눠먹기 내각이란 비판도 있다. 반면 각 파벌들은 크게는 '보수'인 자민당에 몸담고 있지만 세부적으로는 극우보수, 중도보수 등 성향, 대외관이 제각각 다르기 때문에 집권 파벌의 독주를 막는 견제 역할을 잘 하고 있는 편이다. 실제로 일본의 최근 내각 구성원들을 보더라도 총무상에는 아베 총리와 정치적 경쟁 관계에 있는 노다 세이코가 임명되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2-3개 수준으로 당의 파벌이 대형화되면 일본사회당처럼 좌파사회당, 우파사회당 같은 내분이 강해진다. 일본 자민당은 대체로 5~6개 정도의 파벌이 존재했고,[12] 주요 파벌들 여러개가 연립하는 형식이었기에, 한 파벌이 다수 의석을 점유하고 파벌전쟁을 벌이는 경우는 없었다. 반면에 일본사회당이 망할 때까지 집권에 실패한(...) 것은 바로 이 복수 교섭단체 제도 하에서 “파벌이 딱 두 개”로 갈렸기 때문이다. 당 세력이 둘로 쪼개지니까 내부 다툼에 바빠 자민당 견제를 거의 못했다.

한편 2012년 자민당의 정권 재탈환 이후에는 기존의 대형 파벌들에 소속되지 않은 이시바 시게루가 反아베 진영의 대표 주자가 되는 등 파벌과 별개로 유력한 총리 주자로 떠오르는 인물도 있다.[13] 차기 총재로 유력시되었고, 비록 낙선은 했으나 의원 지지도는 제일 높아 여전히 유력한 잠룡으로 남아 있는 고이즈미 신지로 역시 특정 파벌의 영수는 아니다.

2009년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대패함에 따라 파벌들이 대부분 반토막나고 심지어 일부는 궤멸되면서, 아무 파벌에도 소속되지 않은 무파가 최대 파벌 비스무리하게 되기도 했지만, 2012년 중의원 선거에서 다시 자민당이 승리해 재기에 성공하면서 파벌 정치가 재개된다. 2010년대 중후반 기준으로 아베 내각이 장기 집권하면서 아베를 비롯한 강경 보수파들이 자민당을 이끌고 있고, 온건 보수파들은 힘을 많이 잃은 상황이다.

2018년 기준 주요 자민당 파벌은 아베 총리가 속한 호소다 파가 94명, 아소 파가 59명, 누카가 파가 55명, 기시다 파가 48명, 니카이 파가 44명으로 5대 파벌을 형성하고 있으며 아베는 이들 모두의 지지를 받고 있다. 다만 성향차는 있기 때문에 아베가 맘대로 좌지우지한다고 볼 순 없고 선거 낙승에 의한 지지가 강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14] 그런데 이것도 크게 나눠서 5대 파벌이고 그 밑에 또 의원들끼리 소형 파벌이 있는데 주로 XX 연구회 같은 이름을 대고 비공식 의원 연구단체 형태로 존재한다.

2018년 이후 자민당 내 친 아베 세력과 반 아베 세력 간의 갈등이 커지고 있으며, 특히 총재 선거에서 이시바 시게루와 관련한 문제 때문에 큰 갈등을 빚었던 것이 한 요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민당의 힘은 정계에서 절대적이지만 아베의 당 내 영향력이 약해지자 내각을 철저한 친정체제의 논공행상으로 진행했는데, 그 사람들이 검증되지 않고 무능하거나 막말로 점철된 자들이라 야당들은 물론 자민당 내 다른 계파들조차 저 혼자 다 해먹으려 한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이런 파벌의 형성은 의원내각제 정치의 특징이기도 하다. 일본이 유독 자민당 체제로 오랜 기간 집권해서 그렇지, 다른 내각제 국가들도 다 파벌이 있고 심지어 일본 내 다른 정당에서도 파벌은 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일본의 국회는 교섭단체가 통일교섭단체(단일교섭단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선거 때는 한몸, 국회 안에서는 남남이 가능한 복수 교섭단체 제도(1정당 안에서 복수의 교섭단체가 형성)를 채택하고 있기에, 국회의원이 되면 자민당 내에서 재빨리 자기 라인을 찾아서 교섭단체에 등록하는 형태로 출석관리(...)가 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복수교섭단체(교섭단체 분할)가 불법이라서 분당을 해야 하지만[15], 일본에서는 한 당 안에서 남남으로 지내는 길이 열려있다보니 이런 파벌 정치가 가능해진 것이다.[16] 심지어 파벌항쟁으로 중의원 총리 선출 투표에 자민당에서만 두명이 출마하는 엽기적인 상황이 벌어진적도 있다.[17]

보수본류보수방류로 나누던 기존의 방식도 의미가 없어졌는데, 우파 성향인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보수 방류 파벌인 지수회는 중도~중도우파 성향 니카이 도시히로의 집권 이후 예전 보수본류와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

3.1. 파벌 체제 붕괴

2024년 1월부로 연쇄적으로 터진 파벌의 비자금 조성 스캔들기시다 내각의 지지율이 바닥을 찍자 기시다 총리가 자민당의 정치쇄신을 위해 파벌체제를 재고해보겠다고 했고, 비리에 연루된 굉지회지수회, 세이와 정책연구회, 근미래정치연구회가 잇따라 해산을 표명하며 자민당 주요 파벌 중 절반이 없어지고 의원 중 과반수가 무파벌이 될 예정이다. 일본 현지 여론조사 결과 무려 80.2%나 되는 응답자가 자민당 내 파벌 해체에 긍정적이라는 결과가 나올 정도로 파벌에 대한 국민적 시선이 매우 나빠진 터라 이런 결정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파벌 체제의 주요 구성원이던 세 파벌이 해체한 것으로 나머지 파벌들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으로 보여 자민당 내의 파벌 중심 권력투쟁 체계가 앞으로는 완전히 변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당 정책쇄신본부에서는 파벌을 자금 모집과 인사 추천 기능이 없는 '정책집단'으로 존속시키는 것을 용인하였고, 지공회아소 다로 회장과 헤이세이 연구회모테기 도시미쓰 회장은 정책집단 형태로 파벌 존속을 선언했다.

게다가 남은 파벌이 정책집단으로 전환할 수 있을지도 예단하기 어렵다. 자민당이 1994년 파벌 해산을 선언했으나 이듬해 파벌 활동이 재개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당장 기시다는 2024년 9월 예정인 총재 선거 재선을 위해 파벌 인맥에 의지할 수밖에 없기에 파벌이 살아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4. 문제점

21세기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는 파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지역구 세습이다. 일본의 정치는 예로부터 다이묘를 위시한 지방 호족세력의 막부를 중심으로 하는 연합정권 성격이 강한데, 참혹했던 6.25 전쟁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대부분 포맷된 대한민국과 달리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추축국의 일원이 되어 원자폭탄을 얻어맞고 패전했지만 오키나와를 제외한 본토는 공습만 있었을 뿐 상륙전을 치르지 않았으며, 옆나라에서 급작스럽게 발생한 전쟁으로 인해 GHQ가 일본국에 정권을 돌려주면서 사실상 봐주는 꼴이 되어 신분제를 위시한 과거의 유산이 청산되지 않은 채로 계속 이어져 왔고, 다이묘는 화족을 거쳐 점차 지역 유지로 바뀌면서 그들의 후예가 계속해서 정계에 진출하는 것으로 변화되어 왔다. 이러한 경향 하에서 한때 자민당 중의원 중 세습 정치인의 수가 무려 50%를 넘었던 적도 있었는데, 2018년 당시도 30% 수준으로 점차 낮아지고는 있지만 일반적인 나라와 달리 상당히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명문대를 졸업해 △'정치인 직업 학교'격인 사숙에서 현실 정치를 학습하고 △대기업·정부관청에 잠시 근무한 뒤 △정·재계 명문가 자녀와 결혼해 △아버지의 지역구와 후원회를 물려받아서 편하게 의원에 당선된다. 설령 지역구를 그대로 세습하지 않더라도, 일본에는 대를 이어 정치를 하는 정치인들이 상당히 많다. 이런 세습 정치인들은 ‘오봇짱’, 한국으로 치면 '도련님' 이라 불리며, 서민들이 살아가는 환경은 일절 겪어보지 못해서 격차사회(=양극화), 고령화 등 현실문제에는 둔감하며 헌법개정, 재무장, 역사해석 등 이념투쟁에만 몰두한다는 지적이 많다. 도련님 정치인의 대표적인 예시로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외손자이자 아베 신타로 전 외무상의 아들인 아베 신조 전 총리,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의 아들인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의 외손자인 아소 다로 전 총리 등이 있다. 이들 세 명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퇴임 이후 연달아 총리를 하였으며, 이들의 집권 이후 민주당으로 정권이 넘어갔다.[18]

총리가 되기 위해서는 파벌 영수 혹은 그 정도 급의 위상은 거의 필수이며,[19] 파벌에 들지 않고 총리가 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라는 말도 있다. 일본의 총리는 의원들의 간선제로 내각에서 결정하는 것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건 민주당 정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또 파벌 때문에 총리 개인이 뭔가 정책을 실현하려고 해도 다른 파벌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경우도 많은데, 이게 부정적 요인이 될 때도 있지만 반대로 긍정적 요인이 되어 총리를 견제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헌법 개정과 재무장을 주장하는 매파세력이 독주할 수 없었던 이유도 사실은 자민당의 파벌 정치가 한 몫 했다는 평. 자민당이 오랫동안 집권할 수 있었던 것도, 일본의 실질적인 야당이 자민당 내 파벌이었기에 민주당 등의 야당의 효력이 적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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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파벌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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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align=center><table bgcolor=#fff,#1F2023><rowbgcolor=#EAEAEA,#2D2F34> 명칭 || 통칭 || 회장 || 세력 || 중의원 || 참의원 || 비고 ||
지공회 아소파 아소 다로 45 31 14 위공회와 번촌정책연구소[20]의 통합으로 만들어진 파벌
무파벌 - - 258 159 99 2024년 정치자금 스캔들로 파벌이 대거 해체
양원 의장 - - 2 1 1
305 191 114

6. 역대 자민당 총재의 파벌

총재 총리 이름 파벌
1 52-54 하토야마 이치로 하토야마파[21]
2 55 이시바시 단잔 이일회 → 정책간담회 → 지공회[22]
3 56-57 기시 노부스케 청화회[23]
4 58-60 이케다 하야토 굉지회[24]
5 61-63 사토 에이사쿠 경세회
6 64-65 다나카 가쿠에이
7 66 미키 다케오 정책간담회[A]
8 67 후쿠다 다케오 청화회
9 68-69 오히라 마사요시 굉지회
10 70 스즈키 젠코
11 71-73 나카소네 야스히로 지수회
12 74 다케시타 노보루 경세회
13[26] 75[27] 우노 소스케 지수회
14 76-77 가이후 도시키 정책간담회[A]
15 78 미야자와 기이치 굉지회
16[29] -[30] 고노 요헤이 위공회(창립)[31][32]
17 82[33]-83 하시모토 류타로 경세회
18 84 오부치 게이조
19 85-86 모리 요시로 청화회
20 87-89 고이즈미 준이치로
21 90 아베 신조
22 91 후쿠다 야스오
23 92 아소 다로 위공회
24[34] - 다니가키 사다카즈 굉지회
25[35] 96[36]-98 아베 신조 청화회
26 99 스가 요시히데 무파벌[37]
27 100-101 기시다 후미오 굉지회 → 무파벌
28 102 이시바 시게루 무파벌

[1] 2021년 10월 기준[2] 굉지회헤이세이 연구회.[3] 이름을 여러번 바꿨다. 목요회 - 경세회를 거쳐 현재의 이름은 헤이세이 연구회.[4] 니카이 도시히로, 에사키 데쓰마, 오쿠다 게이와, 야마모토 고조, 이시바 시게루, 오카다 가쓰야 등 현재 이름있는 정치인들이 바로 하타•오자와파였다.[5] 상기된 사토 에이사쿠는 기시 노부스케의 친동생이다. 아버지가 데릴사위로 들어가면서 가족의 성이 사토로 바뀌었으나 기시만 성을 유지했기 때문.[6] 党人, 직업 정치인. 기시는 관료 출신임에도 방류의 시초가 되었는데 그는 GHQ에 의해 공직 추방을 당한 것을 뼈아프게 생각해 일반적인 관료들과 마인드가 달랐다. 동생 사토 에이사쿠는 본류 거물인데 그는 공직 추방을 안 당했다.[7] 무파벌인 스가 요시히데도 한 때 본류파에 소속되어 있던 정치인이었으나, 00년대 1차 아베 내각 때 총무대신에 취임하고, 이후 10년대 8년의 아베 내각동안 관방장관으로 재임하면서 아베의 측근으로 떠올랐기 때문에, 그가 총리가 되었을 때에도 방류인 아베는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렇기에 스가는 사실상 방류 쪽 총리라봐도 무방했다.[8] 보수본류와 보수방류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보수의 지류라고 불렸다.[9] 중도파의 리더였던 미키 다케오의 별명이 "청렴한 미키"였다.[10] 그리고 그 직계 계승자가 아베 신조였다. 그래서 한국에서 극우 이미지인 것과 달리 일본에서는 무색무취의 오로지 선거만 잘하는 포퓰리스트라는 평가도 많았다. 다만 반공성향의 노년 투표층 공략을 위해 일본 공산당에 대한 공격은 꽤 강경한 편이었다.[11] 대표적인 인물이 70-80년대 자민당의 당내 정치를 이끌었던 다나카 가쿠에이. 다나카는 정치자금 문제로 인해 총리 퇴임 이후 자민당을 탈당하는 불명예를 겪었으나, 다나카파는 여전히 자민당의 핵심 파벌로 활동하며 자민당의 당내 정치를 주도하였다. 다나카는 자신의 총리직 복귀 때까지 다나카파에서 총리가 나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나카파는 자민당 내에서 킹메이커 노릇을 했다.[12] 크게 보수본류에는 사토 에이사쿠를 뿌리로 하는 '목요회계', 이케다 하야토를 뿌리로 하는 '굉지회계'가 있고, 보수방류에는 기시 노부스케를 뿌리로 하는 '십일회계', 고노 이치로를 뿌리로 하는 '춘추회계', 보수좌파에는 미키 다케오를 뿌리로 하는 '정책간담회계'가 있었다. 이 중 '굉지회계'에서 고노 요헤이가 떨어져 나가면서 만들어진 '위공회계'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최근 정책간담회계 파벌인 '번촌정책연구소'를 흡수했다.[13] 이시바 시게루도 한때는 신흥 파벌을 형성했었다. 대다수 파벌들이 1955년 자민당 창당 때부터 내려오는 오랜 계보를 가지고 있는 것과 달리, 이시바파는 뿌리가 없는 완전한 신흥 파벌이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단, 이시바 시게루 본인과 해당 파벌이었던 인원 대다수는 헤이세이 연구회 출신이었다. 지금은 다시 완전히 무파벌이고, 2024년 마침내 신임 총재에 당선되었다.[14] 여담으로 저 3파는 2005년 우정 총선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우정민영화 문제로 기존 주류였던 시슈회(니카이파)를 절단내버리고(이후 시슈회 일부는 민진당으로 넘어가 민진당 우파 계열이 된다) 사실상 고이즈미가 인원을 재구성한 파벌이기도 했다. 다만 이게 지금도 무슨 대단한 영향을 미친다고 보긴 어려운 것이 애초에 아베 신조도 고이즈미가 직접 지명했던 고이즈미의 직계 후계자였지만 알다시피 2007년 총리에서 한번 나가리되었고, 2010년대 들어 아베가 복귀하긴 했지만 정작 고이즈미는 자민당 밖에서 탈원전을 기치로 반아베 후보를 지원하고 있다.(...) 화무십일홍 또 2009년 선거 대패로 애초 계파 자체가 대폭 물갈이되기도 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15] 물론 이 법 때문에 한국이 일본보다 정당 변천이 훨씬 복잡하고 빈번하다는 문제도 생기고 있다. 일본 자민당은 그래도 55년 체제 이후 당명 변경도 없이 일단 당 자체는 계속 유지되고 파벌만 갈리지만, 한국은 이렇게 국회 내 복수 파벌 형성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보니 분당 및 합당 사태가 비교도 안 되게 빈번하다. (당명 변경을 포함하면) 정당 평균 수명이 5년이 채 안 된다는 말도 있으니... 준연동형 비례제를 뚫고 미래통합당과 더불어민주당이 각각 미래한국당과 더불어시민당이라는 비례대표 전용 위성정당을 만들고 21대 총선을 치렀는데 예상 외로 정당 득표수가 원내교섭단체 최소컷인 20석에 거의 근접하여 이들이 합당을 바로 안 하고 이걸로 또 복수교섭단체를 만들까 계산을 했던 이유도 이러한 규제를 우회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타 당의 반발로 철회하고 합당했고, 22대 총선에서는 이런 구상 없이 총선 직후에 바로 합당했다.[16] 자유민주당의 파벌은 법적으로 기타 정치단체로 분류되어있고, 매년 선관위에서 정치자금수지보고서를 공표한다.(링크 자료는 세이와정책연구회(호소다파)의 정치자금수지보고서이다.) 그리고, 파벌 사무실이 별도로 존재한다. 참고로, 메인 파벌의 연간 수익금은 한국 돈으로 대략 20억원 내지는 40억원 정도로 추정되고, 수익금 중에서, 정치자금 파티의 비중이 약 70%~80% 전후 정도 된다.[17] 1979년에 오히라 마사요시후쿠다 다케오가 동시에 출마한 적이 있다. 각복전쟁 항목 3라운드 참조.[18] 그러나 막상 민주당 정권의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 역시 자유민주당 창당의 주역이었던 하토야마 이치로 전 총리의 손자이다. 세습정치가 자민당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애초에 민주당계 정당의 뿌리는 자민당 탈당파인 마당이니.[19] 아베 신조는 의외로 그가 총리로 재임할 당시 자기 파벌의 영수가 아니었다. 다만 호소다 파는 그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의 파벌이 그 시초이며,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 역시 이 파벌의 영수였기도 했던 만큼 아베 가문의 영향력이 짙게 배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베의 총리시절 영수인 호소다 히로유키는 사실상 바지사장일 뿐, 아베 신조가 실질적인 파벌의 영수였고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 영수직을 차지했다.[20] 미키 다케오의 파벌이었기에 과거에는 소위 ‘보수좌파’라고 불리던 수정자본주의 성향 계파였다.[21] 청화회의 뿌리인 기시 노부스케, 지수회의 뿌리인 고노 이치로는 모두 하토야마 이치로 휘하의 정치인이었다.[22] 미키의 파벌인 정책간담회에 흡수되었다가 번촌정책연구소(정책간담회의 이후 명칭)가 위공회와 통합하며 지공회가 되었다.[23] 청화회 계열의 창립자로, 창립 당시 명칭은 십일회였다.[24] 굉지회의 창립자. 굉지회는 이름이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A] 정책간담회를 승계한 번촌정책연구소는 지공회에 흡수되었다.[26] 자민당 역사상 최단임 총재[27] 총리 취임 2개월 만에 불명예 사퇴[A] 정책간담회를 승계한 번촌정책연구소는 지공회에 흡수되었다.[29] 자민당 역사상 첫 야당 총재였으나, 10개월 만에 여당으로 복귀하면서 야당 총재 신분에서 벗어났다.[30] 사회당과의 연립정권 구상을 다케시타 파벌이 주도했기 때문에, 고노 총재는 총리에 취임하는 것을 스스로 포기했다.[31] 번촌정책연구소와 통합하면서 명칭이 지공회로 전환된다.[32] 초선시절부터 탈당 전까지는 지수회 소속이었다. 이후, 자민당에 복당해서 굉지회로 들어갔고, 굉지회 소속으로 총재에 선출되었다. 총재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굉지회 소속이었으나, 굉지회 차기 회장을 두고 가토 고이치와 대립했다. 결국, 가토가 굉지회 회장이 되면서, 자신을 따르는 의원들과 함께 굉지회를 탈퇴하고 위공회를 창립했다.[33] 2년 6개월 만의 자민당 출신 총리[34] 야당 총재 신분으로 재임기간 3년을 채운 유일한 자민당 총재[35] 5년 만의 총재직 복귀[36] 5년 3개월 만의 총리직 복귀[37] 과거 헤이세이 연구회(경세회), 굉지회에 가입했던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