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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30 00:33:31

정하상

정하상 바오로에서 넘어옴
<colbgcolor=#a52a2a><colcolor=#fff> 성 정하상 바오로
丁夏祥
파일:external/info.catholic.or.kr/%EC%84%B1%EC%A0%95%ED%95%98%EC%83%81%EB%B0%94%EC%98%A4%EB%A1%9C_%EC%A3%BC%EA%B4%91%ED%9D%AC%EC%9E%91.jpg
성 정하상 바오로의 이콘
이름 정하상(丁夏祥)
본관 나주 정씨 (羅州 丁氏)[1]
출생 1795년 (정조 19) 6월 5일
경기도 양근군 마현
(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
사망 1839년 (헌종 5) 9월 22일 (향년 44세)
종교 가톨릭 (세례명: 바오로)
부모 아버지 정약종 아우구스티노(丁若鍾, 1760 ~ 1801)
어머니 유소사 체칠리아(柳召史, 1761 ~ 1839)
형제자매 이복 누나 달성 배씨(達城 裵氏) 배윤문(裵允文)의 처
이복 형 정철상 가롤로(丁哲祥, ? ~ 1801)
여동생 정정혜 엘리사벳(丁情惠, 1797 ~ 1839)
친척 둘째 큰아버지 정약전(丁若銓, 1758 ~ 1816)
작은 아버지 정약용(丁若鏞, 1762 ~ 1836)
고종 사촌 정명련 마리아[2]
사촌 매형 황사영 알렉시오
시복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
시성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3]
축일 9월 20일[4]
1. 개요2. 생애
2.1. 신앙을 따르다2.2. 성직자를 찾다2.3. 교황청에 청원하다2.4. 말년
3. 한국 가톨릭에 남긴 업적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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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시대 순교한 가톨릭 교회의 성인. 축일은 9월 20일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들 시성식의 그 정하상 바오로가 이 사람이다. 19세기 동아시아 가톨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대표적 인물[5] 중 하나로, 본관은 나주(羅州)[6], 자는 가록(嘉祿).

붕당으로는 남인에 속하는 인물로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 세례명은 바오로이며, 한국 가톨릭교회에서는 '성 정하상 바오로 '로 불리고, 미국 가톨릭에서는 'Saint Paul Chong Hasang'이라고 부른다.

2. 생애

1795년 6월 5일 경기도 양근군(현 양평군)에서 아버지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어머니 문화 유씨 유(柳, ? ~ 1803. 10. 18) 체칠리아 사이의 2남 1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정약종은 1801년 신유박해순교한 것으로 유명하며, 숙부는 실학자 정약전정약용 형제가 있다. 세례명은 바오로이다.

부친인 정약종은 실학자 이익(李瀷)의 학문을 이어 서학(西學)을 연구하고, 1784년 한국 천주교 창설에 참여한 초기 평신도 지도자였으며, 1801년 순교하였다. 반면 정약종의 형제인 정약전, 정약용은 도중에 천주교 신앙을 철회하여 유배로 끝났다.

2.1. 신앙을 따르다

순교적 희생으로 진리를 증언한 아버지와 신심이 유달리 깊었던 어머니 문화 유씨 유(柳) 체칠리아의 인도로 어려서부터 천주교 신앙을 깨우쳤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부친과 친형 정철상(丁哲祥, ? ~ 1801. 2. 26) 가롤로[7][8]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하여 순교하자, 7세인 정하상은 누이동생 정정혜(丁情惠, ? ~ 1839) 엘리사벳과 어머니를 모시고 마재(馬峴)[9]의 큰댁으로 낙향하였다.

20세 때 단신 상경하여 교우 조증이(趙曾伊)의 집에 의지하며 한국천주교회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교리와 학문을 철저하게 익히기 위해 함경도 무산(茂山)에 귀양가 있는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를 찾아가 수년 간 학덕을 닦았고, 한양으로 귀환하여 한국천주교회의 발전을 위한 초석으로 종횡의 활동을 펴게 된다.

2.2. 성직자를 찾다

1801년의 신유박해로 조선 내 오직 1명뿐이던 성직자 중국인(청나라)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와 대표적인 평신도 지도자들이 순교한 후, 좀처럼 부흥의 계기를 찾지 못하는 조선 천주교회를 위해 첫째로 흩어진 교인들을 찾아내 신앙의 불길을 다시 태우게 하고 신자들의 신앙 생활을 조직화하는 한편, 한국 천주교에 다시금 성직자를 파견해 주도록 북경주교(北京主敎)를 상대로 성직자 영입운동(聖職者迎入運動)을 추진하게 된다. 그는 이 어려운 사업을 현석문(玄錫文, 가롤로)과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 등 희생적이며 유능한 동지와 힘을 모아 추진하였다.

정하상은 북경교구 주교에게 한국 천주교회에 성직자를 파견해 주도록 직접 호소하기 위하여 1816년 이후 전후 9차례나 국금(國禁)의 위험을 무릅쓰고 왕복 5천 리의 길을 엄동설한에 노복의 비천한 역무를 담당하며, 부경사대사신(赴京事大使臣)의 사행 기회에 틈타 북경을 왕래하며 북경 주교에게 계속 청원(請願)하였다. 그러나 당시 북경교구의 사정도 여의치 못하여 한 사람의 성직자도 조선으로 파견할 수 없는 사정이었다.

1823년부터 정하상은 국내 천주교회의 실질적 지도자의 일을 맡아보면서 역관(驛館)으로 북경과의 연락이 용이한 유진길과 부경사행의 노복인 조신철(趙信喆, 가롤로)을 밀사로 북경 교회와 꾸준히 교섭케 하였다.

2.3. 교황청에 청원하다

정하상의 성직자 영입 운동은 마침내 세계 교회로까지 확대된다. 즉 북경 주교를 대상으로 하는 성직자 영입 운동이 실효를 거두기 어려움을 체험적으로 간파하게 된 정하상은 마침내 세계 가톨릭의 최고 수위권자(首位權者)인 교황청교황에게 청원하기로, 세계적 경륜(世界的 經綸)의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1825년 정하상은 유진길과 의논 후 “저희들은 교황 성하께 2가지 일을 겸손되이 제안하옵는데, 이 2가지가 똑같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나이다. 이 2가지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옵니다. 신부님을 파견하는 것이 저희들로서는 큰 은혜요 저희들에게는 크나 큰 기쁨이 되리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오나, 이와 동시에 저희들의 욕구를 영속적으로 채워 주고 장래에 있어서 저희들의 후손들에게 영신적 구원을 보장하여 줄 방법이 강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충분한 일일 것입니다.”라는 내용을 담은 대교황청원문(對敎皇請願文)을 올렸던 것이다. 성직자의 파견만이 아니라 "영속적인 구원을 보장할 적극적 대책"을 청구하고 나선 것이다.

여기서 정하상이 청구한 '영속적 구원을 보장하는 적극적 대책'은 조선인 출신의 천주교 사제를 교육, 양성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유학 및 귀국을 통해 현실화되었다.

이 청원문은 북경 주교의 동정 어린 배려로 마카오 교황청 포교성성 동양 경리부로 접수되었고, 포교성성의 움피에레스(Umpierres) 신부의 의견이 첨부되어 1827년 로마 교황청에 접수되었고, 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Capellari) 추기경의 주선으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전교 성직자이던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전교 자원이 있어 마침내 1831년 9월 9일자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10]에 의해 조선교구의 설정이 세계에 선포되었다.

당시 교황청의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정하상의 편지 번역본을 읽고 "동방에 주님의 기적이 일어났다"라고 말하며 매우 큰 감동을 받았으며, 이러한 '기적'은 후대 교황들이 한반도의 전도 활동에 매우 공을 들이고 수많은 순교자들을 시성한 것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는 당시 교황청에게 있어서 동방의 조선국이라는 나라에서 일어난 이 일이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그렇게까지 놀라냐고 의문이 들 수 있겠지만 조선은 포교 한번 없이 가톨릭이 전래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가톨릭 신앙을 믿는 국가가 많은 유럽의 어느 국가에서도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지 않았는데, 조선에서는 자생적으로 가톨릭을 믿는 신자가 생겼났기 때문이다. 이는 인류 역사상 유래를 찾기 어려운 기적 같은 일이었다. 물론 조선의 역사 안에서 보면 어느 순간 갑자기 천주교 신자가 생겼다기 보다는 유교(성리학)를 공부하던 양반들이 자신들의 학문적 사유로 답하기 어려운 의문에 대한 답을 서학(천주학)에서 찾게 되었고 그 근거를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적(마태오 리치 신부의 '천주실의')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렇지만 포교를 목적으로 온 신부나 선교사를 통한 천주교 유래가 아니기 때문에 일반적인 선교와는 분명히 다른 매우 특별한 경우였다. 다만 신자나 신부와의 접촉이 없던건 아니다. 당장에 한국의 가톨릭 신자 중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승훈이 정조시대 사람이다. 그래도 일단 포교없이 신자가 생겼으니 교황청 입장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나라에서 갑자기 신자가 생겨난 일이며 그것이 전례없던 일이니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감동했을 것이다.

다만 일단 조선에도 가톨릭 신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비오 6세 때도 알려져 있었다. 당시 비오 6세는 나폴레옹에게 잡혀 유배생활 중이었는데, 이 소식이 어찌나 기뻤던지 힘든 일이 생기면 이 사실로 마음을 추스렸다고 한다.

2.4. 말년

그는 기해박해 때인 1839년 9월 22일 서소문 밖에서 45세를 일기로 순교하였다. 그보다 2달 늦게 79세의 노모 유 세실리아도 옥사 순교하였고, 다음 달에 누이동생인 정혜마저 순교하였다. 이 3명의 순교자는 1925년에 복자로 시복(諡福)되었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가톨릭에서는 "정하상의 일생은 오로지 천주만을 위한 고귀한 것이었다"라고 높이 평가한다. 일가가 모두 혼인하지 않거나 혼인했어도 모두 순교하여 정약종의 대는 끊겼고, 정약종의 남동생 정약용의 자손을 양자로 하여 정약종의 대를 잇게 했다.[11]

3. 한국 가톨릭에 남긴 업적

정하상 바오로는 한국 가톨릭 교회에 여러 업적을 남긴 인물이며, 19세기 동아시아 가톨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인정되며 연구된다. 한국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전세계 가톨릭에서 연구되는 사람으로, 아직도 그에 대한 논문과 출판물은 미국, 유럽, 남미 등 수많은 가톨릭 신학계에서 계속 나온다. 특히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라는 최초의 조선인 신부의 등장을 위해 정하상이 목숨을 걸고 노력한 위대한 업적에 대한 가치는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다. 그를 세례명으로 선택하여 세례받는 서양인들, 특히 사제와 수도자들도 의외로 굉장히 많다.

첫째, 그는 조선교구 설정의 직접적 계기를 이룬 진보적이고 세계적 안목을 가졌던 박해 시대 한국 교회 평신도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둘째, 정하상 바오로는 조선교구 설정 이후 조선교구로 부임해 오는 성직자를 계속 영입해 들였고 그 성직자들의 충실한 협조자로의 회장일을 헌신적으로 수행하여 한국 천주교회 발전에 지극히 큰 공헌을 쌓았다.

즉, 1834년 말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를 비밀리에 영입하였고 1835년 모방(Maubant) 신부, 1836년에 샤스탕(Chastan) 신부, 그리고 1837년에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 주교를 영입하였다. 이리하여 조선 교회가 교구장인 주교, 전교자인 성직자 그리고 교구 신자를 가지는 교회로의 교회 체제를 갖추게 했으며 이들 성직자를 협조하여 한국 천주교회 발전을 위해 몸바쳐 일하였다.

셋째, 그는 앵베르 주교로부터 속성 신학 교육을 받고 성직자(聖職者)가 되기 위해 선택된 한 사람이었다. 그의 순교적 열성과 교리에 대한 지적 이해, 그리고 놀라운 신덕에 탄복한 앵베르 주교가 베트남의 베리트(Beryte) 주교의 예를 따라 박해 하의 조선 교회에 필요한 방법인 성직자 양성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학지(學知)와 수덕(修德)과 신망(信望)의 정하상은 한국인 최초의 성직자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1839년의 기해박해가 일어나면서 앵베르 주교가 순교하고 정하상 자신도 순교하게 되어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때문에 최초의 신부 타이틀은 신학생으로서 외국으로 파견나간 김대건 안드레아가 가지게 된다.

넷째, 정하상은 한국인 최초의 호교론서(護敎論書)인 《상재상서(上宰相書)》로써 박해자에게 천주교의 입장을 밝히고 박해를 그치도록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체포되기 전에 미리 저술하였고 체포 후 박해 당국자에 제출된 《상재상서》는 불과 2,000여 자의 단문이나 가장 요령 있게 주장한 명문으로 이름 높은 소책자이다.

다섯째, 정하상 바오로는 순교함으로써 천주에 대한 신앙을 증거하고 영생의 영광을 얻었으며 한국인의 신앙을 굳게 실증하였다.

4. 기타



[1] 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동원공계(東園公系) 24세 상(祥)○, 학(學)○, 교(敎)○ 항렬.[2] '정난주'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인물로 큰아버지 정약현의 딸이다. 황사영 백서 사건의 영향으로 제주에 유배됐고 제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제주시 외도일동에 있는 '정난주 성당'이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성당이다.[3]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 시성.[4]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5] 성인인 그의 이름을 딴 해외 가톨릭 단체가 상당히 많으며, 가톨릭계에서는 그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진다. 아직도 전세계 신학계에서는 그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에 대한 논문과 출판물이 나오고 있다. 한국인과 무관하게 그냥 서양인, 남미인, 흑인 등의 천주교인들이 만든 단체가 많다. 미국 텍사스의 유명한 성당 중 하나인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Saint Paul Chong Hasang Catholic Church)"도 그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다만 이 성당 역시 뉴욕의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처럼 한국인 교인들을 위해 세워진 것이 그 시초이다. 이는 성당 연혁에도 나와 있다.) 물론 주임신부는 모두 서양인이다. 미국 텍사스의 정하상바오로 성당. 그의 순교일 근처에 그를 기리는 미사가 열리기도 한다. 2023년 스페인 마드리드의 한 성당에서 열린 김대건 안드레아 및 정하상 바오로 성인 순교 현양 미사.[6] 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동원공계(東園公系) 24세 교(敎)○, 학(學)○, 상(祥)○ 항렬.[7] 아버지 정약종의 첫째 부인 경주 최씨 소생이다.[8] 해남 윤씨 가문에서 270여 가문의 족보를 모아 편찬한 만가보에는 丁祥으로 적혀있다. 당시 처형당했으므로 정약종 가족은 나주 정씨 족보에 1960년대까지 기재되지 못했다. 만가보에도 사주(邪誅 : 사악한 것을 믿어 참수당함)라 적혀있다.[9] 당시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재. 현 남양주시 와부읍 능내리 일대. 2010년대 말부터 천주교 성지로 지정, 조성되어 천주교 의정부교구에서 관리하고 있다.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 팔당역에서 하차 후, 시내버스로 구 능내역 정류장에 내려서 찾아갈 수 있다. 정약용의 업적을 기리는 다산유적지도 수백 미터 이내의 거리에 위치한다.[10] 전기 카펠라리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임되어 등극.[11] 이 부분은 확인이 필요해보인다. 족보에는 정하상의 친아들로 음직으로 참봉을 지내고 통정대부에 오른 정대익(丁大益)이란 사람이 있고, 정대익에겐 또 아들이 셋이나 있으며 세 아들도 각각 후손을 많이 둔 걸로 기재하고 있기 때문이다.[12] 서강대학교가톨릭 미션스쿨(정확히는 예수회)이기 때문에, 거의 모든 건물의 이름이 가톨릭 인물의 이름이다. 김대건관도 있다. 그래도 예수회 학교라, 예수회 인물(스페인)로 된 건물명이 많이 있다.[13] 김강우도 천주교 신자이며 세례명은 빈첸시오이다.[14] 2022년 11월 30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