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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측천무후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2. 초기
당고조 이연을 도운 개국공신이었던 태원군공 무사확의 차녀로 태어나서 637년 당태종 이세민의 후궁으로 입궁하게 되었다. 당시 후궁으로서 받은 지위는 정5품에 해당하는 재인(才人)이었으며,[1] 태종에게서 별명을 받아 이후 본명[2]보다는 거의 무미랑(武媚娘)[3]으로 불렸다고 한다.그러나 당시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 성격을 이유로 드는 학설이 많다. 당시 성격을 잘 드러내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태종이 당시 궁궐에 새로 들여온 말이 하도 사나워서 대장군인 울지경덕이 몇 번이고 말에서 떨어지자 무재인이 나서서 자신이 저 말을 길들여보겠다고 했다. 태종이 어떻게 어린 소녀인 네가 할 수 있느냐고 방법을 묻자 무재인은 대답했다.
"먼저 철편[4]을 휘둘러서 기를 죽이고, 그렇게 해서 안 되면 철추로 내려칩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비수로 목을 따면 됩니다."
"그러다가는 말이 죽을 텐데 아무리 사나운 말이라도 죽이는 것은 지나치지 않으냐?"
"폐하의 장수들은 모두 폐하와 생사고락을 함께 한 충신들입니다. 말이 멋대로 날뛰면서 대장군을 다치게 했는데 어찌 말 한 마리를 아끼겠습니까?"
"그러다가는 말이 죽을 텐데 아무리 사나운 말이라도 죽이는 것은 지나치지 않으냐?"
"폐하의 장수들은 모두 폐하와 생사고락을 함께 한 충신들입니다. 말이 멋대로 날뛰면서 대장군을 다치게 했는데 어찌 말 한 마리를 아끼겠습니까?"
이러한 무재인의 대답은 태종이 울지경덕을 가볍게 웃음거리로 만들었음을 은연 중에 비판한 것으로, 태종은 크게 감탄하며 무재인을 존중하게 되었다. 그러나 총애하게 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훗날 고종은 아버지가 이 때문에 무재인을 처녀로 남겨두었다고 주장하며, 이것을 무재인과의 결혼을 합리화하는 이유로 내세웠다.
태종이 붕어한 이후에는 황실의 관습에 따라 장안 인근의 감업사(感業寺)로 출가해서 비구니로 지내게 되었지만, 태종의 9남인 고종 이치의 명령으로 정2품 소의(昭儀)[5]로 복귀되어 651년에 황궁으로 금의환향했다. 당태종의 후궁이었다가 그 아들 당고종의 부인이 된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나라 황실이 원래 선비족과 한족의 혼혈이라 북방 유목민족의 풍습에 익숙했기 때문으로 해석한다. 유목민족들 사이에서는 아들이 아버지 사후에 자기 생모를 뺀 나머지 첩들을 자기 부인으로 삼거나 형사취수제를 하는 것이 일상적인 풍속이었다. 사마천은 《사기》 <흉노 열전>에서 중항열의 입을 빌어 "전쟁으로 먹고사는 종족이다 보니 집안의 계통이 끊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선택"이라고 설명했다.
북방 유목민족의 이러한 풍습은 여성들이 남편에게 시집오면서 가지고 오는 재산 때문이었다. 중국과는 다르게 여성의 재혼이 가능하기에 가지고 온 재산을 다시 내놔야 했으므로 이러한 불이익을 막기 위하여 생긴 일이었다.비슷한 예로 칭기즈칸은 정실 보르테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정복된 부족 여성들을 첩으로 삼았는데, 칭기즈칸 사망 후 이들 중 일부에게 약간의 재산을 상속해주었을 뿐, 칭기즈칸의 아들들은 이들을 첩으로 삼았다는 말이 없다. 예시로 백등산 전투에서 위기에 처한 한고조 유방에게, 흉노의 묵돌 선우는 여자에 약하다며 묵돌의 연지(부인)를 설득하자는 주장이 나왔는데, 정작 묵돌은 자기 애첩도 거리낌없이 죽여버린 인간이었다. [6]
3. 당나라의 황후가 되다
이 무렵 고종의 정후(正后)인 황후 왕씨[7]와 후궁인 숙비 소씨의 사이에 암투가 있었는데, 왕황후는 소숙비를 제거하기 위해서 당시 고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던 무소의를 이용했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왕황후와 소숙비를 모두 제거하고 655년 새로운 황후로 즉위하게 된다.고종이 왕황후를 쫓아내고 무후를 황후로 삼은 결정적인 이유는 무후의 어린 딸 안정공주가 황후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왕황후가 정말로 안정공주를 죽였는가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후가 황후를 몰아내기 위해 모함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안정공주는 단순히 유아 돌연사했을 뿐이고, 그 시기가 하필 왕황후의 방문 시기와 맞아떨어져 황후가 누명을 썼다는 주장이다. 자치통감에서는 무후가 직접 갓난 안정공주를 목 졸라 죽이고 황후에게 덮어씌웠다고 기록되어 있다.[8]
권력에서 밀려난 왕황후와 소숙비를 제거하는 과정은 상당히 잔혹했다. 구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무후는 먼저 곤장 100대를 내렸고, 피부가 터져 나간 두 사람의 사지를 잘라냈다. 그리고 빈사 상태의 그들을 술독에 담궈 천천히 며칠 동안 죽어가게 방치했다고 한다. 소숙비는 죽기 전에 "나는 다시 태어난다면 고양이로 태어나겠다. 그래서 쥐로 다시 태어난 너를 물어 죽여주마!"라고 무후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이때 아무 이유 없이 쥐로 환생할 거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추측하는 일부 역사가들은, 무후의 생년을 쥐띠 해에 맞춰 628년으로 계산하기도 한다. 그 때문인지 측천무후가 살아있을 때는 고양이를 황실에서 키우지 않았다고 한다.
숙청 공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황후가 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친정이 한미한 것을 탓하며 반대했던 장손무기나 저수량 등의 쟁쟁한 원로 대신들을 정치 공작을 통해 모조리 죽이거나 귀양보내며 그 정치적인 능력을 드러내기도 했다. 장손무기와 저수량 등은 선제였던 태종을 따라 국난을 수차례 해결하고 황제 못지 않은 권력을 쥐었던 무서운 인물들이었다. 게다가 나약한 고종이 즉위한 이후에는 그 위세가 가히 황실을 쥐고 흔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한 자들과 정치적인 대결을 벌여 제거해버렸으니, 측천무후의 무서운 정치적 역량을 엿볼 수 있다.
정사에 정력적이지 못한 유약한 황제가 장손무기 등의 원로대신을 처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당태종의 후궁으로 오래 황실에 몸 담았던 점, 왕황후와 소숙비의 암투 속에서 황후 자리를 쟁취한 점 등을 보아 황제보다는 무황후가 원로대신을 처리했다고 봐야 한다. 무씨 일족의 대두 역시 아버지 무사확은 이미 사망했고, 이들을 중용한 것은 고종이었다. 그리고 무삼사 등의 능력은 제법 유능했기에 이들의 임용에 대해서 별다른 반발이 있지도 않았다.
정치적으로 정력적인 편이 아니었다는 고종은 무후에게 많이 의존했다고 한다.[9] 고종의 신임을 얻어 정치적인 힘을 얻게 된 무후는 자신에게 위협이 되었던 대신 장손무기, 저수량, 우지녕 등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했다. 공신 가운데 살아남은 건 이세적 정도였다. 이세적은 농민 출신으로 장손무기와 저수량, 우지녕 등의 관롱귀족이거나 고위문신들에게 배척받았던 사람으로 무측천의 정권 장악에 오히려 적극적으로 지원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죽은 뒤엔 유골이 분쇄되어 바람에 날려지는 형벌을 받지만 이건 손자인 이경업이 측천무후에 대항하여 모반을 꾸몄다가 진압당했기 때문이다.
4. 무주의 황제가 되다(무주혁명)
656년 측천무후는 황태자(皇太子) 이충(李忠, 643~664)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장남인 이홍을 황태자로 앉혔으나, 그 역시 곧 죽었다. 《십팔사략》에서는 소숙비의 장녀 의양공주(義陽公主)와 차녀 선성공주(宣城公主)가 유폐되어 시집을 못 간 것을 이홍이 주선하여 보내겠다고 하자, 그것이 측천무후의 심기를 건드려 독살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홍의 사후, 당고종과 무후는 크게 슬퍼하며 이홍을 '의종(義宗) 효경황제(孝敬皇帝)'로 추존했다. 아들이 부모를 추존하는 일은 흔하지만 부모가 아들을 추존하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보기 드문 일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황태자가 된 뒤 과로사했다는 해석도 만만치 않다.[10]그 후 자신의 차남인 이현(李賢)을 황태자로 세웠다. 《십팔사략》의 기록에 따르면 고종과 한국부인(무후의 언니)의 불륜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680년 명숭엄을 살해한 배후자로 의심을 받아 태자 자리에서 쫓겨난다. 무후는 3남 이현(李顯)을 황태자로 세웠는데 그가 바로 훗날의 당중종이다. 이 와중에 672년 당고종이 병으로 인해 정사를 보지 못하게 되자 본격적으로 대신 정치를 했으며, 675년엔 아예 수렴청정을 선언했다. 다만 이때까지도 어디까지나 최종 결재권자는 고종이었다. 무측천이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면 반대파가 재상직까지 올라오는 꼴을 놔뒀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고종이 붕어한(683년) 이후 황태자 이현(李顯)이 중종으로 제위에 올랐으나 중종의 아내 위황후와 그녀의 친정 아버지 위현정이 정권을 장악하려고 했다. 이때 중종이 위황후의 친정아버지 위현정을 시중으로 삼으려다가 신하들이 반대하자 홧김에 "내가 천자인데 천자 자리를 준다 한들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라는 망언을 내뱉는 바람에 폐위당했다. 이때도 무측천이 자기 아들을 나서서 끌어내린 것은 아니고, 재상 배염이 태후인 무측천에게 황제의 폐위를 먼저 거론하고 이를 추진하는 절차를 거쳤다.(684)[11]
무후는 4남인 상왕 이단, 즉 당예종을 즉위시킨 이후 계속해서 일어나는 반대파들의 저항과 반란을 진압하고 권력을 강화했다. 대표적인 것이 684년, 이세적의 손자인 이경업(서경업)이 일으킨 반란이다.[12]
그리하여 690년, 무후는 예종에게서 제위를 넘겨받아[13]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그래서 이 시대를 무주시대, 즉위를 무주혁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측천무후는 주왕이 정무를 보던 명당(明堂)을 다시 만들어 세우는 등 고대 주나라와의 연관성을 강조했다.
측천무후가 지냈던 궁궐 만상신궁(萬象神宮)의 명당(중앙)과 천당(좌측)
현재는 수·당시대 황궁 재현 단지 내에 이렇게 재현되어있다.
이로써 남성 중심의 중화제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성 황제의 시대가 개막한 것이었다.
5. 공포정치와 외척정치 속의 안정된 내치(무주지치)
무후는 반대파를 매우 엄격히 감시하고 통제했는데, 사궤(四軌)라는 투서함과 불량배, 건달들을 중심으로 한 비밀경찰인 혹리(酷吏)들을 바탕으로, 상대의 비리를 먼저 고발하는 사람이 빠르게 승진하는 밀고 정치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게 신하들 입장에서는 마녀사냥이 열리는 수준이라 조정에 출근할 때면 가족들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무사히 퇴근해 집에 돌아오면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양 크게 기뻐했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하지만 지나친 고발로 인해 자신의 인기가 떨어질 것을 우려한 무후는 정적들이 거의 제거되고 제위를 차지하자 사냥개 역할을 하던 내준신과 삭원례 등의 혹리들을 차례로 없애 이들에 대한 원성이 자자하던 백성들에게 환호를 받는다. 그야말로 토사구팽이었다.
친정 가문인 무씨들은 그야말로 세도를 누렸다. 이런 일이 일어난 건 전한 여후 이래 최초였을 정도였다. 측천무후가 조카인 무승사 및 무삼사에게 제위를 넘겨주려고 말은 했지만 '조카가 당신 제사를 안 지내줄 텐데? 믿을 건 아들뿐'이라는 신료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14]
그러나 상대적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되었다고 한다(무주의 치). 혹자는 무후가 다스린 시기의 내치는 당태종의 정관의 치에 버금가며 이후 현종때 맞이한 개원의 치를 불러오는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북주(北周)-수(隋) 제국 관롱집단들보다는 넒어졌지만, 여전히 협소한 범위의 문벌귀족 집단으로 정계의 고위직을 독점하던 현상을 해소하고, 수나라 시기 시범적으로 도입되던 과거 제도를 점차 확대시행하여 당나라 후기에 이르면 과거 급제 출신들이 주류를 차기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당나라의 도자기가 그 특징을 확립한 것도 바로 이 시기의 일이었다. 심지어
일처다부제가 실시되기도 했었는데, 거대 제국들 중에서 이런 사례는 유례를 찾기 힘들다.
또한 인재를 아끼는 모습이 보이는데, 무후 시절 '초당 4걸'에 들 정도로 걸출한 문인 낙빈왕이 <토무조격>(討武曌檄)이라는 격문을 지어 이경업 거병의 정당성을 피력하고 무후를 혹독하게 비판한 글을 읽고 이 글을 누가 지었느냐고 물어보았다. 낙빈왕이 썼다는 말을 듣자 재상에게 "왜 진작에 이 사람을 나에게 추천해 주지 않았나? 이런 인재를 내가 기용해 주지 않았으니 반란이 일어나는 것도 당연하지!"라며 낙빈왕의 재능을 아까워했다고 하며, 낙빈왕이 죽은 뒤에도 그의 작품을 모아 엮도록 했다. 즉위 후에도 적인걸, 장간지 같은 뛰어난 재상들이 등용되기도 했다.
한국과의 관계를 보면 신라의 제31대 신문왕이 《예기》(禮記)와 더불어 문장으로 본받아 쓸 만한 것을 요청하자 담당 관청에게 명령하여 《길흉요례》(吉凶要禮)의 사본을 제작하고, 《문관사림》(文舘詞林) 가운데 모범으로 삼을 만한 글들을 골라 뽑아 50권으로 엮어서 보내주었다고 한다. 신라에서 온 왕자 김인문이 694년에 사망했을 때는 부음을 듣고 수의와 관작을 보낸 뒤 김인문에게 관직을 추증하고 그의 영구를 신라로 호송하도록 명령했으며, 또한 702년 제32대 효소왕이 붕어한 것을 전해듣고 애도 차원에서 2일 동안 조회를 열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효소왕의 왕제로 뒤를 이어 즉위한 왕자 김융기[15]에게 효소왕의 계승을 승인한 것도 측천무후였다.
6. 거란, 토번, 돌궐 등과의 대외관계
696년 거란족의 송막도독 이진충이 처남 귀성주자사 손만영과 함께 영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도독 조문홰를 주살하고 숭주에서 토격부사 허흠적을 사로잡아 기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이를 들은 무측천은 조인사, 장현우, 마인절, 이다조 등 28명의 장수들로 하여금 거란을 토벌하라고 지시하였고 무측천의 조카인 양왕 무삼사를 유관도안무대사, 납언 요숙을 부사로 삼았다. 그러나 696년 8월 서협석곡의 황장곡에서 선봉 조인사, 장현우, 마인절의 군대가 거란군의 기만전술에 휘말려 전군이 몰살당하고 조인사, 장현우, 마인절이 사로잡힌다. 거란군은 포로로 잡은 장현우 등의 서명을 얻어 총관 연비석, 종회창의 군에게 조서를 보냈는데 이를 본 연비석과 종회창의 군대는 급속행군하다가 거란군의 매복에 의해 전군이 몰살당한다. 이를 들은 무삼사는 황급히 장안으로 도주하였고 패배를 접한 무측천은 건안왕 무유의를 중심으로 2차 토벌대를 모집하였는데 범죄자들 중 용력있는 자들을 병사로 모집했다. 이진충 사후 손만영이 가한 자리에 오르자 손만영은 기주를 함락하여 자사 육보적을 죽이고 수천명을 도륙한다. 그리고 손만영은 이씨를 지지하는 명분을 내세운다.무엇 때문에 우리 여릉왕을 폐했는가?
이후 손만영은 배후를 안정시키기 위해 신성의 안동도호부를 공격하면서 이전에 포로로 잡은 허흠적으로 하여금 안동도호부에 투항을 권하나 허흠적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친 도적에게는 반드시 화가 닥칠 것이오. 그러니 끝까지 싸우시오!”
이에 손만영이 허흠적을 죽이고 안동도호부를 공격하지만 요동주도독 고구수와 도호부사 배현규에게 저지당하였다. 697년 청변도총관 왕효걸과 소굉휘가 이끄는 17만 군대가 거란군을 공격하나 거란군에 패하고 왕효걸은 자결하였다. 무유의의 군대는 유주를 공격하나 거란군에 가로막히고 말았는데 이에 무측천은 하내왕 무의종, 누사덕, 사타충의로 하여금 거란을 토벌하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무의종은 조주에서 낙무정이 이끄는 거란군을 보고 크게 놀라 대경실색하여 싸우지도 않고 상주로 도주했다. 이에 거란군은 조주에서 대학살을 행하였으나 양현기, 누사덕, 사타충의가 군을 수습하고 맞서 싸웠다. 손만영은 돌궐의 습격을 대비해 유성 서북쪽 400리에 성을 지으면서 당의 단주를 포위공격하는데 후방의 해족들이 배반하여 잠시 철군한다. 6월에 우려대로 돌궐이 거란의 후방을 습격해 후방에 있던 거란인 가족들을 모두 사로잡자 손만영과 하북 전방에 나와 있던 거란군이 동요하고 결국 와해되고 만다. 당도 이에 맞춰 4차 공세를 보내고 장구절의 군대에 의해 손만영이 패한 뒤 신병도행군의 무의종과 양현기에 의해 결국 하아소가 사로잡히고 이해고와 낙무정은 항복했으며[16] 손만영은 도주 중에 노수 동쪽 인근에서 가노에게 피살당하여 남은 무리들은 돌궐에 투항하고 난이 종결된다. 700년 이해고와 낙무정이 이진충의 잔당들을 토벌하고 장안으로 개선한다.또한 무측천 시기는 왕방익이 숙청당하면서 토번에 왕방익이 겨우 찾은 안서사진 지역을 빼앗기고 가르친링에게 연패하는 등 토번과의 관계에서 열세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692년 강족 추장 갈소가 당에 투항하자 이를 틈타 왕효걸을 기용하여 안서사진을 수복한다. 그러나 696년 왕효걸과 누사덕은 소라한산에서 토번의 명장 가르친링에게 패하고 만다. 이후 가르친링이 안서사진 지역에서 철수하고, 서돌궐 지역을 분할하는 것이 어떠하냐고 제의하자, 무측천은 가르 가문의 권세가 약화되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이를 거절한다. 이후 699년 치둑송첸이 가르 일가를 숙청하자[17], 당은 토번에 우세를 점한다.
돌궐 제2제국의 초대 가한 쿠틀룩이 당의 변방을 노략질하자 정명진의 아들이자 당의 명장인 정무정이 돌궐족에 연전연승하지만, 서경업의 난에 연좌되었다는 무고를 받고 군중에서 처형당한다. 이후 돌궐족들은 출전할 때마다 그의 사당에 기도를 드리고 출전한다. 그럼으로써 당의 돌궐 방어선이 와해되고 만다. 쿠틀룩 사후 묵철이 가한 자리에 오르자, 묵철은 당을 지속적으로 노략질한다. 이후 696년 거란족의 영주 반란에 무주군이 고전하자 무측천은 돌궐족과 동맹을 맺어 이진충의 난을 진압한다. 그러나 묵철은 이후 자신의 사위가 당 황족인 이씨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승사의 아들인 무연수를 억류한 뒤 당나라와의 동맹을 파기한다. 무측천은 이다조, 장인원, 사타충의 등을 내보내지만 사타충의 등은 두려워서 나가지도 못했고 적인걸만이 돌궐족을 추격했다.
이처럼 무측천 시기는 거란, 돌궐, 토번 등의 이민족들에게 시달리는 시기였다.[18][19]
7. 신룡정변과 퇴위
하지만 699년 이후 장역지, 장창종 등 측근 관리에 실패해 폐단이 발생했으며, 705년 말년에 측천무후가 병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당 황실의 충성파들이 신룡정변을 일으켜 그만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압박을 넣게 된다. 이에 무후는 당시 황태자로 있었던 아들 이현(중종)에게 양위했고, 무주는 1대만에 멸망하며, 당나라 농서 이씨 왕조가 복벽했다.당장 당나라 황실 직계 후손들이 모두 당고종과 측천무후와의 후손이였기 때문에 아무리 정변에 성공했어도 장간지 일파는 함부로 무후를 건드릴 수 없었다. 당장 반란 세력의 주축인 당중종만 하더라도 당고종과 측천무후의 적자였다.[20] 그렇기에 무후는 양위 이후에도 중국에서 유일한 여자 태상황으로 말년을 대우받으며 편하게 보낼 수 있었다.[21]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다 권좌에서 쫓겨났다는 충격이 컸는지 그해 말 붕어했다고 한다. 측천무후가 왜 자신의 비석에 아무런 글을 새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는지를 두고 '내 삶에 대한 평가를 모두 훗날의 역사에 맡긴다.'는 겸허함으로 보는 해석과 '내 공적은 너무도 커서 이런 작은 비석 따위에 다 새기기도 모자란다.'는 오만함으로 보는 두 가지 상반된 해석이 있다.[23]
죽기 전에 자신이 모함해 죽인 폐후 왕씨 일가를 복권시켜 줄 것을 태자에게 간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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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래 입궁 때는 이 정도로 낮은 품계를 받는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입궁한 후궁들이 승급하는 동안 측천무후는 만년 재인이었다.[2] 본명은 기록된 바가 없다.[3] 무씨 성의 예쁜이[4] 문서에도 설명되고 있지만, 흔히 생각하는 쇠사슬 채찍이 아니라 대나무 모양으로 벼린 쇠막대이다.[5] 이전 품계였던 재인(才人)에서 무려 11품계가 올라간 것으로, 엄청난 신분 상승을 한 것이다. 정2품 소의에서 무품이자 황후의 바로 아랫자리인 귀비까지 총 3명의 비(숙비, 현비, 덕비)만 존재할 뿐이었다.[6] 훗날 당현종 이융기도 자기 아들인 수왕의 여자였던 양귀비를 도교 도사로 출가시켰다가 다시 입궁시키는 형태로 후궁으로 삼았다. 당태종 사후 비구니로 출가했다가 환속해 당고종의 후궁이 된 측천무후와 비교하면 종교를 제외하고는 비슷한 경우이다. 다만 양옥환의 경우에는 도교에 출가하면 이전의 모든 행적들이 다 지워진다는 것을 활용한 측면이 크지만 측천무후의 경우에는 이러한 과거세탁을 할 목적으로 절에 들어 간 것이 아니라 선황의 후궁들 중 자녀가 없는 사람이 절에 들어간 것으로 봐야 한다.[7] 당고조의 누이인 동안공주의 손녀이다.[8] <연개소문(드라마)>에서는 아예 '네가 죽어야 내가 황후가 된다' 라며 안정공주를 살해하는 장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대조영(드라마)>에서도 무측천이 황위에 오른 후 "내가 낳은 아이까지 내 손으로 죽여가며 오른 자리다"라는 대사를 하는 장면이 있다. 측천무후 소생의 자식으로 무후에게 죽은 사람이 한 명 더 있는데 <황대사> 노래로 유명한 장회태자이다. 측천무후 본인이 죽인 건 아니고 측근이었던 구신적에게 죽은 것이었다. 만화 《고우영의 십팔사략》은 아예 이 설을 채용했다. 하술할 국내 비디오 시장에 나온 적 있고, SBS 방영으로 더 유명한 <일대여황>에서는 자기를 오랫동안 모셨던 시녀가 안정공주를 죽이고 왕황후를 모함하려고 자작극을 꾸몄다가 들통나자 사실대로 말하고 황궁 연못에 투신자살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왕황후는 몰락했다.[9] 이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다. 당고종의 생을 보면 선황이었던 태종 이세민에 비하여 정력적이지는 못했지만, 그 이세민이 자신의 후계자로 세운 사람이었다. 또한 왕황후의 경우, 무천진 관롱집단의 지지속에 황후에 오른 사람으로 궁으로 복귀한 지 얼마되지 못한 상황에서 무측천이 쫓아낼 힘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종 시기까지 무측천은 황제였던 고종의 최측근 조언자이자 지지자였을 경우가 더 높다고 봐야한다.[10] 당시 기록에서 태자 이홍의 건강이 악화되자 고종과 무측천이 얼마나 지극정성이었는지를 알 수 있으며, 또한 무능한 3남 중종 이현을 쫓아내기는 했지만, 죽이려고 한 적이 없었다. 당장에 가장 유력한 후계자인 자기 소생 아들을 죽인다고 다음 후계자로 지명되는 사람이 또 다시 자기 소생이 된다라는 확고한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이는 멍청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11] 배염은 무측천의 반대파 사람으로 훗날 무측천에게 제거될 정도였으니 비밀리에 이를 꾸몄을 가능성도 거의 없다.[12] 국성이라서 반란 이후 도로 성씨를 빼앗겼다. 이적의 집안은 거의 박살이 나서 후손 중에는 토번으로 달아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경업 자신은 바다에서 배를 타고 고려(옛 고구려땅, 신라일 수도 있다)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이경업의 난을 평정할 때 나섰던 장군 중에는 백제 유민 출신의 번장 흑치상지도 있었다.[13] 공식적으로는 조정 신료들과 백성들이 무후의 즉위를 하루가 멀다하고 주청하자 예종도 이에 동조해 스스로 제위를 어머니에게 넘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현실은 시궁창.[14] 사실 무승사, 무삼사가 황제가 되고 싶어서 설친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측천무후가 중종을 폐위한 이유가 가족주의인데 무씨가 황제가 되면 무후의 자식들은 숙청당할 것이 분명했다. 측천무후가 아무리 무자비한 면이 있었다고 한들, 자기가 자기 자식을 치우는 것과 남이 자기 자식을 숙청하는 건 다른 문제이니만큼 그 꼴을 그냥 두고 볼 리는 없었다. 무씨가 제위에 오를 경우 일어날 반란에 대한 염려는 덤이었다.[15] 당현종 이융기의 이름과 같다고 해서 나중에 '흥광'으로 고치기는 했는데, 성덕왕이 즉위했을 때는 아직 당현종이 즉위(712)하기 이전으로 임치군왕 시절이었다.[16] 하아소, 마행위, 양봉절은 처형당하였다. 이해고와 낙무정도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나 이들의 재주를 안타까워한 재상 적인걸의 만류로 인해 사면되었다.[17] 가르친링은 그의 동생 가르다고리와 함께 자결하고, 가르찬파와 가르궁린은 당에 투항하여 논씨 성을 하사받는다.[18] 한편 이 무렵의 우리나라는 거란족의 반란에 걸걸중상과 대조영이 합세했다.[19] 참고로, 이진충의 난을 통해 무씨 일족의 군사적 무능이 드러나게 된다.[20] 이후의 예종과 현종도 모두 측천무후의 직계 자손이다.[21] 여기서 무후를 컷하게 된다면, 무후는 역적이 되는데, 문제는 이후 후계 황족이 모두 무후의 자식이기에 역적의 후손이라는 고질병을 지속적으로 달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무후의 측근을 죽일지언정 무후을 숙청하자는 언급은 나올 수도 없게 된다. 당장 측천무후가 중종 및 예종의 모후라는 점이 너무나도 컸다.[22] 유언에 따라 측천무후의 묘비에는 글자가 없는데 그래서 '무자비'(無字碑)라고 부른다. 중국의 소설가 샨사는 이 측천무후의 무자비 앞에서 소설 《측천무후》를 구상했다고 한다.[23] 어쩌면 두 가지 의미를 같이 노렸을지도 모른다. 이런 식의 '무자 공덕비'는 측천무후의 전유물은 아니었고, 명나라 만력제를 비롯한 중국사의 여러 인물들이 남겼다.