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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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張嵩생몰연도 불명
전조의 인물. 량주 농서군 출신.
2. 생애
장숭은 젊었을 적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그 효성이 깊다는 소문이 마을에서 자자하였다. 이윽고 어머니가 사망하자, 장숭은 그 묘지 곁에 초가집을 짓고 살면서 진심어린 마음으로 애도하였다.[1] 이후 한나라의 왕미 휘하로 들어가 그를 섬기면서 장사에 임명되었다.[2]광흥 2년(311년) 6월, 마침내 낙양성을 함락한 왕미와 호연안은 함께 선양문에서 진나라군을 격파하고, 남궁(南宮)으로 들어가 태극전(太極殿)의 전전(前殿)에 올랐다. 그리고 군사 풀어 크게 노략질해 궁중의 보물과 궁녀를 모두 거두었다. 왕미군의 약탈로 진나라 황제들의 능묘는 도굴되었고, 궁전은 불탔으며, 성의 창고는 텅텅 비었다. 왕미군이 궁성을 한창 약탈할 당시, 유요는 자신보다 직급이 낮은 왕미가 먼저 약탈하는 것에 원망을 품고 약탈을 저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왕미가 따르지 않자, 유요는 왕미의 아문 왕정(王延)을 죽였고, 격분한 왕미는 유요군을 공격하기 시작해 서로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더이상 아군끼리의 피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장숭은 왕미에게 간했다.
"명공(明公)께서는 국가와 더불어 큰 일을 시작하였고, 이제 막 일이 세워지려는 참에 서로 공격하면 무슨 면목으로 주상을 뵐 수 있겠습니까! 낙양 평정의 공은 장군께 있으나, 유요는 황족이므로 의당 그보다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진나라가 동오를 평정했을 때 왕혼과 왕준이 다투었던 일은 그리 먼 과거가 아니니, 밝으신 장군께서는 이를 잘 헤어려주시길 바랍니다. 설사 장군께서 군사를 계속 움직여 그들을 끝장낸다 하더라도 나중에 주상께서를 알게 되신다면 장군의 자제와 종족들은 어찌 되겠습니까!"
왕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유요를 찾아가 사죄하며 말했다. 유요 역시 당장은 왕미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기에, 왕미의 사죄를 받아들임으로써 두 사람은 일단 겉으로 화해하였다. 왕미가 유요에게 말했다."이 하관(下官)이 과오를 저질렀으나 이렇게 깨달은 바 있어 사죄하러 온 것은 모두 장 장사(長史)의 공입니다."
유요는 이를 듣고 장숭을 칭송하며 말했다."그대는 주건(朱建)에 비할만하다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어찌 범생(范生)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후 유요와 왕미는 각각 황금 100근을 장숭에게 하사하였다.영가 5년(311년) 10월, 석륵이 기오(己吾)에서 연회를 열고 왕미를 초청하였다. 이때 장숭은 전제(専諸)가 오왕 료를 죽인 일과 손준이 제갈각을 제거한 고사를 들어 반대하였으나, 왕미는 듣지 않았다. 결국 석륵이 연회 자리에서 왕미를 살해하자, 장숭은 평양으로 돌아가 소무제 유총을 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