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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30 22:08:16

노예(야구)

1. 개요2. 노예의 말로3. 21세기 KBO 각 구단의 대표적인 전직, 현직 노예들4. 과거5. 아마추어
5.1. 한국의 경우
5.1.1. 개선을 위한 노력
5.2. 일본의 경우5.3. 기타
6. 관련 문서

1. 개요

파일:50이닝 1400구.jpg
야구에서 투구이닝, 출장 경기, 투구수 3가지가 많은 투수를 가리키는 속어. (계약 기간 내에서는) 소속이 구속된 채 혹사당하는 것을 노예에 빗대어 말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1.1. 중간계투

대개 중간계투 투수들이 노예가 되는 경우가 많다. 중간계투의 경우 지고 있는 경기라 해도 스코어가 박빙일 경우 필승계투조를 투입해서 상대 타선을 최대한 틀어막고 역전을 노리는 경우가 많으며, 선발 투수가 난조를 보일 때 선발을 조기에 강판시키고 바로 믿을 만한 중간계투를 투입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현대 야구에서 대부분의 노예는 중간계투이다. 이는 제아무리 좋은 투수가 많이 있어도 마운드에 올릴 수 있는 투수는 단 1명뿐인 야구의 환경상, 연투 강도 차이만 있을 뿐이지 어느팀 어느 감독이건 위기 때 애니콜해서 불끄는 노예는 매 시기 매 시즌 선수만 바꿔가면서 존재한다. 이는 감독의 멘탈 및 선수 운영에도 영향을 미치지만, 선수의 동기부여 차원에서도 영향을 주는 부분이다.

특히 프라이머리 셋업맨이나 스윙맨 포지션의 중간계투요원 중에서 노예가 많다. 대표적으로 선동열 감독은 삼성 감독 시절 5회까지 이기고 있으면 선발 투수를 5회까지만 던지게 하고 바로 내린 뒤 불펜투수들을 물량으로 퍼부어 이기는 벌떼야구를 선보였다. 불펜 중심의 경기 운용을 하다보니 권오준, 정현욱, 권혁 등의 셋업 노예가 생긴 것. 하지만 반대로 점수차가 크지 않음에도 지는 상황이면 그냥 게임을 포기하는 선수 운용을 보여서 엄청나게 까이기도 했다. 권혁은 이후 류중일 체제에서 안정적인 필승조, 원포인트 릴리프 등으로 뛰다 FA를 통해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 한화로 이적하며 원없이 던져보고 싶다는 말을 남겼고 결국...

1.2. 마무리 투수

마무리 투수는 귀족 중간계투 중 유일하게 보직이 고정되어 있고 선발 투수만큼 꾸준히 관리를 받기 때문에, 보통 1이닝을 초과해서 던지게 하는 경우가 드물고 지고 있는 경기가 8~9회까지 지속될 경우 대개 패전처리 투수(이른바 추격조)가 등판하지 마무리가 올라올 가능성은 낮다. 물론 한화는 예외 드물게 실전감각 유지를 위해 올라오는 경우가 있지만, 이런 때는 보통 팀이 연패를 하거나 압도적인 점수차로 연승을 하고 있다는 뜻이므로 그리 흔한 경우는 아니다. 물론 팀의 불펜 뎁스가 얇아서 마무리까지 가기 힘든 상황이 되거나, 플레이오프처럼 긴박한 상황에서는 마무리 투수를 8회에 출격시켜서 2이닝씩 굴리는 경우도 있다. 마리아노 리베라가 대표적.

하지만 이러한 관리받는 마무리는 현재의 이야기이고 1이닝 마무리 시스템이 정착하기 이전까지는 불펜에서 가장 잘 던지는 투수를 마무리로 만들어서 가장 많이 던지게 했었다. 두목 노예 6~7회 박빙 상황만 되면 올려서 경기 끝까지 가게 하는 경우가 대다수였고, 세이브 기록 중 3이닝 이상을 던져서 기록한 세이브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 뛰어난 마무리라면 1년 투구 이닝이 100이닝 넘는 일도 흔했다. 이러한 마무리 선수나 그 운용법을 칭하는 단어가 중무리 투수이다. 지금도 뭔일이 일어날지 모르는게 야구니, 중간계투가 약하거나 죄다 연투해서 휴식이 필요한 팀이 후반 박빙 승부를 할때 마무리 투수를 빨리 올리거나, 연장전 승부때 마무리 투수에게 긴 이닝을 맡기는 경우는 자주 나온다. 2013년 포스트시즌의 손승락, 오승환이 대표적.

1.3. 선발 투수

프로시스템이 확고하지 않던 초창기부터 1990년대까지는 선발 투수가 휴식일 보장 없이 연투하러 나오곤 했으며 한 경기당 투입되는 투수의 숫자가 2명 남짓으로 선발투수가 완투하는 경기는 흔했으며 감독의 투수교체 지시에 투수가 불쾌한 표정을 지을 정도로 완투는 선발투수의 자존심과도 같았다.

1994년 이광환 감독의 스타시스템이 도입된 1990년대 후반부터는 선발 투수의 적정 투구수 및 휴식 일정[1]을 많이 지켜주는 편이다. 물론, 급한 경우 3일 정도의 짧은 휴식을 가진 후 바로 등판시키는 사례도 있다.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심심찮게 보이곤 한다. 아직도 선발 뎁스가 약한 강팀이 플레이오프에서 3인 로테이션을 돌리는 사례가 있을 정도.

가끔 선발 투수가 2~3일 정도 쉬고 구원등판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선발 투수들이 휴식일 중간에 한 번 정도 갖는 불펜 피칭 대신에 이루어지는 경우일 때가 많다. 이 또한 선수마다 선호도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이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니다[2]. 애초에 팀이 웬만큼 막장가도를 달리고 있지 않으면 불펜 피칭 대신 등판시키지도 않는다. 현대 야구는 스케줄 강도는 물론 타자들의 상향평준화로 인해 이전까지 표준이라고 생각했던 4일 휴식조차 정말 특급 선수 아니면 맡기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이전이라면 생각할 수 없었을 정도로 선발투수의 육체적 스트레스가 심각함을 알려주는 사례.

21세기 현재 한국프로야구에서는 선발 투수로 구분되는 선수들간의 실력 격차가 크고 이닝 이터로 인정받을 만한 특급 선발이 많이 부족해서 선발 노예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용병 선발 투수들조차 예외없이 선발 투수의 퀵후크가 유행하면서 불펜노예들이 늘어났을 뿐. 그 대신 류현진, 김광현, 윤석민 등의 특급 선수들에게 주문하는 100구 이상의 많은 투구수가 선발 노예의 상징이다. 특히 불펜 뎁스가 약한 팀은 선발 투수가 버틸 수 있으면 어떻게든 많이 투구수와 이닝을 쥐어 짜서 불펜의 등판을 줄여야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특급 선발 투수의 경우 한계 투구수를 110, 120이 넘어 될 때까지 쥐어 짜는 잡는 감독은 여전히 남아 있다. 몇 년간 보이지 않다가, 2015년 에스밀 로저스가 등장하면서 오랜만에 선발 노예가 부활했다. 로저스 이후에는 메이저리그 진출 전까지 근 4년간 투구수, 투구 이닝이 제일 많은 양현종이 선발 노예로 굴려졌다.

일본은 6인 선발제가 보편화된 편이라 휴식일이 긴만큼 오래 가져가는 편이고 메이저리그의 경우 2013년 기준 현역 감독들인 신시내티 레즈더스티 베이커[3]LA 에인절스마이크 소시아등의 경우가 선발 투수를 많이 굴리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1.4. 야수의 경우

한국에서는 거의 관심밖이지만, 야수들도 노예 출장의 대상이다. 특히 선수층이 얇은 포수, 그 중 타격이 좀 되는 포수가 주로 희생양. 한국 야구는 특별한 이 없는 이상 더블헤더, 월요일 경기를 가지지 않는 편이고 경기중 대타빈도가 메이저리그에 비해 확연히 많아서 일반적인 야수는 전경기 출장해도 노예출장이라 할 수 없다. 허나 포수는 포지션 자체가 체력소모가 상당해서 혹사문제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는데, 확실한 공격력과 내구력을 겸비한 포수가 조인성강민호, 그리고 양의지 정도뿐이라 잘 드러나지 않는 것뿐이다. 나머지 팀들의 포수 돌려막기 수준은 그저….

특히 공격력이 강한 포수의 경우는 그 중요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쉬지 않고 출장해야 하기 때문에 무릎 등에 고질병이 많으며 이 때문에 나이가 들면 출장기회가 줄거나(이만수가 대표적) 유리몸이 되거나(박경완이 대표적), 공격력을 살리기 위해 자연스럽게 지명타자로 전업(홍성흔이 대표적)하는 편이다. 그게 안 될 경우 결국 DTD하게 되는데 2013년 강민호가 그걸 겪었다.

메이저리그처럼 180일동안 162경기를 하는 강행군리그의 경우는 포수, 유격수, 중견수 등 센터라인 플레이어들을 어느정도 관리해준다. 포수의 경우는 최소 1주일당 1경기 정도는 백업이 출장하는 경우가 많다.[4] 메이저리그에서 주전 선수들의 휴식일 제공에 대해 보스턴 레드삭스의 감독 알렉스 코라휴스턴 애스트로스 벤치코치 시절 호세 알투베와의 일화를 이야기 하면서 잘치고 있을수록 휴식의 중요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코라 감독의 인터뷰 내용.

이외에도 비슷한 센터라인인 유격수 역시 백업 멤버가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주전이 혹사당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시는 김하성.

2. 노예의 말로

대개의 경우 노예로 분류되는 투수들은 계속된 등판으로 혹사가 심해 구위가 떨어져서 난타를 당한다거나 부상이 발생하는 등 선수생명이 일찍 끝날 위험성이 크다. 단, 자주 나온다는 것은 감독이 어떤 상황에서든 믿고 낼 만한 투수라는 이야기도 되며, 이는 대개의 경우 노예로 분류되는 선수들은 시즌 내내 호투했으며 팀 기여도 또한 매우 높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노예로 분류되는 선수들은 보통 시즌이 끝난 뒤 연봉협상에서 노예로 굴렀던 보상을 두둑히 받는다. 노예의 대명사 정현욱의 경우 2008년에는 6천만 원이었던 연봉이 2009년에는 1억 3천만 원으로 오르면서 무려 117%의 연봉인상률을 기록했고, 마노예로 불렸던 마정길 또한 2008년 5천만 원에서 2009년에는 100% 인상되어 연봉 1억 원이 되었으며, 정노예 4인방 중 한 명이자 고무팔로 유명한 정우람 또한 2008년 8천만 원에서 2009년 1억 4천만 원으로 오르면서 75%의 연봉인상률을 기록했다. 그렇기 때문에 늦게 빛을 봐서 모아둔 돈이 적거나 나이 들어서 어차피 선수 생활 얼마 안남은 노장들은 벌 수 있을 때 최대한 많이 벌어둬야 하는 직업 특성상 노예를 자청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 듯하다.

물론 전년도의 무리한 투구로 인해 다음 해에는 폭삭 말아먹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2010년의 이재우, 2011년의 고창성, 2012년의 박정진, 2013년 유원상, 2014년 송창식 등이 대표적인 예.

미국은 얄짤없다. 마이너리그에서 찾아보면 대안을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는 만큼 불펜투수의 한 시즌 플루크 활약이 이어진 뒤, 마무리 혹은 프라이머리 셋업맨으로 3시즌 이상[5] 버티는데 실패하고 계속 노예생활이 이어질 경우 대부분 언젠가 탈이 나서 사라진 다음 잊혀진다.[6] 그렇다 하더라도 메이저리거가 되는 것만으로도 야구 인생이 성공한 케이스니 한국과는 또 다른 문제.

일본프로야구의 경우라면 대부분의 팀이 6인 선발 로테이션을 주로 택하고 있기 때문에 선발 투수를 많이 던지게 하는 편인데다, 결정적으로 일본프로야구 중간계투 선수 이름까지 알 정도의 매니아들이 적어서 무차별적으로 등판하는 중간계투가 특별히 노예로 부각되거나 하는 경우는 한국에 비해 적은 편이다.

물론 그렇다고 아주 없는 건 아니라서, 예를 들면 2009년에 67경기(7선발) 113⅓이닝을 소화하고 33홀드 6세이브를 기록한 뒤 3년 연속 80이닝 이상[7]을 소화하고 2011년에 MVP를 수상한 주니치 드래곤즈아사오 타쿠야나, 과거 다이에 호크스시절인 1999년에 60경기를 전부 구원 등판하여 79⅓이닝을 소화하고 무려 14승을 따낸 좌완 셋업맨 시노하라 다카유키같은 사례가 있다. 또한 2019년 80경기 출장과 82이닝 투구를 넘긴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히라이 카츠노리도 불펜 노예의 훌륭한 예시.[8] 서브컬처의 사례이나 그라제니의 주인공 본다 나츠노스케도 비슷하다.

선발 투수, 중간계투, 마무리 투수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던 1980년대, 1990년대 초에는 선발, 계투, 마무리 따질 거 없이 노예들이 많았다.

아래 노예 투수들의 목록을 보면 특정 팀 편중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 모든 종류의 혹사가 그렇듯 감독의 야구 철학에 달린 문제이다.

3. 21세기 KBO 각 구단의 대표적인 전직, 현직 노예들

3.1. 두산 베어스

3.2. LG 트윈스

3.3. KIA 타이거즈

3.4. 삼성 라이온즈

3.5. 롯데 자이언츠

3.6. 한화 이글스

3.7. SSG 랜더스

3.8. 키움 히어로즈

3.9. NC 다이노스

3.10. kt 위즈

4. 과거

1980년대에 야구 전설을 써내려 간 투수들 중에 혹사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는 수준이다. 다만 이 당시에는 선발 로테이션, 선발/중간계투/마무리의 투수진 세분화, 투구수 관리 같은 개념 자체가 제대로 도입되지 않았었다는 점은 고려해야 한다.

장명부는 1983년 한 시즌 동안 60경기, 427⅓이닝, 36완투, 30승 16패라는 전무후무한 최악의 노예 혹사 기록[49]을 보유하고 있다. 물론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돈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고 장명부의 말로는 뭐...

최동원은 아마야구 시절부터 기록적인 혹사를 당해왔으며 1981년 코리안시리즈에서 6경기중 6경기 등판해 42⅓이닝 2승 1패 1세이브 방어율 2.32라는 말도 안 되는 기록을 세웠으며 1984년 한 시즌 동안 51경기에 출장하여 27승 13패, 284⅔이닝을 기록하였다. 또한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5경기 등판 4승 1패 4완투 2완투승 1완봉승 1완투패 1구원승 40이닝 투구 평균자책점 1.80 WHIP 1.08.이라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기록을 다시 본인이 갈아치웠다. (1차전 완봉승, 3차전 완투승, 5차전 완투패, 6차전 구원승, 7차전 완투승.) 총 40이닝 투구를 기록,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최동원의 빛에 가린 투수로 김일융이 있는데, 1984년 시즌 중에는 38경기 23선발 222이닝밖에(?) 소화하지 않았지만, 최동원과 맞붙은 한국시리즈에서 4경기 출전하여 3승 1패(2차전 선발승, 4차전 선발승, 5차전 구원승, 7차전 선발패)를 기록하였다.[50] 1985년 시즌 중에는 34경기 28선발 226이닝을 소화하여 25승(김시진과 공동 다승왕)을 기록하였다.

김시진도 1983년 37경기 229⅓ 이닝, 1984년 39경기 215이닝, 1985년 47경기 269⅔이닝 (25승) 을 소화했다. 그리고 1987년 193⅓이닝을 던지고 다시 한 번 23승을 기록하며 마지막 불꽃을 피운 뒤, 사실상 완전히 어깨가 망가져 버렸다.

선동열 역시 1986년 39경기 출전, 22경기 선발, 19완투 8완봉승, 262⅔이닝을 투구하고 24승을 기록하였다. 그 뒤로도 선발구원 안가리고 나왔으며 1992년에 부상으로 시즌아웃되기 전까지는 매년 노예로 굴려지며 팀에게 1986년 한국시리즈, 1987년 한국시리즈, 1988년 한국시리즈, 1989년 한국시리즈, 1991년 한국시리즈 총 5번의 우승을 안겨주었으며 세 번의 헹가래 투수가 되는 영광을 안았다. 1993년에는 마무리로 전업하여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 다시 헹가래 투수가 되며 해태 타이거즈에게 7번째 우승을 안겨주었다.

5. 아마추어

5.1. 한국의 경우

선수층이 얇은 아마추어 팀일수록 에이스 투수의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으며, 이로 인해 투수의 혹사로 이어지는 일이 흔하다. 문제는 고교 시절에 좋은 기록을 내야만 프로 또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는 현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어릴 땐 많이 던지면서 어깨를 강화시켜야 한다라는 투구 이론[51] 때문에 쉽게 개선될 지는 미지수이다. 그래서 입단 초기만 해도 유망주로 큰 기대를 받았으나 고교 시절 혹사로 인해 제 기량을 펼치지 못하고 사라지는 투수들이 많다. 또 이런 투수들은 즉전감이라는 명목하에 프로와서도 전천후로 엄청 굴려진다. 가장 유명한 사례가 한기주로 고교 시절 불같은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였으나 고교시절과 입단 초 거듭된 혹사를 견디지 못해 기나긴 재활의 시간을 보냈고, 겨우 복귀했으나 전만한 압도적인 구위나 구속은 잃은지 오래였다.

관련 기사에서 발췌

5.1.1. 개선을 위한 노력

5.2. 일본의 경우

일본 고교야구 선수인 안라쿠 토모히로는 2013년 3월 26일의 코시엔 경기에서 연장 13이닝까지 232개의 투구수를 기록하고, 4일 뒤에도 선발 출전하여 9이닝 159개의 투구수를 기록했다. 두 경기 합쳐서 391구를 던진 것이다. 언론에서는 '괴물 투수'로 포장했지만, 이것이 정말 괴물의 등장인지, 단지 투수 혹사일 뿐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 관련 기사 이후 안라쿠는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1라운드 지명[52]을 받고 프로에 진출하였으나 부상으로 인해 2~3시즌을 날리고 끝내 선발을 포기하였다. 포텐 자체는 꽤 높았기 때문에 입단 6년차인 2020년 후반기부터 불펜으로 자리잡으면서 살아남긴 했지만 불펜 투수는 기량이 조금만 떨어져도 파리목숨이라는 것이지만 최근 2021년부터 2023년 현재까지 구단의 후배 선수에 대한 여러 가혹 행위가 밝혀지면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구단으로 방출되었다.

사실 이보다 더한 원조노예 괴물은 바로 마쓰자카 다이스케인데, 당시 요코하마 고교 재학 중이던 1998년 코시엔에서 연장 17이닝까지 가는 접전을 포함해 3일 동안 무려 419개의 투구수를 기록하며 모교를 코시엔 우승으로 이끈 바 있다.

2014년 8월 일본 니칸 스포츠 신문에 고시엔의 투구수 문제에 대한 칼럼이 '내가 고시엔을 좋아할 수 없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키무라 코우이치'가 작성한 글이며, 번역된 내용은 이곳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일본 야구의 현실적인 문제와도 맞물려 있다. 졸업 예정 선수 전원이 자동 지명 대상이 되는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고교 선수 중 극히 일부만이 성인야구(대학, 사회인/독립리그, 프로)로 가며 나머지 선수들은 고시엔을 끝으로 야구 선수 커리어를 끝낸다. 이러한 점 때문에 혹사가 용인된다는 시각도 나타나고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고시엔 항목 참조. 근데 위에서 지적된 안라쿠는 고졸로 프로에 진출한 게 문제지

5.3. 기타

박동희 기자가 한국의 한기주와 일본의 '쓰지우치 다카노부'의 경우를 비교하며, 한일 야구계의 선수 혹사에 대한 비평 기사를 작성하였다. 기사보기

노예등판에 빗대어 야구 경기마다 가리지 않고 거의 매일 나오는 강행군을 하는 캐스터나 해설위원에게도 이 단어를 쓴다. 예를 들어 2013년의 한명재 캐스터가 있는데, 한명재 캐스터는 본래 맡는 한국야구는 기본에 중계 류현진의 메이저리그 선발등판 캐스터로 꼭 나오며, 류현진 경기가 아니라도 메이저리그 중계 경기 캐스터로 종종 나왔다. 특히 9월 12일에는 아침에 류현진 선발경기 캐스터로 나온 경기를 중계한 뒤 오후에 방송할 프로야구 경기를 위해 삼성 홈구장인 대구로 바로 내려가기까지 하여 노예등판이라는 드립이 나왔다. 2015년에는 SPOTV최두영 캐스터가 우천 취소 경기를 제외한 모든 경기의 중계를 맡으면서 이 대열에 합류했다.

이보다 더한 노예는 사실 지방의 라디오 야구 캐스터들이라고 볼 수 있다. 라디오 특성상 중계상황을 TV에서보다 훨씬 더 설명해줘야 해서 TV 캐스터보다 더 설명을 많이 해야 한다. 근데 거기에다가 전 경기 중계를 해야 되다 보니...

공서영 역시 XTM으로 이적한 후에는 주 6일에서 월요일 경기 있는 때까지 포함하면 매일같이 등판했다.

6. 관련 문서



[1] 4일 내지 5일. 6선발 체제의 경우 1주일에 한번 등판하므로 6일.[2] 대체로 마인드의 차이. 불펜 피칭은 그냥 편하게 하고 싶어하는 투수가 있는 반면 타자를 상대하면서 어느 정도 긴장감을 갖는게 더 좋다는 투수가 있다. 물론 후자의 경우도 실제 등판은 부상 염려도 크고, 투구수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기 때문에 보통은 그냥 불펜 피칭을 한다.[3] 마크 프라이어를 혹사로 보냈던 걸로 까인 그 빵감독.[4] 미국은 일요일 프라임타임 1경기 빼고 일요일 경기 = 낮경기 공식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야구의 경우 토요일(밤경기)과 일요일(낮경기) 경기의 시간차가 12시간 정도밖에 안 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주말은 주전을 풀로 돌리기가 어렵다.[5] 3시즌 이상 버티면 연봉조정자격이 생기고 본인 동의 없이 마이너 강등이 되지 않는다. 아예 먹튀급으로 못 던지지 않는 한 방출 위험은 최저연봉시기보다는 낮은 편.[6] 이런식으로 탈이 나는 바람에 구위나 구속이 조금 하락한 선수들은 선발 경력이 꽤 있는 경우 한국과 일본을, 선발 경력이 드문 경우 일본과 대만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왜 선발 경력이 드문 선수가 한국은 포기하는데 더 수준이 높은 일본에는 도전할 수 있냐면 일본의 경우 불펜 용병도 많이 써먹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또한 대만의 경우 AAA에서 불펜으로 뛰었다고 해도 대만에서는 선발로 꽤 써먹을 만큼 리그 수준이 낮기 때문에 선발 경험이 적어도 도전이 가능한 것.[7] 2010년 72경기 80⅓이닝 47홀드(1위)(2013년 기준, 일본프로야구 최다 홀드 기록) 1세이브, 2011년 79경기(1위) 87⅓이닝 45홀드(1위) 10세이브.[8] 히라이는 2018-2019년 2년 연속 필승조였지만 2019년부터는 공의 위력이 떨어지면서 선발과 추격조를 오가게 되었다. 2020년에는 41경기 60.1이닝을, 2021년에는 25경기 74.2이닝을 던졌는데, 두 시즌 모두 ERA 4점대로 좋지 못했다. 물론 팬들은 2019년에 그렇게 미친듯이 던져놓고 아직도 시즌 60~70이닝 씩 던질 수 있다는 점에서 히라이의 내구성에 감탄하고 있다(...)[9] 당시 프로야구의 대표적인 짠돌이 구단으로 유명했던 롯데가 5억이라는 거액을 베팅할 정도였으면 차명주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알 만하다. 게다가 무려 1996년에 5억을 받았는데, 20년 후인 2016년 현재의 물가를 생각해보면 자그마치 7~8억 원 정도 되는 돈이다.[10] 다만 2003년에는 현대 이상열과 공동 홀드왕에 올랐다.[11] 다만 올라올 때마다 한 타자만 잡고 들어가는 원 포인트 릴리프라 이닝 소화 횟수는 33⅔에 그쳤다.[12] 이 기록은 2013년 롯데 강영식에 의해 경신된다.[13] 두산 구단에서는 코치직을 제안했으나 이재우는 현역 연장을 원했다.[14] 사실 17시즌 시작 후 2군에서 이미 플레잉 코치에 가까웠다고 한다. 이충호 등 신예들에게 슬라이더 그립을 가르쳐줬다고.[15] 스캔들을 감안하더라도 야구팬들은 대체로 임태훈이 감독 멱살잡아도 할 말 없을 수준이라고 본다.[16] 그나마 줄어든 게 51경기 50⅔이닝이다.[17] 6월에는 한 경기.[18] 공식적으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생활 문제라는 설이 있다.[19] 2012년 우규민의 92⅔이닝은 2012년 43경기 이상 등판한 투수들 중 가장 많은 이닝이다.[20] 4월 14일 한화와의 대전 경기.[21] 2018년을 제외하면 모두 70경기 이상 출장[22] 특히 5차전에서 호세에게 역전 끝내기 홈런을 허용한 뒤에는 울면서 마운드를 내려올 정도였다.[23] ex.권혁, 송창식, 이재우 등.[24] ex.주형광, 전병두 등.[25] 다만 대회 전체를 통틀어 한기주의 평균자책점이 99.99는 아니다.[26] 신용운보다도 1이닝을 더 던졌다.[27] 이는 동일한 날짜를 기준으로 손승락은 17세이브 중 1이닝 미만 세이브가 2회, 1이닝 세이브가 13회, 봉중근은 14세이브 중 1이닝 미만 세이브가 1회, 1이닝 세이브가 10회, 오승환은 13세이브 중 1이닝 세이브가 7회였던 것과 비교된다.[28] 2006년부터 계산하여 한국프로야구 역대 최다 점수차 블론세이브 신기록.[29] 구단의 군경팀 입대 권유를 거절하고 공익요원으로 입대했다가 몸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체중이 급격히 불었다. 이 때문에 투수는 공익(사회복무요원) 가서 어깨를 쉬게 해주며 몸관리를 하는 게 좋다는 말의 반례로 인용된다.[30] 이런 밀어주기식 등판 때문인지 골든글러브 수상에 실패했다.[31] 1999년 54경기 93이닝, 2000년 63경기 109이닝, 2001년 54경기 95⅔이닝, 2002년 64경기 76⅔이닝, 2003년 63경기 85⅔이닝.[32] 당시 김현욱의 무릎 상태는 잦은 등판과 피로 누적으로 인해 연골이 거의 닳아 없어져 던질 때마다 뼈끼리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33] 이후 13년 뒤인 2015년 한화의 권혁이 불펜투수로 1시즌 112이닝(…) 2000구 투구를 달성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2002년 노장진이 중무리로 굴려질 당시 권혁은 삼성 신인이었다.[34] 2002년의 노장진이 현재까지 풀시즌을 중무리로 굴린 사실상 마지막 사례라고 한다.[35] 사실 한 선수가 2번째 토미 존 서저리를 받은 것도 국내에서는 권오준이 최초이다. 이후 2016년 1월 롯데 자이언츠의 조정훈이 국내 선수로는 2번째로 3차례의 토미 존 서저리를 받게 되었다.[36] 현욱 가대표 예. 매국노가 아니다.[37] 사실 2015년 정현욱의 근황사진이 올라왔는데 전에 비해 상당히 살이 빠진 모습이 나오면서 팬들 사이에서 위암 수술을 했다는 카더라가 돌았는데 사실로 밝혀졌다.[38] 사실 삼성 시절에도 팔꿈치 부상으로 재활한 전력이 있다. LG때와 달리 비교적 간단한 재활로 극복한 터라 묻힌 면이 있다.[39] 실제로 타격이 부진할 때도 마땅한 대체외야수가 없으니 타순만 바뀌고 계속 나왔다.[40] 다만 2014년은 체력 저하도 있지만 그 전해에 당한 뇌진탕 후유증도 한 몫 했다.[41] 정확히는 2003년 말 FA로 영입된 정수근의 보상 선수로 두산 베어스로 넘어갔다가, 보상선수 지명 몇 시간만에 한화의 백업포수 채상병을 상대로 트레이드되었다.[42] 정확히는 장딴지에서 시작된 부상이 허리, 고관절까지 영향을 미쳤고, 이는 허리 디스크로 이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인식은 문동환을 마구잡이로 등판시킨 것이다.[43] 심지어 구대성도 노예 대열에 합류해야 했다.[44] 선발 출장하지 않는 투수들 기준[45] 2000년 74경기 94⅓이닝, 2001년 59경기 76⅔이닝, 2002년 56경기 82⅔이닝, 2003년에는 마무리 투수임에도 65경기 77⅔이닝&30세이브, 2004년 55경기 79이닝, 2005년 52경기 60⅓이닝, 2006년 51경기 63⅓이닝, 2007년 64경기 74⅔이닝.[46] 의외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2002년 67경기 97⅓이닝, 2003년 52경기 116이닝, 2004년 60경기 94이닝을 소화했다. 이중 2004년에는 시즌 막판 병역비리에 연루되어 시즌을 조기 마감했음에도 불구하고 소화한 이닝이다.[47] 2003년에도 68이닝이나 던졌다.[48] 경기당 평균 이닝이 2이닝 가까이 되긴 하지만, kt 위즈가 워낙 약체라 이기는 경기가 거의 없어서 등판할 기회가 많지 않은지라 저절로 휴식이 보장되었다.[49] 한국프로야구 단일 시즌 최다 선발 등판&단일 시즌 최다 이닝&단일 시즌 최다 완투 기록&단일 시즌 최다승을 동시에 달성했다.[50] 만약 7차전에서 김일융이 승리를 거두었다면, 1984년의 최고의 선수라는 명예는 김일융의 몫이었을 것이다.[51] 특히 김성근 감독처럼 일본에서 야구를 배운 감독들은 모두 이 이론을 믿고 있다. 그래서 2011시즌에 폼을 만들어야 된다며 김광현에게 8이닝 8실점 147구 투구를 시킬 정도였다. (경기는 완투패) 김광현은 이 이후로 김 故광현, 줄여서 고광현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으며 11~13년 사이 3년여의 시간 동안 부진에 빠지고 말았다. 이 당시에는 김광현이 10시즌에 비해 크게 부진하여 '보통 투수'라 불릴 정도로 팬들도 실망하고 있었고, 김성근의 이미지가 거의 야구의 신 정도라 크게 부각되지 않았으나, 한화 시절 송창식을 4이닝 90구 12실점, 송은범을 3.1이닝 12실점할때까지 내버려두는 등 그의 실체가 부각되는 일들이 많아져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다행히 김광현은 14시즌부터 클래스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고, 토미 존 이후 시즌인 2018시즌에는 구단 차원에서 철저히 투구수 관리를 해 주며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2019시즌에는 전성기 수준의 성적을 기록하는 데 성공했고, 메이저리그 진출에 성공한다.[52] 한국의 1차지명과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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