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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592년 (선조 25년) 11월 7일 ~ 11월 13일 (1592년 음력 10월 4일 ~ 10월 10일) | |
장소 | 조선 경상우도 진주목 진주성 | |
원인 | 일본군, 경상우도 장악 및 전라도 침공 도모. | |
교전국 | <rowcolor=black> 조선 (수세) 승 | 일본 (공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김시민 (진주목사) † 김성일 (초유사) 성수경 (진주판관) 이광악 (곤양군수) 최덕량 (前 만호) 이눌 (진주군관) 윤사복 (진주군관) 이찬종 (율포권관) 유숭인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 † 정득설 (사천현감) † 주대청 (가배량권관) † 김준민 (거제현령) 이계종 (권관) 최경회 (의병장) 임계영 (의병장) 곽재우 (의병장) 심대승 (의병장) 윤탁 (의병장) 정기룡 (상주판관) 조응도 (고성현령) 최강 (의병장) 이달 (의병장) 정유경 (진주복병장) 정언충 (의병장) 장응기 (의병장) | 지휘관 우키타 히데이에 호소카와 타다오키[1] 호소카와 겐바노조[2] 오타 카즈요시[3] 가토 미쓰야스 하세가와 히데카즈 기무라 시게지 신조 나오사다 카스야 타케노리[4] 모토시마 마타사부로 † 다구치 야스케 † 요네모토 스게지로 † 이쿠다 우베에 † |
병력 | 조선군: 3,800명 (+500여 명) | 일본군: 30,000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5] |
결과 | 조선의 대승 | |
영향 | * 일본군 지휘관 다수 전사 * 전후 진주목사 김시민 사망 * 일본군의 호남 지역 진출 및 육로 보급 차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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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주성 전도[6] |
2. 진주 대첩과 그 배경
김시민은 각지에 구원병을 요청하며 진주성 방어 태세를 강화하였고 왜군은 남강 남안까지는 진출하였으나 강을 건너 진주성을 공격하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 사천으로 물러나 거기에 거점을 확보하려 했다. 김시민은 일천의 병력으로 사천성 왜군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추격해 고성과 진해도 탈환하였으며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치하하고 목사로 승진시켰다.
연패당한 왜군은 김해에서 작전 회의를 열어 “경상도 병마의 주력이 진주성에 있는 듯하니 이 뿌리를 먼저 뽑아버리면 다른 방면에서 시끄럽게 움직이는 조그마한 군사들은 겁에 질려 스스로 흩어져버릴 것이다. 대부대를 동원해 먼저 진주성을 함락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라 결론 내렸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또한 경상 우도를 장악할 수 있는 본거지이자 전라도 침입에 교두보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요충지가 진주성이라 여겨 공략을 명령함에 따라 진주성 공략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하였다.
왜군은 8월 중순 경부터 진주성 공격 준비에 나섰다. 한양 쪽 정예군이 김해로 집결하기 시작하였고, 9월 24일 김해성을 출발한 왜군도 진주성으로 향했다. 2~3만에 달하는 왜군은 삽시간에 노현, 원, 함안 등지에서 조선군을 격파했다. 이에 조선군은 다수의 전사자를 내며 전의를 상실했다.
3. 진주성 당시 상황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 사실 진주 목사는 김시민이 아니었다. 왜군이 경상도 남부를 휩쓸자 진주 목사 이경은 부하들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도주했다. 때문에 상부에서 이경에게 사람을 보내어 돌아가 성을 지키라고 명령하였는데 이경이 산에서 병사[9]했다. 그가 산중에서 병사(?)하자 김시민이 목사직을 대신했다. 일본의 수군이 이순신 함대에 격파당하며 어느 정도 진주성을 둘러싼 위기가 해소되자 김시민은 진주성을 방어하고자 수성군을 훈련시키고 화약 무기를 비축했다. 그리고 거창에 침입한 일본군을 병사 일천 두로 격파하였다.진주성 공략이 시작되자 김시민은 전라 의병장 최경회, 경상 의병장 곽재우 등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한편 자나깨나 달아날 궁리만 하는 부하 장수들과 군민을 너른터에 모아놓고 싸울 것을 호소하였다.
창원에서 왜군에게 패하고 퇴각하여 온 경상 우병사 유숭인이 성안으로 들어가 함께 방어할 것을 요청했으나 김시민은 작전 계통에 혼선이 생길까 저어하여 성 밖에 그대로 두었다. 유숭인은 김시민보다 계급이 위이므로 그가 성안에 들어와 명령을 내리게 된다면 이제껏 김시민이 준비한 훈련과 작전에 차질이 생길 확률이 높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곽재우는 이를 듣고 '계책이 성을 온전하게 하기에 충분하니 진주 백성들의 복이다'라고 평했다.[10] 이 때 유숭인과 함께 전사한 사천현감 정득설은 백마장군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리고 1592년 음력 10월 4일…….
3.1. 전투 전야
왜군 선발대 일만여 명이 진주 동쪽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진주성 공격 이전에 주위의 지원 부대를 제압할 목적으로 먼저 유숭인의 부대를 공격, 전멸시켰다. 김시민은 이를 보고도 지원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진주성에 주둔한 조선군의 사기가 잠시 떨어졌으나 곽재우가 임기응변으로 대처해 다시 사기를 회복한다.10월 6일 3만의 왜군 본대가 도착하기 시작했다. 사실 진주성이 견고한 성이기는 하나 기백년간 이어진 전쟁으로 공성전에 이골 난 일본군이기에 금방 함락할 것이라 생각했다.
왜군은 성을 포위했으나 뒷산을 거점으로 한 성 외곽의 조선 의병 부대가 배후를 위협하고 있어서 바로 공격하지 못하였다. 김시민은 백성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군기를 여럿 세워 심리전을 걸었고 응원하러 온 외곽의 곽재우 등의 조선군은 왜군의 배후에서 횃불을 들고 뛰어다니며 피리를 불며 또한 심리전을 걸었다.
왜군도 심리전을 구사하였는데, 군사들이 머리를 풀어헤친 뒤 뿔 달린 금색 가면을 쓰고 잡색 기를 짊어지거나 붉은 해가리개 또는 흰 칼날을 들고 성을 돌았다.[11]
3.2. 10월 6일
이윽고 왜군이 성 공격을 시작했다. 조총수 일제 사격과 동시에 성이 침묵하자 왜군이 돌격을 시작했으나, 성안에서 대포[12]를 발사하여 방어했다. 왜군은 근처 민가를 헐어 방패막과 공성 무기를 준비했다 한다.공방전은 해가 지고도 계속되었는데 곽재우가 지휘하는 군사 이백여 명이 뒷산에 올라가 호각을 불고 횃불을 흔들어 성안을 응원하자 성안 사람들도 호각을 불어 응하였다. 그러자 당황한 일본 군사들이 우왕좌왕하는 등 소란을 벌였다.
3.3. 10월 7일
왜군이 하루 종일 공격했으나 수비군이 잘 막아냈다. (6일에 비해 소극적이었다.) 왜군은 진주성 주변 십여 리 안팎의 민가를 약탈하고 불태웠으며 날이 어두워져 전투가 일단 끝났다. 왜군은 이날은 야간 공성전을 벌이지 않았다.밤이 되자 김시민은 심리전을 구사했다. 악공(樂工)을 불러 거문고를 타고 퉁소도 불게했다.
당황한 왜군은 조선 아이들에게 성을 돌며, “한양이 이미 함락되었고 팔도가 붕괴되었습니다. 아저씨들이 새장 같은 진주성을 어떻게 지키겠어요. 빨리 성문을 열고 항복하세요”라고 외치게 시켰다. 각지에서 잡아왔기에 언어는 별 문제가 없었다. 전쟁에 어린이를 이용하는 모습에 분노한 조선군 군사들이 호통치려고 하거나 심지어 성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김시민은 이에 대한 대응을 일체 금지하였다.
3.4. 10월 8일
8일 아침 왜군은 드디어 대대적인 진주성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때 진주성은 함락 직전까지 갔고, 간신히 막아내는 것은 성공했으나 보급품이 떨어지는 등 상황은 어려워져만 갔다. 김시민은 왜병들이 접근하면 화살을 아껴 돌을 던지게 하였다. 다시 어두워져 전투가 멈추고 밤이 되자 성밖 조선 의병이 남강 건너편에 나타나 횃불을 올려 수비군을 응원하였다. 왜군 지휘부는 동네 담장 같은 진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진주성 외곽에 분산되어 있는 지원 부대들 때문이라 판단하게 된다.3.5. 10월 9일
9일 왜군은 공격군을 다수의 소부대로 나누어 편성한 다음 진주성 외곽에 있는 조선군 지원 부대 공격에 나서는데 이러한 병력 분산 작전은 전력을 약화시켜 의병 부대들에게 유리한 결과만 선사하게 된다.(왜군은 의병장 김준민 등에 격퇴당해 큰 손실을 입는다.) 전라도 의병장 최경회 부대 등도 도착해 성 바깥에서 성 안 수비군과 호응하며 왜군을 압박하였다.이에 왜군은 공성 작전을 바꾸는데 대나무 다발과 연결 사다리를 많이 준비한 다음, 토성을 쌓고 누대를 세워 한 부대가 그 위에서 성 안으로 총을 쏘아대는 동안 나머지 부대가 대나무을 엮어 만든 타케타바(竹束)#####를 방패로 하여 사다리를 들고 성으로 접근하였다. 그러나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공성에 계속 실패하자 계략을 써서 성안 수비군을 밖으로 유인해 내기로 하는데, 밤에 여기저기 모닥불을 피워 어둠을 환하게 밝혀놓고는 거짓 퇴각을 하는 척 했다. 그러나 왜군에게 잡혀 있던 조선 아이 한 명이 탈출하여 성문으로 달려가니 문을 열어 들어오게 한 뒤 적의 실정을 물었고, 아이가 “내일 새벽에 총공격을 한답니다”고 알려주었다.[13]
3.6. 10월 10일
왜군이 총공세에 들어갔고 외벽이 일시 점령되어 수비진이 뚫렸다. 허나 내벽은 아직 온전했고 양측은 사력을 다해 최후의 전투를 벌인다. 마침 악천후에 밤이 되어 난전이 벌어졌다. 이때 앞장서 전투를 지휘하던 김시민은 왜군이 쏜 총탄을 맞아 쓰러졌고, 그의 부장인 곤양 군수 이광악이 김시민을 대신해 남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0일 상오 열한 시 쯤 일본군은 결국 진주성을 포기하고 퇴각하였으나 이미 조선군의 피해가 컸고 김시민이 의식이 없었기에 추격하지 못하였다. 김시민은 며칠 동안 사경을 해매다 끝내 세상을 떠났다.4. 역사적 영향
한국에서는 다른 두 대첩에 비해 대중적인 인지도는 조금 떨어지나, 진주 대첩은 임진왜란 전체를 통틀어 전쟁의 판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전투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 진주 싸움의 충격이 너무 커서 김시민의 이름을 모쿠소(목사의 일본식 발음)라고 부르며 두려워했고, 2차 진주성 싸움이 바로 이 진주대첩의 복수를 위한 것인 만큼 일본에게 준 충격은 다른 대첩들보다 크면 컸지 못하지 않았다. 징비록에 이 싸움이 상세히 기록되지 않아 사극등지에서 조금 덜 다루어지는 면이 있고, 왜란 종반까지 다른 두 대첩의 장군들은 지속적으로 활약한 반면 김시민은 이 싸움에서 전사하였기에 상대적으로 이름이 덜 알려진 면이 있으나 전투 자체의 극적인 면에서도, 전략적 중요성에 있어서도 삼대첩 중 단연 독보적이라 할 수있다.진주전 당시 왜군 사망자는 지휘관 급이 3백 명, 병사가 1만여 명이 넘었고 왜군은 후퇴할 당시 사망자가 많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모든 시신을 불태워 화장하고 후퇴했다. 일본군 육군이 이정도의 피해를 입은 적이 없었기에 전투 하나만으로도 일본군의 기세를 꺾어 버리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이 전투로 왜구 수군과 육군이 짠 보급 작전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는데, 만약 이때 패배해 전라도 방어선이 뚫렸다면 해상 전투에만 집중하고 있던 이순신 휘하 조선 수군마저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거시 안목으로 볼 때 한산도 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을 사실상 조선의 승리로 결정지은 대단히 중요한 전투인 것이다. 게다가 주목받지 못하는 점이지만, 3천~4천 정도 규모의 조선군이 분투 끝에 10배에 가까운 머리수 열세를 극복한 것 자체로도 명량 해전 못지 않은 대단한 성과라 하겠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전라도와 경상도 경계를 따라 소백 산맥이 이어져 있다. 현대에는 도로도 잘 정비되어 있고 교통 수단이 발달해 대수롭지 않게 볼 수 있지만, 말 타고 걸어다니던 시절엔 좁은 산길을 따라 대규모 군대를 이동시키고 그에 필요한 보급품을 조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소백 산맥은 지리산을 포함한, 소위 백두대간이라 불리는 1차 산맥에 해당하는 험한 지형이기 때문에 왜군이 전라도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경상도와 전라도를 이어주는 교두보인 진주성을 반드시 점령해야 했다. 왜군은 남강 일대의 곡창 지대를 점령하여 보급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으나 이 전투로 계획이 산산조각나게 된다. 일본의 해군들도 이미 박살나 버린 상황에서 육군까지 이렇게 무너지면서 전라도 점령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나아가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 본영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고 해전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도, 전라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의병들이 활발히 활동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전투가 가져온 후광이다.[14] 즉, 곡창 지대인 전라도를 온전히 보호하여 의병 활동과 이순신의 수군 전력을 유지시켜 준 대단히 중요한 전투라는 이유에서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힌다.[15]
일본은 진주성에서의 참패에 분노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차전을 지시하면서 조선군의 승리의 주역인 김시민 목사의 목을 베어 오도록 명령하였고, 이는 제2차 진주성 전투의 보복전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 2차 전투는 강화 협상 중의 심리전의 일환 및 보복의 성격이 강했으며, 일본군은 전라도 진출을 포기하고 진주성을 함락시키는 것에만 초점을 두고 공격했다.[16] 2차 전투에서 진주성은 함락되긴 했지만 조선군이 일본군 10만을 상대로 열흘을 버텼기 때문에 일본이 이기기는 했지만 무시하기 어려운 피해가 났을거라는 추측을 해볼 수는 있다.[17] 일본 문학 중에 모쿠소라는 괴물이 등장하는데 이는 김시민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당시 일본군은 김시민의 이름은 모르고 직책인 목사만 알았다는 것과 2차 진주성 전투 때도 살아있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진주시 곳간을 살찌우는 대표 행사 진주남강유등축제의 기원이기도 하다. 진주 대첩 당시 왜군에게 진주성으로 지원군이 모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 한 교란 목적, 그리고 의병들에게 보내는 진주성 지원 요청, 가족들 소식을 전하기 위해 남강에 종이 등을 띄워 보낸 것 등이 그 유래라 한다. 이후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이 함락된 이후에는 순국한 이들을 기리면서 띄웠고 이 전통이 지금은 유등 축제로 이어지고 있다.
5. 대중매체
- 국립 진주 박물관에서는 15분 분량의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진주 대첩을 일정 시간대마다 상영하고 있다. 자세한 상영 일정은진주 박물관 홈페이지를 참조.
-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 편에서는 25화 ~ 26화에서 집중적으로 다룬다. 조선군은 민중의 분투를 집중 조명해서 그런지 관군보다 의병, 민간인들이 더 많이 등장하며 비격진천뢰 등 화기와 왜군에게서 노획한 조총을 사용하는 모습도 묘사된다. 현자총통과 승자총통, 대완구와 화차까지 등장해서 화끈한 전투장면을 보여준다. 참전한 왜군 지휘관들인 가토 미츠야스, 호소카와 타다오키, 하세가와 히데카츠가 모두 등장하는데 불멸의 이순신에서 30세였던 호소카와 타다오키를 너무 늙게 묘사했다면 이쪽에서는 56세 노인인 가토 미츠야스를 너무 젊게 묘사하는 오류를 내기도 했다. 김시민의 전사 장면은 실제 장면과 유사하게 전투에서 승리해 다들 기뻐하는 와중에 갑자기 튀어나온 왜군 총격에 이마를 맞는 걸로 묘사했다. 김성일이 최경회, 곽재우 등 의병들을 규합해 왜군들 배후를 교란시키는 장면, 퉁소를 불면서 왜군들에게 심리전을 거는 장면, 성 안 부녀자들이 사내 옷을 입고 전투에 참가하는 장면 등으로 처절함을 잘 묘사했다. 김시민이 총탄에 맞아 쓰러지자, 곤양군수 이광악이 동요를 억누르며 전투를 독려하는 모습이 백미.
방영 전 제작진이 가장 중요하게 다룰 4대 전투 중 하나라고 말했다.(다른 3개는 평양성 전투, 행주대첩, 노량 해전)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고작9분 남짓이라는 짧은 전투 시간에 규모도 빈약했다. 처절한 항쟁을 조명하려 노력한 점은 인정받았으나 규모가 빈약했다는 것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다. 게다가 김성일은 존재감도 없이 통째로 삭제되었다.
[1] 국내 임진왜란 서적에서는 나가오카 타다오키(長岡忠興)로 표기된 경우도 있다. 호소카와 타다오키는 임진왜란 당시에는 나가오카 성씨를 쓰다가 토요토미 가문의 멸망 이후 다시 호소카와 성씨로 복귀했고, 당시 기록을 중시하는 역사책의 경우 나가오카로 표기하게 된 것.[2] (細川玄蕃允) 원래 이름은 호소카와 오키모토로 실제로는 1619년에 사망했다. 호소카와 타다오키처럼 당시에는 나가오카 성을 썼기 때문에 나가오카 오키모토로 표기되기도 한다.[3] 군감으로 참전.[4]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중 하나.[5] KBS 역사스페셜에서는 10,300명이라고 하였다. 그냥 일반 병력피해 1만과 지휘관급 300명을 합쳐 그렇게 추정한 것 같다.[6] 내성과 외성이 다 존재하며 절벽과 해자, 강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이다.[7] 진주가 경상도 서쪽에 있는데 왜 "우도"인가 하면 당시 임금이 있던 한양에서 지방을 바라 보았을 때를 기준으로 좌우를 나눴기 때문이다. 즉 전라 좌도는 동부 전라도, 경상 좌도는 동부 경상도를 말한다.[8] 지금의 창원시 진해구가 아닌, 흔히 삼진이라고 불리는 마산합포구 진동면, 진북면, 진전면 일대를 가리킨다. 조선시대까지 진해는 삼진 지역을 가리키고, 현재 진해구 일대는 웅천이라는 지명으로 불렸다. 진해향교가 뜬금없이 마산 진동면에 위치해있는 것도 이러한 연유. 그러다가 구한말 일본이 웅천에 해군기지를 건설하면서 근처의 진해라는 이름을 여기다 붙였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9] 도망쳤을 확률이 높다.[10] 이 부분을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유숭인이 이끈 경상 우도 병력들이 진주성 문 앞에 도착했지만, 지금 성문을 열면 일본군이 쳐들어와 함락될 수 있다고 하며 우병사 유숭인에게 미안하다고 전하면서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유숭인은 병사들을 격려를 한 후 일본군과 싸워 장렬하게 전사한 것으로 표현했다. 역사 고증과는 거리가 멀지만 진주 대첩의 비장함과 처절함을 극대화 했다 하겠다.[11] 당시는 천지신명(天地神明)을 굳게 믿는 사회였기에 이러한 귀신 분장은 굉장히 유효한 심리전이었을 것이다. 물론 귀신이 없다는 과학적인 생각을 하는 현대인이라도 한밤중에 이런 광경을 보면 오줌 지릴 것이다. 게다가 가부키나 노오에 등장하는 한냐, 오니 가면은 상당히 현실성 가득하게 생겼기에 누가봐도 꽤 무섭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 시작 부분에 잘 묘사 되어 나타나는데, 총병대가 탈 쓴 기마부대를 보고 겁먹어 지휘체계가 무너지는 바람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박살난다.[12] 현자총통 내지는 황자총통이었다고 한다.[13] 이 일화를 각색한 단편 만화도 존재한다.[14] 이때 패배했더라면 의병들은 거병할 것도, 이순신이 바다로 나가 싸울 것도 없이 수군의 본영과 의병들의 민가가 잿더미가 됐을지도 모른다.[15] 대첩이란 단순히 크게 이긴 전투를 뜻하는게 아니라 전체적인 전쟁의 향방을 바꿀 만큼 큰 영향력을 가져다준 전투를 의미한다. 물론 크게 이기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한양 탈환이라는 정치적 의미가 더 큰 행주대첩보다는 왜군 육군의 호남 진출을 막아낸 이치 전투를 더 중요시하는 경우도 있다.[16] 당시 일본군은 6000명의 조선군을 상대로 거의 10만의 병력을 투입했다. 일본은 이 병력을 충당하려고 후방 점령군과 수군까지 긁어모았다.[17] 공성전 특성상 공격측은 방어측보다 많은 전력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수적 우세를 차지하고도 공격부대가 섬멸당하는 경우도 흔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차 진주성 전투를 생각해보자.[18] 유숭인의 직책은 종2품 당상관 경상우병사인데 반해 김시민의 직책은 정3품 당하관 진주목사로 3품계나 낮았다. 만일 유숭인이 들어온다면 김시민이 짜놓은 계획이나 지휘 계통 등에 혼선이 생길 것이고 김시민은 이를 염려하여 유숭인의 입성을 간접적으로 거부하였다.[19] 설령 타다오키가 늙은 게 사실이라고 해도 같은 사무라이 지휘관 위치에 있는 그에게 와키자카가 일관적으로 하대를 하는 것은 매우 이상한 장면. 지위를 막론하고 나이로만 따졌을 때 극중에서 와키자카는 구키는 물론 고바야카와에게도 존댓말을 썼었다.[20] 드라마 상에서는 조총 4발을 맞는다. 실제 김시민은 왼쪽 이마에 총탄을 맞고 9일간 사경을 헤매다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