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성 라이온즈
1.1. 데뷔 초기
1999년에서 2000년 사이. (출처: 포토로) |
초창기에는 불같은 강속구를 지닌 투수로 많은 기대를 받았었다. 그러나 볼만 빠르고 제구가 형편없어 선발과 불펜으로 적지 않은 기회를 부여받았음에도 전혀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게다가 투구 폼도 전성기 시절과는 달리 많이 딱딱하고 엉성하여 더욱 제구가 안 되는 모습이었고, 그렇게 평범하게 볼만 빠른 미완의 대기로 남아 있다가 사라지나 싶었다. 그래도 정현욱을 붙잡아 놓고 키웠던 장본인이 바로 임호균.
여담으로 1998 시즌 후 해태 타이거즈와의 임창용 ↔ 양준혁, 곽채진, 황두성 트레이드 때 원래 황두성 대신 해태로 갈 뻔했다. 그러나 해태 구단 실무자의 착각으로 황두성이 대신 갔다.[1]
2000년에 2군 생활을 하던 도중에는 김성근에게 맞기도 했었다.[2]
2002~2003년에는 필승조는 아니었지만 삼성의 처참한 계투진에서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다. 또한 2002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어가 우승반지를 획득하였다.
1.2. 2004 시즌
2004년에 선동열 투수 겸 수석코치가 부임함으로써, 스프링캠프에서부터 투구 폼 교정과 그의 조련 덕에 이 때부터 조금씩 포텐을 터뜨려 나가기 시작한다. 시즌 중반까지 윤성환과 함께 특급 중간계투로 쏠쏠하게 활약하며 삼성의 막강 허리로서 잘 나가나 싶었는데 시즌 막판 윤성환, 현재윤과 함께 병역비리 사건이 터졌고, 현재윤 등과 함께 구속됐다.구속된 후 구치소에서 푸시업을 하면서 체력을 유지했다고 한다. 방법은 다르지만, 수감 중에도 공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고 하는 유동훈도 비슷한 케이스.
1.3. 2007 시즌
2004년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으로 구속되어 단기 징역을 살고 출소한 후, 관련 법규에 따라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했다. 경산시청에서 복무를 마치고 2007년 8월에 소집 해제되어 마운드로 돌아왔다. 이후 삼성 마운드의 기둥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황두성 대신 해태로 트레이드될 뻔한 걸 생각하면 삼성팬으로서는 아찔한 일.병역비리로 야구인생이 그대로 끝날 뻔 했으나, 교도소에서 복역하며 팔굽혀펴기[3]로 체력을 유지했다. 인터뷰에선 "다른 재소자들도 운동을 하는데 운동선수인 내가 운동을 안 하면 어떡하냐." 면서 구슬땀을 흘렀다고. 출소 후 복무하면서 퇴근 후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그 노력은 그대로 빛을 발해 불명예를 이겨내고 재기에 성공하는 원동력이 된다.
1.4. 2008 시즌
2008년 프로야구에서 LG 정재복, SK 정우람과 함께 소위 정노예 3인방 중 수장으로 떠올랐다. 불펜 투수로 주로 나왔음에도 정규이닝을 채웠을 정도로[4] 이닝을 많이 소화한 데다 선발, 불펜, 마무리 같은 보직을 가릴 것 없이 등판했기 때문. 선동열 감독의 야구 스타일에 부합하는 투수 중 하나. 다만, 정현욱의 등판 간격을 보자면 혹사라고 하긴 뭐하다. 집중 관리되는 노예인 듯.한화 마정길과의 호각지세로 마노예 vs. 정노예라고 불리기도 했다. 다만 팀이 유리할 때에는 나오고 점수차가 벌어져 질 듯한 경우 안 나오는 케이스.
이 2008 시즌과 후술할 2009 WBC 당시의 맹활약으로 인해 국민 노예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이에 착안하여 이후 2009 시즌 초에 캐롤 'The First Noel'를 개사한 노예송이라는 응원가가 나오기도 했다. 당연히 처음 나왔을 때부터 비난을 받고는 바로 사라졌다.#
1.5. 2009 시즌
WBC에서 돌아오자마자 쉴 틈도 없이 꾸준히 등판하며 초반부 초토화된 삼성의 투수진의 한 줄기 희망으로 자리매김했으나 점점 방어율이 상승, 결국 2군으로 내려갔다. 부상이 아닌 계속된 투구로 인한 피로누적으로 인한 부진이었으며, 11일만에 다시 1군경기에 출장하여 다시 위력적인 투구를 보여주었었다.마운드가 붕괴한 삼성과 선동열 감독은 선발 5이닝-권혁 2이닝-정현욱 2이닝 등의 극적인 운영을 보여줬는데, 혹사로 권혁과 함께 두자릿수 세이브포인트를 달성하기도.
그러나 9월 잔여경기 시즌에서 롯데와 피말리는 4위 싸움을 하는 도중, 롯데를 상대로 등판해서 권혁과 함께 두들겨 맞아버렸다. 그리고 한화를 상대로 3:3 상황에서 등판하자마자 4안타 볼넷 1개를 내주면서 방어율 99.9를 찍어버린뒤에 강판당하면서 그날 패배의 원인이 되어버릴 정도로 페이스가 하강.
여담으로 시즌 종료후 일본프로야구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가 이승호랑 정현욱 영입에 관심이 있다는 기사가 나왔으나 등록일수가 모자라 규정상 해외진출이 불가능했다.#
1.6. 2010 시즌
겨울과 봄에 국제대회가 없는 상황 속에서 푹 쉰 결과, 팀 내 홀드, 세이브 1위로 2009시즌보다 나은 성적을 보여주며 권혁, 안지만과 함께 안정권 트리오를 결성하며 삼성의 무적 불펜 전설을 완성했다. 구속도 150km/h까지 올랐으며 2009년과 비교해봤을 때 커브도 많이 좋아졌다. 그러나 2009 시즌과 마찬가지로 시즌 막판 피로가 누적되면서 페이스가 다소 떨어진 모습을 보였다. 최종 성적은 ERA 3.20 9승 1패 11세이브 12홀드.10월 7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는 팀이 스코어 5:2로 지던 6회말 2사 2루에서 세 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다섯 타자를 상대하여 단 한 명도 출루시키지 않고 1⅓ 23투구수 2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했다. 팀은 8회말에 4점을 뽑아 5:6으로 재역전승했다.
10월 8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는 6회초에 권혁이 3실점하여 팀이 스코어 스코어 4:0으로 지고 있던 1사 1, 2루에서 등판하여 3개의 공으로 아웃카운트 2개를 잡아냈다. 이 날 ⅔이닝 3투구수 무실점을 기록했고, 팀은 스코어 4:3으로 패했다.
10월 10일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는 팀이 스코어 4:2로 앞선 4회말 1사 2,3루에서 세 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첫 타자이자 1번타자인 정수빈에게 2타점 3루타를 맞고 3번타자인 이종욱에게 1타점 내야안타를 맞아 스코어 4:5를 만들고 말았다. 이 날 1⅔이닝 27투구수 4피안타 1탈삼진 1실점 1자책점을 기록했고, 팀이 스코어 4:6으로 지던 8회초에 2점을 뽑아 패전을 면했으며 팀은 11회초에 2점을 뽑았지만 11회말에 3점을 내줘 8:9로 패했다.
2010년 플레이오프 전 경기에 등판하여 5⅔이닝 5피안타 1사구(死球) 1탈삼진 1실점 1자책점 평균자책점 1.59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SK 와이번스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2경기 2⅔이닝 3피안타 1사구(死球) 2탈삼진 2실점 2자책점 평균자책점 6.75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패로 준우승에 그쳤다.
2010년 포스트시즌 9경기 중 7경기 등판하여 8⅓이닝 8피안타 2사구(死球) 7탈삼진 3실점 3자책점 평균자책점 3.24를 기록했다.
1.7. 2011 시즌
시즌 초기, 삼성 불펜진 중 제일 불안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5]4월 3일 KIA전에서는 8:8 동점상황에서 이범호에게 솔로홈런를 맞았으며, 4월 8일 SK전에서는 1:1 동점 상황에서 차우찬 뒤에 등판하여 정상호에게 투런홈런을 맞았다. 그리고 4월 13일 LG전에서는 박용택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았다.. 이리하여 개막한지 2주도 안되어 3패를 기록하게 되었다. 4월 22일 넥센전에서도 강정호에게 역전 적시타를 맞았다. 카도쿠라 켄이 쌓아놨던 주자라 패전투수가 되진 않았지만. 이렇게 시즌 초, 구위와 구속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제구가 잘 안되는 모습에 '노레기'로 격하되어 불리기까지 했다. 4월 월간 기록이 13경기에 12⅔이닝 소화하면서 15피안타(3피홈런) 5볼넷에 3패 3홀드 ERA 4.97이었으니... 그래도 탈삼진도 12개를 뽑아냈기도 하고 3패를 찍은 직후부터 슬슬 살아나고 있긴 했었다.
이윽고 차츰 안정을 되찾더니 4월 말부터는 예전의 페이스로 돌아와 팀의 막강 허리의 한 축을 책임졌다. 감이 살아난 5월 이후의 방어률은 0.85(…) 결국 1위싸움의 분수령이 되었던 7월 26일~28일 기아 원정 경기에서 26일과 28일 등판하여 모두 무실점 호투로 홀드를 수확하고 1점대 방어율까지 떨어뜨리며 관리받는 노예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여주었다.
8월 4일 넥센과의 경기에서 홀드를 기록하면서 16홀드로 LG 이상열과 홀드 공동 선두를 달리게 되었다.
8월 7일 롯데와의 경기에서 배영수의 7이닝 1실점 호투 다음으로 3:1 스코어 상황 속 8회에 등판하여 2타수 2안타의 맹타를 휘두르고 있던 문규현을 삼진 처리한 이후 대타 이인구와 김주찬을 모두 땅볼처리하며 삼자범퇴 시켰는데, 오승환이 8월 2일~8월 4일 넥센과의 경기에 모두 나와 세이브를 올린데에 이어 5일 롯데전 역시 마무리로 등판하여 세이브를 올리면서 4연속 등판했기에 휴식을 위해서 등판하지 않고는 정현욱이 마저 9회까지 마무리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 롯데의 클린업 트리오였던 손아섭-이대호-홍성흔까지 깔끔하게 막아내며 2이닝 1탈삼진 무실점의 퍼펙트한 피칭으로 시즌 첫 세이브를 기록했다.
2011년에 24홀드로 홀드 2위를 차지하였다.
팀이 시리즈 전적 1승으로 앞선 2011년 10월 26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SK 와이번스와의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팀이 스코어 0:2로 앞서고 있던 8회초에 등판하였는데, 노예 생활을 한동안 하지 못해서 감을 잃었는지, 박재상에게 2루타, 최정에게 볼넷, 박정권에게 안타를 허용하여 폭풍 같이 스코어 1:2를 만들고 오승환을 소환하게 만들었다. 끝판대장의 위엄과 대수비로 나온 이영욱의 활약으로 팀이 1:2로 승리하게 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정현욱은 예능이 뭔지 아는 선수+잔인한 희망고문 선사자[6]가 되었다. 이 날 정현욱은 0이닝 7투구수 2피안타 1볼넷 1실점 1자책점 평균자책점 99.99를 기록하였는데 이날 등판이 정현욱의 2011년 한국시리즈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등판이 되었다. 그리고 팀은 시리즈 전적 4승 1패로 우승했다.
다행히 아시아 시리즈에서는 한국시리즈의 부진을 만회하듯 중간 계투로서 예전같은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 팀의 첫 우승에 기여했다.
1.8. 2012 시즌
성적이 굉장히 좋지 않았다. 2011년에도 시즌 초에는 부진하다가 5월부터 서서히 살아나는 모습을 보였지만, 12시즌엔 6월 들어서도 컨디션을 되찾지 못했다.5월 4일, 한 팬이 새벽에 술집에서 정현욱, 안지만, 오승환을 봤다는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팀은 침체기에 빠져 있는데 술이나 푸러 다닌다며 까이고 있다. 특히 정현욱은 평소에 굉장히 성실한 이미지인 데다, 5월 4일 당일 경기에 등판해 1이닝 3실점이라는 처참한 결과를 보여 더 까였다.
6월 8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SK 와이번스 전에서 4년만에 선발로 등판했다. 윤성환의 갑작스런 부상으로 생긴 선발진의 공백을 메꿈과 동시에 떨어진 정현욱의 컨디션을 오랜 이닝을 던져보며 올려보자 하는 의미의 선발등판으로, 대부분은 60구 정도를 던지고 내려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류중일 감독은 80구에서 100구는 던져야 하지 않겠냐고 발언. 실제로 93개의 투구를 하며 4⅔이닝 3실점을 하였다. 성적만 보면 상당히 좋지 않지만 불펜 투수로 뛰다가 4년만에 선발로 등판한 점도 그렇고, 5회 투아웃까지는 꾸역이지만 상당히 호투하다가 1아웃을 남겨놓고 연타를 맞아 만루 상황에서 강판되었고, 후속 투수가 필승조도 아닌 이우선이 올라와 공 두개로 깔끔히 3점 전부를 분식회계 해버렸다는 점[7] 등등 때문에 정현욱은 그리 까이지 않았다.
그나마 추격/패전조로 내려간 후로는 제 몫을 해주며 2012년 9월에 접어든 후론 방어율도 3점대로 많이 낮아졌다. 그런데 하도 말아먹은 경기의 임팩트가 커서인지 평균자책점'만' 보면 많이 까였다.
팀은 또다시 우승했지만, 본인은 이전 시즌에 비해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다만 리그 전체적으로 봤을 땐 여전히 중상위권 성적이라 할 수 있었다.
SK 와이번스와의 2012년 한국시리즈에서 2경기 1⅔이닝 2피안타 1탈삼진 2실점 비자책점을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승 2패로 우승하여 2년 연속 페넌트레이스&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1.9. FA
시즌이 끝난 후 FA를 신청. 본인은 4년 계약을 원했지만 구단 측에서는 3+1 계약을 제시하여 아귀가 맞지 않았고, 결국 FA 시장으로 나가게 되었다. 나올 당시 "후배들에게 좋은 선례를 보여주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삼성 팬덤의 분위기는 좋지만은 않았다. 대부분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한 멍한 반응을 보였으며, 일부 팬들은 배신감마저 느껴진다는 말까지 했다. 하지만 오히려 2군에서 썩던 신인들에게 간만에 기회를 줄 수 있게 되었다며 전화위복이라는 이들도 있었다.어찌됐건 정현욱은 다른 구단과의 협상을 가지게 되었다. 불펜 사정이 널널하지 못한 KIA 타이거즈나 한화 이글스, NC 다이노스 등지에서 노릴 가능성이 컸다.[8]
그러나 당초 예상과는 다르게 2012년 11월 17일, LG와 4년 28억 6천만원에 계약하며 LG 트윈스로 둥지를 옮겼다. 원소속구단 우선 협상 기한을 넘기자마자 LG 김기태 감독으로부터 함께 하자는 문자를 받았고, 백순길 단장이 직접 찾아와 오랫동안 함께 해보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야구선수로서 어느 정도 황혼기에 접어들고 있는 정현욱에게 4년의 계약기간을 보장한 것이 정현욱의 마음을 움직였을 가능성이 크며, 봉중근이라는 마무리 투수가 있는 LG 트윈스에서 그나마 부담갖지 않고 하던 필승조 역할을 계속 할 수 있어서 LG 트윈스행을 선택한 듯[9]. 자녀들 교육 문제도 있고... 보상선수로 이승우가 삼성으로 갔다.
이적 후에는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에서는 세 가지 표현이 유행했는데, 첫째는 웃음이 나옵니다 ㅋㅋ[10], 둘째는 박수친다[11] 세번째는 그 선수
2. LG 트윈스
2.1. 2013 시즌
자세한 내용은 정현욱/선수 경력/2013년 문서 참고하십시오.2.2. 2014 시즌
자세한 내용은 정현욱/선수 경력/2014년 문서 참고하십시오.2.3. 2015 시즌
재활이 이상할 정도로 길어지면서 의구심을 자아냈는데, 6월 말경 소식이 전해졌다. 그런데 이전의 정현욱이 맞나 싶을 정도로 살이 확 빠져버렸다.2.3.1. 위암 투병
링크에 있는 사진에서 보듯이 살이 쪽 빠졌는데, 딱 봐도 운동선수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너무 메마른 몸이다. 엠엘비파크의 LG 팬 중 한 사람이 이천에 갔을 때는 등번호를 보고서야 정현욱임을 알아봤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링크 밑의 댓글에서 위암 투병이라는 말이 나온 것.위암이라는 소문이 맨 처음 나온 건 6월 19일디시인사이드 LG 트윈스 갤러리의 한 유동닉의 댓글이다. 이후 삼갤에 소식이 전파되었고 이 소식이 꼬리를 물어 결국 정현욱 연관검색어에 '정현욱 위암' '정현욱 암투병' 이 뜨기에 이르렀다.
캐스터안이 현재 정현욱이 팔꿈치가 아닌 다른 부분에서 아프다고 언급했다는 카더라 또한 언급되었다.
현역 선수 중 위암에 걸렸던 선수는 위의 정현석과 (당시 현역인)김상진 선수가 있었다. 김상진은 항목에도 있지만 먹성이 좋았던 것로 유명했다고 한다.
LG의 담당기자인 윤세호 기자에 의하면 2016년 복귀를 목표로 재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2.4. 2016 시즌
2군 대만 스프링캠프 명단에 포함되었다.
개막 엔트리에 들지 못했고 2군에서 시즌을 시작했다. 4월 9일 2군 경기에 선발투수로 등판해 5이닝 1실점을 기록했다.
4월 15일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647일만에 1군 등판하여 3⅓이닝 무실점을 기록하고 1043일만에 세이브를 올렸다. 대부분의 팬들은 정현욱의 복귀에 박수를 보냈다.
4월 22일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 대신 코프랜드가 1군으로 콜업되었다.
5월 22일, 컨디션이 좋지 않던 우규민이 내려간 자리에 한 달만에 콜업되었다. 이준형, 코프랜드 등판 경기에 각각 1이닝씩 등판하며 롯데 타선을 틀어막았다. 전성기만은 못하지만 클래스는 여전하다는 것을 증명한 역투.
6월 7일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가 26일날 1군으로 올라왔다.
8월 12일 잠실 NC전에서 8회초 진해수가 최동환이 내보낸 2명의 주자를 모두 분식하여 역전당하고 박민우를 헤드샷까지 하면서 퇴장한 가운데 등판하여 나성범을 고의사구로 걸러 1사 만루의 절체절명 최대의 위기 상황에서 조영훈과 박석민을 연속 삼진으로 잡아내며 자칫하면 6월 14일 경기 때의 대량실점이 재현될 뻔할 상황에서 팀을 구원하고 9회초에도 등판하여 깔끔하게 삼자범퇴로 처리하면서 팀의 9연승의 발판을 마련한 LG 이적 이후 최고의 호투를 보여주며 승리를 챙겼다. 특히 박석민을 삼진 잡을 때 낙차 큰 커브로 얼어붙게 만든 것은 일품 중의 일품. 그리고 그의 말처럼 16년 LG는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2.5. 은퇴
부상과 암을 이겨내고 2016년 복귀를 이뤄냈지만 11월 18일 은퇴를 선언했다.구단에선 만류했지만 스스로의 의지가 강해 뜻대로 은퇴를 하게 됐다. 이미 시즌 시작 전에 은퇴를 결심했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는 LG에서의 정현욱은 이닝이터와 실패라는 평가가 공존하지만 그다지 위력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위암 투병이라는 불운까지 겹쳐서 LG의 FA 잔혹사의 일부가 되었다. LG 트윈스/팀 특징 참조
3. 국가대표 경력
3.1.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전성기 투심 패스트볼. |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국가대표 대회였던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임창용과 함께 필승조로 대회내내 국민노예라 불릴 만큼 훌륭한 활약을 했다. 심지어 유니폼에 들어간 로마자 성 표기도 JONG(종). 모처에선 명성황후를 패러디해 "내가 조선의 국노다"라는 말을 만들기도 했다.
1라운드 A조의 일본전에서 조기에 무너진 김광현의 뒤를 이어 2회 1사에 등판하였으며, 1.1이닝 동안 네 타자를 모두 깔끔하게 잡아내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그리고 중국과의 경기에서 콜드승을 거두며 다시 만난 일본과의 A조 1,2위 확정전에서 봉중근의 뒤를 이어 1대0으로 앞선 6회 1사 상황에서 등판하였는데, 1.2이닝동안 탈삼진을 무려 3개나 빼앗아내며 7회까지 딱 두 개의 단타만 허용하고 무실점으로 마운드를 넘겨주었으며, 정현욱의 호투에 힘입어 대표팀은 일본을 1대0으로 누르고 조 1위로 2라운드에 기분좋게 진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다시 만난 일본과의 결승전, 에이스 봉중근이 초반부터 꾸역꾸역 주자를 쌓아가며 투구수를 많이 빼앗긴 탓에 힘이 빠지며 5회에 무사 1,3루 위기를 초래하자[12], 당시까지 평균자책점이 0이었던 불펜진의 에이스 정현욱은 이 막중한 위기상황에서 구원등판하였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정현욱의 인생투가 시작되었다. 조지마 겐지를 풀카운트 끝에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우고, 뒤이은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마저 3구 삼진[13]으로 돌려세움과 동시에 2루 도루를 시도했던 아오키 노리치카가 오버 슬라이딩으로 태그아웃되며 이 위험한 상황을 무실점으로 막아내었다. 6회에는 일본 타선을 삼자범퇴로 처리하였으며, 7회에도 또 등판하였으나 공이 서서히 읽혔는지 무사 1,3루 상황에서 나카지마 히로유키에게 좌전안타를 얻어맞으며 1실점을 허용했으며, 뒤이은 아오키 노리치카에게는 담장 바로 앞에서 추신수의 호수비로 겨우 잡아낸 정타를 얻어맞는 등 구위가 떨어지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정현욱은 결국 1사 1,3루 상황에서 조지마 겐지에게 5-4-3 병살타를 얻어내며 또 한번 위기를 넘겨내었다. 그리고 8회초에도 또 등판하여 오가사와라 미치히로를 삼진으로 돌려세웠으나, 뒤이은 우치카와 세이이치에게 깨끗한 우전안타를 맞자 그제서야 류현진으로 교체되며, 이번 대회에서 모든 것을 불태운 이 '국노'는 그제서야 미소를 보이며 마운드를 내려갔다. 이후 류현진이 2루타를 얻어맞으며 정현욱의 주자를 불러들이는 바람에 정현욱의 결승전 성적은 3.1이닝 4탈삼진 2자책점.
최종 성적은 10⅓이닝 2자책점 13탈삼진 ERA 1.74로[14], 2006년 wbc에 구대성이 있었다면, 2009년에는 정현욱이 있었다고 할 정도로 폭망한 계투진에서 홀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었으며, KBO 수준을 크게 뛰어넘는 타자들을 말 그대로 압도한 패스트볼과 그와 짝을 이루는 커브를 유감없이 과시하였다. 15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대표팀이 연이은 처절한 졸전으로 국제대회에서 죽을 쑬 때마다 이 대회 정현욱의 활약상은 여전히 야구팬들 사이에서 회자될 정도.
4. 연도별 성적
- 붉은 글씨는 리그 1위 기록.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기록.
역대 기록 | ||||||||||||||||
<rowcolor=#ffffff>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ERA | 피안타 | 피홈런 | 사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WAR |
1996 | 삼성 | 1군 기록 없음 | ||||||||||||||
1997 | ||||||||||||||||
1998 | 5 | 7⅔ | 1 | 0 | 0 | 0 | 4.70 | 6 | 3 | 6 | 2 | 4 | 4 | 1.44 | -0.10 | |
1999 | 25 | 78⅔ | 3 | 7 | 0 | 0 | 5.03 | 80 | 12 | 32 | 56 | 54 | 44 | 1.39 | 1.08 | |
2000 | 2 | 5 | 0 | 0 | 0 | 0 | - | 6 | 1 | 3 | 2 | 6 | 2 | 1.60 | -0.04 | |
2001 | 1군 기록 없음 | |||||||||||||||
2002 | 20 | 36 | 1 | 1 | 0 | 0 | 4.00 | 32 | 2 | 18 | 34 | 20 | 16 | 1.33 | 0.64 | |
2003 | 43 | 85⅓ | 4 | 5 | 1 | 3 | 4.59 | 91 | 6 | 34 | 77 | 47 | 44 | 1.43 | 1.96 | |
2004 | 27 | 85⅔ | 4 | 5 | 0 | 1 | 3.36 | 81 | 8 | 42 | 67 | 41 | 32 | 1.39 | 1.79 | |
2005 | 군복무(사회복무요원) | |||||||||||||||
2006 | ||||||||||||||||
2007 | 11 | 14⅔ | 0 | 1 | 1 | 0 | 5.52 | 15 | 3 | 11 | 6 | 10 | 9 | 1.64 | -0.12 | |
2008 | 53 | 127 | 10 | 4 | 0 | 11 | 3.40 | 108 | 3 | 56 | 97 | 51 | 48 | 1.28 | 3.58 | |
2009 | 62 | 79 | 8 | 5 | 6 | 16 (2위) | 3.42 | 77 | 8 | 38 | 66 | 33 | 30 | 1.43 | 2.31 | |
2010 | 61 | 70⅓ | 9 | 1 | 12 | 11 | 3.20 | 66 | 3 | 30 | 61 | 31 | 25 | 1.31 | 2.25 | |
2011 | 59 | 72⅓ | 4 | 3 | 1 | 24 (2위) | 2.36 | 70 | 4 | 34 | 52 | 22 | 19 | 1.38 | 2.17 | |
2012 | 54 | 62⅔ | 2 | 5 | 0 | 3 | 3.16 | 57 | 1 | 21 | 48 | 25 | 22 | 1.25 | 1.62 | |
<rowcolor=#ffffff>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ERA | 피안타 | 피홈런 | 사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WAR |
2013 | LG | 54 | 47⅔ | 2 | 5 | 2 | 16 (5위) | 3.78 | 55 | 4 | 26 | 31 | 23 | 20 | 1.68 | 0.72 |
2014 | 25 | 32⅓ | 2 | 2 | 0 | 1 | 4.73 | 39 | 4 | 16 | 24 | 17 | 17 | 1.67 | 0.57 | |
2015 | 1군 기록 없음 | |||||||||||||||
2016 | 17 | 21 | 1 | 0 | 1 | 3 | 7.29 | 22 | 4 | 14 | 18 | 19 | 17 | 1.52 | -0.27 | |
KBO 통산 (15시즌) | 518 | 826⅓ | 51 | 44 | 24 | 89 | 3.80 | 805 | 66 | 381 | 641 | 403 | 349 | 1.40 | 18.15 |
[1] 당시 해태 타이거즈 구단 실무자가 정현욱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자 그 공 빠르고 밥 잘먹는 투수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원했던 정현욱 대신 황두성이 넘어오자 해태 구단에서는 트레이드를 무를려고 했으나, 이미 입단식을 모두 치르고 유니폼 등번호까지 모두 배정받은 상태에서 그럴 수도 없었다고 한다.[2] 김성근은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해임된 후 2000년에 삼성의 2군 감독을 1시즌 동안 맡다가 1년 뒤 LG로 가게 된다.[3] 하루 1천 개를 했다고 한다.[4] 53경기 등판, 7경기 선발, 127이닝 투구.[5] 일단 2008시즌 53경기 동안 127이닝, 2009시즌 62경기 동안 79이닝, 2010시즌 61경기 동안 70⅓이닝을 소화했고, 2008, 2010년의 포스트시즌 등판에 2009 WBC 까지 합치면 과부하가 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6] 이 날 양팀의 경기 내용은 심각한 투수전+물빠따 양상이었고, SK의 박희수가 불을 지른 후에는 삼성이 무난하게 경기를 이기는, 타 팀 팬들이 보기에는 지루한 경기라고 할 수 있었다.[7] 즉 정현욱이 올라와 있는 상황에서 직접 실점한 점수는 0점.[8] 특히 KIA의 경우 선동열 감독이 정현욱과 삼성 시절 선수-감독 사이로 한솥밥을 먹으며 삼성 최강 불펜이었던 JOKKA 라인을 구축했던 데다가 불펜야구를 선호하는 선동열 특성상 불펜이 약한 KIA의 팀 사정 때문에 정현욱을 원할 가능성이 컸고, 그리고 한화 역시 김응용 감독이 삼성 감독이던 시절 정현욱과 함께했던 적이 있어서 한화도 유력 후보 중 하나였다. 실제로 당시 김응용 감독은 정현욱과 김주찬을 FA로 영입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하기도 했다.[9] 위에서 언급된 한화 이글스, KIA 타이거즈, NC 다이노스에 제대로 된 마무리감이 없기 때문에, 만약 정현욱이 갔다면 꼼짝없이 마무리 낙점이다.[10] 이적 후, 시범경기에서 최형우에게 홈런을 맞았다.[11] 3년 계약을 뿌리치고 LG와 4년 계약을 했을 때, 삼성 라이온즈 단장인 송삼봉의 박수치며 보냈다에서 유래.[12] 아웃카운트 12개를 잡는동안 투구수가 무려 94개였다.[13] 작정하고 공 세개를 전부 스트라이크 존에 91마일 패스트볼로 꽂았는데, 어찌나 구위가 무시무시했던지 반대손 타자였던 오가사와라가 세 번 모두 헛스윙을 할 정도였다.[14] 결승 일본전에서 실점하기 전까진 7이닝 무실점을 기록했으며 실점한 점수 중 1점도 류현진의 분식회계에 의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