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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13:32:50

장덕

장덕
張德 | Chang Deok
파일:external/res.heraldm.com/20150610000360_0.jpg
<colbgcolor=#878787><colcolor=#fff> 출생 1961년[1] 4월 21일[2]
서울특별시 중구
사망 1990년 2월 4일 (향년 28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결성 장씨
신체 158cm, 46kg, A형[3]
가족 아버지 장규상, 어머니 이숙희
오빠 장현, 조카 장원(1979년생)
배우자 이승언(1981년 결혼~1983년 이혼)
학력 서울흥인초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속여자중학교 (졸업)
안양영화예술고등학교 (연극영화과 / 졸업)
테네시 주립대학교 (작곡학과 / 중퇴)
벨먼트 대학교 (음악학과 / 중퇴)
데뷔 1975년 노래 '꼬마인형'

1. 개요2. 일생3. 영상
3.1. 생전 영상3.2. 사후 영상
4. 사망 및 사후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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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여성 싱어송라이터, 작사가, 작곡가, 음반 프로듀서, 배우이다.

음악적으로 당시 대한민국 음악계의 수준을 뛰어넘는 혁신적인 코드워크(코드 진행)와 보이싱(화성을 구성하는 음의 배치를 바꾸는 것)을 보여주면서도, 단번에 신드롬이 될 만큼 뛰어난 멜로디를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녀가 활동했던 시기[4]에는 여자 싱어송라이터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던 때로[5], 1984년 데뷔한 이선희 조차 '여자가 감히 작곡을 한다'는 편견 때문에 1996년 10집에 와서야 자신이 작곡한 곡을 앨범에 실으며 본격적인 싱어송라이터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심지어 여자 가수가 바지를 입고 다니는 것마저 신기하다고, 정수라이선희, 장덕이 '여자 가수 바지 삼총사'라고 적힌 잡지 기사마저 존재한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등록된 장덕의 작품 개수는 총 136개(2021년 기준)이다. 생전 약 300여곡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고, 현이와덕이 앨범 4장, 솔로 음반 9장, 참여 음반 33장, 10여 편 영화 출연(주연/조연)을 하였다.

2. 일생

1961년 4월 21일 서울특별시 중구에서 1남 1녀 중 둘째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장덕의 아버지인 장규상[6]서울시립교향악단 첼리스트였고 어머니는 서양 화가 이숙희였다. 장덕 집안은 전형적인 예술가 집안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덕이 초등학교 2학년이 될 때 그녀의 부모는 이혼했고, 장덕은 도봉산의 사찰인 청기와집에서 1년간 살았다고 한다. 당시 그녀의 아버지는 그 자신이 만든 뿐철학[7]이라는 것에 심취해 있었다.
파일:external/img.maniadb.com/153398_1_f.jpg
<colbgcolor=#878787><colcolor=#fff> 1976년 데뷔 앨범

1975년 4월 만 13세가 된 장덕은 오빠와 함께 드래곤 래츠라는 듀엣명으로 통기타를 메고 아메리칸 엠버시 클럽에서 열린 미8군 주최의 파티 무대에서 《To Be A Child Again》 이라는 곡으로 데뷔했다. 남매는 이 공연을 통해 출연료도 받고, 아메리칸 엠버시 클럽의 쇼 매니저로부터 드래곤 래츠의 노래와 미모에 반했다는 찬사를 들으며 엘 클리나드를 통해 출연 계약까지 정식으로 요청받았다. 그리고 이 무대에서 남매는 곧바로 방송국 PD들의 눈에 띄어 스카우트 되었고, 1개월 뒤 TBC TV의 청소년과 젊은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오라오라에 출연해 장덕이 작사 · 작곡한 《꼬마인형》, 《일기장》을 부르며 최연소 남매 듀엣으로 일반 무대에 데뷔하게 된다.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갈 무렵 장덕은 어머니에게 안양예술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처음엔 1년을 더 다녀야 된다며 말렸지만, 안양예술고등학교에 찾아갔고 다행히도 현이와 덕이로 연예계에 데뷔한 후라서 그 재능을 인정받고 입학을 허락받는다. 그 해 4월 남매는 드래곤 래츠에서 '현이와 덕이'로 듀엣명을 바꾸고 《친구야 친구》, 《사랑한다고 말해주오》 등 3곡이 수록된 옴니버스 형식의 컴필레이션 음반 《친구야 친구》를 발표했다. 그리고 그해 11월 개봉된 김응천 감독, 임예진, 이덕화, 전영록 주연의 영화 푸른교실에서 오라오라에 출연해 불렀던 《꼬마인형》, 《일기장》을 사운드트랙으로 싣게 된다.

1977년 4월 고등학교 1학년의 장덕은 명보극장에서 개봉된 임원식 감독의 영화 《내 마음 나도 몰라》에서 주연으로 출연한다. 한달 뒤 장덕이 어머니와 함께 살던 때 이사로 인해 집들이에 참석한 가수 송창식은 장덕이 중학교 2학년 때 작사, 작곡한 《소녀와 가로등》을 장현이 기타 연주와 함께 노래를 불러주자 감탄을 하며 이후 서울국제가요제에 출품할 것을 적극 권한다. 결국 송창식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장덕은 《소녀와 가로등》을 1976년에 김기웅 곡의 《말해줘요》로 데뷔한 히트곡도 없는 신인가수 진미령에게 주며 작사, 작곡가로서 제1회 MBC 서울가요제에 출전한다. 같은 해 7월 명보극장에서 개봉한 박태원 감독의 영화 《선생님 안녕》에서 장현은 임예진과 함께 주연으로 출연하였다. 이 영화는 삼각관계가 얽힌 영화로 비록 단역이지만 장덕 또한 장현의 동생 역으로 출연하였다. 현이와 덕이는 이 영화에서 사운드트랙 《정말》도 싣게 된다.

1978년 4월 장덕은 1970년대 하이틴 영화의 붐을 주도했던 세 명의 감독인 김응천, 석래명, 문여송이 모여 옴니버스 형식으로 만든 영화 《우리들의 고교시대》 제1화에서 다시 주연으로 출연하였다. 그 해 7월 장덕은 제1회 MBC 서울국제가요제에서 오빠 장현이 부른 《더욱 큰 사랑》의 작사, 작곡가로서 출전, 2년 연속 MBC 서울국제가요제에서 입상하게 된다. 같은 해 《현이와덕이》 정규 1집이 발표되었다.

나아가 1979년 6월 제2회 MBC 서울국제가요제에서 박경희가 부른 《사랑이었네》(작사/작곡 : 장덕)가 가야금상을 수상하며 장덕은 작사, 작곡가로서 3년 연속 MBC 서울국제가요제에서 입상하는 기록을 세운다. 같은 달 장덕은 지구레코드와 계약하며 솔로 데뷔 음반 《첫사랑》을 발표한다.

장덕은 1977년부터 1979년까지 10여편 영화에 주, 조연으로 출연하였다.

이후 1980년 10월 장덕은 어머니가 살고 있는 미국 테네시주내슈빌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내슈빌은 컨트리 뮤직의 메카로 일컬어지는 곳으로 장덕은 이 곳에서 벨몬트 칼리지 음악과에 입학, 대학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1981년 장덕은 비싼 등록금으로 인해 벨몬트 칼리지 음악과에서 한 학기를 마친 뒤 테네시 주립대학교 실용음악과로 옮기게 되며 그 곳에서 음악의 기초 · 이론 · 감상 · 작곡 · 작곡 기법 등을 전문적으로 배우게 되었다. 또한 내슈빌 작곡가 협회에 회원으로 가입도 하고, 한인 기독교 방송 프로그램 한국의 샘터에서 MC로도 활동하였고, 한인회 밴드인 리패밀리 멤버(리더)가 되어 각종 행사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장덕은 같은 리 패밀리의 멤버 이군과 1981년 10월 17일, 내슈빌에서 결혼했다. 미국에 머물던 이 시기 장덕은 미국 가수에게 《여인이여 안녕》 이라는 작품을 주어서 취입시켰는데, 당시 장덕의 미국 내 창작 활동은 미국 일간지 및 '테네시언'지에 크게 소개된 바있다.

1983년 10월 이혼을 하게 된 장덕은 가수 생활의 추억, 그리고 아버지 · 오빠 · 친구에 대한 그리움 등으로 고국에 대한 향수병에 걸려서 어머니에게 말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메모 한 장만을 남기고 한국으로 귀국, 한남동에서 자취 생활을 시작했다. 한 달 뒤(11월) 장덕은 서라벌레코드와 전속계약을 맺고 타이틀곡 《날 찾지 말아요》를 비롯 《안녕히 계세요》, 《가을에 만난 소녀》, 《철없는 안녕》 등의 곡들이 수록된 정규 음반 《날 찾지 말아요》를 발표했다. 당시 장덕 본인이 방송 출연을 꺼린 탓에 방송을 가장 많이 탄 가수 부문에서는 순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앨범이 발표된 지 6달 만에 타이틀곡 《날 찾지 말아요》가 PCI(인기가요순위 조사연구소)에서 집계한 '한 달(1984년 5월) 동안 방송을 가장 많이 탄 노래' 부문 3위까지 오른다. 많은 방송 활동을 하지 않는 장덕으로서는 좋은 결과였다.

이 사이 장덕은 새 음반을 내는 자매 듀엣 국보자매에게 《백치미》, 《사랑하고 있나봐요》를 작사/작곡해 주기도 했다. 국보자매는 현이와 덕이, 그리고 장덕에 의해 각각 발표된 바 있는 《끝없는 마음이야》, 《첫사랑》까지 리메이크하여 1984년 2월에 발매된 자신들의 새 음반에 수록했다. 1984년 10월 장덕은 이미례 감독, 김진아 · 남궁원 주연의 개봉 영화 《수렁에서 건진 내딸》에서 음악 감독을 맡았다. 11월에는 타이틀곡 《사랑하지 않을래》를 비롯 《사랑의 꿈》, 《사랑과 인생》 등의 곡들이 수록된 정규 2집을 발표한다.

하지만 대중의 반응은 냉담한 편이었다. 이에 장덕은 실망했다. 어린 시절 뭣 모르고 음반을 내고 노래를 불렀던 그 때와 한 동안 공백기를 가졌다가 성인이 되어 복귀, 겪게 되는 지금의 연예계는 너무도 달랐던 것이었다. 모든 것을 혼자 해내야 한다는 점 또한 그녀를 힘들게 만들었다. 결국 장덕은 대부분의 시간을 방에 틀어박혀 우울히 보냈고 식음을 전폐하며 세상에서 버려진 아이처럼 혼자만의 세계에서 신음하게 된다. 방송국에서 출연 섭외 전화가 와도 "장덕이 없어요"라는 한마디만 던지고 전화를 끊을 정도였다. 동생의 이런 안타까운 소식에 현이와 거룩한 성의 리더이자 보컬로서 활동하고 있던 오빠 장현이 1985년 4월 울산에서 서울로 상경, 장덕에게 현이와 덕이의 재결성을 제안하게 된다.

1985년 6월 장현 · 장덕 남매는 7년 만에 재결합, 현이와 덕이를 결성하며 타이틀곡 《너나 좋아해 나너 좋아해》를 비롯 《이젠 안녕》, 《그대의 투정》, 《해바라기 사랑》 등의 곡들이 수록된 정규 2집 《너나 좋아해 나너 좋아해》를 발표한다. 앨범의 타이틀곡 《너나 좋아해 나너 좋아해》가 단숨에 가요순위 10위권 내에 들며 인기를 끌었고 장덕의 막힌 숨통을 트게 해주었다. 그러나 남매는 지향하는 음악이 서로 달랐고 결국, 장덕은 다시 솔로 활동을 준비한다.

1986년 5월에는 장덕이 작곡한 곡들 중 가장 훌륭한 곡으로 평가받으며 훗날 수많은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 되는 리듬앤블루스 스타일의 곡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이 동료가수 이은하에 의해 발표되었고 한 달후 1986년 6월 타이틀곡 《님 떠난 후》를 비롯 《어른이 된 후에 사랑은 너무 어려워》, 《사랑해줘요》, 《소외》 등이 수록된 장덕의 솔로 정규 3집 《님 떠난 후》이 발표되었다. 포크뮤직에 디스코가 섞인 타이틀곡 《님 떠난 후》는 KBS 가요톱10에서 5주(1987년 2월 18일 ~ 1987년 3월 18일) 연속 1위를 차지, 골든컵을 수상하였고 MBC 라디오 인기가요, KBS 2FM 인기가요 광장, PCI(인기가요순위 조사연구소), 뮤직박스(도서출판), 전국 DJ 연합회 등 각종 인기 순위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하게 된다. 1986~87년 장덕은 제 2의 전성기를 보내며 대한민국에서 가장 성공한 여자 가수들 중 한명으로 인정받았다.

1987년 7월 장덕은 타이틀곡 《이런게 아니었는데》를 비롯 《이별인 줄 알았어요》, 《이 노래를 들을때면》 등의 곡들이 수록된 정규 4집 《이런게 아니었는데》를 발표했다. 이 앨범은 두봉엔터프라이즈를 통해 발매되었으며 재킷에 《골든앨범1집》이란 타이틀이 표기되어 발매되었다. 이 앨범에 수록된 《이별인 줄 알았어요》는 가요톱10 등에서 순위권에 오르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9월 장덕은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제 3회 ABU(아시아 태평양 방송연합) 가요제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게 되는데, 당시 불렀던 노래 《너를 기다릴거야》는 1989년 발매된 장덕의 정규 6집 《예정된 시간을 위해》에 재편곡되어 수록되게 된다. 이 시기 장덕의 오빠 장현도 타이틀곡 《마지막 진실》을 비롯 《연민》, 《어느날》, 《만날 수 없는 사랑》 등의 곡들이 수록된 솔로 데뷔 음반 《마지막 진실》을 발표하게 된다.

1988년 9월 장덕은 다른 싱어송라이터 김파, 김범룡과 함께 작업하며 타이틀곡 《얘얘》를 비롯해 《내 말 좀 들어요》, 《서울의 밤거리》, 《나의 꿈 이야기》 등의 곡들이 수록된 정규 5집 《얘얘》를 발표한다. 이 앨범 역시 《골든앨범 2집》이란 타이틀로 두봉엔터프라이즈를 통해 발매되었다. 앨범의 타이틀곡 《얘얘》는 특히 무대 위 장덕의 귀엽고 깜찍한 율동과 춤으로 주목을 받았다.

1989년 2월 오빠 장현은 그동안의 밤무대 일을 모두 청산하고 본격적으로 장덕의 매니지먼트로서의 일을 하기 위해 여의도에 코아기획이라는 프로덕션을 설립한다. 이 때 훈이와 슈퍼스타, 박혜성 등의 가수들도 영입하였다. 그렇게 장덕의 새 앨범 《예정된 시간을 위해》의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을 때였던 1989년 6월 18일 장현은 갑작스럽게 국립의료원에서 설암 3기 판정을 받았다. 그전부터 혓바닥에 혓바늘 같은 것이 돋아났지만 장현은 피로 때문에 생긴 것으로 여기고 넘어갔는데 혓바늘로만 여겼던 것이 자꾸만 커져가고 통증도 심해지자 다니던 작은 병원에서 치료받던 걸 중단하고 국립의료원에 찾아간 것이었다. 병원의 의사는 장현에게 혀의 절반을 자르면 5년을 살고 그렇지 않으면 1년밖에 못 산다는 진단을 하였으나 장현은 수술을 하면 말을 할 수 없고 노래도 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수술을 거부하고 자가요법을 택하게 된다.

얼마 후 타이틀곡 《예정된 시간을 위해》를 비롯 《네가 나에게 어떻게 이럴수 있니》, 《슬픈 약속》, 《수레》, 《나의 공주님》 등의 곡들이 수록된 장덕의 정규 6집 《예정된 시간을 위해》가 발표된다. 동명 타이틀곡 《예정된 시간을 위해》는 좋은 반응을 얻었고 1990년 1월에는 어렵지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 모녀의 이야기를 그린 KBS 신년 특집극 드라마 《구리반지》에 주연으로 출연, 억척스럽고 발랄한 스무살 여성을 맡아 오랜만에 연기 활동도 하였다. 그러나 앨범 활동 중, 오빠 장현이 설암으로 쓰러지게 되자 장덕은 활동을 중단하고 오빠의 병간호를 하게 된다.

당대 여가수 중에서는 외모가 빼어났기 때문에 예능 프로그램이나 단막극 드라마에도 자주 나왔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1990년 설날 특집 드라마 "구리반지"의 주연 및 주제가를 불렀다. 구리반지 풀영상.

3. 영상

3.1. 생전 영상

<rowcolor=#fff> '소녀와 가로등'. 1977년 서울가요제 당시 진미령이 부른 영상.[8] 장덕 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님 떠난 후'. 1987년의 영상.
<rowcolor=#fff> '너 나 좋아해 나 너 좋아해'. 1987년의 영상.[9]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10] 1987년의 영상.

3.2. 사후 영상


장덕 사후 31주기에 장덕의 팬이 장덕을 기리는 영상.

4. 사망 및 사후

하지만 그 행복할 것 같은 시간도 오래 가지 않았다. 1989년, 오빠 장현설암에 걸렸고, 장덕은 그 해 출시한 앨범 '예정된 시간을 위해'[11] 활동까지 중단하면서 오빠의 병간호를 해야 했다.[12] 그런 가운데에서 그녀는 불면증까지 걸려서 수면제로 잠을 청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1990년 2월 4일, 서울특별시 마포구 염리동 진주아파트[13]에서 감기약과 기관지 확장제, 소량의 수면제를 복용해 신음하고 있는 것을 함께 살고 있던 의상 담당 문인옥씨가 발견해 급히 병원으로 옮겼지만, 결국 28세의 젊은 나이에 끝내 숨졌다. #

이렇듯 3가지 약을 일시에 복용해 상승 작용에 의한 쇼크 사망, 즉 자살이 아니었음에도 자살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 아무래도 이전에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고, 여기에 약물 복용으로 인한 사망이기도 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오해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2022년 4월 25일 비즈엔터지에 홍성규 기자가 장덕이 자살이 아님을 증명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관련기사
[내용일부 발췌] 故장덕은 결코 '자살'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 지면을 빌어 다시 한번 알리고 싶다. 당시 연합통신의 1보 전송 기사를 보고, 성급하게 '가수 장덕 자살'이라는 1면 톱기사로 보도되어, 정신적 피해를 입었던 유족들에 대해 뒤늦게 사과를 드린다.

의상담당 문인옥의 말에 따르면 장덕은 불면증을 겪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경찰은 장덕이 설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오빠 장현의 병간호를 오래 해왔으며 최근 이은하 · 조영남 · 최진희 · 변진섭 · 김승진 · 하춘화 등 동료 가수들에게 곡 의뢰를 받고 신곡 작업까지 하는 등 빽빽한 일정으로 무리를 해왔다는 주변의 진술에 따라 과로와 감기 증세 때문에 과다복용한 약이 부작용을 일으켜 숨진 것으로 판명했다.

장덕의 안타까운 죽음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연예계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아무 탈 없이 노래를 잘 부르던 가수가 갑작스레 사망했으니 모두의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시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들은 장덕의 죽음을 추모하는 인사말로 방송을 시작했으며, 한동안 장덕의 '예정된 시간을 위해'가 신청곡으로 폭주했다. 당시 연예인의 사회적 신분상 신문 등에는 비교적 작게 부고 기사가 나갔지만, 그래도 거의 대부분의 일간지에서는 관련 기사를 쉽사리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오빠 장현은 당시 설암으로 투병 중이라 말을 전혀 할 수가 없어서 그저 여동생의 죽음에 대해 인터뷰로 슬프다는 이야기를 메모로 보여주며 안타까워 했다. 그리고 6개월 뒤인 1990년 8월 16일, 장현도 결국 여동생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1990년에 12명의 동료 가수들(기타 참여자 : 밴드 연주자 26명, 회사 및 단체 20개, 도움을 주신 분 27명 등)에 의해서 리메이크와 미발표곡을 포함한 유고 앨범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14]가 발표되었고, 이선희는 자신의 시집에 장덕 추모시를 실었다. 장덕의 30주기를 맞아 KBS 유튜브 채널 Again 가요톱10에서 2020년 2월 6일, 생전의 출연 영상 모음을 올렸다. 영상 모음.

5. 여담



[1] 한동안 1962년생으로 알려져 있었다.[2] 장덕의 묘비. 참고로 저 묘는 장덕의 오빠인 장현의 묘로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대지공원묘원에 있다고 하며, 시신은 화장되어서 남이섬 상류에 뿌려졌다고 한다.[3] #[4] 1980년대 초반에 활동을 중단한 시기가 있어, 활동 시기는 1970년대 후반, 그리고 1980년대 중반~후반에 걸쳐 있다.[5] 여자 싱어송라이터가 드물었던 것이지 사람들이 여자가 작곡한다는 것을 수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비슷하지만 조금 더 이른 시기에 활동을 시작한 심수봉도 싱어송라이터다.[6] 1929년~1996년 11월 24일. 개성고보와 연세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의 수제자로 알려져 있으며, 천재적인 소질을 타고난 첼리스트인 그에게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첼로를 선물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1996년 대장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67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발췌 기사.[7] '우주는 착각이고 한낱 환상에 불과하며, 중요한 건 마음뿐이고 필요한 건 사랑뿐'이라는 장규상 본인이 창조한 철학이었다. 이 때문인지 죽으면서 남긴 유언조차도 먼저 떠난 자식들에 대한 얘기가 아닌 "자유의 세계로 떠납니다. 좀 더 사랑을 전해 주지 못하고 떠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라는 내용이었다.[8] 지휘하는 어린 장덕의 모습은 2분 57초 쯤부터.[9] 이 영상 43분 42초에서 노래를 부른다. 참고로 가운데에서 베이스를 들고 있는 남자는 가수 김학래이고 우측에서 기타를 들고 있는 사람은 조영남이다. 그리고 화면에는 잘 나오지 않지만, 뒤에서 드럼을 치고 있는 사람은 배철수이다.[10] 장덕이 작곡한 이은하의 곡이다.[11] 이 곡은 그녀의 마지막 활동곡이 되어버렸다. 애절한 멜로디와 이별을 준비라도 했다는 가사 때문에 장덕의 추모곡으로 손꼽힌다. 특히 이 노래 마지막 가사로 인해 호사가들은 이를 두고 자살을 암시한 게 아니었냐며 말이 많았다. 참고로 마지막 가사는 '이제는 시간이 됐어요 그대여 안녕'.[12] 해당 곡은 장덕 사후 동료 가수들의 리메이크 버전이 뮤직박스 순위에서 2위까지 올랐는데, 활동 중단의 여파로 정상은 밟지 못했다.[13] 2001년에 마포자이재건축되었다. 마포역 근처의 염리초등학교 옆에 있다.[14] 장덕이 부른 타이틀곡은 '예정된 시간을 위해' 이며, 장덕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TV 프로그램에서 불렀다.[15] 이후 '샐러리맨의 블루스'로 인기를 얻은 강용욱의 앨범에 '좀 더 가까이', '비 그리고 사랑'이, 김성필의 앨범에 '우리 사랑 영원히' 등의 미발표곡이 수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