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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04 17:08:20

제갈량(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

1. 개요2. 작중 행적3. 기타

1. 개요

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의 등장인물. 원 역사의 제갈량에게서 모티브를 따왔다.

2. 작중 행적

유비군의 대전략인 융중대를 수립한 책사. 유비의 입촉을 뒤에서 계획한 인물이지만 빙의자의 기억을 얻은 유비는 이 융중대의 허점을 파악하고 고심 끝에 입촉을 미루고 한중 공략을 통해 서량의 마초를 아군으로 편입해 명분작에 더 신경을 쓴 다음에야 입촉을 시작한다.

유비가 관우와 장비를 익주 원정군에 소환하면서 제갈량을 형남의 책임자로 임명해 30대 초반 나이에 형남 전체를 책임지게 된다. 경력도 입지도 그리 굳건하지 않은 상황에서 냅다 중책을 떠맡은 것 때문에 특유의 편집증적으로 꼼꼼한 성격까지 합쳐져서 아랫사람들을 미친 듯이 쪼아대며 일하고 있는데 이게 의도치 않게 전화위복이 되었다.

손권이 저지를 익양대치를 대비해서 유비가 임상현과 익양 사이 개울에 보루를 세우라는 지시를 내리자 이를 열성적으로 받아들여 보루를 2개를 나란히 세우고 최신 원융노를 비롯한 군수 물자를 풍족하게 보급했으며 인력도 수시로 교대케 하는등 유비의 지시를 120% 이행했고, 그 결과 동오의 장군 감녕을 사살하는 성과를 올린다.

비록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지만 나름 고위 지휘관을 죽여버린 것이기에 제갈량은 자신 때문에 동오와의 협상이 어그러지는 게 아닌가 당황했지만 배신자 동오군을 상대로 이긴 영릉 사람들의 사기가 크게 오르고, 당한 것도 인성이 나쁜 것으로 유명한 데다 아직 제대로 중용받지 않던 감녕이라 유비는 크게 치하했다.[1]

유비의 명을 받아 대별산맥 인근의 반조조 군세를 지원하는 한편 서량으로 파견되는 관우에게 마초와 염행의 일화를 거론해 마초를 (관우가 싫어하는)호족 나부랭이가 아니라 조조에게 가족을 잃고 자기도 죽을 까봐 두려워하는 불쌍한 사내로 여기게 만들어 반목하는 일이 없도록 단도리한다. 미래의 기상이변을 예상할 수는 없으니 형남을 지키는 데는 문제 없다 자신하지만 219년의 집중 호우 때 북상하지 않을 수 없음을 잘 아는 유비는 별도의 대비책으로 유사시 강에 내걸 수 있는 쇠사슬과 쇠막대를 제조해 둘 것을 당부한다.

217년 서량 전투 와중에 조조 치하에서 도망치는 유민들을 받아들여 병력을 8천이나 늘리고, 조운을 파견해 양양성 인근을 찔러보는 등 북벌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양양을 치려면 육로와 수로를 다 동원해야 하는데 당장 양양을 지키는 게 그 조인인데다 양양으로 가는 한수 수로는 역시 명장인 문빙이 지키고 있어 정공법으론 뚫을 방도가 없어 고민하고 있다.[2]

3. 기타

독자들에게 익숙한 간절히 작가의 전작인 아! 내가 마속이다에서 보여주는 만인지상의 승상 제갈량이 아니라 까마득한 고참인 관우, 장비의 눈치를 보고 방통, 법정 등 비슷한 연배의 쟁쟁한 참모들과 성과 경쟁을 해야 하는 젊은 시절의 제갈량이라 신선하다는 평을 듣는다. 전작에 나오는 악덕상사 제갈량과 달리 이제 막 신참을 벗어난 상황에서 냅다 큰 프로젝트를 떠맡아 고생하는 모습 때문에 '천하의 승상도 저런 시절이 있었구나'라며 직장인 독자들이 감개무량(...)을 느끼기도 했다.

제갈량은 서주 낭야에서 굴러들어와 황씨와의 혼맥을 통해 형주의 호족, 명사들과 줄을 만들었고, 방통은 남군 출신 토박이라 방통이 요절하지 않았다면 입촉 이전 유비의 인재풀의 다수를 차지한 남양, 양양 출신들 사이에서 제갈량이 우뚝 서기는 쉽지 않았다. 본작에서는 방통이 유비의 곁에서 계속 일하고 있는 만큼 제갈량 본인도 그만큼 고민이 많을 듯하다.[3]

어릴 적 서주 대학살로 버려진 시체로 인해 사수가 막히는 기가 막힌 참사를 보고 기억하는 것으로 나온다. 제갈 가문의 형주 이사는 서주 대학살보다 조금 앞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서는 이사가 약간 늦었거나, 아니면 모종의 일로 고향에 잠깐 왔든가 해서 참사를 직접 본 것으로 추정되며 이것이 일종의 PTSD가 된 것으로 나온다.


[1] 감녕이 항장 출신이란 딱지를 떼어내고 오에서 확고한 위상을 점유하는 건 합비에서 손권을 구하고, 유수구 전투에서의 특공으로 손권의 체면을 크게 올려준 다음부터고, 이때까지의 감녕은 쓸만한 돌격대장 정도의 위상이었다.[2] 기존 형남 수비군이 3만 가량이었는데 8천 정도 추가해도 4만이 채 안 된다. 이미 동오의 뒤통수에 당할 뻔한 이상 수비 병력을 제법 남겨야 하고 다시 육로와 수로로 가르면 조인과 문빙이란 당대의 명장들이 지키는 방어선에 정면으로 도전하기에는 너무 적은 병력만 남는다. 유비군은 증원 한 번 오려면 장강삼협을 건너야 하지만 조조군은 남양 쪽에서 신속한 원군 파견이 가능하니 더더욱.[3] 작가의 전작인 내마속에서 제갈량이 한 유언에 따르면 다른 이유도 있기는 했지만, 유비의 밑에 들어가면 더 출세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유비의 삼고초려를 받아들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