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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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田崧생몰연도 미상
전조의 인물. 자는 자대(子岱). 출신지 불명.
2. 생애
광초 6년(323년) 8월, 유요 시기에 임관하여 대홍려를 지내던 전숭은 유요가 전량의 장무를 토벌하러 친정할 때 종군하였다. 전조의 대군을 보고 두려워진 장무가 사신을 보내 칭번해오자, 유요도 전숭을 사자로 보내 장무의 항복을 받아주고 양왕으로 책봉하였다. 이후 진서장군 유후가 한중(漢中)으로 도망친 양난적을 추격해 치중 1,000여 대와 남녀 6,000여 명을 포로로 잡아서 돌아왔다. 이리하여 구지를 평정한 유요는 전숭을 진남대장군, 익주(益州)자사로 삼아 구지를 다스리게 하였다.광초 8년(325년) 3월, 한중에서 다시 세력을 기른 양난적이 구지를 습격해 함락시키고 전숭을 사로잡아 자신의 앞으로 데려오게 하였다. 양난적이 미동도 없이 서있는 전숭을 보고 좌우에 명하여 그의 무릎을 강제로 꿇도록 하니, 전숭이 눈을 부릅 뜨고 양난적을 노려보며 말했다.
"천자의 목백(牧伯)이 어찌 저족의 개한테 절할 수 있으리오!"
그러자 양난적이 답했다."자대(子岱)여, 나는 그대와 더불어 큰일을 이루고 싶소. 그대는 유씨(劉氏)에게 충성을 다하면서 어찌하여 내게는 충성을 다하려 하지 않는가?"
이에 전숭이 얼굴에 노기를 가득 띄운 채 소리쳤다."저족 도적이 노예의 재주를 가지고도 감히 내게 분간하기를 바란다는 말을 하느냐! 내가 정녕 국가의 귀신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어찌 너 같은 도적놈의 신하가 되겠느냐! 속히 나를 죽이기나 하라!"
말을 마친 전숭은 고개를 돌려 뒤에 있던 양난적의 측근에게 달려들었고, 그 측근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양난적을 향해 찔렀다, 그러나 전숭의 일격은 적중하지 못하였고, 이내 양난적에게 살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